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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F. 케네디/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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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44C9> 일생 생애 (1968년 미국 대선 ·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평가 평가
가족 아버지 조셉 패트릭 케네디 · 배우자 에설 케네디 · 장남 조 케네디 2세 · 차남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 형 조셉 P. 케네디 주니어 · 형 존 F. 케네디 · 남동생 테드 케네디 · 손자 조 케네디 3세, 코너 케네디 · 조카 존 F. 케네디 주니어
역대 선거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선거)
관련 인물 존 F. 케네디 · 마릴린 먼로 · 지미 호파 · 마틴 루터 킹 · 조지프 매카시 · 존 에드거 후버 · 린든 B. 존슨 · 테드 케네디 · 랄프 야버러 · 조지 맥거번 ·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 밴스 하트케 · 케네스 오도넬 · 아서 슐레진저 · 니콜라스 카젠바흐 · 아치볼드 콕스 · 샘 지앙카나 · 카를로스 마르셀로 · 휴버트 험프리 · 유진 매카시
사건사고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파일:노란색 깃발.svg 자유주의 · 파일:Coat_of_Arms_of_John_F._Kennedy.png 케네디 가문 · 파일:존F케네디-투명.svg 존 F. 케네디 · 파일:테디 K.svg 테드 케네디 }}}}}}}}}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민주당 · 공화당
선거 과정
선거 결과 분석
최종 후보
로버트 F. 케네디 선거운동 ·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 민주당 전당대회 폭력 사건

1. 개요2. 출마 거부와 번복3. 예비선거에서
3.1. 인디애나 예비선거 (5월 7일)3.2. 네브래스카 예비선거 (5월 14일)3.3. 오리건 예비선거 (5월 28일)3.4. 캘리포니아 예비선거 (6월 4일)
4. 미완으로 끝난 선거운동5. 사망 이후6. 각종 권력집단과의 관계
6.1. 민주당 당권파6.2. 노동조합6.3. 대기업6.4. 신좌파 그룹6.5. 빈곤층·흑인민권운동 세력
7. 1968년 대선에서 당선될 수 있었을까?
7.1. 낙관론7.2. 비관론
8. 관련 문서

1. 개요

미국 정치인 로버트 F. 케네디의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을 다루는 문서이다.

2. 출마 거부와 번복

로버트 케네디는 1964년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자마자 린든 B. 존슨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1966년 2월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민주당원에게 27%의 지지를 얻어 5%를 얻는데 그친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을 크게 앞질렀고 3선 도전의 야욕을 보이던 린든 존슨 대통령의 52%를 뒤쫓았다. 베트남 전쟁과 1966년 중간선거의 참패 등으로 존슨 대통령의 지지율이 꺾인 1967년에, 로버트 케네디의 대통령 출마를 지지하는 여론은 민주당 내에서 43%에 이르렀고 존슨은 34%에 그쳤다. 본선 경쟁력에서 케네디는 특히 무당층에게 소구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존슨에 대비했을 때 케네디는 민주당원에게 2% 정도 더 받지만 무당층에게는 무려 14%정도 더 지지를 받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존슨에 대적하는 것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백악관과 상원 민주당이 모두 존슨의 편이었기 때문에 존슨 치하에서 살아남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로버트의 측근들도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는데, 테드 케네디는 존슨에게 밉보일 여유도 없을 뿐더러 현직 대통령과의 경선에서 패배하면 정치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므로[1] 존슨의 3선 임기가 만료되는 1972년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 1967년 로버트 케네디는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였으며, 케네디가 불출마한다면 존슨은 70%대 후반의 지지율로 여유롭게 민주당의 지명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존슨의 유일한 반대자는 베트남 전쟁 전면 철수 정책을 내세운 미네소타 주의 상원의원 유진 매카시였다. 유진 매카시는 거의 무명의 인물이었고, 초기 지지율은 10%대 초반에 그쳤다. 1968년 1월 구정공세로 베트남 전쟁 수행 지지율이 꺾였음에도 여전히 존슨의 위세는 굳건했고, 로버트 케네디도 1968년 1월 30일 불출마의 뜻을 굳히며 자신의 측근인 조지 맥거번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1968년 3월 12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거 잘 구축된 반전 풀뿌리 조직을 동원한 유진 매카시가 42%를 얻어, 49%를 얻은 존슨 대통령을 거의 추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존슨의 위세에 처음으로 금이 간 것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그것을 기회로 여기고 1968년 3월 16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린든 존슨이 고조되는 흑백 인종갈등을 잘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유진 매카시는 국외 정책과 달리 국내 정책이 부실해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고[2] 했지만, 사실상 유진 매카시의 "일격"에 자신감이 붙어 출마를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대부분의 반전운동가들은 로버트 케네디를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유진 매카시의 한 선거운동원은 "크리스마스 아침날 일어났는데 누가 선물을 모조리 훔쳐간 것"이라고 분통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의 입장에서 보자면, 테드 케네디가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1972년, 혹은 1976년까지 대선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존슨이 출마를 포기한 이상 1968년 대선에서 당선되는 사람은 누구든 1972년 대선에 재선을 노릴 것이고, 1976년이면 8년이나 기다려야했다. 당시 상원은 휴버트 험프리마이크 맨스필드 원내대표가 이끄는 속칭 "위대한 사회 민주당원"이 민주당 내 주류를 차지했고 로버트 케네디의 동맹은 몇 없던 상황이었다. 상원의원으로서 8년이나 기다리는건 위험했고, 1972년 재선에 도전하는 현직 대통령에 대항해 출마하는 것은 무모했다. 로버트 케네디의 입장에서도 1968년 출마는 불가피했던 것이다.

아무튼 로버트 케네디의 입후보 선언은 그 자체로 존슨의 정치적 인생을 끝내는 것이나 다름 없었고,[3] 존슨은 2주 후 베트남 폭격 일시 중단과 3선 출마 포기 성명문을 냈다.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존슨의 후계자로 즉시 예비선거에 뛰어들었다. 이로서 1968년 대선 민주당 예비선거는 반전좌파의 매카시, 민주당 기득권의 험프리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의 구도로 압축되었다.

3. 예비선거에서

1968년 민주당의 대선 프론트러너
<colcolor=#000,#fff><colbgcolor=#f5f5f5,#222> 후보 이름 로버트 케네디
Robert F. Kennedy
유진 매카시
Eugene McCarthy
휴버트 험프리
Hubert H. Humphrey
사진 파일:꽃다운나이에억울하게돌아가신(고화질).png 파일:유진 매카시.jpg 파일:Hubert_Humphrey_1968_DNC.jpg
직위 뉴욕주 상원의원 미네소타주 상원의원 미국 부통령
출생 1925년 (42세) 1916년 (52세) 1911년 (57세)
홈스테이트 뉴욕 미네소타
핵심 의제 국내 빈민, 인종 문제 해결 베트남 전쟁 즉각 종결 "위대한 사회"[4]의 지속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입장 철수 반대
휴전 협정, 폭격 중단 찬성
철수 찬성
휴전 협정, 폭격 중단 찬성
철수 반대
휴전 협정, 폭격 중단 보류[5]
민주당과의 관계 反존슨, 反당권파 親존슨, 親당권파
주요 지지층 흑인, 라티노
대도시 빈민층
청년 세대
신좌파 그룹
반전 대학생
교외 진보층 및 지식인
노동조합원
농민
민주당 기존 기득권층
현재 미국의 예비선거와 달리 당시 예비선거는 당원들의 여론을 확인하는 작업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대통령 후보 선발은 당 기득권의 영향을 받는 주 선출 대의원단을 통해 이루어졌다.[6]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의 예비선거 캠페인은 몇몇 주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주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 유진 매카시와 단일화 한 뒤 그의 대의원을 자신의 대의원과 합치고, 여론을 바탕으로 리처드 J. 데일리 시카고 시장 등 일부 민주당 기득권 세력을 압박하여 휴버트 험프리를 이길만한 대의원 수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생각보다는 승리 전략이 복잡했던 셈.

휴버트 험프리는 존슨의 사퇴 직후부터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고, 1968년 4월 27일 형식적인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험프리는 예비선거를 통한 대의원 확보보다는 간접적으로 선출되는 주 대의원단 확보에 더 공을 들였으므로, 예비선거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전당대회에서 험프리 측과 대의원을 합칠 각 주의 "Favorite Son"[7]이 다수 출마했다. 유진 매카시는 반전 좌파의 표를 일부 로버트 케네디에게 잃으며 주춤했으나 여전히 로버트 케네디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경선은 험프리를 지지하는 Favorite son, 유진 매카시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의 삼자 구도로 전개되었는데, 이들은 특히 인디애나, 네브래스카, 오리건, 캘리포니아 4개 지역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다.

예비선거 시작 직후인 4월 9일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후보 지지율은 로버트 케네디 35%, 휴버트 험프리 31%, 유진 매카시 23%로 박빙으로 나타났다.

3.1. 인디애나 예비선거 (5월 7일)

1968년 5월 7일 인디애나 예비선거 결과
<colcolor=#000,#fff><colbgcolor=#f5f5f5,#222> 후보 이름 로버트 케네디 유진 매카시 로저 브래니진[험프리]
득표수 328,118 209,695 238,700
득표율 44.26% 27.01% 30.74%
획득 대의원 59명 4명
파일:RFK indiana.jpg
인디애나 주에서의 로버트 케네디
1968년 3월 27일 로버트 케네디는 인디애나 주 프라이머리 출마를 선언했다. 인디애나 주는 백인이 다수 거주하는 중서부 산업주[9]로 로버트 케네디의 핵심 지지층인 유색인종이나 청년층이 주로 사는 지역은 아니었다. 보좌진들은 인디애나 프라이머리에서 매카시나 험프리를 이길 방도가 없다는 이유로 인디애나 예비선거 참여를 만류했으나 로버트 케네디는 도박을 걸었다.

험프리와 존슨을 지지하는 로저 브래니진 인디애나 주지사가 favorite son으로 경선에 참여했다. 로저 브래니진은 인디애나 주 내에서 막강한 조직력을 갖추었고 92개 카운티 전역에서 캠페인을 벌였기에 케네디에게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케네디는 대도시 빈민가와 흑인 밀집 지역, 대학교를 순회하며 자신의 장기인 연설을 통해 지지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한편 유진 매카시는 시골과 소도시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핵심 지지층들을 결집시키는 풀뿌리 캠페인을 벌였다.

1968년 4월 4일 사우스벤드노터데임 대학교(노트르담 대학교)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첫 유세를 가졌다. 로버트 케네디는 노터데임 대학교에서 자신에게 항의하는 의대생들을 상대로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 중 아무것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백인과 흑인, 빈곤층과 중산층이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전진하는 것이 1968년의 도덕적 의무입니다"라고 연설했다. 사우스벤드를 떠나 인디애나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로버트 케네디는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인디애나폴리스 시민들에게는 아직 이 소식이 알려지기 전이었고 케네디의 보좌진들은 킹 목사의 암살 소식이 알려지면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언급하지 말자고 조언했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즉석 연설을 통해 킹 목사가 암살되었다고 대중에게 알렸다. 대중의 탄식 소리가 잦아든 후에, 로버트 케네디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동료 인간 간의 사랑과 정의를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그 노력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어려운 날에 우리는 미국이 어떤 국가인지, 어떻게 나아가야하는지 자문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우리는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살아가며 서로를 향한 증오로 가득 찬 이 양극화의 상황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킹 목사님이 말하셨듯 우리 땅 전체에 드리워진 폭력을 이해하고, 이를 사랑하려는 노력으로 대체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흑인 여러분 중, 모든 백인에 대한 증오와 불신으로 가득찬 분들께 저는 제 마음 속에서도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형은 백인에게 암살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된 미국을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다 함께 이 어려운 시기를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고대 그리스의 아이스킬로스의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잠을 자는 시간에도 고통은 마음 속에 한방울 씩 떨어진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우리의 의지와 무관히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으로 지혜는 찾아온다."

미국에 필요한 것은 분열이 아닙니다. 미국이 필요로하는 것은 증오가 아닙니다. 미국에 필요한 것은 폭력과 불법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과 지혜, 연민이며, 백인이든 흑인이든 그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면 그들을 위해 품을 수 있는 우리 속의 정의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밤, 마틴 루터 킹의 가족을 위해 기도해드리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도 우리가 모두 사랑하는 조국과 연민, 이해를 위해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간을 겪을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폭력이나 불법, 무질서가 당장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 살아가는 대다수의 백인과 흑인은 함께 살기를 원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길 원하며,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위한 정의를 원합니다. 오래 전 그리스 시인이 쓴 글, 즉 인간의 야만성을 길들이고 이 세상의 삶을 온화하게 하는 것에 헌신합니다. 이를 위해 오늘 밤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을 위해 기도합시다.
연설문 전문
이 연설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한 기관이 선정한 "20세기 미국 최고의 연설"에서 17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킹 목사의 죽음이 알려지자 미국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는데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폭동의 수위가 매우 낮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10] 4월 10일 로버트 케네디는 동생 테드와 함께 킹 목사의 장례식에 참여했으며, 당시 증언에 의하면 그는 그 자리에서 야유나 비난이 아닌 박수갈채를 받은 유일한 백인이었다.

물론 로버트 케네디가 단순히 연대와 희망 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인디애나 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법무장관을 맡은 자신의 경력을 내세워 법과 질서(Law and order)를 바로잡고 불법을 근절하겠다고 주장했다. 흑인과 빈민층의 폭동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폭력까지 옹호할 수는 없다는 것이 로버트 케네디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이는 매우 교묘한 전술이었는데, 청년좌파 세대에게는 유진 매카시에 지지가 약간 밀렸지만 도시 빈민층과 유색인종에게는 엄청난 표를 얻을 수 있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인디애나 프라이머리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흑인의 85%~90%의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민주당 후보로서는 거의 유례가 없는 수치였다.

5월 7일 예비선거 결과 로버트 케네디는 초반의 열세를 뒤집고 328,118표를 득표해 42.26%로 1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저 브래니진은 238,700표로 30.74%, 유진 매카시는 209,695표로 27.01%였다. 인디애나 프라이머리의 최대 승자는 로버트 케네디였으며, 케네디의 캠페인은 이것으로 확고한 추진력을 얻었다.

3.2. 네브래스카 예비선거 (5월 14일)

1968년 5월 14일 네브래스카 예비선거 결과
<colcolor=#000,#fff><colbgcolor=#f5f5f5,#222> 후보 이름 로버트 케네디 유진 매카시 휴버트 험프리
득표수 84,102 50,655 12,087
득표율 51.72% 31.15% 7.43%
획득 대의원 직접선거로 선출 안함
매카시와 로버트 케네디는 네브래스카 주에서 다시 맞붙었다. 네브래스카 주는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주는 아니지만 오리건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를 앞두고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유진 매카시의 핵심 지지층은 네브래스카에 거주하지 않았기에 매카시는 네브래스카를 한번 밖에 방문하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 역시 농민들에게 자신이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매카시와 달리 여러번 방문했다.

선거 결과, 네브래스카에 공을 들인 로버트 케네디가 52%를 얻어 31%의 매카시를 여유롭게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로버트 케네디는 25개의 카운티 중 24개의 카운티에서 승리했는데, 매카시는 대학생들이 다수 거주하는 밀스 카운티에서 패배했다. 네브래스카 대학교에서 유진 매카시의 몰표가 쏟아진 탓이었는데 증언에 의하면 매카시는 밀스 카운티에서 로버트 케네디에 딱 2표 앞섰다고 한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를 토대로 오리건 프라이머리와 캘리포니아 예비선거 승리를 위한 모멘텀을 마련했다.

3.3. 오리건 예비선거 (5월 28일)

1968년 5월 28일 오리건 예비선거 결과
<colcolor=#000,#fff><colbgcolor=#f5f5f5,#222> 후보 이름 로버트 케네디 유진 매카시 휴버트 험프리
득표수 141,631 163,990 12,421
득표율 37.96% 43.96% 3.33%
획득 대의원 35명
파일:RFK oregon.jpg
오리건 주에서의 로버트 케네디
5월 28일 오리건 예비선거를 앞두고 매카시와 케네디는 프라이머리일까지 각자의 지지층을 끌어모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우주비행사 존 글렌과 함께 유세장에 깜짝 등장했고, 매카시는 어느 유세장에서나 좌파 대학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로버트 케네디의 목표는 유진 매카시를 다시 앞질러 매카시를 경선에서 탈락시키는 것이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유진 매카시와 자신으로 반-존슨, 반-험프리 진영이 분열되어있으면 승리할 수 없다고 여겼고, 때문에 유진 매카시를 주저앉히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필요하다면 그는 유진 매카시를 국무장관으로 기용하겠다는 거래를 할 생각도 있었다. 한편 유진 매카시의 입장에서는 인디애나 주에서의 당혹스런 케네디 열풍을 잠재우고 자신의 우세를 재입증할 좋은 기회였기에 두 후보에게 있어 오리건 예비선거의 상징성은 엄청났다.

이러한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미리 정해져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오리건 예비선거는 유진 매카시의 승리가 거의 유력시된 싸움이었다. 유진 매카시는 로버트 케네디보다 6개월이나 빨리 오리건에서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는데, 신좌파 대학생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으로부터 일정부분 지지를 얻고 있었다. 반면 로버트 케네디의 핵심 지지층인 유색인종은 오리건에 거의 살지 않았는데, 당시 오리건 주 인구 중 유색인종의 비율은 단 2%에 그쳤기 때문이다. 로버트 케네디가 주장하는 의제 역시 부유한 중산층 거주지였던 오리건에는 통하지 않았다.고용률은 높았고, 빈곤율은 낮았으며, 주민 대부분은 휴양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로버트 케네디가 내세운 총기 규제에는 반대했다. 또한 로버트 케네디의 "케네디 신화" 재건에는 관심이 없고 유진 매카시의 반전진보주의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더 많았다.
오리건에서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
로버트 케네디는 선거 10일 전부터 오리건 예비선거에서의 패배를 직감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오리건 주를 "주 전체가 하나의 교외지역 같다"라고 했고, 케네디의 측근들은 케네디에게 "차라리 오리건 주민들이 전부 흑인이었으면 좋겠지?"라고 농담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유진 매카시가 흑인의 공정한 투표권을 보장하는 1965년 투표권법에서 최저임금과 인두세 폐지에 반대표를 던졌다고 공격했지만, 오리건 주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1%를 겨우 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의미 없는 비판이었다. 반대로 매카시는 로버트 케네디가 법무장관 시절 마틴 루터 킹을 감청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역공에 나섰는데, 이는 시민 자유와 같은 추상적인 진보 의제에 공감했던 오리건의 중산층 좌파 유권자들에게 로버트 케네디의 위신을 악화시켰다.

예비선거 일주일 전인 일요일 아침, 매카시와 케네디는 우연히 포틀랜드의 공원에서 동시에 선거운동을 하게 되었다. 유진 매카시의 선거운동원은 로버트 케네디의 차를 발견하고 같이 사진이나 한장 찍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로버트 케네디는 화를 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운전수에 빨리 장소를 벗어나라고 했다. 황당해진 매카시의 운동원들은 로버트 케네디의 등 뒤에 "겁쟁이!"라고 소리쳤고, 이는 카메라에 그대로 녹화되어 그날 밤 오리건 주 TV 뉴스를 장식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 사건 이후 오리건 내에서 이미지를 회복할 기회가 없었고, 민주당 일부 유권자 사이에게 퍼져있던 "기회주의자" 케네디의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고 말았다. 유진 매카시는 유세에서 "자신에게 차갑다는 이유로 프라이머리에서 도망치려는 사람은 장미가 피어나는 따뜻한 오리건에 출마해서는 안됩니다"라는 명연설을 하며 자신의 우세에 쐐기를 박았다.

투표 결과 매카시는 44%를 얻어 38%의 케네디를 근소하게 앞질렀다. 이것은 대의원을 얻고 못얻고의 문제가 아니라,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 전략상 차질이 생겼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오리건에서 유진 매카시를 눌러 리처드 데일리 등의 당 기득권에게는 자신의 강세를 입증하고, 유진 매카시에게는 지속적인 패배를 안겨줌으로서 유진 매카시의 선거 포기를 종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진 매카시는 여전히 자신이 신좌파, 교외 백인 유권자, 대학생 사이에서 인기가 건재함을 입증했고, 케네디가 "무적"의 후보는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무엇보다 케네디 가문이 누군가에게 경선에서 패배한 것은 이것이 거의 처음이었다.[11] 수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케네디에게 모두 나쁜 결과였으므로 케네디 입장에서는 충격적이었을만 하다. 케네디의 전기작가들은 로버트 케네디가 이때의 패배를 기점으로 자신이 무적이 아니며 많은 지지층과 자원봉사자들이 자신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임을 깨달았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유진 매카시에게 승리 축하 전보를 보내고[12], 매카시와 TV 토론을 할 것이며, 캘리포니아 예비선거에서 패배하면 더이상의 반전진영의 분열을 막기 위해 자신이 사퇴하고 매카시에게 기회를 양보하겠다는 배수진을 치면서 지지층을 다시 결집시켰다. 캘리포니아 예비선거는 그만큼이나 결정적이게 되었다.

3.4. 캘리포니아 예비선거 (6월 4일)

1968년 6월 4일 캘리포니아 예비선거 결과
<colcolor=#000,#fff><colbgcolor=#f5f5f5,#222> 후보 이름 로버트 케네디 유진 매카시 토머스 린치[험프리]
득표수 1,472,166 1,329,301 380,286
득표율 46.27% 41.78% 11.95%
획득 대의원 172명
5월 말 오리건 예비선거의 패배로 케네디의 상승세는 꺾였고, 매카시의 강력한 공격으로 이미지 역시 실추되었다. 5월 말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하는 민주당원의 비율은 35%에서 25%로 10% 정도 떨어졌고, 그를 기회주의자라고 보는 시각은 무려 67%에 달했다. 로버트 케네디 역시 이러한 불리한 상황을 받아들였고, 친구에게 "내가 민주당 지명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털어놓았다. 언론에게는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패배하면 유진 매카시에게 기회를 양보할 것이며, 자신은 상원으로 돌아가 케네디 가문의 수장으로서 케네디 가문의 차세대 주자를 육성하는데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6월 4일, 캘리포니아, 뉴저지, 사우스다코타에서 민주당 예비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이중 케네디와 매카시가 가장 집중한 곳은 미국 최대의 주인 캘리포니아였다. 캘리포니아 예비선거는 매카시와 케네디의 맞장 승부였고, 그만큼 정치적인 상징성이 큰 예비선거였다. 예비선거를 앞두고 로버트 케네디가 유진 매카시와의 토론을 승낙한 것이 캘리포니아 예비선거의 정치적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유진 매카시는 달변가로 토론에서 강했고, 로버트 케네디 역시 말빨로는 뒤지지 않는 인물이지만 형과 마찬가지로[14] 생방송 토론회보다는 연설이 주특기였다.

이 때문에 매카시가 TV 토론회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TV 토론회는 전반적으로 로버트 케네디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두 후보는 토론을 진행하며 거의 모든 의제에 비슷한 의견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이것만으로도 양쪽 중 어느쪽이 선거를 도중 포기할 명분은 생긴 셈. 다른 문제는 제쳐두고, 매카시와 케네디는 각각 자신의 핵심 어젠다였던 베트남 전쟁과 흑인 게토 문제에 갑론을박을 나눴다. 매카시는 로버트 케네디와 존 F. 케네디가 백악관에 있으면서 쿠바 침공을 주도하고 베트남 침공을 설계했다고 지적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매카시가 흑인과 유색인종 게토화 문제에 대해 실질적 해결책이 없다고 비판했고, 매카시는 흑인 게토를 교외에 편입시킴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고 답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그러면 흑인들을 버스에 태워서 오렌지 카운티에 보낸다는 것인가?"라고 일격했고 매카시는 이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또한 유진 매카시는 토론 내내 지루하다는듯한 표정을 보였고 로버트 케네디는 형과 같이 열정적으로보였다. 비록 로버트 케네디는 토론 직후 토론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지만 토론을 시청한 무당층 유권자는 2대 1의 비율로 로버트 케네디가 승리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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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서 유세하고 있는 로버트 케네디
토론에서의 판정 승에 더해,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다수의 유색인종은 케네디의 훌륭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가 방문하는 모든 도시마다 빈민층과 흑인이 뛰쳐나와 그의 이름을 연호했으며, 케네디는 사람을 만나고 악수하면서 오리건 예비선거 패배로 인한 우울감을 씻어냈다. 흑인들은 로버트 케네디를 너무 좋아해서 그를 만지려고 손을 뻗었고 로버트 케네디의 양복은 그때마다 찢겨나갔다. 동양계에게도 일부 지지를 받았는데, 차이나타운에서는 폭죽 소리를 케네디와 그의 측근들이 총격으로 오해해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철렁이게 했다.[15] 라티노들도 압도적으로 케네디를 지지했다. 전설적인 라틴계 노동운동가 세자르 차베스는 히스패닉 유권자들에게 로버트 케네디에 반드시 투표하라고 요청했고,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95%의 라티노들이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로버트 케네디의 핵심 측근 중 하나였던 조지 맥거번은 자신의 지역구인 사우스다코타에서 효과적인 캠페인을 조직해 추가적인 승리를 도왔는데, 아메리카 원주민 역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열정으로 로버트 케네디를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

이에 반해 유진 매카시는 UCLA, UC 버클리, USC 등 많은 대학교 캠퍼스에서 신좌파 대학생들에게 큰 환호를 받긴 했으나 대도시 유권자 사이에서는 지지가 밀렸다. 신좌파 히피 운동의 본거지인 캘리포니아에서 반전운동가들은 대부분 유진 매카시를 지지했으며, 히피들은 유진 매카시를 베트남 전쟁 종전의 선구자로 여겼다. 그럼에도 몇몇 대학생들은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하는 대도시의 큰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했다. 가령, 민주사회를 위한 대학생 모임(SDS)의 의장이자 신좌파 혁명의 리더였던 톰 헤이든(Tom Hayden)은 로버트 케네디의 캠페인에 참여했다. 유진 매카시는 오리건 예비선거와 달리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약점을 보였는데, 1965년 투표권법과 이주노동자 최저임금 보장 반대의 전적이 알려지며 대대적으로 매카시를 거부하는 운동이 있었고, 매카시는 제한적으로 대도시 교외의 진보주의자와 대학생들을 포섭할 수 밖에 없었다. 매카시는 뒤늦게 로버트 케네디의 "오렌지 카운티" 발언을 언급하며 그가 흑인에 대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우익적 캠페인을 진행한다고 공격했으나 하늘이 두쪽나더라도 케네디를 지지할 기세의 흑인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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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예비선거 승리를 자축하는 로버트 케네디
1968년 6월 4일 밤, 로버트 케네디는 캘리포니아와 사우스다코타 경선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측근, 가족, 지지자와 함께 LA 앰베서더 호텔에 모였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케네디는 46.3%를 득표해 41.8%의 매카시를 약 4.5%p차이로 앞질렀고, 사우스다코타에서도 49.5%로 압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버트 케네디는 측근 케네스 오도넬에게 "이제 내 형의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게 된 것 같군. 내 힘으로 혼자 뭘 해본건 처음이야"라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이어 로버트 케네디는 사우스다코타 주 프라이머리의 승리를 이끈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과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사설 경호원을 대리고 혼잡한 인파를 피해 호텔 주방으로 빠져나왔다.

4. 미완으로 끝난 선거운동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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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10분, 연설장을 벗어난 로버트 케네디와 일행은 12시 15분 호텔 주방 복도에서 환호하는 지지자들과 일일히 악수하고 있었다. 16세의 호텔 주방 보조원 후안 로메로(Juan Romero)와 로버트 케네디가 악수하고 있을 때 갑자기 총성이 들렸다. 괴한에 의해 22구경 리볼버에서 총 8발의 총알이 발사되었고 5발은 빗나갔지만 3발은 로버트 케네디를 명중했다. 가슴과 목 뒤쪽, 오른쪽 귀에 총알이 박혔는데, 그중 마지막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케네디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케네디는 위중 상태에 빠졌고, 인근의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에서 케네디의 몸에 박힌 총알을 모두 빼내는 수술을 시행했음에도 뇌의 손상이 너무 심각해 상황이 계속 나빠졌다. 결국 암살 다음날인 6월 6일 새벽 1시 44분 사망 판정이 내려짐에 따라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은 미완으로 끝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문서 참조.

5. 사망 이후

케네디가 사망하자 케네디의 선거운동원은 사분오열되었다. 일부는 험프리를 막겠다는 목적으로 유진 매카시 측으로 캠프를 옮겼지만, 또다른 일부는 케네디의 유지를 이어받아 새로운 사람을 대선 후보로 내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36세로 불과 1살 차이로 대선 출마 연령을 넘긴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대선 후보자로 지목되어, 일부 선거운동원은 드래프트 테드(Draft Ted)[16]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테드 케네디 본인이 대선 출마가 부적절하다고 느꼈기에 거절하면서 이 운동은 동력을 얻지 못했다.

대신 생전 로버트 케네디의 가장 가까운 인물 중 하나였으며, 케네디 자신이 대선 후보로 지지하기도 한[17] 조지 맥거번 사우스다코타 상원의원이 로버트 케네디의 진영을 수습하기 위해 출마했다. 맥거번은 예비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고 매카시 쪽으로 이탈하지 않은 로버트 케네디의 대의원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출마 시점이 너무 늦었기에 당선 가능성은 전무했다. 기본적으로 당시 경선 시스템은 후보 선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고 대부분의 대의원이 당 기득권의 영향을 받았기에, 케네디 암살 시점에서 휴버트 험프리의 후보 지명은 거의 확정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8월 전당대회에서 휴버트 험프리가 맥거번과 매카시를 꺾고 여유롭게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면서 로버트 케네디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베트남 전쟁 반대를 외치는 매카시 지지자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민주당 당직자들과 시카고 경찰이 시위대를 과격진압하는 바람에 험프리의 이미지가 실추되었고 이를 극복할 기회가 없었다. 그나마 선거 운동 막판에 험프리가 자신의 본래 입장이었던 "베트남 북폭 반대"를 내세우며 케네디와 매카시 지지층을 흡수하며 지지율을 상승시켰지만, 닉슨의 우세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고, 11월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이 불과 0.7% 차이로 당선되면서 1932년 이후 30년 넘게 이어진 민주당의 전성시대는 끝을 맞이한다.

6. 각종 권력집단과의 관계

1968년 대선 당시, 로버트 케네디는 민주당을 구성하는 여러 권력 집단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부분이 대중적으로 무시되는 면이 있으나 로버트 케네디는 뉴딜동맹의 해체와 청년-소수인종-도시 중심부 빈곤층의 연합이라는 현대 민주당의 유권자 연합 구도를 처음으로 구현한 인물 중 하나였기에 무시되기 힘들다. 또한 1968년 당시 각종 권력집단의 이해관계는 후보자 지명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케네디가 1968년 당시 각 권력 집단과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6.1. 민주당 당권파

로버트 케네디의 가장 큰 적수는 민주당의 당권파였다. 1960~70년대, 민주당은 린든 B. 존슨을 위시로 한 "위대한 사회 민주당원"과 케네디를 위시로 한 "케네디파"로 나뉘어져있었는데, 후자는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크게 뭉쳐있지 않았다. 상원 내에서 확고하게 로버트 케네디의 동맹이라고 부를만한 인물은 조지 맥거번이나 코네티컷 주 상원의원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등 극소수였고, 저명한 반전좌파이자 반 존슨파인 J. 윌리엄 풀브라이트도 로버트 케네디와 거리를 두었을만큼[18] 로버트 케네디는 민주당 내에서 고립되어있었다.

민주당 당권파는 여러가지 이유로 그를 멀리했다. 린든 B. 존슨은 사적인 이유와 백악관 내 권력투쟁 관계 때문에 케네디를 배척했고, 휴버트 험프리는 케네디의 반노동조합 경력을 근거로 삼아,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은 케네디와 친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나친 정의감을 이유로 케네디를 멀리하였다. 일부 로버트 케네디의 지지자들은 만약 케네디가 데일리 시장을 회유하고 매카시와 단일화에 성공했다면 대의원을 충분히 확보해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데일리 시장은 케네디 대통령을 결코 바라지 않은 인물이었다. 리처드 데일리는 로버트 케네디가 당선되면 즉시 자신의 시카고 정치기계가 해체당하고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될거라고 공포에 떨었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휴버트 험프리가 대통령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유지되고 있던 뉴딜동맹의 핵심 유권자 그룹 중 흑인을 제외한 모두와 갈등을 빚었고, 이것은 기존 뉴딜동맹에 기대던 민주당 당권파 세력이 케네디를 경계하는 이유가 되었다. 케네디 사후에도 그의 유산을 계승한 조지 맥거번은 험프리나 AFL-CIO 등 민주당 당권파라 부를만한 정치가, 세력의 지지를 거의 못받았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6.2. 노동조합

로버트 F. 케네디는 민주당 정치인 중 가장 노동조합과 적대적인 관계를 맺은 인물 중 하나였다고 평가되는데, 이는 1968년 대선 기간 내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물론 로버트 케네디는 세자르 차베스나 월터 뤼터 UAW 회장 등 일부 노동조합 운동가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긴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있어 로버트 케네디의 이미지는 잘해야 철 없는 부잣집 도련님, 대다수에게는 1950년대 후반 목소리를 높이며 지미 호파를 공격하던 노동조합 탄압자의 모습이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상원 위원회에서나 법무장관으로서나 노동조합과 마피아의 유착을 끊어내야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했는데,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이것이 실제 노동 현장의 현실을 모르는 이상론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1968년 대선 당시 케네디의 적수였던 휴버트 험프리는 "노동자의 히어로"라고 불릴 정도로 친노동, 진보적인 입법 경력으로 노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 당시 험프리의 지지가 얼마나 높았냐면 월터 뤼터조차 공개적으로 케네디 지지를 못했을 정도였다. 인디애나 예비선거에서 험프리의 "Favorite son"이었던 로저 브래니진은 최소한 60% 이상의 노동조합원의 표를 얻었다. 반면 로버트 케네디를 공개 지지한 노조는 UAW 인디애나폴리스 지부 단 한개에 불과했다.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5~600명 가량의 대의원단이 노동조합의 영향을 받았음을 감안하면 이는 로버트 케네디의 심각한 디스어드벤티지였다.

6.3. 대기업

그렇다고 대기업과 로버트 케네디가 사이가 좋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대부분의 기업가들은 로버트 케네디가 법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대기업 비리를 감독하고 상원의원으로서도 대기업 규제 법률을 다수 입법한 것을 들어 케네디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다루면서 그를 "마오쩌둥보다 아주 약간 덜 위험하다"라고 했을 정도로 케네디를 혐오하였으며, 케네디를 이길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선거 자금을 지원할 용의가 있었다. 심지어 휴버트 험프리도 이를 인정했다. 험프리는 자신이 케네디에 대항해 형식적 출마 선언을 발표한 다음날 수많은 기업인들로부터 500만달러 이상의 후원금이 들어왔으며, 케네디 사후 즉시 이 후원금이 줄어들었다고 회고하였다. 험프리는 케네디가 닉슨과 맞붙었다면, 너무 케네디를 혐오했던 기업인과 노동조합원이 합심해 닉슨에 선거자금을 지원해 케네디가 참패했을 것이라고 예리하게 분석한 바 있다.

6.4. 신좌파 그룹

68혁명을 주도한 신좌파 그룹과 로버트 케네디의 관계는 애매했는데, 종합해보자면 신좌파 지도부와는 갈등을 빚었고 신좌파 내 조직원, 즉 대학생 운동권에게는 어느정도의 지지를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법무장관 시절 로버트 케네디는 노동조합과의 전쟁으로 일부 사회주의 성향 대학생들에게 비판받았다. 1964년, 사회주의 청년 협의회(Socialist Youth Conference)는 로버트 케네디에 대한 비난결의안을 투표에 부쳤고, 비록 229표 대 202표로 부결되었지만, 이는 당시 신좌파 그룹에게 로버트 케네디가 불신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흑인민권운동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NAACP, 비폭력 조정을 위한 대학생 협의회(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 등 일부 신좌파 그룹과는 동맹 관계를 맺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러한 신좌파 그룹이 흑인 민권운동을 신장하는 정치적 세력 연합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법무장관으로서 이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1968년 대선 때 신좌파 그룹 지도부는 대부분 유진 매카시를 지지했다. 역사가 깊은 전국 학생 협회(National Student Association)의 지도부는 공식적으로 매카시를 지지했으며, 이들의 영향을 받은 히피 운동가나 음악가도 유진 매카시를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1968년 예비선거에서 지역별 우세 구도를 보면 유독 유진 매카시는 대학생 인구의 비중이 높은 카운티일수록 많은 표를 얻은 경향이 있었다. 대학생, 식자층, 반전 신좌파 세력은 로버트 케네디를 "정치적 귀족"의 산물로 보았고 더 나아가 그의 기회주의적인 행보에 비판적이었다. 로버트 케네디의 애매모호한 성향 역시 유진 매카시에 비해 낮게 평가되는 요소였다. 대학생들은 그를 "반쯤 마르크스주의자, 반쯤 보수주의자, 궁극적으로는 신념 없는 추상적인 자유주의자"라고 보았다.

그러나 민주사회를 위한 대학생 협의회(SDS)의 지도자로서 전국적인 신좌파 운동을 이끈 톰 헤이든(Tom Hayden)이 인정했다시피 로버트 케네디는 흑은 민권운동에 대한 연대 차원에서 이미 법무장관 시절부터 신좌파 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많은 대학생들이 케네디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에 공감해 케네디를 지지한 경향이 있었다. 당시 대학생 신좌파 세력 지도부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을 넘어서 빈곤층과 흑인을 위한 정치를 표방한 케네디의 "급진주의"에 많은 대학생이 심정적으로 공감하였으며 그에게 매력을 느낌을 경계하기까지 했다. 법무장관부터 1968년 대선 시기까지 케네디가 계속 자신의 관심 분야를 넓히고 이들을 위한 입법 활동을 벌인 "성장"에 감명을 받은 대학생도 적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자신이 교외와 대학가의 반전 세력보다는 도시 중심부와 시골의 빈민층, 흑인, 유색인종에 더 공감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이유로 신좌파 대학생 그룹은 케네디를 경계하고 유진 매카시를 지지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케네디가 주장한 급진적인 국민적 화해, 빈곤층 구제, 흑인 민권 등에 공감한 대학생의 수가 적지 않다. 이렇듯 로버트 케네디와 대학생 신좌파 사이의 관계는 매우 복잡미묘하기 때문에 1968년 대선 시기 이들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논문 수도 많다.

6.5. 빈곤층·흑인민권운동 세력

로버트 케네디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권력집단은 빈곤 및 흑인 민권운동 세력이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 시절 이들과 강력한 관계를 갖지는 않았다. 흑인 민권운동 세력은 그의 마틴 루터 킹 도청 사실에 비판적이었으며 그가 현실 감각이 없는 추상적 평등만을 내세운다고 공격했다. 한편 빈곤은 법무장관 케네디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케네디가 법무장관에서 물러나고 뉴욕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이들과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공개적으로 킹 목사 도청 허가에 대해 사죄하였으며, 미시시피 델타 유역 방문 후 빈곤 문제로 관심을 돌려 푸드스탬프와 같은 빈곤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8년 대선 당시 빈곤층과 흑인 민권운동 세력은 로버트 케네디의 가장 큰 지지층이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마틴 루터 킹의 장례식에서 흑인들로부터 야유가 아닌 환호를 받은 유일한 백인이었다. 또한 케네디는 노동운동가이자 히스패닉 민권운동 지도자인 세자르 차베스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처음으로 히스패닉 민권 문제에 접근한 주류 정치가가 되었다. 빈곤층 인권 해결을 위한 조직도 대부분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했다. 캘리포니아 예비선거에서, 로버트 케네디가 존 F. 케네디만큼이나 훌륭한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본 백인 유권자의 비율은 40%에 불과했지만, 흑인의 경우 94%에 달했다. 이 선거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흑인의 90%, 히스패닉의 95%의 지지를 얻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도 지지를 받았는데, 사우스다코타 프라이머리에서는 투표에 참여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99.7%가 로버트 케네디에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19] 또한 빈민층이 밀집해있는 지역에서 대부분 승리했는데 일부 게토에서는 100%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일반적으로 휴버트 험프리에 비해 중산층 노동계급에게는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저소득 빈민층 노동계급에게는 큰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로버트 케네디에 대한 "소수집단"의 압도적인 지지는 미국 정치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그 이전까지 민주당의 진보 정치가들은 백인 노동계급, 아일랜드-폴란드계 등 백인 소수 민족, 농민들을 타겟팅했고 흑인, 히스패닉, 도시 빈민층 등은 논외 대상이었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이들을 중앙 정치 무대로 끌어들여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최초의 정치가였으며, 이들에게 구애하는 민주당의 전략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빈민층과 흑인, 히스패닉은 민주당 주류 기득권 세력이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로버트 케네디가 이들에게 구애하게 된 것 역시 휴버트 험프리가 노동계급과 농민으로부터 받고 있던 막강한 신뢰를 이기기가 도저히 불가능해 새롭게 자신을 지지할만한 유권자 그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케네디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 민주당 기득권과 별 연관이 없었기에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상원의원을 할 때에는 큰 도움이 되었더라도 1968년 대선에서 승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완벽하게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로버트 케네디는 상원의원을 지내며 미시시피 델타 유역, 중서부 슬럼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주민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등 유색인종, 빈곤층에 꾸준하고도 확실한 관심을 보인 거의 유일한 정치가였다. 유색인종과 빈민들에게 케네디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던 것은 "성장"이라고도 표현되기도 하는, 소외받는 자들을 향한 케네디의 커져가는 관심이 진실성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많은 유색인종과 빈민층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다 죽는구나..."라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7. 1968년 대선에서 당선될 수 있었을까?

로버트 케네디가 캘리포니아 예비선거에서 이기고 한창 분위기를 타고 있을 때 암살되었기에 미국 역덕후들 사이에서는 "그가 암살되지 않았다면?"이라는 떡밥이 많이 돈다. 가히 1944년의 헨리 A. 월리스, 2000년의 앨 고어 등과 더불어 미국 현대 선거사 최대의 if라고 불릴만 하다.[20] 로버트 케네디의 사후 리처드 닉슨-제럴드 포드-지미 카터-로널드 레이건으로 이어지는 보수주의 경향이 강화되었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21]

대중적으로는 그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닉슨을 이겼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그가 본선 승리는 커녕 민주당 후보로 지명도 못됐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이에 대한 재반박으로 선거 흐름 상 그가 충분히 이겼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한다.

7.1. 낙관론

로버트 케네디가 초반 여론조사에서 일부 부진하긴 했지만, 인디애나 예비선거가 보여주듯 로버트 케네디의 진정한 지지층은 여론조사에서 잡히기 힘든 흑인, 히스패닉, 빈곤층 등이었고 이들을 겨냥한 풀뿌리 선거운동은 케네디의 잠재적인 성장 가능성이 컸음을 의미한다. 인디애나, 네브래스카, 오리건, 캘리포니아 예비선거를 거치면서 로버트 케네디는 유진 매카시를 누르고 기세를 타고 있었으며, 암살되기 며칠 전 유진 매카시와의 토론회에서도 유권자들에게 로버트 케네디가 더 대통령감으로 보인다는 의견이 많았다. 특히 다양한 인종적 배경과 적당한 소득 계층 구성 비율, 가장 많은 인구 등으로 인해 "작은 미국"이라 불리는 캘리포니아 주의 프라이머리에서 케네디가 약 4% 차이로 매카시를 누르고 신승했기에, 유색인종 비중이 더 높고 로버트 케네디가 상원의원 지역구를 두고 있는 뉴욕 주의 예비선거에 로버트 케네디가 출마했다면 그야말로 압승해 유진 매카시를 제압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전반적인 기세는 유진 매카시가 쳐지고 로버트 케네디가 올라오는 구도였으며, 이를 보면 뉴욕 주 예비선거 이후 유진 매카시가 국무장관 직을 받는 대가로 로버트 케네디와 단일화를 했을 가능성도 어느정도 있다. PBS[22]월스트리트 저널[23], 당시 케네디 캠프에 참가했던 정치인들과 일부 언론인 및 역사학자도 이렇게 주장한다.

물론 이 당시 예비선거로 선출되는 대의원이 많지 않았기에, 여전히 로버트 케네디가 최종적으로 민주당 후보 지명을 받을 확률이 아주 높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족한 정치경력이나 부실한 국내 의제 설정 등으로 곤란을 겪은 유진 매카시와 달리 로버트 케네디는 자신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노련한 정치인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1968년 연초부터 전당대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민주당의 실세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에게 연락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대의원을 조정해달라고 부탁했다. 로버트 케네디와 데일리 시장은 어느정도 친분도 있었고, 뉴욕주 예비선거에서 케네디가 압승을 거두면 기득권층도 로버트 케네디를 무시하기 힘들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렇다면 로버트 케네디는 유진 매카시와의 대의원, 데일리에 의해 유리하게 조정된 대의원을 자신의 대의원과 합쳐 근소하게 휴버트 험프리를 꺾고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본선의 경우 로버트 케네디의 승률이 아주 낮지는 않다. 우선 그의 전국적인 호감도는 61% 정도로, 1966년에 비하면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리처드 닉슨과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다. 휴버트 험프리가 1968년 대선 초반에 급작스럽게 20%p 가까이 닉슨에게 뒤진 것은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 당시 폭력 사건의 영향으로, 이 사건으로 험프리는 반전좌파에게도, 평화와 안정을 바라던 대다수 중산층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가 지명되면 이러한 폭력이 없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24] 험프리는 존슨과 100% 입장이 일치하지도 않았는데도 많은 유권자들이 그를 "존슨의 클론"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선거운동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존슨과의 나쁜 사이가 익히 잘 알려져있으므로 이 논란에서 자유롭다. 또 정력적이고, 헌신적이며 젊은 이미지를 가진 로버트 케네디의 이미지는 자동적으로 노련한 정치적 동물인 리처드 닉슨의 이미지와 대비되어 추가적인 이점을 줄 수 있다.[25]

또 험프리가 근소하게 패배한 주인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뉴저지는 유색인종, 대학생, 도시 빈민층의 비율이 높은 주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다시 말하자면 매카시와 케네디가 강점을 보인 계층이 많이 거주했다는 뜻이다. 이들이 대대적으로 투표장에 나온다면 이 주에서 승리했을 것이고 그러면 선거인단 83명을 추가로 획득할 수 있고, 기존 험프리 선거인단 191명에 83명을 더하면 274명으로 선거인단 과반수를 넘는다.

1968년이 아닌 1972년이나 1976년에는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1972년의 경우, 로버트 케네디에 비해 카리스마가 부족한 조지 맥거번이 출마했는데도 맥거번은 바뀐 경선 룰을 잘 이용해 험프리를 기적적으로 꺾고 본선에 진출했다. 맥거번이 케네디의 핵심적인 선거 참모였음을 고려하면 케네디가 1972년 경선에서 승리하는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유의미한 경쟁자가 거의 없었던 1976년은 나오면 지명은 거의 확실했을 것이다.[26] 특히 1976년 대선에서 지지율이 땅바닥을 기고 있던 제럴드 포드를 꺾는건 거의 식은죽먹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그가 암살되지 않았다면..."이라는 아쉬움이 더욱 남는 것이다.

7.2. 비관론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가 1968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보는 입장도 많다. 많은 케네디 지지자들은 로버트 케네디가 리처드 데일리 시장과의 협력으로 대의원 수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나, 리처드 데일리는 초기부터 로버트 케네디의 입후보에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당장 그의 아버지 또한 1968년 대선 출마는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 데일리는 시카고 마피아와 깊은 유착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로버트 케네디는 마피아의 가장 공공연한 적이었다. 데일리는 만약 로버트 케네디가 당선되면 자신을 배신하고 노동조합, 마피아 그리고 자신의 부정부패를 철저하게 파헤쳐 감옥에 가둘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가졌고 로버트 케네디의 지원 요청을 한사코 거부했다. 린든 B. 존슨의 격렬한 반대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 역사상 가장 정치적 본능이 뛰어났다고 평가받는 존슨이 정치적으로는 물론 사적으로도 가장 싫어했던 정치인인 로버트 케네디의 지명을 그냥 놔둘리는 없다. 설령 로버트 케네디가 지명되었더라도, 1972년 대선 때 조지 맥거번이 험프리를 비롯한 민주당 기득권 전체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처럼 존슨이 케네디를 지지하지 않고 그를 방해했을 가능성도 높다.

또한 유진 매카시와의 단일화 역시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대중적인 시각과 달리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철수에 반대했으며 오히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각은 휴버트 험프리와 거의 비슷했다. 워딩도 리처드 닉슨과 동일하게 "명예로운 평화"였다. 유진 매카시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볼 수 있는 J. 윌리엄 풀브라이트는 존 F. 케네디와는 친했지만, 정작 케네디 행정부 때 국무장관 지명이 로버트 케네디의 격렬한 반대로 거부되었기에[27] 로버트 케네디와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대학생 히피들도 100%는 아니지만 그의 기회주의와 "부잣집 도련님" 이미지에 막연한 거부감을 지녔다. 이 때문에 유진 매카시와의 단일화도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본선은 더욱 험난하다. 당시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로버트 케네디의 호감도는 61%를 기록했지만, 이는 애들레이 E. 스티븐슨, 해리 S. 트루먼, 존 F. 케네디 등 이전의 민주당 후보에 비해 크게 낮은 것이었다. 특히 1966년 8월 그의 호감도가 74%였으나 1968년 5월 61%로 떨어진 것이 매우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후보들과 비교해봐도 그의 호감도가 높다고 볼 수 없다. 로버트 케네디를 "매우 선호한다"라고 밝힌 비율은 24%에 그쳤는데, 닉슨이 28%, 험프리가 26%였음을 고려하면 그의 지지가 다소 과장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케네디에 대한 부정평가 여론은 더욱 충격적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가 기회주의(opportunist)적이고, 무자비(ruthless)하며, 권력에 미쳐있고(power-mad), 표를 위해 뭐든지 하며(will do anything for votes), 남을 기만하고 속이는 음흉한 인간(schemer)으로 여겼다.# 비슷한 시기 치러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도 로버트 케네디를 "기회주의적"이라고 보는 의견이 65%를 넘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그가 법무장관부터 1968년 대선 후보까지 불과 4년간의 커리어 동안 빈곤 문제, 흑인 민권 문제, 베트남 문제 등 여러 사안에서 그의 입장을 너무 쉽게 바꾸었고, 마틴 루터 킹 도청 허가나 뒤늦은 경선 참여 문제 등이 겹친 것으로 분석된다. 아무튼 현재와 달리 당시 로버트 케네디가 마냥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론조사에 있어서도 로버트 케네디는 열세를 보였다. 1968년 5월 6일 그가 암살되기 한달 전 여론조사에서, 로버트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 조지 월리스의 가상 3자 대결은 케네디가 38%로 40%의 닉슨에 비해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험프리는 38% 대 36%로, 매카시는 40% 대 37%로 닉슨을 오차범위 안에서 앞질렀다. 넬슨 록펠러와의 대결의 경우 케네디는 33% 대 41%로 록펠러에 비해 더 뒤쳐졌다. 험프리(37 - 39), 매카시(36 - 38)가 모두 오차범위 안에서 뒤진 것과는 대비된다. 특히, 그가 출마하면 조지 월리스가 전국적으로 1~2% 정도 더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교외 중산층, 노동조합과의 갈등 때문에 조지 월리스 쪽으로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의 유출이 많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다면 로버트 케네디의 승리 가능성은 매우 떨어지게 된다.

단순 계산만 해봐도 텍사스 주는 케네디가 출마했으면 이기는건 100% 불가능했고, 그 외에도 교외 비율이 높았던 워싱턴 주나 메릴랜드 주[28]도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최소 25명에서 최대 44명까지 추가로 선거인단을 잃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케네디가 캘리포니아, 뉴저지, 일리노이를 이겼더라도 텍사스, 워싱턴 등을 잃어 과반수를 얻는데는 실패했을 것이다.

8. 관련 문서


[1] 정작 테드 케네디 본인은 훗날 지미 카터의 재선 출마에 도전했다가 패배했다.[2] 로버트 케네디는 출마 선언 발표 전날 조지 맥거번이 나갔으면 불출마했을 것이라고 했지만, 유진 매카시는 흑인 게토나 빈곤에 대한 해결책이 없기에 좋은 후보라고 할 수 없다고 매카시를 직접적으로 공격했다.[3] 또한 후에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존슨은 자신의 가족 중 심장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많다며 자신도 대통령 집무로 인한 노화로 일찍 사망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4] 린든 B. 존슨이 추진한 일련의 복지 정책을 의미한다.[5] 험프리는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철수 반대, 폭격 반대, 휴전 협정 체결 등을 지지했지만 대대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을 강화한 것은 1968년 10월 이후이다.[6] 1952년 대선 때도 에스테스 키포버는 예비선거 유효 득표의 64%를 얻었지만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권을 얻지 못했다.[7] 그 주의 주지사나 상원의원이 출마해 경선에서 압승한 다음, 전당대회날에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자신의 대의원이 지지하도록 하는 일종의 꼼수로, 1970년대 후반까지 꽤 자주 볼 수 있었던 양당 프론트러너의 전략이었다. 험프리 자신도 애들레이 스티븐슨을 지지하기 위한 미네소타의 Favorite son으로 1952년 예비선거에 출마한 전적이 있었다.[험프리] 휴버트 험프리의 "Favorite son"[9] 게다가 인디애나는 예나 지금이나 중서부 주 중 가장 보수적인 성향이다.[10] 마찬가지로 존 린지 뉴욕시장이 할렘가에서 킹 목사를 추도하는 연설을 한 뉴욕에서도 대규모 인종 폭동이 없었다.[11] 물론 이전에도 존 F. 케네디나 로버트 케네디가 예비선거에서 패배한 전적은 있긴 했지만 그때는 적극적으로 유세를 하지 않았을 때였다. 1 대 1 대결에서 케네디가 패배한 것은 이게 처음.[12] 당시까지 예비선거에서는 패배자가 승리자를 축하하는게 관례가 아니었다.[험프리] 휴버트 험프리의 "Favorite son"[14] 흔히 존 F. 케네디가 1960년 대선의 토론회에서 닉슨을 이겨 선거의 향방을 결정지었다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라디오로만 토론을 청취한 시청자들은 압도적으로 닉슨이 이겼다고 답했다. 닉슨의 미숙한 메이크업과 케네디의 잘생긴 외모 때문에 TV 토론회를 집중해 시청하지 않고 흘려들은 정치 저관여층이 닉슨보다 케네디에 호감을 가졌기 때문에 케네디가 토론회의 이점을 누렸다는 것이 중론이다.[15] 로버트 케네디는 "이미 형이 죽었으니 나는 암살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군중들을 안심시켰다.[16] 195~70년대에 대선 출마를 꺼리는 사람을 지지자들이 "강제 징집"하듯 옹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드래프트 운동으로는 1952년의 드래프트 스티븐슨, 드래프트 아이젠하워, 1964년의 드래프트 로지 등이 있다.[17] 케네디는 자신이 1968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으면 맥거번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18] 1960년 풀브라이트의 인종주의 성향을 근거로 그의 국무장관 인준을 막은 것이 로버트 케네디였기 때문이다. 풀브라이트는 케네디보다는 유진 매카시와 친밀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19] 케네디를 뽑지 않은 표가 주 전체에서 단 2표(휴버트 험프리에 투표) 나왔다고 한다.[20] 2000년 대선은 불과 537표차로 당선인이 정해졌고, 1944년 대선에서 대소련 유화파인 헨리 월리스가 부통령 자리에서 교체되지 않았다면 냉전의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을 수 있기에 앨 고어와 헨리 월리스는 언제나 좋은 떡밥이 된다. 세사람 모두 공교롭게도 민주당원이다.[21] 실제로 reddit의 r/president 같은 진보 성향 역사 커뮤에서 "대통령이 되지 못한 인물 중 가장 대통령이 되었어야할 인물은?" 같은 설문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언제나 1등을 차지한다.[22] #[23] #[24] RFK를 지지한 에이브러햄 리비코프는 로버트 케네디의 유훈을 이어 출마한 조지 맥거번을 지명하는 연설에서 "맥거번이 지명되면 지금 같은 폭동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즉흥 연설을 해 학생들에게 호평을 받았다.[25] 당시 갤럽의 여론조사를 보면, 유권자들은 험프리가 너무 "정치인"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그를 선호하지 않았다.[26] 1976년 경선 때 그나마 중량감 있는 후보는 헨리 잭슨, 조지 월리스 정도였고 나머지는 제리 브라운, 모리스 유돌, 지미 카터 등 인지도도 떨어지고 대통령감이 아닌 것 같이 보이는 사람들밖에 없었다.[27] 로버트 케네디는 그의 인종주의적 배경을 문제삼았고, 이 때문에 풀브라이트 대신 딘 러스크가 국무장관으로 올라갔다.[28] 다만 볼티모어의 압도적인 흑인 인구로 신승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