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6 11:34:02

오버로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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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1. 개요2. 전개
2.1. 노르망디 상륙2.2. 파리 진격과 해방2.3. 프랑스 전역 해방

1. 개요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해왕성 작전과 상륙 지역 일대를 점령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포함하여 궁극적으로 프랑스 전역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다.

2. 전개

2.1. 노르망디 상륙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해왕성 작전을 실시했고, 노르망디 전역을 탈환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시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노르망디 상륙작전팔레즈 포위전 항목 참고.

2.2. 파리 진격과 해방

연합군은 2달 동안 노르망디 지역에 묶여 있었지만 독일군 잔존 세력을 팔레즈에 모아서 포위 섬멸 했다. 귄터 폰 클루게장군은 동쪽으로 후퇴 할 계획을 세웠지만 히틀러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리고 클루게 마저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에 1944년 8월 19일에 자살했다. 또한 8월 15일 연합군이 프랑스 남부 해안에 상륙하는 용기병 작전이 시행되자 독일군은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독일군의 후퇴는 연합군의 신속한 진격을 의미했다.

연합군이 점차 프랑스의 수도 파리로 다가오자 샤를 드 골은 파리 내부의 레지스탕스에 봉기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1944년 8월 15일 레지스탕스가 봉기를 했고 파리시의 공무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곧 이어 파리 시내의 모든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에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도시 전체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당시 독일 수비대 사령관이자 파리 군 사령관이었던 디트리히 폰 콜티츠장군은 파리 파괴 대신 레지스탕스의 거점인 그랑 팔레에 발포하라고 명령 했다.

파리 내부가 어수선 했을 때 1944년 8월 24일 자유 프랑스의 필립 르클레르장군이 이끄는 제 2 기갑사단이 파리로 진격했다. 다음 날 미 제 4보병사단도 포르트 디탈리[1]를 통해 파리 시내로 진격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 하다고 생각을 한 디트리히 폰 콜티츠장군은 파리를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8월 25일 항복을 했다.[2] 항복을 한 콜티츠 장군은 항복 서명식을 치르기 위해 파리 경찰청으로 이송된 다음 르 클레르 장군이 지휘소를 차린 몽파르나스 기차역으로 이동을 해 정식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파일:external/media-3.web.britannica.com/48153-004-3BFC5561.jpg
1944년 8월 26일 파리를 행진하는 샤를 드골과 조르주 비도, 필리프 르클레르

독일군이 항복을 정식으로 선언한 8월 25일 자유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파리 시청으로 이동을 해서 군중들을 향해 파리가 해방되었다는 연설을 했다. 연설이 끝난 다음날 르 클레르의 제 2기갑 사단은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했고 8월 29일 미군과 영국군도 오슈가에서 개선문까지 행진을 했다.

2.3. 프랑스 전역 해방

파리 해방은 전투의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연합군의 급속한 진격은 보급선이 길어짐을 의미했고 프랑스 북부의 항구 도시들은 여전히 독일군 수중에 있거나 파괴되었다. 해결책은 벨기에의 항구도시 안트베르펜을 해방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북부 프랑스를 해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8월 말 미 제3군은 베르됭과 코메르시 주변에 있는 뫼즈 강의 주요 교량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연료 부족으로 실패했다. 그래서 미 10군단의 기갑 부대는 9월 6일 알자스 로렌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메츠를 공격했다. 2달 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대부분의 요새를 고립 시켰고 11월 26일 베르됭 요새[3]가 함락되자 요새 안의 독일군은 차례로 항복했고 12월 13일 마지막 요새인 잔 다르크 요새가 미군에 항복을 했다.

메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미 12군단은 프랑스 북동부의 주요 도시 낭시를 향해 진격했다. 9월 10일 독일군에 의해 폭파되지 않은 다리를 점령한 미군은 교두보를 확보했고 낭시를 점차 포위했다. 낭시 남쪽의 모젤 강을 건너 미군은 마른-라인 운하를 점령함으로서 낭시는 포위되었다. 9월 15일 미군은 독일군을 도시의 동쪽 변두리까지 밀어 붙였고 당시 낭시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장군은 낭시를 포기하고 독일군은 뤼네빌로 철수했다.

미군이 성공적으로 낭시를 점령하자 독일 기갑부대는 모젤 강변에 있는 미 12군단의 교두보를 제거하기 위해 핫소 폰 만토이펠장군이 지휘하는 제5기갑군을 보내 기습 공격 했지만 독일 기갑군의 빈약한 전술 배치로 인해 미국의 화력에 크게 당했다. 결국 200대의 탱크 및 돌격포를 잃은 독일군은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미군 및 자유프랑스군은 알자스 로렌 지역으로 진군을 했고 영국군 및 캐나다군은 벨기에를 향해 진격했다.

한편 1944년 11월 22일 프랑스 제 1군과 프랑스 제 2기갑사단은 스트라스부르를 향해 진격했다. 스트라스부르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분쟁지역이었던 알자스 로렌지역의 핵심 지역이다. 이 곳이 해방된다는 것은 프랑스 시민들에게 크나큰 힘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하루만에 프랑스 제2기갑사단은 시내로 진입해서 오후 2시 30분에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삼색기를 계양했다. 독일군은 무질서하게 도망쳤고 알자스의 독일인과 협력자들은 도보로 도주했다.

이로서 대부분의 프랑스 영토는 해방되었지만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들은 아직 해방되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고 히틀러가 자살하자 라로셸, 덩케르크, 로리앙, 생나제르에 있던 독일군이 항복함으로 인해 프랑스 전역은 해방되었다.


[1] 파리 13구에 위치한 파리와 이탈리아를 잇는 도로[2] 자유 프랑스군 필리프 르클레르 장군 및 레지스탕스에 콜티츠와 휘하 주둔군 만 7천여명과 함께 항복한다. 이때 파리의 구원자라는 평을 듣게 되었고 전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석방 되었다.[3] 1차대전 당시 그 유명한 베르됭 전투가 벌어진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