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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폰 라이헤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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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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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colcolor=#fff> 독일 국방군 육군 원수
발터 폰 라이헤나우
FM Walter von Reichen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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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alter Karl Ernst August von Reichenau.jpg|width=100%]]
이름 Walter Karl Ernst August von Reichenau[1]
발터 카를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폰 라이헤나우[2]
출생 1884년 10월 8일
바덴 대공국 카를스루에
사망 1942년 1월 17일 (향년 57세)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 폴타바[3]
복무 독일 제국군 (1903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 (1933년 ~ 1942년)
최종 계급 원수 (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주요 서훈 기사 철십자 훈장

1. 개요2. 생애3. 평가4. 일화5. 주요 보직 내역6. 진급 내역7. 주요 서훈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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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W0408-503%2C_Walter_v._Reichenau.jpg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feb6b83089a108f4a4da5eeedf9ef0f4.jpg
▲ (좌)국가방위군 소장 시절이던 1933년 찍은 사진. 오른쪽 눈의 모노클이 인상적이다.[4], (우) 국방군 원수시절의 라이헤나우. 야전에서도 모노클을 즐겨 착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국방군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독소전쟁에서 유대인-슬라브족을 몰살하자는 이른바 강조 명령(Severity Order)을 내린 원흉. 독일 국방군 내에서 가장 나치당 빠돌이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전부터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다. 그럼에도 군사적 재능은 뛰어나서 독일군 초기 전역에 대활약을 하여 원수까지 진급하지만, 뇌출혈과 후송 지연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폴란드의 마을인 보가티니아독일 작센주 소속이던 시절 명칭인 라이헤나우 인 작센도 이 인물에서 따왔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4년 10월 8일 독일 제국의 제후국 바덴 대공국의 카를스루에에서 융커프로이센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실 아버지 에른스트 폰 라이헤나우(1841-1919)는 유서 깊은 융커 군인 가문 출신이기는 했지만 하급귀족이었고, 그다지 큰 세력이 있는 귀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중장으로 제대후 가구사업에 손을 대었고, 군인보다는 사업가가 더 체질이 맞았는지 대박나서 당시 독일 제국에서 가장 큰 가구 회사가 되었고, 재벌이 되었다.

이런 재벌 집안에서 태어난 라이헤나우는 1903년 김나지움 졸업후 베를린 주둔 제1근위 포병 연대에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하였다. 1904년 소위로 진급했고, 참모학교 입학허가를 받았다. 이후 무관으로 남미에 파견되기도 했다. 1912년 중위로 승진했고, 1914년에는 엘리트 초급장교들의 승진코스인 참모학교에 입학해 참모로서 훈련을 받았다.

라이헤나우는 여러 스포츠에도 능했으며, 외국어 실력도 좋아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참모학교 재학 도중에 참전하여 참모장교로 동부전선으로 전속되었다. 그는 독일 동부군 참모장인 막스 호프만의 아래에서 일하면서 대위로 승진했고, 1915년에 야전참모본부에 합류했다가 일선부대의 참모장교로 나가기도 했다.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여러 공세를 방어하고 역공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 공적으로 철십자 훈장 1급을 받았다.

2.2. 바이마르 공화국

종전 후에도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을 대폭 감축했는데, 라이헤나우는 우수한 장교였기 때문에 군에 남을 수 있었던 4000명중 한명이 되었다. 1919년 포메른 지방의 유서깊은 귀족의 딸인 알렉산드리네 폰 말찬과 결혼했고, 이에 따라 집안의 위세를 조금 높일 수 있었다.

이어 장교 순환근무로 여러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1923년에는 소령으로 진급했고, 1929년 중령이 되었다. 이해 영국에 무관으로 파견되었다가 가을 귀국하여 통신참모 총감(Chef des Stabs der Nachrichteninspektion)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에는 1군구 참모장으로 승진했고, 1932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1931년 열렬한 나치였던 삼촌의 소개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고, 이때부터 골수 히틀러 숭배자가 된다. 본인뿐만 아니라 아내도 중증 나치빠였다. 당시 군인은 정당 가입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나치당에 가입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라이헤나우의 이런 친나치 행위를 혐오했고, 이 때문에 라이헤나우는 자신의 능력[5]과 함께 히틀러의 총애와 신임을 받고 있었음에도 다른 장성들의 견제를 받는다.

1933년 히틀러는 총리로 집권했고 친나치군인인 라이헤나우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군부에서 날개를 달게 되었다.

2.3. 아돌프 히틀러 집권 후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라이헤나우는 국방부 군무국장에 임명되어 나치당과 국방군 사이를 잇는 연락장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적 경향이 있던 나치당의 지도자 에른스트 룀에 대한 국방군 수뇌부의 비토를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 등에게 전해 장검의 밤 사건을 일으켜 룀의 숙청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중화민국과의 친선을 강하게 주장하여 중국-독일 간 군사 지원 및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진행하는 데 기여하였다. 중일전쟁 초반기까지 진행된 중국과 독일 간의 군사 및 경제 협력은 중국의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 역량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고, 동시에 독일도 외화의 낭비가 없이 군수 생산 및 민간 경제에 필요한 희귀 물자를 조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34년 소장, 1935년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1938년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6] 이후 히틀러는 나치빠였던 라이헤나우를 국방장관이나 육군총사령관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라이헤나우가 둘 중 한 곳에 오르면 국방군이 모두 나치의 하부 조직이 될 것을 우려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이를 강하게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7]

많은 국방군의 고위 장교들이 나치를 혐오했으나, 라이헤나우는 고위 장교들이 혐오하던 하인리히 힘러에게 국방군 내의 쿠데타 움직임을 밀고하는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2.4. 폴란드-프랑스 전역

1939년 9월에 벌어진 폴란드 침공시에 라이헤나우는 10군을 이끌고 폴란드군을 유린하였다. 그때 10군의 참모장프리드리히 파울루스였다. 10군은 후에 6군으로 재편되었는데, 이 6군이 훗날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주공 부대가 되고 파울루스가 6군의 사령관이었다.

1940년 프랑스 침공 때는 보크가 지휘하는 B집단군에 소속되었다. 6군은 벨기에군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고, 결국 50만에 달하는 벨기에군은 라이헤나우가 지휘하는 6군에 포위되어 항복했다. 이 공적으로 라이헤나우는 원수로 임명되었다.

2.5. 독소전쟁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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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2007-_0125%2C_Russland%2C_Hitler_und_Reichenau.jpg 파일:external/static3.akpool.de/572909.jpg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인 1941년 9월, 제6군 사령부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우) 1941년의 라이헤나우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라이헤나우는 다시 6군을 거느리고 룬트슈테트 원수 휘하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다시 소련을 침공하였다. 라이헤나우가 거느린 6군은 키예프를 점령하고, 더 나아가 하르코프까지 다다른다.

라이헤나우는 다른 고위 지휘관들은 무시하거나 아랫사람에게 책임으로 미루던 히틀러의 전쟁범죄적인 명령을 오히려 자기의 이름으로 더욱 강조해서 내리기도 했으며, 1941년 10월 10일 이를 문서화하였다. 이를 강조 명령이라고 한다. 아래는 그 일부.
유대-볼셰비즘에 대항하는 이 전역에서 최고로 중요한 목표는 유대-볼셰비즘의 힘의 원천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럽 문명에서 아시아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동부전선에서 한 명의 장병은 전통적인 전쟁 방식에 따라 싸우는 사람뿐만이 아닌, 국가적 구상을 가혹할 정도로 대표할 만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로 우리 장병은 유대인이라는 하등 인종에게 가해져야 하는, 가혹하지만 정당한 심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Das wichtigste Ziel des Feldzugs gegen Jud-Kommunismus, wo Deutschland kämpft ist Vernichtung der Jud-kommunismuschen Macht, und sie der Asienischen Elemente. Am Osten Front sind unsere Soldaten nicht nur Leute, wer den traditionellen Operationen folgen, sondern auch Repräsentanten des National-Sozialistismus' sehr harsch. Deshalb müssen wir den geraden Urteil für Jud verstehen, der minderwertiges Volk ist.

즉 동부 전선에서는 장병들이 통상적인 전쟁방식이 아니라 유대인-볼셰비즘을 절멸시키는 전사로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관할하던 영역에서는 아인자츠그루펜과 같은 학살 부대들이 다른 곳보다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는 이 명령문을 자신의 부대뿐만 아니라 남부집단군을 포함한 동부전선 모든 부대에 회람시켰고,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룬트슈테트는 그것을 적극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자신의 휘하였던 제6군의 사령관인 라이헤나우의 싸이코 같은 언동을 막지는 못할지언정 찬동하고 나선 것이다.전후에는 "자신은 잘 몰랐다"고 비겁하게 부인하지만 이러한 국방군 장성들의 동조로 인해 동부전선에서도 특히 남부집단군의 점령 지역에서는 슈츠슈타펠이 저지른 것과 동급의 인종 범죄가 발생하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독소전쟁 민간인 학살은 대부분 중북부전선이 아닌 남부전선이었는데 물론 스탈린그라드 전투부터 쿠르스크 전투 패배까지 42-43년 격전지였던것도 있지만 남부집단군이 침공 이후 열심히 강간, 살인, 방화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바비야르 학살 또한 라이헤나우의 6군이 저질렀다.
이 명령을 당시 남부집단군 일선부대의 고급 장교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안 그래도 바쁜데 병사들이 무장친위대와 학살에 나서면서 진격속도가 느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지휘관이자 라이헤나우의 후임 6군 사령관[8] 파울루스는 아예 대놓고 명령을 씹고 불태워 버렸을정도. 훗살 라이헤나우의 이 학살은 독소 전쟁 참전자 중 남부집단군 참전자가 가장 소련군의 학대를 받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전세가 밀리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관들을 해임하기 시작했고,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룬트슈테트 원수도 전선이 교착상태에 이른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다. 히틀러는 발터 폰 브라우히치 육군 총사령관 후임으로 자신이 총애하는 라이헤나우를 앉히려고 했으나 라이헤나우의 지나친 친나치 성향을 알고 있는 참모본부의 반발에 직면했고, 이에 히틀러는 자신이 직접 육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라이헤나우를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2.6. 최후

라이헤나우는 6군 사령관직을 자신의 전(前)참모장이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9]에 넘기고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취임했으나 임명된 지 1달쯤 지난 1942년 1월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켰다. 수술 시설을 갖춘 본토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도중에 수송기가 사고가 나는 바람에 소련 영토에 불시착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병원으로의 이송이 늦어진 라이헤나우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0]

3. 평가

친나치 군인이라는 부정적인 평가에도 라이헤나우의 군사적 재능은 인정받고 있다. 그가 지휘하던 6군이 프랑스 침공벨기에군을 차단한 것은 프랑스 침공전의 대승리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이 사람이 너무 일찍 사라져서 부대 지휘 경험이 전간기에 연대장을 잠시 맡은것 외엔 전혀 없는 참모장교 출신 파울루스가 제6군을 지휘하다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참극을 빚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11] 라이헤나우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파울루스는 참모장교 출신답게 결단에 서툴렀고, 결정적일 때 히틀러의 명령 때문에 위치를 사수하다가 결국 독일군의 대패를 자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

그러나 친나치 군인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에 개전 이전에도 독일군 내부에서 평판이 안 좋았고, 그 때문에 육군 총사령관 자리도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게 밀릴 정도였다. 하지만 전범 재판에서는 야전지휘관들보다 총통사령부에 근무하던 장성들만이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현실을 보면, 사형이 언도되었어도 집행까지는 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물론 한 행위를 보면 사형을 때려도 할 말은 없겠지만 말이다.

4. 일화

  • 처제가 유대인과 교제하고 유대인들을 돕고 있던 것을 알고도 눈감아 주었고 유대인 학살에서 도망치는 것도 도와주었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의 유대인 가족 주치의가 프랑스로 망명하도록 해 준 적이 있고, 헤르만 괴링 또한 동생 알베르트 괴링이 자신의 배경을 이용해 유대인들을 구해주는 것을 눈감아 주었던 일이 있었던 만큼 당시 독일군 내에서도 유대인 친지들을 눈감아 주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 동생 에른스트는 집안 사업을 하면서도, 작가 및 기자로 일했는데 나치가 집권하는 1930년대부터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고 이후 형과 절연하고 중국에 남아서 연합국의 일원인 장제스 정부와 협력했다.

5. 주요 보직 내역

  • 1935.10.01 : 뮌헨 주둔 7군단장
  • 1938.02 ~ 1939.09.01 : 라이프치히 주둔 4집단 사령관
  • 1939.09.01 ~ 1939.10.19 : 10군 사령관
  • 1939.10.20 ~ 1941.11.30 : 6군 사령관
  • 1941.12.01 ~ 1942.01.17 : 남부집단군 총사령관

6. 진급 내역

  • 1904.08.18 : 포병 소위(Leutnant)
  • 1912.08.18 : 중위(Oberleutnant)
  • 1914.11.28 : 대위(Hauptmann)
  • 1923.07.01 : 소령(Major)
  • 1929.04.01 : 중령(Oberstleutnant)
  • 1932.02.01 : 대령(Oberst)
  • 1934.02.01 : 소장(Generalmajor)
  • 1935.10.01 : 중장(Generalleutnant)
  • 1936.10.01 : 포병대장(General der Artillerie)
  • 1939.10.01 :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0.07.19 : 원수(Generalfeldmarschall)

7. 주요 서훈 내역

  • 시기 미상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시기 미상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시기 미상 : 호엔촐레른 왕가 검 기사 십자 훈장
  • 1939.09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09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09.30 : 기사 철십자 훈장


[1] 영어다큐멘터리에서는 "라이헤노"로 읽기도 한다.[2]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라이헤나우'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3]우크라이나 폴타바주 폴타바[4] 모노클은 프로이센 귀족의 전통 중 하나이다. 야전에서는 착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훈장 수여식과 관련 기념 촬영에 참석할 때엔 착용한다.[5] 육군총사령관이나 육군참모총장 모두 거뜬히 할 수 있었다는 게 군사사 연구자들의 평이다.[6] 하인리히 힘러의 계략에 의해 국방장관이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의 후처가 창녀 출신이었음이 밝혀졌고,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베르너 폰 프리치가 동성애자라는 설이 돌아서 두 명 다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7] 1930년대까지는 친나치 성향보다도 너무 젊은 연령이라는 게 참모총장이나 총사령관의 자리에 취임하지 못하는 원인이었다.[8] 라이헤나우는 룬트슈테트의 후임으로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진급하면서 6군 사령관도 겸하게 되었는데 혼자서 두 사령관직을 동시에 수행할 순 없다고 하여 파울루스를 후임으로 추천했다. 파울루스가 6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직후 라이헤나우는 뇌출혈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9] 취임 직전에는 참모차장이었다. 파울루스의 사령관 취임은 라이헤나우의 의중대로 움직이는 야전군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10] 어떤 책에 의하면 그가 히틀러의 진격 명령을 거부하여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고 하나 이는 냉전 당시 군사 문서가 별로 공개되지 않았을 때의 가설 제기에 불과하다. 실제로 영미권 전사학자들의 6, 70년대 유명 전사학 서적들은 지금 보면 팩트가 아닌 픽션이 상당히 많다. 출처도 근거도 없는 내용이 대부분. 문제는 네티즌들이 이러한 서적들만을 출처로 영문 위키에도 버젓이 올려 놓는다는 점.[11] 물론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는 히틀러의 탓이 가장 크다. 소련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을 것임이 전선 각지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나 이러한 조짐은 히틀러의 고집에 모두 씹혔다. 다만 히틀러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있던 라이헤나우가 살아있었다면 설득이 가능했을지도.[12] 다만 이 주장은 전사계에서도 평가가 갈리는데 파울루스가 천왕성 작전으로 포위망에 갇힌 이후 스탈린그라드의 6군은 공군의 공중보급 실패로 전투력이 바닥이었고 운송용 말과 돌파용 기갑장비를 모조리 상실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만슈타인이 스탈린그라드에서 50km 지점까지 돌파하는데 성공하고 즉시 서쪽으로 돌파를 시도하라고 명령하지만 파울루스는 참모 장교들의 돌파 건의를 거부한다. 파울루스입장에서는 만슈타인의 탈출 명령을 따르게 될 경우 도보로 패주하는 독일군을 소련군이 손 쉽게 학살할 수 있을것이라고 우려할만 했다. 실제로 소수의 독일군 부대들이 개별적으로 시도한 탈출은 대부분 처참히 실패했다. 결론적으로 파울루스의 위치 사수는 히틀러의 명령이라기 보다는 제6군의 탈출시도를 엄두도 못내게 할 만큼 겹겹히 포위한 소련군의 탓과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지 못할 정도로 악화된 6군의 역량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