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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야버러

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텍사스 주 클래스 1)
제85대
빌 블리클리[1]
제85~91대
랄프 야버러
제92~103대
로이드 벤슨

미합중국 제85~91대 연방 상원의원
랄프 웹스터 야버러
Ralph Webster Yarborough
파일:Ralph_Yarborough_1957.jpg
<colbgcolor=#0044C9><colcolor=#FFF> 출생 1903년 6월 8일
미국 텍사스 주 챈들러
사망 1996년 1월 27일 (향년 92세)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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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오팔 워런 (1928년 결혼)
자녀 슬하 1명
학력 샘 휴스턴 주립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법학 / LL.B.)
의원 선수 3 (상원)
의원 대수 85, 86, 87, 88, 89, 90, 91 (상원)
지역구 텍사스 클래스 1 (상원)
소속 정당

약력 텍사스 주 법무차관 (1931~?)
1938년 텍사스 주 법무장관 선거 민주당 예비선거 후보
텍사스 법률 심사관 위원 (1947~1951)
1952, 1954, 1956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 민주당 예비선거 후보
연방 상원의원 (1957~1971 / 텍사스 클래스 1)
1. 개요2. 생애
2.1. 상원의원이 되기까지2.2. 상원의원2.3. 낙선과 정계은퇴
3. 선거 이력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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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텍사스 주 연방상원의원을 역임하였다. 남부 민주당원으로서 드물게 진보주의 성향을 드러낸 정치가이다.

2. 생애

2.1. 상원의원이 되기까지

1903년 텍사스 챈들러 출생. 청년기에는 법조인으로 활약했으며, 1931년 제임스 알러드(James V. Allred) 텍사스 주지사에 의해 주 법무차관으로 임명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토지법 전문가로, 텍사스 정유회사의 조세회피 및 불법을 적발하는데 도가 터서 텍사스 정계에서 꽤 유명해졌다. 텍사스 민주당의 보수성에 대항해 몇번이나 주지사, 법무장관 선거에 출마하고자 했으나 예비선거에서 계속 낙선했다.

1952년, 주 법무장관 선거에 출마하려 했을 때 텍사스 민주당의 극보수파인 앨런 시버스(Allan Shivers) 텍사스 주지사에게 개인적인 모욕을 당한 것에 격분해 시버스에 앙심을 품고 1952년과 1954년[2] 시버스에 대항해 텍사스 주지사 예비선거에 출마했다. 야버러는 텍사스 주의 자유주의자들과 노동조합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시버스는 보수적인 농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1952년 첫 도전 때에는 62 대 36으로 시버스에게 크게 밀렸지만 1954년에는 53 대 47로 표차를 크게 줄이는데 성공한다.

1956년 대선에서 시버스 주지사가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지지를 거부하고 아이젠하워를 지지하는 "시버스 민주당원"(Shiverscrat) 조직을 만들자 민주당 지도부는 공식적으로 시버스를 비판하고 야버러에 힘을 실어줬다. 1956년 텍사스 주지사 예비선거는 초접전이었는데 인종주의자 프라이스 대니얼(Price Daniel)과 진보파 야버러가 격돌했다. 비록 텍사스 주의 보수적 정서 때문에 야버러는 이번에도 주지사 후보로 선출되지는 못했으나 당 지도부의 지지를 받은 결과 표차이를 4,000여표, 불과 1%p 내로 좁히며 텍사스 자유주의자들의 영웅이 되었다.

2.2. 상원의원

1957년, 자신을 예비선거에서 낙선시킨 프라이스 대니얼 상원의원의 텍사스 주지사 출마로 공석이 된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상대는 앨런 시버스를 비롯한 보수파의 지지를 받는 극렬 반공주의자 마틴 다이스 주니어(Martin Dies Jr.)였다. 이 선거에서 야버러는 다이스를 38% 대 30%라는 제법 큰 표차로 꺾고 승리했다. 뒤이은 195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그는 손쉽게 예비선거에서 이기고 재선에도 성공한다.

야버러는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를 지지하고 복지 정책 확대와 환경 보호, 석유 회사 규제, 베트남 전쟁 반대 등 여러 면에서 진보좌파적인 식견을 보였는데, 이 때문에 텍사스 주 내에서 평가가 엇갈렸다. 당시 텍사스 민주당의 명실상부한 수장은 린든 B. 존슨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텍사스 주지사인 존 코널리였다. 존슨과 코널리는 야버러를 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매우 싫어했다. 반면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야버러를 지지하고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런 경위로 케네디 대통령과 진보파의 지지를 받는 야버러 상원의원 대 존슨 부통령과 보수파의 지지를 받는 코널리 주지사로 텍사스 주 민주당 조직이 분열되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은 대선을 1년 앞두고 텍사스 주 민주당 조직의 분열을 막기 위해 댈러스 카퍼레이드를 기획한다. 케네디 대통령, 존슨 부통령, 코널리 주지사, 야버러 상원의원를 모두 동원한 거대한 행사였다. 카퍼레이드 하루 전, 존슨 대통령은 야버러와 자신이 같은 차에 동승해야한다는 사실에 불편해하며 케네디 대통령에게 야버러가 케네디와 같이 타고 자신은 친구이기도 한 코널리와 같은 차에 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야버러 역시 존슨과 같은 차에 탈 수 없다고 케네디에게 따졌다. 케네디는 존슨에게는 코널리-존슨, 야버러-케네디로 차를 나눠타면 오히려 언론에게 텍사스 주 민주당의 분열상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야버러가 존슨과 같이 차를 타야한다고 설득했고, 야버러에게는 존슨과 따로 타고 싶으면 그냥 혼자 댈러스 길거리를 걸어가라고 화를 냈다. 그리고 다음날 케네디는 저격수에 의해 암살당했고 야버러는 매우 극적으로 중상이나 혹은 사망까지 이를 수 있는 비극을 회피할 수 있었다.[3]

1964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존슨 대통령은 마지못해 야버러를 지지했다. 야버러가 1964년 연방 민권법과 자신의 복지 프로그램을 지지했기 때문에 차라리 정치적으로 그 편이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코널리 주지사는 은밀하게 공화당을 지지했고 그 결과 야버러는 1958년 74%로 재선한 것과 달리 1964년에는 고작 56% 대 44%로 조지 H. W. 부시를 힘겹게 밀어내고 3선에 성공한다.

2.3. 낙선과 정계은퇴

그러나 존슨 대통령이 물러나고 닉슨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텍사스 주 민주당이 야버러를 지지할 필요가 없어졌고, 야버러는 자신의 지역구 내에서 인기가 매우 없었기 때문에 4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특히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 J. 윌리엄 풀브라이트가 이끄는 반전좌파 파벌에 동참했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 지지율이 높았던 남부에서 야버러는 불리한 입장에 처했다. 1970년, 야버러에 비해 훨씬 젊고, 보수적인 성향인 로이드 벤슨이 출마하자, 야버러는 결국 예비선거에서 벤슨에게 근소하게 패배했다. 설령 예비선거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6년만에 다시 출마한 조지 H. W. 부시에게 밀려 낙선했을 가능성이 크다.[4] 경선 결과에 불복한 일부 야버러 지지자들이 부시를 지지하기도 했지만, 로이드 벤슨은 무난히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1988년 부통령 후보로도 지명되는 등 야버러와 달리 승승장구했다.

야버러는 1972년 상원의원 재출마에 도전하지만, 예비선거에서 베어풋 샌더스(Barefoot Sanders)에게 밀렸다. 1차 투표에서는 49%를 득표했지만 결선에서 47%를 득표하며 텍사스 보수파가 야버러를 얼마나 혐오하는지만을 입증하고 말았다. 샌더스 역시 본선에서는 존 타워에게 엄청난 격차로 밀려 낙선했다. 벤슨은 이후 정계를 은퇴했으며, 본업인 변호사로 돌아와 조용히 살다가 1996년 오스틴에서 사망했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7 연방 상원의원 보궐선거 텍사스

364,605 (38.09%) 당선 (1위) 초선
1958 연방 상원의원 선거 587,030 (74.58%) 재선
1964 연방 상원의원 선거 1,463,958 (56.22%) 3선

4. 여담

  • 1964년 연방민권법 통과 당시 유일하게 민권법을 지지한 남부 상원의원이었다. 이 때문에 스트롬 서먼드 의원과 마찰을 겪었고, 몸싸움까지 한 적도 있다. 존슨 대통령은 인종 문제 중재를 위한 위원장으로 르로이 콜린스 플로리다 주지사를 임명하고자 했다. 서먼드는 이에 반발해 문 밖에 진을 치고 상원 상임위원회의장에 안들어가 표결을 위한 정족수가 안채워지는 방식으로 최후의 발악을 했다.[5] 그때 야버러가 회의장에 도착하면서 서먼드의 저항은 물거품이 되었고 야버러는 절망하는 서먼드를 놀렸다. 극대노한 서먼드는 양복을 벗고 야버러와 몸싸움을 벌였다. 야버러는 매일 푸시업과 근력운동을 하며 다져진 서먼드를 이길 수 없었고 의사당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워런 매그너슨 상원의원이 달려와 둘을 중재하면서 싸움은 중지되었고 표결 결과 콜린스는 위원장으로 무탈하게 임명되었다.
  • 미국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인으로서 보인 진보적 행보로서보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때 린든 존슨 부통령과 동승했던 것으로 더 유명한데, 흥미롭게도 그가 케네디 암살 음모론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다. 린든 존슨과 케네디는 11월 21일, 암살 전날 밤 야버러/코널리가 어느 차를 타야할 지에 대해 길게 전화통화를 나눴는데 상세한 내용이 존슨의 반대로 인해 공개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존슨이 케네디를 살해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존슨이 미리 총격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동지이자 친구인 코널리가 암살에 휘말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야버러를 케네디의 차에 태우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또 총격이 일어난 시점에 존슨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치 총알이 날아올 것이라는걸 미리 알았다는듯 자신이 탄 차에서 몸을 크게 숙이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런 정황들을 미루어 보면 존슨이 리 하비 오스왈드나 다른 저격범을 통해 거슬리는 케네디와 야버러를 함께 제거하려던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있는 것이다.[6]


[1] 전임자 프라이스 대니얼 텍사스 주지사 선거 출마로 인해 주지사에 의해 대체 상원의원으로 임명[2] 이때는 텍사스 주지사 임기가 2년이었다.[3] 존 코널리 주지사는 케네디를 관통한 총알에 폐가 관통당하고 손등도 골절당하는 등 중상을 입어 맞아 4시간에 걸친 대수술로 구사일생했다. 총알이 몇cm만 빗겨나갔더라도 코널리도 즉사하는건 거의 확정이었다고 한다.[4] 야버러에 비해 인기가 높은 벤슨이 출마했는데도 부시는 46.5%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매우 선전했다. 부시는 이때 낙선으로 텍사스 상원의원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UN대사와 CIA국장을 역임하며 외교 전문가가 되었고 이것은 그의 이후 부통령 및 대통령직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되었다.[5] 이는 오늘날에도 상원의원들이 머릿수에서 밀리면 자주 사용하는 전술인데 대표적으로 표결 거부로 미군 장성들의 진급을 차단해 미군 전체를 마비시키고 있는 토미 튜버빌이 있다.[6] 물론 정치적으로 보자면 야버러와 존슨은 앙숙 사이였기 때문에 다른 차에 타는게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야버러를 비롯해 당시 존슨과 동행했던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존슨은 군중의 환호 대신 라디오 뉴스를 더 잘 들으랴고 숙인 것이라는게 유력해 크게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아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