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연방 상원의원 (오하이오 클래스 3) | ||||
제71-75대 로버트 J. 버클리 | → | 제76-83대 로버트 A. 태프트 | → | 제83대 토머스 버크 |
로버트 A. 태프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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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E81018> 미합중국 제76-83대 연방 상원의원 로버트 A. 태프트 Robert A. Taft | |
본명 | 로버트 알폰소 태프트 시니어 Robert Alphonso Taft Sr. |
출생 | 1889년 9월 8일 |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 |
사망 | 1953년 7월 31일 (향년 63세) |
뉴욕주 뉴욕 | |
학력 | 예일 대학교 (B.A.) 하버드 대학교 (법학 / L.L.B) |
가족 | 아버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아내 마사 휘튼 바워스 슬하 4명 |
최종 당적 | |
의원 선수 | 3 (상원) |
의원 대수 | 76, 79, 82 |
경력 | 오하이오 주 하원의원 (1921~1931) 오하이오 주 상원의원 (1931~1933) 미국 연방상원의원 (1939~1953, 오하이오 주) 미국 연방상원 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 (1947~1953) 미국 연방상원 공화당 원내대표 (1953)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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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스터 공화당(Mr. Republican)
상원의원 재직 당시 그의 별명 #
미국의 변호사이자 보수 정치인이다. 공화당 소속의 오하이오 주 연방 상원의원이었으며, 상원의원으로 활동했을 당시 공화당을 대표하는 인물들 중 손꼽힌다. 공화당 의원들과 민주당 내 남부보수파 의원들의 정치적 연합체인 보수연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미국 보수주의의 대부 중 하나다. 공화당 소속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장남이기도 하다.상원의원 재직 당시 그의 별명 #
1957년에는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가 주도하는 상원위원회에 의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5명의 상원의원'의 일원으로서[1]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
2. 생애
2.1. 초기
당시 오하이오 주 연방판사로 재직하고 있던 태프트 대통령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예일 대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했고, 변호사로 일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소속된 공화당에 입당한 그는 1921년부터 1931년까지 오하이오 주의회의 하원의원으로 재직했다가,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오하이오 주의회 상원의원으로 재직했다. 당의 보수주의적 노선에 충실했던 그는 지도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덕분에 1938년 오하이오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당 현역을 꺾고 당선된다.2.2. 연방 상원의원 재직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태프트는 보수연합을 이끌면서 뉴딜 정책 반대에 앞장선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로서 그는 뉴딜 정책의 확산을 방지하고 뉴딜 정책에서 파생된 정부 주도의 프로그램들을 중지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뉴딜 정책 프로그램들의 비효율성과 방만함을 지적했고, 대공황을 끝내기 위한 해결책으로서 자유기업의 역할을 강조했다. 뉴딜 정책을 사회주의적이라고 간주한 그는 뉴딜 정책의 적자재정, 농업 보조금, 관료주의, 노동조합 지원, 의료보험 국유화 등을 비판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재정보수주의 노선에 따른 정부지출 제한과 균형재정, 낮은 세금, 경제성장률을 높이기 위한 기업친화적 정책, 제한된 사회복지정책, 그리고 해군과 공군력 강화에 집중한 국방력 확충으로 구성된 보수주의적 국내정책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대외정책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공화당의 전통적인 불개입주의 노선에 입각해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다만 진주만 공습 이후에는 미국의 참전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2차대전 이후 해리 S. 트루먼 행정부의 영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2]을 표했으며, 당시 신생 독립국이었던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지지를 표명[3]했다.
트루먼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협조적이었던 것과 달리, 국내정책에 있어서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 시절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대립했다. 특히 트루먼 행정부의 의료보험 국유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이에 대한 의사들의 저항은 정당한 일이라는 입장을 미국 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그가 상원의원 임기 중 발의한 법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47년 태프트-하틀리법(Taft-Hartley Act)[4]이다.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상원에서 68명, 하원에서 331명의 찬성을 얻어 트루먼의 거부권을 무효화하고 통과된다.[5] 이 법안 때문에 미국의 노동 운동은 상당한 시간 동안 제한을 받게 되었다.
2.3. 대선 출마 시도
공화당의 가장 유력한 상원의원들 중 한명이었던 만큼, 1940년 대선부터 1952년 대선까지 줄곧 공화당의 유력한 후보군으로 언급됐으며, 본인 또한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지망했다. 하지만 공화당 내에서도 보수 강경파에 속했기 때문에 듀이와 같은 온건파에 밀려 번번히 실패했다.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맞붙는데, 둘이 격돌한 공화당 경선은 공화당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경선 중 하나로 꼽힌다. 결국 아이젠하워의 승리로 돌아갔고, 아이젠하워는 태프트와의 앙금을 해소하기 위해 태프트 계파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을 것이며, 정부지출을 삭감하고, 모든 국내정책 분야에 있어서 사회주의의 침투를 막을 것을 약속했다.[6]
2.4. 말년과 사망
1948년 대선에서 듀이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태프트는 아이젠하워를 위해 중서부를 순회하며 열정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고, 아이젠하워의 압승에 힘입어 공화당이 상원 다수당 지위를 탈환함에 따라 다수당 원내대표(Majority Leader)에 취임하게 된다. 이후 그는 자신이 이끄는 보수연합과 함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내 정책 추진을 힘껏 조력했다. 심지어 조지프 매카시의 매카시즘 광풍이 공화당에 장기적으로 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가라앉히려 물밑에서 조율을 시도했을 정도. 물론 이에 굴복할 매카시가 아니었지만..하지만 태프트의 이러한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어느새 골프친구가 된 아이젠하워와의 라운딩에서 갑자기 통증을 느낀 그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결국 1953년 7월에 사망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을 포함한 수많은 공화당 정치인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3. 여담
- 차남인 로버트 A. 태프트 주니어(1917~1993)도 오하이오 주 연방상원의원(1971~1976)을 역임했고, 손자 로버트 A. 태프트 3세(1942~, 주니어의 아들)은 오하이오 주지사(1999~2007)를 지냈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3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오하이오 | | 1,255,414 (53.62%) | 당선 (1위) | 초선 |
1944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500,609 (50.30%) | 당선 (1위) | 재선 | ||
195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645,643 (57.54%) | 당선 (1위) | 3선[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