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000,#999 | <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
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
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
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
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바르샤바 봉기 폴란드어: Powstanie warszawskie 독일어: Warschauer Aufstand 영어: Warsaw Uprising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점령 폴란드에서 발생한 봉기 | ||
▲ 바르샤바 봉기의 전개 | ||
기간 | ||
1944년 8월 1일 ~ 10월 2일 | ||
장소 | ||
폴란드 총독부 바르샤바 | ||
교전 국가 및 세력 | [[폴란드 지하국| ]][[틀:국기| ]][[틀:국기| ]] 폴란드 동부군 (9.14~)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지원 국가 및 세력 | 폴란드 망명 정부 미국 [[영국| ]][[틀:국기| ]][[틀:국기| ]] [[남아프리카 연방| ]][[틀:국기| ]][[틀:국기| ]] 소련 | |
지휘관 | 지그문트 베를링 타데우시 코모로프스키 타데우시 페우친스키 안토니 흐루시치엘 카롤 지엠스키 에드바르드 프페이퍼 얀 마주르키에비츠 레오폴트 오쿨리츠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하인리히 힘러[1] 발터 모델 니콜라우스 폰 포어만 라이너 슈타헬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2] 하인츠 라이네파르트[3]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4] 오스카 디를레방어[5] 페트로 댜첸코 파울 오토 가이벨[6] |
결과 | ||
나치 독일의 봉기 진압 성공 | ||
영향 | ||
소련의 루블린-브레스트 공세 중단 독일의 바르샤바 파괴 및 민간인 학살 | ||
병력 | 49,000명[7] | 25,000명[8] |
피해 | 10,000여 명 전사 5,200~6,000여 명 실종 5,000여 명 부상 15,000여 명 포로 민간인 20만 명 이상 사망 | 3,000여 명 전사 전차 및 장갑차 310대, 트럭 및 승용차 340대, 야포 22문, 전투기 1대 손실 |
[clearfix]
1. 개요
<rowcolor=white> 브위스카비차(Błyskawica, 번개)[9]를 들고 있는 폴란드 국내군 병사 |
2. 서론
<rowcolor=white> 바르샤바 1944에서 묘사된 바르샤바 봉기 |
따라서 바르샤바 봉기의 목표는 첫째로 독일 국방군을 바르샤바에서 몰아내는 것이었고, 둘째로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해방시키기 전에 폴란드인들의 손으로 바르샤바를 해방시켜 폴란드의 정통성에 대해 소련보다 우월을 점하는 것이었다. 봉기 초기 폴란드 지하국가 하의 폴란드 봉기군은 바르샤바 중심가 대부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봉기군은 주요 요충지인 무기고를 탈취하는 데 실패하였고 이로 인해 보급품 부족과 무기 고갈에 시달리며 장기간 봉기를 이끄는 데에 한계를 보이게 된다.
바르샤바에 도착한 소련군은 전력 재정비 문제로 폴란드 측의 무전 접촉을 무시하고 바르샤바 경계 밖에서 대기만 하고 있었다. 소련은 연합국의 압박에 못이겨 바르샤바에 공중 보급을 하였지만 대부분 독일군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폴란드 측에 도착한 물품들도 대부분 당장 사용할 수 없는 소련제 탄약들과 폴란드의 항복을 권유하는 삐라가 전부였다. 이러한 정황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반공 성향의 폴란드 지하국가가 독일군에게 소탕되기를 바라며 고의적으로 폴란드를 방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원인이 되었다.
9월에 이르자 상황은 극도로 암울해져 봉기군은 하수도로 들어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도시를 파괴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으며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동원해 하수도의 봉기군을 소탕했다.
바르샤바 봉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수많은 저항 운동 중 가장 거대하고 중요했던 봉기로 꼽힌다. 비록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으나 폴란드를 끝없이 수탈하던 나치 독일에 대항해 2차 대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봉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현대 폴란드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공산정권 시기 폴란드에서는 주목받을 계기가 없었으며, 소련은 서방의 지원을 받는 자유폴란드군이 아닌 자국의 지원을 받아 조직된 폴란드 인민군만이 존재했다고 역사를 왜곡했다. 소련군은 살아남은 국내군 병사들을 처형하거나 굴라그로 보내 버렸으며 오늘날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연구는 1989년 폴란드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시작되었다.
3. 배경
1944년 6월 22일 시작된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소련군의 진격에 동부전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독일의 중부집단군은[10] 궤멸당했고 엄청난 크기의 지역이 다시 소련의 통제하로 들어갔다. 소련군의 진격은 거칠 것이 없어서 곧 폴란드 영내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작전이 끝나갈 즈음엔 바르샤바 함락도 목전이었다. 바르샤바 시내에선 소련군의 포성이 들릴 정도였다.한편, 영국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1942년 말부터 '폭풍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내부의 무장봉기를 통해 나치를 몰아내고 자력 독립하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고 이를 실행할 단체로 폴란드 지하국가(Polskie Państwo Podziemne, 속칭 PPP)를 지원하고 있었다. 1943년 중순부터 계획은 소규모로 실행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나치의 지배가 강력했기에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폴란드 이동의 독일군이 전면적으로 붕괴되고 소련군에 의한 폴란드 점령이 눈앞에 다가오자 스탈린이 폴란드의 독립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는 폴란드 지하국가에게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켜 소련군이 폴란드로 진격하기 전에 폴란드 각지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르부프, 루블린, 크라쿠프, 비아위스토크, 우치 등 폴란드 주요 도시에서 7월 말부터 크고 작은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남부의 주요 도시 르부프가 해방되었고 이 밖에 폴란드 각지에서 작은 도시들이 다시 탈환되는 등 충분히 고무적인 성과가 잇달아 나오고 있었다.[11] 이런 성과들에 힘입어 폴란드인의 수도 바르샤바에서도 가장 대규모의 봉기가 준비되고 있었고 PPP의 주력인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 AK)을 중심으로 1944년 8월 1일 17시(W-Hour)[12]를 기해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되었다.
4. 봉기군의 구성
<rowcolor=white> ▲ 타데우시 코모로프스키의 사진 |
폴란드 봉기군이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리라는 상당히 낙관적인 희망을 가진 것은 그 동안 소련의 반응을 보고 판단한 것이었다. 실제로 모스크바에 위치한 폴란드 방송국에서는 폴란드 국내군에게 계속 봉기를 선동하는 방송을 하였으며, 외곽에서는 소련군이 거의 바르샤바 시내로 곧 진입할 것처럼 빠르게 진격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7월 31일, 봉기 지도자들이 바르샤바에 모여 회합을 가졌고, 그들은 다음 날 8월 1일 오후 5시에 봉기를 개시하기로 하였다. 봉기군은 그 때까지 충분한 양의 무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는 결정적인 실책이었다.[13] 봉기 직전 바르샤바 곳곳에서 파열음이 튀어나와서 독일군과 이따금씩 소규모 교전들을 벌였다. 봉기의 최고 지도자는 타데우시 코모로프스키였는데 그는 국내군 사령관이기도 했다. 부르코모로프스키는 폴란드 왕국 시기부터 이어진 군인 귀족 출신이었다. 이 봉기가 실패하고 사로잡혀 복역한 그는 2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반공 투쟁에 나섰으나 끝내 런던에서 사망했고 폴란드가 민주화된 1994년에서야 조국에 묻혀졌다.
5. 봉기 발발
5.1. 시작
8월 1일 오후 4시 30분에는 최고 수위의 경계령이 독일군 진영에 하달되었고, 오후 5시경 본격적 봉기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봉기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로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매우 당황하였다. 봉기군은 독일군의 기관총 세례를 감내하면서 계속 공격해 나갔다. 그 날 바르샤바의 상당 부분이 봉기군에 의해 해방, 8월 2일부터 봉기군의 신문배부가 시작되었고, 8일부터는 자체 라디오 방송인 '섬광'을 수신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봉기군 소속 조시카(Zośka) 대대와 바첵(Wacek) 대대는 필사적인 전투 끝에 5일 1943년에 이미 폐허가 되었던 바르샤바 게토를 점령했고, 겡시우프카(Gęsiówka)에 살고 있던 350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하였다. 이후 이 유대인들도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8월 4일 당시 봉기군의 점령지 |
5.2. 진행
"저런, 대포도 없고 전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다니... 현대전에서 이런 게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게요."
-이오시프 스탈린, 44년 8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Stanisław Mikołajczyk)[14]에게[출처]
하지만 바르샤바 봉기는 시작부터 잘 풀리지 않았다. 바르샤바 내의 독일군은 7월 말의 병력 증원을 통해 15,000여 명에서 30,000여 명으로 불어난 상황이었고, 외곽에도 90,000여 명이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30,000여의 병력은 봉기가 시작되자마자 증원되었다.-이오시프 스탈린, 44년 8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Stanisław Mikołajczyk)[14]에게[출처]
봉기군 사령관 중 한 명인 안토니 흐루시치엘(Antoni Chruściel)은 국내군이 장악한 영역을 8개 구역으로 구분하였다. 8개 구역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졌다.
구역 | 지역명 |
제1구역 | 도심(Warszawa-Śródmiescie), 구시가지(Warszawa Stare Miasto) |
제2구역 | 졸리보시(Zoliborz), 마리몬트(Marymont), 비엘라니(Bielany) |
제3구역 | 볼라(Wola) |
제4구역 | 오호타(Ochota) |
제5구역 | 모코투프(Mokotów) |
제6구역 | 프라가(Praga) |
제7구역 | 바르샤바 자치구역(Warsaw County) |
제8구역 | 오켕치에(Okęcie) |
기습적으로 독일군을 공격해서 바르샤바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으나, 바르샤바의 독일군 대부분은 전력을 보존한 채로 방어태세를 갖추는데 성공했고, 무엇보다 무기고 탈취에 거의 실패했기 때문에 봉기군의 무장상태는 극히 열악했다. 충분한 탄약과 무기를 갖춘 봉기군은 20,000-45,000여의 봉기군 중 2,500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봉기군의 무장 상태를 보면, 소총은 1,000여 정, 권총은 1,750여 정, 중기관총은 7정, 대전차포는 20문에 불과했다. 기관권총은 300여 정이었고, 25,000여 발의 수류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관단총은 60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폴란드군은 브위스카비차(Błyskawica) 기관단총이라는 스텐 기관단총의 폴란드 자체 카피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중화기는 커녕 소화기와 탄약의 자체 생산능력조차 처음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rowcolor=white> 폴란드 국내군이 제작한 장갑차 쿠부시(Kubuś)[16] |
<rowcolor=white> 친위대 군복을 착용한 파라솔(Parasol) 대대원의 모습. 어깨에 폴란드 국기를 동여맸다. |
게다가 폴란드 국내군이 애당초 봉기를 일으켜 폴란드를 장악할 능력 자체가 부족했다. 당시 폴란드 국내군은 무기가 부족했던 탓에 독일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군사적 요충지에 별로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연합군의 요청에 마지못해 출격한 소련군이 투하한 공중 보급품 중 30%만이 봉기군 점령지로 투하되었으며 나머지는 독일군의 손에 들어갔다. 더군다나 소련군은 낙하산도 없이 보급품들을 투하하여 대다수가 파손되었기 때문에 공수된 물자의 대부분이 사실상 사용불능 상태였으며, 그나마 온전한 탄약이나 총기류들도 소련제였기 때문에(...) 독일제 장비를 노획하여 사용하던 봉기군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18]
사실 스탈린은 정치적 이유뿐만 아니라 군사적 이유로도 협력을 거부했다. 소련의 선봉 부대가 바르샤바 교외 라지민(Radzymin)에서 발터 모델의 독일군에게 괴멸되어 바르샤바를 지원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도시를 양분하는 비스와 강 동안을 점령하긴 했지만, 정작 바르샤바를 지원하기 위한 행동은 거의 취하지 않았다. 호환가능한 소련제 장비를 보급해줘도 모자랄 판에 소련군은 보급품이 아니라 삐라(!)를 살포하기도 했는데, 소련군이 삐라를 뿌린 대상은 독일군이 아니라 봉기군이었다. 게다가 그 삐라의 내용이란 것도 용기를 복돋아주는 내용이 아니라 무모한 모험을 중단하고 항복하라고 종용하는 아스트랄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비록 카틴 학살이 폭로되어 이에 경악한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가 소련과 단교를 하기도 했지만, 폴란드는 엄연히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즉 같은 연합국을 상대로 저런 짓거리를 자행한 셈이다.
소련도 독일군의 파쇄공격에 당한 후에는 당분간 공세를 펴기에는 여력이 부족했고, 굳이 바르샤바 봉기군을 구하기 위해 무리할 생각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기가 계속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갔다.
5.3. 독일군의 진압
에리히 폰 뎀 바흐 SS 대장(상급집단지도자) (봉기 진압 사령관) |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SS 중장(집단지도자) (SS 진압 부대 지휘관) | 파울 오토 가이벨 SS 소장(여단지도자) (바르샤바 SS 및 경찰 지도자) |
라이너 슈타헬 국방군 공군 중장 (바르샤바 수비대 지휘관) | 오스카 디를레방어 SS 상급대령(상급지도자) (디를레방어 여단장)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SS 소장(여단지도자) (카민스키 여단장) |
나치의 인간백정 6인방 |
<rowcolor=white> 봉기 진압을 위해 투입된 디를레방어 여단과 아제르바이잔계로 구성된 제111보병대대 |
"총통각하, 분명 현 상황은 우리에게 그리 좋지 않습니다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폴란드놈들이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것은 우리에겐 축복이나 다름 없습니다. 우린 기껏해야 5~6주면 이 문제를 해결할 겁니다. 그리고 700년 동안 독일의 동쪽을 가로막았던 1,600만~1,700만 명의 폴란드인들의 수도인 바르샤바는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 폴란드는 더 이상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큰 문제가 안될 겁니다."
-하인리히 힘러, 4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의 발생을 히틀러에게 보고하면서
-하인리히 힘러, 4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의 발생을 히틀러에게 보고하면서
독일군은 첫 날부터 강력한 진압에 나섰다. 당시 나치 독일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체제가 흔들리고 있었으며, 서부전선에서는 오버로드 작전으로 파리 해방이 목전에 있었고,[19] 동부전선에서는 바그라티온 작전의 대성공으로 인해 중부집단군이 전멸하고 전선이 붕괴된 상태였다. 그래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수뇌부는 또 다른 반란이 발생하는 것을 막고 자신들의 체제가 아직 견고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본보기로 바르샤바를 초토화시킬 작정으로 진압 작전에 돌입했던 것이다.
얼마 후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지휘하는 진압부대가 파견되었고 디를레방어 여단, 카민스키 여단, 아제르바이잔계로 구성된 제111보병대대 등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으면서 진격을 개시했는데, 이들 부대들은 모두 정규전을 위해 창설된 부대들이 아니라 오로지 민간인들에 대한 무차별 테러를 위해 창설된 부대였으며 부대원들도 도덕적 인식 자체가 결여된 교도소 형집행을 받고 있었던 중범죄자 출신들이었다. 디를레방어 여단의 경우 그 여단장인 오스카 디를레방어(Oskar Dirlewanger)부터 미성년자 성폭행 전과가 있었다. 게다가 이들 부대들이 실제로 거둔 전과는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민간인만 학살하는 상황에 국방군은 물론 다른 무장친위대 부대들마저 기겁하면서 카민스키 여단장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는 상부로부터 습격으로 위장한 암살을 당하고 디를레방어 여단장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보직 해임되었다. 참고로 디를레방어의 진격속도는 하루에 1.6km도 못갔다. 왜냐면 죽이고 강간해야되니까... 그가 저질렀던 악행에 대해선 항목 참고. 그나마 카민스키 여단은 디를레방어보단 덜 죽이고 다녔는데 그 이유인즉슨 그들의 진격로에 보드카 양조장(...)이 있었기 때문. 이들 부대가 바르샤바로 투입된 초기 며칠간 적어도 6만 5천의 바르샤바의 시민들이 죽었다.
<rowcolor=white> 진압을 위해 투입된 제1강하기갑사단 헤르만 괴링 |
8월 2일, 폴란드 국내군이 폴란드 국내군 포로들을 비롯한 폴란드 시민들이 수감된 모코투프 교도소의 수감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접근하자, 파울 오토 가이벨 바르샤바 SS 지도자가 이들을 모조리 학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모코투프 교도소를 담당하던 토텐코프 사단 예비 동원 대대가 수감자들을 총기와 수류탄을 동원해 무차별 학살했고 700명 이상의 수감자들이 사망했다.
봉기 개시 2주 후, 독일군은 도심에서 기갑병력을 동원, 봉기군을 공격했으나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봉기군은 뒤이어 반격했으나 독일군이 장갑열차를 동원하는 바람에 반격은 실패했다. 독일군의 공세는 9일부터 18일까지 구시가지와 은행 광장에 집중되었다. 독일군의 폭격과 포격에 대공망이 사실상 전무한 봉기군은 거의 대응할 수 없었고, 얼마 안 가 구시가지와 은행 광장은 초토화되었다. 독일군은 부상당한 봉기군이 모인 병원에까지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로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일부 병원에서는 심지어 분살까지 일삼았다. 더군다나 볼라 지구의 성 라자루스 병원에선 1,360명 이상의 환자와 병원 직원들이 집단학살당했다.[21]
구시가지는 8월 14일 끝내 독일군에 함락당했다. 이곳에서 봉기군과 독일군은 각각 7천 5백, 4천의 사상를 냈고, 시민도 3만여 명이 사망하고 7천 명이 부상당했다. 부상자가 포함된 3만 7천여 명이 바르샤바 시내로 도피했다. 구시가지에 남겨진 민간인들은 독일군이 점령하는 과정에서 모두 학살당했다.[22] 구시가지에서의 봉기군의 영웅적인 항전은 후에 폴란드인들의 뇌리 속에 깊이 뿌리박혔다. 9월 2일 경 봉기군은 구시가지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구시가지가 독일에 점령된 후 뒤이어 바르샤바 수력발전소가 독일군에 함락되었고, 8월 17일 무렵 독일은 380mm 로켓포를 탑재한 슈투름티거, 600mm 자주박격포 칼[23]과 800mm K(E),[24] 원격 조종 대전차폭탄 골리아트 등을 투입시켰다. 18일까지 봉기군과 구시가지의 시민들은 도심으로 쫓겨 들어갔다. 바르샤바 곳곳에서 매우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하인리히 힘러가 이 전투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비견했을 정도로 치열했다. 봉기군은 곳곳에서 공격해 오는 독일군들을 막아내는가 하면, 포위된 독일군들을 힘들여 분쇄해 나갔다.
<rowcolor=white>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진압작전에 투입된 슈투름티거 |
<rowcolor=white> 바르샤바를 향해 발포하는 칼 자주박격포[25]와 그 포탄에 맞아 터지는 당시 푸르덴셜 폴란드 지사 빌딩. 독일군은 이런 식으로 바르샤바를 잿더미로 만들었다.[26] |
<rowcolor=white> 바르샤바를 향해 발사되는 네벨베르퍼 다연장로켓.[27] |
<rowcolor=white> 바르샤바 구시가지를 폭격하는 Ju87 급강하폭격기 |
무엇보다도 식량 사정이 상당히 심각했는데, 무기 비축도 못한 마당에 식량이라고 사전에 비축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29] 소련측이 항공보급 등을 통하여 지원을 해줄 수는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스탈린은 바르샤바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다.[30] 결국 절망에 빠진 바르샤바에는 식량난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소빈스키(Sowiński) 대대가 바르샤바의 맥주 양조장을 점령하고[31] 저장된 보리를 시내로 옮긴 덕분에 바르샤바 시민들은 잠깐이나마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국내군은 봉기를 선전하기 위하여 뉴스 영화도 제작했다. 안토니 보흐지에비치(Antoni Bohdziewicz)가 이끌던 선전단은 각종 뉴스영화를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8월 13일, 첫 뉴스영화가 제작되어 황금 거리(Złota Street)의 팔라디움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각종 신문과 잡지들도 제작되어 시민들에게 봉기에 관한 소식과 정보를 제공하였다.
5.4. 9월의 상황
9월 10일에 이르면 봉기는 암울한 운명에 빠져들게 된다. 폴란드 봉기군은 봉기 내내 보급품과 무기가 부족했는데, 무기 상황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심히 암울했다. 많은 역사가들이 봉기 실패 이유로 가장 큰 것을 '보급품 부족'과 '무기 고갈'로 꼽는다. 만일 폴란드 봉기군이 좀 더 시간을 기다려서, 좀 더 많은 무기와 대공화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면, 폴란드 봉기군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두들겨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32]밀려오는 독일군을 피하기 위해 봉기군은 미로처럼 얽힌 바르샤바의 하수도로 숨어 들어가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계속 밀려들어왔고, 이제는 하수도 안에서도 수류탄이 터지고 독일군의 화염방사기로 인해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9월 말이 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시민들은 너무도 굶주렸고 잡아먹을만한 쥐조차 남지 않았으며, 봉기군의 무기와 탄약도 거의 떨어졌다. 9-10일 바흐첼레프스키는 바르샤바 시민들에게 도시를 떠나라는 권유문을 살포하였고, 폴란드 적십자가 독일군과 협상을 하여 2시간 동안 포격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독일군은 도시 북부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시민들은 도시 남쪽으로 도망쳤다. 11일에는 소련군이 다시 공세를 개시, 독일군을 비스와 강 서안으로 몰아붙였다. 당시 연합군 공군 소속으로 공수 지원에 참여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윌리엄 페얼리(William Fairly)는 1982년 바르샤바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바르샤바를 찾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100km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으니까. 불바다가 된 도시에서 타오르는 거대한 화염 때문에, 목표지역에 떨어뜨린 조명탄마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rowcolor=white> 바르샤바 교두보를 만들기 위해 도하하는 폴란드 인민군. |
영국과 미국도 더 이상 소련에게 압박을 넣지 못했다. 9월 18일에 미국이 대규모의 공수지원을 실시하였으나 봉기군 수중에 떨어진 보급품은 2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독일이 죄다 먹어치워 버렸다. 봉기 기간 동안 영국과 미국은 총 합계 200회에 걸쳐 공수지원을 실시했다. 영국군은 이 공수 지원으로 34기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의외로 소련군도 바르샤바 공수보급에 참여했으며 보급이 진행되던 기간 동안 2000소티로 연합군 최대의 출격횟수를 올렸다. 허나 보급에 투입된 항공기가 무려 Po-2 였기 때문에, 아담한 화물 적재량은 둘째치고 낙하산 없이 투하한 물품들 대다수가 소련제였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후에는 봉기군에게 투항을 종용하는 삐라를 살포하는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저질렀다.
치열한 전투 끝에 폴란드군이 보유한 영역은 조금씩 줄어들어, 20일에 이르면 원래 8개로 나뉘어 있었던 폴란드군의 전투구역은 다시 3개로 개편되어야 했다.
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의 『Rising '44』의 내용에 따르면
1944년 9월 18일 미군의 공수 보급을 바라본 두 시선
폴란드 국내군 사령관 부르코모로프스키의 회고:
그 날은 날씨도 좋고 햇살 가득한 날이었다. 청명한 하늘.
물론 바르샤바 주민들은 구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 비행기들이 도시 상공 머리 위로 날아가는 예상치 못했던 모습은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을 자아냈다. 폭격기들은 매우 높은 고도를 비행했고, 그들 뒤에는 하얀 반점들의 자국이 남았다. 낙하산들이었다.
독일군은 대공포화를 날려 대었으나, 비행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바르샤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열정의 순간들을 헤쳐왔다. 병자와 부상자들을 제외한 모두가 지하실에서 뛰쳐나왔다. 은신처에서 나온 사람들이 거리와 뜰을 메웠다. 그들은 이게 폴란드 공수여단의 도착이라고 믿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한 병사는 쌍안경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고함쳤다:
'이럴 수가, 독일군이 저들을 쏴대고 있어!'
한 장교가 그를 진정시키며, 그들은 공수부대원이 아니라 무기와 보급품을 담은 컨테이너에 불과하다고 설명해줬다.
'하지만 쌍안경으로 하늘에 흔들리고 있는 그들의 다리를 볼 수 있다니까요!'
병사는 계속 주장했다.
그래도 독일군들도 자기 부대들에게 비상을 거는 것을 보니 똑같이 판단 착오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폴란드 국내군 사령관 부르코모로프스키의 회고:
그 날은 날씨도 좋고 햇살 가득한 날이었다. 청명한 하늘.
물론 바르샤바 주민들은 구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 비행기들이 도시 상공 머리 위로 날아가는 예상치 못했던 모습은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을 자아냈다. 폭격기들은 매우 높은 고도를 비행했고, 그들 뒤에는 하얀 반점들의 자국이 남았다. 낙하산들이었다.
독일군은 대공포화를 날려 대었으나, 비행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바르샤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열정의 순간들을 헤쳐왔다. 병자와 부상자들을 제외한 모두가 지하실에서 뛰쳐나왔다. 은신처에서 나온 사람들이 거리와 뜰을 메웠다. 그들은 이게 폴란드 공수여단의 도착이라고 믿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한 병사는 쌍안경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고함쳤다:
'이럴 수가, 독일군이 저들을 쏴대고 있어!'
한 장교가 그를 진정시키며, 그들은 공수부대원이 아니라 무기와 보급품을 담은 컨테이너에 불과하다고 설명해줬다.
'하지만 쌍안경으로 하늘에 흔들리고 있는 그들의 다리를 볼 수 있다니까요!'
병사는 계속 주장했다.
그래도 독일군들도 자기 부대들에게 비상을 거는 것을 보니 똑같이 판단 착오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독일군 수송부대 병사 H. 슈트렉바르트의 일기:
우리는 오늘 지휘소에서 대부분이 뉴스필름에서나 보아오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13시 55분 경 영국군과 미군 비행기들이 약 1,000미터 상공에 처음 2~3대씩 짝지어 나타났다. 대략 50~60대는 되어 보였다(나는 54대까지 세다 포기했다). 거대한 새 무리가 날아오르듯 많은 수의 비행기가 있었다. 그러다 우리는 뭔가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것을 알아챘고, 그것들은 우리들 바로 상공에 있어 보였다. 낙하산이 펴진다! 경보가 내려지고 포화가 울려대었다. 몇몇은 사람과, 관절과, 손을 목격했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서부에서처럼 여기도 마침내 공수부대가 투입되는 것인가? 여기에 그럴리는 없는데. 낙하산이 내려오면서 나는 까만색, 초록색, 노란색, 흰색 등 갖가지 색깔의 낙하산을 목격했다. 오, 저것들은 보급품 용기들이다![33]
…다른 용기들 안에는 독일 탄약이 있었다. 오, 이렇게 예의바를 수가. 미군들은 우리가 황급히 서부에 버려두고 온 보급품들을 갖다주고 있었다. 그것도 비행기로 바르샤바에 있는 우리한테까지 배달해주다니![34]
우리는 오늘 지휘소에서 대부분이 뉴스필름에서나 보아오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13시 55분 경 영국군과 미군 비행기들이 약 1,000미터 상공에 처음 2~3대씩 짝지어 나타났다. 대략 50~60대는 되어 보였다(나는 54대까지 세다 포기했다). 거대한 새 무리가 날아오르듯 많은 수의 비행기가 있었다. 그러다 우리는 뭔가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것을 알아챘고, 그것들은 우리들 바로 상공에 있어 보였다. 낙하산이 펴진다! 경보가 내려지고 포화가 울려대었다. 몇몇은 사람과, 관절과, 손을 목격했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서부에서처럼 여기도 마침내 공수부대가 투입되는 것인가? 여기에 그럴리는 없는데. 낙하산이 내려오면서 나는 까만색, 초록색, 노란색, 흰색 등 갖가지 색깔의 낙하산을 목격했다. 오, 저것들은 보급품 용기들이다![33]
…다른 용기들 안에는 독일 탄약이 있었다. 오, 이렇게 예의바를 수가. 미군들은 우리가 황급히 서부에 버려두고 온 보급품들을 갖다주고 있었다. 그것도 비행기로 바르샤바에 있는 우리한테까지 배달해주다니![34]
사실상 당시 폴란드의 외적, 내적 상황으로는 이 봉기는 성공하지 못할 운명이였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려 2달에 걸쳐 우세한 독일군에 맞서 싸운 폴란드 봉기군과 시민들의 투지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봉기군 작전처장이었던 레오폴트 오쿨리츠키(Leopold Okulicki) 대령의 경우는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독일군 기관총 진지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수류탄과 함께 돌진하는 등의 솔선수범을 보이기도 했다. 전후에 오쿨리츠키 대령은 소련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5.5. 종지부
이 도시는 지구에서 사라져야 한다. 단지 국방군을 위한 열차역만 남기고 나머지는 돌 한조각 남기지 마라! 모든 건물은 기초까지 없애라!!
-SS 친위대 지휘관 회의에서 하인리히 힘러가 한 발언
-SS 친위대 지휘관 회의에서 하인리히 힘러가 한 발언
바르샤바는 평온해져야 한다!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
결국 바르샤바의 봉기는 우세한 화력과 기갑 전력을 보유한 독일군에 의해 진압당하기 시작했다. 9월 24일 모코투프가 공격당해 27일 점령되었고, 29일에는 졸리보시가 공격당해 다음날 함락되었다. 진압군 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는 항복하면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여 포로 대우를 해 줄 것이라는 선전방송을 하였다.[35] 봉기군은 각 지역으로 분산되어 와해되었다.
<rowcolor=white> 봉기 진압 후 항복한 봉기군 사령관 타데우시 코모로프스키와 악수하는 진압군 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
<rowcolor=white> 10월 5일, 독일 국방군에게 항복하는 폴란드 국내군 병사들 |
10월 2일, 오후 8시를 기하여 바르샤바 모든 지역에서 전투가 중지되었다. 10월 4일, 바르샤바 공과대학 뒤의 광장에서 국내군에 소속된 대대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윽고 광장에서는 폴란드 국가인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르카'가 울려퍼졌고, 그걸로 봉기는 끝났다. 같은 날에 봉기군 신문과 라디오 방송도 중단되었다. 살아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위조신분증을 배부받아 살아남았다. 독일군은 특수공병대대를 바르샤바 시내에 투입, 바르샤바 전역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동유럽의 파리라는 명성을 듣던 바르샤바는 무참히 파괴당했다. 아직 살아남은 봉기군 중 일부는 항복을 거부하고 도시 곳곳에서 계속 절망적인 항전을 하였다.
<rowcolor=white> 화염방사기로 바르샤바를 초토화시키는 독일군. |
<rowcolor=white> 바르샤바 왕궁을 폭파시킬 준비를 하는 독일 국방군 공병대. |
봉기 진압 후 히틀러는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해 없애버릴 것을 명했다. 히틀러는 1939년 6월 20일 전쟁 전에 이미 뷔르츠부르크의 독일 건설부를 방문해 바르샤바를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독일식으로 재건할 팝스트 계획(Pabst Plan)을 세워두었는데 전황이 기울어 도시를 독일식으로 재건할 수 없자 히틀러는 이 도시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먼저 나치는 65만명의 바르샤바 시민들을 프루슈코프(Pruszków)의 난민 수용소로 보내버렸다.[36] 시민들을 추방한 뒤 나치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이미 절반 가까이 파괴되어 있던 바르샤바의 남은 건물들을 모조리 폭파했다. 폴란드의 상징이자 얼굴인 왕궁도 벽 한장 남지 않고 폭파되어 가루가 되었다.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있었던 2달간의 대혈전은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봉기 기간 동안 바르샤바의 25%가 파괴되었고, 봉기 진압 후 독일군의 조직적인 파괴 때문에 35%가 더 파괴되었다. 1939년의 공습, 1943년 게토 철거, 그리고 바르샤바 봉기로 인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도시의 85%가 완파되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볼라 지구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바르샤바 중심부의 신세계 거리(Nowy Swiat)의 경우 71채의 건물 중 65채가 파괴되었다. 인명피해 또한 엄청나서 봉기 기간 동안 1만 6천명의 봉기군 전사자를 포함해 최대 추산 20만명의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1945년 1월 7일, 소련군은 바르샤바를 "해방"시켰다. 이 실패는 영국의 폴란드 망명 정부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폴란드는 결국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고 망명 정부는 사실상 생명이 끝나 버렸다. 다만, 망명 정부 자체는 영국에서 계속 존속했다. 공식적으로 해체한 것은 1990년 폴란드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로 이때 바웬사에게 헌법 전문과 폴란드 정부의 상징물 등을 증여했다.
구글 어스로 1945년 바르샤바의 처참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35년 사진과 비교해볼 때 건물들 대부분이 지붕이 사라져 있고, 다리들이 끊어져 있다.
1945년 바르샤바 볼라 지역 중 일부.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이 위치한 곳 주변부.
영상
1945년 바르샤바의 모습을 재현한 영상도 있다. 전쟁의 처참함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5.6. 소련군의 역할에 대한 의문
<rowcolor=white> 바르샤바 동쪽을 해방시킨 소련군 T-34-85 전차 |
조만간 권력을 좇아 바르샤바 모험을 벌인 한 줌의 범죄자들에 대한 진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붉은 군대와 폴란드인들 모두에게 매우 불리합니다. 그럼에도 소련 부대는 히틀러의 진격을 물리친 다음 바르샤바 인근에서 새로운 대규모 공세를 벌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붉은 군대가 바르샤바에서 독일군을 분쇄하고 폴란드인들을 위해 도시를 해방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귀하께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반나치 폴란드인들을 효과적으로 돕는 최선의 방법일 것입니다.
1944년 8월 22일 처칠과 루스벨트의 물자 투하 요청에 대한 스탈린의 답변[37]
소련군은 봉기 기간 동안 바르샤바 봉기군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폴란드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미 폴란드의 공산 정권을 만들 인사들을 모아놓은 상태였다. 나중에 소련군 군용열차를 타고 들어온 이 폴란드 공산당을 두고 서방에서는 "화물 열차 정권"이라 비웃었다. 스탈린은 연합군의 수송기가 봉기군을 지원하도록 소련 영토에 이착륙하는 것을 거부했다. 스탈린에게 있어 바르샤바 봉기를 지원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당한 전리품을 빼앗는 일이었다. 더구나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역사를 보더라도 그들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폴란드는 위험한 존재이기도 했다. 따라서 소련과 직접 맞닿아있지도 않은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와는 비교하기 어렵다. 다만 이런 스탈린의 태도와는 별개로 소련의 공군이 바르샤바 봉기군에게 물자를 지원했고, 소티는 생각보다 많았지만(2,000소티) 아쉽게도 봉기군에게 직접 전달된 물건은 얼마 없었다.1944년 8월 22일 처칠과 루스벨트의 물자 투하 요청에 대한 스탈린의 답변[37]
한편 냉전이 끝나고 공개된 문서들에 의해서 실제로는 당시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진격하는 것이 군사적으로도 불가능했음이 밝혀졌다. 소련군이 언제든지 바르샤바를 들이칠 수 있을 것처럼 압도적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은 상당부분 스탈린의 허세였고, 실제로는 스탈린은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소련군에 바르샤바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지만 재편성된 독일군의 파쇄공격[38]에 오히려 격파당했음이 드러났다. 당시 전세는 이미 소련에게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지만, 소련의 붉은 군대는 바르샤바 근교에서 공세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소련군을 상대하던 독일군 사령관은 2차대전 최고의 방어전 사령관인 발터 모델이었다. 그는 무너진 나치독일의 동부전선을 재건했고, 폴란드 인근에서 소련군에게 역습을 날려 동부전선의 수호자로 불렸다. 나치독일의 생명연장에 지대한 공을 세운 승리였지만 폴란드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아쉬움으로 남을 지점이다.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된 지 약 1달 정도 지난 1944년 7월 22일 시점에서 바르샤바 방면의 선봉인 소련 제2 전차군은 810량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2 전차군은 적어도 7월 27일 시점에는 바르샤바를 향해 급속히 전진하여 바르샤바에서 북동쪽으로 고작 25km 정도 떨어진 오쿠니에프(Okuniew)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8월 1일 경 중부집단군 사령관인 모델 원수가 끌어다 모은 4개 기갑사단을 직접 지휘하여 바르샤바 전면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의 치열한 전차전이 벌어졌다. 양측의 사투 끝에 소련 제2 전차군은 포위섬멸당하는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매우 심각한 타격을 입어 263량의 전차만이 남았고 8월 5일에 전선에서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처럼 바르샤바 초입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의 대규모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련 지휘부가 의도적으로 도시 점령을 늦췄다 볼 근거는 빈약하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이끄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거리를 매우 빠른 속도로 지나쳤고 그러다보니 전력 재정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39] 보급도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어느정도로 심각했냐 하면 전차가 철갑탄이 없어서 적 기갑차량을 고폭탄으로 상대해야 했을 정도이며 그 반대의 경우로 고폭탄이 없어 동축기관총 하나로 적 벙커를 부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9월 중순부터 소련은 바르샤바에 대한 공중 투하를 늘렸는데, 이 조치는 소련군의 공격 개시와 동시에 이루어졌다. 9월 14일부터 10월 1일까지 제1벨라루스 전선군은 바르샤바에 2,243회 출격하여, 박격포 156문, 대전차포 505문, 기관단총과 소총 2,667정, 탄약통 300만 개, 수류탄 4만 2,000발, 의약품 500kg, 식량 113톤을 투하했다. 그리고 이는 영국이 8월과 9월 동안 지원한 피스톨과 리볼버 1,344정, 자동 권총 3,855정, 경기관총 380정, 바주카포 237문, 박격포 13문, 소총 130정, 수류탄 1만 4,000발, 대전차 수류탄 3,000발, 플라스틱 폭약 8.5톤, 탄약 450만 발, 식량 45톤과는 비교가 됐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라티온 작전에 연이은 공세의 마지막에 바르샤바라는 무리한 목표가 하달되어 공세종말점을 지나치게 되었고, 그 결과 독일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수십km를 밀려나 방어에 급급한 상태에 몰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봉기군에게 지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소련이 다음 공세인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펼 수 있었던 것은 바르샤바 봉기가 끝나고도 무려 3개월이 지난 후였다.[41]
즉 최종 결론을 내리면 소련군에게 바르샤바 봉기군을 도와줄 여력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 공교롭게도 마침 개입할 의지가 약했던 스탈린의 의도와 맞아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42] 봉기 시점에서 소련군의 바르샤바 해방 가능 여부 또는 스탈린나 의사와 결정에 관한 의문은 러시아 측 자료로 명백한 답을 내릴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완전한 접근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진 중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과 별개로 바그라티온 작전 종결 단계에서 스탈린과 소련군의 작전 지휘를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작전 마무리 단계에서 스탈린은 하나의 방면에 병력을 집중하기 보다는 폴란드 북부의 비스와 강 하구와 발트 해 방면, 중부의 바르샤바 방면, 남부의 리보프 및 루블린 방면으로 공세를 분산시켰고,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했음에도 독일군 전선을 완전히 붕괴시키지 못해 중부집단군이 전선을 다시 안정화시키는 것을 허용했다는 비판이다. 이 같은 견해에 따르면 소련군의 바르샤바 방면의 진격은 너무 늦게 이뤄졌고, 동원 가능한 병력 중에서도 일부만이[43] 동원됐다고 비판한다.
6. 피해
봉기가 진압되고 황폐화 된 바르샤바의 전경.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바르샤바시의 85%가 완파되었다 [44]
- 폴란드 국내군
- 병력: 45,000여 명
- 피해: 16,000여 명 전사 또는 실종, 15,000여 명 포로
- 민간인 200,000여 명 사망, 바르샤바의 85% 이상 파괴
- 나치 독일
- 병력: 39,000여 명
- 피해: 3,000명 전사, 9,000명 부상[45]
7. 평가 및 영향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발생한 봉기 중 최대 규모의 봉기이자 가장 중요한 봉기로 평가된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대규모로 일어나 나치 정권을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려 했다는 점에서 폴란드인들은 이 봉기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공산정권 시기 폴란드에서는 주목받을 계기가 없었다. 1944년 말에 소련군이 독일로 향할 때 폴란드 국내군은 독일군에 의해 거의 궤멸 지경에 이르렀고 바르샤바를 점령한 소련은 서방의 지원을 받는 자유폴란드군이 아닌 자국의 지원을 받아 조직된 폴란드 인민군만이 존재했다고 역사를 왜곡했다.[46] 붉은 군대는 살아남은 국내군 병사들을 처형하거나 굴라그로 보내 버렸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에 의해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정보들은 검열을 거쳐 폐기되었으며 폴란드 국내군이라는 단어의 사용조차 금지되었다. 1989년 폴란드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현재 폴란드 내 친러 세력도 바르샤바 봉기를 대놓고 격하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나치 독일과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굳이 안 좋게 평가할 이유가 없다. 다만 봉기 전후 소련군의 과오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리는 정도.
바르샤바 봉기를 기념하는 기념비
오늘날 바르샤바에는 바르샤바 봉기 기념비(Pomnik Powstania Warszawskiego)가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바르샤바 봉기 45주년을 기념하여 1989년 8월에 세워졌다. 또한 매년 8월 1일에는 이날을 되새기기위해 1분간 사이렌이 울린다. 이때는 시민들, 자동차 할것 없이 모두 잠시 정지해서 1분 동안 침묵을 지키며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바르샤바 봉기 60주년을 맞아 경례를 하는 노병.
바르샤바 봉기 60주년인 2004년 8월 1일에는 독일 총리인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기념비에 헌화했다.
8. 봉기군의 노래
이봐, 친구들아, 총검으로 무장하자
(Hej, chłopcy, bagnet na broń)
기나긴, 머나먼 길로, 뜨거운 가슴에
(Długa droga, daleka przed nami, mocne serca)
손에 카빈소총을 들고, 총검을 들고 포탄 속으로 가자
(A w ręku karabin, Granaty w dłoniach i bagnet na broni)
여명이 밝아온다, 바람이 불어온다
(Jasny świt się roztoczy, wiatr owieje nam oczy)
폐가 펌프질하고, 피가 뜨거워진다
(I odetchnąć da płucom i rozgrzać do krwi).
노래가 우리사이로 퍼져나간다
(I piosenkę, jak ręczę, nad nami roztoczy)
앞으로 전진 하는 행군 속에. 하나, 둘, 셋
(W równym rytmie marsza: raz, dwa, trzy)
(머리 위로)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Ciemna noc się nad nami roziskrzyła gwiazdami)
긴 밤과 낮 동안, 흰 견장은 먼지 길 위에 있다
(Białe wstęgi dróg w pyle, długie noc i dni)
새로운 폴란드의 승리가 우리에게 달려있다
(Nowa Polska Zwycięska jest w nas i przed nami)
앞으로 전진하는 행군속에. 하나, 둘, 셋
(W równym rytmie marsza: raz, dwa, trzy)
이봐, 친구들...
(Hej, chłopcy...)
바르샤바 봉기 당시 봉기군이 불렀던 노래
'이봐, 친구들아, 총검으로 무장하자(Hej, chłopcy, bagnet na broń)'
폴란드어 원문 및 노래(Media Player 필요)
(Hej, chłopcy, bagnet na broń)
기나긴, 머나먼 길로, 뜨거운 가슴에
(Długa droga, daleka przed nami, mocne serca)
손에 카빈소총을 들고, 총검을 들고 포탄 속으로 가자
(A w ręku karabin, Granaty w dłoniach i bagnet na broni)
여명이 밝아온다, 바람이 불어온다
(Jasny świt się roztoczy, wiatr owieje nam oczy)
폐가 펌프질하고, 피가 뜨거워진다
(I odetchnąć da płucom i rozgrzać do krwi).
노래가 우리사이로 퍼져나간다
(I piosenkę, jak ręczę, nad nami roztoczy)
앞으로 전진 하는 행군 속에. 하나, 둘, 셋
(W równym rytmie marsza: raz, dwa, trzy)
(머리 위로)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Ciemna noc się nad nami roziskrzyła gwiazdami)
긴 밤과 낮 동안, 흰 견장은 먼지 길 위에 있다
(Białe wstęgi dróg w pyle, długie noc i dni)
새로운 폴란드의 승리가 우리에게 달려있다
(Nowa Polska Zwycięska jest w nas i przed nami)
앞으로 전진하는 행군속에. 하나, 둘, 셋
(W równym rytmie marsza: raz, dwa, trzy)
이봐, 친구들...
(Hej, chłopcy...)
바르샤바 봉기 당시 봉기군이 불렀던 노래
'이봐, 친구들아, 총검으로 무장하자(Hej, chłopcy, bagnet na broń)'
폴란드어 원문 및 노래(Media Player 필요)
9. 여담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수도가 된 바르샤바를 복구할 때 소련은 어차피 거의 파괴된 도시이기에 아예 새롭게 공산주의 스타일로 재건하려 했다. 하지만 그 소식이 알려진 다음 날 수많은 시민들이 시청으로 몰려와 전쟁 전 바르샤바를 그린 그림과 사진을 보여주며 완벽하게 복구시킬 수 있다면서 항의했고 결국 시민들의 의견대로 다시 원래 모습대로 재건하기로 결정하였다. 최종적으로 단 3년만에 900여개의 건물을 비롯하여 전쟁 전의 바르샤바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건하기는 했지만 건축적으로는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고, 바르샤바는 세계유산에도 등재되었지만 이는 바르샤바 봉기 때 침묵했던 서방 열강들의 사과 비슷한 것에 불과하다. 지금도 도시 바르샤바의 예술적 가치는 다른 세계유산 도시들에 비해 떨어진다.독일군이 바르샤바를 완전히 파괴한 탓에 전후 소련의 개입으로 수립된 폴란드 공산정부는 바르샤바를 재건하기 전까지 3년 동안(1945~1948) 우치에 임시정부를 두었다.[47] 지금의 바르샤바는 옛 모습을 참고해 완전히 새로 지은 도시로서, 복원된 2차대전 이전 건물과 소련 스타일 건물(문화과학궁전 등), 현대식 건물이 섞였고 난개발이 매우 심하다. 폴란드에서 중세 및 근세 때부터 이어진 오래된 건축물은 고도 크라쿠프처럼 파괴가 덜한 도시에나 있다.
잘 안알려진 사실이지만, 외국인들도 이 봉기에 각각 진압군, 봉기군 양쪽에 참여했다고 한다. 바르샤바에 거주하던 나이지리아 출신 흑인도 봉기군에서 싸웠다고 한다.
당시 독일군에서 쓴 800mm 철갑탄 한 발이 폴란드 육군 박물관에 전시중이다.
10. 대중매체
- 사바톤의 Uprising은 바르샤바 봉기를 기리는 곡이다.
- 폴란드에서는 상당한 인기 소재라서 한국의 6.25 전쟁처럼 자주 극화되는 소재다. 유명작으로는 안제이 바이다의 카날이 있다.
- 2014년 9월 얀 코마사(Jan Komasa) 감독,[48] 유제프 파브워프스키(Jozef Pawłowski), 조피아 비흐와치(Zofia Wichłacz) 주연의 바르샤바 봉기 70주년 기념작 영화 <Miasto 44>가 폴란드에서 개봉되었다. 제작 기간 8년, 제작 비용 8백만 달러에 달하는 대작으로 개봉 2주 만에 관람객 100만 명을 돌파하며 일약 폴란드 국민 영화로 떠올랐다. 봉기의 주축이 되었던 민간인 소년 소녀 지원병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바르샤바 봉기의 여러 군상들을 심리 묘사에서 상황 묘사에 이르기까지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는데, 위 본문에서도 언급된 봉기 직전의 불완전한 준비상황, 처절한 시가전, 독일군의 진압 과정과 사용된 무기 등에 대한 묘사가 치밀하다. 국내에는 2014년 10월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플래시 포워드 부문에 바르샤바 1944라는 제목으로 초청되어 최초 상영, 소개되면서 호평을 받았다. 바르샤바 봉기 초반의 희망적 분위기와 봉기 후반의 절망적 분위기를 잘 나타냈으며 봉기군의 열악한 무장 상태 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연애 파트가 다소 진부하고 후반부의 전개가 늘어지는 면이 있다. 지나친 신파 요소를 제외하고 담담하게 그려냈더라면 바르샤바 봉기와 폴란드 국내군에 대한 공감대가 없는 외국인들도 즐길 수 있었겠지만 폴란드 국내용 영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 후반부에도 바르샤바 봉기가 등장한다.
- 스틸 디비전 2 비스툴라 캠페인 중에 이벤트로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다. 봉기로 제1강하기갑사단 헤르만 괴링의 증원이 지연된다. 또한 폴란드 인민군이 강을 건너 봉기를 도우려다 격퇴되는 이벤트도 발생한다. 그 외 히스토리컬 배틀로 폴란드 인민군으로 강을 건너 바르샤바와 연결하거나 독일군으로 방어하는 미션을 플레이할 수 있다.
11. 둘러보기
[1] 친위대 국가지도자[2]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무장친위대 및 질서경찰 대장[3] 친위대 집단지도자, 무장친위대 및 질서경찰 중장[4] 친위대 여단지도자, 무장친위대 소장[5] 친위대 상급지도자, 무장친위대 상급대령[6] 친위대 여단지도자, 질서경찰 소장[7] 최초 20,000명[8] 최초 13,000명[9] 스텐 기관단총의 폴란드 카피판.[10] 어디까지나 러시아 영토 내의 독일군 전선을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을 뿐 공세를 펼쳐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련 영토 깊숙히 들어갈 수 있는 마지막 가망성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6군의 전멸과 쿠루스크 전투에서의 남부 집단군의 참패로 없어진 상태였다.[11] 하지만 이 도시들은 곧 소련군에게 점령되었다. 봉기의 주축이던 국내군들은 소련군 지휘하의 폴란드 인민군에 편입될 것을 강요받았고, NKVD는 이를 거부한 국내군들을 체포하여 굴라그로 보냈다. 전쟁이 끝나가도 동유럽에 해피엔딩은 없었다.[12] Godzina W. 폴란드어로 폭발을 뜻하는 wybuch에서 따왔다.[13] 일각에서는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함락하기 전에 폴란드의 독립 의지를 제대로 선보여야 한다'는 판단을 봉기 강행의 원인으로 분석한다. 3.1 운동이 비록 실패했지만 상당한 역사적 의의를 남기고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국가 정체성 수립에 기여했듯이 바르샤바 봉기의 정치적, 역사적 의의를 근거로 이 결정을 100% 실책만으로 볼 수는 없다는 관점도 존재한다. 또한 역사적으로나 폴란드 침공 전후의 행적으로 봤을 때 폴란드가 전후 협상 테이블에서 동등한 연합국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폴란드의 자주독립은 소련군정에 의해 유린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군을 상대로 참전하고자 했던 것과 유사하다.[14] 당시 폴란드 망명정부 대표.[출처]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원제 : Russia's war), p.334[16] 이 차량은 봉기 실패와 함께 독일군이 노획했다가, 나치의 패망 이후 다시 폴란드로 반환되었다. 21세기 현재에도 폴란드 육군 박물관이 소장하며 기념하고 있다.[17] 푸델은 월드 오브 탱크에 첫 번째로 구현된 폴란드 전차다.[18] 반면, 소련군과 같이 작전하던 폴란드 인민군은 스탈린으로부터 온갖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T-34-76은 물론이고 심지어 IS-2까지 수령받아 기갑부대까지 운용할 정도로 성장했다. 스탈린은 어차피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을 이용해 폴란드를 공산화시킬 생각이었기에, 폴란드 인민군은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스탈린 입장에서 공산주의와 이념이 다른 폴란드 국내군은 나치의 군사력 소모용으로 쓰다가 버리면 그만이었던 것.[19] 결국 파리는 8월 25일에 해방되었다.[20]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가 바르샤바 봉기에서 저지른 악행을 본 하인츠 구데리안이 히틀러에게 이들의 문제를 보고했는데, 옆에 있던 페겔라인이 한 대답이다. 같은 나치들, 그것도 슈츠슈타펠 내부 인물에게서도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이다.[21] 출처:2차 대전의 마이너리그[22] 당시 독일군의 진압 목표부터 바르샤바를 철저한 본보기 삼아 짓밟는 것이였기에 초기 볼라 지구와 오호타 지구 점령시점부터 대량의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고 최종적으로 약 한달간 20만명에 이르는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23] 600mm 버전과 540mm 버전이 각각 하나씩 투입되었다.[24] 이 녀석은 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모든 무기 중에 단순 화력만 치자면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현재까지 나온 모든 대포들 중에 아토믹 애니와 2B1 오카를 제외하면 이 녀석만큼 강력한 것은 전무후무했으며 강력한 만큼 엄청나게 비싸서 단 1문만 만들고 2호기는 공사하다 중단했으며, 포탄 운동에너지 18억 줄에 진지구축작업만 3주가 걸리고 세바스토폴에서 실전을 겪었을 때는 세바스토폴 시가지에 높이 12m, 넓이 12m의 크레이터(...)까지 생길 정도의, 무장한 적들을 향해 쏴도 돈 아까운 무기의 포구를 바르샤바의 비무장 시민들 쪽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여담으로, 당시 쓰인 800mm 철갑탄 한발이 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육군 박물관에 현재 전시되어 있다.[25] 사진에 찍힌 차량은 "치우(Ziu)"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재 실물을 쿠빙카 전차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26] 푸르덴셜 폴란드 지사 빌딩은 전후에 복구되어 '호텔 바르샤바' 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영업 중이다.[27] 오른쪽에 쌓인 고철덩어리들은 전부 사용하고 버린 네벨베르퍼 발사기들이다. 독일이 얼마나 많은 로켓을 바르샤바에 쏟아부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28] 폴란드에게 닥친 1944년의 여름은 유난히 덥고 뜨거웠다고 한다. 너무나도 뜨거워서 도로의 아스팔트가 물렁물렁해질 정도였다고.[29] 나치는 폴란드 점령 이후 배급제를 실시했는데, 폴란드인들은 유대인보다는 더 많은 식량을 배급받긴 했는데 그래도 1일 섭취량에 미달하는 분량이었다. 식량 비축이 가능할 리가 없다.[30] 스탈린 눈에는 나치나 바르샤바의 봉기군이나 어차피 다 소련에 대항하는 적들일 뿐이다. 누가 이기든 소련군은 힘이 다 빠진 승자를 처리하고 바르샤바를 점령하면 그만.[31] 소빈스키 대대는 결사적으로 맥주 양조장을 방어했고, 봉기 종료 시까지 양조장 자체는 지키는 데 성공했다.[32] 물론 봉기를 연기했다면 소련군한테 바르샤바가 함락될 때까지 봉기군은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못 하고 끝났을 가능성도 있다.[33] 바로 그 폴란드 공수여단의 바르샤바 공수는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검토되고 있었으며 폴란드 공수부대원들의 간절한 숙원이기도 했다. 허나 폴란드 공수여단의 바르샤바 공수는 무산되었고, 바르샤바 대신 투입된 곳이 바로 마켓 가든 작전이었다. 폴란드 공수부대가 마켓 가든 작전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문서에 잘 기술되어 있다. 여담으로 폴란드 공수부대가 마켓 가든에 강하하던 바로 그 시각에 바르샤바에서는 공수 보급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바르샤바의 봉기군들과 독일군 모두 이를 폴란드 공수여단의 투입이라고 착각하는 비참한 광경이 연출되었다.[34] 연합군이 독일제 탄약을 공수한 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당시 폴란드 국내군의 주요 무장은 독일군으로부터 노획한 독일제 화기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당연히 독일제 탄약이 필요했다. 문제는, 국내군 점령지역이 매우 좁은 상태이다 보니 이 독일제 탄약이 대부분 독일군 측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35] 힘러는 바르샤바 봉기군을 포로로 잡지 말고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폰 뎀 바흐가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이 자는 자신이 내건 협정 조건을 모두 내다버린 후 바르샤바 내의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하도록 명령하고, 항복한 6만여 명의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한 볼라 학살의 주범이다. 바르샤바에서뿐만 아니라 폰 뎀 바흐는 폴란드 침공 후 폴란드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약탈하여 현지에 독일인들을 정착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친위대 장교로 파르티잔과 민간인들을 가리지 않고 도살했으며(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민간인 희생자를 파르티잔 희생자 수에 편입시켰다), 1943년 7월에는 라트비아 리가에서 3만 5천, 벨라루스, 폴란드 동부에서 20만 이상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괴물이다.[36] 이들 중 약 5만 5천명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중 1만 3천명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37] 제프리 로버츠, 김남섭 옮김, 『스탈린의 전쟁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열린책들, 2022, 365쪽.[38] 기동방어의 일종으로, 적군이 공격준비를 마치기 전에 선제공격으로 격파함으로써 적군의 공세역량을 분쇄하는 것이다.[39] 심지어는 병력의 대부분이 정원수에 못미쳤고, 증원 병력의 대부분은 전투 도중 소련군이 '해방'한 지역에서 충원되었다.[40] 제프리 로버츠, 김남섭 옮김, 『스탈린의 전쟁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열린책들, 2022, 365~366쪽.[41] 소련의 목표가 애초에 폴란드 공산정권 수립이었기 때문에 봉기군과 소련군이 양동으로 독일 식민지역 사령부를 파쇄하더라도 소련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공산당 지지자였다면 지역 정치장교 세력으로 키웠을지언정 절대 독자정부 수립은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실제 역사처럼 바르샤바가 처참하게 박살나고 시민들이 학살당하지는 않았을테니 그나마 상황이 양호하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르자 작전 당시 실제로 전쟁 전 폴란드 제 3의 도시였던 르부프, 즉 현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는 폴란드 국내군이 구상한 그대로 내부 봉기에 의한 선 해방->소련군 진주로 독일군 축출이란 이상적인 과정을 통해 해방되었지만 남은 폴란드 국내군은 싸그리 적성 세력 취급받아 굴라그로 끌려 가거나 반소 게릴라로 쫒기고 도시는 열강들의 땅따먹기로 현대까지 우크라이나쪽으로 넘어가는 신세가 되었다.[42] 2차 세계대전 재조명이라는 다큐에서는 이 당시 스탈린의 의도를 극명하게 표현했다. 독일군은 독일군대로 피해를 입고 친서방 폴란드 봉기군은 진압 및 괴멸당할테니 결과적으로 스탈린만 이득을 얻는 싸움이었다고. [43] 즉 바르샤바 공격에 800대의 전차가 아니라 8천대 이상의 동원이 가능했다 추산한다. 독일군 다 죽겠다 이놈들아 지나치게 결과론적이다는 견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도 공세를 분산시킨 결과가 영 신통치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44] 1947년에 촬영된 사진이다.[45] 출처. 독일군 17,000여 명 전사 또는 실종이라는 설도 있지만, 사실 그만큼 피해를 입히기는 어려웠을 것이 확실하다.[46] 기본적으로 스탈린의 입장은 '공산주의자는 우리의 친구다'도 아니었고, 오직 충성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다. 대숙청 때 소련으로 망명해 있던 수많은 해외 공산주의자들이 처형된 이유는 이들이 모스크바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아서였다. 폴란드도 마찬가지였고, 스탈린은 공산주의자건 아니건 '소련에 충성하지 않는' 그 어떤 세력도 공산진영 안에 남겨 둘 생각이 없었다. 폴란드 전역을 소련이 점거했기에 두려울 게 없었음에도 하다못해 중국이 일부 그랬던 것처럼 포섭이나 회유, 전향이 아닌 사형과 역사왜곡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한 것도 그때문이었다.[47] 소련군이 폴란드에 들어오기 전에는 공산 정부가 루블린에 머물렀다.[48] 문신을 한 신부님나 수어사이드 룸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