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3 22:15:59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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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9대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니에프 카지미에시 브레진스키
Zbigniew Kazimierz Brzeziński
파일:Zbigniew_Brzezinski.jpg
출생 <colcolor=#000,#fff>1928년 3월 28일
폴란드 공화국 바르샤바
사망 2017년 5월 26일 (향년 89세)
미국 버지니아 주 폴스 처치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합중국
직업 공무원, 정치인
재임기간 제9대 국가안보보좌관
1977년 1월 20일 ~ 1981년 1월 20일
정당

학력 맥길 대학교 (국제관계학 / 학사)
하버드 대학교 (국제관계학 / 박사)
약력 제9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저서 거대한 체스판 (1997)
미국의 마지막 기회 (2007)
전략적 비전 (2012)

1. 개요2. 생애3. 어록4. 기타

[clearfix]

1. 개요

미국정치인이자 공무원이다. 폴란드계 미국인이며 지미 카터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카터 시기에 삼극위원회의 창설 멤버 3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헨리 키신저와 더불어 냉전 시기 미국을 대표하는 3대 안보보좌관의 일원으로 불리며,[1] 브레진스키는 그들 중에서도 특히 개입주의의 성향이 강력했던 인물로 꼽힌다.[2]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목표를 추구한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매파 중 한명으로, 현대 민주당의 전반적인 국제주의 외교 기조를 완성한 인물로 꼽힌다.[3] 그런데, 자유주의적 목표를 추구하였지만, 지정학에 기반하여 철저하게 현실주의적으로 상황을 분석하였기에, 정치현실주의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4]

2. 생애

1928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타데우시 브제진스키 (Tadeusz Brzeziński)는 폴란드의 외교관이었다. 아버지가 외교관으로서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독일에 파견되어 나치 독일의 성장을 보며 자랐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에 파견되어 소련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대숙청을 목격한다.[5] 1938년 아버지가 캐나다 몬트리올에 총영사로 파견되자 브레진스키 일가도 캐나다로 이주한다.[6] 이후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 등으로 인해 일가족이 완전히 캐나다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이루어진 독일소련독소 불가침조약, 그로 인한 독일의 폴란드 침공, 독소 불가침 조약의 '폴란드를 반으로 분할한다'는 내용, 어린 시절 보았던 스탈린의 대숙청 등의 영향으로 즈비그니에프는 반공적이며 소련에 적대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1945년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에서 문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의 석사 논문은 소련 내의 다양한 민족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원래 캐나다에서 외교관 경력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에서 유학을 준비하려 했으나 영국인에게만 열려있는 장학금 때문에 유학은 포기하고 1953년 미국으로 넘어와 하버드 대학교에 다녔고 메를 파인소드와 함께 소련과 10월 혁명, 블라디미르 레닌의 국가, 이오시프 스탈린의 행동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학자로써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의 편찬한 저서로써 1956년 독일의 정치학자 칼 프리드리히와 같이 공저한 <<전체주의적 독재와 전제정치>>를 펴내기도 했다. 이후 1953년부터 1960년까지 하버드 대학교 교수를 지내고 1960년부터 1972년까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공산당 문제 연구소장을 맡았다. 그는 워싱턴 D.C.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폴 니츠 고등 국제학원의 국제 관계 수석 연구 교수이기도 했다.
소련군의 침공을 알리던 카불 주재 미국 대사관의 외교전문들이 속속 도착하던 워싱턴의 백악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깊은 숙고에 빠졌다. 카터 행정부 내에서 가장 강경한 냉전 전사였던 그의 머리를 사로잡는 문제는 이번 사태가 소련이 도를 넘는 조처였냐는 것이었다. 당시 그와 미국의 안보외교팀들은 아프간에 대한 중앙정보국 등 미국의 공작에 대한 소련의 피해의식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소련의 침공을 중동의 걸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아프간 친소정부를 유지하려는 절박한 행동으로 해석했다. 그럼 문제는 소련의 의지가 어느 정도이며, 그 노력이 성공할 것인가였다.
소련, 체제붕괴 대가…미국도 새 적 키워(한겨레, 기사작성일자 2013.10.31)#
1977년 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National Security Advisor)으로 재직하였다. 재임기인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목격하였다. 전 CIA 국장 로버트 게이츠는 1996년에 쓴 회고록 「음지로부터: 냉전에서 승리한 다섯 대통령의 숨은 이야기」에서 미국 정보기관들이 실제로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가 아닌 이미 그 6개월 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 게릴라를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7] 실제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발발일로 간주되는 1979년 12월 27일[8] 이전부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을 지원했으며 이는 사실이었다. 다만 이런 지원은 1979년 7월에 가서야 개시되었고 액수로 50~70만 달러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의료물자나 무선송수신기 비군사적 물자였기 때문에 이 원조가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뒤집어엎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단순 반군 지원을 넘어서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유도했다는 주장을 한다. 심지어 이 유도설은 단순 음모론이 아니라 상당히 그럴듯한 근거도 갖추고 있는데, 1998년 프랑스 언론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9]가 브레진스키와 인터뷰한 내용에서 브레진스키가 유도설을 인정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해당 대화록의 일부이다.
"그렇다. 공식적으로는 무자헤딘에 대한 CIA의 지원은 1980년, 즉 1979년 12월 24일 소련 군대의 아프간 침공 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비밀이 유지되어 온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실 카터 대통령이 카불의 친소련 정권 반대파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첫명령을 승인한 것은 1979년 7월 3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그러한 지원이 소련의 군사적 개입을 유도하리라고 대통령에게 설명했던 자료를 내가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벨 옵세르바퇴르」: 지금 당신은 이 점과 관련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가?

브레진스키: 무슨 후회를 할 게 있는가? 그때의 기밀 작전은 기발한 구상이었다. 그 작전은 러시아를 아프가니스탄의 함정에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후회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소련이 아프간 국경을 넘었던 그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을 베트남 전쟁으로 몰아세우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라고.

「누벨 옵세르바퇴르」: 그러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미래의 테러 집단들에게 무기와 군사 참모를 제공한 사실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브레진스키: 세계사의 전개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지 않는가? 탈레반인가, 아니면 소련 제국의 붕괴인가? 무슬림 일부를 약간 동요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중부 유럽의 해방과 냉전의 종식인가?
브레진스키, 프랑스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 영어 번역본-2, 영어번역본, 영어번역본-1, 프랑스어 원문1, 프랑스어 원문2.
하지만 이 인터뷰를 토대로 미국이 소련의 행동을 유도하거나 또는 소련이 미국의 유도에 말려들었다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이렇게 섣부른 결론을 내놓는 것은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정세, 소련의 침공에 대한 미국 정부(특히 브레진스키)의 인식과 반응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20세기 아프가니스탄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현대 제국들의 무한 세력 확장과 이에 기반한 전략전 오판의 결과이자 참사였다. 미국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최고 전략적 자원인 석유가 묻힌 페르시아만까지 영향력을 확장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소련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넘어서 자신들의 중앙아시아 내 이슬람계 자치공화국을 묶어서 현대판 오스만터키 제국 결성을 사주한다고 오판했다.
아프가니스탄, 패권의 경연장이자 무덤(한겨레, 기사작성일자 2013.09.12)#
애초에 미국으로 향하는 원유의 주산지인 걸프만과 아프가니스탄의 거리가 지척이라는 점에서 미국에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이 결코 좋은 일일 수가 없었다.[10] 서방에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국제안보와 걸프만의 석유 공급 라인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11] 후일 브레진스키는 침공 유도설의 근거로 사용된 1998년 인터뷰의 정확성을 수차례나 부정했으며, 2020년 코너 토빈(Conor Tobin)의 The Myth of the “Afghan Trap”: Zbigniew Brzezinski and Afghanistan, 1978–1979도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를 사학적 근거로 삼기는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토빈에 따르면 브레진스키는 해당 인터뷰 기록은 실제 인터뷰 기록이 아니라 발췌문으로 심각하게 편집되었고, 그 편집본을 자신에게 확인도 받지 않고 출판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해당 인터뷰는 원래 영어로 진행된 것이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다시 영어로 재번역되는 과정에서 원래 인터뷰 의도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1979년 12월 말 작성된 기록을 참고하면 브레진스키는 소련의 침공 직후 소위 곰덪(Bear Trap)에 걸려들었다고 환호작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련의 남진을 우려한 것으로 드러난다. 앤서니 타이틀러(Anthony Teitler)의 2020년 책이다. 이 책은 1998년 인터뷰 내용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진 않지만, 인터뷰 내용은 1979년 침공 당시 작성한 메모와 상충된다고 지적하였다. 타이틀러에 따르면 1998년 인터뷰는 소련 붕괴 후 브레진스키의 자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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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Carter's declaration on 3 July 1979 that Washington supported covert assistance to the Afghan rebels via Pakistan's ISI was the first clear foray into opposing the Soviet Union's presence in Afghanistan (Gates 1996: 146). This was a small and innocuous beginning as only half a million dollars was deployed to boost psychological and propaganda efforts against the Soviet Union. Furthermore, it was done via intermediaries in order to disguise US involvement so not to directly antagonise Moscow (Coll 2004: 46; Rasanayagam 2005: 105). However, over time, a small trickle of funding to the Afghan Mujahideen turned into a vast stream and by 1987 had reached $630 million per annum (Roy 1991: 35; Rasanayagam 2005: 136). (중략)
1979년 7월 3일자 연설로 카터 대통령이 밝힌, 미 정부가 파키스탄 정보기관 ISI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비밀리에 지원한 일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을 겨냥한 최초의 명확한 시도였다.(Gates 1996: 146) 이 시도는 처음에는 소련에 대한 심리 및 선전전을 강화할 목적으로 50만 달러만 사용했기 때문에 미국이 손해볼 것 없었다. 더욱이 이는 모스크바를 직접적으로 적대시하지 않기 위해 미국의 개입을 위장해줄 중개자를 통하여 이루어졌다.(Coll 2004: 46; Rasanayagam 2005: 105)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은 더욱 커져만 갔고 1987년에 이르면 연간 6억 3천만 달러가 사용되었다(Roy 1991: 35; Rasanayagam 2005: 136). (중략)

Although initial US involvement in Afghanistan carried modest cost, Zbigniew Brzezinski later claimed that the United States had planned to lull the Kremlin into an intervention of that country. Indeed, in a 1998 interview, the former national security advisor made this very point, arguing Washington knew it could inflict on Moscow its own 'Vietnam War'. As Brzezinski pointed out, in the wider scheme of things the United States' support of a few 'stirred up Moslems' to help bring down the Soviet Union was a price worth paying even in the aftermath of the Cold War: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처음에는 소소했지만, 후일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는 소련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도록 유도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이 전직 국가안보보좌관은 실제로 1998년 인터뷰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미 정부가 소련이 자신의 '베트남 전쟁'에 빠져들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브레진스키가 지적한 바와 같이, 더 넓은 관점에서 소련 붕괴를 위해 소수의 '동요하는 무슬림'을 지원하는 것은 냉전이 끝난 이후에 봐도 지불할 가치가 있는 댓가였다.

We didn't push for the Russians to intervene, but we knowingly increased the possibility they would.... It had the effect of drawing the Russians into the Afghan trap and you want me to regret it? The day that the Soviets officially crossed the border, I wrote to President Carter. We now have the opportunity of giving to the USSR its Vietnam War. Indeed, for almost 10 years, Moscow had to carry on a war unsupportable by the government, a conflict that brought about the demoralization and finally the breakup of the Soviet empire.... What is most important to the history of the world? The Taliban or the collapse of the Soviet empire? Some stirred-up Moslems or the liberation of Central Europe and the end of the cold war? (Interview with Zbigniew Brzezinski 1998)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개입할 가능성은 높였다. (중략) 그 작전은 러시아를 아프가니스탄의 함정에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후회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소련이 아프간 국경을 넘었던 그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을 베트남 전쟁으로 몰아세우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실제로 소련 정부는 근 10년간 자기들이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계속했고, 이 분쟁은 결국 소련 제국의 사기를 저하하고 종국에는 제국의 붕괴를 일으켰다. (중략) 세계사의 전개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지 않는가? 탈레반인가, 아니면 소련 제국의 붕괴인가? 무슬림 일부를 약간 동요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중부 유럽의 해방과 냉전의 종식인가? (Interview with Zbigniew Brzezinski 1998)

Written memos at the time however directly contradict Brzezinski's bravado language (Brzezinski 26 December 1979; Coll 2004: 581; Riedel 2014: 102). The Carter administration's supposed certainty about giving the Soviet Union a 'bloody nose' was post hoc rationale. As was the case, Brzezinski wrote to President Carter explaining the potential dangers and pitfalls that encompassed a Soviet intervention and the challenges for Washington. Indeed, the national security advisor was certainly not so sanguine about the Soviet Union being lulled into its own 'Vietnam' as the circumstances were very different. Brzezinski was clearly cautious. In this aforementioned memo of 26 December, Carter's national security advisor expressed pessimism about the Afghan resistance to the Soviet Union, in large part because they did not have the support and capability on both a domestic and an international level that the Vietcong clearly had. As Brzezinski stated,
그러나 (침공) 당시 브레진스키가 작성한 메모는 훗날 브레진스키의 허세 가득한 언사와 직접적으로 모순된다.(Brzezinski 26 December 1979; Coll 2004: 581; Riedel 2014: 102) 소련에 '한 방' 먹일 수 있게(bloody nose) 되었다는 카터 행정부의 확신은 사후적으로 지어낸(post hoc) 근거였다. 마찬가지로 브레진스키는 카터 대통령에게 메모를 보내어 소련의 개입과 미국 정부에 대한 도전을 포함하는 잠재적 위협과 함정에 대해 설명했다. 실제로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치룬 베트남 전쟁과) 상황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소련이 자신의 '베트남'에 빠져들 것이라고 낙관할 수 없었다. 브레진스키는 분명히 조심스러웠다. 앞서 언급한 12월 26일 메모에서 브레진스키는 반소 아프가니스탄 저항군의 운명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그 이유는 (아프가니스탄 저항군이) 베트콩만큼 국내 및 국제사회에서 확고히 보유했던 지원과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브레진스키가 말했듯이,

[t]he Soviet intervention in Afghanistan poses for us an extremely grave challenge, both internationally and domestically. While it could become a Soviet Vietnam, the initial effects of the intervention are likely to be adverse for us.... However, we should not be too sanguine about Afghanistan becoming a Soviet Vietnam: A. The guerrillas are badly organised and poorly led; B. They have no sanctuary, no organized army, and no central government - all of which North Vietnam had; C. They have limited foreign support, in contrast to the enormous amount of arms that flowed to the Vietnamese from both the Soviet Union and China.... As a consequence, the Soviets might be able to assert themselves effectively, and nothing in world politics succeeds like success, whatever the moral aspects. (Brzezinski 26 December 1979)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개입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우리에게 극도로 심각한 도전이다.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베트남이 될 수는 있지만 처음에 그 개입의 효과는 우리에게 부정적일 가능성이 높다. (중략)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베트남이 될 것이라고 너무 낙관해서는 안 된다. 첫째, 아프가니스탄 게릴라의 조직력이 나쁘고 지도력도 부족하다. 둘째, 그들은 북베트남이 가지고 있던 성역(sanctuary)[역자주1], 조직화된 군대, 중앙 정부 중 그 어느 것도 없다. 셋째,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무기를 지원받은 북베트남과 달리 그들은 외국으로부터 제한적인 원조만 받고 있다. (중략) 그러므로 소련은 자신의 목적을 확고히 달성할 것이다. 도덕적 측면과 관계없이 국제정치에서 성공은 또다른 성공을 부른다. (Brzezinski 26 December 1979)

In this memo, Brzezinski provided context for the United States' response to the Afghan invasion. It was, however, not entirely clear-cut as to how and in what way the Carter and (subsequent) Reagan administrations would implement its Afghanistan policy, especially if the Soviet occupation became a long-term one. Over time, a clear approach emerged, but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Soviet invasion, there was major concern about what needed to take place, as the NSC's 'Summary of Conclusions' of the same day was also cautious about the Soviet advance into the country. Moscow seemed on the verge of "pacifying Afghanistan", and this would have had serious implications for Washington's image and strength in the region (Special Coordination Committee Meeting 26 December 1979). After the Iranian Revolution and concomitant hostage crisis, this only appeared to add fuel to the fire. The importance of acting swiftly and involving the UN showed the alarm and genuine uncertainty that key decision makers in the NSC felt at the time.
이 메모에서 브레진스키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할 미국 정책의 맥락을 제공했다. 그러나 메모는 특히 소련의 점령이 장기화했을 경우 카터와 (후속) 레이건 행정부가 대아프가니스탄 정책으로 명확히 무엇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제시하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접근 방식이 명확해졌지만, 소련 침공 직후에는 무엇을 해야할지에 관해 큰 우려가 제기되었다. 같은 날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결론 요약'에서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진출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이 나왔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평정하기" 직전에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이는 이 지역에서 미국의 이미지와 영향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Special Coordination Committee Meeting 26 December 1979) 이란 혁명과 그에 따른 인질 위기[역자주2]는 이런 사태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속히 행동하는 것과 UN을 관련시키는 것의 중요성은 당시 NSC의 주요 의사결정자들이 느꼈던 경각심과 진정한 불확실성을 보여주었다.
Anthony Teitler. (2020). US Policy Towards Afghanistan, 1979-2014: 'A Force for Good', Routledge; 1st Edition

스티브 콜(Steve Coll)의 2004년 책도 브레진스키가 처음 며칠간 작성한 메모들과 소련의 침공으로 당대 카터 행정부가 처한 곤경을 근거로 들며 유도설을 일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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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mporary memos—particularly those written in the first days after the Soviet invasion—make clear that while Brzezinski was determined to confront the Soviets in Afghanistan through covert action, he was also very worried the Soviets would prevail. Those early memos show no hint of satisfaction that the Soviets had taken some sort of Afghan bait. Given this evidence and the enormous political and security costs that the invasion imposed on the Carter administration, any claim that Brzezinski lured the Soviets into Afghanistan warrants deep skepticism.
(브레진스키가) 당시 작성한 메모들, 특히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후 처음 며칠간 작성된 메모들은 브레진스키가 비밀작전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을 상대하기로 결정했지만 동시에 소련이 승리할 것이라고 매우 우려하고 있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메모들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의 덫에 걸려들었다는 만족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메모들과 소련의 침공이 카터 행정부에 부과한 막대한 정치적, 안보적 비용들을 고려하면, 브레진스키가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으로 유인했다는 주장은 깊은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Steve Coll. (2004). Ghost Wars: The Secret History of the CIA, Afghanistan, and Bin Laden, from the Soviet Invasion to September 10, 2001, Penguin Press, p.593.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 전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반공 이슬람주의 반군을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소련의 개입을 촉발한 원인은 아니었다. 소련이 개입한 근본적인 원인은 아프가니스탄에 집권한 인민민주당 내 할크(Khalq)파와 파르참(Parcham)파 사이의 지난한 권력투쟁과 그로 인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의 총체적인 분열상, 공산정권의 무지성 소련식 공산주의 개혁과 이에 뒤따른 무자헤딘의 봉기, 집권 3개월만에 전임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를 포함해 최소 7천명을 처형한 아민의 잔혹성[14], 타라키의 실각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 내 소련 영향력의 축소, 마지막엔 타라키 살해 후 아민이 사실은 CIA의 끄나풀이라고 KGB가 유포한 역정보에 소련 자신이 낚여버린 것이었다.

아민이 미국과 접촉하고 있다고 여긴 정치국은 강하게 분노하며, 유리 안드로포프,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중심으로 해서 미국에 포섭되었다고 여겨지는 아민을 제거하고 아프가니스탄을 구하겠다는 입장이 큰 지지를 받았고, 결국 정치국이 우스티노프-안드로포프 계획을 승인했다. 만약 자신들이 믿는 대로 아프간이 친미 국가가 되고, 아프간에 미국 핵무기가 배치된다면, 사실상 소련 전역이 미국 핵미사일의 공격권 안에 들게 되기 때문이었다. 일이 이 지경까지 가자 결국 브레즈네프도 정치국원들의 의견에 수긍하고 개입 결정에 서명을 하면서 소련군이 아프간으로 파견되어 아프간 전쟁이 시작된다

이 기나긴 글을 인내심 있게 읽었다면 느끼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소련의 자충수이므로 미국의 유도니 뭐니 탓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브레진스키는 개전 직후 파키스탄의 아프간 접경 지대를 방문하는 등 미국의 아프간 공작의 큰 그림을 그린 인물이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장기화를 목표로 한 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에 맞서기 위해서 친미 파키스탄의 핵무장도 용인해야 한다고 제안했었다.# 당시 브레진스키는 소련이 파키스탄 남서부 발루치스탄에 집중거주하는 발루치인의 분리주의를 선동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 American Primacy and Its Geostrategic Imperatives, 1997), 전략적 비전(Strategic Vision: America and the Crisis of Global Power, 2012) 등의 저서를 남겼다. 주로 대륙세력(Heartland) 이론에 기반을 둔 유라시아(Eurasia) 지정학을 강조했고, 이를 중심으로 미국의 패권 강화, 특히 러시아 견제 방안을 역설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우크라이나를 서방 진영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레진스키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없이 제국이 될 수 없고, 우크라이나를 장악하면 자연스럽게 제국이 된다"고 말하여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15]

1970년대 말에 카터 행정부에서 자카르타에서의 남·북·미 3자 고위급 회담을 비밀리에 추진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당시에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던 카터 행정부가 철군 반대 여론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헨리 키신저는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했다.

2000년대에 Foreign policy에 기고한 글에서, 중국의 부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하여,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논쟁하였다. 미어샤이머는 공격적 현실주의 이론에 따라서 중국과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고, 브레진스키는 중국이 경제성장을 추구하므로 군사적 충돌을 피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담으로, 오늘날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쇠퇴하고 있다는 입장이며 이는 세월이 갈수록 그의 신작 도서들에 미국에 대한 자신감이 낮아지는게 드러난다는 점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아래 어록 문단에 서술되었듯이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는 당시의 미국의 패권에 대하여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었는데, '미국의 마지막 기회' 에서는 상당히 걱정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말년에 저술한 '전략적 비전'에서는 포기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서서히 쇠퇴하겠지만 중국이 패권을 가지지는 못할 것이고 세계가 다극화되면서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쇠퇴하면서 지정학적 위기에 처할 국가들로, 한국을 포함하여 8개 국가를 지목했다.# 그리고 미국이 쇠퇴하면서 미국의 핵우산 안보공약의 신뢰성이 의심받고, 한국이 핵무장을 시도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미국 쇠퇴하면, 한국 핵 무장 가능성
The leaders of the world’s second-rank powers, among them India, Japan, Russia, and some European countries, are already assessing the potential impact of U.S. decline on their respective national interests.
...
A decline in American power, however, would likely undermine the health and good judgment of the U.S. economic and political systems. A waning United States would likely be more nationalistic, more defensive about its national identity, more paranoid about its homeland security, and less willing to sacrifice resources for the sake of others’ development. The worsening of relations between a declining America and an internally troubled Mexico could even give rise to a particularly ominous phenomenon: the emergence, as a major issue in nationalistically aroused Mexican politics, of territorial claims justified by history and ignited by cross-border incidents.
After America, How does the world look in an age of U.S. decline? Dangerously unstable.

3. 어록

<거대한 체스판>에서, 당시 미국의 패권에 대한 자신만만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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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네가지 결정적 영역에서 최고 강국으로 우뚝 서 있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경쟁 상대 없는 세계적 힘을 지니고 있다. 경제적으로 미국은 세계 성장의 기관차이다. 비록 몇몇 측면에서 독일과 일본의 도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독일과 일본은 경제적 측면 외에서는 장점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기술적으로 미국은 첨단 분야의 기술 혁신에서 압도적인 주도권을 보유하고 있다. 문화적으로 미국은 약간의 투박성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젊은이에게 경쟁 상대 없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다른 나라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정치적 성과를 거두게 해주고 있다. 이 네 가지의 결합이 미국을 종합적인 의미에서 유일한 세계 초강국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43~44p

사실, 브레진스키는 가장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던 <거대한 체스판>에서도, 미국 패권의 미래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낙관하지는 않았다. 그에 따르면 미국 패권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은 중국과 러시아와 이란이 협력하는 동맹이 이뤄지는 것으로 보았다. 실제 역사에 비춰서 평가해보자면, 조지 워커 부시가 서로 가까운 중동지역의 두 약소국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동시에 치루는 '2개의 전쟁' 동시수행 전략을 실행했었다가, 둘 다 수렁에 빠지고 실패했다. 그런데 같은 중동지역에 있는 약소국 2개를 상대로도 수렁에 빠졌었는데, 유럽의 강대국인 러시아,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중국, 인도양의 중견국가인 이란과 동시에 3개의 전쟁이 이뤄진다면, 미국은 전력을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할 위험이 매우 다분하다. 그렇지만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어지간히도 패권주의적이고 일방주의적으로 가혹하게 몰아붙여서 적들을 만들지 않는 한, 그 세 나라가 이데올로기나 체제가 서로 상이하고 이해관계도 충돌하므로, 서로 협력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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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는 중국, 러시아 그리고 아마도 이란이 합세한 거대한 동맹이 형성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통합된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불만감에 의해 통합된 '반패권' 동맹이다. 이것은 그 규모나 영역면에서 과거 중 · 소 진영에 의해 제기되었던 도전을 상기시켜 줄 만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국이 주도국이 되고 러시아가 추종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가능성이 아무리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이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유라시아의 서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에서 동시적으로 미국이 지정 전략적 기술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80~81p

브레진스키는 로마제국의 붕괴처럼 역사속의 제국들의 흥망성쇠 과정에서 제국의 말기에 흔히 보여지는 모습들인, 개인주의와 자본주의 소비 문화의 확산과, 마모니즘과 향락주의와 퇴폐에 의해서 미국의 문화적 · 문명사적 쇠락이 이뤄지고 있고, 미국의 고립주의가 강화된다고 진단하였다. 적어도 마지막 부분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고립주의 열풍을 예측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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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이 결국 붕괴하고 만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된 요인 때문이었다. 첫째, 로마 제국이 너무 커져서 하나의 중심에서 통치하기 어려워졌고, 그 결과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됨으로써 자동적으로 권력의 독점적 특성이 파괴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둘째, 제국적 오만의 시대가 지속됨에 따라 문화적 향락주의(cultural hedonism)가 만연하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정치 엘리트들의 위대함에 대한 의지가 좀먹게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제국 체제를 사회적 희생 없이는 지탱할 수 없게 되었는데, 시민들이 더 이상 그러한 희생을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화적 부패, 정치적 분단 그리고 재정적 인플레이션이 로마 제국을 인근 야만족의 침입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던 것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29~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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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계 초강대국을 넘어서

길게 볼 때 세계 정치는 점차 단일 국가의 손에 패권이 집중되는 쪽과는 거리가 멀게 발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은 최초의 진정한 세계 초강대국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세계 초강대국이고 마지막 세계 초강대국이다.
왜냐하면 민족 국가들이 갈수록 더욱 삼투적이 될 뿐만 아니라 권력으로서의 지식이 더 확산되고 더 공유되며 국경에 의한 제약도 훨씬 덜 받기 때문이다. 경제력 또한 더 넓게 분포되고 있다. 앞으로는 1945년의 미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단일 국가가 전세계 GDP의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20세기 미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단일 국가가 전세계 GDP의 3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10년 후 미국은 전세계 GDP의 20퍼센트 가량을 차지할 것이며, 2020년까지 미국의 점유분은 10퍼센트 내지 15퍼센트까지 하락하게 될 것이다. 같은 기간중 유럽, 중국, 일본 등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이 차지하는 정도만큼 상승될 것이다. 단일 국가가 20세기 미국이 누렸던 바와 같이 전세계적으로 우월한 경제력을 갖는 일은 없을 것인 바, 이것이 지니는 군사적 · 정치적 함의 또한 명확하다.
더욱이 미국 사회가 지닌 다국적이고 예외적인 성격은 미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패권이 엄격하게 국가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면서 그것을 쉽게 보편화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세계 제일의 지위를 추구하는 중국의 노력은 다른 국가의 눈에 국가적 패권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더 간단히 말해서 누구나 미국인이 될 수 있지만, 오직 중국인만이 중국인이 될 수 있다. 본질적으로 국가적인 성격을 지닌 세계적 헤게모니가 수립되기에는 심각한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따라서 일단 미국의 지도력이 쇠퇴하기 시작하면 현재 미국이 구가하는 세계적 지위가 다른 단일 국가에 의해 되풀이되리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미래에 있어 주요한 문제는 "미국이 오랫동안 구가했던 일등적 지위를 통해 세계에 남겨준 유산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분적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한 일등적 지위가 지속될 것이며, 미국이 앞으로 더 제도화될 수 있는 주요 국가간의 협력관계를 얼마나 열성적으로 형성해 내는가에 달려 있다. 사실상 미국이 자신의 세계적 권력을 건설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는 국내외적 이유로 인해 매우 짧을 수 있다. 과거에 진정으로 대중적인 민주주의 국가는 결코 국제적인 일등적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다. 그와 같은 지위를 획득하는 데 요구되는 바 권력에 대한 추구와 경제적 비용 그리고 인명의 희생은 민주적 감각과 양립할 수 없다. 민주화는 제국적 동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이 제일의 초강대국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능력이 없거나 그러한 의지가 없을 때 미래는 매우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만일 미국이 무기력한 세계 강국이 된다면? 미국인에게 벌인 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얼마 되지 않는 사람(13퍼센트)만이 "미국이 유일 강대국으로 남아 있으면서 국제 문제를 해결하는 세계 지도국의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는 제안에 찬성하고 있다. 압도적 다수(74퍼센트)는 미국이 "다른 나라와 더불어 국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분담해야 한다"는 제안을 선호하였다.
더욱이 점차 미국이 다문화적 사회가 됨에 따라, 대규모적이고 광범위한 외부의 직접적 위협이 가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외 정책에 합의를 도출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한 합의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존재했으며 냉전 기간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합의는 깊게 공유해 오던 민주적 가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꼈던- 에 뿌리 박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전체주의에 희생되어 온 유럽인에 대한 문화적 · 인종적 친화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비견할 만한 대외적 도전이 부재한 상황에서 미국 사회는 중심 신조에 직접으로 관련되지 않고, 광범위한 문화 · 인종적 동감을 자아낼 수 없으면서 값비싼 제국적 개입을 요구하는 대외 정책에 합의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만일 이견이 있다면 냉전에서 미국의 역사적 승리가 지니는 의미에 관한 두 가지 극단적 견해가 정치적으로 더 큰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냉전의 종언을 미국의 세계적 지위에 미칠 영향에 상관없이 미국의 세계적 개입을 대폭 감축해야 하는 근거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미국이 자신의 주권을 양도하면서까지 국제적 다원주의를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인식 또한 존재한다. 이 극단적 견해들은 각기 다른 유권자의 지지를 받고 있다.
더 일반적으로 미국 내의 문화적 변화는 점차 제국적 권력의 대외적 행사와는 양립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와 같은 권력의 행사는 높은 수준의 교조적 동기 부여와 지적인 노력 그리고 애국적 만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나라의 지배 문화는 점차 개인적 물신성과 사회 도피적 주제에 지배되어 온 대중적 오락에 빠져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축적된 결과 미국의 대외 지도력 행사를 위해 요구되는 합의 도출이 점차 더 어려워진다. 대중 매체는 이 점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낮은 수준의 희생을 동반하는 선택적 폭력 사용에 대해서마저 강한 반감을 자아내고 있다.
미국과 서유럽은 공히 사회적 물신주의에 따른 제어하기 어려운 문화적 영향과 더불어 종교에 기반한 중심 가치가 극적으로 쇠퇴하는 현상에 직면해 있다.(이 점은 1장에서 요약한 바와 같은 제국 체제의 쇠퇴기에 나타나는 현상과 놀랍게도 유사하다.) 이에 따른 문화적 위기는 마약의 확산이나 물질적 기대 수준을 만족시킬 만큼 증대되지 못하는 경제 성장률 등에 의해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그 반면 소비에 우선 순위를 두는 문화의 결과, 물질적 기대 수준은 계속 높아만 간다. 역사적 우려감, 심지어는 비관주의가 서구 사회의 주요 분야에서 뚜렷해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267~270p

<미국의 마지막 기회>에서 미국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브레진스키의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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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적 사회 모델

물질적 방종, 지속적인 사회적 결점들, 세계에 대한 대중적 무지는 상호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효과적인 세계적 리더십을 위해 전 지구적으로 호소력 있는 강령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증대시킨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소비 방식이 머지않아 점점 더 조급해지는 평등주의적 열망들과 정면충돌하게 될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천연자원 수탈, 과도한 에너지 소비, 전 지구적 생태에 대한 무관심을 통해서이든, 부유한 삶을 위한 과도한 크기의 주거 공간, 가정에서의 사치스러운 자기만족을 통해서이든지 간에, 이런 모습들은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지속되는 빈곤에 대한 무관심을 보여준다.(미국인들이 소비하는 1인당 에너지 소비량만큼을 중국인과 인도인 25억이 소비하는 세계에 대해 생각을 좀 해보라.) 미국의 대중은 아직 이런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미국은 전 지구적 현실들에 민감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사회적으로 매력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미국적 사회 모델이 가지고 있는 주요한 실패들을 시정하고자 하는 광범위한 국가적 합의를 필요로 한다. 10여 년 전 집필한 <통제 불능의 세계 Out of Control>에서, 나는 전 지구적으로 매력적인 모범을 투사할 수 있는 미국의 능력을 가로막는 주요 결점 스무 가지를 열거한 바 있다. 그때로부터,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열네 개 범주들 중 아홉 개 부분이 실제로 퇴행 경향을 보이고 있다.[각주] 예를 들어, 이 기간 동안, 평균 임금이 거의 증가하지 않는 반면에, 가장 많은 급여를 받는 이들은 거의 역겨운 수준으로 보수를 받는 상태에서, 소득 불평등은 신기록을 달성했다.
이렇게 요청되는 사회적 재평가는 신속히 달성되지 않는다. 습관과 기대들은 매우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 대한 수고보다도 더 고상한 명분에 대한 봉사의 관념을 강조하는 의도적인 시민 교육에 의해 고무될 수 있다. 일부 인사들이 이따금씩 주장해왔던 것처럼, 이런 목적을 위한 주요한 조치는 모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의무적 군복무제도의 채택이 될 것이다. 군 복무는 어쩌면 의회가 승인한 각종의 국내외적 자선행위를 포함할 수도 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현재 유일한 국민의 의무는 납세(주요 대기업과 부자들에 대해서는 허점을 가지고 있는)이다. 국방의 의무에 참여하는 것조차도, 긴박한 국가적 위기 상황을 제외한다면, 소외 계층에게만 재정적으로 매력적인 자원 행위에 불과하다.
전 지구적 복지에 헌신하는 군복무 기간은, 미국이 지성적이고, 온정적인 전 지구적 리더십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시민의식(civic consciousness)을 주입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또 그것은 젊은이들의 이상주의적 본능에 호소하고, 그들에게 더 크고 사심 없는 목표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주며, 미국이 만들어내야 할 장기적인 국내적 · 전 지구적 사회의 선택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각성시키는 데 유용할 것이다.
미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임을 감안할 때, 건설적인 전 지구적 정책을 추구하는 미국의 능력은 궁극적으로 대단히 견문이 넓은 대중으로부터 도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대중의 의지에 기초하여 정책 결정을 해야하는 세계 유일 초강대국의 국민들은 세계에 대해 절망적일 정도로 무지하다. 미국인 대다수는 세계사와 세계 지리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다. 지면상으로나 텔레비전으로나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으며, 대중 교육은 앞서 언급한 두 학문 분야에서 특히 취약하다.
미국 대학생의 오직 1퍼센트 정도만이 해외 유학을 가며, 대부분은 다른 국가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에 대해 가장 막연한 형태의 인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미국지리학회(National Geography Society)의 한 연구는 미국 젊은이들의 85퍼센트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위치를 지도상에서 찾아낼 수 없으며, 60퍼센트는 영국을 못 찾고, 심지어 29퍼센트는 태평양조차 식별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게다가 중국어나 아랍어처럼 미래에 국제적으로 중요해질 수 있는 언어들을 현재 공부하고 있는 미국인들은 거의 없다. 공포에 의해 손쉽게 공고화된 대중의 무지는 세계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 미국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진지한 토론을 하기에도 불리한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차기 대통령은 앞으로 필수적인 대중 교육을 위해 개인적 리더십을 행사해야만 한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 230~231p

<미국의 마지막 기회>에서 미국의 잘못된 대외 정책에 대한 브레진스키의 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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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수개월 만에, 세계에서 으뜸가는 전 지구적 강대국의 외교정책은, 미국 자신이 시작했으나 종결시킬 수 없는, 멀리 떨어진 한 국가에서 벌어진 전쟁의 소모적인 결과들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테러에 대한 전쟁은 이슬람 세계 전체와의 충돌이라는 점점 더 험악한 어조를 띠게 되었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대서양 공동체와 가졌던 반세기 동안의 결속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내 세계 여론의 대다수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네오콘의 마니교주의와 파국적인 단호함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새로운 선호, 이 두 가지의 혼합은 9.11 이후 생겨난 미국과 전 세계의 결속을 그 역사적 정점에서 나락으로 던져 넣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 164p
그 후 부시는 그에게 9.11이 특수한 사명에 대한 부르심이었고, 개인적 차원에서 성스러운 소명의 손길을 동반한 외교 안보적 공생애의 시작이었다는 점을 다양한 발언들을 통해서 확인했다. 이런 신념은 그에게 오만함에 가까운 과잉된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단세포적인 마니교적 교조주의를 불어넣었다. 강경한 네오콘적 경향을 가진 몇몇 연설문 작성자들은, "다 덤벼라(Bring'em on)"나 대강 지어낸 조악한 특성화 ["악의 축(axis of evil)"]와 같이 거들먹거리는 호전적 수사, 그리고 때로는 이슬람 혐오증에 대한 선동까지 연설문에 넣으면서, 대통령의 이런 경향을 이용했다. 대통령의 연설문 초안에 대해 전통적으로 용의주도했던 NSC의 감시 기능이 장애를 일으켰다고 그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2002년의 어느 시점에서 NSC가 대통령을 향한 정보의 전달을 선별하고 평가하는 자신의 전통적인 역할을 그만두었다는 결론을 회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정보원으로부터 나온 대안적이거나 회의적인 평가들은 모두 무시되거나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안보 보좌관 라이스 자신이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소유하고 있음을 단정하는 공식적인 치어리더가 되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 168p
2006년에 이르러 전쟁의 대가가 전쟁의 긍정적인 한 가지 성취 -어떤 식으로든, 어떻게든 이미 무능하게 되어버린 사담 후세인을 제거한 것- 를 넘어섰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들 대가는 그 자체로 자명하고,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장황한 상술이 필요치 않다.
첫째,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전 지구적 위상에 비참한 손상을 입혔다. 미국의 전 지구적 신뢰성은 분쇄되었다. 2003년까지, 세계는 미국 대통령이 하는 말을 믿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미국 대통령이 어떤 사실에 대해 주장할 때, 그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에 관한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그러나 바그다드 함락 2개월 후에도, 부시는 여전히 뻔뻔스럽게 "우리는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했습니다"라고 주장(유럽의 청중들에게 보도될 것으로 예정된 한 인터뷰에서)하고 있다. 그 결과 이란과 북한의 핵 문제같이 국제적으로 논쟁이 분분한 사안에 대해, 미국은 그 신뢰성에 심각하게 상처를 입었다.
불신은 또한, 국가 '연성 권력(soft power)'의 중요한 원천인 미국의 국제적 정당성을 훼손했다. 이전에 미국의 힘은 정당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미국이 인류의 기본적 이익들과 어느 정도라도 같은 편에 서 있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된 힘은 본질적으로 더 약하며, 이것은 그 힘의 행사가 이루고자 하는 결과의 성취를 위해 한층 높은 강도의 무력을 투입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성 권력의 상실은 '경성 권력(hard power)'을 감소시킨다.
정당성의 중요한 측면인, 세계 속에서 미국이 가진 도덕적 위상 역시, 문란 행위 -적대적인 민간인들 사이에서 수행되는 반란군 진압 과정의 심리적인 잔인성에 내재하는- 가 점령군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증대함에 따라 더럽혀졌다. 아부 그라이브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 학대 사례를 통해서도 그랬다. 아부 그라이브와 관타나모에서 드러난 잔인성은 그러한 가혹행위에 합치되는 분위기를 허용 -그리고 어쩌면 더 나아가 초래- 한 책임에 국방장관과 부장관을 연관시켰어야만 했다. 후속 조치에 대한 책임을 더하지 못했던 것은 미국의 도덕적 명성에 오점을 남기면서, 병사 개개인들의 일탈행위를 미국 정치 지도력의 행위로 전환시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이 미국이 가진 전 지구적 리더십의 명성을 하락시켰다는 점이다. 미국은 그가 가진 명분을 향해 세계를 규합시킬 수도 없었고, 무력 사용을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도 없었다. 미국의 행동은 미국의 동맹들을 분열시키고, 미국의 적들을 단결시켰으며, 미국의 라이벌과 미국의 불운을 바라는 세력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이슬람 세계는 선동되어 비통한 증오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정치 지도력에 대한 존경은, 미국이 가진 지도력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감과 동시에 급속도로 곤두박질쳤다.
둘째, 이라크 전쟁은 지정학적 재앙이었다. 이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초기 성공에 후속된 탈레반의 재흥기, 알 카에다의 잠재적이고 새로운 피난처가 창출되는 결과와 함께, 테러리스트의 위협으로부터 자원과 주의력을 전환시켰다. 이와 유사한 경향이 소말리아에서 전개되었다. 파키스탄의 정치적 안정성은, 이 국가 내의 극단주의적 요소들이 파키스탄 정권과 미국 사이의 밀접한 연대를 이용함에 따라 불투명한 상태로 남겨졌다.
전쟁의 물리적인 손실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미국인 사망자(3000명에 달하는)의 수효와 불구가 된 이들(2만 명을 넘는)의 수효가 조심스럽게 기록되고 있지만, 살해당한 이라크인들의 수효는 의도적으로 계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 수효는 분명히, 부상자는 언급할 필요도 없이 수만 이상을 헤아릴 것이며, 살해당한 이들의 많은 친족들이 그 고통에 대해 미국을 비난하고 있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다.
직접적인 경제적 비용은 어느 정도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으며, 이 비용의 규모는 -의회의 조사에 따르면- 이미 3000억 달러를 초과했다. 간접적인 비용은 이보다 몇 배 높다. 이것이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적 활력에 주는 함의는 명백히 부정적인 것이다.
부통령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반미 감정은 중동 전역에 걸쳐서 만연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급진적이고 종교적으로 근본주의적인 세력이 대중적 호소력을 획득하고 있으며,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이라크의 파괴는 이 지역의 지정학적 게임에서 이란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아랍 국가를 제거했고, 이를 통해 이 지역 내, 미국의 가장 열렬한 적대자에게 이득을 가져다주고 있다.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이 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자해적인 패배였고, 이란에게 있어서는 순전히 남는 장사였다.
셋째, 이라크에 대한 공격은 미국에 대한 테러리스트의 위협을 증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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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하게 규정된 적도 없으면서 강력한 반이슬람적 함의를 가진 테러와의 전쟁은 이슬람의 여론을 미국에 대한 점증하는 적대감으로 통일시켰다. 이를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 양측을 겨냥한 테러 행위를 위해 새로운 인력을 충원하기 알맞은 토양이 창출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교도에 대한 종교적인 적개심과 함께 외국인들에 대한 정치적 적대감을 고취하면서 극단주의의 호소력을 강화했다. 이어서 이러한 상황은 그들 자신이 상승하는 이슬람의 극단주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위협당하고 있는 온건한 무슬림 엘리트들이 그들의 국민들을 극단주의적인 정치 및 종교적 감정에 반하는 방향으로 결집하여 테러리스트 세포조직과 싸우는 것을 한층 어렵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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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행정부에 의해 열렬하게 수용되었고, 주로 네오콘의 세계관에서 도출된 세 가지 신조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적 성공을 이라크의 재앙으로 변환시킨 정책 결정의 근원이었다. 그중 첫 번째 신조는 중동에서 유래된 테러행위가 특정한 정치적 분쟁이나 최근 역사와는 관계없이, 미국에 대한 뿌리 깊은 허무주의적 분노를 반영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의 신조는 이 지역의 정치 문화, 특히 아랍인들의 정치 문화는 무력을 무엇보다 존중하며, 이런 특성이 미국(또는 미국의 대리인)의 노골적인 무력 행사를 이 지역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영속적 해결책의 본질적 요소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다소 나중에 발전된 세 번째 신조는 선거 민주주의가 외부로부터 부과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무력에 의한 외부 세력의 안정화에 문화적 · 종교적으로 종속되는 가운데에서도, 아랍인들이 자유를 증오하는 상태에서 사랑하는 상태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시 자신에 의해 종종 주장되던 것과는 정반대로, 광범위하게 퍼진 미국에 대한 적대감은 이 지역의 무슬림들이 '자유를 증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적 기억이 이 지역에서 미국 세력과 영국 식민주의의 과거, 현재의 이스라엘 정책이 점점 더 밀접하게 동일시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그들의 분노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영국이 이라크에서 보여준 전적은 2003년 이후 미국이 보여준 행동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계몽된 민주적 지배가 원주민들에게 부과되는 가운데 나타난 진보를 환호하며 증언하는 연이은 보고들, 이어진 실패에 대한 뒤늦은 시인, 그 사이 틈틈이 벌어진 영국 공군(RAF)의 기총소사와 보복적 군사 행동이 그것이다.(1920년대 초 영국의 식민지 장관 윈스턴 처칠은 영국 공군이 이라크 반란군들에게 독가스 폭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촉구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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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관심을 결여한 행정부에 의해 벌어진 전쟁을 더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미국의 행위와 이스라엘의 행동에 대한 심리적이고, 심지어는 가시적인 동일시이다.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장면들 -중무장한,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장한 미군들이 이라크 가정의 문을 마구 두드리는 장면, 이에 직면하여 두려워하는 가족들, 남자들에게 눈가리개를 하고 수갑을 채우는 장면-은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서 행사한 바 있는, 정확하게 동일한 행동들에 대한 이전의 이미지들을 환기시켰다. 이스라엘인들이 종종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겨냥한 테러 행위에 대한 대응으로써 이런 행동을 했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많은 무슬림 목격자들에게 있어, 이런 장면들의 유사점은, 미 제국주의와 팽창주의적 시오니즘(Zionism) 사이의 공모(양자 모두 이른바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전적을 밟고 있다고 주장되는)에 비판의 화살을 돌리는 알 카에다의 극단적인 주장을 강화시켰다. 이런 비판이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그 정치적 효과는 격하고 집중된 분노를 동원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 174~179p
미국은 이스라엘이 그 이웃 국가들에 대항할 때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그러나 규모 면에서는 더 큰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이들 각각은 목표와 이익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에 의해 전적으로 주도되는 지속적인 일방주의적 해결책을 부과할 수 있는 수단을 결여하고 있다. 영국인들은 현명하게 이 점을 이해하고, 장기적인 분쟁 없이 중동을 떠났다. 프랑스인들은 알제리에서 장기적이고 소모적인 전쟁을 치른 후에야 이 점을 알게 되었다. 미국은 같은 교훈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개입, 그리고 만일 이들 분쟁이 지역 전체로 번져나간다면 또 다른 곳에서 이루어질 개입을 통해서 말이다.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이 이 지역에 진척된 민주주의를 부과하는 것이라는 의견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볼 때, 처음에는 경제적인 영역에서 시작해서 정치적인 영역으로, 처음에는 일부 특권층에서 시작해서 한층 넓은 층에게까지 확대된 인권 신장의 장기적인 과정을 통해 등장했다. 이어서 민주주의를 향한 과정은 법치의 점진적 출현과 권력 구조에 대해 법적 통제, 나중에는 헌정적 통제를 점진적으로 부과하는 것을 수반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선거의 채택은 그들의 경쟁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지 않는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존중되는 게임의 규칙과 더불어 타협과 조정의 근본적인 관념에 근거한 법 체제의 등장을 점진적으로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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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민주주의가 시민권의 점진적 신장과 법의 지배의 점진적 출현에 노출되지 않은 전통적인 사회에 조급하게 부과되었을 때, 상호 간에 관용하지 못하는 극단적 입장들이 폭력적으로 충돌하는 가운데, 격화된 분쟁을 촉진시키기 쉽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근시안적인 민주주의 고양 노력이 이라크는 물론 팔레스타인,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야기한 결과이다. 그 결과는 안정에 대한 전망을 고양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적 긴장을 격화시켰다. 이러한 노력들은 기껏해야 열렬하지만 편협한 포퓰리즘, 외견상으로는 민주적이나 실상은 다수당의 폭정일 뿐인 상황을 창출하기 쉽다는 것이다.
중동 민주화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으나, 민주주의의 고양을 궁극적으로 무력을 사용하기 위한 정략적 도구로 간주하고 있다는 의심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민주주의 실험이 실패했으며, 그로 인한 극단주의가 일방적인 힘의 노골적 사용을 정당화한다는 주장을 통해 회고적으로 정당화되는 무력 개입을 유발하면서, '민주주의는 현상을 불안정하게 하는 현상전복의 도구가 되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 181~183p
1967년 국경의 팔레스타인 방면에 주로 위치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계의 전 구간에 대규모 장벽을 일방적으로 건설하는 것은 중요한 기정사실이 되었다. 미국은 이런 장벽 설치와 정착을 통한 계속된 팽창을 묵인함으로써, 이라크 전쟁과 더불어 미국에 대해 점점 더 활성화되어가는 이 지역의 정치적 태도를 지속적으로 형성한 한 분쟁에서, 진정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맡을 책임을 회피해버렸다.
따라서 부시의 재임 기간 동안, 중동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대개 전략적으로 자기 패배적인 것이 되었다. 미국은 문제 해결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들에게만 맡겨놓았을 때,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입장 차이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그 이웃 국가들보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무력만으로는 지속적인 해결 방안을 부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그러한 해결 방안은 주변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고, 분노를 양산할 것이며, 주기적인 폭력 상황을 유발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있어서 미국의 이익이 지속적으로 손상될 것이란 점도 익히 예상되는 바였다.
미국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중재자에서 이스라엘의 지지자로 탈바꿈한 것은 중요한 사건들에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즉, 평화 달성), 이스라엘의 안보를 장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양쪽의 측면에서 미국의 능력을 감소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미국은 점점 더 극단화되고 있는 지역 문제에 더욱 깊이 휘말리고 있었고, 이 지역의 극단화는 미국이 가진 군사력의 한계를 폭로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지속적인 정착촌 건설을 해나가도록 고무되었다. 이스라엘의 무력에 대한 의존은 그들과의 장기적인 역사적 분쟁에서 기꺼이 죽고자 하는 아랍인들을 숱하게 양산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 191p
중국은 자국의 영향력이 증가함에 따라, 점점 더 자기 자신을 미국의 우월성이 구가되던 시기에 대부분 고안된 게임의 규칙에 의해 구속받지 않을 주요한 전 지구적 게임 참가자로 간주할 것이다. 중국은 현재 평화로운 정책을 주장하고 있지만, 지배적인 국제적 협약들을 재정의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다 직설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유력한 중국 외교 문제 저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중국은 국제 체제가 중국의 이익과 요구 사항을 더 잘 반영할 수 있도록, 국제 체제의 개혁과 재편성 작업에 주도권을 쥐어야만 하고 적극적으로 참가하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중국은 국제 체제에서 배제되거나 다른 국가들에 의해 통제받거나 기존의 확립된 체제에 도전하도록 강요받게 될 것이다."
신중하고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국제적 역할을 격상시키면서, 동아시아를 넘어 시야를 확장하고 있는 중국은, 중동을 다음 목표로 겨냥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이 지역에 주요한 임재를 이룩하기 위해, 자신이 믿을 만한 석유 소비자이면서, 무기뿐 아니라 주요 공산품의 경쟁력 있는 공급자이고,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동반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할 것이다. 최근 몇 년간의 미국과는 달리, 중국은 권위주의 정권의 지배자들을 비난하거나 다른 나라 국민들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관습에 대해 오만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아랍인들이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 발언에서 트레이드마크가 된 선도적 어조를 베이징으로부터 듣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가정해보는 것은 전혀 억지스러운 생각이 아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 200~201p
조지 W. 부시는 역사적 순간을 오해했고, 단 5년 만에 미국의 지정학적 위상을 위험스럽게 훼손시켰다. "우리는 이제 제국이고, 우리가 행동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현실을 창조한다"는 환상에 근거한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부시는 미국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유럽은 현재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 두 나라는 더욱 단호하게 서로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일본이 자신을 어떻게 더 안전하게 만들 것인지 은밀하게 고민하고 있는 동안, 아시아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조직화하는 중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적이고 반미적이 되어가고 있다. 중동은 파편화되고 있으며 폭발 직전에 놓여 있다. 이슬람 세계는 상승하는 종교적 열정과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 의해 자극되고 있다. 전 세계에 걸친 여론 조사는 미국의 정책이 광범위하게 두려움을 사고 있으며, 심지어는 경멸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 204~205p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이끌어왔는가?

한마디로, 형편없이 이끌어왔다. 비록 군사 분야와 같은 몇몇 측면에서 미국의 힘은 1991년보다 2006년에 더 탁월할지 모르지만, 공감되는 방향으로 동원하고, 영감을 불어넣으며 지시하는 능력, 그리고 그럼으로써 전 지구적 현실을 주조하는 능력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글로벌 리더로 즉위한 지 15년 후, 미국은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세계 속에서 두려움에 차 있으며 고독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 211p
해결되지 않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은 라빈 총리 암살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채 방치되었다.
라빈 총리의 사망은 궁극적으로 미국 내에서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던 신보수주의 압력단체와 기독교 우파의 동맹을 초래한 이스라엘 내의 우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책의 많은 부분이, 특히 이스라엘 로비의 영향력에 놓여 있던 미국의 외교적 입장은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에서 이스라엘의 선호 -어떤 최종적인 해결책도 미루려 하는- 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변화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중재력은 심각하게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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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2세의 통치 하에서 외교정책은 9.11 테러에 의해 활기를 띠기 전까지 6개월 동안 거의 잠자고 있었다. 세계는 워싱턴에 전 지구적 연합을 형성할 수 있는 전대미문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미국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통령이 주조했던 외교정책은 노골적으로 일방주의적이었고("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당신은 우리의 적이다"), 선동적이었다. 그의 정책은 공포를 유발하면서 공포에 의해 추동되었고, "우리는 전시국가다(We are a nation at war)"라는 구호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부시의 외교정책은 미국을 이라크 전쟁이라는 독단적 선택으로 몰아넣었다.
9.11 테러 이후 부시가 보여준 독선적이고 일방주의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해, 전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미국을 환기시켜주는 상징물은 자유의 여신상이 아닌, 관타나모의 수용자 시설이 되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의심스러운 사실에 근거한 진술들로 뒷받침된 선동을 통해 정당화했고, 값비싼 대가를 치른 자기기만적 자세 -이 지역의 많은 갈등을 격화시키면서도, 이 전쟁이 새롭고 민주적인 중동을 탄생시키고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로 수행했다. 처음에는 굳건하게 대통령의 호전적 수사를 후원했던 미국의 여론은 전쟁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혼란스런 관점들로 분열되었다. 역사에 대한 염려는 더욱 확산되어 갔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 214~215p
전 지구적 정치적 각성의 지정학

전 지구적인 정치적 각성은 역사적으로는 반제국적, 정치적으로는 반서구적, 정서적으로는 점점 더 반미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전 지구적 무게중심의 중대한 변환이 시작되고 있다. 이어서 이러한 변화는 세계 속에서 미국이 가진 역할에 대해 중대한 함의들을 던져주면서 전 지구적인 힘의 분배를 변경시키고 있다.
전 지구적인 정치적 각성의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결과는 제국 시대의 종언(the demise of the imperial age)이다. 제국들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존재해왔으며, 최근에 이르러 미국의 우월성은 종종 새로운 전 지구적 제국으로 묘사되어 왔다. 이것은 미국이 이전 시기의 제국적 체제들과 기본적인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다소 잘못된 명칭이지만, 몇 가지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바로 이런 점이 미국을 반제국적 정서의 표적이 되게 만들었다.
제국적인 안정성은 역사적으로 능수능란한 지배, 우월한 군사조직,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수효 면에서는 더 적었으나 한층 단호했던 지배자들에 대비되는 피지배 민족들의 정치적 수동성에 의존해왔다.(영국은 한때 4000명의 민간 관료와 경찰력을 통해 인도를 통제했다.) 근대에 이르러 러시아 제국(이후 소련)이 답습했던 방식처럼, 처음에 제국들은 인접하는 지역에 대한 영토적 팽창을 통해 발전해나갔다. 근대적인 서구 유럽의 제국들은 주로 무역과 값비싼 광물에 대한 탐욕에 의해 추동된 우월한 대양 횡단 항해술을 통해 성장했다. 따라서 근대의 제국주의는 대부분 서구 세계의 소산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 정점에 다다랐고, 20세기에 걸쳐 대부분 쇠퇴했다. 쇠퇴의 직접적인 원인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지만, 쇠퇴의 근원적인 추진력은 피지배 민족의 정치적 각성 -민족주의적 동요, 구별된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고양된 의식, 커져가는 사회적 궁핍에 대한 자각, 무엇보다 외세의 지배를 그들의 인격적 존엄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는 관점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는- 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 236p
언젠가 우리는 동아시아의 중국, 유라시아의 인도와 러시아가 주도하는, 더욱 신랄하게 반미를 외치는 국제 연대의 출현을 목도할지 모른다. 이 연대는 또한 이란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연대의 출현이 현재는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2006년 여름 상트 페테스부르크에서 열린 사상 최초의 중국-인도-러시아 간 정상회담 후, 일부 중국 외교 전문가들이 레닌이 주창했던 이들 세 국가 간의 반서구 동맹을 향수에 젖은 어조로 저술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이러한 동맹이 전 세계 인구의 40퍼센트, 전 세계 지표면의 44퍼센트, 전 세계 국민총생산(GNP)의 22퍼센트를 아우를 수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이렇게 점점 더 복잡해져가는 전 지구적 맥락에서, 미국이 이슬람 세계와 친교를 회복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결정될 것이다. 이 문제에 장기간 실패를 거듭한다면, 중국은 인도네시아나 파키스탄뿐만 아니라 이란과 페르시아만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증대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만약 이 지역에서 미국의 위상이 지속적으로 저하된다면, 중국의 정치적 임재는 매우 환영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의 지구적 영향력을 크게 향상시키고, 심지어 일부 유럽 국가들은, 장기적으로 볼 때 현재 활기차게 등장하고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와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유럽연합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수도 있다.
미국의 증가하는 전 지구적 부채(현재 전 세계 저축액의 약 80퍼센트를 대출)와 막대한 무역 적자, 대규모 금융 위기, 특히 정서적으로 충만하며 전 지구적으로 만연해 있는 반미 감정은 미국의 복지와 안보에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유로화는 달러화의 만만치 않은 라이벌이 되고 있으며, 양자(달러화, 유로화)에 대한 아시아의 대항마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고 있다. 적대적인 아시아와 자기 이익에만 골몰하는 유럽은 언젠가 미국의 부채에 대해 융자를 지속하는 것을 기피하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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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전 지구적 정치 현실이 전통적인 서구적 지배의 쇠락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대서양 공동체는 반드시 성공적인 비서구 국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의 폭을 확장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일본(그리고 더욱 확장하면 남한까지)을 대서양 양안 간 협의의 확장된 폭 안으로 참여시키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는 일본이 NATO가 행사하는 몇 가지 임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것은 물론, 확장된 NATO의 안보 계획에서 특별한 지위를 행사하게 하는 노력도 수반되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선진적이고 민주적인 비유럽 국가들을 선별해 전 지구적 사안에 긴밀하게 협조하도록 끌어들임으로써, 중용과 부, 민주주의를 갖춘 지배적 핵심 세력은 건설적인 세계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투사할 수 있다.
일본이 머지않아 평화주의자적 입장 -히로시마와 나가시키의 공포에 대한 이해할 만한 반응이며, 그 결과, 미국이 만들어낸 그들의 헌법에 내장되어 있는-을 벗어버리고 더욱 자립적인 안보 역할을 자임하게 될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본은 필연적으로 중요한 군사 강국이 될 것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 241~243P

<전략적 비전>에서 서방의 쇠퇴와, 대중들의 정치적 각성에 따른 반제국주의 운동의 확산
서방의 쇠퇴

결국, 지구정치(global politics, 국가가 아닌 세계를 정치 구성의 단위로 보는 견해_옮긴이)는 단일국가에 패권이 집중되는 현실에서 점차 벗어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진정한 글로벌 초강대국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유일한 국가가 될 가능성이 크다. ……

경제력도 더욱 분산될 것이다. 앞으로 어떤 단일국가도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수준에 도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은 20세기 내내 그 수준을 유지했고, 1945년에는 50%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의 결론 중, 1997년, 210쪽

서방은 오랫동안 세계 정치를 지배했지만 지난 수십 년간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중반에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유럽 전체가 자멸할 위기를 겪었음에도, 서방은 1990년대에 잠시나마 화려하게 부활할 것 같았다. 또한 미국은 소련의 해체로 냉전이 평화롭게 끝나면서 세계 제일의 진정한 초강대국으로 급부상하기 직전인 듯 보였다. 국제 무대에서 정치적 입김 강화에 목이 마르고 활발한 경제체제를 갖춘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과 세계를 이끌고 있는 미국을 보면, 서방이 다시 한 번 국제사회에서 두드러진 존재가 되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EU가 국제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미국의 위상도 흔들리는 듯 보인다. 현재 서방은 대체로 결속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 유산이 지속될지도 의문시되고 있다. 과거에는 잠깐이긴 했지만 전 세계에 확산되는 민주주의, 세계 평화, 그리고 잘 이뤄지는 사회 합의가 서방의 인류유산으로서 오래 지속될 듯했다. 그러나 글로벌 강대국의 분포가 변하고, 정치 각성이 강대국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최근 들어 미국의 대외정책 및 미국의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면서 그에 따른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도 보인다. 이 모든 요인이 어우러져 앞서 언급한 서방의 유산들이 과연 바람직한지 의심되고 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략적 비전, 16~17p
대중들의 정치 각성 확산

글로벌 강대국의 분포 변화는 기존에 없던 한 가지 현상 때문에 가속화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치에 수동적이었거나 억압받던 이들이 정치에 각성하는 현상이며, 이는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처음에는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 최근에는 아랍 세계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실시간 동영상 및 화상 통신기술로 전 세계가 연결되어 지구촌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됐으며, 또한 발전이 더딘 국가들에서 젊은 층 인구가 급속히 증가한 것이 합쳐져 정치 각성이 나타났다. 이 젊은이들은 정치에 민감한 대학생과 궁핍한 실업자들이 주를 이루며, 자신보다 부유한 이들과 지도자들의 부패에 분노한다. 권위주의와 특권을 향한 그들의 분노는 대중들의 열망으로 이어지면서, 대규모 혼란을 낳을 가능성이 전례 없이 커졌다.

대중들의 정치 각성이라는 새로운 사회 현상이 세계 곳곳으로 퍼지고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역사상 유래가 없던 현상이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인류는 한정된 지역에서 고립된 상태로 살았고, 정치에 무감각한 상태로 지냈다. 신체의 자유와 물질이 박탈된 상태에서 그들의 일상은 개인의 생존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종교가 어느 정도의 위안을 주었고, 사회의 전통도 가혹한 운명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가끔씩 휴식과 안정을 제공했다. 정치를 할 수 있는 권한은 대중들과는 전혀 관련 없었고, 어떤 경우엔 신의 뜻을 실천하는 일로 간주되기도 했다. 또한 세습을 통해서만 정치를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지도자가 되기 위한 권력 투쟁은 대부분 소수 집단에 소속된 이들에게만 한정됐다. 인접한 공동체와의 집단 분쟁은 주로 영토나 자원을 차지하는 데 집중됐으며, 비이성적인 종족 간 분쟁과 종교 갈등 때문에 일어나기도 했다. 정치를 위한 대화, 정치에 대한 신념과 열망은 측근인 특권층만의 전유물이었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정치 토론과 정치권력 투쟁에 참여하는 독특한 계층이 등장했고, 이들은 조직화된 사회에서 맨 윗자리르 차지했다. 로마 제국과 중국의 조정에서는 대신과 고위 관리들이 정치활동을 했지만, 이들은 정책보다는 궁중 음모에 몰두했다. 사회가 보다 발전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정치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지방의 토호, 팽창하는 도시의 부유한 상인과 장인, 소수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중들은 여전히 정치와 단절됐다. 물론 간헐적으로 폭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대부분은 농민들의 봉기가 그랬듯이 정치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분노가 표출된 것이었다.

한정된 지역이긴 했지만 여러 계층의 사회 구성원들이 정치에 각성한 최초의 사례는 프랑스 혁명이었다. (...)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격렬한 정치 격변으로 대중들의 민족 정체성이 크게 강화됐다. (...)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표방한 반제국주의 덕분에 일반 대중들의 정치 각성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에서 징집됐던 군인들은 자신의 정치, 인종, 종교에 대한 정체성과 궁핍한 경제 상황을 새롭게 자각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또한 식민지의 상류층들은 서구의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아졌고, 그에 따라 식민지에 서구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식민지인들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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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기에 걸쳐 매스컴의 혁명이 일어나고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면서 개인의 정치 각성은 집단 현상으로 바뀌었다. 19세기에는 전단지와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신문이 등장하여 정치 변화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부채질했다. 중류층과 상류층이 신문을 읽는 습관을 들이면서 이들의 정치 의식이 성장했고, 국가 운영에 관한 정치 대화가 흔한 사회 현상이 됐다. 20세기 초에는 라디오가 등장하여 정치인의 연설이 곳곳으로 전파됐고, 먼 나라의 소식도 바로 알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그때까지 정치에 수동적이었고 정치에서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던 사람들이 다양한 정치 의견을 접하게 됐다.

그 후 TV와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이전에 고립 상태에 있던 지역이 전 세계와 연결됐고, 정치 운동가들이 자신의 정치 주장을 전파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 20세기 말이 되면서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자 어떤 곳에 정치적 소요 사태가 발생하면 다른 곳에서는 시위 방법을 배우게 됐다. 이질적이고 멀리 떨어진 정치 집단들이 서로의 시위 방법을 도입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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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현재 일부 국가에서는 자국의 문화, 경제에 융합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젊은 층이 다른 연령층에 비해 훨씬 많아졌다. 이런 '젊은 층 인구의 급증'이 통신기술 혁명과 맞물리면 더욱 강한 파급력이 생긴다. 교육을 받았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해 좌절감에 시달리는 그들은 과격한 무장단체의 훌륭한 포섭 대상이다. (...)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특히나 정치 각성에 즉각 반응할 수 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이들을 답답한 자국의 정치 현실에서 해방시켜 주기 때문에 이들 역시 무장 투쟁에 가장 이끌리기 쉬운 정치 집단이다. 따라서 현재 많은 지역의 수많은 대학생들은 과거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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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탈식민주의 시대에서 새로이 정치에 각성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자기 비하, 외부 세력의 장기 지배 및 현재의 불리한 환경이 모두 서방의 과거 식민지배가 남긴 잔재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모두 서방을 강하게 비난한다.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의 식민주의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중동의 이슬람 국가 젊은이들은 미국의 대중문화에 심취하면서도, 미국이 중동에 군사 개입을 하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에 크게 분노한다. 이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미국의 행동이 서방 제국주의의 연장이며, 따라서 자신들의 박탈감 역시 서방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선견지명이 있는 한 분석가는 냉전 종식 직후 "서방에 대한 극도의 분노는 요즘 비서방주의 문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기본 요소다."라고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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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대중들의 정치 각성 현상에 따른 간접 영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기술에서 월등한 서방 원정군이 정치에 수동적이고 무기가 빈약한, 그리고 결속력이 떨어지는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저렴하고 일방적인 군사행동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19세기 중앙아프리카에서 영국을 상대로, 캅카스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미국에서 이주민을 상대로 싸운 원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원주민들은 잘 조직되고 월등한 무기를 가진 적들과 상대했기에 사상자의 상대 비율이 100대 1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에 각성하면서 서로 단합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됐고, 그에 따라 외부 세력이 이들을 지배하는 데 드는 비용이 크게 늘었다. 베트남, 알제리, 체첸, 아프가니스탄에서 외세의 지배에 반발한 '인민전쟁(people's war)'으로 알려진 민중의 저항이 그런 사례다. 이들은 의욕이 강했고, 매우 집요했으며, 기존과 다른 전술을 사용했다. 의지와 인내의 싸움에서 무기 기술이 우세한 세력이 반드시 승자가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둘째, 대중들이 정치에 각성하는 현상이 확산되면서 어떤 사회 시스템이 더 우월한지 경쟁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이 역시 과거에는 없던 현상이다. 산업시대 이전에는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군사력(무기, 조직, 동기, 훈련, 전략을 갖춘 리더십)이 국제 무대에서 우월한 지위를 얻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단 한 차례의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우위를 점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상호 비교되는 사회 성과가 국가 영향력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고, 이는 흔한 경우가 됐다. 1800년대 이전에는 사회 통계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그런 통계를 쉽게 얻을 수도 없었다. (...) 그러나 그로부터 채 1세기도 안 되어 전 세계가 인정하는 국제사회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 통계의 비교가 점차 중요한 요소가 되기 시작했다. 특히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 아니면 지금의 미국과 중국 같은 가장 강력한 경쟁국들 사이에서는 그런 비교가 매우 중요해졌고, 지금은 다양한 사회 환경을 비교하는 것이 흔해졌다. (...) 주요 경쟁국인 미국과 중국은 끊임없이 서로의 사회 시스템을 면밀히 조사하며, 전 세계는 미래에 둘 중 누가 세계 1위가 될지는 어느 쪽의 경제 및 사회 시스템이 더 큰 성과를 냈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 그에 따라 대중들의 정서, 집단 인식, 특정한 한 지역이 행사하는 문화 및 정치 영향력에 더 이상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에 따라 지금의 세계는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양상은 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다. 그 결과 현재 서방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서방만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 따라서 앞으로 서방의 역할은 미국, 미국 내의 사회 성과, 그리고 미국의 대외정책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크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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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미국이 국제 무대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계속하려면 미국의 시스템이 꾸준히 전 세계를 매료시켜야 한다. 미국의 건국 이념, 경제 모델의 역동성, 국민과 정부의 호의가 그런 매력의 핵심이다. 미국의 사회 시스템이 월등한 성과를 내야만 과거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다. 특히 제3세계가 점점 중국에 매력을 느끼는 현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 미국의 시스템이 시대에 뒤진 모델로 널리 인식된다면, 계속해서 성장하는 중국의 시스템이 그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략적 비전, 38~48p

<전략적 비전>에서 매력을 잃어가는 아메리칸 드림과, 미국의 주요 문제 6가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야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미국을 자신의 희망으로 여기지만, 세계인들은 미국이 중대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음을 잘 알게 됐다. 어마어마한 국가 부채, 점점 심해지는 사회 불평등, 물질숭배 문화, 탐욕스러운 투기가 지배하는 금융 시스템, 양극화(polarization)된 정치 시스템이 미국을 괴롭히는 문제들이다.

미국의 현실 바로보기

미국이 국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가 국제 무대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결정하며, 그런 추세는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국제 무대에서 미국의 앞날이 어떨지를 평가하려면, 먼저 국가 차원에서 신중하게 판단하여 필요할 경우 국내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 무대에서 현재 미국이 가진 장점뿐만 아니라 약점도 냉철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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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위협이 커지는 미국의 주요 문제는 6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미국의 국가 부채다. 계속 불어나는 부채를 그냥 두면 결국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를 것이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의 2010년 8월 보고서 <예산과 경제 전망>에 따르면, 미국의 공공 부채는 GDP 대비 약 60%다. 높은 비율이긴 하지만 세계 최악의 대열에는 들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임박해오면서 발생할 구조적인 예산 적자는 장기간에 걸쳐 중대한 문제가 될 전망이다. 다양한 시나리오에서 미국의 국가 부채를 추정해 본 브루킹스 연구소의 2010년 4월 보고서에 따르면, 오바마 행정부의 현재 예산을 적용할 때 미국의 국가 부채는 2025년이 되면 제2차 세계대전 후 최고치였던 GDP 대비 108.6%를 넘어설 것이다. 이런 지출 추세를 감당하려면 상당한 세금 인상이 불가피하지만, 현재로서는 세금을 올릴 의지가 없는 듯하다. 따라서 늘어나는 국가 부채 때문에 중국 같은 주요 채권국의 책략에 미국이 더 취약해진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미국 달러화의 지위가 위협받고, 세계의 걸출한 경제 모델로서 미국의 역할이 손상되면서 G20, 세계은행, IMF 같은 기구에서 미국의 리더십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아울러 국내 상황을 개선하는 미국의 능력이 제한을 받고, 어쩌면 반드시 필요한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능력도 크게 약화될지 모른다.

공공정책 전문가 R. C. 알트먼(Altman)과 R. N. 하스(Haass)는 2010년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Foreign Affairs>에 기고한 '미국의 방탕과 미국의 파워 American Profligacy and American Power'라는 글에서 미국의 암울한 전망을 이렇게 요약했다. "2020년 이후의 재정 전망은 완전히 절망적이다. ⋯⋯ 미국은 역사상 분기점으로 급속히 다가가고 있다. 재정을 현명하게 재정비하면 세계 최고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여건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실패하면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만약 미국이 지출을 줄이는 동시에 세입을 늘릴 수 있는 중요한 개혁을 계속 미룬다면 고대 로마제국이나 20세기의 대영제국처럼 재정이 파탄 난 강대국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을 수 있다.

둘째는 결함 많은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큰 골칫거리다.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위험하고 규모를 부풀리는 행위 때문에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 전체를 위협하는 시한폭탄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도덕적 해이를 불러 국내에서 분노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해외에서 미국의 매력을 손상시킨다는 점이다. 규제 완화 및 폐지와 관련한 의회의 무책임한 행동, 주택담보의 부실 대출, 탐욕스러운 월스트리트의 투기꾼들이 주도한 미국 투자은행과 거래소의 도를 넘는 무모함은 2008년의 금융위기와 그에 이은 경기 침체를 촉발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안겼다.

설상가상으로 은행과 헤지펀드 전문 투기꾼들은 경제 혁신이나 일자리 창출에는 신경 쓰지 않고 어마어마한 이익을 챙겼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미국 내 금융 시스템의 최상위 집단들이 개도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내 일반인들과도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2009년 실무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직전까지 금융 부문 종사자들의 임금과 나머지 민간 부문 종사자들의 임금 비율은 1.7:1이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없었던 현상이다. 미국 경제가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규제를 통해 금융 시스템을 개혁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며, 경제 전반의 성장을 촉진하는 동시에 투명성과 책임 소재를 규명할 수 있는 규제가 있어야 한다.

셋째, 소득격차 심화와 신분상승 가능성의 축소는 장기간에 걸쳐 사회 합의와 민주주의의 안정을 위협한다. 사회 합의와 민주주의는 미국의 효과적인 대외정책에 반드시 필요하기에 이는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 통계국에 따르면 1980년 이래 미국의 소득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1980년 기준으로 미국 전체 가계의 상위 5%와 하위 40%가 국가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각각 16.5%와 14.4%였다. 2008년에 이르자 그 비율은 각각 21.5%와 12%로 격차가 더 벌어졌다. 가계의 연간 소득이 아닌 소유한 부를 따졌을 때는 더 큰 차이를 보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따르면 2007년 기준으로 미국 전체의 국가 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국 가정의 상위 1%가 33.8%, 하위 50%가 고작 2.5%였다.

미국은 소득과 부의 불평등 모두에서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는 세계의 주요 선진국 중 가장 불평등한 사회라는 뜻이다. 그런 소득 불평등도 아메리칸 드림의 기본 개념인 신분상승의 기회가 많아졌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지난 몇 십 년간 미국은 신분상승의 기회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의 최근 데이터를 보면, 경제대국 중 미국이 중국, 러시아와 비슷한 수준으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주요 개도국 중에서는 브라질만이 미국보다 높은 소득격차를 보였다.

게다가 유럽과 미국의 세대간 소득 이동성을 비교한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의 전반적인 경제적 계층 이동이 여타 선진국에 비해 낮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현재 상위로의 소득 이동성 비율이 일부 유럽 국가들보다 뒤진다는 점이다. 이렇게 된 주요 원인은 미국의 문제 많은 공교육 제도다. OECD에 따르면 미국은 초증등 교육에서 학생 1명당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나라인데도, 선진국 중 학업 성취도가 가장 뒤처진다. 이 떄문에 미국 경제 앞날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미국 시스템의 매력을 떨어뜨리고 인적 자본을 활용할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미국의 네번째 골칫거리는 국가 기반시설의 노후 현상이다. 중국은 새 공항과 고속도로를 건설하느라 바쁘다. 유럽과 일본, 중국은 첨단 고속철도를 자랑한다. 반면 미국의 공항, 고속도로, 철도는 20세기 그대로다. 중국의 고속철도만 해도 총연장 구간이 거의 5,000km에 이르지만 미국은 전무한 실정이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공항은 워싱턴과 뉴욕의 공항보다 효율성이나 미적 감각에서 수십 년이 앞선다. 미국의 공항들은 부끄럽게도 갈수록 제 3세계의 분위기를 띤다. 이처럼 21세기에 적합한 기반시설 혁신에서 (지금도 지방에는 전근대적 사회 양식이 적지 않은) 중국이 미국보다 앞섰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미국 토목학회(ASCE)는 2009년 미국의 전반적인 기반시설 성적을 최저점인 D로 매겼다. 세부적으로는 항공 부문 D, 철도 부문 C-, 도로 부문 D-, 에너지 부문 D+로 평가했다. 미국의 도시 재개발도 무척 더디다. 수도 워싱턴 D.C.를 포함해 수많은 도시에서 빈민가와 낙후된 공공주택이 너무도 많다. 이는 정부가 사회에 무관심하다는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뉴욕 시에서 워싱턴 D.C.까지 느리고 진동이 심한 '고속열차' 아셀라(Acela)를 타보면 차창 밖으로 미국의 낙후한 기반시설이 한눈에 들어온다. 20세기에 미국의 특징이었던 사회 혁신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탄탄한 국가 기반시설은 경제 효율성과 경제 성장에 반드시 필요하며, 동시에 국가 전반의 역동성을 상징한다. 역사에서 보면 앞서가는 국가의 시스템이 성공적인지의 여부는 국가 기반시설의 상태와 수준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고대 로마의 도로와 수로, 영국의 철도망이 대표적인 예다. 앞서 지적했듯이, 미국의 기반시설 상태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경제를 갖춘 국가라기보다 쇠퇴하는 국가의 모습이다. 미국의 기반시설이 계속 녹슬면 경제 생산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신흥 강대국들의 도전이 더욱 거세지는 현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미국과 중국의 시스템 경쟁이 더욱 가열될 수 있는 상황에서, 낙후된 기반시설은 미국의 침체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미국의 다섯 번째 문제는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에 매우 무지한 대중들이다. 미국인들은 기본적인 세계 지리와 시사 문제는 물론, 심지어 세계사에서 발생했던 중요한 사건에도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다. 이런 달갑지 않은 현실은 부분적으로는 문제가 많은 공교육 시스템 때문이다. 2002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조사에 따르면, 캐나다, 프랑스, 일본, 멕시코, 스웨덴의 18~24세 사람들 중 세계 지도에서 미국을 찾을 수 있는 비율이 미국인들보다 높았다. 미국의 젊은 성인을 상대로 한 2006년 조사에서 63%는 중동 지도에서 이라크를 찾지 못했다. 이란을 못 찾은 비율은 75%, 아프가니스탄을 못 찾은 비율은 88%나 됐다. 미국이 막대한 대가를 치르며 전쟁을 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최근 역사 지식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의 대학 4학년생 중 절반 이상이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NATO가 창설됐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성인의 30% 이상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싸운 두 나라의 이름을 대지 못했다. 미국인들의 지식 수준은 다른 선진국 사람들보다 뒤쳐져 있다. 2002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스웨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영국, 캐나다, 미국, 멕시코의 젊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시사와 지리에 대한 지식 수준을 비교했다. 미국은 개도국인 이웃나라 멕시코를 겨우 누르고 꼴찌에서 두 번째를 차지했다.

이렇게 미국인들이 무지한 현실은 미국 언론들이 국제문제를 잘 보도하지 않아서 대중들이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쉽게 접할 수 없어 더 악화된다. 5대 주요 신문은 예외가 될 수 있겠지만, 미국의 언론과 TV는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나 대재난을 제외하고는 국제 뉴스를 거의 보도하지 않는다. 뉴스라고 하면 사소한 소식이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간주되는 경향이 짙다. 많은 대중들이 무지한 상황이 누적되면, 대중은 선동가들이 무추기는 두려움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특히 테러가 발생할 경우 더욱 그렇다. 그런 두려움은 자멸적인 대외정책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높인다. 대중이 무지한 데다 이익단체의 로비까지 겹치면, 탈냉전 시대의 복잡한 국제 현실을 무시하고 극단주의자들의 단순한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는 정치 환경이 될 것이다.

미국이 안고 있는 여섯 번째 문제는 다섯 번째와 관련이 있는데, 정치 시스템이 갈수록 정체되고 당쟁도 심해지는 현상이다. 정치권의 타협이 과거보다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데, 이는 미디어(특히 TV, 라디오 토크쇼, 정치 의견을 담은 블로그)가 갈수록 당파성을 띠고 독설이 난무하는 것에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 비교적 지식이 적은 대중은 흑백 논리의 선동에 쉽게 현혹된다. 그 결과 정치가 마비되면서 재정적자 감축 같은 중요한 문제의 해결책을 도출할 수 없다. 그래서 세계인들에게 미국은 긴요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력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더구나 선거자금 기부에 크게 기대는 미국의 정치 시스템은 돈은 많지만 편협한 국내외 로비단체에 쉽게 흔들린다. 이런 단체들은 미국의 국익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현재의 정치 구조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다. 랜드 연구소의 보고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크고 깊은 뿌리를 가진 정치 양극화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미국은 좌익과 우익 사이의 장기적인 정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다."

이상의 여섯 가지 상황은 미국의 쇠퇴가 필연적이라고 확신하는 이들에게 유리한 근거가 된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략적 비전, 62~70p
<전략적 비전>에서 러시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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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스탈린주의에 대한 러시아의 모호한 태도 또한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에 상당한 걸림돌이다. 나치 시절의 과거와 완전히 단절한 독일과 달리 러시아는 겉으로는 스탈린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역사상 가장 잔인한 범죄에 직접 책임이 있는 자들을 여전히 숭배한다. 방부 처리된 레닌의 시신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을 굽어보는 웅장한 무덤에 모셔져 있고, 스탈린의 유골은 크렘린 궁의 벽에 안치돼 있다. 만약 히틀러의 유해를 이런식으로 안장했다면 독일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과거 역사에 대한 러시아의 이런 모호한 태도는 역사 교과서에서 레닌과 스탈린 정권을 분명하게 비난하지 않은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이 문제에 관한 푸틴의 애매한 발언과 옛 소련의 영광을 향한 그의 향수는 추악한 소련의 과거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러시아 정부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러시아의 이런 태도는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에 부담을 주는 한편, 러시아의 민주화에도 걸림돌이 된다.

Strategic Vision: America and the Crisis of Global Power. New York: Basic Books, 2012.[* 전략적 비전, 아산정책연구원, 2016, 황선돈 옮김, 177페이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적대감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러시아보다 먼저 서방에 접근한다면, 러시아가 서방을 향해 문호를 열고 유럽의 밝은 미래에 기여할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가 서방과 단절되고 러시아에 정치상 종속될 경우 러시아는 제국주의의 부활이라는 헛된 꿈에 사로집힐 가능성이 있다.

Strategic Vision: America and the Crisis of Global Power. New York: Basic Books, 2012.[17]
향후 20여 년간 서방과 러시아가 진정성 있게 협력하고 결속력 있는 관계를 형성할 것이라 예상하는 것 또한 허무맹랑한 생각이 아니다. 러시아가 EU와 NATO의 기준에 맞춰 법에 기반을 둔 광범한 민주화에 착수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최적의 환경이 조성된다면 러시아가 EU와 NATO, 양쪽 모두에 가입할 수도 있다.

Strategic Vision: America and the Crisis of Global Power. New York: Basic Books, 2012.[18]

<거대한 체스판>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중요한 지정학적 추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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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국제 정세로 볼 때, 유라시아의 지도 위에서 적어도 다섯 개의 중요한 지정 전략적 게임 참가자와 다섯 개의 지정학적 추축(이 중에서 두 국가는 부분적으로 게임 참가자로서 자격을 지니고 있다)을 변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 독일 · 러시아 · 중국 · 인도가 중요하고 역동적인 게임 참가자인 반면, 영국 · 일본 · 인도네시아는 비록 중요한 국가이기는 하지만 게임 참가자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 우크라이나 · 아제르바이잔 · 남한 · 터키 · 이란 등은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추축이다. 터키와 이란은 어느정도 그들의 제한된 역량을 동원하여 지정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64p

<거대한 체스판>에서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남한의 지정학적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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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은 극동 지역의 지정학적 추축이다. 남한이 미국과 맺고 있는 밀접한 관계는 미군이 일본에 대규모로 주둔하지 않고서도 일본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해 주며, 따라서 일본이 독립적인 군사 강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통일 혹은 중국 영향권으로의 편입 등으로 말미암아 남한의 지위가 변화하면, 극동에서 미국의 지위 역시 크게 변화할 것이고 일본의 지위도 마찬가지로 크게 변화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남한의 증대된 경제력으로 인해 남한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공간'이 되었고, 남한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값진 것이 되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72p

중국을 견제하고 일본을 통제하기 위한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과, 남북통일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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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큰 중국의 영향권을 인정할 것인가? 세계적 차원에서 중국을 성공적으로 포섭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은 어디까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재부상하는 이 천자의 나라에 현재 중국의 정치적 반경 바깥에 있는 지역을 어느 정도까지 양도해야 하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남한의 미군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그것이 없이는 미 · 일의 방위 협력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지속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일본이 군사적으로 지금보다 더 자립적이 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통일을 향한 어떠한 운동도 미군의 계속적인 남한 주둔을 방해할 가능성이 높다. 통일 한국은 영구히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으려 들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중국이 자신의 결정적인 무게를 한반도 통일 쪽에 실어 주는 대신 강력하게 요구할 대가이기도 하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80p

남북통일의 지정학적 파급효과와, 일본을 통제하기 위한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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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에서 지정학적 추축국인 한국 또한 미 · 중 분쟁의 원천이 될 수 있으며, 한국의 미래는 미 · 일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국이 분단되어 있고, 불안정한 북한과 점점 더 부유해지는 남한 사이에 전쟁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한 미군은 반도에 남아 있어야 한다. 어떠한 형태의 일방적 철수라 할지라도 새로운 전쟁을 촉발시킬 수 있으며, 일본 내 미 군사력의 종언을 가져 오는 신호탄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미국이 남한을 포기한다고 할 때 일본인이 일본 영토에 계속해서 배치된 미군에 대한 신뢰를 지속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는 급속한 일본의 재무장이 초래될 가능성이 무엇보다 높고, 지역 전체의 광범위한 불안정을 초래할 가능성마저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재통일 역시 심각한 지정학적 딜레마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미 군사력이 통일 한국에 그대로 남게 된다면, 그것은 중국인 입장에서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보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중국인이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통일을 묵인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한국 통일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 이른바 연착륙(soft landing)을 포함하면서 - 중국은 정치적으로 그것을 방해하면서 북한 내의 반통일 세력을 지지할 것이다. 만일 한국의 통일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 북한의 '붕괴' (crash landing)를 포함하면서 - 중국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의 관점에서 볼 때 통일된 한국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일 한국이 동시에 미국 세력의 연장선(배후의 일본을 발판으로 한)이 아닐 경우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주한 미군이 없는 통일 한국은 처음에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립 형태에서, 이어서는 점차 - 한편으로 아직까지도 잔존하는 강렬한 반일 감정에 의해 움직이면서 - 중국의 확고한 정치적 영향권 혹은 교묘하게 중국의 권위가 존중되는 권역 안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크다. 다음 문제는 과연 일본이 미국 세력을 위한 아시아의 유일한 기지로서 기능하려고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적어도 이 문제는 일본의 국내 정치를 심각하게 분열시킬 것이다. 어떤형태로든 미국의 군사적 반경이 극동에서 위축되는 것은 유라시아의 안정적인 세력 균형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려는 한국을 현상 유지시키는 것이 좋다는 미국과 일본의 이해 관계를 높여 줄 것이다.(비록 각각의 경우는 약간 다른 이유에서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만일 그러한 현상 유지가 어려워진다면 매우 완만한 단계를 통해 미국과 중국간의 적응을 심화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와중에 진정한 한 · 일 화해는 어떠한 형태의 한국 통일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더욱 안정적인 지역 구도의 형성에 기여할 것이다. 한국 통일이 수반하는 다양한 국제적 복잡성은 한구고가 일본의 진정한 화해를 통해 완화될 수 있을 것이며, 두 나라 사이의 협력적인 정치 관계를 증대시킬 것이다. 미국은 그와 같은 화해를 촉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독 · 불 협력에서 밟았던 단계들, 이어서는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서 밟았던 단계들(예를 들면, 대학간 공동 프로그램부터 공동군의 창설에 이르기까지)이 이 경우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포괄적이고 지역적으로 안정적인 한 · 일 동반 관계는 역으로 극동 지역에서 미국 세력의 계속적 임재를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 심지어는 한국 통일 이후에까지.
일본과의 밀접한 정치적 관계가 미국의 세계적 지정 전략적 이익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일본이 미국의 속방으로 남아 있을지, 경쟁국이 될지, 혹은 동반자가 될지는 미국인과 일본인이 얼마나 명확하게 두 나라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국제적 목표를 규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미국의 극동에서의 지정 전략적 사명과 일본의 세계적 역할에 대한 야망 사이의 경계선을 얼마나 명확하게 획정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일본에 있어 일본의 대외 정책에 관한 국내의 토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과의 관계가 일본의 국제적 방향 감각에 기준이 되고 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일본, 즉 재무장을 향해 매진한다거나 중국과의 단독적 적응을 시도한다거나 하는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 역할의 종언을 불러들일 것이고, 지역적으로 안정된 미-일-중 삼각 구도에 종지부를 찍게 할 것이다. 이것은 다시 미국이 관리하는 유라시아 전체에 걸친 정치적 균형의 형성을 가로막을 것이다.
요컨대 방향 감각을 상실한 일본은 절박하게, 그러나 동시에 위험하게 몸부림 치는 뭍 위의 고래와 같을 것이다. 그것은 아시아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미국 · 일본 · 중국간에 필요한 안정적 균형을 위한 대안을 창조할 수는 없다. 미국은 일본과의 밀접한 동맹을 통해서만 중국의 지역적 열망에 순응할 수 있고, 그것의 더욱 전횡적인 발현을 제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초 위에서만 복잡한 삼자 적응 - 미국의 세계적 힘과 중국의 지역적 우월성 그리고 일본의 국제적 지도력 등을 포괄하는 - 이 고안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까운 시일 안에 일본 내의 미군을 감축하는 것(마찬가지 이유에서 주한 미군을 감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일본의 군사적 노력이 미치는 지정학적 범위를 크게 증대시키는 것이라든지, 그것의 실제 행동 범위를 넓히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 대규모 미군 철수는 일본으로 하여금 전략적 방향 감각의 상실을 해소하기 위한 맥락에서 대규모 군비 증강에 나서게 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반면 일본이 더욱 큰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미국이 압력을 가하는 것은 지역적 안정성의 전망을 훼손시키고, 거대 중국과의 폭 넓은 적응을 방해하며, 일본이 더욱 건설적인 국제적 사명을 담당하는 것을 가로막고, 그럼으로써 유라시아 전체에 걸친 지정학적 안정성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244~247p

이란과의 화해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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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이란의 적대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미국에 이익이 되지 못한다. 궁극적인 화해는, 최근 휘발성이 높아지고 있는, 이란을 둘러싼 지역에 있어 상호간의 전략적 이익을 인정하는 것에 기초해야만 한다. 그러한 화해는 당연히 쌍방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어느 일방의 호의에 따라 공여되는 것이 아니다. 강력하고, 비록 종교적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열광적으로 반서구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이란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 궁극적으로 이란의 정치 엘리트 역시 그와 같은 현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유라시아에서 미국의 장기적 이익은 터키와 이란의 경제 협력을 반대하는 현재 입장을 철회함으로써 더 잘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261p

상대국을 악마화하는 미국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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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CSIS에 있는 나의 동료 앤써니 코즈맨(Anthony H. Cordesman)의 충고(1997년 2월 육군전쟁대학 the Army War College에서 발표한 「미국에 대한 미국의 위협 The American Threat to the United States」에 관한 그의 보고서 16쪽)를 인용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코즈맨은 쟁점, 심지어는 국가들 자체를 악마화(demonize)하고 있는 미국의 성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이란, 이라크, 리비아는 미국이 사실적이지만 제한적인 위협을 제기하는 적대적 체제로 간주하고, 어떤 중장기적 목표를 지닌 전략을 발전시키지 않고 '악마화'하고 있는 경우이다. 미국 전략가는 이들 국가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을 기대할 수 없으며, 이들을 '악당'(rogue) 국가 혹은 '테러리스트' 국가로 낙인 찍어 취급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 미국은 도덕적으로 회색인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것을 흑백으로 분리하려는 노력은 성공할 수 없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261p

4. 기타

한국에서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나, 미국에서 이 사람의 이름은 폴란드어 발음을 존중해주어 '즈비그니에프'(/zbɪɡnjɛf/)라고 발음한다. 그러나 성인 Brzeziński는 폴란드어식인 브제진스키(/bʐɛˈʑij̃skʲi/)가 아니라 영어화된 발음인 브레진스키(/brəˈzɪnski/)라고 발음한다.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다.

첫째 아들인 이안 브레진스키는 외교 전문가이자 공화당원으로 조지 W. 부시 1기 행정부의 국방부차관을 역임하였다. 둘째 아들인 마크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외교관으로 현재 주 폴란드 미국 대사로 재직중이다.

막내딸 미카는 MSNBC의 정치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19]


[1] 국무장관을 비롯한 일반 외교관을 기준으로는 조지 케넌, 존 포스터 덜레스, 딘 러스크 등도 포함된다.[2] 또한 키신저, 스코크로프트 두 사람이 공화당(닉슨,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재직했던 반면, 브레진스키는 민주당(카터) 행정부 시절 백악관에 재직하였다.[3] 브레진스키 이전부터 민주당은 개입주의 성향을 띄었지만 현재와 같은 적극적인 개입 성향으로 기운 것은 브레진스키의 영향력 때문이다. 특히 코소보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에서 드러나는 민주당의 반러시아 기조가 브레진스키의 영향이라는 평가가 많다.[4] 다만 Foreign policy에서 미어샤이머와의 중국 부상에 관한 논쟁에서 중국의 평화적 부상을 예측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에 대한 신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5] Zbigniew Brzezinski was born in Warsaw, Poland, on March 28, 1928 into an aristocratic Roman Catholic family originally from Brzeżany, Tarnopol Voivodeship (then part of Poland, currently in Ukraine). The town of Brzeżany is thought to be the source of the family name. Brzezinski's parents were Leonia (née Roman) Brzezińska and Tadeusz Brzeziński, a Polish diplomat who was posted to Germany from 1931 to 1935; Zbigniew Brzezinski thus spent some of his earliest years witnessing the rise of the Nazis. From 1936 to 1938, Tadeusz Brzeziński was posted to the Soviet Union during Joseph Stalin's Great Purge, and was later praised by Israel for his work helping Jews escape from the Nazis. #[6] In 1938, Tadeusz Brzeziński was posted to Montreal as a consul general. The Brzezinski family lived proximate to the Polish Consulate-General, on Stanley Street. #[7] 정작 게이츠 자신은 미국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유도했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일축했다.[8] 소련이 폭풍333 작전을 발동하여 당시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대통령이자 광적인 공산주의자인 하피줄라 아민을 살해한 날짜이다. 광적인 공산주의자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며 소련마저 아민의 잔혹성에 경악했다.[9] Le Nouvel Observateur. 현 롭스(L'Obs).[10]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소련 몰락에 일조했으니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미국의 인식에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분명히 미국의 핵심적 국익에 해가 되는 일이었다. 상대가 사담 후세인 치하 이라크처럼 사방천지에 적을 만들어놓고 쿠웨이트 침략으로 선빵까치 친 모지리가 아니라 소련이었기 때문에 직접 충돌까지 가지 않은 것이지.[11] Kepel, Gilles (2006). Jihad: The Trail of Political Islam. I.B. Tauris. pp. 138–139, 142–144. ISBN 978-1-84511-257-8.[역자주1] '공격받지 않는 안전지대'를 가리키는 정치학계의 관용어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은 캄보디아라오스 일대에 호치민 루트를 건설하여 '성역'으로 사용했다. 이는 결국 미국과 남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초래했다.[역자주2] 1979~1981년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을 가리킨다.[14] 특히 타라키를 죽여버린 것은 당시 소련의 지도자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를 충격에 빠뜨렸다. 아민을 가리켜 개새끼(bastard)가 따로 없다고 직설적으로 욕했을 정도인데 왜냐하면 타라키는 브레즈네프 자신이 보호하겠다고 공개적으로 확언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KGB 의장이자 후임 서기장이 된 유리 안드로포프도 타라키 암살을 계기로 아민 축출을 결심했다. Rodric Braithwaite. (2012). Afgantsy: The Russians in Afghanistan 1979-89, Profile Books, p.73[15] 미국의 격월간 잡지 <포린 어페어스>의 1994년 3-4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유래한 내용이다. 원문은 "Without Ukraine, Russia ceases to be an empire, but with Ukraine suborned and then subordinated, Russia automatically becomes an empire."라고 나온다.[각주] 예를 들어, 지난 15년 동안 미국의 구가 부채는 절대적 총량과 GDP 대비 양면에서 증가했고, 무역적자는 급격하게 증가했고, 순수 저축량은 절대적 총량과 GDP 대비 양면에서 심각하게 감소했다. 건강보험을 받지 못하는 65세 이하 국민들의 비율은 증가했고, 부유층의 소득점유율(share of income)은 증가했으며, 불법행위에 의한 손실은 거의 2배가 되었다. 불법 마약 사용을 알리는 미국인의 비율처럼, 빈곤 가운데 있는 아프리칸 아메리칸(African American)은 증가했고, 빈곤층을 위한 사회적 상승의 기회는 감소되었다.[17] 전략적 비전, 아산정책연구원, 2016, 황선돈 옮김, 185페이지.[18] 전략적 비전, 아산정책연구원, 2016, 황선돈 옮김, 187페이지.[19] 2006년 패리스 힐튼이 저지르던 기행으로 뉴스가 도배되던 시절, 생방송 뉴스에서 패리스 힐튼 소식이 적힌 뉴스 원고를 읽으려다가 이따위 소식을 전하는게 신물이 난다며 그자리에서 원고를 라이터로 불태우려다 옆에서 말리는 바람에 실패했는데, 이후 기어이 파쇄기에 원고를 갈아버리는데 성공했다.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패리스 힐튼 소식으로 해외 연예 토픽란이 도배되다시피하던 시절이었기에 미카 브레진스키의 행동을 속시원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