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00:53:00

몬테카시노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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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 카시노 전투 (The Battle of Monte Cassino)
제2차 세계대전이탈리아 전선의 일부
날짜
1944년 1월 17일 ~ 5월 18일
장소
이탈리아 왕국, 몬테 카시노
교전 국가 및 세력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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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폴란드 망명 정부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캐나다 자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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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알베르트 케셀링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프리들린 폰 센게르
결과
연합군의 승리
영향
몬테카시노 수도원 손실
피해규모
사상자 5만5천 명 사상자 ~2만 명
민간인 2천 명 사망

1. 개요2. 상세3. 기타4. 전쟁범죄

1. 개요

1944년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중 하나. 독일 국방군 공군 공수부대 팔시름예거가 카시노 산을 방어 거점으로 삼고 미국·영국·자유 프랑스·폴란드 망명 정부·오스트레일리아·브라질·벨기에·캐나다 육군공군으로 이뤄진 연합군[1]과 맞선 방어전이었다. 또한 공동교전국으로 연합국에 전향한 이탈리아 왕국군과 현지 레시스텐자도 연합군을 돕는 데 가세했다.

독일 공수부대의 용맹함과 나라 잃은 설움을 불타는 복수심으로 푼 폴란드 망명 정부자유 폴란드군의 기상을 널리 알린 전투이다.

2. 상세

파일:mt0.jpg
당시 온전했던 수도원의 모습

당시 사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독일군은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를 포기하되 로마는 계속 수중에 넣은 상태로 유지하고자 지연전을 수행하며 서서히 후퇴하고, 연합군은 이를 추격하는 형국이었다. 독일군은 '구스타프 라인(혹은 윈터 라인)'이라 불리는 방어선에 도달한 후 후퇴하는 아군의 후미를 방어하려고 독일 공수부대를 급파했다.

독일 공군 제1공수사단은 전선에 도착하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몬테카시노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몬테카시노산에는 가톨릭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방어하면 연합군의 진격을 능히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수도원중세 시대에 지어진 유서 깊은 수도원으로[2] 가치 있는 고문서들도 많은 중요한 문화유산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 총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 공군원수는 부대에 "수도원에 손 끝 하나라도 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연합군 지휘부에도 방침을 전달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연합군은 적군의 말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수도원이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치라 거슬리기도 했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연히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구조를 대략 알 수 있는 문서를 연합군이 입수했는데, 돌로 된 외벽의 두께만 3 m에 육박하여 어지간한 야포 따위로는 이빨도 안 먹힌다는 사실에 다들 경악했다.

결국 연합군 상층부는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관측병이 수도원까지 올라와서 관측할지도 모른다.'는 둥 핑계를 들어 수도원에 포격과 융단폭격을 가해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수도원 인근에 수도원보다 더 관측에 유리한 봉우리들이 있었기에, 독일군 입장에서는 굳이 연합군에게 잘 보이는 수도원에 자리잡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렇게 무리하게 폭격을 감행한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이탈리아 전선은 독일군이 이탈리아의 험악한 지형을 끼고 우주방어를 폈는데, 이를 억지로 뚫고 지나가는 양상이었기 때문에 연합군 입장에서는 진격속도가 느린 데 비해 보병의 손해가 엄청났다. 몬테카시노 전투에 참전한 어느 육군 대령은 "이런 험악한 곳에서 연이은 혈전에 지친 병사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김영옥 미합중국 육군 보병 대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당시 수도원 안에는 수도자들과 부상당하거나 피난온 민간인도 다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케셀링 장군이 수도원을 방어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예하 부대에 명령을 내렸고, 자신들이 수도원에는 부대를 전혀 배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연합군에 통보하기까지 했다.

대수도원장(아빠스)은 미군이 뿌린 폭격예고 삐라를 보고 부랴부랴 피난행렬을 꾸렸지만, 행정상의 착오인지 조급증이 난 미군의 무리한 작전개시인지 몰라도 삐라에 예고된 날보다 일찍이 미 육군 항공대B-17이 폭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탈리아 민간인들이 폭격에 희생되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지 율리우스 슐레겔 공군 공수 중령이 폭격을 피하기 위해 수도원 지하로 옮겨놓은 중세 필사본 서적 등 수도원의 1만 2천 권에 달하는 장서들과 미술품들을 모두 바티칸의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었기 때문에 문화재 소실은 방지할 수 있었다. 미국 정부의 입장은 전후 조금씩 정정되었는데, 1969년 최종적으로 확정된 미 육군 공식 문서는 '폭격 당시 수도원은 독일군에게 점거되어 있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아무튼 수도원이 박살났으니 더 이상 방어거점으로서 작동을 못하면 그나마 미군에겐 위안이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원래 튼튼한 요새였던 만큼 아무리 폭격으로 두들겨 패도 폐허가 남았고, 이 폐허가 보병에게는 매우 유용한 은엄폐를 제공해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눈치 볼 게 없어진 독일 공수부대원들은 수도원의 폐허 속에 더욱 더 튼튼하고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고, 연합군은 항공 지원포격 지원을 등에 업고 대규모 공세를 가해도 거점을 점령하지 못하고 번번이 물러나야만 했다. 결국 수도원 폭격은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열악한 방어진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바꾸어 적군에게 헌납한 셈이라는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다.
  •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파괴됨이 오롯이 연합군의 탓이라는 말은 눈 가리고 아웅에 가깝다. 2020년 비오 12세의 보관고에서 발견된 문서에 의하면 양군은 1943년 10월에 수도원이 전투에 휘말리지 않게 하겠다며 중립지대를 설정했으나, 1943년 12월 23일 히틀러의 직접 지시로 이미 몬테카시노에 실제로는 독일군의 방어 진지가 구축되었다. 1944년 1월부터는 아예 중립지대 표지판까지 철거됐다. 그래서 중립지대의 수도원 벽 아래에서 실제로도 독일군은 잘만 군사행동을 하고, 포탄과 탱크를 숨겨소 포격까지 행하고 있었다.

    물론 케셀링 주장대로 수도원 안에는 독일군이 없었다. 하지만 수도원 안에 들어가지만 않았을 뿐이지, 자기들이 처음에 중립지대로 그어놓은 근방에서 중립지대 따위 군사적 행동을 하였다. 심지어 야간에는 아예 수도원 벽을 엄폐물 삼아 탱크로 포격까지 쏴대었으니 현장의 연합군이 민감해지기엔 충분했다. 물론 그렇다고 민간인이 있는 곳까지 폭격한 연합군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독일 역시도 이 사건에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

다급해진 연합군은 이 지역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돌파하기 위해 기존의 몇십 배에 달하는 병력을 계속해서 더 투입하였다. 자신들의 몇십 배에 달하는 병력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계속해서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연합군 측도 정예부대였는지라 한 번은 양측의 전선이 10 m까지 좁혀진 적도 있었다. 결국 이 전투는 독일군의 철수 후미를 경계하며 시간을 끄는 작전에서 독일 공수부대와 연합군 정예부대들 간 자존심 싸움으로 바뀌었다. 당시 연합군 부대 중에서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 제2군단은 특히나 독일에 대한 복수심과 보복심이 뼛속 깊이 박혔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당시 독일 제1공수사단의 한 소대장 '하인츠 베르거' 중위의 증언에 의하면 이러하다.
우리는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그 점은 이미 우리의 적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군은 모든 점에서 이성을 상실한듯 보였다. 그들은 흡사 이 전투에서 전원이 몰살당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부상을 입은 어느 폴란드군 부상병이 우리가 다가가자 마치 야수같은 괴성을 질러대며 마구 돌을 집어던지며 계속해서 저항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하반신 전체는 이미 수류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그러져 있었음에도 말이다.
또한 프랑스 육군 원정군단(FEC)에 소속된, 모로코구미에 산악병들은 고향이 험한 산악지형이라 몬테카시노 산 정도를 등반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연합군이 엄청난 병력을 동원해서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포함한 산악지역 전체를 감싸려 한다는 사실이 독일군 상층부에 보고되자, 케셀링 장군이 명령을 내려 독일 공수부대가 철수함으로써 몬테카시노 전투는 막을 내렸다. 더욱 대단한 것은 전투력이 손실되었을 독일공수부대는 야음을 틈타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나온뒤 후퇴하는 독일군 사단 후위를 지키는 역할을 맡아 2주 가까이 연합군 추격대를 저지했다는 것이다.

지금 몬테카시노산에 재건된 수도원에는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전사한 양측 장병들의 묘비가 세워져 전사자들의 넋을 달랜다.

이 전투에서 '몬테카시노의 녹색 악마들'이라는, 독일 공수부대의 별명이 하나 추가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의 전용 피복인 녹색 계열 배색의 위장무늬 덧옷과, 역시 일반 공군 병력들에겐 지급되지 않은 녹색 강하복 하의 덕에 멀리서 보면 이들이 녹색 덩어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3. 기타

결국 몬테 카시노를 점령한 것은 자유 폴란드군이었다. 물론 엄청난 서방 연합군의 포위공격이 바탕이 된 것이었지만. 전사자 수만도 4천 명을 넘어가는 등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폴란드군 소속 제4소총대대의 경우 대대장이 단 하루만에 2명이 전사했다. 3월 17일에 카롤 판슬라우 중령이 전사하고 유제프 스토예프스키-리브친스키 소령이 지휘권을 인계받았는데 같은 날 전사한 것. 전사자 대부분은 인근 언덕에 묻혔고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폴란드군
우리의 자유와 당신들의 자유를 위해[3]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
우리의 육체를 이탈리아의 흙에
우리의 심장을 조국 폴란드에 바쳤다.
이탈리아의 녹색 악마였던 독일 정예와, 각종 우주방어라인을 분쇄하여 질주한 미군의 전과도 눈부시지만,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폴란드군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진정한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파일:external/www.euro-t-guide.com/Monte_Cassino_2012_23.jpg
한편 몬테카시노의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전쟁이 끝난 후 복구되었는데, 이 수도원은 이로써 총 5번 파괴되고 5번 재건되었다.[4] 현재 수도원의 청동제 정문 하단부 좌측에는 수도원을 처음으로 파괴한 랑고바르드족의 얼굴이, 우측에는 2차대전 중에 수도원을 파괴한 연합군 폭격을 뜻하는 군용 철모와 폭탄이 새겨져 있다.

이 전투 당시 이곳에는 크루프 K5라는 그나마 실용적인 열차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K5는 일반 철로에도 쓸 수 있어서 한동안 갈긴 뒤 터널 등으로 도망치는 방법으로 나름 활약했지만 후퇴할 때 폐기되었으며, 잔해는 연합군이 확보했다.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저자 윌터 M. 주니어는 이 베네딕토회 수도원 폭격에 승무원으로 참여했다가 죄책감에 시달려 1996년에 자살했다. 참고로 저 소설도 인류의 문화유산을 수납한 교회에 대한 것이다.

HBO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가니어의 형이 이 전투에서 죽은 것으로 언급되었다.

그 외에도 폴란드군 소속으로 참전한 보이텍이 유명하다. 한 폴란드군이 이란에서 구입해 그의 손에서 길러진 시리아 불곰 보이텍(Wojtek)은 자유 폴란드군 2군단 포병사단 22탄약보급중대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상병(Kapral) 계급까지 받았다. 어릴 때부터 인간들 손에 길러진 탓에 야생적 본능은 많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과 레슬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몬테카시노 전투에서는 포탄 운반을 담당했는데, 이 모습이 형상화되어 22탄약중대의 부대마크가 되어 장병들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한 운반중에 탄약을 단 1발도 떨어트리지 않았다고. 부대 안에 잠입한 스파이를 잡기도 했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폴란드는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자유 폴란드군 소속이었던 보이테크는 폴란드로 가지 못했고[5], 글라스고의 동물원에서 살다가 1947년 에딘버러의 동물원으로 옮겨진 뒤 1962년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맥주와 담배를 즐겼고, 동물원에 옛 전우들이 보러오면 담배를 달란 제스쳐를 했다고 한다.


스웨덴 록 밴드인 Sabaton에서 노래 'Union'의 배경이 되었다.

4. 전쟁범죄

파일:external/ninapetronzio.com/two-women-movie-poster-1020199521.jpg
몬테카시노 전투 이후 자유 프랑스군 사령관 알퐁스 쥐앵 장군이 이끄는 군단이 인근 지역인 치오치아리아(Ciociaria)에서 50시간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다. 이때 프랑스 육군모로코 식민지인 구미에 병사들이 여자 총 2천여 명을 강간했는데 피해자 중에는 [age(1944-01-01)]년도 넘은 아직까지도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여성도 있다고 한다. 참고로 주민이 2,500명에 불과했던 도시인 에스페리아(Esperia)에서만 700명이 강간당했다고 보고되었다.

그 외에 남자 800여 명을 살해했으며, 마을을 불태우고, 재물들은 모두 약탈했다. 이탈리아 영화 <두 여자(Two Women, 1960)>가 이 사건 당시 강간당한 두 자매 이야기를 다루었다. 몬테카시노에서 발생한 강간 피해자들을 이탈리아에서는 '모로코인들의 짓(Marocchinate)'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프랑스나치 독일에 어지간히 데인 국가였기 때문에[6] 소련군이 저지른 범죄와 비슷하게[7] 현재까지도 잘 언급되지 않는다. 게다가, 피해국인 이탈리아 역시 북아프리카에서 학살과 약탈, 강간을 엄청나게 저지르며 추축국다운 온갖 전쟁범죄를 일으킨 터라 이탈리아도 이런 피해에 대하여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다. 이걸로 징징거리자면 압도적으로 훨씬 더 많은 강간, 학살, 약탈, 탄압을 리비아에티오피아에서 저지른 것이 같이 거론되며 역공당할뿐이니까.[8]

참고로 이탈리아는 구미에나 프랑스 때문에 당한 학살 말고도 유고슬라비아 왕국1941년 나치와 손잡고 멸망시키고 좋아라 차지하며 이탈리아인들을 보내 정착시켰지만, 2차대전 말기에 이 이탈리아인들은 같이 이주한 독일인들과 함께 현지인들에 의해 무수히 학살당한 바 있다. 대표적인 사건이 '포이베 학살사건 Foibe massacres' 이다. 당연히 이 학살들도 국제적으로 묻혀져 이탈리아로서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뭐라고 하자면 "쳐들어와서 텃세부리고 약탈하던 침략자 주제에 뭐라고 하냐?"는 소리만 듣으니까.

프랑스군은 이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도 강간, 학살, 약탈 등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프랑스인들이 2차 대전 영웅으로 인정하고 있는 필리프 르끌레르의 2기갑사단은 포로로 잡은 프랑스 출신 독일군 병사들을 전부 반역죄로 규정해서 총살해버리거나 프랑스인 무장친위대원들에게 "너네들 왜 나치 놈들 군복을 입고 있냐"는 질문을 했다가 '그럼 그쪽은 왜 미국놈 군복을 입고 있소?'라는 답변을 듣자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으로 죽여 버렸다. 프랑스 정부는 현재까지도 이 전쟁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 독일군의 결사방어에 연합군은 마지막 공세에서 몬테카시노 공략을 위해 영연방과 타 연합국의 망명정부들의 군대, 심지어는 연합군에 전향/항복해서 재편한 구 이탈리아군 군대까지 총동원했다.[2] 서기 529년 베네딕토회를 창설한 성 베네딕토가 직접 세운 베네딕토회의 첫 번째 수도원이면서 유럽에서 체계적인 수도원을 구현한 최초의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전 세계에서 11곳 밖에 없는 교황청 직속 자치수도원이기도 하다.[3] Za naszą i waszą wolność. 폴란드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모토다.[4] 첫 번째는 581년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한 랑고바르드족에 의해, 두 번째는 844년 시칠리아 정복 과정에서 이탈리아 남부를 약탈하던 아글라브 왕조에 의해, 세 번째는 1349년 수도원을 덮친 지진에 의해, 네 번째는 1799년 이탈리아로 원정 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다섯 번째가 바로 몬테카시노 전투.[5] 애초에 페르시아 산이었기 때문에 평생 폴란드는 간 적이 없다.[6] 동유럽에서 워낙에 스케일 큰 학살들이 많이 일어났기에 가려진 사실이지만, 서유럽에서도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나치에 살해당했다. 프랑스에서는 하루만에 어린아이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 642명이 죽은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마을 단위 학살이 일어났고, 그 외에도 참혹한 마구잡이식 고문 치사와 강제노동이 일어났다. 프랑스까지 갈 것도 없이 네덜란드에서는 전후 5년새 20만 명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7] 독일에서 엄청난 강간 및 학살을 저질렀으나 소련에 먼저 쳐들어간 나치 독일이 저지른 엄청난 학살과 약탈, 강간에 가려졌다.[8] 나치나 다른 식민지를 가졌던 나라들도 똑같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저지른 오스만 제국 역시 민간인들이 보복 학살당한 게 있으나 워낙에 규모가 더 큰 자국군의 학살에 가려졌다. 이는 프랑스나 영국이나 독일 역시 마찬가지이며 일본조차도 만주한반도에서 일본인을 상대로 벌어진 보복학살이 있음에도 정부에서 나서지 못하는 게 그보다 훨씬 더 크게 저지른 학살이 부메랑으로 돌아오기에 입을 다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