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습격 Raid on Alexandria 이탈리아어 : Impresa di Alessandria | ||
▲ HMS 퀸 엘리자베스로 접근하는 특공대원들의 상상도 | ||
1941년 12월 18일 ~ 12월 19일 | ||
장소 | ||
지중해 알렉산드리아 | ||
교전국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밸리언트 함장 찰스 모건 | -스치레 함장 주니오 발레리오 보르게세 -특공대 지휘관 루이지 뒤랑 드라펜 |
전력 | 영국 지중해 함대 | 잠수함 1척 인간어뢰 3발 |
피해 규모 | 전함 2척 손상 유조선 1척 손상 구축함 1척 손상 8명 사망 | 포로 6명 |
결과 | ||
이탈리아군의 승리 | ||
영향 | ||
영국 해군의 지중해 활동 위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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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인간어뢰 부대 Decima Flottiglia MAS가 영국 해군 지중해 함대의 알렉산드리아 해군 기지를 습격한 사건이다.2. 배경
1940년 11월 영국은 이탈리아의 타란토 항을 뇌격기로 공습했다. 이는 역사상 항공기와 전함이 맞붙은 첫 전투였고, 따라서 이에 대비하지 못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전함 3척이 무력화되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지중해의 해군 균형이 영국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영국은 지중해에서 이전보다 더 유연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반면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이는 재앙에 가까운 일이었다. 공습 이전에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전함 6척을, 영국 지중해 함대는 전함 4척을 보유한 상태여서 이탈리아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는데 공습으로 3척을 손실하는 바람에 이제는 반대로 전함 3척 대 4척으로 이탈리아가 밀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941년 3월 벌어진 마타판곶 해전도 이탈리아군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이 해전에서 이탈리아군은 자국의 최신예 순양함이었던 차라급 중순양함 3척과 구축함 2척을 잃는 매우 큰 패배를 당했고 이에 따라 지중해의 패권은 완전히 영국에게 넘어가는 듯 했다.
따라서 이탈리아는 타란토 공습의 복수를 함과 동시에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1] 영국의 전함들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고심하게 되고, 여러 논의 끝에 인간어뢰를 이용한 알렉산드리아 해군기지 기습을 골자로 한 작전을 세운다.
3. 전개
3.1. 작전 준비
1941년 12월 3일, 아두아급 잠수함 스치레(Scirè)함이 3발의 인간어뢰를 탑재하고 라 스페치아 항을 나섰다. 스치레 함에 탑재된 인간어뢰는 "마이알레"[2] 라는 이름의 인간어뢰였는데, 목표물에 접근하면 인간어뢰에 탑승한 인원들이 내려서 선수에 붙은 흡착기뢰를 제거한 다음 목표물의 선저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운용되는 인간어뢰였다.[3] 이후 스치레는 도데카니사 제도의 레로스(Leros) 섬에서 비밀리에 특공대 6명을 승선시킨 다음 영국 지중해 함대가 주둔해 있던 알렉산드리아로 나아갔다.3.2. 알렉산드리아 해군기지 잠입
12월 9일, 목표 지점에 도착한 스치레는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약 2.1km 떨어진 지점에서 3발의 인간 어뢰를 모두 분리했다. 이후 특공대원들은 영국 해군 구축함 3척이 알렉산드리아에 입항하는 순간을 노려 몰래 그들을 뒤따르는 방식으로 함께 해군 기지의 방어를 뚫고[4] 유유히 해군기지 내로 잠입했다.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겼는데, 3발의 인간어뢰 중 1발의 엔진이 그대로 멈춰선 것이다. 결국 해당 인간어뢰의 특공대원 2명은 하는 수 없이 몸으로 인간어뢰를 목표물이었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HMS 밸리언트 근처까지 힘들게 이동시켜야 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특공대원 1명의 산소 공급 장치가 고장나버리는 바람에, 남은 특공대원 1명이 흡착기뢰 설치를 맡아야 했다. 일단 흡착기뢰 설치는 성공하였으나, 얼마 못 가 둘은 결국 순찰을 돌던 영국 해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포로로 붙잡힌 이탈리아 특공대원 2명은 영국군에게 강도높은 심문을 받았음에도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고, HMS 밸리언트의 함장과만 대화하겠다며 버텼다. 결국 승조원들은 하는 수 없이 특공대원들과 함장 찰스 모건 대령의 대화를 성사시켜 주었는데, 이 자리에서 특공대장 루이지 뒤랑 드라펜(Luigi Durand de la Penne)[5]은 "15분 뒤 폭발이 있을 것이다" 라고 진술했다. 이 말을 들은 함장과 승조원, 포로가 된 특공대원들은 전원 대피했고 얼마 후 진짜로 흡착기뢰가 선저에서 폭발했다. 밸리언트는 침몰은 면했으나 대파되었다.
한편 다른 한 조는 전함 퀸 엘리자베스에 접근하는데 성공했고 퀸 엘리자베스의 키에 흡착기뢰를 부착했다. 얼마 후 폭발은 예정대로 일어났고 선저부에 침수가 일어난 퀸 엘리자베스는 대파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승조원 8명이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조는 알렉산드리아 해군기지 내를 돌아다니면서 최중요 목표였던 항공모함을 찾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항공모함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결국 이들은 차선책으로 7천 5백톤급 유조선 사고나(Sagona)의 선저에 흡착기뢰를 설치했다. 폭발은 예정대로 일어났으며, 사고나는 선미부가 아예 날아가 버리는 큰 피해를 입었다. 한편, 당시 사고나 바로 옆에는 J급 구축함 HMS 저비스가 급유 중이었는데, 저비스 역시 이 폭발에 휘말려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이후 두 조의 특공대원들은 모두 육로로 해군기지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나, 한 조는 해안가에서 이들을 회수할 스치레를 기다리다가 이집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나머지 한 조 역시 검문소에서 이집트 경찰에게 체포됨으로서 특공대원 여섯 명은 전원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4. 결과
비록 침몰한 선박은 없었으나 이탈리아는 이 작전으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밸리언트와 퀸 엘리자베스를 대파시켜 장기간 전력에서 이탈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일시적으로나마나 다시 지중해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반면 영국은 이 작전으로 인해 HMS 밸리언트와 HMS 퀸 엘리자베스가 각각 9달, 6달 동안 전력에서 이탈하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지중해서의 행동이 위축되었다. 게다가 이 사건이 벌어지기 1달 전인 1941년 11월, 마찬가지로 지중해 함대 소속이었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HMS 버럼(Barham)이 U-331에 의해 격침당한 상황이었고, 자매함 HMS 워스파이트(Warspite)와 HMS 말라야(Malaya)는 각각 미국에서 개장 및 수리를 받고 있는 관계로 지중해를 떠나 있었기에, 1941년 말 영국은 지중해에 작전 가능한 전함이 1척도 없는 막장 상황까지 몰렸다. 만약 이 상황에서 독일과 이탈리아가 몰타에 대규모 상륙 작전을 시도한다면 정말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작전에 참가한 특공대원들이 전원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이탈리아 해군은 아이러니하게도 성공적이었던 작전의 결과를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탈리아 측은 항공 정찰로 두 전함의 상태를 알아보려고 시도했는데, 영국은 이를 노리고 항구 바닥에 착저한 두 함선의 갑판에서 주기적으로 국기 게양식 등을 열면서[6] 아직 자국 전함들과 지중해 함대가 건재하다고 속였다. 이러한 영국 측의 속임수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영국이 제일 우려하던 추축국의 몰타 대공세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 작전을 성공시킨 특수부대 Decima Flottiglia MAS는 영국 등 연합국에서도 큰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동시에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이탈리아 해군의 용맹함은 그들이 타는 배의 배수량과 반비례한다"라는 평을 들었다.
종전 직전에 드라펜느 백작은 이 작전에 대한 공로로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수여식에 발리언트의 함장이었던 찰스 모건도 참석했다고 한다.
[1]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이탈리아군의 전력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기에 이 상태에서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이탈리아 해군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1941년 후반 시점에서 타란토 공습에서 손상된 전함 3척 중 2척은 전열에 복귀한 상태이긴 했지만, 이젠 반대로 핵심 순양함 전력이 날아가버렸으니 그거대로 불리했다.[2] 이탈리아어로 돼지를 뜻하는 단어이며, 이름이 이렇게 붙은 이유는 이 인간어뢰의 속도가 2.5 노트로 4.63 km/h 정도에 불과했고, 항속 거리 역시 10해리에 잠항 심도도 30 미터 정도로 다소 둔중하고 느렸기 때문이었다.[3] 일본의 자살인간어뢰 가이텐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그렇지, 사실 대부분의 국가들의 인간어뢰는 이런 식으로 특수부대원들을 안전하게 침투시키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다.[4] 영국이라고 해서 이탈리아 잠수함이나 인간어뢰의 항구 침투 가능성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당시 웬만한 군항 입구에는 그물을 설치해 이들의 접근을 막았다.[5] 그의 이름은 이탈리아 해군이 1989년 건조한 방공구축함 뒤랑 드 라 펜급 구축함의 네임쉽 함명으로 기념되고 있다.[6] 두 전함 모두 수심이 얕은 항구에서 착저한 덕에 갑판이 수면위로 올라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