'''[[미국| 미국]]의 주요 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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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계파 | ■ 급진파 공화당, ■ 민주당 주전파, ■ 버번 민주당, ■ 비타협파, ■ 록펠러 공화당, ■ 뉴딜연합, ■ 보수연합 | |
( 중앙 정당 · 지역 정당 ) |
버번민주당 Bourbon Democrat | |
<colbgcolor=#0044c9><colcolor=#fff> 활동 시기 | 1870년대 중반 ~ 1900년대 초반 |
주요 인물 | 그로버 클리블랜드 새뮤얼 틸던 토머스 F. 베이어드[1] 헨리 M. 매튜스[2] 존 M. 파머[3] |
이념 | 고전적 자유주의 재정보수주의 금본위제 지지 자유무역 지지 |
정당 | |
스펙트럼 | 중도우파 ~ 우익 |
연관 집단 | 리디머 운동 보수주의 민주당 국민민주당 남부 민주당원 |
대립 세력 | 공화당 급진파, 복본위제 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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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7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민주당에서 활동한 보수적인 분파를 일컫는 말이다. "부르봉 민주당"이라고도 부른다.민주당이 공화당에 비해 열세였던 19세기 후반 민주당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갖추었고 그로버 클리블랜드나 새뮤얼 틸던과 같은 저명한 정치인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수권 능력에서 한계를 보이면서 쇠퇴했다.
2. 역사
2.1. 리디머 운동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 공화당 내에서 온건한 재건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당하면서 공화당은 복수심으로 들끓었고, 급진적인 재건정책을 주장한 공화당 내 진보파 즉 공화당 급진파가 정권을 잡았다. 찰스 섬너, 새디어스 스티븐스 등으로 구성된 이 파벌은 강력한 인종평등 정책과 남부 군정 등으로 남부의 원성을 샀다. 이들은 전쟁 영웅 율리시스 그랜트를 대통령으로 내세우며 승승장구했지만, 이내 그랜트 대통령의 측근들이 엄청난 부패 스캔들에 휘말리고 부통령 스카일러 콜팩스마저 이에 연루되며 공화당 급진파의 지지율은 급락한다.또한, 남부의 일부 백인들이 공화당을 지지하고[5] 폐허가 된 남부에서 한탕을 노리며 북부 자유민들이 남부로 이주하면서[6] 남부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에 많은 보수적인 민주당원들이 리디머(Redeemers) 운동이라고 부르는 정치 운동을 전개한다. 리디머 운동은 노골적인 인종주의나 노예제 복귀 등의 수사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흑인 투표권의 점진적 박탈, 공교육의 축소, 기업의 자유, 세금 인하, 그리고 무엇보다 공화당 급진파의 부패 청산 등을 내세웠다.
그리고 1872년 대선에서 리디머 운동의 지지자들은 자유주의 공화당(Liberal Republican)의 호레이스 그릴리가 민주당 지지 후보로 결정되자, 이에 반발해 제퍼슨 데이비스의 수석 변호인이었던 찰스 오코너를 대선 후보로 내세웠다. 비록 오코너는 민주당의 공식 지지는 받지 못했지만 전국으로 2만여표를 얻으며 버번 민주당의 시작을 알렸다.
2.2. 버번 민주당의 전성기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새뮤얼 틸던의 근소한 패배로 끝나자, 1877년 타협을 통하여 남부 군정이 종료되며 버번 민주당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이들은 보수적인 성향의 남부 거주민과, 일부 북부 금융 재벌의 지지를 받는 동북부 및 중서부 보수 민주당원, 뉴잉글랜드 지역의 가톨릭 이민자들을 연결하는 광범위한 유권자 블록을 형성하여 공화당에 맞섰고 실제로 187~90년대의 거의 모든 대통령 선거는 5%p 이내의 초박빙으로 당선인이 결정되면서 그 위력을 보여주었다.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번민주당은 뉴욕주지사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후보로 내세웠고, 이들은 제임스 G. 블레인과 공화당의 부정부패를 비난하였다. 이에 공화당 내 부정부패를 반대하는 일부 소신파 공화당원들, 즉 "머그웜프"(Mugwumps)들이 클리블랜드를 지지하면서 클리블랜드는 아주 아주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비록 1888년에는 낙선하지만 1892년 다시 당선되며 클리블랜드와 버번민주당은 당 내에서 강력한 기반을 갖추었다. 한편, 1880년대에는 공화당 역시 급진파 공화당의 퇴색으로 다소 보수화되었으므로, 공화당이 보호무역을 지지하고 민주당이 자유무역을 지지한 것 외에는 정책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로 인해 이 시기에는 조지프 퓰리처로 대표되는 황색언론이 등장해 상대방 후보의 부패나 성스캔들을 캐내는 노골적인 네거티브 선거가 발달해 선거 공학적으로 좋은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2.3. 금은본위제 논쟁과 몰락
그러나 양당이 보수화되다보니 약자들은 거의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 특히 금은본위제 논쟁으로 버번 민주당은 타격을 입었다. 본래 미국은 금은 복본위제였으나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인해 금의 유통량이 엄청나게 올라가면서 은의 사용량이 감소했고, 1873년 의회는 은화 제조를 중단하기로 결정한다. 금은 높은 가치를 가져 부유층 및 거대 사업체에게 선호된 반면, 은은 1880년대 콜로라도주 은광 개발로 인하여 가치가 더더욱 하락해 소액 화폐로서의 가치를 지녔고 따라서 농민과 소시민들에게 선호되었다. 그런데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이 모두 은본위제 폐지의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서부 농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으며, 민주당의 자유무역 정책으로 인해 설상가상으로 농작물 가격도 폭락하면서 1890년대 농장에는 재앙이 닥쳤다.결국,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겹쳐 1893년 클리블랜드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2달만에 경제 공황이 터졌다. 이 공황은 J. P. 모건이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금을 급하게 빌려오며 불이 꺼지긴 했지만 이 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클리블랜드는 시장을 안정화시킨다는 이유로 부자들에게 돈을 더 풀었고 농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이런 배경 하에서, 1896년 대선에서 결정된 민주당의 대선 후보는 인기 없는 클리블랜드가 아닌, 민주당 핵심 지지층인 농민들에게 가장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었다. 브라이언은 당시 무명의 정치가였지만 "노동자에게 가시면류관을 씌울 수 없습니다! 인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없습니다!"라는 감동적인 연설로 농민들에게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브라이언은 클리블랜드 및 버번민주당의 정책과 정 반대로 복본위제를 지지하였다.
버번민주당원들은 격분해 존 M. 파머(John M. Palmer)를 대선 후보로 내세워 "금본위 민주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금본위제를 지지한 매킨리 대 복본위제를 지지한 브라이언으로 구도가 압축되며 이들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고작 0.9%(...)라는 참담한 결과를 얻으며 몰락한다.
이후에도 버번민주당은 민주당 내에서 세력을 키우려고 노력했고 1904년에는 브라이언 대신 앨튼 B. 파커(Alton B. Parker)를 후보로 옹립하는데까지는 성공하나, 정작 파커가 민주당 내 본위제 논쟁을 피하기 위해 금은본위제에 대한 의견을 함구하고, 본선에서도 루스벨트에게 대참패하면서 빛이 바라게 된다. 버번 민주당은 여기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1912년 대선에서 버번민주당 소속의 우드로 윌슨이 브라이언과의 타협으로 상원 직선제 시행 및 연방준비제도 창설 등 여러 진보적 정책을 추진하면서 버번민주당은 끝내 소멸하게 된다.
3. 성향
보수적인 리디머 운동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주의 권리"[7]를 강력하게 지지하였으며, 공화당의 일부 제국주의적 정책에 맞서 반제국주의를 표방하고 고립주의를 지지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고전적 자유주의를 지지하였고, 금은본위제 논쟁에서는 공화당과 마찬가지로 금본위제를 지지했다. 인종 문제에 관해서는,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점진적으로 흑인들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등의 행위를 제지하지 않으면서 인종주의에 동조하는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다.20세기 초반 미국에서 고전적 자유주의가 힘을 잃으며 사실상 이들의 직계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은 사라졌다. 조지 월리스 같은 후대의 보수 민주당원들도 뉴딜 정책을 지지하는 등 이들과는 약간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 그나마 고립주의, 주의 권리, 고전적 자유방임주의 등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티파티 운동과 유사하긴 하나 무역 정책에 있어서 견해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역시 같지 않다.
4. 여담
- 버번 민주당에서 "버번"은 남부에서 판매되는 음료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멸칭이었다. 버번이라는 이름은 이들이 남부 보수파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과,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 빗대어 이들이 그만큼 역사 퇴행적이라는 점을 비꼬는 의도로 붙여졌다.
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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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omas F. Bayard. 클리블랜드의 1기 행정부 시기 국무장관이었으며 이후 주영대사를 맡았다. 1880년, 1884년 대선의 프론트러너였다.[2] Henry M. Mathews. 웨스트버지니아 주지사로, 버번 민주당원 소속으로는 최초로 주지사 직에 올랐다.[3] John M. Palmer. 1896년 당시 금본위 민주당의 대선 후보였으나 참패했다.[4] 행정학자 시절 한정.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는 여러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해 버번 민주당원으로 분류되지 않는다.[5] 이들을 스캘러웨그(Scalawag)라 한다.[6] 이들을 카펫배거(Carpetbagger)라 한다.[7] 미국 보수파의 단골 레퍼토리로 쉽게 말하자면 "연방 정부는 주의 일에 신경 끄고 우리끼리 알아서 하게 냅둬라"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