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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네디 가문에 전해내려온다는 저주에 대한 이야기. 별칭은 케네디가의 비극(Kennedy tragedies)이다. 알다시피 케네디가에는 불행을 겪은 사람이 많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사례는 역시 암살당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과 그의 동생인 로버트 F. 케네디. 물론 도시전설이지만 케네디 전 대통령과 그 형제자매만 두고 보면 9명중에 2명은 20대에, 2명은 40대에 비명횡사했고 한명은 살아도 사는게 아닌 삶을 살았으니 그야말로 저주란 이야기가 나올 법 하다. 다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대가족은 구성원이 많기도 했고[1], 교통사고나 이혼 등 어느 대가족이나 겪을 만한 불행들은 저주라고 끼워 맞춘 감이 있다.2. 연표
타임라인- 1941년: 조셉 P.(패트릭) 케네디 부부의 장녀이자 셋째인 로즈메리 케네디는 어린 시절 입은 뇌손상으로 약간의 정신지체 장애[2]가 있어 정신적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비밀리에 전두엽 절제술을 받았으나 실패했다. 사실 그녀의 증상은 오늘날로 보면 조울증에 해당되는 것 같았지만...[3] 이후 위스콘신에 있는 보호시설에 수용되어 여생을 보냈다. 일단 86세까지 생존하기는 했지만, 케네디 집안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 #
- 1944년 8월 12일: 조셉 P. 케네디 부부의 장남이자 첫째인 조셉 P. 케네디 주니어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폭격기 조종사로 복무 중 아프로디테 계획에 참여하였다가 사고로 29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 1944년 9월 9일: 조셉 P. 케네디 부부의 차녀이자 넷째인 캐슬린이 영국의 하팅턴 후작 윌리엄 캐번디시[4]와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5]을 했으나 캐번디시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결혼 4개월 만에 벨기에에서 전사했다.
- 1948년 5월 13일: 조셉 P. 케네디 부부의 차녀이자 넷째인 캐슬린 캐번디시 후작부인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후 다시 연애를 하여 새로 사귄 애인과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던 중에 프랑스 세벤 산맥에서 추락사고로 28세의 나이로 사망. 장례식은 아버지만 참석했었다고 전해진다.
- 1956년 8월 23일: 재클린 케네디가 사산된 딸을 낳는다. 이 딸은 알링턴 국립묘지의 케네디 부부의 무덤에 그냥 딸이라는 묘비만으로 안장되었다. 후에 조사에 의하면 케네디 부부는 이 딸에게 아라벨라(Arabella)라는 이름을 붙여주려고 했다고.
- 1963년 8월 9일(추정): 재클린 케네디가 차남이자 넷째인 패트릭 부비에 케네디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조산으로 태어난 이 아들은 생후 40시간만에 호흡곤란으로 사망한다. 일각에서는 케네디가 재클린에게 성병을 옮긴 것이 조산의 원인이 됐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참고로 패트릭 역시 사산된 큰누나처럼 알링턴 국립묘지에 부모와 함께 안장되었으나 큰누나와 달리 묘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 1968년 6월 6일: 조셉 P. 케네디 부부의 3남이자 일곱째인 로버트 F. 케네디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직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서한 비샤라 서한[6]에게 암살. 이 때부터 케네디가의 저주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 1969년 7월 18일: 테드 케네디가 마서스 빈야드(Martha's Vineyard)섬 인근의 작은 섬 채퍼퀴딕(Chappaquiddick)에서 파티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밤중에 빗길 속에서 몰던 차가 다이크(Dyke) 다리에서 추락해 동승하고 있던 비서인 메리 조 코펜(mary jo kopechne)이 사망했다. 이것을 차파퀴딕 사건이라고 한다. 에드워드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다음날 아침까지 경찰에 사고를 신고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내연의 관계가 아니었나, 비서를 구조하는 게 가능했는데 아무것도 안 했던 것 아닌가 등의 의문점이 에드워드 케네디에게 평생의 멍에가 되어서 대통령 선거 도전을 포기해야 했다.
- 1973년 8월 13일: 로버트 F. 케네디의 장남이자 둘째인 조 케네디 2세가 자동차 운전 부주의로 남동생 데이비드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남동생의 여자친구는 하반신 불수가 되게했다.
- 1973년 11월 17일: 에드워드 케네디 부부의 장남이자 둘째인 에드워드 케네디 주니어가 12살의 나이에 골종양으로 오른쪽 다리의 일부분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 신체장애인이 되었다.[7]
- 1984년 4월 25일: 로버트 F. 케네디의 3남이자 넷째인 데이비드 케네디가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한 호텔에서 마약인 코카인 및 마약성 진통제인 데메롤의 과다복용으로 사망. 데이비드는 앞서 언급한 맏형 조지프의 부주의한 운전으로 척추를 다쳤을 때 통증을 치료하면서 약물에 중독되었다.
- 1999년 7월 16일: 존 F. 케네디의 장남이자 셋째인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사촌(로버트 F. 케네디 부부의 4녀이자 11째인 로리 케네디)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내 캐롤린 베셋, 처형 로렌 베셋과 함께 경비행기를 몰고 가다 경비행기 추락으로 사망. 하필이면 추락한 곳이 에드워드 케네디가 채퍼퀴딕 사건을 일으킨 마서스 비니야드의 대서양 상공.
- 2019년 8월 2일: 로버트 F. 케네디의 차녀이자 다섯째인 코트니 케네디의 외동딸 시어셔 케네디 힐이 22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사망해 할머니인 에셀 케네디에 의해 발견되었다. 정확한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약물 과다 복용 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 2020년 4월 2일: 로버트 F. 케네디의 장녀이자 첫째인 캐슬린 케네디(1951년생)의 차녀이자 둘째 매브 케네디 맥킨(1979년생)이 아들 기드온(2012년생)과 함께 카누를 즐기다 실종되었다.# 결국은 두 사람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다.##
[1] 케네디 가문은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계라 대체로 자식을 많이 낳았고, 몇 대에 걸쳐 내려오며 후손이 매우 많아졌다. 외손들까지 포함하면 더욱 많다.[2] IQ 60~70의 지적장애. 사람들은 그가 외조부모가 6촌간 이어서 우생학적으로 그러한 결과가 나왔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자폐증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자폐증의 특성상 성욕을 참지 못하고 그냥 밖으로 나가서 아무하고나 관계를 가지고 돌아오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인 패트릭은 로즈메리가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아이를 임신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고 한다. 자식들을 정계에 진출시키겠다는 계획이 이미 있었던 그였기에 집안의 명예를 위해 전두엽 절제술이나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등 최대한 장애를 가진 딸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았다.[3] 실제로도 정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도 한다. 굳이 따지자면 감정 조절에 서툴러서 쉽게 난폭해지는 문제가 있기는 했다.[4] 실제 후작이 아니라, 데번셔 공작(Duke of Devonshire)의 후계자가 받는 예우칭호[5] 캐슬린의 부모는 모두 아일랜드 대기근 때 미국으로 이민간 아일랜드계의 후손이었고, 남편은 영국의 귀족 가문 출신이라, 아일랜드와 영국 간의 수백년에 걸친 민족감정이 문제가 되었다. 아울러 케네디 부부가 독실한 신자였던 점도 딸이 성공회 신자인 영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식 때 신부 가족 중에서는 유럽에 머물던 큰오빠 조셉 P. 케네디 주니어만 참석했다.[6] 요르단계 미국인. 전설적인 프로파일러 로버트 K. 레슬러는 저서인 살인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람을 면담한 후 전형적인 편집증으로 인해 이러한 사건을 저질렀다고 분석.[7] 이 날은 마침 로버트 케네디의 장녀이자 첫째인 캐슬린 케네디의 결혼식날이었다고 한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신부의 아버지 역할까지 해야 했으므로 병원에 있다가 부리나케 결혼식장으로 향했다고 본인의 자서전에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