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9:44:48

하이럼 존슨

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캘리포니아 주 클래스 1)
제62~64대
존 D. 웍스
제65~79대
하이럼 존슨
제79~85대
윌리엄 노랜드[1]

파일:캘리포니아 주지사기.png
캘리포니아 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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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65-79대 연방 상원의원
하이럼 워런 존슨 시니어
Hiram Warren Johnson Sr.
파일:Hiram_Warren_Johnson.jpg
<colbgcolor=#aeaa7a><colcolor=#fff> 출생 1866년 9월 2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
사망 1945년 8월 6일 (향년 78세)
미국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
재임기간 캘리포니아 주지사
1911년 1월 3일 ~ 1917년 3월 15일
캘리포니아 연방상원의원
1917년 3월 16일 ~ 1945년 8월 6일
학력 UC 버클리 (법학사)
정당

(1888~1912)

(1912~1916)


(1916~1945)
선수 2 (주지사)
5 (상원)
대수 23 (주지사)
65, 68, 71, 74, 77 (상원)
배우자 민 맥닐[2]
자녀 장남 하이럼 W. 존슨 주니어
차남 아치발드 맥닐 존슨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주지사 선거2.3. 주지사2.4. 상원의원2.5. 여담
3. 선거 이력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및 법조인. 1920년대에 중서부의 로버트 M. 라폴레트와 함께 미 서부 제일의 진보주의자로 꼽혔던 거물 상원의원으로, 특히 캘리포니아 정계가 진보화되는 데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유복한 가정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그로브 L. 존슨은 뉴욕 주 시라큐스 출신의 영국계 미국인으로, 남북전쟁 당시 북군 소속 보급계원으로 애리조나에서 복무하다가 그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865년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공화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다가 민주당을 거쳐 다시 복당하는 등 영 순탄치 않은 시절을 보냈으며, 하이럼 존슨이 11세가 되는 1877년에야 캘리포니아 주 하원에 겨우 입성하는 데 성공한다.

한편, 어머니인 마벨 윌리엄슨 드몽프레디는 건국의 아버지들과 그 이전의 뉴암스테르담 정착지 세대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부유한 네덜란드계 미국인 집안 출신으로, 그로브와 마찬가지로 본래 뉴욕 토박인데다 미국애국여성회[3]의 정회원이라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기반을 갖춘 상태였지만 함께 새크라멘토에 정착해 새 살림을 차렸다. 이러한 가정환경의 영향으로 하이럼 존슨은 강성 공화당 성향을 띠게 되었으며, 어릴적부터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새크라멘토 공립학교를 거쳐 UC 버클리에서 법학을 수료한 뒤 아버지의 선거유세를 수행하는 식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대학을 졸업한 지 2년이 지난 1888년에는 번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으며, 이후 자기 명의의 로펌을 열어 캘리포니아 최초의 전업 변호사 중 한 명이 되었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이후인 1902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해 지방 검사로 활동하면서 각종 범죄 수사를 진두지휘해 강렬한 명성을 얻었다. 10년에 가까운 검사 생활 끝에 마침내 캘리포니아 공화당 경선에 도전하게 된다.

2.2. 주지사 선거

이 당시 캘리포니아 진보파를 주도하던 링컨-루스벨트 연맹[4]의 가장 좋아하는 선택은 프랜시스 J. 헤니였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저명한 개혁주의자였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도 굉장히 밀접한 사이였다. 그러나 헤니는 친노조 성향과 급진주의로 인하여 큰 반대를 받았고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보수파들의 선택은 찰스 M. 벨쇼 주의원과 프랭크 K. 모트 오클랜드 시장이었다. 그러나 벨쇼는 연맹의 반대를 받았고, 모트가 자신을 타협 후보로 묘사하려는 시도마저 실패하며 연맹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후보는 윌리엄 R. 데이비스, 해리스 와인스톡, 그리고 하이럼 존슨으로 좁혀졌다.

이 3명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헤니와 협력하여 반부패 성전을 주도했던 하이럼 존슨이었다. 그러나 존슨은 꾸준히 출마를 거부했고 나머지 2명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연맹의 지도자들은 데이비스와 존슨을 설득하기 위해 힘썼다. 데이비스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출마를 거절했고, 이에 지도자들은 존슨에게 돌아서게 된다. 이 시점에서도 헤니는 정치적 야망을 버리지 못했으나 지도부가 모트, 벨쇼, 그리고 헤니를 막기 위해 존슨한테 결집했다는 걸 깨닫고는 포기하게 된다.

이 시점까지도 존슨은 완전히 설득되지 않았고, 2월 19일에는 와인스톡이 28표중 18표를 받아 지명되었다. 그러나 와인스톡은 아직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존슨을 설득하기 위한 마지막 여정을 떠났고, 마침내 존슨이 지명을 수락하게 되었다. 존슨은 21대 6으로 연맹의 후보로 지명받았다. 그러나 하이럼 존슨의 선정은 꽤나 비민주적인 기계 정치에 가까웠고 연맹의 회장인 로웰을 비롯한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존슨에 대한 저항이 컸다.

그럼에도 존슨은 상대방에 대해 큰 이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길렛은 사우스퍼시픽 철도의 로비스트들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철도 업계와 관련된 심각한 부패 스캔들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로비스트들과 당내 보수파는 한 후보 아래 결집할 수 없었다. 태프트 행정부를 비롯한 전국적 정치인과 시어도어 루스벨트마저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음에도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존슨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존슨 자신은 여전히 비관주의적 전망을 유지했다.

8월 16일 국민경선에서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존슨은 101,666표를 얻어 55,390 표를 받아 2등을 기록한 커리와 5만 표 가량의 격차를 벌리며 여유롭게 경선에서 승리했다. 존슨은 자신에 대한 반대가 컸던 남부에서마저 큰 승리를 거두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디킨슨의 예측과 같이 3대 1로 압승을 거두었고 역설적이게도 샌프란시스코와 그 근교에서 제일 표를 적게 받았다.

그러나 경선에서의 대승이 본선에서의 대승을 이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06년에도 출마하였으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반대로 근소하게 패배했던 개혁주의자 시어도어 A. 벨이 민주당 경선에서 재차 승리한 것이다. 게다가 공화당 보수파의 반발 역시 극심했다. 이는 공화당 정강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 진보파가 장악한 정당에서 작성된 정강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언한 진보적 공화주의 원칙"에 충성을 맹세했고 캘리포니아 공화당원들에게 "반동적 세력의 권력을 없애기 위해 진보파와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정책적으로도 전국적으로는 소득세, 상원의원 직선제, 반독점법의 강력한 집행을 주장했고 지역적으로는 더욱 민주적인 경선, 주민발의제와 주민투표, 비당파적 사법부, 고용주책임법과 단결권 제정 등이 있었다.

이에 존슨은 공화당 보수파를 만족시키기 위해 큰 노력을 해야만 했다. 연맹은 모든 공화당 후보를 이념에 관계없이 지지하겠다 선언했고 프랜시스 J. 헤니가 주에 돌아오지 말라는 서한까지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존슨의 시도는 역풍을 불러왔다. 찰스 로웰과 윌리엄 켄트를 비롯한 이들은 헤니를 공개적으로 초청했고 결국 존슨은 헤니를 자신의 선거운동에 불러와야만 했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결국 존슨은 선거에 승리했다. 결과는 5.8% 차이, 표로는 22,000표 가량의 차이였으며 하원의원 선거에서도 8개의 지역구중 7군데에서 공화당이 승리했고 주의회 선거도 공화당이 큰 다수를 차지했다.

2.3. 주지사

그가 주지사직에 앉으면서 즉각 실시한 핵심 정책은 바로 선거유세 당시부터 줄기차게 주장했던 사우스퍼시픽 철도 독과점체제의 해체와 도로망의 확충으로, 특히 주립 철도위원회의 수립을 통해 철도 트러스트의 세력을 성공적으로 억누르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한편 그는 철도위원회 수립을 지지해주는 대가로 자신들과 타협할 것을 주장한 당내 중진의 강력한 압박을 받으면서 시민권 미보유 이민자들, 특히 화교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하는 1913년 캘리포니아 외국인 토지법에 개인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찬성표를 던져야 했는데, 이는 혐중 성향을 갖고 있으면서 1912년 대선에 함께 출마할 러닝메이트를 구하고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딱 알맞은 코드인사로서 눈에 띄는 일이었고 결국 하이럼 존슨은 제도권 정치인이 된 지 단 2년만에 일약 부통령 후보의 자리까지 급부상한다.

비록 1912년 대선에서 진보당은 상당수의 중서부 진보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공화당과 표심이 분열된 상태에서 우드로 윌슨의 민주당을 상대로 27.4퍼센트의 득표율을 거두면서 고배를 마셔야 했지만 그 대신 하이럼 존슨 개인은 캘리포니아의 유망한 정치인에서 전국구급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는데 성공하며, 이를 토대로 1914년 선거에서 가뿐히 재선에 성공한 뒤 2년만에 곧바로 그 윗단계인 연방상원의원에 출마, 완승을 거둔다.[5]

2.4. 상원의원

하이럼 존슨이 상원의원으로서 첫 임기를 시작한 1917년은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극대노한 미국 정부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결의하던 시기로, 당시 독일계와 아일랜드계를 중심으로 세력이 강성했던 고립주의 정치인들이 완전히 기가 죽어 1차대전 참전과 군비증강에 관련된 의결에 찬성 및 기권표를 던지는 와중에도 꿋꿋이 전쟁에 반대하는 일관적 태도를 보여 지조가 있다는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1차대전은 끝내 미국의 개입을 통한 협상국 진영의 완승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이에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에 거부표를 던지거나 미국의 국제연맹 가맹에 반대하는 등 끝까지 고립주의 기조를 유지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사망한 1919년 이후엔 불 무스 공화당원들의 수장 자리도 이어받아 더이상 미국이 대외 개입을 하지 않고 아시아인들의 이민도 받지 않을 것을 주장하면서 1924년 이민법 등 각종 반아시아, 반이민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1920년대에 접어들자 유색인종을 제외한 모든 시민권자의 보통선거권이 통과되면서 캘리포니아의 선거권자 수는 2배 이상으로 늘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중산층 및 하류층, 여성을 주 표밭으로 공략하는 데 성공한 하이럼 존슨은 1928년 선거에서 이전에 비해 득표율을 10퍼센트 이상 늘리는 등 캘리포니아 내에서 압도적 우세를 굳히는데 성공했으며, 자당 소속 대통령인 캘빈 쿨리지허버트 후버에게 크게 실망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강력히 지지한 덕분에 1934년 상원의원 선거에선 민주당과의 단일화를 구성하는 데 성공, 무려 94.66퍼센트에 달하는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득표율을 달성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이후 1940년 선거에서도 민주당, 진보당과의 단일화에 힘입어 압승을 거두고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던 도중 뇌동맥에 이상이 발견되어 입원했으나, 워낙 고령이었던 탓에 뇌혈전증으로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하이럼 존슨이 사망한 1945년 8월 6일은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고립주의 신념이 제2차 세계 대전의 클라이맥스인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완전히 끝장나는 날이었다.

2.5. 여담

  • 자신과 마찬가지로 거물 진보주의자이자 강경 고립주의자로 평가받았던 로버트 M. 라폴레트와는 의외로 사이가 상당히 나빴으며, 이 때문에 1924년 진보당에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공약 자체에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기에 비판적 지지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 또다른 고립주의적 진보주의자인 헨리 캐벗 로지 시니어[6], 윌리엄 보라와 함께 20세기 초반 3대 고립주의자로 같이 묶이는 경우가 많다.
  • 본인은 상당히 장수했지만, 차남인 아치발드 맥닐 존슨이 1차대전 참전 당시 생긴 셸쇼크와 불운한 결혼생활로 고통받다 1933년 43세의 나이로 권총자살하는 바람에 참척의 고통을 겪은 바 있다.
  • 1917년 (또는 1918년) 반전운동을 할 당시 남겼다는 "전쟁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진실이다(The first casualty when war comes is truth.)"라는 명언이 러우전쟁 발발 이후 발굴되어 국내외 언론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데, 정작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참고
  • 성격이 안 좋기로 꽤나 유명했다. 그의 친구였던 윌리엄 E. 보라 상원의원은 "상대방이 존슨을 반대한다면 그는 상대방을 증오한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고 한 역사학자는 "존슨의 충성심을 믿느니 부러진 갈대를 부여잡는게 낫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굉장히 청렴하고 용기 있으며 대단한 웅변가로서의 면모를 가지기도 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10 미국 주지사 선거 캘리포니아

177,191 (45.94%) 당선 (1위) 초선
1912 미국 부통령 선거[7] 미합중국
4,122,721 (27.40%, 88명) 낙선 (2위)
1914 미국 주지사 선거 캘리포니아 460,495 (49.69%) 당선 (1위) 재선
1916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574,667 (61.09%) 초선
1922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564,422 (62,17%) 재선
1928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148,397 (74.11%) 3선
1934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946,572 (94.66%) 4선
1940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2,238,899 (82.62%) 5선[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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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임자 하이럼 존슨 임기 중 사망으로 주지사 얼 워런에 의해 상원의원 임명[2] 1886년 결혼.[3] 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 미국 독립 전쟁 참전용사들의 여성 후손들에게만 가입 자격이 주어진다.[4] Lincoln–Roosevelt League. 당시 임기를 막 마치고 내려온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후원하는 조직이었다.[5] 여담이지만 이 당시 상대 민주당 후보인 조지 S. 패튼 시니어가 바로 조지 S. 패튼의 아버지다.[6] Henry Cabot Lodge Sr. (1850-1924) - 헨리 캐벗 로지의 아버지이다.[7] 대통령 후보는 시어도어 루즈벨트.[8] 1945.8.6.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