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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노랜드

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캘리포니아 주 클래스 1)
제65~79대
하이럼 존슨[1]
제79~85대
윌리엄 노랜드
제86~88대
클레어 잉글
미합중국 제79-85대 연방 상원의원
윌리엄 파이프 노랜드
William Fife Knowland
<colbgcolor=#e81018>
파일:윌리엄 노랜드.jpg
출생 1908년 6월 2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앨러메다 카운티
사망 1974년 2월 23일 (향년 65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겐빌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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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학력 캘리포니아 대학교 (B.A.)
종교 개신교
신체 185cm, 80kg[2]
가족 아버지 조셉 R. 노랜드[3]
배우자 헬렌 데이비스 헤릭 (1926-1972)
배우자 앤 딕슨 (1972-1974)
'재임기간 연방상원의원(캘리포니아 클래스 1)
1945년 8월 26일 ~ 1959년 1월 3일
공화당 연방상원 원내대표
1953년 8월 4일 ~ 1959년 1월 3일
연방상원 공화당 의원총회 의장
1953년 8월 4일 ~ 1959년 1월 3일
서명 파일:윌리엄노랜드 서명.jpg
{{{#ffffff 군사 경력}}}
복무 미국 육군
1942년 ~ 1945년
최종 계급 소령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 오버로드 작전
1. 개요2. 생애
2.1. 초반2.2. 상원의원 임기2.3. 주지사 도전과 실패2.4. 사망
3. 선거 이력4.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정치인,언론인, 공화당 연방상원 원내대표를 지냈다.

2. 생애

2.1. 초반

노랜드의 할아버지는 골드러시로 인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목재 사업이 대박을 쳐 경제적으로 성공한다. 할아버지의 기반으로 노랜드의 아버지인 조셉 R. 노랜드[4]공화당 소속으로 연방하원의원을 지낸다.[5] 조셉 노랜드는 연방하원의원 임기 중 윌리엄 노랜드를 얻는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12살 때부터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지지 연설을 하는 공화당원으로 성장한다.

1932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최연소 주 하원의원이 된다. 노랜드의 정계 진출에는 아버지의 친공화당 성향 지역 신문사인 오클랜드 트리뷴 덕이 컸다. 2년 후인 1934년에는 주 상원에 출마해 역시 최연소 주 상원의원이 된다. 이후 32세의 젊은 나이로 공화당 전국위원회(RNC)의 집행위원회 위원장직을 맡는다.

2.2. 상원의원 임기

파일:윌리엄노랜드타임.jpg
1957년 1월 14일 타임지 표지[6]
1945년 8월 6일 캘리포니아주의 현직 상원의원이던 하이럼 존슨이 임기 중 고령의 나이 때문에 뇌혈전증으로 사망한다. 주지사 얼 워런은 조셉 노랜드와의 인연[7]으로 당시 유럽에서 군 복무 중이던 윌리엄 노랜드를 상원의원에 임명한다.[8] 1946년 중간선거에서 노랜드는 정규선거[9], 보궐선거[10] 모두 민주당 후보를 꺾고 승리한다. 1952년 선거에서는 공화당, 민주당 경선에서 모두 승리해[11] 본선에서는 88%의 득표율를 받아 압승한다.

고립주의진보주의자인 존슨과 달리, 노랜드는 확고한 국제주의보수주의자다. 반공주의매파로서 포모사의 상원의원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친중화민국 성향이어서 해리 S. 트루먼과 민주당이 중국을 잃었다고 비판했으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대중공정책도 너무 온건하다고 생각했다.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강경히 반대해서 로버트 A. 태프트와도 긴밀한 동맹 관계였다. 1953년 로버트 태프트가 사망하자 공화당 연방상원 원내대표 자리를 이어받는다.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인 린든 B. 존슨과는 1957년 민권법의 조항을 존슨이 후퇴시키자 반발했지만 전반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조지프 매카시에 대한 상원 공식 비난 결의안이 올라왔을 때, 노랜드는 매카시 비난에 반대표를 던진 22명의 상원의원 중 1명이었다.[12] 상원의원 임기 중 내한한 적이 있다.#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태프트의 부통령 후보 제안에도 불구하고 같은 주 출신의 얼 워런을 지지했다. 하지만 리처드 닉슨의 농간[13]으로 결국 부통령 후보 자리를 놓친다. 닉슨의 당내 정적이 된 노랜드는 닉슨의 불법 정치자금 의혹이 터졌을 때 대체 러닝메이트로 고려되었지만 체커스 연설[14]로 닉슨이 의혹을 잠재우자 없던 일이 된다.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고려했지만 아이젠하워가 건강 문제를 해결하자 그를 지지하고 불출마했다. 닉슨은 캘리포니아 공화당 관리에서 노랜드와 계속 갈등했고 이는 1958년 노랜드가 무리수를 두는 이유가 된다.

2.3. 주지사 도전과 실패

노랜드는 1958년 중간선거에서 상원의원 재선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급작스럽게 주지사 출마로 선회했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워런 주지사 시기 부지사였던 굿윈 나이트(Goodwin Knight)로 자유주의 공화당원이었다. 상원의원보다 주지사가 주의 대의원 확보에 유리해 1960년 대선에서 닉슨의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을 막기 유리할 거라고 생각한 노랜드는 닉슨과 함께 나이트에게 노랜드는 주지사,나이트는 상원으로 출마할 선거를 교환하자고 강요했다.# 나이트는 주지사 재선을 원했지만 당내의 압박으로 "자리 교환"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런 밀실 거래에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게다가 1958년 중간선거는 공화당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노랜드의 반노조 입장 때문에 노조 표가 민주당에게 결집했다. 결국 노랜드는 고작 40%를 받아 60%를 받은 민주당 팻 브라운(Pat Brown)에게 대패한다.[15] 노랜드에게 주지사 후보 자리를 내준 나이트도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밀려 낙선한다.[16]

주지사 낙선 후에는 선출직 도전을 접고 오클랜드 트리뷴 운영에 집중한다.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에서는 온건파 넬슨 록펠러 대신 보수파 배리 골드워터의 캘리포니아 선거운동 의장을 맡아 골드워터의 캘리포니아 경선 승리에 기여했다.[17] 아버지가 1966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오클랜드 트리뷴의 소유를 넘겨받는다. 오클랜드 트리뷴은 그의 소유 아래서 흑표당을 비판하고 오클랜드의 인프라 발전에 힘썼다. 닉슨과는 역시 화해하지 않아서 닉슨이 1968년 대선 선거운동 중 그의 오클랜드 트리뷴 빌딩을 보고 "개자식!"이라고 욕하기도 했고 노랜드는 경선에서 공화당 대선후보로 로널드 레이건을 지지했다.

2.4. 사망

정계 원로라는 신분에 개인 소유 신문사까지 있었지만, 그의 사생활과 재정 상태는 좋지 못했다. 노랜드 본인은 상원에서 보여준 무뚝뚝하고 정직한 모습과 달리, 라스베이거스를 틈만 나면 다녀오는 도박 중독에 그의 불륜녀였던[18] 앤 딕슨은 사치스러운 소비를 즐겼다. 신문사도 적자가 늘고 그만큼 재정적으로 쪼들리던 그는 1974년 2월 21일 오클랜드 트리뷴 창립 100주년 기념 연설을 한 지 2일만인 1974년 2월 23일에 빚쟁이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한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32 미국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 선거 캘리포니아 14구

- (-%) 당선 (1위) 초선
1934 미국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 선거 캘리포니아 16구 94,236 (51.67%)
1946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캘리포니아 425,273 (74.31%)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428,067 (54.10%) 재선
1952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3,982,448 (87.79%) 3선[19]
1958 미국 주지사 선거 2,110,911 (40.16%) 낙선 (2위)

4. 같이 보기


[1] 1945.8.6 임기 중 사망[2] 6피트 1인치,200파운드[3] 연방하원의원(1903-1915)[4] Joseph R. Knowland[5] 조셉 노랜드는 1914년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3위로 낙선한다.[6] 공화당의 상징 동물인 코끼리가 캘리포니아 주기를 들고 있다.[7] 조셉 노랜드의 오클랜드 트리뷴이 워런의 당선에 기여했다.[8] 주지사에게 임명된 상원의원은 보궐선거 전까지로 임기가 제한된다.[9] 임기 1947-1953[10] 임기 1946-1947[11] 당시 캘리포니아주에서는 타 정당 예비선거에도 출마가 가능했다.[12] 에버렛 더크슨,배리 골드워터도 비난 결의안에 반대했고, 존 F. 케네디는 병원에 있느라 기권했다.[13] 닉슨은 앞에서는 워런을 지지했으나 뒤에서는 대의원들이 아이젠하워를 찍게 공작했다. 노랜드는 이것을 배신이라고 여겼다.[14] 이때 닉슨이 노랜드에게 기대서 울기도 했다.#[15] 팻 브라운은 4년 뒤 리처드 닉슨을 꺾고 승승장구하다가 1966년 중간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한다. 4선 캘리포니아 주지사 제리 브라운이 팻 브라운의 아들이다.[16] 나이트는 1962년 중간선거에서 주지사에 재출마하려 했지만 간염 때문에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중도 사퇴한다.[17] 골드워터는 노랜드를 원칙주의적 보수주의자라고 고평가했다.[18] 1972년 결혼[19]

경선 승리로 단일 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