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3:32:06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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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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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F. 케네디 선거운동 ·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 민주당 전당대회 폭력 사건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8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파일: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
험프리 191인 (35.5%)
(55.9%) 301인 닉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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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 5일
1968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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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일시 11월 5일 5시 ~ 11월 6일 6시 (UTC)
투표율 60.9%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미국)|
민주당
]]
[[공화당(미국)|
공화당
]]
[[미국 독립당|
미국 독립당
]]
선거인단
191명 301명 46명[1]
전국 득표
42.7%
31,271,839표
43.4%
31,783,783표
13.5%
9,901,118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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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IXONAGNEW1968.jpg
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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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정당 별 상황4. 최종 후보
4.1. 민주당: 휴버트 험프리4.2. 공화당: 리처드 닉슨4.3. 미국 독립당: 조지 월리스
5. 선거 진행
5.1. 초기 닉슨의 우세5.2. 조지 월리스의 부상5.3. 휴버트 험프리의 10월 서프라이즈5.4. 닉슨의 평화협상 사보타주
6. 선거 결과
6.1. 지역별 결과6.2. 투표자 집단 별 선거 결과
7. 평가 및 탐구
7.1. 68혁명의 실패7.2. 남부전략의 시작7.3. 조지 월리스가 선거인단 과반수를 저지했다면?7.4. 로버트 F.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8. 매체에서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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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8년 미국에서 제37대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 후보와 스피로 애그뉴 후보가 유효표의 43.4%, 선거인단의 301인을 확보하여 당선되었다. 선거인단 격차는 컸지만 닉슨과 험프리 양 후보 격차는 불과 0.7%p에 불과해 미국 역사상 가장 접전인 선거 중 하나였다.

2. 배경

1964년 선거는 민주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대공황 직후의 선거보다도 큰 격차로 패배한 공화당은 충격적인 상황에 빠졌다. 이 선거의 패배로 공화당은 존립의 위기에 서기도 했으나, 리처드 닉슨이 구원 투수로 나섰다. 배리 골드워터의 참패와 넬슨 록펠러의 재혼 스캔들은 닉슨의 가장 큰 경쟁자 두명을 추락시켰으며 닉슨은 1965년부터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권주자 선두 자리를 지키게 된다.

또한 베트남 전쟁이 고조되고 인종 폭동이 전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린든 B. 존슨의 지지율을 하락시켰으며, 그 결과 1966년 중간선거에서는 예상과 달리 민주당이 크게 패배하고 만다. 상원은 공화당이 3석을 추가로 얻었고 하원은 47석을 추가 획득했다. 특히 공화당은 백인 블루칼라들과 농부들이 많이 거주하던 대평원 및 중서부 지역의 지역구들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또한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메릴랜드 주지사에 각각 로널드 레이건스피로 애그뉴[2]라는 보수 강경파 인사들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1964년 민권법 제정과 맞물려, 재건 시대 이후 처음으로 아칸소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연방하원 의석을, 아칸소[3]플로리다[4]에서 공화당 주지사가 당선되어 남부의 민주당 조직력도 비록 조금씩이지만 흔들리기 시작되었다.
폭도에 의해 불타는 워싱턴 D.C.의 모습
워싱턴 정계 뿐 아니라 미국 전체는 변동을 맞이하고 있었다. 비틀즈, 롤링 스톤스를 위시로 한 락밴드들은 음악적 영향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 반문화 운동을 주도하는 밴드로 거듭나고 있었다. 청년들 사이에서는 LSD를 포함한 마약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고 인문학적으로는 미셸 푸코, 루이 알튀세르,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노엄 촘스키 등 급진 사상가들의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5] 1967년에는 히피 문화의 중심지였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랑의 여름이라는 68혁명의 전조 격인 운동이 있었다. 또한 베트남 전쟁의 상황이 고조된 것을 넘어 장기적인 소모전 국면으로 가면서, 미국 청년들에게 린든 B. 존슨에 대한 혐오감이 심어지게 되었고, 린든 B. 존슨 행정부을 위시로 하여 보수적인 문화를 강요하는 기성 세대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거부하는 유행이 번졌다. 이렇듯 상황이 심상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의 주요 정치인들은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1968년 1~3월부터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독일,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에 이어 미국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 반문화, 혁명적 신좌파를 내세운 68혁명이 터지게 된다.

68혁명은 미국의 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현재 68혁명은 여러 면에서 다각적으로 평가받지만 이 당시 기성 세대들에게 68혁명은 공포 그 자체였고, 이로 인해서 양당 지지층 구성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1960년대 중반 무렵까지 백인 블루칼라 노조원들은 고용안정과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민주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고, 농부들 또한 대다수가 자영농이었을지언정 농업보조금 지급에 더 관대한 민주당을 지지하는 경우도 상당했다. 하지만 동시에 보수적인 사회가치관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서 젊은층 사이에서 한창 볼던 성해방 바람과 막 유행하던 장발록 음악을 대단히 싫어했었으며, 결국에는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급속히 보수화 되어갔다.

반면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의 대학생들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보수적인 유권자 집단에 속해있었다.[6] 하지만 대학진학률이 증가하면서 서민 출신의 자수성가한 대학생들이 대거 진학하게 되었고, 이러한 대학생 집단의 사회경제적 구성의 변화는 전반적인 정치성향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또 억압적인 학교분위기에 질린 대학생들이 문화적 자유주의에 호응하고, 소수인종 또한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급속히 진보화되었던 것이었다.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눌려있던 대학생들과 소수인종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동을 일으켜, 디트로이트,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 인구가 많은 대도시는 모두 폭동의 물결에 휩쓸렸고 방화, 약탈, 약물 투약, 성범죄가 잇따랐다. 경찰은 폭동적 시위진압으로 대학생들과 흑인들을 무차별 폭행해 유치장에 넣었고 밤은 고사하고 대낮에조차 산책하는데 목숨 걸어야하는 상황이 닥칠 정도로 치안이 악화된다. 심지어 수도 워싱턴 D.C.에서까지 폭동이 일어나 시위대가 링컨 기념관, 오벨리스크, 국회의사당 등 주요 워싱턴 D.C.의 건물을 습격하기도 했고 워싱턴 경찰은 국회의원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완전무장한 경찰을 국회의사당에 배치시켜야했다.[7]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은 평화와 안정, 법과 질서를 원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흑인과 대학생, 일부 여성, 진보층은 더 많은 사회적인 정의를 원하고 있었다. 이렇듯 1968년 미국 대선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치러진 대선으로 평가받았다.

3. 정당 별 상황

3.1. 민주당

3.1.1. 존슨의 탈락과 유진 매카시 돌풍

민주당에서는 당초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재선이 가장 유력했다. 존슨 대통령은 이미 재선 대통령이었지만 초선 임기는 존 F. 케네디의 임기를 계승한 것이었으므로 3선이 가능했다. 여론조사에서도 1966년 2월 존슨의 대통령 재도전을 지지하는 여론이 52%였던 반면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하는 여론은 27%에 그쳤다. 1966년, 로버트 케네디는 차기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에 사실상 존슨이 다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이는 1966년 중간선거의 패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로버트 케네디가 출마하지 않는 이상 존슨의 재지명은 거의 확실했다.
파일:merlin_60337219_1275bf5e-2386-4aea-b711-e10f43a57209-superJumbo.jpg
연설하고 있는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8]
존슨의 유일한 경쟁자는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이었다. 유진 매카시는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는 등 당 내에서 유독 비둘기파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고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했는데, 자연스럽게 구도는 베트남 전쟁 찬성파인 존슨 대 반대파인 매카시의 양강 구도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당의 지지, 노조의 지지, 현직 프리미엄을 한꺼번에 가진 존슨과, 불과 재선의 무명 상원의원이었던 매카시는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1968년 1월 7일 여론조사에서 존슨이 74.3%의 지지를 기록한 반면, 매카시는 16.7%의 지지를 기록, 사실상 대등한 상대라고 부를수도 없었다.

그러나 1968년 1월 30일 일어난 구정 공세는 존슨 대통령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의 종결이 임박하였다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정작 그 직후 베트콩들이 대대적으로 남베트남을 공격하여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마저 베트콩에게 일시 함락되는 모습이 생중계되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급락했다. 뒤이어 일어난 68혁명으로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인 진보층의 베트남 전쟁 수행 지지율에 대한 여론은 아주 나빠졌다.

물론 구정공세 이후로도 표면상으로 존슨의 지지율은 높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1968년 3월 12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놀랍게도 유진 매카시가 엄청난 선전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존슨은 49.62%, 매카시는 41.94%를 득표했다. 비록 매카시의 패배였으나 여론조사에서 매카시가 보인 엄청난 열세에 비하면 이는 놀라운 선전이었다. 무엇보다, 현역 대통령이 경선에서 이렇게 낮은 지지를 보인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위스콘신 프라이머리를 앞두고 존슨 대통령의 지지율이 불과 12%밖에 나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충격을 받은 린든 B. 존슨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직후인 3월 31일, 대권 재도전을 포기한다.[9] 린든 B. 존슨은 자신의 측근이자 부통령인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을 대선 후보로 지지한다.

이로서 경선은 반전파의 유진 매카시 대 찬전파의 휴버트 험프리로 재편성되었다. 두 미네소타 출신 정치인의 대결이었다.
파일:Eugene_McCarthy_1968.jpg
매카시의 선거운동 로고

3.1.2. 로버트 F. 케네디의 등장, 그리고 암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F. 케네디/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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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로버트 F. 케네디는 1968년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일찌감치 그는 1966년 차기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린든 B. 존슨의 압도적인 당권 장악력으로 인해 승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적인 지지도는 높았으나,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경선은 당원의 지지를 파악하는 요식 행위였고 실제로는 당의 실세[10]들의 영향을 받는 대의원단이 사실상 대선 후보를 결정했다. 이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가 경선에서 아무리 압도적인 득표를 얻어도 존슨이 출마하는 이상은 후보 지명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3월 12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존슨이 당하는 것을 본 로버트 케네디는 마음을 바꿔,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직후인 3월 16일 기존의 입장을 180도 뒤집고 차기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유진 매카시 캠프는 경악했다. 매카시 캠프의 한 관계자는 "크리스마스 아침날에 막 일어났는데 누가 선물을 다 훔쳐간 셈"이라며 로버트 케네디의 기회주의적인 행보에 분통을 터트렸다.
파일:Bobby 1968 1.webp
흑인 거주지에서 유세하고 있는 로버트 F. 케네디
로버트 케네디의 핵심 지지층은 흑인들이었다. 반면, 유진 매카시는 지식인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기회주의자 논란이 있었던데다, 백인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핸디캡이 있었다. 그러나 1968년 5월 7일, 패배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인디애나 주 프라이머리에서 42%를 얻어 존슨과 험프리의 지지를 받은 로저 브래니진(31%)과[11] 매카시(27%)를 모두 큰 차이로 꺾고 1위로 올라섰다. 1968년 4월 마틴 루터킹의 사망은 로버트 케네디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한때 마이너리티 집단이었던 아일랜드계에서 대통령을 냈듯 언젠가 당신 흑인들도 여러분들의 대통령을 갖게 될것"이라는 연설을 해 흑인들로부터 광적인 지지를 받았고 열성 지지자들에 의해 옷까지 찢겨가며 유세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두가지의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혔다. 첫번째로 로버트 케네디가 모든 경선에서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실제 지명을 받았을 확률은 낮았다는 점이다. 상술했다시피 경선 결과보다 간선 대의원이 더 큰 영향을 미쳤는데 로버트 케네디를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극혐했던 존슨이 케네디를 놔둘 리 없었다. 두번째로 안그래도 부족한 경선 대의원단이 유진 매카시에 의해 분열되고 있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 매카시의 지지율이 회복된 반면 케네디의 지지율은 떨어졌다. 로버트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에 찬성했으나 이후 월남전 여론이 나빠지자 입장을 바꿨고 이로 인하여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배수진을 쳐 캘리포니아 주 프라이머리에서 매카시에게 밀리면 경선 후보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로버트 케네디는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부진하긴 했으나, 열성적인 유세로 46% 대 42%로 매카시를 꺾고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로버트 케네디가 캘리포니아에서 승리를 확인한 직후 암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유력 주자를 잃은 민주당은 혼란에 빠졌고 민주당 지지자들과 흑인들은 슬픔에 빠졌다. 로버트 케네디의 지지자들은 그의 동생 테드 케네디나 로버트 케네디의 측근 조지 맥거번을 대타 후보로 내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고 테드 케네디는 경선 참여를 거부했으며 맥거번은 뒤늦게 경선에 참여했으나 대중의 지지를 얻기에는 시간이 형편 없이 부족했다. 이로 인하여 경선이 종료된 시점에서 매카시는 38.7%, 로버트 케네디는 30.6%를 얻은 것으로 나타나며, 매카시가 남은 경선 일정에서 승리하여 우위를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3.1.3. 전당대회의 폭력

파일:1968 DNC 2.webp
아수라장이 된 민주당 전당대회
1968년 7월 6일 경선 종료 시점에서 유진 매카시는 310.5명의 대의원을 얻었고 로버트 케네디는 239.5명을 얻었다. 휴버트 험프리는 중간 중간의 간선제에 가까운 경선에서 승리해 매카시보다 아주 약간 많은 대의원을 확보했고 그 누구도 당선에 필요한 절대적인 득표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험프리는 사실상 경선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 득표에서는 2% 정도만을 얻어 39%의 매카시에 비해 형편 없이 밀렸다. 여론조사는 험프리 지지 51%, 매카시 지지 39%로 전쟁 찬성파이자 존슨의 지지를 받는 휴버트 험프리와 전쟁 반대파 유진 매카시가 팽팽하게 맞붙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경선으로 선출되지 않는 간선 대의원들이 린든 B. 존슨의 영향으로 사실상 모두 험프리를 지지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좌익 대학생들의 여론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험프리가 경선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 지명권을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고[12] 격분한 대학생 시위대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시카고 전당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시카고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경찰서, 시청, 전당대회장 등 시카고의 거의 모든 시설들이 성난 대학생들에 의해 점거되었으며 당황한 데일리 시카고 시장은 경찰을 불러 이들을 진압하게 했다.

전당대회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전당대회장에 "Happy Days are Here Again"[13]이 울려퍼지는 동안 유진 매카시와 조지 맥거번을 지지하는 대학생들은 경찰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고 전당대회장은 피와 최루가스로 물들었다. 대표적인 반전파이자 맥거번 지지자였던 에이브러햄 리비코프(Abraham Ribicoff)는 이러한 경찰의 행태를 '게슈타포 잔술'이라며 비판했다.[14] 또한, 경찰이 취재중이던 기자 댄 래더에게 폭력을 가하자 당대 최고의 뉴스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가 격양된 목소리로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15] 전당대회 대의원 표결 결과, 휴버트 험프리는 1759.25표를 얻었고 유진 매카시는 601표, 조지 맥거번은 146.5표에 불과했다. 부통령을 뽑는 표결에서도 험프리의 측근 중 하나였던 에드먼드 머스키가 1942.5표를 얻어 압승한다. 대학생 시위대들은 후보직 수락 연설을 하는 험프리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이 모습은 언론 카메라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 되었고 험프리의 지지율은 형편 없이 떨어졌다.

3.2. 공화당

파일:NIXON 1968 2.jpg
경선 유세에서 환호하며 V자 사인을 긋고 있는 닉슨
민주당의 혼란에 비해 공화당은 리처드 닉슨이 1965년부터 꾸준한 선두를 보이며 사실상 닉슨으로 여론이 일치단결되어있었다. 몇명의 경쟁자가 있었으나 이들은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차례 차례 스러져갔다.

닉슨에 처음으로 대항한 것은 미시간 주지사이자 당내 온건파를 대변한 조지 W. 롬니였다. 롬니가 내세운 표어는 '더 나은 미국을 위하여(For a Better America)'와 '68년을 위한 최고의 선택(Great for '68)'이었다. 밋 롬니의 아버지이기도 한 조지 롬니는 유진 매카시의 공화당 버전으로 간주되었고, 베트남 전쟁 추가 개입을 반대했으며, 상대적으로 중도적인 정책을 내세웠다. 1966년 11월의 한 조사에서 롬니는 39%의 지지를 얻어 31%의 닉슨을 제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롬니는 그가 베트남 전쟁을 지지하도록 외교관과 군인에 의해 "세뇌"되었다고 말하는 말실수를 해 지지율이 떨어졌다. 또 닉슨은 롬니가 멕시코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생적 미국인이 아닐 수 있는데 그렇다면 대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롬니의 지지율은 결국 떨어졌고 그는 프론트러너 자리에서 탈락한다.

두번째 경쟁자는 넬슨 록펠러 뉴욕 주지사였다. 롬니, 에드워드 브룩을 비롯한 당내 온건파의 지지를 받은 록펠러 주지사는 닉슨의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4월 30일, 록펠러는 매사추세츠 경선에서 닉슨을 꺾었지만, 결국 1964년의 재혼 스캔들이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외도가 나 부인을 버리고 연하의 여비서와 결혼한 넬슨 록펠러의 여성 문제는 그의 지지율 상승을 어렵게 만들었다. 록펠러는 매사추세츠 주의 경선을 제외한 나머지 경선에서 모두 부진했고 닉슨이 다시 우위를 잡았다.

마지막 경쟁자는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다. 롬니, 록펠러와 달리 레이건은 보수강경파였고 공화당 강성 지지층에게 지지를 받아 여러 경선에서 승리했다. 그는 대중 득표에서 닉슨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16] 하지만 공화당 지도부와 중진 의원들은 레이건이 너무 보수적이기 때문에 당선이 어렵다고 생각했고 획득 대의원단 수도 닉슨에 비해 모자랐다.
파일:록펠러레이건.jpg
1967년 10월 20일 타임지 표지
그러나 이념으로는 공화당 내에서 양끝인 록펠러와 레이건은 각각 닉슨의 온건파, 보수파 대의원을 잠식해서 1차 투표에서 닉슨의 지명을 막으려고 연대했다. 더 나아가 록펠러 대통령/레이건 부통령 티켓 혹은 그 반대도 논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전당대회에서 후보 지명에 필요한 과반을 근소하게 넘는 대의원을 확보한다.

결국, 닉슨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다. 이후 닉슨은 부통령 후보로 존 린지 뉴욕시장, 레이 셰이퍼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로버트 핀치 캘리포니아 부지사, 찰스 퍼시 일리노이 연방상원의원 등을 고려했으나, 이들은 모두 록펠러 공화당원 ~ 온건파 공화당원이었기에 당내 보수파와 남부인[17]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전국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법과 질서" 주장으로 보수파에게 호소력이 있으면서도 온건파도 소외시키지 않는 현직 메릴랜드 주지사 스피로 T. 애그뉴[18]가 최종적으로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4. 최종 후보

4.1. 민주당: 휴버트 험프리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험프리 머스키 1968.jpg
{{{#!wiki style="margin: -5px -10px"
에드먼드 식스터스 머스키
메인 주 연방 상원의원
}}}
파일:Humphrey_Muskie_'64.svg
험프리 후보의 후보직 승낙 연설
Some People Talk Change, Others Cause It
어떤 사람들은 변화를 말하지만, 누군가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1968 험프리-머스키 티켓 슬로건
1968년 8월 29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휴버트 험프리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휴버트 험프리는 메인 주의 상원의원 에드먼드 머스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낮은 지지율과 전당대회에서의 폭력 사건으로 인하여 선거전 초반 휴버트 험프리는 리처드 닉슨에게 큰 차이로 뒤진 채 캠페인을 시작한다.

휴버트 험프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매우 미묘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말을 피하며 위대한 사회 정책 지속과 빈곤과의 전쟁 유지를 지지했는데 이는 험프리가 인기 없는 대통령 린든 B. 존슨의 연장선상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도록 했다. 험프리는 뒤늦게 "베트남 전쟁 폭격 반대"를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닉슨과 달리 단계적 철수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휴전을 통해 전쟁을 잠깐 중지시킬 수 있다는 애매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험프리의 애매모호한 입장은 험프리의 지지율을 계속 떨어지게 만들었다.

4.2. 공화당: 리처드 닉슨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닉슨 애그뉴 1968.jpg
{{{#!wiki style="margin: -5px -10px"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
제36대 미국 부통령
스피로 시어도어 애그뉴
제55대 메릴랜드 주지사
}}}
파일:Nixon_Agnew_1968_campaign_logo.svg
닉슨 후보의 후보직 승낙 연설
Nixon's the One!
닉슨이 바로 적임자다!

1968 닉슨-애그뉴 티켓 슬로건
1968년 8월 8일 마이애미 비치에서 치러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닉슨은 록펠러, 레이건, 롬니 등의 경쟁자를 재치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강경보수파 메릴랜드 주지사 스피로 애그뉴는 부통령 후보자로 지명된다. 리처드 닉슨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냈으며 196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인물이었으며, 민주당의 분열상과 전당대회의 혼란에 대비되어 선거전 초반 험프리에 비해 큰 우위를 보인다.

리처드 닉슨은 온건보수파와 강경보수파를 아우르는 후보로, 버싱(Busing) 정책[19]흑표당 등 과격한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는 반대했으나 민권법 통과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리처드 닉슨은 68혁명으로 무너진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울 것이며, 린든 B. 존슨이나 휴버트 험프리와 달리 베트남 전쟁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해 "명예로운 평화(Peace with Honor)"를 이룰 것이라고 공약했다.

4.3. 미국 독립당: 조지 월리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미국독립당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월리스 르메이 1968.jpg
{{{#!wiki style="margin: -5px -10px"
조지 콜리 월리스 주니어
제45대 앨라배마 주지사
커티스 에머슨 르메이
미국 공군참모총장
}}}
파일:Wallace_Lemay_bumper_sticker.svg
월리스 후보의 털사 유세 연설
Stand Up for America
미국을 위해 궐기하자

1968 월리스-르메이 티켓 슬로건
1968년 대선에서 두각을 드러낸 또다른 후보자는 조지 월리스 앨러배마 주지사였다. 조지 월리스는 1964년 민주당 경선에 출마해 메릴랜드 주 프라이머리에서 놀라운 성과를 드러낸 바 있었다. 1963~1968년 사이 이루어진 많은 민권 조치는 조지 월리스를 비롯한 극우적인 남부 민주당원들을 격노하게 했고 특히 휴버트 험프리의 민주당 후보 지명은 그들에게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당선이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휴버트 험프리는 린든 B. 존슨의 측근이었을 뿐더러 1948년부터 연방민권법의 필요성을 주장한 대표 "민권 파이터"였다. 존슨 행정부에서 이행된 여러 민권 법안들도 험프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았다. 험프리가 아니더라도, 남부 민주당원들에게는 유진 매카시, 로버트 F. 케네디 모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1968년 2월 조지 월리스는 일찌감치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였으며 1968년 8월 대선 후보가 험프리로 확정되자 독자 출마를 확정하고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조지 월리스는 1940년대 GATT 체결로 인하여 미국의 공업이 쇠퇴하고 있으며 신흥 공업 국가들에게 공장을 빼앗기고 있는데도 케네디와 존슨, 닉슨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가 미국 노동자를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조지 월리스의 보호무역주의 공약은 많은 노동조합원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전미 최대의 노조인 AFL-CIO는 노동조합원들의 월리스 지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실수를 거듭해 더 많은 노동자들이 월리스를 지지하도록 하였다. 월리스의 또다른 지지층은 백인 중산층이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법과 질서였다. 1968년 68혁명으로 인해 악화된 치안을 바로잡아야한다는 공감대가 미국 중산층들에게 형성되었고, 당시 보수 미디어들은 치안 악화의 주범으로 폭력적인 흑인 민권운동을 지목했으므로 인종차별주의자 후보인 조지 월리스가 미국 중산층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은 매우 당연했다.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 조지 월리스는 군대를 철수할게 아니라 오히려 늘려서 북베트남과 베트공을 굴복시켜야한다고 주장하였다.[20]

조지 월리스가 꼽은 부통령 후보자는 커티스 르메이였다. 커티스 르메이는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대규모 폭격을 지시한 공군참모총장이다. 또다른 후보군으로는 할랜드 샌더스(...), 존 에드거 후버, 존 웨인(...), 에즈라 태프트 벤슨[21], 해피 챈들러 등이 거론되었다. 이 중 관심을 표한 것은 벤슨과 르메이였고 후버는 편지를 받았지만 무시했다.[22] 처음에 조지 월리스는 해피 챈들러를 부통령 후보로 고려했으나, 그가 재키 로빈슨의 브루클린 다저스 입단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알자 부통령 후보군에서 탈락시켰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은 모르몬교도인 것이 나타나 탈락했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커티스 르메이였다. 커티스 르메이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강경한 입장으로 월리스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커티스 르메이는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로 인식될까봐 지명을 거부하려 했으나 월리스가 진지하게 설득하여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5. 선거 진행

파일:1968 대선 여론조사.png

5.1. 초기 닉슨의 우세

리처드 닉슨의 선거 광고 - "Convention"[23]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는 휴버트 험프리가 여론조사에서 리처드 닉슨과 경합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1968년 8월 민주당의 시카고 전당대회는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험프리는 단숨에 30%대 후반의 지지율에서 20%대 후반으로 10%p에 가까운 지지율 하락을 겪었다. 8월 전당대회 직후 갤럽의 여론조사는 닉슨 45%, 험프리 29%, 월리스 18%로 닉슨과 험프리의 지지율 격차가 19%p인 반면 월리스와 험프리의 격차가 9%p밖에 되지 않아, 사실상 대선이 2위 싸움이 되었음을 시사하였다.

닉슨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에 투표했지만 1964년 민권법으로 인해 공화당으로 지지 정당을 바꾸었고 1966년 중간선거에서 이미 한번 그 위력을 입증한 바 있는 백인 블루칼라 중산층들에게 구애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닉슨은 민권법에 대해 불만이 많은 남부 지지층을 타겟팅하여 비(非) 딥사우스, 즉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켄터키, 플로리다 등의 남부 주에서 승리하고자 하였고, 공화당 소속이었음에도 일부 진보적인 판결을 내린[24] 얼 워런 대법원장을 비판했다. 그러나 닉슨은 동시에 잠재적인 온건파 유권자들을 포용하려는 제스처도 취했다. 그는 최초의 흑인 상원의원인 에드워드 브룩[25]과 함께 유세를 진행하였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정부 세금 혜택을 부여하겠다고 하였다.
파일:NIXON 1968.jpg
리처드 닉슨의 오픈카 유세
닉슨의 또다른 핵심 공약은 베트남이었다. 닉슨은 베트남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으므로 베트남 전쟁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정하지 못한 휴버트 험프리에 비해 우위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리처드 닉슨은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하겠다는 주장을 해 일부 대학생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물론 이는 모병제가 시행된다면 고소득층 대학생들이 합법적으로 군대를 뺄 수 있게되므로 반전 좌익 운동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닉슨의 철저한 계산 하에 제시된 공약이었지만, 닉슨은 안보, 외교, 경제 등 거의 모든 사안에 있어 험프리에 앞서나갔다.

험프리는 "행복의 정치"를 슬로건으로 하여 당장은 여론조사에서 뒤지더라도 해리 S. 트루먼과 마찬가지로 깜짝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는 닉슨에 비해 우위를 보이는 것이 얼마 없었으므로 리처드 닉슨에 대한 네거티브 선전을 거듭했으나 오히려 역효과만을 발휘했고 1968년 9월 말까지 험프리의 열세가 지속된다.[26]

5.2. 조지 월리스의 부상

조지 월리스의 CBS 인터뷰
8월 전당대회 이후 부상한 또다른 세력은 조지 월리스남부 민주당원 세력이었다. 존슨은 텍사스 출신이면서 뉴딜을 계승하였으므로 전통적인 뉴딜연합 지지층을 기반으로 다층적인 지지 기반을 형성했다. 반면, 존슨의 후계자인 휴버트 험프리는 강경한 민권파이자 북부 미네소타 주 출신, 거기다 베트남 전쟁 찬성파로 지지 기반이 매우 약했으므로 존슨의 기존 지지층은 험프리[27], 매카시-케네디[28], 월리스[29]로 쪼개졌다. 매카시가 경선에서 미끄러지고 험프리가 전당대회에서 곤혹을 겪자 이중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조지 월리스였다. 조지 월리스는 민주당의 기존 핵심 지지층이었던 남부 농민과 블루칼라 중산층들에게 어필하며 지지율을 급상승시켰다.

조지 월리스의 선거 전략은 그 누구도 과반의 선거인단을 확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1824년의 선거 이후, 양당제 체제인 미국에서는 모든 후보가 과반의 선거인단을 얻어 당선되었으나, 만약 과반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하원에서 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한다. 이 법에 따르면 한 주는 한 표의 투표권을 가지며 각 주 하원의원의 투표를 통해 어떤 주가 어떤 후보를 지지할지를 결정한다. 월리스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26개 주를, 공화당은 19개 주를 통제하고 있었고 5개 주는 양당의 하원의원 수가 동일해서 누구를 뽑을지 알 수 없었는데 민주당의 26개 주 중 13개 주가 남부 주였다. 남부에서 민주당은 버지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를 제외한 모든 주를 통제했고 월리스는 이를 통해 험프리를 효과적으로 압박하는 동시에 닉슨이 승리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또한, 중서부 주에서 월리스가 승리할 확률은 낮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중서부 주는 경합주였으므로 일리노이,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등 노동조합원들이 다수 거주하는 중서부 공단 지역에서 충분한 표를 확보하는 것이 월리스의 또다른 전략이었다. 험프리와 닉슨 모두 자신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중서부에 집중하는 동안, 월리스는 손쉽게 남부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어 충분한 선거인단을 쓸어간다는 것이었다.

월리스의 선거전은 68혁명의 혼란 속에 높은 지지를 얻어 1968년 9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닉슨 43%, 험프리 28%, 월리스 21%로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조지 월리스의 캠페인은 1968년 9월 정점을 찍은 후 점차 쇠락했다. 커티스 르메이를 부통령 후보로 택했던 탓이었다. 커티스 르메이는 "나는 매캐한 숯덩이가 된 일본인을 위해 울지 않습니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리겠다" 등의 망언으로 당시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며[30] 특히 베트남 전쟁에서는 핵무기를 쏴서 공산주의자들을 굴복시켜야한다는 극우적인 수사로 대중의 기피를 샀다. 언론은 르메이와 월리스를 폭탄 형제들이라고 불렀고 대중 사이에서는 월리스가 당선된다면 르메이 부통령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것이라는 현실적인 위협이 대두되었다. 결국 월리스의 지지율은 어마어마하게 떨어졌고 본래 우세를 점했던 노스/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주에서 닉슨에 밀린 것은 물론 북부에서의 지지율도 13%에서 8%로 반토막이 났다. 여성 지지층들도 월리스에게서 등을 돌렸고[31] 월리스의 지지율은 21% 고점을 찍은 후 1968년 10월 경 15%대로 다시 내려갔다.

5.3. 휴버트 험프리의 10월 서프라이즈

휴버트 험프리는 8월 전당대회의 충격으로 닉슨에 비해 20%p 가까이 여론조사에서 뒤진 채 캠페인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험프리에게는 핵심 지지층이 부족했다. 보수적인 중산층을 끌어들인 닉슨이나 남부 노동자, 농민을 타겟팅한 월리스에 비해 험프리의 지지층은 매우 분산되어있었고 진보를 지지해야할 좌익 운동권 세력은 험프리를 가장 큰 적으로 보았다. 험프리가 연설하는 곳마다 반전 시위대의 야유가 뒤따랐다.
파일:HHH LBJ.jpg
휴버트 험프리와 린든 B. 존슨
설상가상으로 린든 B. 존슨 대통령도 험프리를 돕지 않았다. 존슨이 왜 험프리를 돕지 않았냐에 대해서는 입장이 갈린다. 어떤 주장에 의하면 존슨은 30%대 초반에 불과했던 자신의 지지율을 의식해 험프리를 지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험프리를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반대로 존슨의 전기 작가였던 로버트 댈럭(Robert Dallek)은 존슨이 험프리를 불신했으며 그가 당선되면 곧바로 베트남 전쟁이 종결될 것을 두려워해 의도적으로 그의 캠페인을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명확한 사실은 존슨이 10월까지 험프리를 명확하게 지지하지 않았으며, 9월 10일에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해 험프리 캠페인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는 점이다.

9월에 접어들자, 험프리의 목표는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패배를 당하지 않을만큼의 높은 표를 얻고 대선에서 2위의 결과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험프리의 당선은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그러나 9월 중순 이후 판세는 점차 험프리에게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정치 초보 스피로 애그뉴는 말실수를 거듭해 리처드 닉슨을 돕지 않은 반면[32] 능수능란한 정치인 에드먼드 머스키는 훌륭한 어조로 닉슨을 공격해 지지율을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일부 반전 시위대까지 포용했다. 조지 월리스의 지지층은 커티스 르메이 부통령 후보 지명 이후 떨어져나갔고 휴버트 험프리의 낮은 지지율에 우려하여 닉슨의 어부지리 당선을 막기 위해 험프리로 결집했다. 흑인 지지층 또한 닉슨의 남부전략과 월리스의 노골적인 인종주의에 반발해 확고한 민권 지지 정치인인 험프리에게 결집했다.[33]
휴버트 험프리의 선거 광고 - "Ahead of His Time"
9월 30일은 캠페인의 전환점이었다. 휴버트 험프리는 솔트레이크 시티 유세에서 북베트남 폭격 반대를 공약으로 내걸면서 반전좌파의 지지세를 규합했다. 이 발언은 너무나 효과적이라서 즉시 30만 달러가 기부되었으며 유진 매카시의 선거운동원들이 줄지어 험프리를 지지했다. 더 나아가 닉슨은 "단계적 베트남 철수"에 명확한 계획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험프리의 폭격 반대 공약은 험프리에게 불리한 이슈였던 베트남을 오히려 유리한 이슈로 바꿔놓았다. 닉슨은 9월 30일 폭격 반대 발언 이후 노골적으로 베트남에 대한 이야기를 삼가고 "법과 질서"를 핵심 어젠다로 내세웠다. 린든 B. 존슨은 격분했다. 존슨은 측근 중의 측근인 험프리마저 자신을 배반했다며 보좌진들에게 불 같이 화를 냈고 며칠간 그를 만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험프리가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안 존슨은 소극적으로 험프리의 북베트남 폭격 반대에 말과 행동을 맞춰줬다.

9월 30일 후 15~20%p 격차로 뒤쳐져있던 험프리의 지지율은 놀라운 속도로 올랐다.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험프리는 9월 말 29%의 지지를 보였을 뿐이지만 10월에는 36%, 11월 초에는 42%로 올랐고 닉슨과의 격차가 오차범위 내로 좁혀졌다. 뿐만 아니라 험프리 지지를 꺼리던 많은 명사들도 험프리 지지를 선언했다.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 록그룹 사이먼 앤 가펑클, 배우 폴 뉴먼은 물론이고, 선거 며칠 전에는 유진 매카시의 지지를 얻어내는데도 성공한다!

이렇게 험프리의 참패로 끝날 것이라는 초기의 예상은 뒤집히고 누가 이길 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닉슨이 불과 1%p의 여론조사 우위를 보인채 선거가 치러지게 된다.

5.4. 닉슨의 평화협상 사보타주

물론 닉슨도 험프리의 "10월 서프라이즈"를 지켜만 본 것은 아니었다. 우선 닉슨은 자신의 약점이었던 TV 토론회를 거절했다. 휴버트 험프리는 몇번이나 닉슨에게 TV 토론을 제의했지만, 만약 TV 토론을 한다면 닉슨은 자신이 대선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TV 토론 제의를 지속적으로 거부하였다.[34]

결정적으로 닉슨은 험프리의 당선을 막기 위해 존슨과 험프리가 진행한 베트남 평화 협상을 사보타주하였다. 존슨은 험프리의 베트남 평화 공약을 못마땅해했지만, 그의 당선을 돕기 위해 10월 31일 "할로윈 평화조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조약이 공개된다면 험프리는 반전좌파의 더욱 열렬한 지지를 받을 것이 유력했고 그렇다면 험프리에게 표를 주기를 주저하던 진보좌파 세력이 험프리로 결집해 닉슨의 낙선은 거의 기정사실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평화협상은 철저한 비밀이었지만, 닉슨은 이를 헨리 키신저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헨리 키신저는 민주당과 공화당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험프리 캠프의 외교 중책이었던 새뮤얼 헌팅턴에게 개인적으로 닉슨을 혐오한다고 말했으며 헌팅던의 부하이자 후일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국가안보조좌관이 되는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에도 접근했다. 이런 방식으로 키신저는 민주당 인사들을 안심시킨 다음 민감한 베트남 평화협상 정보를 빼내 닉슨에게 알려주었다.[35]
파일:닉슨 키신저.webp
리처드 닉슨과 헨리 키신저
닉슨은 측근 H. R. 홀더먼(H. R. Haldeman)에게 평화 협상을 방해하라고 지시했다.[36] 홀더먼은 응우옌반티에우 남베트남 총통에게 "닉슨이 당선된다면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해줄태니 일단 기다려라"라고 알려주었고, 부패한 정치가 응우옌반티에우는 이 말에 넘어가 존슨-험프리와의 평화 협상을 전격 중단한다![37] 이는 명백한 반역행위였다. 닉슨의 행위는 민간인이 정부의 외교 협상에 끼어들 수 없으며 끼어든다면 반역으로 간주하는 "로건법"에 저촉되는 행위이다. 닉슨은 당시 어떤 공직에도 있지 않았다.
파일:안나체놀트.jpg
평화협상 방해공작에 참여한 안나 셔놀트[38]
린든 B. 존슨은 닉슨의 비행기를 도청하고 있었고 국가안전보좌관실로부터 관련 정보를 보고받고 있었기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험프리에게 닉슨의 비열한 사보타주를 귀띔해주었지만, 존슨과 험프리 모두 이 사실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존슨은 이 사실이 대중에게 공개된다면, 유력 대통령 후보가 당선을 위해 대놓고 반역을 저지른 것이 되므로 미국의 국제적인 위신이 크게 추락해 베트남과 관련된 그 어떤 협상도 할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했다. 험프리는 존슨이 닉슨을 도청한 사실이 알려지면 닉슨이 이를 통해 오히려 역공을 펼칠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차라리 지지율이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안전하게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39]

6. 선거 결과

<rowcolor=#000>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 득표수 비고
부통령 후보 득표율
정당 선거인단 당락
파일:민주당(미국) 엠블럼.svg 휴버트 험프리
(Hubert Humphrey)
31,271,839 2위
에드먼드 머스키
(Edmund Muskie)
42.72%


[* 앨라배마주에서는 으로 출마]
191인 낙선
파일:F4527307-6210-4C4F-BF18-51E4D94F8A0E.png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31,783,783 1위
스피로 애그뉴
(Spiro Agnew)
43.42%


301인 당선
AIP 조지 월리스
(George Wallace)
9,901,118 3위
커티스 르메이
(Curtis LeMay)
13.53%
[40] 46인[41] 낙선
- 그 외 후보 511,944 낙선


[[무소속(정치)|
무소속
]]
0.70%
총 투표수 73,199,998


탈환
전국 득표 선거인단
험프리 닉슨 험프리 닉슨
<rowcolor=#000,#fff> 42.72% 43.42% 35.50% 55.94%
선거 결과는 놀라울정도로 경합이었다. 선거 다음날 아침까지 누가 당선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며 뒤늦게 많은 언론사들이 닉슨의 당선을 확정지었다. 최종적인 양 후보간의 격차는 0.7%p, 약 50만 표 정도밖에 안되었다. 1968년 대선은 1880년(0.11%p 차, 역대 최소), 1960년, 1884년, 2000년 대선에 이어 5번째로 양 후보간 격차가 작은 선거였다.

선거인단 격차는 301명 대 191명으로 득표율 격차를 고려한다면 제법 컸다. 그러나 이는 제3지대 후보자 조지 월리스가 46명이나 되는 선거인단을 가져갔고, 여러 경합주에서 닉슨이 아슬아슬하게 이겼기 때문이다. 일리노이(2.93%p 차 닉슨 승), 캘리포니아(3.18%p 차 닉슨 승), 오하이오(2.28%p 차 닉슨 승)은 닉슨의 승리를 견인했다. 이 주의 선거인단을 합치면 92명이 되는데, 만약 험프리가 아주 약간만 더 득표해 이 주에서 모두 이겼다면, 닉슨 209명, 험프리 283명으로 험프리가 되려 선거인단에서 크게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제3지대 후보자인 조지 월리스13.5%를 득표해, 로버트 라폴레트 이후 가장 많은 득표를 한 제3지대 후보자가 되었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후로 가장 많은 주를 승리했다. 총 5개의 딥사우스 주 (아칸소, 루이지애나, 조지아, 앨러배마, 미시시피)에서 승리했고 45인의 선거인단을 얻었으며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불충실한 선거인단을 얻어 최종적으로 4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다만, 당초 승리할 것으로 예상된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주에서는 패배해 양 후보 모두의 선거인단 과반 확보를 저지한다는 목표는 좌절되었다.

닉슨이 우여곡절 끝에 당선되긴 했으나 그의 득표율인 43.4%는 미국 역사상 에이브러햄 링컨(39.8%), 우드로 윌슨(41.4%), 빌 클린턴(43.0%) 다음으로 낮은 당선자 득표율이다.[42] 예상 외로 부진한 닉슨은 격분했고 이는 1972년 대선에서의 더 큰 압승을 갈구하게 만들어, 워터게이트 사건의 단초가 되었다.

6.1. 지역별 결과

파일:1968년 대선 지역별 결과(4).svg
권역별 후보 득표[43]
<colcolor=#000,#000> 지역 구분 험프리 닉슨 월리스
<rowcolor=#000,#fff> 서부[West]
12,589,737
5,497,551
(43.67%)
6,126,437
(48.66%)
895,558
(7.11%)
<rowcolor=#000,#fff> 중부[Midwest]
22,205,555
9,701,398
(43.69%)
10,392,363
(46.80%)
1,2,064,312
(9.30%)
<rowcolor=#000,#fff> 남부[South]
18,996,117
6,275,790
(33.04%)
6,955,332
(36.61%)
5,739,552
(30.21%)
<rowcolor=#000,#fff> 동부[Northeast]
19,408,589
9,797,100
(50.48%)
8,309,651
(42.81%)
1,201,696
(6.19%)
<rowcolor=#000,#fff> 전국
81,531,584
31,271,839
(42.72%)
31,783,783
(43.42%)
9,901,11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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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fff><colcolor=#000,#000> 태평양[Pacific]
9,611,708
4,360,545
(45.37%)
4,556,032
(47.40%)
637,412
(6.63%)
<rowcolor=#000,#fff> 대평원[Prairies]
6,129,021
2,449,179
(39.96%)
3,138,492
(51.21%)
525,950
(8.58%)
<rowcolor=#000,#fff> 딥사우스[DeepSouth]
4,719,124
1,188,764
(25.19%)
1,127,147
(23.88%)
2,388,054
(50.60%)
<rowcolor=#000,#fff> 뉴잉글랜드[NewEngland]
4,824,622
2,755,453
(57.11%)
1,855,223
(38.45%)
202,063
(4.19%)
}}}}}}}}} ||

6.2. 투표자 집단 별 선거 결과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투표자 집단 별 선거 결과[52][53]
<rowcolor=#fff><colbgcolor=#f5f5f5,#222> 집단 험프리 닉슨 월리스
43% 43% 14%
인종
백인 38% 47% 15%
비백인 85% 12% 3%
흑인 97% 2% 1%[54]
민족 커뮤니티[NBC]
아프리카계 95% 5% 1%
이탈리아계 51% 39% 10%
슬라브계 65% 24% 11%
유대계 81% 17% 2%
성별
남성 41% 43% 16%
여성 45% 43% 12%
교육 수준
초등학교 졸업 52% 33% 15%
중·고등학교 졸업 42% 43% 15%
대학교 졸업 37% 54% 9%
거주지/소득 수준[NBC]
도심/고소득 32% 63% 5%
도심/중소득 43% 44% 13%
도심/저소득 69% 19% 12%
농촌/전체 33% 46% 21%
직업
현장직 50% 37% 13%
사무직 41% 47% 12%
전문직 34% 56% 10%
연령대
30세 미만 47% 38% 15%
30-49세 44% 41% 15%
50세 이상 41% 47% 12%
종교
개신교 35% 49% 16%
가톨릭 59% 39% 2%
소속 정당
민주당 74%
공화당 86%
무당층 31% 44% 25%

7. 평가 및 탐구

7.1. 68혁명의 실패

1968년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이 승리한 것은 많은 정치가, 문화인, 철학자들에게 68혁명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68혁명은 프랑스, 미국, 독일 등 세계 거의 모든 국가를 뒤흔들었고,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특히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어 일부 도시에서는 경찰이 통제력을 잃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기존에 정권을 잡고 있던 보수파 세력이 퇴진하고 신좌파의 의제를 받아들이는 진보 세력이 정권을 잡을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968년 6월 치러진 196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정작 보수 드골파 세력이 압승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뒤이은 1968년 8월의 민주당 경선에서도 반전좌파 유진 매카시조지 맥거번이 탈락하고, 반전좌파들의 차악이었던 휴버트 험프리마저 낙선하면서 프랑스와 미국에서 68혁명은 반전좌파 세력의 완패로 끝났다.

이는 68혁명의 광란이 일부 반전좌파, 청년층에 의해서만 주도되었으며 사회 기성 세력인 중산층은 이에 반대하지만 대놓고 목소리를 내지는 않고 대신 투표를 통해 이들에 반대한다는 침묵하는 다수이론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8년 이후, 정권을 잡은 프랑스의 조르주 퐁피두-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정권과 미국의 리처드 닉슨은 일부 온건한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기조를 유지하여 68혁명의 진보적인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사회를 도리어 보수화시키기도 했다.(프랑스의 제8대학 해체, 미국의 남부전략 등.) 물론 문화적으로는 우드스탁 페스티벌 등 진보적인 분위기가 이어지곤 했지만 동력을 잃은 신좌파 세력은 퇴조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롤링 스톤스의 1969년 12월 알타몬트 공연의 참담한 실패, 1970년 4월 비틀즈의 해체,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의 압승, 1974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데스탱의 승리 등으로 점차 명확해진다.

이후 68혁명을 주도했던 신좌파의 연구는 어찌하여 68혁명이 실패했는지로 바뀐다. 철학자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는 그 유명한 <앙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의 서문에서 자신들의 작업을 68혁명 실패 원인에 대한 탐구라고 명확히하였으며 미셸 푸코는 더욱 직접적으로 68혁명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렇게 범죄와 감시, 처벌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미국에 중점을 둔 설명이기도 하다. 다른 국가들, 즉 독일(빌리 브란트로의 정권 교체), 오스트리아(브루노 크라이스키로의 정권 교체), 캐나다(피에르 트뤼도로의 총리 교체) 등에서는 68혁명이 직접적으로 투표에 영향을 끼쳤고 특히 네덜란드는 제도권 정치 자체가 보수파와 진보파 가릴것 없이 68혁명 후 크게 바뀌었다.

이렇게 된데에는 베트남 전쟁 자체를 민주당 정권이 시작한 일이라는 딜레마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공학적으로 보면 민주당 정권에서 벌어진 일을 반전파들이 비판해봐야 기존 민주당에서 반전파들이 다수를 차지하지 못했고, 결국 자아비판에 가까운 형태가 되니 신좌파가 패배할수밖에 없던 환경이었던것이다.

7.2. 남부전략의 시작

1968년 대선은 1932년 이후 30년간 유지되어왔던 뉴딜연합이 종결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구축한 광범위한 유권자 블록인 뉴딜연합은 가톨릭 이민자 - 중서부 노동자 - 남부 농민을 규합하는 조합이었으나, 1968년 대선에서 가톨릭 이민자들은 여전히 민주당에 투표했으나 중서부 노동자들은 닉슨으로, 남부 농민들은 월리스로 표심이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968년 대선의 지역별 결과에서, 중서부 지역에서 험프리는 자신의 홈스테이트인 미네소타와 미시간에서만 승리했을 뿐이다. 남부는 더해서 험프리는 남부에서 33%의 지지를 얻는데 그쳤고 월리스와 닉슨은 합쳐서 60%가 넘는 표를 쓸어갔다.

리처드 닉슨은 이를 토대로 "남부전략"을 구상한다. 계층적으로는 중산층 이상[57], 지역-인종적으로는 남부 백인, 종교적으로는 개신교 복음주의자의 표를 합쳐 미국인 전체의 5~60%를 차지하는 인구를 중심으로 한 유권자 블록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대성공했는데, 1972년 대선에서 닉슨이 60.7%라는 엄청난 표를 받았을 뿐 아니라, 1968년 대선 이후 1992년 대선까지 단 한번을 제외한 모든 대선에서 공화당이 대승을 거둔 것이다. 1976년 대선마저, 민주당의 보수파 지미 카터가 나왔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공화당 지지율이 급락해 민주당이 승리한 것이었을 뿐 대선 결과는 매우 경합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1992년 빌 클린턴이 민주당의 우클릭을 시도해 공화당의 장기 집권에 지친 일부 중도층 유권자를 공화당에서 빼오며 뒤집힌다. 그러나 1968년 대선 이후, 민주당이 북부와 남부의 표 모두를 꽉 쥐고 장기집권한 민주당 우위의 구도는 무너졌고, 1992년까지 공화당의 초우위 구도가 지속된데다, 1992년 이후에도 민주당이 보수화되어[58] 공화당과 큰 정책의 차이를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1930~1960년대의 민주당 우위 뉴딜연합을 제5정당제로, 1960년대 이후 보수 우위 정치 구도를 제6정당제로 부르기도 한다.

다만 대통령 선거 결과로 인해 생긴 통상적인 인식과 달리 의회에서는 민주당이 계속 남부를 통제했다. 민주당이 의회 단위에서도 남부의 통제를 잃은 것은 1994년깅리치 혁명 때의 일이다.

반대로 공화당도 북동부에서 2000년대까지 꽤 주지사와 의원을 많이 배출하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와 달리 주 정계 단위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지역 기반이 굳어진건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리이다.

7.3. 조지 월리스가 선거인단 과반수를 저지했다면?

1968년 대선은 워낙 경합이었기 때문에 몇가지의 변수가 대선 결과를 크게 바꿀 수도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제시되는 것이 조지 월리스의 선전과 로버트 F. 케네디의 출마이다.

조지 월리스는 1968년 9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21%의 지지를 얻었는데, 만약 이 지지율이 유지되었다면, 그는 로스 페로보다도 더 많은 득표를 얻었을 것이며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후 가장 큰 지지를 확보한 제3지대 후보자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확고한 지지 기반이 없었던 로스 페로와 달리 조지 월리스는 실제로 몇몇 주에서 크게 승리했다. 조지 월리스가 14% 이상의 표를 받아 아깝게 패배한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를 닉슨에게서 뺏었다면, 그는 총 77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을 것이다. 반면 닉슨은 270명으로 1인 차이로 간신히 당선되는데, 불충실한 선거인단이 한명이라도 발생한다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또한 조지 월리스가 미주리 주에서 더욱 선전해 우익의 표를 뺏었다면, 험프리와 닉슨의 격차가 1.13%p 밖에 안되었던 미주리는 닉슨이 아니라 험프리의 손을 들어줬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닉슨 258명, 험프리 203명, 월리스 77명으로 1824년 이후 처음으로 그 누구도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의회로 대통령 지명권이 넘어갔을 것이다.
파일:대체 1968.svg
누구도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가상의 1968년 대선 결과
이 경우 두가지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번째는 의회로 대통령 지명권이 넘어간 채 험프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이다. 의회의 민주당원들은 월리스보다는 험프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과거 KKK단의 단원이었을 정도로 극렬한 인종주의자였던 로버트 버드 상원의원조차 험프리를 지지했을 정도이다. 어떤 정치인이든 월리스를 지지하는 순간 바로 위원회에서 지위를 박탈당하고 내쫓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월리스가 특별한 수를 쓰지 않는 이상, 남부 민주당 하원의원들도 험프리에 투표하여 험프리가 이겼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두번째는 닉슨의 당선이다. 월리스는 표면적으로는 닉슨과 험프리 모두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한참이 지난 후 1990년대에는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강경한 민권 지도자였던 험프리 대신 닉슨과 협약을 맺어 선거인단이나 하원의원 대표단이 닉슨을 지지하게 만들어 닉슨이 당선되도록 하는 대신, 월리스 자신이 닉슨 행정부의 장관으로 입각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실제로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헨리 클레이가 자신의 표를 존 퀸시 애덤스에게 몰아주고, 국무장관직을 보장받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에도 '부패한 거래(Corrupt Bargain)'로 비난받았고, 이후 당시 2등을 차지한[59] 앤드루 잭슨18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무엇보다 첫번째 임기 말부터 온갖 스캔들에 시달리기 시작한 닉슨에게 '부패한 거래' 혐의까지 생겼더라면 그의 평판은 더욱 나락을 기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지 월리스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조지 맥거번을 지지했을 정도로 민주당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기 때문에 닉슨이 자존심까지 버리며 과감한 양보를 하지 않는 이상 월리스가 닉슨을 지지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재반박이 가능하다. 게다가 월리스가 선거인단이나 하원의원에게 영향력을 미칠 방법도 없고 닉슨이 양보를 지키도록 강요할 수도 없으며 그 사실을 폭로한다고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다.

어쩌면 선거인단이 알아서 잘 찍었을 수도 있다(...) 펜실베이니아의 제임스 미체너와 같은 사람은 월리스가 민주적 의사를 방해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공화&민주당 선거인단이 한 사람에게 표를 몰아주자는 계획을 짜기도 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월리스에 의한 선거인단 과반수 저지는 남부 인종주의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켰을 것이다. 누가 당선되었든 조지 월리스와 같은 남부 민주당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미국 사회가 더욱 보수화되었을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7.4. 로버트 F.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F. 케네디/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7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RFK CA.jpg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를 앞두고 유세하고 있는 로버트 F. 케네디
대중에게 흔히 알려져있는 믿음은 로버트 F. 케네디가 캘리포니아에서 괴한에 의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휴버트 험프리를 꺾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천받아, 리처드 닉슨을 꺾고 미국의 제38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케네디가의 저주와 맞물려 오늘날에는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닉슨이 낙선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사실상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곤 한다.

실제로 케네디는 경선 기간동안 '법과 질서'를 지지하는 중서부와 일부 남부 블루칼라 유권자들에게 인기있었다. 또한 인디애나폴리스 연설이나 노동운동가 세자르 차베스와의 친분으로 흑인, 히스패닉등 유색인종 계층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이들은 뉴딜 연합의 핵심을 담당한 유권자 계층으로, 현실에서는 이들의 표가 닉슨, 월리스, 험프리등으로 분산되었다. 만약 케네디가 후보였다면 이러한 표 이탈을 막고 현실의 험프리보다 더욱 승산있는 승부를 벌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다만, 역사가들은 실제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지 않았더라도 1968년 대선에서 이겼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편이다. 크게 두가지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첫번째로 로버트 케네디가 민주당의 대통령 선거 지명권을 받았을 가능성이 희박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민주당의 대의원단은 민주당 당권파와 실세 정치인들의 영향을 받았고 직접 투표를 통한 경선으로 결정되는 대의원은 극소수였다. 그 극소수의 직선 대의원단마저도 유진 매카시와의 경쟁으로 양분되어있었던 상태였다. 경선의 흐름 자체도 로버트 케네디에게 불리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분명 인디애나 주 경선의 승리 이후 승기를 잡았으나, 지지율이 점차 떨어져 캘리포니아 경선에서 유진 매카시에게 밀려 경선 후보직 사퇴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던 상태였다.[60]

만약 로버트 케네디가 유진 매카시를 극적으로 밀어내고 경선 대의원을 싹쓸이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다수의 대의원은 리처드 J. 데일리 시카고 시장과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에 투표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로버트 케네디가 어찌 어찌 전당대회까지 올라왔더라도 투표로 선출되는 대의원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역사대로 휴버트 험프리가 대통령 후보 지명권을 받았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두번째로 로버트 케네디가 실제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한들 닉슨을 꺾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로버트 케네디는 흑인과 유색인종 계층에게서 높은 지지를 얻었지만, 정작 백인 노동자들에게는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백인 노동자들은 주로 험프리나 월리스를 지지했으며 나머지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인 가톨릭, 대학생, 지식인 계층은 유진 매카시를 더 선호했다. 리처드 닉슨의 당선 이유가 68혁명과 베트남 전쟁에 모두 지친 "침묵하는 다수"를 규합시켰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로버트 케네디가 유색인종의 표를 끌어올린다 할지언정 닉슨을 꺾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흑인들은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휴버트 험프리에 97%의 표를 던졌으므로 흑인의 압도적 지지가 본선에서 로버트 케네디만의 강점이었다고도 볼 수 없다.

특히 1968년 5월 그의 사망 직전 치러진 갤럽의 여러 여론조사에서, 미국 국민의 67%는 그를 기회주의자로 보았고[61][62], 25%만이 그의 민주당 후보 지명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휴버트 험프리만큼, 혹은 그보다도 더욱 대중에게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많은 역사가들과 칼럼니스트들은 로버트 케네디가 오늘날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의 죽음 5~10년 후에 만들어진 이미지이며 1968년의 정치 지형이 결코 로버트 케네디의 당선을 확실시할만큼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결국, 결론은 1968년 대선에서 가장 높은 득표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휴버트 험프리라는 결론이 된다. 1968년 8월의 양자구도 여론조사에서 로버트 케네디와 지지층이 어느정도 겹쳤던 유진 매카시조차 42% 대 37%로 오차범위 밖에서 닉슨에게 지지율이 밀렸다. 휴버트 험프리의 10월 지지율 상승이 민주당 기득권 세력의 지지와 반전좌파의 단결이었음을 고려해본다면, 유진 매카시나 로버트 케네디가 선거전 초반에 이점을 취했을 지언정 험프리와 같은 10월 서프라이즈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도리어 휴버트 험프리보다 더욱 크게 패배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선거인단 25명이 걸려 있던 텍사스에서 험프리는 텍사스 출신 존슨 대통령의 지지 덕분에 1.27%에 불과한 아슬아슬한 차이로 닉슨을 이겼는데, 험프리보다 왼쪽에 있던 케네디나 매카시가 후보였다면 텍사스를 닉슨에게 빼앗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1968년 대선이라면 몰라도 1972년, 1976년, 그리고 그 이후의 대선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은 높다. 그의 동생 테드 케네디가 2009년까지 민주당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테드 케네디는 미심쩍은 자동차 사고로 여비서를 죽게 내버려뒀음에도 불구하고[63], 여러 차례 민주당의 유력 대권주자로 분류되었고 오바마 행정부 때까지 미국 민주당 진보파의 영수로 군림했다. 기회주의자라는 인식은 "여비서 살인범"이라는 이미지에 비해 훨씬 가벼운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1968년 대선은 아니더라도 로버트 케네디가 지속적으로 민주당에서 대권주자로 언급되고 오랫동안 미국 정치에 영향을 끼쳤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64][65]

8. 매체에서

9. 관련 문서


[1] 노스캐롤라이나의 불충실한 선거인단으로 기존 획득 예정 득표수보다 1표 증가[2] 다만 스피로 애그뉴는 1966년 메릴랜드 주지사 선거에서 록펠러 공화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인종분리주의자 민주당 후보 상대로 NACCP의 지지를 얻고 흑인 투표 70% 이상을 얻었을 정도이다. 애그뉴의 보수화는 1967년 메릴랜드 폭동 이후의 일이다.[3] 넬슨 록펠러의 동생인 윈스롭 록펠러 당선.[4] 클로드 R. 커크 Jr 당선. 민주당 탈당파로 남부 보수주의자였지만 경선에서는 뜬금없게도 록펠러를 지지한다. 1970년에는 루빈 애스큐에 밀려 낙선.[5] 1960년대 중반은 서구 철학의 명저들이 많이 나온 시기였다. 이 시기의 대표 저작으로는 일차원적 인간(마르쿠제 / 1964년), 마르크스를 위하여(알튀세르, 랑시에르, 발리바르, 에스타블레, 마슈레 공저 / 1965년), 자본론을 읽자(알튀세르 / 1965년), 말과 사물(푸코 / 1966년), 그라마톨로지(데리다 / 1967년) 등이 있는데 모두 68혁명 정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6] 이 당시에는 미국과 영국의 부유층 세율이 80%를 족히 넘던 고세율의 시대였다. 물론 대부분의 부유층들이 이러한 세금을 그대로 낸 것은 아니었고, 많은 경우에는 자선재단 설립을 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절약했다.[7] 국회의사당에 무장 경찰이 상주한 것은 딱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이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때이고 나머지 한 번이 바로 이 때이다.[8] 매카시 뒤의 문구는 "우리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즉각 중단, 남베트남 지상전의 단계적 종료, 모든 정당이 참여할 수 있는 협상을 추진할 수 있는 후보를 지지합니다"이다.[9] 당시 존슨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피로감도 상당했다. 이때는 경선이 대선 후보를 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므로, 존슨이 모든 표를 끌어 모았다면 어찌 어찌 후보 재지명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사정에 겹쳐 당의 낮은 지지율에 낙담해 사실상 권력 의지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10] 존슨 대통령, 험프리 부통령, 데일리 시카고 시장 등.[11] 인디애나 주의 "Favorite Son"이다. 쉽게 말하자면, 주에서 지지를 많이 받는 의원을 프라이머리에 내보내 대의원을 확보한 다음에 전당대회 투표에서는 다른 후보를 지지하도록 하여 대의원단 획득 수에서 이점을 취하려는 일종의 꼼수이다.[12] 사실 민주당에서는 이런 일이 잦았다. 당장 1952년 대선에서도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은 경선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거의 70%에 가까운 대중득표가 에스테스 키포버에게 돌아갔으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것은 스티븐슨이었다.[13]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선거송이다.[14] 당시 리비코프는 이 아수라장을 진두지휘한 장본인인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을 사실상 직접적으로 비판했는데, 이에 데일리 시장이 그의 유대계 혈통을 가지고 욕했다는 카더라가 있다.[15] 이와 함께 나온 명대사가 바로 "민주당 전당대회가 경찰국가(police state)에서 시작됩니다. 달리 할말이 없군요."[16] 사실 홈스테이트인 캘리포니아 빨, 대부분 지역 경선에서는 닉슨이나 닉슨 지지 "Favorite son"이 승리했다.[17] 특히 스트롬 서먼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연방상원의원[18] 애그뉴도 원래는 록펠러 공화당원이었으나, 록펠러의 대선 불출마 선언 번복과 주지사 임기 중 우클릭으로 전당대회 시점에는 닉슨 지지자가 되었다. #[19] 흑백 학군 통합을 위해 흑인 아이들을 통학 버스에 태워 백인 거주지의 학교로 보내는 정책을 의미한다. 조 바이든이 젊은 상원의원이었던 시절 이 정책에 반대했는데 이 때문에 2020년 민주당 경선에서 카멀라 해리스에게 극딜을 받은 바 있다.[20] 이런 강경보수적 공약 때문에 조지 월리스를 도널드 트럼프의 원형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21]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농무부장관을 역임한 농장주 겸 목사.[22] 존 에드거 후버는 본래 KKK를 비롯한 남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웃기는 애들이라며 진지하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엄격하게 다루었다. 1960년대 후버가 은근히 백인우월주의 집단을 밀어준 것은 민권 세력을 더 큰 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23] 미국 역사상 추악함으로써는 최악의 네거티브 광고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자신을 법과 정의의 후보로, 험프리를 혼란의 후보로 묘사한 닉슨의 선거전은 큰 효과를 발했다.[24] 특히 미란다 대 애리조나 판결은 닉슨 유세의 단골 소재였다.[25] 후일 존 B. 앤더슨의 대선 러닝메이트로 고려되기도 했다.[26] 단, 험프리가 닉슨에 대한 네거티브 선거전으로 낙선했다는 인식과 달리 네거티브는 닉슨도 험프리에 못지 않게 활용했다. 특히 위의 "Convention" 광고는 아직도 네거티브 선거 광고의 전설로 꼽힌다.[27]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을 필두로 한 민주당 당권파와 노동조합원들[28] 대학생 및 지식인 계층(매카시), 흑인 및 대도시 거주자(케네디)[29] 남부의 보수적인 농민들과 중서부의 블루칼라 중산층들[30] 한국에서는 반일 감정 때문에 인터넷에서 르메이를 고평가하는 흐름이 있지만 미국에서는 대놓고 대 민간인 폭격을 지시하고 이를 정당화했기 때문에 당시에나 지금이나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부통령 같은 높은 지위에 오르는 사람이 전쟁의 학살에 무감각하게 되는 것은 큰 문제로 여겨졌다.[31] 한 여론조사에서, 르메이 부통령 후보 선정 직후 월리스의 남성 유권자 지지율은 20%였으나 여성 지지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32] 부통령 후보가 말실수를 해 지지율을 떨어트리는 구도는 이후 밥 돌, 댄 퀘일, 사라 페일린에서도 반복되는 공화당의 유구한 전통(?)이다.[33] 대표적인 사례가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닉슨을 지지한 재키 로빈슨[34] 다만, 험프리 역시 TV 토론의 강자는 아니었다. 험프리는 1972년 민주당 경선 TV 토론회에서 조지 맥거번에게 일격을 당해 결국 경선에서 패배한 바 있다. 닉슨이 TV 토론을 거부한 것은 철두철미한 계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존 F. 케네디와 관련된 나쁜 기억에 의한 심리적인 요인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35] 이런 점에서 알 수 있다시피 키신저와 닉슨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닉슨이 그런 키신저를 계속 측근으로 유임시킨 것은 단순히 키신저가 해임되면 보복으로 자신의 사보타주를 알려 탄핵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리처드 닉슨은 존 코널리, 존 얼리크만, H. R. 홀더만 등 극소수의 측근들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정치인들을 불신하거나 증오했다.[36] 홀더먼은 닉슨의 더러운 손이 되어 워터게이트 사건을 비롯한 온갖 정치 공작에 가담했다. 결국,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후 법의 심판을 받고 1년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며 정치 생활이 끝장났다.[37] 참고로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리처드 닉슨은 파리 평화조약을 통해 남베트남 원조를 반토막내며 응우옌반티에우의 뒷통수를 쳤다(...). 물론 닉슨도 양심은 있어서 응우옌반티에우의 신변 보장은 해줬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자 그런것에 신경 쓸 여지도 없어졌고, 응우옌반티에우는 남베트남이 멸망하자 돈과 보석을 가득 실은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도망가 평생 베트남으로 돌아오지 못했다.[38] 남베트남과의 연락책을 맡은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 공화당원.(사진 가운데) 클레어 셔놀트의 부인이었다.[39] 후일 험프리는 자신이 이를 공개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40] 앨라배마주

지지/일부 주에서는

[[무소속(정치)|
무소속
]] 출마
[41] 노스캐롤라이나불충실한 선거인단으로 선거인단 1인 추가 획득[42] 좀 더 위로 올라가면 존 퀸시 애덤스(30.9%)가 최저 기록이긴 하나 존 퀸시 애덤스는 헨리 클레이와의 야합으로 당선된 사례라 애매한 감이 있다.[43] 미국 상무부 휘하 연방 인구조사국 지정 권역에 따른 구분#[West] 알래스카,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하와이, 아이다호, 몬태나, 네바다, 뉴멕시코, 오레건, 유타, 워싱턴, 와이오밍[Midwest] 일리노이, 인디애나, 아이오와, 캔자스, 미시간, 미네소타, 미주리, 네브래스카, 노스다코타, 오하이오, 사우스다코타, 위스콘신[South] 앨라배마, 아칸소, 델라웨어, 플로리다, 조지아, 켄터키, 루이지애나, 매릴랜드, 미시시피, 노스캐롤라이나, 오클라호마,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텍사스, 버지니아, 웨스트버지니아[Northeast] 코네티컷, 워싱턴 D.C., 매인,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뉴저지, 뉴욕,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버몬트[Pacific]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하와이[Prairies] 콜로라도, 아이오와, 캔자스, 미주리, 몬태나, 네브래스카,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와이오밍[DeepSouth]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NewEngland]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매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52] 출처: #, #[53] "NBC"라고 각주가 적힌 것만 NBC의 조사이며 나머지는 모두 갤럽의 조사임.[54] 196~70년대 조지 월리스를 위한 흑인(...)이라는 조직이 있어 흑인들 사이에서 1%정도 월리스 지지율이 나왔다고 한다.[NBC] [NBC] [57]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던 고소득층과 화이트칼라 중산층에다가, 블루칼라 중산층이 합류.[58] 물론 대침체와 2018년 중간선거 이후 민주당이 상당히 진보화되긴 했으나, 빌 클린턴이 구축한 도심-다인종-여성-대학생 선거 블록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59] 대중득표율에서는 애덤스를 꺾고 1위를 하기도 했다.[60] 케네디의 경선 선거운동을 다룬 저서 '라스트 캠페인'에서는 그가 매카시에게 국무장관직을 댓가로 사퇴를 요구할 계획을 세우는 모습도 나온다.[61] 실제로 케네디는 법무장관 시절 마틴 루터 킹 수사를 지원했다가 이후 그의 석방을 돕고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불출마를 선언했다가 존슨 대통령의 우세가 꺾이자 이를 번복하는등 기회주의적 행보를 많이 보여주었다.[62] 다만 법무장관 시절의 마틴 루터 킹 수사 지원의 경우는 로버트 케네디가 후일 킹 목사 본인을 만나 존 에드거 후버에게 자신이 속아서 수사를 지원했고, 이를 깊이 후회한다며 참회했고, 마틴 루터 킹 본인도 로버트 케네디를 용서하여 그를 꽤나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진짜 변명의 여지 없이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보인 건 본래 불출마 입장을 밝히다가 존슨 대통령이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유진 매카시에게 패배했을 때 출마한 것.[63] 이른바 차파퀴딕 사건으로, 이로 인해 테드 케네디는 대권의 꿈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그가 유일하게 출마한 경선은 지미 카터 대통령에 반대해 당내 진보파 대표로 출마한 1980년 예비경선뿐이다.[64] 현실에서도 테드 케네디와 보좌진들은 선거운동을 포기하고 1972년이나 1976년을 노려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만약 케네디가 본인의 2번째 상원의원 임기가 끝나는 1976년에 출마했다면, 1968년에 비해 가볍게 공천을 따내고 본선에서도 승리했을 가능성이 크다.[65] 물론, 1968년을 기점으로 신좌파 계열이 민주당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로버트 케네디의 보다 온건한 기조는 먹혀들지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골수 가톨릭 성향으로 낙태, 동성애등 후기 민주당 정치가들과 유권자들이 지지한 이슈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였다. 테드 케네디가 민주당내 진보파 영수가 된 이유는 민주당 주류 강령에 묵묵히 따르면서 보편적 의료보험등 민주당 기반을 자극하는 안건을 계속해서 밀어붙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