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방군 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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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c0><colcolor=#000> 나치 독일 제3대 제2항공편대장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FM Wolfram von Richthofen | |||
본명 | Wolfram Karl Ludwig Moritz Hermann Freiherr von Richthofen 볼프람 카를 루트비히 모리츠 헤르만 폰 리히트호펜 남작[1] | ||
출생 | 1895년 10월 10일 | ||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주 슈트리가우군 바르츠도르프 | |||
사망 | 1945년 7월 12일 (향년 49세) | ||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바트이슐 | |||
재임기간 | 제2대 제4비행편대장 | ||
1942년 7월 20일 ~ 1943년 9월 4일 | |||
제3대 제2비행편대장 | |||
1943년 6월 12일 ~ 1944년 9월 27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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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 1918년 | |||
독일 국가방위군 | |||
1918년 ~ 1933년 | |||
나치 독일 공군 | |||
1933년 ~ 1944년 | |||
최종 계급 | 원수 (나치 독일 공군)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스페인 내전 폴란드 침공 영국 본토 항공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크레타 섬 전투 독소전쟁 바르바로사 작전 세바스토폴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 ||
주요 서훈 |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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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니카는 불타고 있다." 참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공군의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에이스 파일럿이자 붉은 남작으로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사촌동생으로 유명하다. 또한 게르니카 폭격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독일 콘도르 군단의 지휘관이기도 하다.
2. 생애
1913년 18세의 나이로 사관후보생으로 올라우 제 4 유사르연대에 배속된 그는 칼세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후 1914년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했다.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육군 대대장으로 종군하였는데, 그러다가 사촌형 붉은 남작을 따라 1917년에 할레 항공학교로 전속한다. 그곳에서 그는 뒤늦게나마 항공 기술을 습득한 후, 1918년 3월에 종형제이던 붉은 남작의 11전투기 중대(일명 Jasta 11, 즉 야스타 11)에 배치되어 파일럿로 활약하며 1차 대전 당시에는 8기를 격추한다.[2]그러다가 그는 독일 제국의 패전을 맞이하게 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1920년, 중위로 전역한다. 전역 후에는 하노버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었고 졸업한 후 독일 국방군에 재입대한 그는 소위로 11기병연대에 배치되었는데, 아돌프 히틀러가 극비리에 진행하던 루프트바페 창설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 이후 그는 자식이 없었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양자가 되었다.
1929년에 대위로 승진한 리히트호펜은 4월부터 로마에 있던 독일 대사관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이탈리아 공군을 연구하라는 히틀러의 특명을 받고 이탈리아의 공군 장성들과 친분을 쌓으며 나날이 이탈리아의 전투기, 폭격기, 공군 전술 등을 익히게 된다. 1931년, 독일로 귀국하여 1933년 10월에 꿈에도 그리던 루프트바페의 재건이 성공하여 육군 11기병연대에서 다시 공군 항공성 개발국으로 전속한다. 참고로 1차 대전 때는 전투기 조종사로 근무했으나, 2차 대전 때는 폭격기 조종사로 전향하게 된다. 1936년 중령이 된 그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콘도르 군단의 부사령관으로 참전하였다.
1937년 4월 바스크 전선의 게르니카 일대의 공화파 부대의 규모는 23개 대대에 달했으며 이들은 교통의 요충지인 게르니카를 거쳐 빌바오 방면으로 후퇴 중이었다.
4월 26일 그는 공화파 부대의 후퇴를 지연시키기 위해 게르니카에 대한 전술폭격을 실시한다. 이 폭격대는 He-111 3대, Do-17 1대, Ju-52 18대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엉망인 폭격 정밀도로 인해 주요 목표였던 렌타리아 다리는 물론 도로와 철도에도 별 피해를 주지 못했고 이에 더해 프랑코군의 느린 진격속도로 인해 공화파 군대는 큰 피해없이 철수하고 말았다. (공화파 정부는 이 폭격을 민간인에 대한 테러 공격으로 선전하고자 공산당원인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그림 게르니카를 파리 국제박람회에 전시한다.)
이 공로로 그는 11월에 소장으로 진급되었고 스페인 내전이 종료되자 다시 독일로 귀환한다.
그러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특별항공군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에 종군했다. 그는 개전 직후 비무장한 소도시 비엘른을 폭격하였다. 그후 근접항공지원을 지휘하며 바르샤바를 소이탄과 고폭탄을 이용해 폭격하여 2만 5천여 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폴란드 침공이 끝나고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특별항공군은 제8항공군단으로 개칭되고 여기서도 근접항공지원을 지휘하였다.
훗날 1940년 7월에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자 영국 공습에 총력을 기울이는데, 여기서도 그는 Ju 87과 Ju 88, He 111 등으로 영국의 도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민간인들을 향해 거침없이 소이탄을 투하했다.
▲ 상급대장 시절
1941년 4월에 크레타 섬 강습 작전의 지휘관으로도 참가했는데, 그 작전에서도 역시 크레타 섬을 거의 재기불능 상태 일보 직전까지 만들어 놓았고, 같은 해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나치당이 명명한 열등한 짐승인 소련을 향해서는 더욱 거침없이 무차별적인 민간인 폭격을 가행했다. 그러다가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42년 2월에 상급대장으로 승진, 16일에는 무려 원수 계급이 주어졌다. 이는 유례 없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그가 공군 원수가 됐을 때의 나이가 47세로, 이는 당시 루프트바페 내에서는 물론, 독일 국방군 전체 내에서 최연소 원수였다. 그러나 그도 점점 짙어지는 패전의 기색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1943년 말에 이르어 연합군이 물량 공세로 루프트바페를 완전히 압도하자 리히트호펜은 더 이상 활약할 수 있는 전장을 잃고 말았고, 1944년 10월 27일에는 평소에 지병으로 앓고 있던 뇌종양의 급작스러운 발병으로 의병 제대한다. 1945년 5월 8일 종전이 되자 그는 미군의 포로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뇌종양으로 사망한다.[3]
3. 평가
유독 국내에서 저평가 되는 나치 독일의 원수인데 미국 밀리터리나 군사학 서적 등에서는 유능한 공군 지휘관으로의 면모가 부각되는 편이다. 다만 국내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인지도가 낮아서 그냥 소이탄을 광적으로 사랑한 공군 장군 또는 붉은 남작의 사촌 정도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독일 공군 장군들보다는 에이스들이 주목받는 경향이 있고 장군들의 경우 괴링, 갈란트, 케셀링 정도를 제외하면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전차 에이스보다 장군들이 주목받는 독일 육군과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리히트호펜은 1차대전 이후 하노버 공과 대학에서 항공 공학을 전공했으며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33년 루프트바페에 합류하고 항공기 개발 부서에서 복무했다. 중형 폭격기를 지지했으며 급강하 폭격엔 부정적이였으나 이런 견해는 콘도르 군단에서 복무하며 변화한다,
리히트호펜의 군 지휘 경력은 스페인 내전에서 콘도르 군단에서 복무하며 시작한다. 그는 국민파를 지원하는 지상 공격을 지휘했고 게르니카 폭격을 수행하였다. 이런 작전 속에서 리히텐호펜은 지상-공중 통신을 발전시키고 근접항공지원의 필요성과 급강하 폭격기의 유용함을 깨달았으며, 지상 지원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리히트호펜을 루프트바페에서 근접항공지원의 최고 전문가로 만들어 주었다.
그 외에도 V-1과 V-2의 개발을 승인하고 이러한 승인은 독일의 제트 엔진 개발로 이어졌다.
그가 했다는 말로 유명한 "소이탄에 의해 불타는 도시와 적들을 보면 멋지고 기분이 좋다"는 국내에서 주로 도는 말이다. 다만 흑해 근처에서 투하한 집속탄[4]이 소련군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냈다는 소식에 '훌륭한 광경'이라며 기뻐했다는 일화가 있다.
국내에서 흔히 평가되는 소이탄 성애자에 가려져 국내에선 묻힌,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의 진짜 전쟁 범죄는 다름이 아닌 동부 전선에서의 포로와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학대에 관여했다는 의혹이다. 제대로 조사되기 전에 뇌종양으로 사망하며 의혹으로 끝났으나 파리의 구원자라 불리는 디트리히 폰 콜티츠도 동부전선에서 유대인 학살 의혹이 있는 만큼 국방군과 친위대에서 동부전선의 전쟁 범죄 행위에 관여하지 않은 지휘관은 극소수에 달한다는 걸 생각하면 그가 동부전선에서의 행위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폴란드 침공 당시 바르샤바에는 약 12만 명의 폴란드 군이 주둔하고 있었기에 폭격 자체는 헤이그 조약[5]에 위배되지 않았으나, 여기서도 민간인들에게 기총소사를 하고 병원 마크가 달린 건물에도 폭격하였다. 즉 폭격 자체는 전쟁범죄가 아니었지만 폭격 중에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게르니카와 비엘룬, 프람폴[6] 폭격은 아예 비무장한 도시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폭격했기에 명백한 전쟁 범죄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였을 때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어느정도 독일판 커티스 르메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유능했으며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였고[7] 도시에 대한 소이탄 폭격으로 적국에 큰 타격을 입힌 전과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리히트호펜은 전쟁 범죄 행위가 확실하다는 점이다.
4. 매체에서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나치 독일의 조언가로 등장하며 근접항공지원을 연구했던 이력이 반영되어 전장 지원 교리 연구 속도를 15% 올려준다. 그런데 우데트가 더 싼 가격에 더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어서 채용할 메리트가 없다.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레드 바론에서 잠시 등장. 만프레트와 식사를 하면서 자신도 항공대에 합류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에 만프레트가 한숨 쉬면서 전쟁은 놀이가 아니라며 꾸짖는다.[8]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주인공 샤흐트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독일이 원래 역사와 달리 연합군에 합류하자, 커티스 르메이와 환상의 조합을 보여주며 추축국[9]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준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가 적국이 되면서 로마를 폭격해 불태우고 '로마는 불타고 있다.'는 짤막한 보고를 올린다. 전후 원 역사보다 4년을 더 살았지만 점차 건강이 안 좋아지다 결국에는 뇌졸중으로 병사하며 31년 전 서부전선 상공에서 전사한 사촌형의 옆자리에 안장된다.
[1]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폰리히트호펜'이 되지만 '리히트호펜'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 관용적 예외가 인정된다.[2] 참고로 붉은 남작 문서에도 나오지만 붉은 남작의 죽음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사망일 당일에 볼프람도 출격했지만 당시엔 초보 파일럿이어서 전투를 위에서 관전하고 있었고, 이 때 캐나다 출신이자 역시 초보였던 윌프리드 "웝" 메이 대위의 공격을 받았다. 볼프람이 공격받는 것을 본 붉은 남작은 싸움에 끼어들었고, 볼프람은 무사히 도주했다. 붉은 남작은 메이를 계속 추격했고, 이를 보고 메이의 친구였던 로이 브라운 대위도 끼어들었고, 지상에 있던 호주군까지 대공사격으로 가세하면서 난장판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붉은 남작은 (아마도 대공사격에 맞아)사망했다.[3] 사실 그로서는 일찍 사망한 것이 다행일 따름이었는데, 리히트호펜과 비슷하게 유고슬라비아에서 무차별 폭격을 실시한 공군 지휘관 알렉산더 뢰어는 유고슬라비아에게 생포되어 전범재판 끝에 사형당했다.[4] SD-2. 나비폭탄이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처음으로 대량 사용된 집속탄으로 평가된다.[5] 제25조 방어되지 않은 도시, 촌락, 주택 또는 건물에 대한 공격 또는 포격은 금지된다.[6] 9월 13일에 폭격을 당한 폴란드 도시. 당시 폭격으로 주민의 절반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아직까지도 프람폴의 인구는 전전의 40%도 회복하지 못했다.[7] 커티스 르메이는 폭격기 전술을 리히트호펜은 CAS 전술을 연구하였다.[8] 어설프게 영웅 놀이할 곳이 아니니, 다시 생각해 보라는 의미.[9] 이 세계관에선 소련과 파시스트 프랑스, 일본 제국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