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5:34:11

바르바로사 작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1D1D1D; margin: -6px -1px -11px; font-size: 0.92em; letter-spacing: -0.8px; word-break: keep-all"
※문서가 생성된 전투만 기재
둘러보기 : 아시아 및 태평양 전선 전투목록
전투 이름 교전 국가 및 세력
<rowcolor=#FFF> 공격 측 방어 측
<nopad> 1939년
<colbgcolor=#b31c31> 폴란드 침공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단치히 우체국 방어전
바르샤바 전투
비츠나 전투
브주라 전투
겨울전쟁
수오무살미 전투
콜라 전투
<nopad> 1940년
가짜 전쟁
노르웨이 침공
프랑스 침공
아라스 전차전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탈리아의 프랑스 침공
북아프리카 전역
몰타 항공전
칼라브리아 해전
영국 본토 항공전
독수리의 날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침공
타란토 공습
<nopad> 1941년
마타판곶 해전
라인 연습 작전
크레타 섬 전투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그리스 왕국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
발트해 전역
브로디 전투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계속전쟁
은색 여우 작전
뮌헨 작전
제1차 스몰렌스크 전투
우만 전투
모스크바 폭격
제1차 키예프 전투
페르시아 침공
레닌그라드 공방전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
툴라 전투
세바스토폴 공방전
로스토프 전투
알렉산드리아 습격
<nopad> 1942년
류반 공세
르제프 전투
데미얀스크 전투
영불 해협 돌파작전
마다가스카르 전투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남아프리카 연방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
류반 구원 작전
빌헬름 작전
프리데리쿠스 작전
청색 작전
보로네시 전투
엘 알라메인 전투
PQ-17 호송선단 전투
자이들리츠 작전
칼라치 전투
제1차 르제프-시쵸브카 공세
비르벨빈트 작전
디에프 상륙 작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횃불 작전
튀니지 전투
천왕성 작전
벨리키예루키 전투
화성 작전
겨울폭풍 작전
바렌츠 해 해전
<nopad> 1943년
북캅카스 공세
콜초 작전
이스크라 작전
보로네시-하리코프 공세
스카쵸크 작전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쿠투조프 작전
제1차 돈바스 공세
므가 공세
플로이에슈티 공습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
제2차 스몰렌스크 전투
브랸스크 공세
드네프르 강 전투
도데카니사 전투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무솔리니 구출 작전
슈바인푸르트 공습
제2차 키예프 전투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슬로바키아
노스케이프 해전
<nopad> 1944년
칼린코비치-모지리 공세
몬테카시노 전투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안치오 상륙 작전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나르바 전투
비텝스크 공세
논쟁 작전
로가체프-즐로빈 공세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빌레르보카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레지차-드빈스크 공세
프스코프-오스트로프 공세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루블린-브레스트 작전
타넨베르크 선 전투
바르샤바 봉기
타르투 공세
팔레즈 포위전
용기병 작전
도펠코프 작전
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파일:체코 국기.svg 슬로바키아 봉기군
동부 카르파티아 공세
발트해 공세
라플란드 전쟁
베오그라드 공세
휘르트겐 숲 전투
마켓 가든 작전
아헨 전투
판처파우스트 작전
굼비넨 작전
벌지 전투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임시정부
부다페스트 공방전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nopad> 1945년
보덴플라테 작전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동프로이센 공세
한니발 작전
하부 슐레지엔 공세
드레스덴 공습
남풍 작전
봄의 새싹 작전
모라바-오스트라바 공세
상부 슐레지엔 공세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텍셀 봉기
파일:Georgische_Legion.png 조지아 군단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저항군
삼란드 공세
베를린 공방전
오드자크 전투 파일: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깃발.svg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
이터 성 전투 파일:슈츠슈타펠 깃발.svg 항전파 무장친위대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저항군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VIP
프라하 봉기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 저항군
※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000,#999
<colbgcolor=#536349> 연표 사건
1936년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1941년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1942년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1945년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바르바로사 작전
Unternehmen Barbarossa
Операция «Барбаросса»
Operation Barbarossa
제2차 세계 대전독소전쟁의 일부
파일:external/ww2db.com/battle_barbarossa5.jpg
▲ 바르바로사 작전 전개도
날짜
1941년 6월 22일 ~ 12월 5일
원인
아돌프 히틀러소련 정복 야욕, 레벤스라움
장소
소련 국경 전역
교전국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소련|]]

[[나치 독일|]][[틀:국기|]][[틀:국기|]]
[[헝가리 왕국(1920~1946)|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 헝가리 왕국 (6.27~)

[[이탈리아 왕국|]][[틀:국기|]][[틀:국기|]]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루마니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핀란드 공화국|
핀란드 공화국
]]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슬로바키아 공화국
]][[틀:국기|
행정구
슬로바키아 공화국
]][[틀:국기|
속령
슬로바키아 공화국
]]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이오시프 스탈린|]]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세묜 티모셴코|]]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게오르기 주코프|]]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마르키안 포포프|]]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표도르 쿠즈네초프|
표도르 쿠즈네초프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드미트리 파블로프|
드미트리 파블로프
]]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미하일 키르포노스|
미하일 키르포노스
]]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미하일 툴레예프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로디온 말리놉스키|
로디온 말리놉스키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아마자습 바바자냔|
아마자습 바바자냔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안드레이 예료멘코|
안드레이 예료멘코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아돌프 히틀러|]]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발터 폰 브라우히치|
발터 폰 브라우히치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프란츠 할더|]]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빌헬름 리터 폰 레프|
빌헬름 리터 폰 레프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페도어 폰 보크|
페도어 폰 보크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이온 안토네스쿠|
이온 안토네스쿠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
결과
추축국압도적인 전술적 승리, 전략적 목표 달성 실패[1]
추축군이 소련 영토 약 1,600,000km2 점령
영향
독소전쟁 발발, 동부전선 개전
전력 약 290만 명
- 북부전선군
- 북서전선군
- 서부전선군
- 남서전선군
- 남부전선군
- 예비전선군
- 전차 11,000대
- 항공기 9,100기
약 380만 명
- 북부집단군
- 중부집단군
- 남부집단군
- 동맹국군
- 전차 3,350대
- 항공기 4,389기[2]
피해규모 497만 3천 820명 손실
- 전사 802,191명[3]
- 부상 1,336,147명
- 실종 및 포로
2,335,482명
- 예비군 동원 도중
포로 500,000명
- 전차 20,500대
- 항공기 21,200기
88만 1천 788명 손실
- 전사 186,452명
- 부상 655,179명
- 실종 40,157명
- 전차 2,735대
- 항공기 2,827기

1. 개요2. 배경
2.1. 독일의 의도2.2. 소련의 내막2.3. 진정한 세계대전의 시작
3. 작전 준비
3.1. 독일 국방군3.2. 소련군
4. 전개5. 편제6. 결과

[clearfix]

1. 개요

우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만 하면, 저 엉터리 건물은 스스로 무너진다.
- 아돌프 히틀러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로서 4년에 걸친 독소전쟁의 서막을 연 나치 독일소련 침공작전이다. 또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한 단일 군사 작전이기도 하다.[4][5]

바르바로사(Barbarossa)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red beard)라는 뜻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는데, 프리드리히 1세가 동방으로 십자군 원정을 갔듯이 소련을 침공하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6] 또 하나는 붉은 수염이라는 뜻이 공산주의의 주도국인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을 연상하게 한다는 데서 착안했거나,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작전 암호명 중 색상이 사용된 사례 - 녹색 상황[7], 백색 상황, 청색 상황, 황색 상황/적색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사용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2. 배경

소련과 나치 독일은 대전 초에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나중에는 폴란드서로 같이 침공하여 사이 좋게 나눠 먹었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오래갈 수 없었다.

2.1. 독일의 의도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파시스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의 원인을 배후중상설로 믿고 있었다. 즉, 독일 제국이 무너진 것은 독일군이 연합국에 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 내부에서 사보타지를 일삼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를 내세우며 지도부에 유대인이 많은 소련에 대해 유달리 적대적이었다. 여기에 인종주의가 결합하여, 게르만족은 슬라브족을 유라시아에서 몰아내고 그곳을 레벤스라움으로 만들어야 독일이 번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기에, 당연히 독일과 소련의 관계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마치면서 칼 끝을 소련으로 돌렸다. 비록 항공전에서 패배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서유럽에서 독일의 패권은 확고했고,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하기로 한다.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도 굳이 전선을 늘릴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기는 했으나 소련을 만만하게 보는 것은 별 차이가 없었다. 예외적으로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이전에 소련의 인력과 미국의 물자가 합해지면 어떤 시너지를 낼지 모른다며 경고했다.[8][9]

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한 이유는 그 무엇보다 그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맺어진 소련과의 평화를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래에 분명 소련과의 전쟁이 있을 거라 예상했고, 수많은 천연 자원과 인력을 가진 소련이 힘을 키운 뒤 독일과의 전쟁에 들어가면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수많은 혼란으로 인해 비교적 약해진 소련이, 국력을 회복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훗날 있을지도 모르는 위협을 제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겨울전쟁에서의 붉은 군대의 부진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처형되는 등 소련에 뛰어난 지휘관이 없어 보였던 것 또한 그의 결정을 도왔다.

경제적인 부분도 있었다.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국가로서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는데, 히틀러는 민족을 하나의 유기체로 봄으로써 한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생활 공간과 자원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게르만 민족(나치 독일)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당시 소련 영토)의 곡창지대(식량 필요), 코카서스의 유전(전차, 장갑차 연료 필요), 우랄 산맥의 광물, 시베리아의 목재 등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이것들을 결국 소련에게서 빼앗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히틀러는 당시 중립국에 머물러 있었던 미국도 영국에 대한 지원 정책을 지속하는 것을 보며 언젠가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가진 미국도 상대해야 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 전에 소련의 자원과 인력을 미리 확보하기 위함도 있었다.

또한 경제적인 또 다른 문제로서, 당시 독일은 메포어음이라는 어음을 발행하여 인플레이션 없이 통화량을 늘리는 편법을 사용해 경제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가 갚아야 할 돈을 계속 늘리고 있었다. 이 빚을 갚기 위해서는 금본위제라는 국제 경제 질서 하에서 돈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금을 확보해야 했고, 당시 스페인 내전 이후 잉카에서 약탈한 스페인 제국의 금이 무기 대금으로 소련에 넘어갔기 때문에 이 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련을 굴복시켜 강탈해야 했다.

사상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어차피 양쪽 다 알고는 있었지만 독소 불가침조약이야 고작 휴전일 뿐인 데다가 나치즘이란 사상과는 견원지간공산주의를 말살하겠다는 사상적 목표도 덤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나치 독일에게 유럽에서 큰 위협이 되는 소련군(붉은 군대)을 조기에 제거하고 동부전선을 조기 종료한 다음 육군 예산을 절감하고 그 절감한 비용으로 영국 상륙에 더 중요한 해군과 공군을 증강하여 다시 한번 완전히 성공시키지 못한 대영 작전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즉, 경제, 사상, 군사적 여러 목적들로 소련을 침공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히틀러의 생각은 대강 이렇다.
  1.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도 군수 시설에 큰 피해를 입었으니 한동안 유럽 본토에는 신경쓰지 못할 것.[10]
  2. 피해를 복구하는 동안 영국은 미국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음.[11]
  3. 일단 피해 복구로 바쁜 영국에 의한 본토 위협이 없는 동안 독일은 소련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4. 동맹국 일본이 우릴 도와서 소련을 공격[12]
  5. 그러면 소련군 병력이 한쪽으로 쏠리는 일은 없을 것.
  6. 적당한 시점에 조약을 맺고 미국의 귀를 막아 버리면[13] 미국이라는 지원국을 잃어버린 영국을 휴전 협상장에 끌어내거나, 아니면 영국 본토 침공을 다시 계획해볼 수도 있다.

2.2. 소련의 내막

히틀러와 독일군부가 아무리 비밀을 감추려고 해도 이런 대규모 작전이 소련에게 포착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독일이 전쟁 준비를 시작한 1940년, 소련측도 계속 전쟁 징후를 감지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 산재한 소련 간첩망은 1940년 가을부터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테니 대비해야 한다는 첩보를 계속 보냈다. 독일 내에는 히틀러 집권 전부터 수십만 명의 공산당원과 수백만 명의 공산당 지지자들이 있었는데, 그 위성국들과 동맹국 내에도 상당수의 공산당 동조자들이 있었다. 독일 정부 내에도 신분을 위장한 간첩망이 엄연히 존재했다.[14] 이들은 1년 전부터 계속 소련에 독일의 전쟁 준비 징후를 알려왔다. 특히 일본 제국에서 신문 기자로 위장하고 있었던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본 주재 독일무관으로부터 들은 침공 몇 개월 전에 6월 22일이 개전일이라는 정보까지 알려왔었다. 공산주의에 동조적이었던 독일 인쇄업자는 한참 인쇄되고 있던 독일 점령군용 러시아어 회화집 한 부를 빼돌려 소련 영사관에 전달했다. 여기에 1940년 가을부터 소련 주재 독일 외교관들이 가족들을 대거 독일로 귀국시킨다는 이상 정황도 포착되었다.

외국에서도 소련에 계속 경고를 했는데, 영국에서도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이 대거 동부로 계속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소련에게 제공했으며, 스웨덴에서도 노르웨이로 들어가는 스웨덴 관할 케이블에서 독일의 암호 통신을 감청하여 해독, 소련에 제공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부정하고 싶어 했다. 스웨덴 건은 출처 부족으로 무시당했고 소련은 영국이 제공한 정보를 가지고 독일에게 항의했으나 독일은 "영국 공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이동 배치하는 것이다"며 변명했고 그럴듯한 변명에 스탈린은 이를 믿어버렸다. 왜냐하면 이때 나치 독일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벌려놓은 그리스 침공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리스랑 전쟁을 해야 했고, 여기에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친독정부가 붕괴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유고까지 진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를 들어 독일측이 그럴듯하게 변명하자, 스탈린도 히틀러한테 그 이상을 추궁할 순 없었다.

물론 스탈린에게도 독일 침공을 부정하는 데엔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독일의 입장에서 적국인 대영제국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영국과 그 식민지간의 항로가 살아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럴 때 소련과 양면전을 벌이는 것은 천년에 한 번 나올 바보나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히틀러가 스탈린한테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고 한 이유가 1차대전 때 독일이 양면전쟁을 벌이다 파멸한 것을 교훈 삼아 소련과의 양면전쟁을 미리 막기 위해서였는데, 이걸 모를 리 없는 스탈린이 히틀러가 그토록 피하려 했던 양면전쟁을 또다시 벌일 거라고 예상하기는 힘들었다. 여기에 소련군 정보국인 GRU 국장인 필리프 골리코프 중장은 여러 경로로 독일군의 침공 징후가 뚜렷했는데도, "영국이 있는데 설마 소련까지 침공하겠나"고 생각하던 스탈린에 동조하여 독일이 영국을 정복하기 전까지 독소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15] 특무부대 총수인 골리코프의 이런 결론은 스탈린을 안심시켰고, 스탈린은 히틀러가 측근들의 만류에도 대단히 무모한 도박을 행하는 벼랑 끝 전술에 이골이 난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대영작전을 준비하기 위한 기만책일 뿐"이라는 독일의 해명을 믿게 된다.

다만 스탈린의 이런 확증편향에도 불구하고 세묜 티모셴코 국방장관이나 붉은 군대 총참모부[16]는 전쟁 징후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1940년 12월 독일의 침략을 상정한 자체 도상연습을 실시했다. 청군(독일군)을 맡은 사람이 주코프 대장(당시 키에프 군관구 사령관), 적군(소련군)을 맡은 사람이 파블로프 대장 (당시 서부 군관구 사령관)이었는데, 청군은 적군을 몇 주 만에 포위 섬멸하는 결과가 나왔다. 즉 소련군의 자체평가에서도 소련은 독일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소련군 수뇌부는 이런 소련군의 취약성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동부에 산재한 부대를 서부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고 스탈린에게 상신했으나, 스탈린은 "우리가 부대를 서진시켜 국경 부근에 집결시키면 독일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그럼 진짜 전쟁이야! 전쟁!"이라며 군부의 의견 상신을 묵살했다.[17]

붉은 군대 지휘부는 1941년 봄부터 계속 스탈린에게 경계령을 내려줄 것을 상신했으나 스탈린은 이것이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위와 같은 이유로 번번이 막았다. 결과적으로 침공 당일인 1941년 6월 22일 0시 30분에서야 티모셴코와 주코프 명의의 경계령이 내려질 수 있었으나, 이때는 6.25 때와 마찬가지로 일요일 새벽이었고, 농촌 출신이 대부분인 붉은 군대의 장병은 농번기 휴가철을 맞아 상당수가 외출-휴가를 떠난 와중에서 이미 부대는 텅텅 비어 있었는데, 경계령 발령 3시간 후 독일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이는 초반 소련이 파죽지세로 독일군에게 점령당하는 요인이 된다.

2.3. 진정한 세계대전의 시작

독일이 소련을 침략하기 전까지는 아직 세계대전이라고 불리기 힘들었다. 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각각의 전역이 유기적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는 단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럽 본토에서의 전투는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끝났었고, 영국 본국과의 전투는 바다사자 작전이 발동되지 않은 시점에서 공중전만 진행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영국, 영연방과 식민지들 대 이탈리아, 독일 지원군들의 전투였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중국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남방 작전과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지 않은 시점이라 당시 중국은 연합국의 일원이 아니었다.

독소전쟁 전까지는 연합국은 영국과 영연방국밖에 남지 않았고[18][19], 추축국[20]에 가입한 국가들 중 대표적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중 독일과 이탈리아는 공동 전선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을 치르고 있었고, 일본은 독자적인 중일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동안 소련은 이 세계 정세에 중국, 미국과 함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로 남아 있게 되었고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나름대로 독소 폴란드 점령, 겨울전쟁, 발트 3국 점령과 같은 영토 확장도 꾀했었다.

하지만 1941년에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고,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에게 전쟁을 걸면서, 세계 각지의 전역은 하나의 복합적인 전쟁, 즉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으로 합쳐지게 된다.

3. 작전 준비

  •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동부전선
독일 소련 비율
사단수 166 190 1:1.1
총병력 4,306,800 3,289,851 1.3:1
화포 42,601 59,787 1:1.4
전차 및 자주포 4,171 15,687 1:3.8
전투기 4,389 11,537 1:2.6

병력 수는 독일군이 많고 장비는 소련군이 많다. 사단의 수는 소련이 더 많은데, 독일 측의 병력수가 더 많은 이유는 편제의 차이 때문이다. 개전 당시 독일 보병사단의 정원은 17,000명[21], 기갑사단의 정원은 12,000명 정도였지만, 소련 소총사단의 정원은 11,000명[22]이었다.[23] 독일군은 2년간의 실전 경험[24]으로 장비 수는 부족했지만 그 운용법은 이미 베테랑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소련군의 장비는 독일군에 비해 그다지 뒤떨어지지는 않았으나[25] 기습을 당한 데다가 실전 경험이 없었고 경험 많은 장교들이 숙청을 당한 것 때문에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특히 소련 공군 같은 경우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되는 날에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소련군 비행장을 향해 기습을 하러 왔는데도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서 멀뚱멀뚱 보고만 있다가 기습당해서 이륙도 못해본 채로 상당수의 전투기가 파괴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소련 공군은 독일군의 동진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1943년에 재건될 때까지 해군 항공대가 이를 채워야 했다.

3.1. 독일 국방군

파일:4422412121.jpg
파일:zxczxc.jpg
소련을 침공하는 나치 독일 육군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초토화된 소련의 마을
독일군 주요 지휘관들인 프란츠 할더,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등은 후일 회고록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양면전쟁의 참혹한 기억 때문에 이 침공에 회의적이었다는 식으로 증언한다. 그런데 이건 전후에 그들이 패전의 모든 책임을 히틀러에게 덮어 씌우기 위해 한 증언들 중 하나에 불과한 얘기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하여 실의에 빠졌던 독일 군부는 히틀러의 이 결정에 열광했고, 심지어 독일군 정보부는 "12주의 전역으로 소련을 완패시킬 수 있다"라고 보고하며 이 결정을 확신시켰다. 허나 당시 독일의 정보능력은 소련에 완전히 밀리고 있었는데 주소 대사 역시 "소련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어찌할 수가 없다"할 정도였다. 독일이 자신이 가진 정보에서 50%를 뻥튀기했는데도 "220개 사단을 격파하면 소련군은 완전히 무너진다"라고 보고했으나, 소련군은 1941년에만 400개가 넘는 사단을 동원했다. 하물며 작전계획도 비현실성이 넘쳤는데, 최초에는 "12주의 전역으로 소련을 패배시킨다"였던 것이 보급 문제가 불거지자 그것을 해결하니 "10주에 끝낼 수 있다"라고 줄였고, 또한 프리피야티 습지(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국경의 대습지로, 프리피야트 시 북서쪽 벨라루스 영토지역과 남서쪽 우크라이나 영토지역에 걸쳐 영국 전체나 한반도 전체 크기보다 큰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엄청난 규모–269,400 km2의 습지이다.) 돌파 문제에 대해 "8주에 가능하다"고 수정하는 등 작전 계획에 어떠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것을 지엽적으로 해결하면서 근거도 없는 자신감만 넘쳤다. 이 문제는 7월 중순 프란츠 할더의 "14일에 이길 수 있다는 예상이 현실이 되어 간다." 라고 쓴 것을 겨우 한 달 후에 "우린 현재 350개 사단을 확인했다. 그들의 무장은 빈약하나 그들은 존재한다. 우리가 4개 사단을 격파하면 소련군은 그 자리에 4개 사단을 투입한다."라는 일기에서 화룡점정을 이룬다.

작전 목표를 둘러싸고 독일군 수뇌부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할더 총참모장을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는 정치적 수도이자 교통의 중심인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히틀러는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석유가 풍부한 캅카스 지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26] 결국 군부와 히틀러는 타협하여 침공군을 북부, 중부, 남부 집단군 세 갈래로 구성하기로 했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키예프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구성되었다. 작전의 목표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을 잇는 선, 이른바 "A-A선(Arkhangelsk-Astrakhan line)"이었다. 독일군과 함께 루마니아군, 헝가리군, 이탈리아군, 핀란드군이 참전하기로 하면서 총 병력은 390만 명, 4,600여 대의 전차, 4,389여 대의 항공기, 46,000여 문의 각종 포가 동원되었다.

독일군의 주요 전법은 'Keil und Kessel'(카일 운트 케셀)[27]이라고 불리는 양익 포위였다. 소련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일단 적의 주력을 패퇴시키더라도 후방으로 도주하면 섬멸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동원 가능한 병력이 많은 소련군이 시간이 갈수록 유리해지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보병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가해 정면의 적을 고정시킨 후, 기갑 부대가 양익을 돌파하여 적의 주력을 포위하는 전법이었다. 히틀러는 정치장교는 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체포하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알려지자 병사들의 독전 임무를 맡은 소련군 정치장교를 자극하여 오히려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3.2. 소련군

소련군은 1938년에 벌어진 대숙청에서 사단급 이상의 단위 부대에서 반이 넘는 군 지휘관들이 처형되거나 굴라크로 끌려가는 큰 혼란을 겪었다.

대숙청이 적어도 겨울전쟁과 동부전선 초반까지 큰 혼란을 야기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최근 들어 대숙청에서 날아간 인물들 중에 상당수가 정치적으로 출세한 무능한 사람들 또는 현대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사라진 후 전문적이고 현대적인 교육을 받았던 유능한 40대 지휘관들이 전면에 나설 기회를 제공해서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는 반론을 감안해도 그렇다.

초반의 대패 때문에 소련군이 전혀 준비를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소련은 1920년대부터 강력한 국방 정책을 밀어붙였다. 특히 1930년대 성공한 공업화 때문에 전투기 수, 잠수함 수, 전차 수는 1940년 당시 세계 1위였다. 이렇게 많은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운용 교리 또한 발전시키고 있었으나, 군부 대숙청의 결과 이런 교리를 발달시킨 장성들도 쓸려나가면서 교리들이 부정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군사 이론가들이 자주 숙청되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운용 사상이 바뀌는 바람에 부대들은 해체와 재편을 반복하고 있었다. 보유한 전차와 항공기들은 스펙상 독일군 장비들을 상대로 우위를 가질 수 있거나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전간기 시대에 맞춰 발전된 장비들을 갖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적시에 활용되지 못하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독일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침략적인 의도를 내비치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군은 병력을 2배로 늘렸으나, 갑자기 몸집이 커지자 대숙청에서 기인한 부작용과 함께 장교 부족이라는 큰 문제가 벌어졌다. 상급 장교도 부족했지만, 하급 장교는 절망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대학생들에게 속성으로 몇 주 교육을 시킨 다음에 바로 소위 계급을 달아주는 식으로 장교를 양성하였다.

1938년에 끝난 스페인 내전에서의 전훈[28]으로 전차 부대들을 모두 여단급 이하로 축소재편했다가 1940년 독일군의 전격전의 대성공을 보고 다시 군단급으로 재편하기로 했다. 이 와중에서 독일군의 침략을 받았으니 결과는 뻔한 일이다. 공군에도 숙청의 올가미가 덮쳐서 유능한 지휘관 상당수가 "항공사고가 너무 잦은데 이거 사보타지 아냐?" 라는 NKVD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결과적으로 공군도 몇 년간 발전이 지체되었다. 사실 항공산업의 초창기에는 소련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고가 났고, 이는 소련만의 문제는 아니었으나, 항공기 문외한인 NKVD는 이를 반동들의 사보타지라고 생각, 저명한 항공공학자들을 수용소로 보내서[29] 삽질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정에서 항공공학의 선도국중 하나였던 소련은 미국, 독일, 영국에 비해 몇 년 뒤쳐지게 되었다.[30]

예외적으로 소련군이 핀란드군을 상대로 고전하다가 겨우 승리한 1939-40년의 겨울전쟁 때의 교훈은 헛되지 않아서, 소련군의 이후 월동 장비나 동계 작전 능력이 대폭 향상되었다. 후에 겨울에 발생한 모스크바 전투 때 겨울전쟁에서 붉은 군대 병사의 피값으로 체득한 전훈들은 유용하게 사용되어 소련군은 겨울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던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승진한 키릴 메레츠코프알렉산드르 노비코프는 후에 소련군의 중추가 되었고 국방장관이 된 세묜 티모셴코는 군 개혁을 조용히 이끌었다.[31]

게다가 소련군은 러시아 내전 이후 겨울전쟁 때까지 대규모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실전경험의 부재는 1차 대전 이후 다른 나라도 유사했지만, 소련군이 독일군에 비해 이런 점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했던 점은 1차 대전에 대대장 이상급으로 참전한 고급 지휘관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러시아 고급장교 대부분은 귀족이나 반혁명세력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붉은 군대에 가담한 고급장교 수는 극히 적었고, 기본적으로 붉은 군대 장성급 고급장교들은 부사관이나 사병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전에서의 지휘 경험이 적다는 문제가 있었다.[32]

작정하고 대규모로 전면전을 벌이는 데는 교리, 즉 종심 작전 이론이라는 선진적인 교리가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의 선구적인 이론가들에 의해 확립되어 있었으나 이 이론을 개발한 이는 물론이고 스페인에서 그나마 실전 경험을 쌓았던 인물들도 대숙청으로 상당수가 황천길을 밟은 상태였다. 특히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본 공군 참전자들이 숙청된 결과 소련 공군은 초기에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다.

미하일 투하쳅스키같이 기동전의 개념을 제안한 유능한 장성들까지 처형되었던 데다가 이론까지 폐기되어서 나머지 사람들은 숙청될까 봐 투하쳅스키의 '투'자도 못 꺼냈다. 투하쳅스키가 제시한 기동전은 독소전쟁 도중 소련에서 다시 부활하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대숙청이 도움이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도 납득이 안 된다면 독소전쟁의 영웅인 게오르기 주코프조차도 대숙청 와중에 저승 갈 뻔했다. 다행히 전공을 세워서 칼날을 피했지만.

지시 없이 훈련했다고 장교나 장성이 저승 가는 이런 미친 피바람 속에서 안 그래도 훈련 부족인 소련군은 더욱 더 경직되어 갔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군사 교리 또한 답보 상태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소련군은 2,900만 명[33] 이상의 사망자를 감수하게 되었다. 이 수치에는 민간인 사망자의 비율이 상당했는데, 나치의 인종 청소 정책 때문이었다. 군인 총 사망자는 1,0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360만 명 정도의 포로 사망자도 포함된다. 바르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전사자는 400만 명이 넘어가며 전차전투기의 손실은 각각 20,500대와 21,200대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 방어전 당시에는 쓸 전차조차 없어서 NI 전차라는 민간 트랙터를 되는 대로 엉망진창으로 개조한 테크니컬 경전차를 주력 기갑으로 내세워 쓸 지경이었다. 첨언하자면 이때 소련이 날려먹은 항공기의 수는 독소전쟁 전체 기간 동안 소련이 날려먹은 항공기의 40% 정도 된다고 한다. 포병의 피해도 극심해서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중포병이 거의 삭제당했다.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이겨내는 데 활약한 40대 연령의 지휘관들도 전쟁 초기엔 감각이 없기는 마찬가지라서 주코프마저도 독소전쟁 초기엔 수십만 명의 병력을 날려먹기도 했다. 결국 소련군은 계속 얻어터지면서 독일군 교리를 학습하여 이를 극복해 나간 것이다. 훗날 소련군의 명장에 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이반 코네프, 안드레이 예료멘코 등도 개전 초기에는 실전 경험 부족 때문에 계속 참패했고, 후퇴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래 연대장이나 여단장급 인물들이 군단장이나 사단장을 맡고 있었으니... 다만 이 당시의 독일군은 2년간 계속 폴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영국, 유고, 그리스군 등을 상대로 실전을 치러 봐서 수준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군이 졸전을 벌였다기보다는 독일군이 잘 싸웠다고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당시 독일군은 스스로가 자신했던 것처럼 규모, 전술에 있어서 최강이었던 것이다.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을 꼽자면 바르바로사 작전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갑작스럽게 파기하고 기습을 감행한 공격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진주만 공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전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갑작스럽게 기습 공격을 당하면 엄청난 피해를 일방적으로 얻어 맞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독일은 독소전 초기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큰 이익을 얻었던 것처럼 어마어마한 전과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진주만에서는 산업 시설 등은 건드리지 못했는데 이건 산업 시설과 곡창지대까지 날려버렸다. 갑작스런 기습이 아니었다면 독소전쟁 초기 교환비가 20대 1에 달하는 참패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소련에서 스탈린을 대신할 지도자는 없었다. 스탈린은 서구 국가들과 협상을 잘 이끌어 냈으며, 소련이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지휘와 통제를 받도록 했다. 스탈린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거의 있을 필요가 없었던 인물로 표현되는데, 대숙청과 초반 무리수를 포함하더라도 독소전쟁에 대한 공로를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다. 전선에서의 싸움뿐만 아니라, 후방에서 소련 인민을 통제하며 무기를 생산하고 병력을 동원하며 자원을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다. 소련 인민들의 자발적인 희생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이 중앙의 효율적 통제 아래 수행되지 않았다면 그런 효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1942년부터 스탈린의 스타프카는 소련 전체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행사했다. 전선에 관여하면서 스탈린이 벌인 실책은 커다란 것이지만, 그래도 니키타 흐루쇼프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이긴 것이라고 말한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34][35] 스탈린은 분명 실책[36]이 있었지만 그의 잘못을 깨닫고 후방에서의 지원에 힘썼고 소련의 지휘관들은 그 지원을 받으며 독일군을 격퇴했다. 물론 스탈린이 모든 것을 총괄했고, 스탈린이 2차 대전을 혼자서 이끌었다 하는 수준까진 아니지만 말이다.[37]

독소 불가침조약 때문에 방어선 구축에서도 문제가 생겼는데, 원래 국경에서 10년 동안 준비해 놓은 방어선을 버리고 새로운 국경선에 맞춰서 방어선 구축을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독일이 영국을 완전히 정리할 때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으로 보았으므로 침략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독일군이 국경을 넘나들며 정찰하는 것마저 무시하도록 명령했는데, 가뜩이나 어설픈 방어선이 독일군에게 완전히 분석당하면서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4. 전개


(1941년 6월 22일 소련 라디오 방송. 목소리는 당시 소련의 유명한 아나운서인 유리 레비탄(Юрий Борисович Левитан, 1914. 10. 2. – 1983. 8. 4.)이다.)
"22 июня 1941 года"
"1941년 6월 22일"


Внимание, внимание.
주목, 주목.


Говорит Москва.
모스크바에서 말합니다.


Передаём важн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енное сообщение.
정부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Граждане и гражданки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들이여.


Сегодня в 4 часа утра
오늘, 6월 22일 새벽 4시


без всякого объявления войны
선전포고도 없이


Германские вооруженные силы атаковали границы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독일 군대가 소련의 국경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Началась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советского народа против немецко-фашистских захватчиков.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들에 대항하는 소련 인민의 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Наше дело правое,
우리의 대의는 옳으며,


враг будет разбит,
적은 패배할 것이고,


Победа будет за нами!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1941년 6월 22일 일요일 새벽 4시 독일군은 동맹군까지 합쳐 3개 집단군, 총 305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소련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만일을 대비해 국경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했지만, 그런 조치는 오히려 개전 초반에 소련군이 독일군에 기습에 큰 타격을 입고 반격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전장 환경이 바뀌었으나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유능한 장교들이 전부 쓸려나간 게 특히 한 몫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절이었다면 국경 지역에 배치된 대규모 병력이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기갑군을 최초로 창설한 독일이었다. 소련군의 전차는 우수한 성능과 기동성에도 불구하고 보병 지원 이상의 역할을 배정받지 못했다. 단일한 전차 군단은 당연히 없었고, 전차들은 드넓은 소련 국경에 흩어져 있었다. 이래서야 기동성과 충격 효과가 발휘될 리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경직된 지휘 체계로 인해 각 부대들의 자체적인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황의 불리함을 알고 상급 부대로 집결한다던지 하는 임기응변적 대책은 물론 없었고, 소련군은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다가 포위되어 죽어나갔다. 독일 기갑군이 뚫은 구멍으로 대량의 독일군이 유입되면서 전방의 소련군은 그대로 갇히고 만다. 또한 독일군의 주공인 중부집단군 쪽에 소련군 사단은 얼마 없었고, 우크라이나에만 100개 사단이 투입되어, 거대한 소련군이 양분되는 일도 발생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스탈린은 여름에 히틀러의 공격이 없을 거라고 예상한 나머지 별다른 경계태세도 취하지 않았다.[38] 소련의 전투기들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육군이 공중 엄호, 무기, 첩보, 통신체계도 없이 단 몇 시간 만에 궤멸되는 일도 잦았다. 그나마 이상 징후를 감지해 숙청될 것을 각오하고 경계 태세를 유지토록 한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의 지시 덕에 소련 해군은 급습에도 피해가 가장 적었고, 살아남은 해군 항공대들이 궤멸한 공군의 역할을 상당량 대신해 줄 수 있었다.

6월 27일에 스탈린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유린되었으며, 국경에 있던 기존 병력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독일군은 민스크에 도착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립을 지키던 헝가리 왕국마저 독소전쟁에 참전하면서 전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39][40] 이때 스탈린은 통치를 그만두고 자기의 다차(러시아식 별장)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이때 스탈린이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추측밖에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스탈린은 정치적 천재였고, 권력에 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실패를 덮고,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책략이었을 수 있다.[41] 소련 정부의 수뇌부는 스탈린을 찾아가 그의 복귀를 호소하였고, 그를 공산당의 최고 직위와 정부 최고 직위에 오를 것을 호소했다.[42] 스탈린은 몇 번 거절하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7월 3일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고, 소련 인민들은 스탈린의 재등장에 안심했다.

독일군은 3개 집단군으로 나뉘어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북부집단군은 시가전을 피하기 위해 레닌그라드를 포위했고 남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도 계속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소련군의 반격이 거세지자 독일은 중부집단군이 남부집단군을 지원하게 했고 이것 때문에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진격이 늦춰지는 동안 가 내리면서 러시아 전역이 악명높은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군마들은 진흙탕에 빠져 죽었고 턱없이 부족한 보급 차량들도 진흙밭에 빠져 망실당하기 일쑤였다. 애초 독일군은 단기 결전을 계획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군한 상태였고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징집을 시작해 독일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을 시작하면서[43] 안 그래도 느린 진격은 더더욱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이에 일본에게 소련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당연히 가만히 있었다.[44] 독일군은 마지막으로 태풍 작전으로 모스크바 점령을 시도했지만 때마침 소련 측에서 일본이 참전하지 않을 거란 첩보를 받았고 바로 일본쪽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 중 25개 보병사단과 9개의 기갑여단[45]들을 모스크바로 재배치, 이후 독일은 소련군의 반격을 받았고 겨울이 되어 러시아의 강추위가 몰아치자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약 30km 앞에 두고 공격을 포기했다.

독일군의 진군이 세 갈래였던 만큼 전역도 크게 3곳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북부집단군이 북부방면군[46]을 상대한 북부 전구에서는 리투아니아-라트비아-나르바/페이푸스호/프스코프-레닌그라드/일멘호를 따라 전투가 이어졌다. 북부 전구에서의 주요 전투로는 라세이냐이 전투, 레닌그라드 공방전 등이 있다. 중부집단군이 서부방면군[47]을 상대한 중부 전구에서는 민스크-스몰렌스크-르제프/뱌지마/오룔-칼리닌/모자이스크/툴라-모스크바를 따라 전투가 이어졌다. 주요 전투로는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제1차 스몰렌스크 전투,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 등이 있다. 남부집단군과 루마니아군이 남서 방면군[48]을 상대한 남부 전구에서는 리보프/브로디/코벨-우만/오데사-키예프-쿠르스크/하리코프-로스토프를 따라 전투가 이어졌다. 주요 전투로는 제1차 브로디 전투, 우만 전투, 제1차 키예프 전투, 제1차 로스토프 전투 등이 있다.

한편 소련은 독일이 침공하면서 서쪽에 있던 공업 지대를 동쪽으로 이동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필요한 무기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공장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빠른 속도로 진군해 오고 있음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한 끝에 공장의 설비들을 동부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공장 지대는 이후 대전 내내 소련군이 싸우는 무기를 공급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과정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이 흘러간다. 당연히 중앙은 전선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공장의 소개와 대피가 중앙의 조율 아래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어떤 기차는 동쪽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매야 했으며, 소개하여 피난을 갔다가, 피난처로 독일군이 진격하는 바람에 또다시 피난 가야 했던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다행히 서쪽에 있던 대부분의 공장들은 우랄 산맥 부근으로 안전하게 이송되었고, 1,500개의 주요 공장 중에 1942년 말까지 단 55개 만이 가동에 들어가지 못했다. 1941년 후반기까지 2,600개의 기업체가 옮겨졌으며, 2,500만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공장을 따라 이동하였다. 옮기지 못하는 생산 시설은 독일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파괴했다.

이러한 결정은 독일군에게 있어서 두 가지 문제로 다가오게 되었다. 먼저 독일군은 소련의 군수 공장들을 점거해 소련의 생산력을 완전히 말소시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예상을 깨고 소련은 서부의 공업시설들을 그야말로 대이동시키는데 성공했고 온전히 물자와 장비가 생산되어 소련군의 전투력은 유지되었다. 그리고 독일군은 광활한 거리의 보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소련 기관차들을 노획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하고 있었다.[49] 그러나 정작 소련의 기관차들은 산업 시설들을 이전시키느라 전부 우랄로 도망간 상태였고 독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소련의 철도 규격을 억지로 바꾼 다음[50] 자국 기관차들을 보냈지만, 문제는 독일의 기관차들은 소련의 추위를 버티지 못해 출력이 크게 저하되었다는 거고, 독일군의 보급에도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독일군은 히틀러가 나폴레옹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모스크바에 병력을 올인하지 않고 키예프, 레닌그라드에 병력을 분산하여 투입하였다. 나름대로 이상적인 판단을 한 것이지만, 나폴레옹 시절의 모스크바 일대와는 달리 당시 모스크바는 시베리아 철도가 지나가는 중심 도시라 점령당하는 순간 유라시아 일대는 철도망이 한순간에 마비돼버리는 효과가 있었기에 전략적인 판단 착오였다. 점령지 주민들은 소련의 탄압을 받던 비러시아계 민족들이 많아 처음에는 독일군을 해방자로 맞이하기도 하였다.[51] 처음 점령지에 진주한 독일 전투 부대 중에는 점령지 주민들과 사이가 괜찮은 부대도 존재했으나, 기본적으로 나치의 인종차별 사상에 찌든 이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점령지 주민들이 차별 대우를 받는 것에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전투 부대가 떠나고 아인자츠그루펜 등 인종 말살 부대가 진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독일이 점령한 벨라루스에서는 독일의 만행으로 시체로 이루어진 지층이 형성될 정도였으며, 적어도 1천만이 넘는 소련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수많은 소련의 대도시들도 독일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었다.

5. 편제

바르바로사 작전/편제 참조.

6. 결과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Aline.png|width=100%]]
<rowcolor=white>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목표였던 A-A선과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획득하기로 계획된 영토. 붉은 선은 실제로 독일 국방군이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차지한 영토다.
우리가 소련을 과소 평가했다. 12개 사단을 격파하면 순식간에 12개 사단을 만든다.
프란츠 할더, 독일 육군 총참모장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소련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전략적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러시아의 영토는 독일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광활했고[52] 자연 환경도 혹독했다. 독일은 최초의 공세 때 소련군 주력이 소련 서부의 공업지대 방어에 매달려 후퇴하지 못하니 그것을 물리적으로 섬멸하면 소련은 무너져 내리리라고[53]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전제조건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소련군은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고 끝까지 처절하게 저항했다.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수많은 소련군 장병들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으며 이는 지속적으로 독일군에 인명피해를 강요했고 1941년 12월 5일 기준으로 8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으며 22,000명에 달하는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54]

이 시점에서도 소련은 소모, 섬멸은 커녕 계속해서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기에 독일군은 한 번의 결정적인 공격으로 소련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태풍 작전을 실시해 모스크바로 진격했지만 러시아의 가을 라스푸티차 시즌이 시작되어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이 온통 뻘밭으로 변해 전차든 말이든 병사든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데 귀중한 2주를 낭비했고, 겨울이 되자 진흙탕이 얼어붙어 다시 기동이 가능해졌지만 얼마 못 가 이번에는 독일군이 예상했던 수치를 훨씬 뛰어넘는 역대급 겨울 폭풍으로 인해 동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고 전차와 무기는 얼어붙어 작동 불량이 속출했으며, 여기에 더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련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자 막대한 수량의 기갑 장비들을 버리고 긴급히 수십km를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과 독일 장병들의 필사적인 분투, 소련군의 미숙한 군사운용에 의해 1941년 12월 17일에 소련의 공세가 사그라들면서 겨우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그 순간부터 독일군의 보급 체계, 진격의 통제, 포위섬멸과 돌파의 밸런스는 총체적으로 무너져 있었다. 단지 독일군의 기습 효과와 수적 우세[55], 소련군의 대숙청 및 군구제 긴급도입으로 인한 지휘체계 무질서에 따라 소련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일 뿐이며, 소련군이 퇴각하면서 질서를 잡기 시작하자 독일군의 내적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체급이 기존의 열강들과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국가였던 소련을 다른 열강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은 그 자체가 결함이었다. 독일군은 기존의 전략이었던 "기동하여 돌파하고 포위해서 섬멸하기"의 교리를 일체 바꾸지 않고 있었고, 이것은 동급의 국가가 아닌 압도적인 국토와 물자를 가진 적에게 시도하기에 부적절했다.[56]

독일군은 초창기에는 이와 같은 자신의 결함을 알지 못했고 모든 전선 지휘관들은 자기 부대와 자기 전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들의 임무와 (자기가 생각하는) 전략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최고 사령부에게 다른 부대와 지휘관을 유기하는 상황을 요구했으며 이것은 장성 간의 반목으로도 번졌다. 독일군 장성들이 입을 모아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던 북아프리카 전선은 그 붕괴와 동시에 유럽 추축국의 2인자였던 이탈리아를 패망으로 몰아넣었고, 중부집단군 장성들은 키예프에 대한 진군과 지원에 대해서 그 자신들의 포위섬멸을 막기 위한 히틀러의 선택이었음에도 이것 때문에 모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했다고 발광했다.

이후로도 독일군의 상황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독일군은 인종주의를 철석같이 믿어 점령지 주민들에게 가혹한 정책을 펼쳤고 동부전선에서 계속 게릴라에 시달리게 된다.[57][58] 일련의 작전에서 독일은 가용한 보급품 및 장비 상당량을 소모해버렸고 이로 인해 전쟁의 결말은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다. 독일군이 남은 것들을 긁어모아 공세를 펼쳐도 바르바로사 작전에 비해 축소된 규모일 것만은 확실했다. 이러한 상황반전 속에서 독일군의 일부는 이미 독일이 패전할 것을 예감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적지 않은 수는 이 전쟁이 뼈를 깎는 장기전으로 변할 것임을 예상했다.

더군나나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의 산업역량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소련은 독소전쟁 개전 이틀 뒤 전시시설 대피 계획을 짜고 1941년 6월 30일 국가전쟁위원회를 만들어 스탈린이 위원장을 맡아 군수공장 이전 명령을 내렸다.# 독일군 폭격 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랄산맥 동쪽으로의 군수공장 이전은 광범위하고 빠르게 이뤄졌다.

11월까지 이전된 대형 군수공장만 1,503개. 연 923,000량의 화차와 수많은 우마차가 나치 공군의 주간공습을 피해 밤새워 모스크바 동쪽으로 설비를 실어날랐으며, 1941년 하반기 우랄 전시산업의 전차 생산량은 4,177량이었지만, 1942년 상반기에는 11,021량으로 배 이상 늘었다. 1942년 중반 이후 소련은 모스크바 근교의 산업생산력 회복과 더불어 주요 병기의 수량에서 독일을 추월하였으며, 이후 성능 면에서도 독일과 거의 대등하게 성장하였다. 1944년 소련은 전차 및 자주포, 각종 야포, 개인화기 생산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여 연합군의 최종적인 승리에 기여를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미국이 소련에 천문학적인 규모로 지원한 원조 물자가 소련의 보급을 책임졌으며 개전 초기 삭제당한 소련의 공군을 사실상 무에서 유로 건설해주다시피 했기 때문에 소련이 전차 및 자주포, 각종 야포, 개인화기 생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크지만 말이다.

소련의 가혹한 추위와 라스푸티차로 인해 수많은 독일군과 장비들이 손실되었으며 독일군 야전부대들도 더 이상 전투를 치를 수 없게 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40만 명의 인명 피해라는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한편, 모스크바 공방전으로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그래서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미처 병력 재편도 끝내지 않고 무리하게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 했다. 그래서 1942년 1월, 독일군의 돌출부 르제프에 게오르기 주코프이반 코네프가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이것이 바로 르제프 전투다. 그러나 발터 모델이 소련군의 번개 같은 공세를 모조리 패퇴시켜버렸고 소련군 야전부대들은 수십만의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한 채 패퇴해야 했다. 르제프 전투는 지금도 소련군의 수치로 기억되고 있다.

독일이 해상작전을 등한시한 것 역시 패착의 원인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전투에선 해상 봉쇄가 제대로 되기는커녕 이미 대파된 전함 마라가 해안포대처럼 항구에 정박하여 계속 저항해도 막지 못해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흑해에서도 소련이 착실히 처발리고 있었지만 제해권을 소련으로부터 빼앗지 못해 기어코 캅카스 유전지대를 탈취하는 데 실패했고 덕분에 소련 내 석유 고갈 사태를 피하게 돼 소련군이 열심히 탱크를 굴릴 자원이 마련되었다. 추후 무시무시한 기갑 웨이브를 생각해 보면 명백한 실수. 심지어 북극해에는 제대로 된 함대를 보내지도 못해 무르만스크로 들어오는 랜드리스 물자를 수수방관하게 되었고 말이다. 다만, 당시 독일은 해군력이 워낙 시망이었던 점도 고려해야 한다. 즉, 해군을 안 보낸 게 아니라 못 보냈다.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전 당시 총 4척의 전함을 보유했었는데, 독일은 침몰 전함을 제외하면 3척뿐으로 그나마 그나이제나우는 어뢰를 맞았고 샤른호르스트는 기관에 문제가 생겨 수리 중이라 가동 가능한 전함은 티르피츠뿐이었다. 하지만 티르피츠라도 좀 적극적으로 썼다면 모를까 레닌그라드 전투 당시 하라는 해상포격은 안 하고 훈련에 투입돼 독일의 해상 장악력이 더 약화되었다. 흑해에는 독일에 닿는 바다조차 아니라 어뢰정 몇 척 보내고 말았고 루마니아, 불가리아 역시 해군은 없는 것이랑 마찬가지라, 소련은 가장 위급했던 상황에서도 흑해의 제해권을 착실히 움켜쥐고 있었다.

독일 측의 바람으론 이 작전에 일본도 참전했어야 했다. 당장 소련군은 품질 좋은 보급품을 독일 쪽 전선으로 보내기 바빴기에 독일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딱히 소련군에게 이기든 지든 상관없었다. 그저 숙청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유능한 지휘관의 발만 묶어두기만 해도 족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소련은 공격 안 하고 미국진주만 공습을 하여 태평양 전쟁을 개전했고 독일이 망하는 데에 지대한 원인이 되었다. 소련은 일본이 대소련전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극동의 소련군 정예부대 다수를 모스크바에 재배치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독일만의 입장이고 일본 측에서도 할 말은 많았다. 일본은 할힌골 전투 이후 소련과의 전쟁을 두려워하게 된 데다가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만으로도 이미 경악하여 내각이 총사퇴할 정도로 당혹감을 느꼈었고, 향후 소련과의 충돌이 벌어져도 독일이 전혀 돕지 않아 국제 왕따가 될 것을 크게 우려했다.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 2달 전에 일본 역시 소련에 접근하여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런데 기껏 독일 따라 불가침조약을 맺었더니 그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총공격하니 일본 입장에선 매우 황당한 상황이었다. 전력 면에서도 중일전쟁에 일본 육군도 이미 수 년째 갈려들어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돌발행동을 한 독일을 도와줄 여력도 부족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들이 돌발행동을 선사해 버렸다.

독일이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소련이 받은 피해는 엄청났다. 40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로 모스크바 서쪽에 배치되어 있던 사단의 거의 전부가 증발했다. 소련의 절반을 먹여살리던 우크라이나와 막대한 가치를 지닌 돈바스 공업 지대의 상실은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에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거대한 패배만으로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저지한 소련군은 가능한 모든 예비 병력을 끌어모으며 저항하여 도리어 독일군에 반격을 가했고, 이 와중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참전하였다. 히틀러는 12월 11일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알아서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12월 5일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독일 육군은 이 결정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결정이 소련을 극한의 상황에서 소생[59]시키고 나치 독일을 결정적으로 파멸시킨다.


[1] 군인이나 항공기, 전차 등 인적/물적 피해는 소련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추축군은 작전 초기에 계획했던 A-A선 도달에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중요 거점이었던 모스크바도 점령하지 못하였다. 몰론 모스크바에서 30km까지 도달했긴 했지만.[2] 이 중 전투기는 2,770기였다.[3] 비전투 요인으로 인한 전사자 235,339명 포함.[4] 이 작전 당시 독일군은 3개 집단군 소속 약 150개 사단 38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게 얼마나 많은 숫자냐면, 현재 대한민국 국군 총병력의 7배에 달하고, 부산광역시의 전체 인구수보다 많은 머릿수를 동원한 것이다.[5] 단,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군사병기를 동원한 단일 군사 작전은 아니다. 가장 많은 군사 병기가 동원된 작전은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이 작전에서 소련군은 5,000여 대의 전차와 7천 기의 항공기, 3만 문의 포를 투입했다.[6] 프리드리히 1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을 가던 도중 사망했다. 독소전쟁나치 독일의 패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7]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작전[8] 이는 미국이 소련에 렌드리스를 통해 증여한 비전투 물자가 썩어나기 시작하자 비전투 물자의 직접 생산을 축소시키고 군수 공장에 인력을 집중시켜 만들어낸 모신나강, PPSh-41, T-34를 쓰는 끝이 없이 밀려오는 군대로 실현되었다.[9] 사실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소련의 발을 묶어두고 유럽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나치 독일한테는 이득이었다.[10] 거기다 영국은 이미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와 싸우고 있었고 여기서도 영국군 단독이 아니라 영연방군(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등)도 적지 않게 투입된 상황이었다.[11] 당시 영국이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이 미국 뿐이었다. 서유럽 본토는 독일에게 완전히 점령되었으며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 수상이었던 처칠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12] 그러나 독일은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은 1941년 4월에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는데, 이를 체결하기 전에 일본의 외무장관 마쓰오카 요스케가 베를린을 방문해 이를 알린 바 있지만 독일은 이에 대해 딱히 아무런 메시지를 주지 않았으며,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일본에게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일본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벌어지자 크게 당황했다. 기밀 유지를 명목으로 아무런 사전합의도 안 했고,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걸 막지도 않았는데 전쟁이 벌어지면 도와주겠지? 라는 식으로 상당히 엉성했던 외교관계였다. 그리고 일본은 그런 엉성한 동맹을 지킬만큼 신의있는 국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 일본 군부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에도 이 불가침조약을 깨지 않는다.[13]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주변인들이 상기시켜 줬지만 히틀러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자 좋다고 같이 선전포고를 했다.[14] 일제 스퇴베(Ilse Stöbe)라는 독일 외무부 직원은 소련 간첩으로 활동하면서 1940년 가을부터 독일이 1941년 5월에 침공할 것이라고 소련군 정보부인 GRU에 전달했다. 스퇴베는 1942년 독일의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5] 이 때문에 스탈린의 확증편향을 부채질한 골리코프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GRU 국장에서 해임된다. 하지만 골리코프는 보신의 달인으로, 정치장교 출신이었음에도 고급 정치장교는 거의 100% 숙청되어 처형되던 대숙청 기간도 무사히 넘기고 승진했을 정도로 정치적 처신을 잘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남았다. 독소전쟁 기간 동안 별 전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포로 심사 업무를 맡아서 부역자를 처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 측에 붙어서 1956년 주코프 국방장관 실각에도 관여하는 등 여러 가지로 정치군인의 행보를 보였고, 그 이후에도 영달을 누리다가 독소전쟁 당시 별다른 전공이 없음에도 1961년 소련 원수까지 올랐다. 다만 원수 진급 1년 후인 1962년 은퇴하게 된다.[16] 1940년 12월 이전에는 키릴 메레츠코프 대장, 이후에는 주코프 대장이 총참모장[17] 이렇게까지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려고 한 이유는 스탈린의 공업화, 군 현대화 정책이 빠르면 1942년, 늦어도 1943년 안에 끝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18] 중국중일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도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과 같은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이 상주해 있었고 트라우트만 공작이 결렬된 뒤에 독일은 이를 불러들였다. 당장은 중국이 어디의 일원이라고 하기보다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과의 독립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낫다.[19] 미국은 랜드리스를 발동한 상태이지만 아직까지의 국내 여론이 전쟁 참가를 지지하는 데까지 이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지원국으로 남아있을 뿐이다.[20] 이 시기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강철 조약과 독일과 일본의 방공협정으로 맺어진 관계에 불과하지만.[21] 1941년에는 보병대대 9개, 포병대대 4개의 편제로 13개 대대를 보유했으나 청색 작전 이후로는 보병대대 6개, 포병대대 3개로 줄어들어 2/3 수준으로 줄어들었다.[22] 이후 점차 줄어들어서 쿠르스크 전투 시점에서는 9,000명이 되었다.[23] 다만, 소련군의 편제가 독일군보다 한 단계 낮았다는 것은 좀 애매한데 개전 이후 새로 생기는 전차군단과 기계화군단의 경우 타국 기갑사단 규모이기 때문에 명백히 한 단계 낮은 제대가 맞다. 그러나 보병의 경우 그 정도라고 보기 힘들다. 당장 1943년이 되면 소련군 소총 사단은 9,000명이 정원이지만 독일 보병사단 역시 12,000명으로 줄었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다. 대신 화력의 차이가 매우 극심해서 독일 사단이 소련 군단급의 화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포가 훨씬 많은데 왜 화력의 차이가 발생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교리의 차이, 중장비 부족, 숙련도 부족, 정찰의 한계 등등으로 화력의 효율이 독일군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24]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베저위붕 작전, 영국 본토 항공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침공 등 숱한 실전을 겪은 독일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엄청난 강군이었다.[25] 오히려 우세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KV-1T-34는 초기에 독일군의 3호 전차를 대학살하면서 독일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26] 위에서도 적혀 있지만 히틀러에겐 소련 침공은 식량과 자원확보가 가장 큰 이유였고 정치적 문제는 그 다음 순위였다.[27] 독일어로 카일은 쐐기, 케셀은 솥이라는 의미. 즉 쐐기와 솥[28] 스페인의 산악 지형에서 전차는 무용지물이었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의 보고, 기갑을 중요시했던 투하쳅스키의 숙청으로 이렇게 멍청한 병크를 저질렀다.[29] 저명한 항공공학자였던 폴리카프포프, 투폴레프, 먀시쇼프, 코롤료프 등은 수용소나 감방에서 몇년 복역을 했다.[30] 당시 학문적 영역에서의 항공공학은 독일이 가장 앞서나가고 있었지만, 생산공학은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미국이 앞서나갔다.[31] 냉전 당시 독소전 초반 소련군 참패의 원흉으로 간주되던 보로실로프는 러시아의 자료가 풀리면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그는 야전지휘관으로서는 무능했고, 이는 겨울전쟁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여실히 드러냈지만,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군과 정치권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면서, 나름 붉은 군대의 기계화를 소련의 경제가 감당하는 내에서 착실히 이끌었다. 보로실로프는 기계화를 주창한 투하쳅스키와 앙숙이었고, 투하쳅스키를 숙청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의 기계화가 필요하다는 전제는 공감하고 있었고, 소련의 경제가 감당하는 내에서 착실히 기계화를 이끌었다. 그리하여 BT 시리즈나 T-34, KV 시리즈 모두 그가 국방장관 재임시에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32]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던 장성들은 있었으나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 성격을 띠었던 데다가 산악 지형에서 치러진 보병간의 회전이었던 만큼 여기서 쌓은 군사 지식, 병법이 대평원이었던 소련에 적용될 수 없었다. 독일군의 원수-상급대장들이 제1차 세계 대전 시 대위급 이상이었기 때문에 풍부한 지휘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대조된다.[33] 4,000만 명 이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34] 헨리 키신저는 저서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는 모두 중대한 판단 실수를 저질렀으나 스탈린은 그것을 만회할 능력이 있었고 히틀러는 아니었다.'" 라고 평했다.[35] 흐루쇼프는 우상과 신격화에 반대하며 스탈린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스탈린을 비난한 것이다. 이건 사학적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고 정치적 공격이다.[36] 크게 보면 첫째는 유능한 인력들을 숙청하여 군대의 질을 저하시킨 것, 둘째는 독일의 침공과 관련된 정보를 받음에도 이를 무시한 것이다.[37] 그걸 하려던 히틀러는 결국 독일을 파국으로 이끌게 된다.[38] 참고로 전쟁 전에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인 프리드리히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 백작은 독일의 소련 침공을 의심해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인 블라디미르 데카조노프에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의심을 귀띔해줬는데 데카조노프 대사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려 한다는 주장은 영국의 거짓 선전에 불과하다."라며 일축한 일도 있었을 정도로 소련 정계는 독일의 침공을 예상조차 안하고 있었다.[39] 헝가리의 독소전쟁 참전은 좀 복잡한 내면이 있는데. 헝가리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 1차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처럼 참전파와 중립파가 싸우고 있는 상태였다. 참전파는 독일 편에 참전해 승리의 과실을 얻고 향후 생길 트란실바니아 문제에서 독일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립파는 소련을 침공할 명분이 없다고(독일과 헝가리간 추축조약은 조약국이 타국으로부터 침공을 당할 경우에만 도울 의무가 있었다) 주장하며 싸우고 있는 상태였던지라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1941년 6월 26일 신원 미상의 폭격기 3대가 헝가리의 도시인 커셔(Kassa, 현 슬로바키아 코시체)를 폭격했고, 이 폭격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군 수사관들이 사용된 폭탄이 소련제라고 주장했다(그 외에 폭격기 3대에 소련 공군 마크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마크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따라 커셔 폭격의 주범이 소련이라고 생각한 헝가리는 그 다음날인 6월 27일, 라즐로 바르도시 총리가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에서 대소선전포고를 함에 따라 독소전쟁에 참전하게 된다.[40] 다만 아직까지 커셔 폭격의 주범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주범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소련의 의도적인 폭격이라는 주장부터, 또는 소련 공군이 슬로바키아를 폭격하려다 실수로 헝가리를 폭격했다는 주장, 독일이 헝가리를 독소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는 주장, 또는 독소전쟁 참전을 위한 헝가리의 자작극이라는 주장, 아님 루마니아 왕국이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공격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41] 이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는 절대권력자가 등장하여 모든 것을 일원화된 체계 하에 통제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스탈린의 부재가 더 심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당시 소련에는 스탈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비등비등한 약자끼리 하는 주도권 싸움이 소련을 붕괴시킬 가능성도 있었다.[42] 당시 스탈린은 당 총간사 직위 외에는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43] 전쟁 초에 독일은 소련군이 180여 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추정했고, 작전 초에 이 병력들이 모두 궤멸당하면서 독일군은 소련군이 완전히 소멸됐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독일군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소련군 360여 개 사단과 마주쳐야 했다.[44] 당시 소련과 일본은 소련이 일본을 실컷 두들겨팬 뒤 서로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고 애초에 독일 측은 일본에 바르바로사 작전을 알리지조차 않았다. 단지 독일 군부 혼자서"우리가 공격하면 일본군도 같이 가세하겠지?"라고 안일하게 망상했을 뿐이다.[45] 소련은 모스크바가 넘어갈까 말까하는 이때도 일본을 염려하여 30여 개 사단은 극동에 남겨놨다.[46] 북부전선군과 북서전선군 지휘[47] 서부전선군과 예비전선군, 브랸스크 전선군 지휘[48] 남서전선군과 남부전선군 지휘[49] 이는 소련의 철도와 독일의 철도 규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소련은 광궤를 사용했고 독일은 표준궤를 썼기 때문.[50] 공병들을 투입하여 철도를 억지로 개궤시켰다.[51] 동유럽 나치들 어쩌고 저쩌고 하는 뉴스가 나오면 동유럽 전선에 나치 독일 편을 들어 싸웠던 사람들, 특히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주민들의 이야기가 꼭 나온다. 볼셰비키 군대에 대항한 독립 투사들로 평가받기도 하고, 인종청소(유대인) 독일 파시스트들의 앞잡이로 평가받기도 한다.[52] 독일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독일이 구상한 레벤스라움에서 그 반은 러시아의 유럽쪽 영토였다. 독일군은 현재 점령한 곳보다 더 많은 땅을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53] 프랑스와 같이 적국의 국토와 병력을 완전히 소모시키지 않아도 항복하게끔 해왔었다.[54] 게다가 이는 지원부대를 제외한 전투부대에서 난 피해인지라 더욱 뼈아픈 손실이었다. 1940년 시점에서 120개 사단 수준이었던 독일군이 소련침공을 위해 180개 사단으로 팽창하면서 이전에도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심각한 손실이었다.[55] 일반적인 착각과 달리 바르바로사 개전 직후부터는 소련군보다 독일군이 더 많았다.[56] 엄밀히 말하면 당시 나치 독일의 체급은 소련과 유사하였다고 평가받으나, 실질적인 생산 관리나 점령지 관리에서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의 행보로 인하여 그 역량에 비하여 한참 낮은 수준의 효율을 보였다. 독소전 당시 독일이 소련의 주요 시설들을 재빠르게 점령하였음에도 도리어 소련에 비해 역량이 감소한 어처구니없는 결과는 바로 이게 결정적인 요인이었다.[57] 많은 지역들은 소련 치하에서 고통받기도 했던 지역들이었다. 그러니 적절한 대민작전으로 현지 주민들의 환영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날려버린 셈. 그나마 나았던 곳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였는데, 이 나라들은 인종이 완전히 슬라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58] 전쟁이 장기화되고 더욱 치열해지면서 전투 부대에서도 인종청소부대들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광기를 드러냈다. 나중에 패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하는 소련군의 가혹한 부역자 색출과 보복까지 더해져 동부전선 기간 동안 동유럽은 생지옥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59] 겨우 중공업을 키워내어 어찌 군 장비들을 생산하고 드넓은 국토에서 징집한 수많은 인구를 모아 독일군을 막아낼 군대를 만들었지만 이를 유지시키고 사기를 올릴 수 있으며 전세를 역전시킬 절대적인 식량과 탄탄한 경공업에서 나오는 기본적 보급품은 매우 부족했다. 미국의 참전은 렌드리스로 일컬어지는 물자 보급으로 소련의 숨통을 트이게 만들어 주었고 특히 소련 공군을 무에서 유로 다시 건설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소련이 독일을 막아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반격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