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2:19:32

툴라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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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라 전투
러시아어: Тульская оборони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1]
독일어: Schlacht um Tula[2]
영어: Battle of Tula
제2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의 일부
바르바로사 작전모스크바 공방전의 일부
파일:1941년 11월의 중부 전선.jpg
▲ 지도 우측 하단, 툴라에서 카시라를 거쳐 모스크바로 진격하려 하는 2기갑군
날짜
1941년 10월 24일 ~ 12월 16일[3]
장소
소련 러시아 SFSR 툴라 일대
원인
독일 국방군모스크바 점령 시도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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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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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주코프|]]
(서부 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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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자하로프|
게오르기 자하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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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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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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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골리코프|]]
(제10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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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도르 폰 보크|
페도르 폰 보크
]]
(중부 집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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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케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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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항공함대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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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츠 구데리안|
하인츠 구데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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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갑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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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하르트 하인리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
(제43군단 사령관)
결과
소련군의 승리
영향
모스크바 남쪽에서 독일 국방군의 공세 종료

1. 개요2. 1941년 10월의 중부 전선
2.1. 소련군2.2. 독일군
3. 전투 서열
3.1. 소련군3.2. 독일군
4. 1차 공세5. 2차 공세6. 소련군의 반격7. 결과

[clearfix]

1. 개요

툴라 전투는 태풍 작전과 모스크바 공방전의 일부로 바르바로사 작전의 마지막 전투 중 하나이며 중부 집단군이 최초로 전술적 목표 달성에 실패한 전투 중 하나이다. 툴라 점령과 모스크바 남쪽으로의 진격 중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했으며 2기갑군의 패배로 모스크바 남쪽에서 독일군의 공세는 끝났다.

2. 1941년 10월의 중부 전선

2.1. 소련군

소련군은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라스푸티차가 독일군의 보급과 진격을 방해하고 곧 다가올 겨울이 동계 준비를 안한 독일군에게 엄청난 위기고 뭐고 간에 소련은 국가가 사라질 기로에 있는 상황이었다. 소련군은 병력, 기갑, 포병 모두 밀리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며 군대의 질은 비교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항공기가 조금 더 많기는 했지만 소련 공군이 독일 공군에게 상대가 안 되었으므로 의미가 없었다.

독일군이 제1차 스몰렌스크 전투 이후 키예프 방면으로 2기갑집단과 2군을 이동시키면서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으나 독일군은 그 사이에 최전방까지 철도과 보급 라인을 정비했고 4기갑집단을 북부 집단군에서 중부 집단군으로 이동시켰다. 그 결과, 태풍 작전이 시작되면서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을 거치면서 소련군의 전방 방어선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손쉽게 무너졌다. 그나마 라스푸티차가 시작되면서 독일군이 보급에 애를 먹기 시작하자 진격이 조금씩 느려졌고 레닌그라드에서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 주코프의 지휘 아래 소련군은 최후의 방어선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칼리닌 전선군은 9군을 견제하면서 칼리닌에서 3기갑집단을 막아야했고 서부 전선군 우익은 모자이스크에서 4기갑집단을 막아야했다. 서부 전선군 좌익은 칼루가 근방에서 4군을 간신히 막고 있었고 예비 전선군이 괴멸 당하면서 브랸스크 전선군이 2기갑군을 막고 있었다. 2군은 휘하 군단을 2기갑군과 교체하면서 2기갑군과 자리를 바꿨고 태풍 작전에서는 남서 전선군을 상대로 보조적인 역할만 담당하고 있었다.

2.2. 독일군

태풍 작전의 1단계로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을 통해 소련군의 전방 방어선을 무너트린 독일 중부 집단군은 이제 모스크바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북쪽부터 3기갑집단은 칼리닌으로, 4기갑집단은 모자이스크로, 2기갑군은 툴라로 향했으며 크게 보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남북에서 협공해서 포위하는 양익 포위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전방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히틀러와 할더를 비롯한 최고 사령부는 여전히 낙관적이었고 모스크바 점령이 아닌 소련군의 포위를 통한 소련군 섬멸이 목표라고 못을 박았으나 라스푸티차로 인해 진격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면서 보크와 구데리안을 비롯해 야전 사령부는 더이상의 대규모 작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었다.

북부 집단군의 16군이 중부 집단군의 좌익을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9군이 알아서 측면을 보호하면서 진격해야 했기에 중부 집단군의 공세 전면은 계속 늘어만 갔고 그 와중에 히틀러는 2군을 남쪽의 쿠르스크 방면으로 돌리면서 중부 집단군은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하기조차 힘들어졌다. 그나마 2군이 다시 돌아온 뒤에도 라스푸티차는 독일군에게 엄청난 장애물이었다. 10월 말에 2단계 공세가 시작된 후에도 보크는 히틀러와 할더의 방침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11월 첫 주에 오르샤에서 할더의 주최 하에 육군 최고사령부의 참모들과 중부 집단군 및 휘하 야전군들의 참모장교들이 모두 모인 회의에서 야전 참모 장교들은 하나같이 더 이상의 대규모 작전은 불가능하며 겨울에 방어를 하기 위한 방어라인을 구축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히틀러에 동조하던 할더는 전선의 심각성을 파악했고 히틀러가 원하던 볼로그다-고리키-스탈린그라드-마이코프 라인 대신에 중부 집단군 참모장이던 그리펜베르크 소장과 함께 모스크바 점령을 1941년의 마지막 목표로 정하는데 동의했다.[4] 그동안 육군 최고 사령부는 보급 문제를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더이상 진격 자체가 힘들다는 것이 분명해진 상황이었다. 문제는 모스크바 점령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 근방은 겨울에 방어선을 구축하기에 매우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3. 전투 서열

3.1. 소련군[5]

  • 서부 전선군[6] ( 사령관 :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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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독일군[8]

  • 중부 집단군 ( 사령관 : 페도르 폰 보크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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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항공함대 ( 사령관 :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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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전투기여단
  • 제7대공포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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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차 공세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이 끝나고 2기갑군과 2군은 위치를 바꿨다. 휘하 군단은 그대로 전선에 두고 야전군 사령부만 이동했으므로 2군은 좌익의 13군단을 4군에 넘기고 우익의 43군단과 53군단을 2기갑군에 넘겼으며 2기갑군은 대신 우익의 34,35군단과 48차량화군단을 2군에 넘겼다. 이에 따라 4군과 2기갑군 사이에 있던 2군이 2기갑군 남쪽으로 이동하여 중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의 연결을 담당하게 되면서 모스크바를 향한 공세에서 사실상 이탈하게 된다. 2기갑군 전면에는 49군과 50군이 있었고 2기갑군과 2군의 경계에는 3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구데리안은 10월 22일에 24차량화군단에게 공세 명령을 하달했고 24일부터 3,4기갑사단을 앞세워 툴라를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두 기갑사단은 므첸스크에서 출발해 오룔-툴라 고속도로를 따라 진격했다. 2기갑군 좌익에서는 43군단과 53군단이 벨료프를 거쳐 툴라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도로와 보급 상황이 극도로 안 좋아서 진격은 매우 느렸지만 어쨌든 29일까지 툴라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툴라 방어를 담당한 50군은 이미 10일간 툴라를 요새화시킨 상황이었다. 24차량화군단은 30일부터 두 개의 기갑사단과 한 개 보병여단으로 도시를 공략했으나 11월 2일까지 계속 병력을 증원했음에도 도시 점령에 실패했다.

50군은 포위망에서 탈출한 병력도 전부 도시로 증원하면서 도시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구데리안은 도시 점령 대신 도시를 남동쪽에서 우회하여 포위하기로 하고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재개했다. 그 사이 독일 2군은 소련 3군을 예프레모프로 밀어냈으나 2기갑군 우익을 담당하던 24차량화군단의 우익의 17기갑사단과 47차량화군단의 18기갑사단이 데딜로보에서 막히면서 툴라를 우회하는 것도 실패했다. 2기갑군 좌익의 43군단은 툴라 공략을 지원하기 위해 툴라 북서쪽 알렉신 방면으로 공세를 펼쳤으나 10일에 막히면서 구데리안은 공세를 중단했다.

5. 2차 공세

파일:툴라 전투.jpg
▲ 툴라를 우회하여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2기갑군

이후 양측은 약 10일간 재편성을 실시했다. 소련군은 브랸스크 전선군이 해체되고 3군과 13군은 남서 전선군으로, 50군은 서부 전선군으로 이관됐다. 11월 15일에 마침내 땅이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추위라는 문제를 제외한다면 그동안 독일군을 괴롭히던 보급과 도로 문제가 해결됐다. 11월 18일에 2기갑군이 다시 공세를 시작했을 때 독일군은 공세 전면에서 여전히 인력, 포병, 기갑 전력에서 3대1 이상의 압도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18일 공세 시작 당일에 중앙의 24차량화군단은 데딜로보를, 우익의 47차량화군단은 예피판을 점령했다. 22일에 4기갑사단은 교통의 중심지인 스탈린고르스크를 점령했다. 50군과 3군 사이의 돌파구는 최대 50km까지 벌어졌다. 24차량화군단의 17기갑사단은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카시라로 진격했다. 카시라는 오룔-툴라-모스크바 고속도로[12]보다는 동쪽이지만 예프레모프-스탈린고르스크-카시라-모스크바로 이어지는 고속도로[13]가 지나기 때문에 중요한 곳이었다. 17기갑사단은 24일에 도시 남동쪽에 도달했으나 이 시점에서 2기갑군은 담당 전선이 너무 길어져서 더 이상 증원할 수 있는 예비대가 없었다. 결국 25일에 도시를 향한 공세는 실패했고 독일군이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추진력을 잃자 중부 집단군 우익에서 모스크바를 향한 직접적인 공세는 사실상 끝나버렸다.

그렇지만 2기갑군의 공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도시 공략에 실패한 25일에 47차량화군단의 18기갑사단은 스코핀[14]을 점령했고 26일에 53군단이 24차량화군단과 47차량화군단 사이의 전선을 인수하면서 2기갑군 우익의 47차량화군단은 동쪽으로의 공세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24차량화군단이 툴라 및 카시라 점령에 실패했으므로 구데리안은 더욱 동쪽으로 우회하여 콜롬나-랴잔-모스크바 고속도로 장악을 위해 진격하려했고 그 사이 2기갑군 좌익의 43군단은 27일부터 4군 우익에 있던 13군단의 지원을 받아 툴라 북서쪽의 알렉신 방면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47차량화군단의 진격은 콜롬나-랴잔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라이스크-자카로보[15]를 잇는 축선에서 멈췄다. 스타브카는 후방의 10군과 61군을 3군과 50군 사이에 배치하여 2기갑군을 막아냈고 28일에는 29차량화보병사단으로부터 스코핀을 탈환했다. 43군단은 툴라를 북서쪽에서 우회하여 알렉신을 점령했고 12월 3일에 모스크바-툴라 고속도로를 차단하면서 50군의 통신선을 차단했으나 끝내 툴라 점령에 실패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진 구데리안은 12월 5일에 다시 공세를 중단했다. 같은 날, 47차량화군단 우익의 2군 소속 48차량화군단이 옐레츠를 점령한 것이 마지막 성과였다.

6. 소련군의 반격

파일:모스크바 공세 1단계.jpg
▲ 지도 우측 하단, 2기갑군을 상대로 반격을 시작한 서부 전선군

독일군의 공세가 멈춘 시점에서 2기갑군의 12개 사단은 350km의 전선을 방어해야하는 상황이었으나 동계 장비도 부실할 뿐만 아니라 이 구역은 방어하기에 부적합했으므로 불가능했다. 소련군은 이미 일부 구역에서 공세로 전환한 상황이었으며 구데리안이 공세를 완전히 정지한 직후인 6일부터 전 전선에서 모스크바 전략공세작전을 시작했다. 주요 추진력은 새로 배치된 골리코프의 제10군과 모스크바에서 이동한 제1근위기병군단[16]이었다.

12월 4일부터 이미 24차량화군단은 남서쪽으로 밀려나고 있었고 24차량화군단에 있던 53군단도 이 영향으로 남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10군 우익[17]에 있던 50군은 툴라 방어로 약해져 있던 상태라 2기갑군의 후방을 차단하는데 실패했지만 9일에 1근위기병군단이 벨로프를 탈환했고 10일부터 동쪽에서 70km나 진격해 돈 강에 도달한 10군과 함께 스탈린고르스크와 예피판을 공격하여 12일에 탈환했다.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13일이 되어서야 돈 강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됐고 독일군은 서쪽으로 더 밀려났다.

그 사이 2기갑군 남쪽에서 옐레츠 공세[18]를 진행하던 남서 전선군의 13군도 2군으로부터 옐레츠를 탈환했다. 북쪽에서는 14일부터 50군 후방에 있던 49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로 그나마 여기서는 17일에 알렉신을 탈환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17일에 50군이 슈키노를 탈환하면서 2기갑군의 전선은 알렉신-슈키노-예프레모프를 잇는 축선까지 밀려나면서 툴라 공세[19]가 마무리됐다.

7. 결과

툴라 전투는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제1차 스몰렌스크 전투,제1차 키예프 전투,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으로 이어지던 구데리안과 2기갑군의 무적 신화가 끝난 전투이며 동시에 중부 집단군의 진격도 끝났다. 독일군은 끝내 툴라 점령에 실패하면서 모스크바 진격에 제약이 걸렸고 남동쪽으로 우회하여 카시라로, 동쪽으로 우회하여 콜롬나와 랴잔으로 진격했으나 모두 실패하면서 모스크바 남쪽에서 태풍 작전은 실패했다. 2기갑군 입장에서는 전쟁기간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우세한 전력으로 공세를 진행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43년 8월에 발칸반도로 이동할 때까지 주요 공세를 펼치지 못하게 된다.

소련군의 모스크바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서부 전선군은 12월 17일부터 곧바로 4군과 2기갑군을 상대로 칼루가 공세를 시작했고 수히니치-벨료프-므첸스크 라인까지 밀려나면서 툴라 전투 시작 시점보다 서쪽으로 밀려났다. 이러한 소련군의 대반격은 모스크바 공세가 끝나고 1월 8일부터 브랸스크 전선군의 볼호프[20] 공세에서 2기갑군이 소련군을 간신히 막아내면서 끝났다. 2기갑군의 전선은 이후 42년 여름에 비르벨빈트 작전과 코젤스크 공세가 시작될 때까지 큰 전투 없이 안정화됐다.


[1] 툴라 방어 작전[2] 툴라 전투[3] 10월 24일부터 12월 5일까지는 독일 국방군의 공세, 6일부터 16일까지는 소련군의 공세[4] 애초에 히틀러와 달리 할더는 모스크바 점령을 원하고 있었다.[5] 11월 1일 기준이며 작성된 야전군은 순서대로 북쪽부터 남쪽 순서, 전투에 연관된 야전군은 3군, 49군, 50군[6] 11월에 제10군 증원[7] 11월 10일에 해산된 후 휘하 부대들은 남서 전선군에 이관, 12월 24일에 다시 편성되어 남서 전선군으로부터 3군과 13군을 받고 스타브카로부터 61군을 증원받았다.[8] 11월 4일 기준[9] 1942년 여름 즈음에 차량화군단들의 명칭이 기갑군단으로 변경된다.[10] 칼루가에서 모스크바 남쪽 담당[11] 모자이스크 근방에서 모스크바 북쪽 및 서쪽 담당[12] 이 도로는 쿠르스크-벨고로드-하리코프로 이어진다.[13] 여기서 남쪽으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옐레츠-보로네시-밀레로보-카멘스크-로스토프로 이어진다.[14] 스탈린그라드-스코핀-카시라-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도로가 지나는 곳이다.[15] 태풍 작전에서 독일군이 도달한 곳 중에 가장 동쪽 지역이다.[16] 원래는 제2기병군단이었다가 11월 26일에 근위 칭호를 받았다.[17] 지도상으로는 서쪽[18] 모스크바 공세의 일부[19] 모스크바 공세의 일부[20] 레닌그라드 동쪽에 있는 볼호프 말고 오룔에서 북쪽으로 50km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