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09:04:01

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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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제6대 펜실베이니아 행정위원회 위원장[1]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FR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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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06년 1월 17일
13개 식민지 매사추세츠 만 직할식민지[2] 보스턴
(現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사망 1790년 4월 17일 (향년 84세)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묘소 크라이스트 처치 베리얼 그라운드
재임기간 초대 주프랑스 미국 대사
1779년 3월 23일 ~ 1785년 5월 17일
초대 주스웨덴 미국 대사
1782년 9월 28일 ~ 1783년 4월 3일
제6대 펜실베이니아 행정위원회 위원장
1785년 10월 18일 ~ 1788년 11월 5일
서명 파일:벤저민 프랭클린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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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17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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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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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776~1790)
부모 아버지 조사이어 프랭클린
어머니 아비아 폴거
배우자 데보라 리드(1730년 결혼~1774년 사별)
자녀 아들 윌리엄 프랭크린
아들 프랜시스 프랭클린[5]
딸 세라 프랭클린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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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신교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정치활동2.3. 과학2.4. 사망2.5. 인쇄공 프랭클린2.6. 발명가 프랭클린2.7. 작곡가 프랭클린2.8. 정치인 프랭클린2.9. 금욕주의2.10. 말년
3. 어록4. 기타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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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정치인. 일명 건국의 아버지들(The Founding Fathers) 중 한 명. 인쇄공으로 시작해 외교관, 과학자, 발명가, 언론인, 사회 활동가, 정치철학자, 사업가, 독립운동가, 스파이 등 온갖 직업들을 다 겸해, 보잘 것 없는 집안에 태어나 자수성가한 미국인(Rise From Humble Beginnings)의 원조격 되는 사람이다. 미국의 정약용

비록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미국에서 지금도 대통령급 이상으로 인지도 있는 인물이며 미국 100달러에 도안으로 채택된 인물이기도 하다. 10달러의 알렉산더 해밀턴[6]과 함께 대통령이 아니면서도 달러화의 도안에 쓰인 둘 뿐인 역사상의 위인 중 한 명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미국인들도 벤저민 프랭클린이 대통령 출신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7]

미국 100달러 지폐는 미국의 국력과 경제력의 상징이고 특히 후진국에서는 특권층의 전유물이라 엉클 샘이 초강대국 미국 연방정부의 권력과 군사력을 상징하듯이 100달러 지폐의 프랭클린 초상화는 미국 경제력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심지어 북한 주민들조차도 우스갯소리로 "김일성 할아버지보다 (미국 100달러의) 벤저민 할아버지가 더 힘이 세다." 라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북한에서도 자국 화폐 북한 원을 가치도 없어서 아무도 안 쓰고 미국 달러를 쓰는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2. 생애

2.1. 유년기

대장장이이자 농부인 토머스 프랭클린과 제인 화이트의 아들이자 벤저민 프랭클린의 아버지인 조사이어 프랭클린은 1657년 12월 23일 영국의 노샘프턴셔주 엑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아비아 폴저는 제분업자이자 교사인 피터 폴저와 전에 계약 하인 (Indentured servant)이었던 메리 모릴의 딸로서 1667년 8월 15일 매사추세츠주 낸터킷에서 태어났다. 폴저의 자손 J.A. 폴저는 19세기에 폴저스 커피를 설립했다.

조사이어 프랭클린은 2명의 부인과 함께 17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는 엑튼에서 대략 1677년 그의 첫 번째 부인으로 앤 차일드와 결혼했고 1683년 보스턴에 그녀와 함께 이주했다. 그들은 이주하기 전에 3명의 아이가 있었고 이주 후 4명을 더 갖는다. 그녀의 죽음 후에, 조사이어는 새뮤얼 윌러드의 주례로 올드 사우스 미팅 하우스 (Old South Meeting House)에서 1689년 7월 9일 아비아 폴저와 결혼했다. 그들의 8번째 아이인 벤저민은 조사이어 프랭클린의 15번째 아이이자 10번째 막내 아들이었다.

1706년 1월 17일에 보스턴에서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집안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10살 때 집안 형편으로 인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형의 인쇄소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열정적인 노력 덕분에 능숙한 인쇄기술을 습득하게 되었고, 또한 글쓰는 솜씨를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1723년, 그의 나이 17세 때에 프랭클린은 가출하여 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향하게 된다. 그 곳에서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빠른 시간에 인쇄업자로서 성공했고, 1730년에는 24살의 나이로 인쇄소를 소유하기도 하였다. 1732년 프랭클린은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Poor Richards Almanac)이라는 책을 발간해서 대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2.2. 정치활동

1731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도서관을 설립하여 도서관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736년에 펜실베이니아의 하원의원으로 임명되어서 1751년부터 1764년까지 국회의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펜실베이니아 시 체신장관 대리로 일하였으며(1737~53), 그 결과로 전 식민지의 체신장관 대리로서, 우편 업무에 관한 사항을 많이 개선시켰다.(1753~74)

2.3. 과학

1748년 그의 사업이 많이 번창함에 따라서, 프랭클린은 과학에 뜻을 두어 사업을 대리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봉급을 받으면서 과학을 탐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740년대 초기에 그가 발명한 난로(프랭클린 스토브)는 아직도 생산되고 있으며, 그 이후에도 아주 많은 실험을 행하였다. 1752년에 그의 유명한 실험인 '연 실험'을 행하였고, 번개가 전기를 방전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번개를 구름에서 끌어내기 위해 금속으로 만든 뾰족탑을 세우자고 제안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과로, 또 프랭클린의 실용적인 면의 재현으로, 그의 피뢰침이 발명되었다. 후에 복초점 렌즈가 발명되는데 이것도 프랭클린의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1753년 영국 왕립학회(Royal Society) 회원으로 선정되었고,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 그해 전 식민지 체신장관 대리가 되어 우편제도를 개선하였고 54년 올버니회의에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참석, 최초의 식민지 연합안을 제안하였다. 57년 펜실베이니아의 이익을 위하여 교섭을 벌일 목적으로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에 자주과세권을 획득하고 귀국하였다. 64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의 철폐를 성공시켰다. 75년 귀국하여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대표로 뽑혔고 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83년 파리조약에는 미국대표의 일원이 되었다.

2.4. 사망

1785년 여름에 프랭클린은 신임 공사 토머스 제퍼슨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10년간 살던 프랑스를 떠나 독립국이 된 미국으로 돌아왔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790년 4월 17일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흉막염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에는 약 2만 명이 참석했으며 필라델피아의 크라이스트 처치 묘지에 묻혔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프랑스 혁명의 제헌 의회는 3일간의 애도 상태에 들어갔고, 프랭클린을 기리는 추모식이 전국에서 거행되었다.

2.5. 인쇄공 프랭클린

1706년 1월 보스턴에서 태어나 가난한 양초장이인 청교도 조사이아 프랭클린(Josiah Franklin, 1657 ~ 1745)의 아들로 17자녀 중 15남으로 태어났다. 글을 일찍 배웠지만 돈이 없어 학교는 2년 밖에 다니지 못하고 형 제임스 프랭클린의 인쇄공 도제로 5년을 지낸다. 이때 시에 빠져 시 쓰기에 열심이었던 벤저민은 아버지가 했던 "시인 되면 평생 거지로 산다."라는 말을 듣고 시 공부를 접는다.[8]

1721년 윗형인 제임스 프랭클린(James Franklin, 1697 ~ 1735)이 주간지 <뉴잉글랜드 커런트>를 창간하자 다음 해 1722년에 16살의 프랭클린은 신문에 기고문으로 14편의 사회 평론을 작성하다가 형 제임스가 쓴 글로 출간 금지를 당했다. 형은 벤저민에게 바지사장 격으로 신문 발행인을 맡겼지만 서로 트러블이 끊이지 않으며 곧 일을 때려치웠는데, 사이가 아주 안 좋아진 형 제임스가 모든 동네 인쇄소에서 벤저민을 욕하고 일을 못하게 해서 보스턴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결국 필라델피아로 가서 한동안 거지꼴로 지낸다.

이후 정착해 인쇄업을 하던 프랭클린은 영국 런던에서 인쇄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하고 미국에 돌아와 1728년 인쇄소를 차리면서 생활이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점점 사업이 커지면서 펜실베이니아 지폐 인쇄권까지 얻게 되고 1729년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를 창간한다.[9] 이후에도 여러 인쇄 사업이나 사회 사업을 벌리고 청교도적인 근면함과 저축으로 급기야는 부동산 투자를 할 정도로 큰 돈을 벌게 된다.[10]

여기까지만 봐도 그의 젊은 시절은 서점 주인이자 인쇄소 주인이자 출판사 사장으로서 살아왔지만 사실 프랭클린은 미국의 초창기 문학을 이끌었던 미국 초기의 유명 문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프랭클린은 자신이 창간한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에 1732년부터 1757년까지 '리처드 손더스'라는 필명으로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달력, 일기 예보, 명언, 시, 심지어는 수학 문제 등 잡다하게 많은 내용을 실은 연보였다. 특히 당시 해당 시장을 쥐고 있던 경쟁자 타이탄 리즈의 사망 소식을 허구로 꾸며낸 뒤 여론을 선동해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경쟁자를 제거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프랭클린이 직접 쓴 속담이나 명언들도 많아서 당시 식민지 미국의 언어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영어를 영국 영어와 완전히 단절하려고 하였고, 독일어나 스페인어처럼 영어의 발음과 철자를 1:1로 맞추려고 했다. 예를 들어 영어단어 "ace"를 "eis"로 표기하려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기존 표기법에 익숙한 사람들의 습관을 간과했기 때문에 이는 실패하고 만다.

2.6. 발명가 프랭클린

그는 한 번도 과학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11] 연구욕과 탐구심이 왕성해 미국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사상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1737년 필라델피아 우체국장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전기에 관심을 가지고 미국 사회에 전기를 알리는 장본인이 되었다.

1748년에는 이미 성숙기에 들어선 출판 사업을 아예 전문 경영인을 고용해 맡기고, 자신은 다른 사업이나 과학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초점 렌즈, 소방차 등을 발명했으며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 목재를 연료로 벽난로를 사용했던 것 때문에 운송비용과 목재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염려해서 기존의 벽난로보다 열효율이 좋고 안전한 펜실베이니아 화로를 발명했다. 그 이후 펜실베이니아 화로의 문제점을 개선한 개방형 난로를 발명했는데, 개방형 난로는 지금도 '프랭클린 난로'라는 이름으로 땔감이 아닌 가스 등을 사용해 쓰이고 있다.

파일:벤저민 프랭클린 연 실험.jpg

이렇게 여유롭게 연구를 이어오다 1752년 6월에는 비 오는 벌판에서 연을 날려가며 실험한 끝에 그 유명한 피뢰침을 발명해냈다. 연줄 끝에 금속제 열쇠를 묶고 그 열쇠를 관찰하여 번개가 전기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 참고로 실험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인 게 프랭클린은 이 실험을 하다가 벼락을 맞을 뻔했다. 아들과 함께 실험을 하였는데, 맨발인 아들의 손을 잡고 있어서 감전되지 않은 것.[12]

방귀 냄새가 지독하다고 방귀 냄새를 맡기 좋게 만드는 실험까지 했다! 아무래도 자기 혼자서 연구하는 건 어렵다고 여겨서인지 상금까지 걸고 방귀 냄새 좋게 만들기 공모전까지 열었다. 물론 상금의 주인공은 없었다. 이에 비슷하게 1781년에 주프랑스 미국 대사로 일할때 방귀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는데, 제목은 당당하게 방귀뀌기(Fart Produly)였다.

화재 사고에 대해 관심도 많아서 필라델피아 소방회사라는 미국 최초의 소방서를 만들었으며 세계 최초의 소방차도 만들었다. 피뢰침도 낙뢰로 인한 화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요도용 카테터 발명자이기도 하며 물리학, 기상학, 해양학, 경제학 등에도 어느 정도의 발자취를 남겼다. 또한 음악에도 능해 하프, 바이올린, 기타를 다룰 줄 알았고 글라스하모니카를 발명하기도 했다. 체스를 무척 좋아했다. 1775년에는 미국 우체국의 초대 우정공사 총재를 지냈으며, 이때 그가 만든 시스템은 아직도 사용 중이다.

단순히 발명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의 대인적인 면모가 돋보이는데 그는 펜실베이니아 화로나 피뢰침 같은 일반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만한 물건에 대한 특허권을 포기했다. 물론 뒤끝 쩌는 영국인들은 왕의 반역자라 칭하면서 그가 발명한 끝이 뾰족한 표준 피뢰침 대신 끝이 둥근 피뢰침을 사용했지만 그의 과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는지 영국에서도 결국 왕립학회 회원으로 받아주고 메달까지 주는 등 사실상 업적을 인정해 주었다.

2.7. 작곡가 프랭클린

벤저민 프랭클린이 작곡한 현악 4중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최소 2곡의 작품을 남긴 작곡가이기도 하다. 먼저 만든 곡은 1719년에 만든 《해적 검은 수염의 죽음에 대한 발라드》이고, 두번째 곡은 대략 1778년에 작곡한 《현악 4중주 F장조》이다. 이 곡은 그의 친구의 살롱 중 한 곳에서 연주할 목적으로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반적인 현악 4중주[13]와는 달리 '바이올린 3+첼로 1'이라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덤으로 이 곡은 모든 악기가 스코르다투라[14]로 조율된 채 개방현으로만 연주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연주되는 16개(4개의 음*악기 4개)의 음들로만 전곡이 구성되는 상당히 전위적인 구성이다. 그런데 유튜브 댓글을 보면 '곡 퀄리티가 너무 낮다'는 평가가 절대다수다.(...)

2.8. 정치인 프랭클린

1757년 정치에 입문해 영국에 파견되어 과세권을 땄고, 1764년에는 또 영국에 파견되어 인지조례를 철폐하며 일약 유명인사로 등극한다. 여기서 했던 말이 그 유명한 "대표 없이 과세도 없다." 물론 프랭클린이 처음 한 말은 아니고 이미 반 영국 기조가 돌던 당시에 흔히 돌던 슬로건이다.

프랭클린은 런던에서 정계의 유력 인사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강력한 (영국) 왕당파를 견지했으나, 막상 독립전쟁에서는 대세를 판단하고 미국으로 가 독립서명서에 서명했다. 막상 그의 아들은 뉴저지 주지사를 지내면서도 왕당파를 고수하는 바람에 투옥되었다(...)

미국 독립전쟁 중에 2차 대륙회의에서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나가서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 작성에도 참여한다. 이후 프랑스로 외교를 하러 가 참전을 요청했다. 라파예트 등의 많은 프랑스 귀족이 미국을 지원하러 대서양을 건너가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루이 16세가 참전을 결의했다.

프랑스 사람들처럼 사치스럽게 행동해서 일행에게는 욕을 얻어먹었지만, 이게 프랑스 사람들의 호감을 사 제대로 성공했다는 말이 있다. 다만 문제는 당시 프랑스 측 외교관이 그 유명한 탈레랑. 그러다 보니 프랭클린이 사실은 이 능수능란한 외교관 손아귀에서 휘둘렸을 뿐이고 실제로는 그닥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는 말도 있다.

전쟁 중 영국에 붙잡힌 미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사략선들, 즉 해적을 교환하는 기행도 저질렀고.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같이 독립 전쟁 때 첩보 활동을 한 미국 최초의 스파이다. 난수 암호표와 해독 체계 역시 이 시기에 워싱턴과 같이 고안했다고.

독립 후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또한 그의 연설과 간행물, 책은 북미 식민지인들이 미국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해주었으며 미국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775년에 설립한 미국우정공사의 창립에 기여했으며, 초대 우정장관을 지냈다.

"전열함 다섯 척보다 2인승 기구 5천 개 운용비가 쌀 거다.'라는 말과 함께 기록상으로 공수부대의 방식을 최초로 언급한 인물로 꼽힌다. 물론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 했고, 이후 여러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실험이 이어진 후에야 가능해졌다.

미국이 독립을 이룬 1785년에서 1788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를 재임한다.

2.9. 금욕주의

인간적인 결함이 비록 많이 있었지만 적어도 자기관리적인 경제 관념과 실천만큼은 모든 경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후에 이어진 막스 베버가 프랭클린의 사상을 '세속적 금욕주의'라고 분석했다. 한끼 식사값이 현재 기준으로 100센트(1달러)였다고 한다.

2.10. 말년

중년부터 비만통풍으로 고생하던 프랭클린은 1790년 4월 17일 흉막염으로[15] 18세기 당시 나이로는 84세로 장수한 뒤에 세상을 떠난다. 사실 평생동안 경제면에서는 통상적으로 볼 때 검소하고 알뜰하게 살았던 그의 특성상 비만이나 질병으로 인해 사망했다기보단 그의 긍정적인 성품이나 사고방식이 더 삶의 질과 길이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

공인으로서, 특히 거의 평생을 살아온 도시 필라델피아에 미국 최초의 종합대학(University)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Penn)를 설립하는 등 워낙 기여를 한 면이 많았으며, 무엇보다 굉장히 장수하면서 식민지에서 공화국까지 미국 초기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존경을 받아 장례식에는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몰렸다. 당시 필라델피아 시 전체 인구가 3만 명이 안 되었던 걸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인파를 끌어 모았던 것이다.

사후에 《자서전》을 출간했는데, 미국적인 정신을 담아서 뭇 미국인들의 귀감이 되어 현재까지 미국에서는 베스트셀러로 남아있는 미국 수필 문학의 고전이다.

3. 어록

Those who would give up essential Liberty, to purchase a little temporary Safety, deserve neither Liberty nor Safety.
일시적 안전을 얻기 위해 근본적인 자유를 포기하는 자들은, 자유도 안전도 가질 자격이 없으며 결국은 둘 다 잃게 될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좌우명[16]
Sell not virtue to purchase wealth, nor Liberty to purchase power.
미덕을 팔아 부를 사지도, 자유를 팔아 권력을 사지도 말라.
저서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에서#
You will observe with concern how long a useful truth may be known, and exist, before it is generally received and practiced on.
어떤 유용한 사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적용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걱정스럽게 지켜보게 될 것이다.
1786년 벤저민 본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양한 납 중독 사례에 대해 정리하며 남긴 말[17]
Never leave that till tomorrow which you can do today.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There will be sleeping enough in the grave.
잠은 무덤에서도 얼마든지 잘 수 있다.
If you would be loved, love and be lovable.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라.
In this world, nothing can be said to be certain except death and taxes.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죽음과 세금을 제외하면.[18]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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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100달러 지폐에 실려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벤자민'이라는 단어가 아예 100달러를 의미하는 관용어로 사용할 정도다.
  • 2남 1녀를 두었으나 둘째 아들 프랜시스를 어릴 때 천연두로 잃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천연두 백신을 맞히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적었다.[19] 큰아들 윌리엄 프랭클린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인정된 사생아인데, 아버지와 다르게 영국 편을 들었고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영국으로 망명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딸 세라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의 여성들을 조직해서 아버지의 독립 운동을 도왔다.
  • 본인 포함 5대가 계자(季子)다. 즉 프랭클린 본인은 5대째 막내아들이다. 그의 고조할아버지부터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 본인까지 막내아들이었다.
  • 원래 오른손잡이였지만 20대 후반에 3년여 간의 피나는 노력으로 왼손을 쓸 수 있게 만들었다. 왜 후천적 왼손잡이를 그토록 연습했는지는 불명. 글씨 연습을 2년 정도 해서 왼손 글씨를 만들고, 1년여 간 식사 연습도 해서 기어이 양손잡이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원래라면 왼손잡이가 오른손을 배우는데, 프랭클린은 거꾸로 오른손잡이가 후천적으로 왼손잡이를 배워서 써먹은 양손잡이의 드문 케이스이다.[20] 프랭클린은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때도 왼손으로 서명했고, 프랭클린의 각종 논문과 신문 기고문 등은 왼손으로 집필한 것과 오른손으로 집필한 것이 모두 남아 있다. 그런데 또 프랭클린이 쓴 일기는 오른손으로 쓴 것이다. 아무래도 공적인 부분은 왼손, 사적인 부분은 오른손을 쓰기로 한 거 같은데 매우 특이한 케이스.
  • 13가지 덕목과 규율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하나같이 좋은 말들이지만 본인도 안 지킨 모양이다. 항목에는 "술은 즐기되 취하지 마라" 또 "늙은 의사보다 늙은 주정뱅이가 더 많다"라고 써놓고, 정작 본인은 생전에 술주정으로 비판을 많이 받은 주당이었다. 또 다른 곳에는 '맥주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라든가, ‘술은 사람을 해하는 몹쓸 것이니 몽땅 마셔 없애야 한다' 등의 센스 있는 음주를 찬양하는 글귀도 많이 남겼다.
  • 자신이 쓴 자서전에는 도수가 높은 술인 럼주북미 원주민들한테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을 적었다. 북미 원주민들은 선천적으로 간에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가 적고 술을 아예 몰랐던 부족들도 많아서 유럽인들보다 알코올 중독에 취약했다. 이런 원주민들이 유럽인들로부터 모피를 팔고 나서 그 대가로[21] 받은 도수가 높은 럼을 마시게 되자, 얼마 못 가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알코올 중독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고 중독자가 된 원주민들은 손이 자주 떨리거나 뇌에 이상이 생기고 눈이 침침해지다가 갑자기 심장마비 등의 증세로 죽어갔다.
  • 90년대 중순 중앙일보에서 미국에서 프랭클린이나 여러 유명 위인, 정치인 자손으로 나오던 인물을 다룬 바 있는데 프랭클린의 증손은 현재 흑인이다. 프랭클린의 후손들이 흑인과 결혼하면서 그 후손이 흑인이라고. 증손으로 나온 흑인은 그걸 자부한다고 나오기도 했다.
  • 이휘소의 미국 이름인 벤저민은 이 벤저민 프랭클린에서 땄다.
  • 교회보다 등대와 학교부터 짓는 게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말을 하였고 영화 《신은 없다》에서도 이 말과 프랭클린 그림이 나온 바 있다. 다만 프랭클린 본인은 기독교인이다. 칼빈주의 감리교 순회 설교자 조지 윗필드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이후 평생 기독교인으로 지냈다. 프랭클린은 평생 동안 윗필드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윗필드의 목회를 돕기도 했으며. 자신이 소유한 인쇄소에서 윗필드의 설교문을 정리하여 인쇄한 뒤 대중에게 판매하고 나눠주기도 했다. 윗필드는 교회는 건물이 아닌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보았기에 교회 건물을 짓기보다 고아원과 가난한자를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하는데 더욱 집중하였는데, 프랭클린 역시 윗필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이유로 이미지와는 달리 평소에는 꽤 종교적이었다. 사실 울지마 톤즈로 유명한 이태석 신부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고[22] 탈무드에서도 종교 시설보다 먼저 학교를 우선하는 걸 보면 이상한 건 아니다.
  • 상당한 호색한이었다. 그의 초상화를 그린 당대의 유명 화가 찰스 워슨 필은 호텔에서 그를 만났을 때 자신의 손녀뻘 되는 어린 아이를 무릎에 앉혀둔 것을 목격했다고 했으며, 다른 사람들도 그가 호텔에서 하녀 등 어떤 매끈한 몸과 얽혀 있던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자서전에 '결혼 전에 성욕을 주체할 수 없어 매춘부를 찾아간 일이 몇 번 있으나, 돈도 아깝고 건강에도 좋지 않은 듯하여 그만두었다'라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을 정도이다. 사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말들은 대부분은 후대에 윤색된 것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협상이 반쯤 진행된 후까지 남아있는 멀쩡한 성벽이나 처녀막은 없다"라고.
  • 또한 그는 어떤 여자의 단점을 알고 싶다면 그녀와 친한 다른 여자들에게 그녀의 장점을 칭찬하면 된다는 발언을 남겼다.
  • 한 일화에 따르면 가로등을 고안해 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밤길을 잘 다니기 위해서 집 밖에 등을 매달아 사람들이 이 불을 보고 넘어지지 않도록 배려했으며,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도 등을 자기 집 앞에 내놓기 시작한 게 가로등의 시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소년 시절에 물건을 팔면서 가격을 깎고자 하는 손님에게 가격을 계속 올리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간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미국 위인전 작가인 퍼슨 윔스가 위인전에서 지어낸 얘기이다 이 사람은 조지 워싱턴의 벚나무 이야기도 지어낸 바 있다. 그런데 '시간은 금이라는 말도 있고, 이자가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라는 말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해당 말들을 그가 정말 했는지 불명. 정확히는 1748년 발표한 《젊은 상인에게 보내는 조언》이라는 글의 첫 번째 조언으로 "시간은 돈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세요."라는 글을 적었다. 그런데 이 말이 전해지면서 "시간은 은이다."가 되었다가 "시간은 금이다."로 변형된 것.
  • 에식스급 항공모함 13번함 및 와스프급 강습상륙함 6번함[23]에 명명된 본험 리처드는 그가 프랑스에서 활동할 시절 쓴 이름을 오늘날에는 영어식으로 읽는 것이다. 당연히 프랑스에서 활동했을 당시에는 프랑스식인 보놈 리샤르로 읽어야 한다. 여담이지만, 그 이전에도 함명으로 써서, 창군기 당시 함명에도 쓰였다.
  • 가짜 뉴스의 선구자다. 1722년에는 사일러스 두굿이라는 가상의 중년 여성을 만들어 사람들의 청혼을 이끌어냈고, 1730년에는 가짜 마녀사냥 이야기를 지어내어 실어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로는 타이탄 리즈 사망사건을 지어내 살아있는 사람을 매장시켜버렸다. 1755년에는 영국인과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창세기 51장을 가짜로 만들어내 성경에 실어 넣었다. 무엇보다도 폴리 베이커라는 5명의 사생아를 낳은 가상의 여성이 사회의 불합리함에 저항하여 끝내 인정받는다는 이야기를 실화처럼 써내 영국 신문에 실었고, 이는 훗날 프랑스 혁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5. 대중매체에서

  • 문명 시리즈

    • 파일:external/vignette2.wikia.nocookie.net/Electricity_(Civ5).png
    • <문명 5>에서 과학 기술 전기를 연구 완료하면 나오는 이미지에 열쇠가 걸린 을 날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 <문명 7>에서 플레이 가능한 지도자로 등장할 예정이다.
  • 존 애덤스를 주인공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에도 등장. 애덤스의 좋은 조언자이긴 하지만 드라마에 묘사되는 전체적인 캐릭터성은 "기괴한 노인." 그러나 훌륭한 발명가이자 외교관으로서의 노련한 외교관으로서의 모습도 많이 묘사되며 특히 강직하기만 한 풋내기에게 국제외교의 냉혹함을 알려주는 면모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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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얼굴이 안 보이는 인물. 오른쪽의 여성은 후손인 엘리시아 웬트워스.
* 자영의 소나닐의 주인공 엘리시아 웬트워스의 할머니의 오빠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엘리시아의 조상이다.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으며 엘리시아가 뉴욕을 여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사람의 힘이 크다. 엘리시아는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듯.[24] 한때 뇌전공이라 불리던 석학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25] 오래전 제자인 테슬라를 피험자로서 비밀리에 프랭클린 뇌전 실험[26]을 감행해《선더버드》의 힘의 일부를 담은 기계대를 만들어 낸 적도 있지만, 현재는 결별하고 제자인 테슬라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생활 중. 테슬라의 말에 의하면 상당히 불 같은 성격인 것 같다.
  • <딜버트>에서는 프리메이슨 중 하나로 나오며 바닥 청소재를 먹고 현대에서 부활해서 "민주주의? 그거 다 헛소리여 ㅎㅎ 지금쯤 알 만할 때 되지 않았나?"라고 말을 하다 자신이 만든 우체국이 이메일에 밀려 쓸모가 없어져 가는 것을 보고 심장마비로 다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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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쌔신 크리드 3>에서도 가장 비중 높은 건국의 아버지들로 등장. 자신이 작성하던 연감이 죄다 도둑맞아 되찾아줄 것을 의뢰하며, 되찾아줄 때마다 자신의 발명품[27] 설계도를 제공해 복제품을 만들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본편에서는 나이 많은 누님 취향의 변태로 워싱턴 왕의 폭정에서는 워싱턴에게 세뇌당해 건국의 아버지들을 살해하고 영국군이 벌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보스턴 학살사건을 저지른 인물로 고인드립당한다. 근데 어쌔신 크리드: 로그에서는 템플러인 셰이 패트릭 코맥의 조력자로도 등장한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 편인지 헷갈리겠지만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단지 각 진영에서 온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뿐.
  • <코드 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시리즈>에서는 배경 설정을 소개하는 를르슈의 브리타니아 역사 강좌C.C.를 통해 언급되었다. 현실 역사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외교로 갔으나 여기선 루이 16세를 만나기 전에 당시의 브리타니아 공작과 만나 백작 작위를 받고 변절했다. C.C.는 너무나 상냥한 남자였던 탓에 변절한 것으로, 프랑스의 지원을 얻지 못 함으로써 워싱턴의 반란이 실패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고 평했다.[28] 즉, 나폴레옹과 더불어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건국의 숨은 공로자.
  • 그레고리 키스의 <철학자의 돌>에서는 호기심과 모험심 많은 소년으로 등장한다. 소설 중의 진 주인공.
  • <화씨 451>에서 최초의 방화수로 나온다. 영국의 불온책자를 태웠다고 왜곡돼서 나온다.
  • <내셔널 트레저>에서는 배경이 현대인만큼 등장하진않지만, 그의 행적과 유품들이 보물을 찾는데 중요한 떡밥인지라 작품내내 언급된다.
  • <티미의 못말리는 수호천사>에서는 티미가 역사 숙제를 하기 위해 소원으로 불러낸 3명의 위인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피뢰침 일화를 반영해 연을 들다가 시도 때도 없이 벼락을 맞거나 전구나 TV 같은 전기 제품을 신기해 한다. 나중에 재등장했을 때는 아예 연을 들고 폭풍과 벼락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린시절을 다룬 에피소드도 있는데 이때 시간여행중이던 티미의 영향을 받아 감자를 바탕으로한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아낸다.


[1] President of the Supreme Executive Council[2] Province of Massachusetts Bay.#[3] 잉글랜드 왕국령 13개 식민지 매사추세츠 만 직할식민지[4] 그레이트브리튼 왕국령 13개 식민지 매사추세츠 만 직할식민지[5] 천연두로 요절했다.[6] 미국 초대 재무장관.[7] 14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피어스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다.[8] 물론 지금 저런 차별적인 말을 하면 어느 나라든 비난을 많이 듣지만 당시 시대상은 그런 차별적인 말이 당연하게 여겼을 때였다.[9] 프랭클린은 이 신문에 세계 최초로 만화를 삽입하고 도서관에 비치했다고 한다.[10] 그러나 그의 삶을 보면 그는 청교도라기보다는 미국과 런던, 프랑스를 넘나드는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했다.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에서는 순결을 지키라며 “성행위는 오직 건강이나 자손을 위해 가져라. 도가 지나쳐 머리를 멍하게 하거나 몸을 쇠약하게 하거나 자신과 타인의 안녕과 평판을 해치는 일은 결코 없게 하라.”(!)라고 말했지만 막상 본인은 달랐다.[11] 물론 이 시대에는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으로 역학과 천문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과학 주제는 아마추어가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상황이었다.[12] 실제로 러시아의 과학자 리히만과 다른 프랑스 과학자는 동일한 실험을 하다가 벼락에 맞아 즉사했다.[13] 바이올린 2+비올라 1+첼로 1[14] scordatura, 현악기를 표준 조율과 다르게 조율하는 것.[15] 말년에 흉막염에 얼마나 시달렸던지 기침과 구토를 심하게 했고 임종에도 심하게 토하다가 사망한다.[16] 프랭클린이 1755년 11월 11일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에서 쓴 '주지사에게 보내는 답신(Reply to the Governor)' 안에 처음으로 이 문장을 사용한 이래, 1759년과 1775년 등 수 차례에 걸쳐 재인용되면서 그의 좌우명으로 자리잡은 문장이다. 1750년대에 펜실베이니아 의회가 프렌치 인디언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의 권세가이던 펜 가문의 땅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는데 펜 가문 측에게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요구받은 주지사가 주 의회의 입법권을 침해하려고 하자 그를 비판하는 편지에서 등장한 말이다.# 1759년에는 리처드 잭슨의 저서 《펜실베이니아 헌법과 정부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근원》을 출간하면서 표지에 이 문장을 넣었다. 1775년에는 대륙 회의 협상 당시 영국 의회가 13개 식민지의 자치권을 침해하고 지역 의회의 동의 없이 군을 주둔시키게 해달라고 요구하자 협상을 완고하게 거부하며 이 문장을 다시 한번 인용했다. 현대에는 자유권적 기본권의 슬로건인 것처럼 쓰이는 발언이지만, 사실 시민적 자유보다는 헌법과 의회의 자치권과 입법권을 강조하는 용도로 쓰인 문장이다.[17] 납과 그로 인한 납 중독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말대로 본격적인 납 퇴출은 2세기나 지난 20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18] 흔히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두 가지는 죽음과 세금이다.'라고 인용되는 문구다.[19] 당시엔 종두법이 발견되기 전이므로 인두법을 사용했는데, 종두법과는 달리 인두법의 경우는 치사율이 1~2%정도라서 맞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20] 왼손잡이에서 오른손으로 바꾸는 경우는 꽤 있다. 일상 생활에서 불편한 게 좀 있기 때문. 대표적으로 글씨 쓸 때 왼손으로 쓰면 손에 묻어서 불편하다.[21] 왜 돈이 아니라 술인 럼을 받았느냐 하면, 원주민들은 화폐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어 그들한테 유럽인들이 돈을 줘봐야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22]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23] 방화 사건으로 인한 손상 때문에 퇴역처리 및 스크랩.[24]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제자인 테슬라에게도 걸린 선더버드의 어떤 저주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25] 다른 건국의 아버지로는 에디슨경이 있다.[26] 테슬라가 현재의 뇌전마인이 된 실험.[27] 프랭클린 화로, 정전기 발생장치, 글라스하모니카, 열쇠를 매단 연, 라이덴병 등.[28] 다만 변절의 이유가 실제로는 기아스에 걸린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