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세이냐이 전투 Расейняйское сражение Panzerschlacht bei Raseiniai | |
독소전쟁 중 바르바로사 작전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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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41년 6월 23일 ~ 27일 | |
장소 | |
소련 리투아니아 SSR 라세이냐이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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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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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력 | |
전차 235~245대 | 전차 749대 |
피해 | |
전차 약 80대 | 전차 704대 |
결과 | |
나치 독일의 승리 | |
영향 | |
소련군이 리투아니아 SSR에서 패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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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소전쟁 중 발생한 라세이냐이 전투(Battle of Raseiniai)는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리투아니아의 네만(Nemunas) 강과 두비사(Dubysa) 강 근처, 라세이냐이(Raseiniai) 마을과 카우나스(Kaunas) 시 주변의 전략적 도하 지점을 확보하기 위해 벌어진 전투였다.[1] 독일군은 당시 기술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동력, 공중 지원, 전술적 유연성을 통해 승리를 거머쥐었다.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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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며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했다. 북부 집단군은 발트해 연안 국가들을 통해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진격했고 이 과정에서 제4기갑집단군이 리투아니아 SSR을 통과하며 소련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 소련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제3기계화군단과 제12기계화군단을 투입했다.
3. 전개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의 북부집단군은 동프로이센에서 레닌그라드로 진격을 시작했고 이들은 제18군, 제16군, 4기갑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에리히 회프너의 4기갑군이 라세이냐이로 진격하고 이를 18군 소속에서 가장 기동력이 우수한 부대였던 제3기계화군단이 지원했으며, 이를 전투 얼마전 발트 군사지부에서 북서부 전선군으로 개명한 표트르 쿠즈네초프가 이끄는 소련군(8군, 11군, 27군으로 이루어짐)이 저지하려 나서면서 전투가 벌어진다.소련군 좌익 측에서 독일 제7기갑사단은 6월 22일 신속하게 소련군 전선을 돌파하고 알리투스에서 소련군 제3기계화 군단 소속 제5전차사단을 공격했다. 소련 전차병들은 드비나 강 도하 지점을 몇 시간 동안 사수했으나 결국 철수했으며, 이로 인해 제5전차사단은 라세이냐이에서의 반격 작전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소련군 예고르 소량킨 소장이 지휘하는 제2 전차사단이 단독으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이 부대는 1년 전 여름 경전차여단을 기반으로 창설되었으며, 창설 직후 리투아니아 점령군으로 배치되어 대규모 부대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대부분 T-26 보병 지원 전차 및 BT 고속전차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소수의 KV-1 중전차와 KV-2 돌파 전차도 배치되어 있었다.
소량킨의 부대는 평시 주둔지인 케다이냐이에서 라세이냐이까지 약 100km를 이동해야 했으며, 낮 동안 독일 공군의 맹렬한 폭격을 받았고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독일군 프란츠 란트그라프 장군이 이끄는 제6기갑사단이 보급 대기 상태로 정지해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6월 23일 밤까지 라세이냐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독일의 제4기갑군이 네만강을 도하하고 리투아니아의 라세이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소련의 제8군과 제11군 소총사단과 마주치게 된다. 독일군의 제1전차사단, 제6전차사단, 제8전차사단은 전격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독일군을 막을 역량이 부족한 소련 소총사단은 항복하면서 라세이냐이로 향하는 길이 뻥 뚫리게 된다. 소련군의 T-26과 BT-7로 이루어진 제23전차사단과 제28전차사단은 무너진 측면 방어선을 지원했으나 독일의 대전차무기에 취약했던 경전차들은 적의 공격을 일시적으로 간신히 막는 것에 그쳤다. 독일군의 기갑사단들은 라세이냐이 마을을 이미 점령한 상태였다. 제6기갑사단의 정찰대대는 두비사 강의 교량을 점령하기 위해 진군했다.
예고르 솔랸킨 소장이 지휘하는 소련의 제2전차사단은 독일군이 두비사 강을 도하하는걸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에 두비사 강을 도하한 독일 정찰부대를 패퇴시키고 두비사 강 너머로 진군하여 독일군의 전차부대를 막기 시작했다. 제2전차사단은 대부분 KV-1과 KV-2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솔랸킨의 공격으로 독일군은 라세이냐이까지 밀려나지만 소련군의 전차 공세는 곧 기세가 꺾이게 된다. KV 전차는 기내 무선 통신의 부족으로 인하여 독일군에게 혼란과 엄청난 피해를 입혔지만, 전술이 분산된 탓에 결국 라세이냐이로 돌파해 독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실패했다. 한편, 독일군 제41기동군단(1st Panzer Division 및 36th Motorized Infantry Division)은 서서히 소련군 제2전차사단의 측면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제6기갑사단은 체코제 경전차를 동원해 소련군 중형전차, 중전차들과 무모한 전투를 벌였다.
분리된 전차 한대가 라세이냐이 북쪽 도로에서 중요한 방어위치를 차지했고 전차는 독일군의 트럭을 파괴하며 독일군의 절반에 달하는 보급로를 막는 바람에 독일군은 진군에 지장이 생긴다. 캄프그루페의 사령관인 에르하르트 라우스(Erhard Raus) 대장은 자신의 부대와 후방 사령부 사이에서 소련군이 어떤 위협적인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지 파악하려 했다. 그런데 마침 그의 부대에 연료와 탄약을 보급하러 오던 수송대가 해당 교차로를 지나려 했다. KV 전차는 다시 발포했고, 12대의 트럭이 불타면서 전멸했다. 라우스는 이 전차가 단 한 대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보급품이 절실했고, 부상자들은 점점 더 위태로운 상태였다. 저 전차를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그러나 KV 전차는 여전히 라세이냐이의 독일군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50mm 대전차포 포대를 배치하고 사격을 가했지만, 전차는 여전히 건재했다. 몇 분간의 침묵이 흐른 뒤, KV 전차의 포탑이 돌면서 대전차포 포대를 향해 응사했다. 포격은 정확히 명중했고, 독일군 포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KV 전차의 승무원들은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에서 몇 시간 동안 내부에 머물러야 했다. 50mm 포탄의 충격파로 인해 그들의 고막은 확실히 손상되었을 것이고, 머리도 심하게 흔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버텼다.
다음으로 독일군은 105mm 곡사포를 동원하여 공격을 시도했으나, 안전한 거리에서 명중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700m 거리에서 88mm 고사포를 배치하려 했으나, 이 움직임은 즉시 KV 전차 승무원들에게 발각되어 또다시 파괴되었다. 그날 밤, 독일군 병사들은 전차를 폭파하기 위해 몰래 접근했지만, KV 전차의 기관총 사격을 받고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설치한 폭약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다음 날, 독일군은 기갑차량을 이용해 KV 전차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동안, 대공포탄을 반쯤 숨긴 채 전차에 발사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결국 6발의 대공포탄이 KV 전차에 명중했고, 전차는 더이상의 반응이 없었다.
겁을 먹은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전차로 다가가 확인해 보니, 대구경 포탄이 장갑을 뚫은 상태였고 전차가 파괴되었다고 생각한 독일군은 방심하여 전차를 두드려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포탑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그때 한 병사가 갑자기 장갑이 뚫린 틈으로 수류탄을 던졌고 이 폭발로 마침내 KV 전차의 승무원들이 전원 전사했다.
한편, 제1기갑사단은 샤울라이 방면으로 진격하다가 소련군 제9대전차여단과 125보병사단의 방어진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강력한 76.2mm 대전차포의 집중 사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독일군은 우회 경로를 찾으려다 소련군 제2전차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는 위치에 정착했다. 제41기동군단이 소련군의 공격에 대응하는 동안, 다른 독일군 부대들은 소련군 제2전차사단의 후방을 차단하고 케다이냐이에 있던 후방 지원 부대를 섬멸했다. 소련군은 완전히 포위되었지만, 소련 보급부대가 기적적으로 독일군을 피해 포위망을 뚫고 보급품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소련군 전차연대는 상당한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보급으로 인해 남은 전차들에게 충분한 연료와 탄약을 제공할 수 있었으며, 이때 살아남은 전차들은 대부분 KV 계열이었다.
소련군 제2전차사단의 목표는 이제 독일군의 포위를 돌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탈출 시도는 실패했고, 솔랸킨 장군은 6월 26일 직접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그러나 수백 명의 병력이 도보로 탈출에 성공했고, 일부 전차들도 철수하는 데 성공 했다. 이들은 이후 9월에 레닌그라드에서 창설된 제124전차여단에 합류했다. 제2전차사단은 1941년 7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으며, 붉은 군대의 편제에서 제거된 첫 번째 사단 중 하나가 되었다.
4. 이후
리투아니아 SSR이 나치 독일의 손에 넘어가자 소련은 리가를 관통하는 다우가바 강 너머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강을 끼고 방어를 시도한다.5. 평가
소련군의 북서전선(Northwestern Front)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으며 참혹한 패배를 겪었다. 소련군의 전차는 대부분 파괴되어 향후 방어 능력을 크게 잃어버리고 발트 3국 지역을 나치 독일에게 손쉽게 내주고 만다. 소련군은 전투 초반부터 통신망이 마비되었고, 부대 간 협력이 원활하지 않았다. 이는 독일 공군의 선제적인 루프드바페 폭격과 독일 기갑부대의 신속한 돌파 작전 때문이었다.독일군이 주로 운용한 체코제 판처 35(t) 전차는 KV 전차의 두꺼운 장갑을 관통할 화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들의 37mm 대전차포 또한 효과가 없었다. 심지어 KV 전차들이 탄약이 떨어졌을 때도 독일군의 대전차포를 그대로 밟아 부수며 전진하기도 했다. 루프트바페의 폭격 지원이 불가능할 때는, 88mm 고사포(Anti-Aircraft Gun)와 KV 전차의 궤도에 부착한 점착 폭탄(Sticky Bomb)만이 이 거대한 전차들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독일은 이 전투로 독일군 전차의 성능을 의심하는 계기가 되었고 티거전차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함께 루프트바페 1의 공습이 소련의 통신망을 대거 파괴하면서 독일 지상군의 진격이 더욱 원활해졌다. 이는 소련군에게 정확한 정보 전달과 협력을 크게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소련군 전차부대는 독일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독일군의 정면에 돌격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