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테르플라테 전투 Battle of Westerplatte 폴란드어 : Obrona Westerplatte[1] |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베스테르플라테 요새를 포격하는 전함 슐리스비히-홀슈타인 | ||
독일군측 지휘관 에버하르트에게 항복하는 폴란드측 지휘관 수하르스키 | ||
양측 병력 배치 및 진격도 | ||
기간 | ||
1939년 9월 1일 ~ 9월 7일 | ||
장소 | ||
베스테르플라테 요새, 단치히 자유시 | ||
교전국 | 폴란드 제2공화국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단치히 자유시|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베스테르플라테 반도 주둔 폴란드군 총사령관 헨리크 수하르스키 -베스테르플라테 요새 군수 사령관 프란체스크 동브로프스키 | -공격군 총사령관 \ 프리드리히게오르크 에버하르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함장 구스타프 클레이캄프 -해군 육전대 사령관 빌헬름 헤닝센† |
전력 | 폴란드 병력 210명 야포 1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문 | 나치 독일 병력 3500명[해군육전대] 전함 1척 어뢰정 1척 소해함 1척 곡사포 다수 항공기 60기 |
피해규모 | 폴란드 15명 사망 20명 부상 포로 155명[3] | 나치 독일 50명 사망 150명 부상 |
결과 | ||
베스테르플라테 요새 수비군의 항복 | ||
영향 | ||
폴란드 국민 및 병사들의 사기 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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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9년 9월 1일부터 7일까지 단치히 자유시의 베스테르플라테 요새를 넣고 벌어진 전투. 폴란드 침공의 첫 번째 전투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막을 올린 전투이기도 하다.2. 전개
2.1. 전쟁의 조짐, 양측의 준비
1939년 3월 말, 독일은 리투아니아에 최후통첩을 가하여 메멜 등 클라이페다 일대를 전격 합병했다. 이와 같은 확장적인 독일의 움직임은 폴란드에게 큰 우려를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폴란드는 친독 성향이 강했던 단치히 자유시에서 독일이 사주한 쿠데타가 일어날 것을 걱정했다. 이에 폴란드는 비밀리에 베스테르플라테에 병력을 증원하기로 결정, 군복을 입은 폴란드 민간인들을 내보내고 몰래 증원군을 요새로 투입했다. 독일 및 단치히 측에게 요새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기 위해서였다.이에 따라 1939년 8월쯤 되면 본래 88명이었던 요새 수비군이 약 210명[4] 정도까지 증강되었고, 총사령관 수하르스키 소령을 포함해 이들을 지휘할 장교 6명도 같이 배치되었다. 한편, 장비 면에서는 주둔군은 권총, 수류탄 등 소화기 다수, 소총 160정, 75mm 야포 1문, 보포스 37mm 대전차포 2문, 81mm 박격포 4문, 중기관총 18정을 포함한 기관총 40정을 보유했다.
이 외에도 폴란드군은 참호를 추가로 파고, 철조망과 바리케이트를 추가로 설치하는가 하면 요새 구조물 일부를 콘크리트로 보강하는 등 독일군의 침공에 대비해 요새 구조를 대대적으로 강화하였다. 당시 폴란드군은 독일군이 육지 방면(동쪽)에서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에 방어선을 그쪽으로 건설했다.
당시 건설된 방어선은 총 3중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1차 방어선은 요새 내 병력들이 전투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목표였으며 참호로 보강된 방어진지 4곳이 있었다. 2차 방어선은 보급창고를 중심으로 구축되었으며 경비초소 5곳이 설치되었고, 마지막으로 최후 방어선인 3차 방어선은 요새 지휘본부와 막사를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폴란드 측의 목표는 요새가 적의 공격을 약 12시간 정도를 버티는 것이었는데, 그 정도면 본토에서 증원군이 도착해 요새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독일군 측도 준비에 들어갔다. 1939년 8월 25일, 독일군은 함장 구스타프 클레이캄프가 지휘하는 도이칠란트급 전함 슐리스비히-홀슈타인을 친선 방문을 명목으로 단치히항에 전격 입항, 요새 남동쪽에서 150m 정도 되는 거리에 정박시켰다. 명목상으로는 친선 방문을 위해 입항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당시 전함 내부에는 빌헬름 헤닝센 대위가 이끄는 해군 육전대 225명이 몸을 숨기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서쪽 방면에서는 프리드리히게오르크 에버하르트 중장 휘하의 병력 1,500명이 투입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당초 독일군의 계획은 슐리스비히-홀슈타인이 입항한 다음날인 26일 아침 공격을 게시하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당일 새벽 클레이캄프는 전함을 요새에 가깝게 이동시켰다. 이를 발견한 수하르스키는 요새에 최고 수준의 경계령을 내리고 공격에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해군 육전대가 전함에서 이함하기 직전, 상부에서 갑자기 공격 중단 명령이 내려왔다. 공격 전날이었던 25일 영국과 폴란드가 영국-폴란드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고, 이를 알아챈 히틀러가 일단 적대행위를 미루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히틀러가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동맹 이탈리아가 강철 조약의 의무사항을 이행할지에 대한 의구심도 한몫했다고 한다. 여하튼 이렇게 공격은 한 차례 연기되었고, 최종적으로 9월 1일 아침에 시작되도록 재조정되었다.
한편 당시 독일군 지휘관들은 폴란드의 수비군 규모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측을 매우 얕잡아보고 있었다. 클라이켐프는 전함의 포격이 요새의 방어선을 상당부분 무력화시킬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후 사실상 빈사 상태가 된 요새를 육전대가 가서 깃발만 꽂으면 전투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비단 클라이켐프만의 생각이 아니라서, 공격 직전 클라이켐프는 단치히 자유시 경찰에게 "요새는 반드시 10분만에 함락될 것"이라는 말을 듣었다. 그나마 지상 방면 공격을 맡은 에버하르트는 조금 더 신중한 입장이었는데, 그는 요새를 함락시키는데 최소 몇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놓친 게 하나 있었는데, 바로 요새 수비군 측의 규모를 100명 이하라고 판단한 것이다.[5]
2.2. 대전쟁의 서막과 폴란드의 항전
그렇게 1939년 9월 1일 새벽, 슐리스비히-홀슈타인이 베스테르플라테 요새를 향해 포격을 시작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동시에 폴란드 침공의 막이 올랐다. 이 포격이 시작된 정확한 시각은 학자들마다 다소 의견이 갈리는데, 4시 45분 설, 4시 47분 설, 그리고 4시 48분 설이 대립한다. 이에 대해 폴란드 역사학자 야로스와프 툴리슈카는 처음 계획된 시각이 4시 45분, 클라이켐프가 발포 명령을 내린 것이 4시 47분, 실제로 포격이 시작된 시각이 4시 48분이라고 주장한 바 있으며, 또다른 역사학사는 포격이 그것보다 더 이른 4시 정각 경에 실시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하튼, 기습공격을 받은 수하르스키는 급히 인근 헬 반도의 폴란드군 지휘본부에 "SOS- 우리는 공격받고 있다"라는 내용의 짧은 무전을 송신했고, 요새 수비군들은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포격이 시작된 지 약 8분이 경과하자, 이번에는 포격 두 시간 전 반도 동쪽에 비밀리에 하선해 있던 헤닝센 휘하 해군 육전대가 공격을 게시했다. 헤닝센은 전함의 포격이 요새의 방어 시설물을 무력화시켰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빠른 승리를 기대하며 요새로 진격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기대와 다르게 포격은 폴란드 측에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벽돌로 만들어진 요새의 외벽이 일부 붕괴되고 연료 창고에 불이 붙는 등의 피해는 있었지만, 요새 측에서는 단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한편, 이 사실을 알 터 없는 해군 육전대는 요새 외벽을 넘어 약 200m 정도 전진하였으나, 직후 폴란드 측의 강력한 반격을 받았다. 해군 육전대 병력은 급히 산개 후 엄폐하려고 했으나 사방에 펼쳐진 철조망 때문에 신속히 이동할 수 없었고, 결국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이때 독일군의 상황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자 중구난방 그 자체였다. 아침 5시 15분 경 폴란드군은 침착하게 75mm 야포로 운하 건너편 창고 지붕에 위치한 독일군 기관총 진지 여러 곳을 무력화시켰고, 같은 시기 철조망 밭에 갇힌 해군 육전대는 맹렬하게 쏟아지는 박격포탄들의 먹잇감이 되고 있었다. 이 상황은 급기야 전함 슐리스비히-홀슈타인이 37mm 대전차포의 공격을 받으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비슷한 시기, 단치히 자유시 경찰이 주가 된 병력들이 요새 서쪽의 보급창고에 상륙하려고 했지만 폴란드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관총 사격으로 폴란드군 하사 보이치에흐 나이사레크가 전사했고, 나이사레크는 폴란드 침공- 그리고 나아가 앞으로 6년 동안 이어절 대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전투는 지속되었고 이후 오전 6시 22분, 해군 육전대는 슐리스비히-홀슈타인에 폴란드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해군 육전대는 병력의 1/4에 달하는 5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상태였는데, 이와 대비되게 폴란드군 측의 사상자는 8명에 불과했다. 이후 재장전을 마친 슐리스비히-홀슈타인은 7시 40분부터 8시 55분까지 재차 2차 포격을 게시했다. 해당 포격은 이전보다는 성공적이었고, 독일군은 75mm 야포를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다. 포격에 고무된 해군 육전대는 8시 35분부터 재공격을 감행했지만, 지뢰, 쓰러진 나무, 그리고 철조망들에 가로막혔다. 게다가 포격에도 불구하고 폴란드군의 반격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 와중에 사령관 헤닝센이 중상을 입는 사태까지 벌어지자,[6] 결국 해군 육전대는 정오 경 요새 점령을 포기하고 후퇴한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에버하르트는 뒤늦게 항공 지원을 요청했지만, 공군 측에서는 기상 문제로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항공 지원이 무산되자 독일군은 일단 9월 1일 당일에는 추가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첫 날 사상사자는 폴란드군은 4명 전사에 다수 사상으로 굉장히 적었던 데 비해, 독일군은 전사자만 16명, 부상자는 무려 120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2.3. 독일군의 반격
처참한 성적표를 받은 클라이켐프와 에버하르트는 요새 측의 방어선이 추가로 무력화되기 전까지는 직접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 요새 포격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지휘관들은 폴란드군을 과소평가한 전날과는 다르게, 요새 지하에 대규모 방어진지와 벙커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등 요새 주둔 전력을 실제 이상으로 과대평갇하게 되었는데, 요새의 항공 정찰 사진을 분석한 결과 여섯 개의 벙커 지붕이 보인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러나, 독일군이 벙커 지붕이라고 착각하였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냥 건초 더미였다.여하튼 다음 날부터 공격은 재게되었다. 슐리스비히-홀슈타인을 비롯한 독일 해군의 군함들 다수와, 105mm 및 210mm 곡사포 포대가 요새를 향해 격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또한, 베스테르플라테의 기상 상황이 개선되면서 오후 6시 5분 약 60기 규모의 Ju 87 편대가 요새에 대대적인 공습을 가해 박격포 진지, 경비초소 1곳, 그리고 식량 창고를 파괴했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군 8명이 전사했다. 또한 이 때 요새의 라디오 및 통신 시설이 파괴되면서 수비군 측은 더 이상 본국과 교신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공습은 베스테르플라테 전투에서 유일하게 이뤄진 독일군의 공습이었지만, 수비군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9월 4일에는 독일 해군 소속 어뢰정 T194와 소해함 M107이 요새 북쪽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이 두 척의 군함은 비록 1차 세계 대전 시기 건조된 구식함이었지만, 그동안 독일군의 공격이 요새 남쪽, 서쪽 그리고 동쪽에만 집중되었던 탓에, 느닷없이 북쪽에서 이뤄진 이 공격에 수비군은 당황했고 결국 방어진지 1곳을 버리고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T194 및 슐리스비히 홀슈타인에서 부상자 몇 명이 발생했는데, 요새 수비군은 독일 해군 함정에 대해 공격을 한 적이 없었으므로 이들은 함내 기계 고장 등으로 인해 부상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날인 9월 5일, 수하르스키는 휘하 장교들과의 회의에서 더 이상은 항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항복을 제안했다. 당초 12시간만 버티는 것이 목표였기에 전투 4일차에 접어들면서 식량 및 물자가 부족해지고 있었고[7], 요새 내 시설도 많이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새 군수사령관 동브로프스키는 아직 조금 더 버텨보자며 항전을 주장했고, 긴 논의 끝에 항복 제안은 일단 부결되었다.
한편 요새가 계속 버티자 독일군은 급기야 불타는 열차를 요새 내부로 돌진시켰는데, 열차를 요새 내 연료저장고에 직격시켜 요새 측의 잔존 연료를 불태우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열차를 조종하던 기관사가 겁을 먹은 나머지 열차를 버리고 너무 일찍 뛰어내렸고, 결국 열차는 탈선해 연료저장고 대신 숲으로 돌진, 숲에 거대한 화재를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이 화재로 인해 발생한 연기, 그리고 탈선한 기관차와 화차들은 폴란드군에게 훌륭한 엄폐물이 되어주었고 독일군 지휘관들은 뒷목을 부여잡았다. 당일 오후 독일군은 불을 붙인 열차를 다시금 요새 내부로 돌진시켰지만 이 공격도 성공적이진 못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요새 내 수비군의 상황도 점점 악화되어 갔다. 일단 물자가 매우 부족했던 데다가, 독일군이 바르샤바 외곽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증원군의 도착은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부상자 다수가 심각한 괴저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9월 6일, 수하르스키는 회의에서 재차 항복을 제안했다. 한편, 당일 아침 독일군은 2시간 30분 동안 동안 화염방사기와 슐리스비히-홀슈타인을 중심으로 요새에 대규모 포격을 가했고, 이 공격으로 경비초소 1곳이 파괴되고 2곳이 손상되었다.
2.4. 전투의 끝
결국, 9월 7일 아침 9시 45분, 수비군 측은 백기를 올리고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약 6일간 이어진 폴란드군의 맹렬한 저항에 에버하르트는 크게 감명받은 상태였고, 수하르스키가 예도를 들고 항복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8]그렇게 당일 아침 11시 30분을 기하여 수비군들은 전부 요새를 떠나면서 2차 세계 대전의 첫 전투는 막을 내렸다. 한편, 요새를 떠나는 수비군들을 지켜본 독일군들은 약 1주일동안이나 동안 자신들을 상대로 맹렬하게 저항하던 이들의 수가 상당히 적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3. 후일담
베스테르플라테 요새의 항복은 영미권 신문과 잡지들에도 보도되었는데, 이때 지휘관 수하르스키의 이름이 "코시안스키"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적혀 나가는 실수가 있었다.베스트레플라테 요새를 점령한 독일군은 요새 내부에서 폴란드군 병사 네 명이 묻힌 무덤을 발견했다. 이들의 정체는 탈영병들로, 현대에는 이들이 9월 2일의 대규모 공습 이후 탈영을 시도하다 붙잡혀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요새 점령 5일 후인 9월 12일에는 항복한 수비군 측 라디오 담당 부사관 카지미에즈 라신스키가 독일군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항복 직후 라디오 코드를 넘기라는 독일측의 요구를 거부하고 며칠간 모진 고문을 받은 뒤 권총을 맞고 절명했다. 한편, 9월 19일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단치히에 방문했는데, 그는 이틀 뒤인 21일 베스테르플라테 요새를 둘러보았다고 한다.
한편, 전투 첫날 독일군을 괴롭힌 75mm 야포는 노획되어 플렌스부르크에 전시되었다. 특이하게 전후에도 폴란드로 반환되지 않았고 현재는 플렌스부르크 바로 옆 킬의 한 해양 학교 정문에 전시되고 있다.
3.1. 2차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한편 베스테르플라테는 6년 후 또다시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이전과는 정반대로, 소련군의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로 베스테르플라테 반도 쪽으로 물러난 독일 육군 제73 보병사단의 일부 전력이 소련군과 전투를 벌인 것. 이들은 3월 28일에서 4월 1일까지 약 나흘간 버티다가 선박을 통해 전원 철수했다.4. 평가
2차 세계 대전의 첫 전투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매우 큰 전투이다.다만, 세간에는 흔히 베스테르플라테 전투가 세계대전의 서막을 연 전투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해 이견도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역사학자 이안 디어(Ian Dear)는 슐리스비히-홀슈타인의 포격(4시 48분)이 독일 공군이 폴란드 공군의 비행장 및 교각을 공습(4시 30분)한 뒤에 일어났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본격적인 전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알프레트 나우요크스와 SS의 가짜 깃발 작전은 이미 8월 31일 밤 시작된 상태였다.
일단 대체로 오늘날 학계에서는 베스테르플라테 전투만을 2차 세계대전의 첫 전투로 보기보다는, 조금 더 넓은 관점을 적용해 독일-폴란드 국경에서 9월 1일 새벽/아침에 벌어진 다수의 전투들을 모두 독일-폴란드 국경 전투로 묶어서 보는 추세이다. 물론, 아직도 민간 그리고 세간에서는 2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 전투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마땅한 증원 하나 없이 압도적인 적들을 상대로 6일이나 버틴 수비군은 폴란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동시에 오래오래 큰 귀감이 되었다. 9월 1일, 독일의 침공 소식을 보도하던 폴란드 라디오 방송국은 "베스테르플라테의 수비군은 아직 싸우고 있다"라고 강조했으며, 16일에는 베스테르플라테 요새의 수비군들을 기리는 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9] 나아가 1943년에는 아예 폴란드 인민군[10] 의 여단 하나가 "베스테르플라테의 수호자들"이라고 명명되었고,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폴란드 국내군은 도시에 구축한 방어진지 한 곳을 "베스테르플라테"라고 명명했다. 이렇게, 폴란드 국내에서는 저항 정신과 독립의 상징 그 자체로 여겨지는 전투라고 볼 수 있다. 가히 폴란드판 테르모필레 전투나 2차 진주성 전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그래서 지금도 전투가 벌어진 9월 1일에는 매년 폴란드의 고위 정치인들이 베스테르플라테를 방문하며, 2차 대전 발발 70주년이었던 2009년에는 독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프랑스 정상들이 다 함께 베스테르플라테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었다.
5. 여담
베스테르플라테 전투를 다룬 영화가 1967년과 2013년 각각 한 번씩 제작된 적이 있다.이 전투의 폴란드측 지휘관이었던 수하르스키의 행보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한동안 수하르스키는 압도적인 독일군에 맞서 부하들을 독려하고 요새를 수호한 명장으로 칭송받았으나, 1990년대 초부터 그간의 인식과는 대조되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수하르스키는 첫 이틀동안만 전투를 지휘했고, 9월 2일 벌어진 공습 이후에는 쉘 쇼크로 겁을 먹고 여러 차례 항복을 주장했었다고 한다. 이런 수하르스키를 설득하고 실질적으로 전투를 이끌어나간 것은 요새 군수사령관이었던 프란체스크 동브로프스키라는 것. 실제로 수하르스키가 9월 5일 처음 항복을 주장했을 때 동브로프스키가 반대했다는 기록을 보면 마냥 신빙성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한편,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동브로프스키 및 수하르스키의 휘하 장교들이 왜 죽을 때까지 이에 관해 일언반구도 없었는지 의문이 들수도 있는데[11] 이에 대해서는 당시 수하르스키와 함께 요새를 방어하던 다른 장교 5명이 그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다같이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함구하기로 해서 그랬다는 말이 있다.
[1] 베스테르플라테 방어전이라는 뜻이다.[해군육전대] 225명 포함[3] 185명이라는 설도 있다.[4] 과거에는 182명이라고 추산되었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210명에서 최대 240명으로 잡는 편이다.[5] 사실 본래 요새 주둔군 규모가 88명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판단은 아니었다. 문제는 전술했듯이 폴란드군은 이미 3월 말부터 병력 증원을 시작했고, 전투 게시 시점에서 요새 수비군은 그에 두 배가 넘는 210명까지 늘어나 있었다는 점이었지만.[6] 헤닝센은 결국 얼마 못 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7] 특히 이틀차에 공습으로 식량 창고가 날아간 것이 컸다.[8] 다만 이 예도는 항복 후 독일군들이 가져갔다고 한다.[9] 참고로 당시에는 수비군들이 최후까지 싸우다 전원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시의 내용 또한 그렇게 맞춰져 있다.[10] 소련 측에 편입되어 싸운 폴란드군으로, 서방의 자유 폴란드군과는 별개의 조직이다.[11] 일례로 동브로프스키는 1962년 사망했는데, 수하르스키는 1946년에 사망했다. 즉, 자신의 공적을 밝힐 시간이 16년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