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렌스크 전투 Смоленское сражение Kesselschlacht bei Smolensk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날짜 | ||
1941년 7월 10일 ~ 8월 5일 | ||
장소 | ||
소련 러시아 SFSR 스몰렌스크 일대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미하일 루킨| ]] [[틀:깃발| ]][[틀:깃발| ]][[바실리 게라시멘코| ]] [[틀:깃발| ]][[틀:깃발| ]][[세묜 티모셴코| ]] [[틀:깃발| ]][[틀:깃발| ]][[안드레이 예료멘코| ]] [[틀:깃발| ]][[틀:깃발| ]][[이반 코네프| ]] [[틀:깃발| ]][[틀:깃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틀:깃발| ]][[틀:깃발| ]][[파벨 쿠로치킨| ]] [[틀:깃발| ]][[틀:깃발| ]][[표도르 쿠즈네초프| ]] | ]][[틀:깃발| ]][[게오르기 주코프|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하인츠 구데리안| ]] [[틀:깃발| ]][[틀:깃발| ]][[헤르만 호트| ]] | ]][[틀:깃발| ]][[페도어 폰 보크| ]]
결과 | ||
소련의 대패, 나치 독일의 기록적인 대승 | ||
영향 | ||
나치 독일의 전략적 불안감 증폭 | ||
<colbgcolor=#c0c0ff,#334> 전력 | 약 58만 명 - 제16야전군 - 제19야전군 - 제20야전군 | 약 40만 명 - 제2기갑집단 - 제3기갑집단 |
피해규모 | - 포로 50만 명 - 전차 3,400여 대 손실 | - 전차 214대 손실 |
1. 개요
1941년 독소전쟁의 일부로 전개된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해 바르바로사 작전 전체에 엄청난 변화가 발생했다.2. 전투 이전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에 의해 독소전쟁이 개전하였다. 초기 독일군은 기갑전력을 활용해 쾌속전진하면서 소련군을 찍어누르고 있었다. 특히 7월 3일 종료된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에서 페도어 폰 보크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중부집단군은 40만에 이르는 소련군을 붕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서부전선군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를 패전의 책임을 물어 총살시켜 버렸다.한편 독일군은 초전의 대승에 힘입어 사기가 폭발적으로 올랐다. 그때, 중부집단군 내에서 전략에 대해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집단군의 선봉대 역할을 하는 제2, 3기갑집단을 이끄는 하인츠 구데리안과 헤르만 호트는 즉각적인 진격을 주장했다. 반면 제4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는 기갑집단과의 간격이 지나치게 길다는 이유로 전열 정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당시 독일군은 기갑군으로 적을 몰아세우고 보병이 뒷정리하는 전략을 채용했는데, 이 때문에 보병을 지원할 전력이 부족해지면서 보병 계열의 불만이 누적된 상태였다. 집단군 사령관 보크는 양측의 의견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7월 1일 민스크 전투가 종료되기도 전에 구데리안과 호트가 보고도 없이 모스크바 방면 베레지나 강 동안으로 기갑전력을 이동시켜 버렸다. 보크와 클루게는 크게 당황했으며 특히 클루게는 극대노하면서 군법회의 회부로 위협했다. 이 때 OKH
3. 전투 경과
3.1. 독일의 진격과 소련의 대응
보크는 제2기갑집단은 도시 남부로, 제3기갑집단은 북부로 나아간 뒤 도시 후방에서 합류하여 포위망을 구성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후 민스크 전역이 마무리되면 즉시 제4, 9군이 합류하기로 했다. 7월 6일 전투가 개시되었다. 독일군은 이미 40만이 넘는 소련군이 사라졌기 때문에 여유로운 진격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불개미떼 같은 소련군이 몰려 들었다.
이는 스탈린이 동원가능한 예비대를 몽땅 서부전선군 복구에 투입하고 근방의 중앙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 총 60만을 싸그리 스몰렌스크로 보낸 결과였다. 이후 스탈린은 총지휘관으로 세묜 티모셴코를 임명했다. 병력 이동 후 군부 총참모장 게오르기 주코프는 조금씩 후퇴하며 지연 방어전을 펼쳐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철혈의 대원수에게 그 소리가 먹힐 리가 없었다. 스탈린은 그저 "쪽수는 우리가 많으니 밀어버려!"라는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3.2. 대참사가 시작되다
스탈린의 명령을 받잡은 티모셴코는 레피옐에 주둔한 제20군을 스몰렌스크로 돌진시켰다. 하지만 전황을 모른채 무식하게 돌진한 결과는 고립이었다. 드비나 강과 드네프르 강 일대에 고립된 20군을 구하기 위해 비텝스크와 오르샤 일대 예비대가 달려 나갔지만 손실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 결과 5일만에 830대의 전차를 날려먹으며 20군은 완벽히 격파당했다. 소련 20군을 갈아버린 독일군은 이후 비텝스크, 모길레프, 벨리키예루키 등을 차례로 점령해 나갔다.
티모셴코는 야전군 하나가 격멸당했음에도 여전히 공세를 지시했다. 독일 제2기갑집단이 보브루이스크까지 전진하면서 집단의 남쪽이 길게 노출되자 그곳을 때리기로 한다. 이에 복구된 제4, 13군과 새로 투입된 제21군을 동원해 해당 방면으로 진격시켰다. 7월 13일, 제21군이 전차를 앞세워 독일 제24장갑군단을 로가체프까지 밀어버렸다. 그런데 24장갑군단은 아랑곳않고 50km를 치고 나가 포위망을 손쉽게 벗겨버리고 제 46장갑군단과 함께 소련 제13군을 모길레프에 가둬놓고서 두들겨버렸다.
3.3. 스탈린의 아집, 소련군 대붕괴
그동안 제2기갑진단 본진은 스몰렌스크 남부로 진격해 도시 근교로 접근했고, 민스크 뒷정리를 끝낸 독일 제9군까지 벨리키예루키로 이동해 전력이 보강되었다. 동시에 예비대였던 제2군은 드네프르 강으로 전진하면서 소련군의 측면이 완전히 봉쇄되었다.
그런데 북쪽으로 향한 제3기갑집단에 문제가 발생했다. 비텝스크까지는 걸리적거리는 것은 싹 다 치워버리며 쾌속 전진했는데, 습지와 악천후로 인해 진격이 중단된 것이다. 이 틈을 타 소련군은 간신히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지만, 미련한 대원수는 재차 공세를 통해 스몰렌스크를 무조건 지키라고 지시했고 충실한
현장의 소식이 전해지자 스탈린은 눈이 뒤집히면서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현실을 접하고, 주코프 뿐만 아니라
4. 결과
민스크에 이어 스몰렌스크에서까지 대패를 겪은 소련군은 전투 단 두번만에 무려 120만의 병력을 산화시켜 버렸다. 뿐만 아니라 독일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에 의해서도 40만이 추가로 갈려나갔다. 2개월 만에 전체 전력의 40%가 사라진 것이다. 이에 히틀러는 흥분하여 실질적인 승전 선언을 할 정도였다.하지만 그렇다고 동부전선의 상황이 빛만 가득하지는 않았다. 특히 중부집단군의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쾌속 전진으로 인해 오히려 보급에 문제가 생기면서 전진이 급속도로 둔화된 것이다. 게다가 전략적 실책도 발생했는데, 사실 구데리안은 스몰렌스크 남부에 도달한 시점에 본진은 계속 전진해 모스크바로 향하고 일부 장갑군단만 스몰렌스크에 남기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히틀러와 OKH는 스몰렌스크를 완전 점령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결국 구데리안은 스몰렌스크로 향했다. 이후 모스크바 공방전과 그 전, 후의 전황을 볼 때 결과적으로 이때 구데리안이 추가적인 진격을 하지 못한 것은 독소전쟁 전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