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전쟁의 일부 | |
날짜 | |
1939년 11월 30일 ~ 1940년 1월 8일 | |
장소 | |
카이누 수오무살미 | |
교전국 | |
[[핀란드| ]][[틀:국기| ]][[틀:국기| ]]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
[[틀:깃발|빌요 투옴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햘마르 실라스부오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파보 수시타이발 | ]][[틀:깃발| ]][[틀:깃발| ]] [[틀:깃발|미하일 두하노프 [[틀:깃발| ]][[틀:깃발| ]][[바실리 추이코프|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알렉세이 비노그라도프 | ]][[틀:깃발| ]][[틀:깃발| ]]
전력 | |
18,000명 | 29,816명 |
결과 | |
핀란드군의 승리 소련군 제44소총사단 궤멸 | |
영향 | |
소련의 보스니아만 진격 계획 포기 | |
피해규모 | |
858명 전사 324명 동사 1,518명 부상 | 3,735명 전사 2,800명 동사 1,800명 포로 3,738명 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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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겨울전쟁 당시 소련군과 핀란드군이 치른 전투. 핀란드 영토 북부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확실한 승리로 간주되며, 핀란드군은 현재도 이 전투를 겨울전쟁의 대명사로 여긴다.2. 전개
1939년 11월 30일, 소련군 제163소총사단이 소련-핀란드 국경을 넘어 북동쪽에서 수오무살미로 진격했다. 제163소총사단의 첫 번째 목표는 오울루로 진격해 분산된 핀란드군 전력을 반으로 가르는 것이었다. 당시 그곳에 주둔 중인 핀란드군 병력은 제15독립대대가 전부였다. 12월 7일까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한 핀란드군은 여러 진지를 파괴하고 해안과 호수 쪽으로 후퇴했다.12월 8일 소련군이 서쪽의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본격적으로 대규모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두 번째 공격을 시작한 증원군은 추가로 도착한 제16독립대대에 의해 후퇴했다. 이튿날 두 개의 수비군은 제27연대로 통합돼 햘마르 실라스부오 대령이 연대장으로 임명됐다. 이후로도 핀란드군은 여러 번의 공격을 막아낸 후 소련 영토 근처까지 진격했다. 제44소총사단이 반격을 시도했지만 얼마 못 가 후퇴했다.
제64, 65연대의 지원을 받은 핀란드군은 12월 27일 마을을 탈환한 뒤 소련군을 몰아냈다. 핀란드군은 수오무살미와 라테 사이의 도로에서 대기하다 후퇴하는 소련군에 추가 공격을 감행했다. 이로서 1940년 1월 4일, 제44소총사단은 궤멸돼 핀란드군이 여러 장비를 노획하게 됐다.
3. 결과
핀란드군에게 큰 승리를 안겨준 덕분에 얼어붙은 호수나 해안 근처로 적을 몰아내 기동성을 낮추는 전술이 유행했다. 만약 소련이 오울루까지 진격했다면 스웨덴과 이어지는 철도가 끊겨 상당한 피해를 받았을 것이다. 핀란드군은 전차 43대, 야포 70문, 대전차포 29문, 기관총 29정, 소총 6,300정의 소련 장비를 노획했다.4. 소련군의 패배 원인
- 소련군은 길에서만 운용 가능한 기갑차량, 핀란드군은 스키와 썰매 위주로 운용했다. 오울루를 지나 핀란드군을 절반으로 가르는 전술은 나름 괜찮아 보였으나 눈과 숲 때문에 진격이 상당히 힘들었다. 또한 소련군은 동계용품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 정치적 이유로 사령관들은 재정비를 하지 않고 무작정 물량으로만 밀어붙였다. 스키부대의 잦은 게릴라 전술로 소련군 병사들의 피로도도 높았다.
- 전시 상황에 표준 통신을 고수해버려서 핀란드군이 쉽게 도청, 감청하게 됐다.
[1] '수오무살미의 비극(Трагедия под Суомуссалми)'으로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