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의 제2차 키예프 전투에 대한 내용은 키예프 전투(194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202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내용은 키이우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제1차 키예프 전투(1941) Битва под Киевом, Киевский котёл Die Schlacht um Kiew Battle of Kiev |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시기 | 1941년 8월 17일 ~ 9월 26일 | ||
장소 | 소련 우크라이나 SSR 키예프 | ||
교전국 | 소련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세묜 부됸니 미하일 키르포노스†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하인츠 구데리안 | |
결과 | 독일의 전술적 대승. 바르바로사 작전 진행 약화 | ||
병력 | 80만 | 50만 | |
피해 | 20만 사상, 50만 포로 | 12만 8,000여 명 사상, 실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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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1년 8~9월 소련의 키예프[1]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포위섬멸로 독일군은 무려 70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을 섬멸하며 우크라이나 일대를 방어하던 남서전선군을 와해시켰지만 직전에 벌어진 우만 전투와 더불어 이후 독일군의 진격이 눈에 띄게 느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무엇보다 중부집단군의 기갑부대를 빼내서 성공시킨 결과였기에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로 이어졌다.2. 전투 배경
1941년 8월 동부전선을 시찰하는 히틀러.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와 함께 독소전쟁의 막이 올랐다. 북부, 중부, 남부의 3개 집단군으로 구성된 독일군은 말 그대로 폭풍처럼 소련을 밀어붙였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향해 진격해나갔고 주공인 중부집단군은 경이로운 포위섬멸전을 펼치며 스몰렌스크에서 소련의 3개 야전군을 갈아버리고 50만명의 포로를 잡았고, 민스크 일대에서는 4개 야전군을 소멸시키면서 40만에 육박하는 전력손실을 입히면서 밀어붙였다. 개전 후 가장 전과가 부족했던 남부집단군 또한 우만에서 30만의 소련군 중 대부분을 분쇄하면서 앞으로 진격했다.
반면 소련 쪽의 상황은 암담했다. 전쟁 발발전 400만의 전력이 배치된 전선에서 단 2개월만에 병력의 절반이 싹 사라지면서 반격할 여력이 극도로 부족했다. 3번의 전투(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 우만 전투)에서 소련의 군사적 역량은 바닥을 쳤고, 도저히 독일의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현실을 모르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진하는 독일군.
한편 독일은 연이은 대승에 쾌속의 진군을 이어갔지만, 한 가지 고민이 발생했다. 그것은 앞선 세 번의 전투 이후 무려 80만의 소련군이 고립된 키예프에 대한 처리문제였다. 현장은 물론 OKH 내에서도 도시 처리에 대해 강한 논쟁이 이어졌다. 독일 제6군이 계속해서 견제하고 있었고 키예프에 배치된 소련군의 사기는 걸레짝이 되었기에 당장 문제는 없다는 입장이 최전선 사령관들의 주류였다.
그러나 최종 결정권자인 히틀러와 그 참모진으로서는, 전술적 단위가 아닌 전략적 단위에서 보았을 때 키예프가 장기적으로 큰 위협이었다. 남동유럽을 동서로 쌍분하는 거대한 하천인 드네프로 강의 유역에 자리잡은 도시 가운데 최대의 도시였고, 동시에 소련의 절반이라고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의 최대도시였다. 이곳을 그냥 둔다는 것은 단순히 "키예프를 그냥 두는 것"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으며 우크라이나, 나아가 소련 남부 전 지역에 대한 독일의 세력 투사 역량을 상실한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남쪽에 거대한 구멍을 만든 채로 모스크바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은 독일군의 전선 그 자체를 거대한 돌출부로 만들 것이었다.
당시 독일군의 생각과 달리 소련군은 결코 "한 번 걷어차고 들어가면 허물어질" 수준의 약체가 아니었으며, 독일군에게 속절없이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 수가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가고 있었고, 후방 지휘관들이 소련의 역량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에는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에 따라 키예프를 방치하는 것은 당장은 별 문제가 아니어 보일 수 있었으나 장기적으로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는 독일 모스크바 도행군의 부드러운 측방을 소련 남부군구의 전력에게 그대로 노출하는 행위가 될 수 있었으며, 독일 제6군이 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소련 남부 지역의 전력이 누적된다면 그때는 동유럽 전체가 포위섬멸될 가능성도 농후했다.
이에 따라 히틀러와 그 참모진은 키예프를 청소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중부집단군의 전력을 반으로 찢어 절반을 키예프에 투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 시점 후방에서 대전략을 확립하는 것과 최전선에서 전술을 구사하는 것에 괴리가 생길 정도로 독일군의 진격속도는 빨랐고, 독일 야전 사령관들에게 소련군은 상상 이상으로 지리멸렬하게 보였으며, 구데리안은 모스크바가 코앞인데 키예프로 전력을 보낸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독일군은 상상을 초월하는 진격 속도에 스스로 잠식되어, 전략과 전술 사이에 톱니바퀴가 맞아 돌아가지 않을 지경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며, 점차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3. 전투 진행
발터 모델(좌)과 구데리안 | 독일군의 작전도 |
구데리안은 히틀러의 지시를 듣고 크게 반발했다. 그는 독일의 중부집단군이 굳이 남부집단군을 지원해야 하느냐는 점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당시 독일의 중부집단군은 기습의 효과와 종심 수적 우세를 통하여 소련군을 격파해 나가고 있었을 뿐, 만약 기습도 아니고 소련군이 총력을 다하고 있다면 결코 모스크바로 진입할 수 없을 정도로 전차, 차량, 보급품이 부족했다. 구데리안도 자기 소속의 전력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고 있었으며 여기서 전력을 쪼개어 키예프에 투입한다면 작전 종료 시점까지 모스크바에 진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구데리안이 야전 사령관이었기 때문에 대전략을 이해하지 못하여 내린 결정이었으며 만약 키예프를 소련군의 교두보로 남겨 두었다가는 동유럽 전체가 단숨에 포위섬멸될 수도 있다는 점을 그는 끝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생각한 듯하나, 모스크바 함락이 코앞이라는 대업에 매료되어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구데리안은 남부전선으로 배치되면서도 지속적으로 이럴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히틀러에게 큰 배신감을 표현했다.
구데리안에게 미안했는지 히틀러는 제2기갑집단을 구데리안 기갑집단으로 명명한다. 8월 17일 구데리안 기갑집단은 키예프로 남하하기 시작해 며칠 후 키예프 북부 외곽에 도달했다. 이동을 뒤늦게 포착한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는 키예프 북쪽에 포진한 브랸스크 전선군을 이동시켰지만 한발 늦었다. 구데리안은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소련 제13, 40, 21군을 날려버리며 8월말에 키예프 북부 세임 강 북단까지 진출하였다. 동시에 남부집단군은 남쪽에서 제1기갑집단을 병진시켰고 이들은 드네프르 강 만곡부를 따라 그대로 북상하여 키예프 남단에 이르렀다.
키예프가 고립될 위기에 처하자 소련군은 키예프에 배치된 남서전선군을 드네프르 강 동안으로 후퇴시키려 했다. 그러는 사이 독일 제6군이 도시 정면으로 돌파해왔고 남쪽에서는 제17군이, 북쪽에서는 제2군이 조여들어왔다. 거대한 포위망에 갇히게 되자 남서전선군 사령관 키르포노스와 사령부 총참모장 샤포슈니코프는 스탈린에게 후퇴 명령을 건의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누구인가?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몇십만 목숨을 몇 번씩이나 날려먹은 인물이다. 스탈린은 9월 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에 부됸니를 경질하고 티모셴코를 임명하면서 '닥치고 지켜'라는 명령을 에둘러 전달했다.
그러는 사이 구데리안 기갑집단은 9월 13일 키예프 동부 로흐비챠에 도달했고 이로써 거대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티모셴코는 어떻게든 저항해보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결국 3일만에 철수를 명령했다. 그런데 이때 키르포노스는 '서면'으로 지시를 다시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스탈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앞서 민스크에서 스탈린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철수했던 서부전선군의 사령관 파블로프의 개죽음을 지켜본 그는 추후 책임을 회피할 구멍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9월 19일 총참모장 명의로 프셀 강까지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오히려 전선군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되면서 군대가 흩어져 버렸고 포위망에 가볍게 찢겨나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사령관 키르포노스 또한 전사했다. 그렇게 키예프는 붕괴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 독소전쟁의 전환점
전투 종결 후 생포된 소련 포로
탈출에 성공한 병력은 80만 중 겨우 10만 내외에 불과했다. 결국 소련 제5, 21,26, 37군이 궤멸되었고 제38, 40군 또한 재편에 오랜 시간이 필요할 정도의 막대한 피해를 입어 만신창이가 되었다. 전쟁 개시 후 이 시점까지 동원된 500만 병력 중 무려 300만의 소련군이 사상, 포로가 되면서 당한 소련은 물론 해낸 독일마저도 경악했다. 개전 후 단 3개월만에 이 정도의 전력 손실을 일으키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서부 지역의 소련군 군사력을 제압하며 완전히 점령해냈다.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국가는 백기들고 항복하기 마련이지만 소련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회복 능력은 압도적이었다.
우리가 소련을 과소평가했다. 12개 사단을 격파하면 순식간에 12개 사단을 만든다.
프란츠 할더, 독일 육군 총참모장
키예프가 무너지는 동안 새로운 500만(!!)의 병력이 시베리아와 우랄산맥 동부지역에서 충원되어 오고 있었다. 게다가 전선이 밀리는 와중에도 산업시설은 충실히 이전시켜, 우랄산맥 동부에 새로운 공업지대를 형성할 정도였다. 또한 참호가 깊게 파이기 시작했고, 방어물을 형성하면서 독일의 전진을 둔화시켰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프랑스 침공 당시 독일군 A집단군이 아르덴 방면의 프랑스 주력군을 섬멸하고 프랑스 내부로 돌진하여 예비군 전력을 박살냈을 때 프랑스군의 전사자는 20만명도 채 안 되었지만 전투의지를 잃고 완전히 무너졌다. 그런데 전체 전력의 60%를 상실하고도 바로 이 모든 것을 메꾸어낸 것이다. 프란츠 할더, 독일 육군 총참모장
독일의 경우 세 번의 전투에 이어 키예프에서 역사적인 승전이 이어지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바르바로사 작전 원안대로 이어져 나갈 것이라는 희망찬 기대를 품게 되었다. 하지만 전선은 이미 독일군이 원하는 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었다. 키예프 전투 종료 이후 독일군은 전력을 재배치하고 태풍 작전(Unternehmen Taifun)을 기초로 모스크바로의 공세를 재개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늦가을 장마로 인해 라스푸티차의 지옥이 시작되면서 전진 속도는 굉장히 둔화되었고 보급문제까지 발생했다.[2]
가장 큰 문제는 격파당하였음에도 다시 들고 일어서서 저항하는 소련군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소련군 부대들은 독일군에 의해 해체당하다시피하였으나 독일군 포위망을 뚫고 본대로 돌아오거나 신병이 증원되어 새로 들어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에 히틀러는 북부집단군의 제4기갑집단을 중부집단군으로 넘기면서까지 공세를 지속시켰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오히려 레닌그라드를 두들기던 북부집단군의 엔진이 꺼지면서 도시 함락에 실패했고 봉쇄로 작전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은 목표인 A-A선 도달에 한참 모자란 상황에서 잠정 중지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