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2:34:54

공화당 급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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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요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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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급진파
Radical Republicans
<colbgcolor=#E81018><colcolor=#fff> 활동 시기 1854년 ~ 1877년
주요 인물 율리시스 그랜트
스카일러 콜팩스
새디어스 스티븐스
찰스 섬너
존 C. 프리몬트
해니벌 햄린
조지 윈터 데이비스[1]
벤저민 웨이드[2]
벤저민 버틀러
이념 급진주의
폐지주의
자유 노동 사상[3]
극단적 연방주의
정당

후계 세력 강건파 (콩글링파)
대립 세력 공화당 보수파, 공화당 온건파, 버번 민주당
파일:TStevens-Johnson_impeachment.jpg
앤드루 존슨 대통령을 탄핵하는 새디어스 스티븐스 하원 의원

1. 개요2. 성향3. 평가
3.1. 진보 세력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Radical Republicans

미국에서 1854년부터 1877년까지 존재했던 공화당의 계파. 급진파라는 이름답게 당시 기준 급진 오늘날로 보면 상식적인 정책들을 많이 추진했다. 초기 공화당 급진파는 반 노예 정책을 앞세우며 공화당에 입당한 30년 넘는 정치경력의 인권 변호사 새디어스 스티븐스, 찰스 섬너 상원의원 구타 사건 이후 반 노예 연설로 급격히 부상한 달변가 찰스 섬너, 185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던 남부 출신 탐험가 존 C. 프리몬트,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으며 이후 대법원장에 임명되었던 새먼 P. 체이스, 마찬가지로 링컨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H. 수어드등이 이끌었다.[4]

흔한 인식과 달리 링컨 대통령은 당내에서 중도파로 출마했고, 공화당 급진파와 보수파 모두에게 반대를 받았다. 이를 봉합하려고 체이스, 수어드, 베이츠같은 반대파들을 주요 장관직에 임명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공화당은 대체적으로 링컨 행정부를 도왔지만, 노예제 폐지등의 사안에 있어서 사사건건 부딪혔다. 링컨은 국가를 다시 하나로 합치기 위해 최대한 남부인들을 자극하지않으려 했는데, 급진파들은 즉각적인 노예제 폐지, 남부인 선거권 박탈, 자유민이 된 흑인 노예들에게 50에이커의 경작지와 노새 한마리 지급[5]등 강경한 대응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수정헌법 제13조를 제정하는데도 많은 난관이 있었다. 이에대한 자세한 내용은 영화 링컨 참고. 이 갈등 때문에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프리몬트가 독자적으로 출마하려 시도한적도 있었다.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뒤 공화당 급진파도 분열됐다. 호레이스 그릴리, 찰스 섬너같은 이들은 율리시스 그랜트 행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며 자유 공화당을 창당했다. 살몬 체이스는 오하이오 민주당의 개혁에 동참하며 공화당을 이탈했고, 윌리엄 수어드는 남북전쟁 당시 전쟁 민주당과 연합하려는 링컨의 계획에 동참하며 성향이 한층 온건해졌다. 물론 대부분의 공화당 급진파 인사들은 잔류했지만, 크레디 모빌리에 스캔들[6]로 인해 영향력 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공화당 급진파는 뉴욕의 콩클링 머신, 펜실베이니아의 캐머런 가문등 지역 유력자 중심의 부패한 정치기계가 이끌게되면서 쇠락하게되었다.

2. 성향

파일:의사 새디어스 스티븐스 풍자 만화.jpg
수정 헌법으로 미국 남부수술하는 새디어스 스티븐스 하원 의원

19세기 당시 미국 남부에서 합법화된 노예제를 반대했으며, 투표권을 흑인 남성에게 주는 것을 주도하는 등 리버럴한 성향의 계파였다. 남북전쟁 종전 후 온건파를 대변하던 링컨이 사망한 후, 율리시스 그랜트 등을 내세워 재건 시대 동안 공화당을 휘어잡고 정책을 주도했다. 율리시스 그랜트 18대 미국 대통령의 임기 동안 남부에서 군정을 주도하고 수정헌법 제13조, 제14조, 제15조, 1875년 시민권법을 통과시키는 등 현재의 미국 공화당과는 성향이 많이 다른 인도주의, 급진주의, 폐지주의 세력이었다.

링컨 사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앤드루 존슨 대통령과의 극한 대립으로도 유명하다. 민주당 출신 인사였던 존슨은 취임 초기만 하더라도 오히려 급진파 지도자 중 한명인 Chandler 상원의원에게 자신만큼 급진적이라는 평도 받을 정도로 이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졌으나, 점점 사이가 멀어져 급진파가 장악한 의회의 인권법 등 여러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이에 급진파는 압도적인 의석수로 대통령의 거부권을 찍어누르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을 반복하였다. 급진파들은 재건과 대남부 강경책을 주도한 에드윈 스탠튼 전쟁장관을 지원하고 존슨이 스탠튼을 해임하려 하자 공직보장법을 제정하여 대통령의 각료 임면권을 제한, 뒤이어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기도 했다.[7]

실제 이때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이 일어날뻔도 했으나, 상원의 탄핵 심판 과정 중 일부 온건 공화당 의원이 반대로 돌아서면서 무산되었다. 당시 이들이 남부에 옹호적이라 반대했던건 아니고 입법부가 행정부를 과도하게 압박해선 안된다는 생각에서 반대한 것이었다. 허나 존슨이 말많고 탈많은 대통령이었던 것도 사실이라 결국 존슨은 임기 말년 내내 공화당에 끌려다니며 재선은 꿈도 꿀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차기 대통령은 급진 공화당이 밀던 율리시스 그랜트가 당선된다.

3. 평가

이른바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 동안 미국을 재건하며 좋은 정책을 시도했고 다수는 통과도 시켰으나, 그랜트 대통령 시기 재건 관련 정책을 위해 중용된 측근들 상당수의 부패 스캔들 때문에 인기가 낮아졌고[8][9] 지속되는 남부 군정에 대한 미국인들의 피로감도 있어 1870년대 후반 가면 세력이 쇠퇴하게 된다.

결국 1877년 공화당 온건파로 대선에서 진땀승한 러더퍼드 B. 헤이스 제19대 대통령이 남부 포용 정책의 일환으로 남부 군정을 해제하면서 공화당 급진파도 같이 해체되었다. 다만 이때 연방군이 빠져나가면서 당시 남부 흑인들은 다시 암흑기를 맞게 된다. 한편, 해체된 급진파 세력 중 일부는 이후 급진파 출신 뉴욕 상원의원 로스코 콩클링에 의해 콩클링파 혹은 강건파라 불리는 엽관제 지지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10]

본격적인 재평가가 이뤄지는 1980년대 이전까지 공화당 급진파는 급진적이면서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세력이라고 종종 폄하되곤 하였으나, 이후 에릭 포너(Eric Foner) 등 미국 역사학자들이 1960년대의 흑인 인권 운동재건 시대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하는 등 현대 들어선 미국 내에서도 재건 시대와 공화당 급진파의 행보를 재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11]

3.1. 진보 세력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공화당 급진파는 종종 대중 혹은 일부 역사가에 의해 공화당 내 온건파(즉 온건 폐지론자)와 민주당에 맞선 진보주의적 세력으로 묘사되곤 하나, 공화당 급진파는 오늘날 미국의 진보주의 계보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중앙은행의 설치를 옹호하고 미국 연방정부가 보증하는 채권인 그린백을 발행하는 등 중앙정부의 경제적 권한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당대 보혁구도의 보수에 속했다.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중앙은행은 진보라기보다는 알렉산더 해밀턴-헨리 클레이의 계보를 잇는 보수의 의제에 가까웠고, 도리어 앤드루 잭슨 등의 민주당원들은 중앙 은행을 엘리트 독점의 산물이라고 보아 반대했다. 또한 관세의 문제에 있어서도, 정치가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높은관세에 의한 보호 무역을 옹호했다. 진보주의의 지지자였던 농민들은 낮은 관세를 지지했지만 사업가들을 대변한 공화당원은 보호무역을 지지했다.

1877년 급진파 공화당원에 속했던 다수의 인원들, 즉 로스코 콩클링이나 올러버 모튼, 제커라이어 챈들러 등의 정치가들은 상술한대로 강건파(Stalwarts)를 형성했다. 강건파는 공화당 급진파의 의제를 계승해 강력한 흑인 민권운동 지지를 천명했지만 동시에 보호무역 옹호, 철도 산업 장려, 산업가 보호, 특히 엽관제 개혁 반대 등의 의제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칼 슈어츠나 찰스 섬너 등 엽관제 개혁을 옹호한 소수의 급진파 공화당원들도 존재했지만, 다수의 급진파들, 특히 율리시스 그랜트 자신은 그것을 반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880년 대선에서 그랜트 대통령은 콩클링을 비롯한 구 급진파 세력의 압도적 지원을 받아 3선을 도전했고 당 내에서 분명하게 관료 임용과 관세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에 속하였다.

이후 1890년대 들어 급진파의 유산이었던 흑인 민권 정책이 점점 우선 순위에서 밀려, 공화당은 1890년대 완전한 보수파 정당으로 굳어지게 되지만, 사실 정책이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있냐의 차이일 뿐 공화당 급진파의 의제와 매킨리와 이후의 올드라이트(Oldright) 등으로 대표되는 보수 공화당의 의제는 큰 차이가 없다. 사족이지만 공화당이 강경한 흑인 민권 정책을 밀어붙인것도 상당히 최근까지의 일로, 록펠러 공화당원인 넬슨 록펠러, 찰스 구델, 제이콥 K. 재비츠, 에드워드 브룩 등은 흑인 인권을 옹호했을 뿐더러 다수의 민권운동가들로부터 지지받았다.

반대로 노예제 폐지와 재건에 반대한 남부의 백인 민주당원은 오늘날 미국 진보주의의 직접적인 뿌리가 된다. 예를 들어 극렬한 인종주의자였던 벤 틸먼(Ben Tillman)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상원의원은 1870년대 재건 마무리 시기 린칭을 옹호하고 인종학살을 주도하였으며 흑인 참정권을 박탈하는 행보를 보였지만 동시에 금본위제를 옹호한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였다. 벤 틸먼을 제외하고도 많은 서부 및 남부 민주당원들이 철도 국영화와 누진 소득세, 은본위제를 옹호하였으며 이는 1896년 대선에서 윌리엄 J. 브라이언이 부상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공화당 급진파가 종종 진보주의의 오랜 뿌리로 인식되는 것은, 공화당 급진파가 표방한 강력한 인종평등의 가치와 이를 위한 연방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1948년 민주당 전당대회 이전까지 인종 문제는 좌우를 가르는 문제가 아니었다. 허나, 공화당 급진파는 인종 문제와 금융, 관세 등에 있어 민주당이나 온건파에 비해 연방정부의 역할을 강화하고자 했고, 오늘날의 많은 진보좌익 정치가들이 이런 급진파의 유산을 옹호하곤 한다. 그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비록 약간의 비약이 있을지언정 미국 진보주의의 넓은 범주에 포함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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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enry Winter Davis[2] Benjamin Wade[3] Free labor ideology. 말 그대로 남부의 노예 기반 경제를 해체하고 노예에게 자유를 줘 자유시장 자본주의(free-market capitalism)를 촉진하여 북부식 근대적 경제체제로 통합하고자 하였다.[4] 이와 반대되는 공화당 보수파 세력은 링컨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에드워드 베이츠, 영화 링컨에서도 나오는 프랜시스 프레스턴 블레어등이 이끌었다.[5]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이 윌리엄 T. 셔먼 장군이었다.[6] 티팟 돔, 워터게이트 이전에 가장 큰 미국내 정치 스캔들로, 철도 건설 과정에서 일어난 비리 사건이었다. 그랜트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스카일러 콜팩스, 헨리 윌슨 모두 이 스캔들에 연루되어있었고 훗날 대통령 후보가 되는 제임스 블레인도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에 대선 기간 내내 공격을 받았다.[7] 특히 1860년대 당시 하원 의원 공화당 급진파 지도자 새디어스 스티븐스와 상원 의원 공화당 급진파 지도자 찰스 섬너는 앤드루 존슨을 거의 극혐할 정도라, 실제로 존슨 행정부 집권 내내 존슨과 대립했다.[8] 파일:nice family peace party image.jpg
1872년 당시 부패한 공화당 급진파 당원들을 묘사한 풍자 만화. 이는 정경유착같은 공화당 급진파의 타락 혹은 경제 복구기 당시 주류였던 급진파에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드는 사회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문에 급진파 내부에서도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고 이후 온건파들과 손을 잡기도 한다.
[9] 사실 이런 부패 스캔들이 커진 것에는, 당시 공화당 급진파와 카펫베거를 반대하던 남부 보수파 일명 리디머(Redeemer)들이 꼬투리 잡듯 온갖 스캔들을 물고 늘어진 영향도 있었다.[10] 다만 이 구분으로 나누는 것은 좀 애매한게, 애초에 강건파는 급진파가 주류이긴 했지만, 온건파(공화당 자유파 혹은 자유공화당원 출신 등)도 섞여있었다. 반대파인 메인 상원의원 제임스 G. 블레인를 중심으로 한 엽관제 반대파 혼혈파 역시 마찬가지. 이들 파벌을 갈라놓은 핵심적인 요소는 상기된 부패와도 연관된 엽관제, 즉 공무원법 개혁 문제였다. 하여튼 1881년 급진파 출신의 중도파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이 취임 몇개월만에 골수 강건파 찰스 기토에게 암살당하고, 계파 안배로 인해 부통령이 되었던 강건파 체스터 아서가 대통령을 이어받는다. 다만 그도 강건파 바램과 달리 엽관제에 제한을 가하는 미국판 행정고시 '펜들턴법'에 서명함으로서 배신자 취급받고(...), 이후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면서 두 파벌 모두 1880년대 말에 해산된다.[11] 오히려 이 시기에 흑백 갈등이 헤이스 이후 남부의 반발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현대까지 이르렀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