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3:49:21

휘르트겐 숲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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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르트겐 숲 전투
Battle of Hürtgen Forest
Schlacht im Hürtgenwald
제2차 세계 대전서부전선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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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44년 9월 14일 ~ 1945년 2월 10일
장소
나치 독일, 휘르트겐 숲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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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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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모델|]]
병력 12만 명 8만 명
피해규모 사상자 3만 3천 명 ~ 5만 5천 명 6만 8천 명
결과
미군의 피로스의 승리

1. 개요2. 배경3. 지형4. 투입 부대5. 전투
5.1. 1단계5.2. 2단계
6. 미디어7. 여담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9월 14일부터 1945년 2월 10일까지 벌어진 독일 국방군미군전투.

독일 땅에서 치른 전투 중 가장 긴 전투였고, 미군이 치른 전투 중 역사상 가장 긴 전투였다. 이 전투의 치열함 때문에 휘르트겐 숲은 마녀의 숲이란 악명이 붙는다.[1]

당시 미합중국 육군 지휘관들의 목적은 독일군아헨 전투(Battle of Aachen)에 지원군을 보내는 것을 저지하고 최전선을 우회공격하는 데 있었다. 아헨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요새화된 참호를 구축하고 전차 함정과 지뢰 지대를 설치하여 연합군과 참호전을 벌이고 있었다. 우선 미군의 첫 목표는 슈미트(Schmidt) 마을을 점령하고 몬샤우(Monschau)를 확보하여 루르 으로 진군하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소방수 발터 모델 육군 원수는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시도했다. 모델 장군은 전장의 상황을 완전히 보고받고 있었으며, 그에 맞추어 다소 강도는 약했지만 연합군의 진격을 지체시키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벨기에-독일 서부 지역은 지크프리트 선의 일부였으므로 그 근처의 방어시설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

미군은 총 12만명을 전투에 투입하고, 독일군은 8만 명을 투입했는데 미군은 비전투 손실을 포함해서 약 3만 3천에서 5만 5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독일군은 약 6만 8천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 지역은 아르덴 대공세를 펼칠 중요한 지점이었고, 근처에는 댐이 있어 댐을 방류시키면 하류 지역에서 도하를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완강히 저항했다. 미군 측에서 이를 깨달은 건 한참 후였다.

2. 배경

1944년 9월 중순, 연합군의 독일군 추격은 늘어나는 보급선과 독일군의 재집결로 인해 지체되고 있었다. 연합군의 다음 목표는 라인 강으로 전진해 도하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코트니 호지스(Courtney Hodges)가 지휘하는 제1군이 아헨 지대에서 심한 저항을 받았고 휘르트겐 숲을 기지로 사용해 적이 공격해 온다면 위협이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44년 10월 초에 미 제1보병사단이 도착하고 19군단과 7군단과 합류하여 아헨을 포위했다. 제1보병사단에서 아헨을 방어하는 독일군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으나 게르하르트 빌크 대령은 항복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저항하다가 10월 22일에서야 항복했다.

또한 루르 댐이 끼치는 위험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도 판단했다. 이곳이 독일군의 손에 있다면 댐에 저장된 물을 방류시켜 하류 지역에서 작전중인 연합군을 쓸어버릴 수도 있었다. 브래들리, 호지스, 콜린스 같은 미군 지휘관들의 판단으로는 루르 댐으로 전진하는 길은 숲을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늦은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 전투에 참여하여 중대를 지휘하고 나중에 미군 역사가가 된 찰스 B. 맥도널드(Charles B. MacDonald)는 "피했어야 하는 기본적으로 이득없고 오판한 전투"라고 기술했다.

3. 지형

휘르트겐 숲은 로어(Roer) 강과 아헨 지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짙은 침엽수림은 도로와 길, 방화수대가 드문드문 숲을 나누고 있어 차량의 통행이 제한되었다. 1944년 가을과 초겨울에는 날씨가 춥고 습기가 많아 공중 지원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많았다. 지상의 상황도 축축한 땅에서 눈 덮인 땅까지 다양했다.

독일군 수비대는 요새를 구축하고 눈 속에 지뢰 지대, 철조망, 부비트랩을 매설하여 방어 준비를 갖췄다. 또한 이 지역은 지크프리트 선의 일부였으므로 여러 벙커가 있었고 그러한 곳은 수비의 핵심이 되었다. 우거진 삼림으로 인해 침투와 측면 공격이 용이했고 최전선을 확립하거나 적을 완전히 소탕했다고 판단하는 게 때로는 어려웠다. 적은 길과 개활지는 독일군의 기관총, 박격포, 야포 부대가 미리 사거리를 조정하고 정확하게 공격을 가할 수 있게 했다. 악천후는 차치하더라도 빽빽한 숲과 거친 지형은 정확한 목표 식별이 어려워서 공중 지원을 어렵게 만들었다.

미군은 숫자 면에서 5:1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날씨와 지형으로 인해 이러한 이점이 상당수 상쇄되었다. 숲이라는 지형을 방어자 입장으로서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독일측 상대적으로 준비가 더 잘 되어있고 본격적인 독일 본토 방어전이었기에 독일군이 이곳이 뚫리면 우리 가족이 죽는다는 결의로 무장해서 더 유리했다. 여기에 미군 사단에서 사상자가 발생할수록 점차 경험이 부족한 신병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또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우거진 숲이 전차의 기동을 제약하고, 반면 판처파우스트를 장비한 대전차 부대는 쉽게 숨을 수 있었다. 즉석에서 만든 로켓 발사기를 쓰기도 했다. 전투 후반에는 전차의 경로를 뚫기 위해 숲을 폭파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길이 없었기 때문에 수송도 상당히 제한되었다. 심각한 때는 최전선 부대를 보충하거나 부상자를 이송하는 것조차도 매우 힘들었다. 독일군도 프랑스에서 심한 피해를 입었고 노인이나 어린아이, 복무 부적격자로 충원되었기에 이러한 문제는 같았다. 또한 연료와 차량 부족으로 인해 수송에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최전선 보급은 인력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지휘관과 병사들 대다수가 오랫동안 싸운 경험이 있었고 겨울과 숲이 우거진 지역에서 효율적으로 싸울 방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유리했다. 반면 미군은 훈련은 제대로 받은 반면에 경험이 부족했다.

키 큰 나무가 만드는 지붕도 방어측에 유리했다. 야포 사격시 탄이 공중에서 폭발하도록 조절해서 발포했는데, 탄이 폭발하면서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퍼져서 부상을 입힐 수 있었다. 독일군은 참호를 파고 있었으므로 포탄 파편과 쏟아지는 나무 조각을 덜 맞았지만, 개방된 지역에 있던 미군은 더 취약했다. 정반대로 미군의 박격포 부대는 개활지가 필요했지만, 그런 곳은 적었고 그나마 있는 개활지는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미군 보병 부대가 박격포 지원을 받는 건 때로는 불가능했다.

4. 투입 부대

휘르트겐 숲은 호지스의 제1군 관할에 속했다. 책임은 제5군단과 7군단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전투 초기에는 독일군 제275보병사단과 353보병사단이 방어를 하고 있었다. 5천 명(그중 대 1천 명)의 병력이었고 한스 슈미트(Hans Schmidt) 장군이 지휘를 하고 있었다. 준비는 잘 되어있었으나 병력이 부족했고, 또한 전차나 야포 병력도 없었다. 전투가 진행될수록 독일군 지원병력이 투입되었으나 미군 측에서는 그러한 병력이 약하고 곧 퇴각할 것이라 판단했다.
미군 독일군
제1보병사단
제4보병사단
제8보병사단
제9보병사단
제17공수사단
제28보병사단
제78보병사단
제82공수사단
제83보병사단
제104보병사단
제3기갑사단
제5기갑사단
제7기갑사단
제366전투비행대
제2레인저대대
제85보병사단
제89보병사단
제275보병사단
제344보병사단
제347보병사단
제353보병사단
제3공수사단
제3기갑척탄병사단
제116기갑사단
제12국민척탄병사단
제47국민척탄병사단
제246국민척탄병사단
제272국민척탄병사단
제326국민척탄병사단

5. 전투

5.1. 1단계

이 단계에서는 숲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슈미트 마을을 중심으로 전투가 치러졌다. 독일군의 보급선이 이 마을 양쪽에 걸쳐있었다. 교전은 1944년 9월 19일에[2] 미군 제9보병사단 60연대의 정찰병이 숲에 진입하여 개시되었으나 이들은 험한 지형과 저항에 직면하여 물러났다.

10월 5일에는 미군 제9보병사단이 47연대를 방어위치로 돌리고 60연대와 39연대를 동원하여 슈미트를 공격했다. 몬샤우-뒤렌(Düren)간의 길은 완전히 단절되었으나 두 연대 모두 독일군의 방어로 인해 지체되었고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60연대에 속한 제2대대는 전투 첫날 만에 병력이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39연대는 좁은 길목과 숲 속에서의 포탄 공중 폭발, 그리고 방화수림이 폐쇄되어 있거나 종사(Enfilade)를 당할 위치라는 문제가 있어 Weisser Weh 계곡에서 지체하고 있었다. 후방 이송과 재보급은 힘들거나 불가능했다.

미군은 지루하게 진격만 계속했다. 10월 16일까지 4,500명의 전사자가 나왔으나 전진한 거리는 3천 야드(2,700미터) 정도였다. 미군 제28보병사단이 제9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다.

28사단은 전차와 위즐(M29 Weasel) 장갑 궤도 수송차량, 공중 지원을 받았다. 3개 연대 중 하나는 북부 측면을 방어하는 데 투입되었고, 다른 하나는 Germeter를 공격하고, 마지막 하나는 주 목표인 슈미트를 점령하는 데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깊은 강 협곡을 따라 이어진 칼(Kall) 산길이 있었다. 보병은 전차의 지원을 받아야 했지만 전차가 활동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제28사단은 11월 2일에 공격을 개시했고, 독일군은 공격을 미리 예상하고 그에 대해 대비를 한 상태였다. 미군 109보병연대는 300야드(270미터)를 전진했으나 예측치 못한 지뢰지대에 발이 묶였고, 박격포와 기관총 공격을 받고 제압되었으며 반격을 받고 있었다. 109연대는 참호를 파고 손실을 견뎌내면서 이틀 후 1마일 (1.6km)를 전진했다. 112보병연대는 Vossenack 마을과 인접한 계곡을 공격하여 11월 2일 점령했다. 110보병연대는 Simonskall을 점령한 후 슈미트로 진격하기 위한 보급선을 유지하기 위해 칼 강 옆의 숲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다시 한 번 악천후와 잘 준비된 방어와 결연한 방어자들, 험한 지형으로 매우 어려웠다. 기상으로 인해 11월 5일까지는 전술 공중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112연대가 3일에 슈미트를 점령하여 몬샤우로 가는 독일군 보급선을 끊었으나, 칼 산길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보급과 부상자 후송이나 충원이 불가능했다. 독일군 제116기갑사단과 제89사단의 보병이 강력한 반격을 가해 미군을 몰아냈고, 미군은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틀간 112연대는 슈미트 외곽에서 위치를 유지해야만 했다.

11월 6일에는 미군 제4사단에서 제12보병연대가 파견되어 28사단을 증원했다.

칼 다리를 건너 제28보병사단의 병력이 슈미트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 11월 초순부터 전진하고 있었다. 며칠 후 치른 소위 Allerseelenschlacht(모든 영혼의 전투)에서 미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Vossenack으로 퇴각하기 위해 미군이 이 다리를 이용하려고 했지만, 이미 칼 계곡의 상당수를 독일군이 가로막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독일군 연대 의무관인 Guenther Stuettgen 대위가 양쪽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11월 7일부터 12일까지 미군과 비공식적인 휴전협정을 체결했고, 실제로 이 때 많은 미군 부상병들이 독일군 의무병 덕에 목숨을 건졌다.

Vossenack에서는 제112보병연대 소속의 제2대대가 지속적인 포격으로 와해되었고 독일군 공격을 피했다. 다행히도 전차와 M10 울버린 대전차자주포로 구성된 미군 전차 소대 2부대가 천우신조로 도착하였고, 제2대대가 이를 지원하고 제146공병연대 소속 두개 중대가 보병의 역할을 하여 미군은 위치를 고수하고 10일까지 슈미트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 싸웠다.

5.2. 2단계

2단계는 연합군이 루르 강으로 진격하는 여왕 작전(Operation Queen)의 일부였다. 미군 제4사단은 Schevenhütte과 휘르트겐 사이에 있는 북부 숲의 절반을 뚫고 휘르트겐을 확보하여 뒤렌 남쪽의 루르 강으로 진격하려 했다. 11월 10일부터는 미군 제7군단이 관할을 하게 되었고, 7군단 주력부대의 루르 강 진격 시도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제 제4사단은 휘르트겐 마을을 점령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지만, 제4사단 소속인 제12보병연대는 슈미트에서의 작전으로 이미 심각하게 손실을 입은 상태여서 사단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전력이 온전한 연대는 겨우 2개뿐이었다. 제7군단은 인원이 부족한 3개 연대로 구성된 독일군 제85군단에게 저지를 받았다. 휘르트겐 마을에는 제275보병사단이 병력 6,500명과 야포 150문을 가지고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참호를 견고하게 파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미군의 공격은 11월 16일부터 시작했다. 보병사단 2개가 평행 열로 공격을 개시했다. 뒤렌 방면의 북부 숲 가장자리에서 제8사단이, 남쪽에서는 22사단이 공격을 했는데 미군의 측면이 뚫려있었고, 이는 독일군의 측면공격을 불러왔다. Rother Weh 계곡을 공격한 제8보병연대는 강한 저항을 받고 극심한 손실을 입고서 물러나야만 했다. 제22연대는 까마귀 울타리(Rabenheck)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방화대를 따라서 중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을 받고 후퇴해야 했고, 3일 후에는 300명이 전사했다(부사관과 장교 포함). 공격 후 이틀이 지나자, 미군 측에서는 전차가 필요하다고 보고 공병대를 투입해 전차가 지날 길을 뚫었다. 그러나 통신과 재보급 문제가 생겨서 11월 19일에 공격을 중지하고 재보급과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이송시켰다. 한편, 독일군은 제344보병사단과 제353보병사단의 증원을 받았고, 저항은 더 극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으로 관할은 다시 제5군단으로 넘어왔다. 11월 21일에는 제8사단이 Weisser Weh 계곡을 공격하여 휘르트겐 방면으로 계속 진격했다. 그러나 제121보병사단은 즉시 강력한 방어에 부딪혔고 제10전차대대의 지원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동안 전진한 거리는 겨우 550m에 불과했다. 휘르트겐 마을은 29일이 되어서야 확보가 되었고 1.6km 북쪽에 있는 Kleinhau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

휘르트겐에서의 마지막 작전은 북동부인 Merode에서 있었다. 미군 2개 중대가 마을을 점령했지만 독일군의 반격으로 파괴되었다. 제8보병사단과 제28보병사단의 일부 병력은 브란덴베르크로 진격했다.

6. 미디어

이 전투 이후 벌어진, 2차대전 서부전선의 마지막 격전인 아르덴 대공세가 더 유명하기에 치열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를 다룬 영화는 거의 없다. 1998년작 영화 'When Trumpets Fade'가 이 전투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는데 암울한 당시 상황을 저예산으로 잘 그려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주인공 매닝의 비열한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한국에서는 엉뚱하게도 베트남전 영화 '햄버거 힐'의 후속작인 것처럼 '햄버거 힐 2'라는 제목을 달고 비디오로 출시되었으며, 플래툰 잡지에서도 한차례 소개하였다. 제목이 엉뚱하게 붙기는 했지만 유명하지 않은 영화가 유명한 영화의 후속작처럼 소개되는 경우는 흔하기도 하고, 둘 다 감독이 존 어빈으로 같기에 지어진 점도 있다. 두 영화에 무의미한 진격에 젊은 병사들이 희생된다는 공통적인 주제가 있다. 상당히 잔인한 묘사들도 많이 등장한다.[3] 또 독일군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다른 2차대전 영화와 달리 주로 미군이 등장하고 독일군은 거의 안나온다.

콜 오브 듀티 2에서 캠페인 미션중 하나로 등장한다. 총 2가지 미션이 연달아 여기서 진행되는데, 첫 미션은 고지점령, 두번째 미션은 수비가 주 목표다.

콜 오브 듀티: WWII에서도 캠페인 미션으로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총 2가지 미션이 연달아 진행되는데, 초반부의 오마하 해변 못지 않게 지옥도로 그려진다.

게임 워 썬더에서 맵으로 등장한다.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에서는 맵으로 등장한다.

서든 스트라이크 4에서 연합군 미션으로 등장하며, 내용인 즉슨 지크프리트 선을 돌파하여 독일군이 요새화시킨 댐을 미군 보병진과 소규모 기갑부대로 장악하는 내용이다. 이 미션에서 아군 병력 측에 처음 써볼 수 있는 연합군의 최고존엄 M26 퍼싱과 연합군 미션 4에서 아군 유닛으로 나온 M18 헬캣M36 잭슨이 주어진다.

혹성탈출 시리즈의 리부트 세계관에서 맥컬러 대령의 할아버지가 이 전투에 참전했다고 나온다.

Hell Let Loose에서 Hürtgen ForestHill 400 맵으로 다뤄진다.

7. 여담

남북 전쟁 이후 탈영죄로 처음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형이 집행된 미군 장병이 이때 나왔다. 에디 슬로빅(Eddie Slovik)이라는 육군 병사였다. 어린 시절부터 경범죄로 구치소를 들락날락거렸던 에디는 1943년에 복무 적합 판정을 받고 1944년 1월에 육군에 입대했다. 이후 같은 해 8월 프랑스에 파견되었으며, 미 육군 제28보병사단 제109보병연대 G중대의 보충병으로 배치됐다.

배치된 뒤, 중대장에게 '너무 겁이 나서' 소총수로 근무를 못 하겠으니 후방으로 빼달라는 편지를 썼으나 중대장은 당연히 거부했다. 결국 탈영을 했다가 자수하여 군법회의에 넘겨져[4] 12월 23일자로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육군 원수의 사형 집행 명령 확신서가 날아왔다. 원래 군법상으로 단순 탈영은 사형이 될 수 없지만 당시 프랑스에 주둔하던 미군들의 탈영 문제가 심각해졌고 아르덴 대공세 때문에 군의 기강을 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본보기로 사형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형은 1945년 1월 31일자로 집행되었으며, 유해는 대전 중 유럽 전선에서 강간이나 살인죄로 처형된 다른 미군들의 시신과 함께 우아즈-엔(Oise-Aisne)의 미군 묘지 옆 'E구역'[5]의 65번 무덤에 묻혔다가 나중에 고향에 있는 아내 곁으로 이장되었다.


[1] 기사 참고. 9번째 문단 마지막 두 줄에 spooky witches' lair라는 구절이 있다.[2] 9월 19일은 아직 마켓 가든 작전이 한창 진행중이었고, 위에 표에 기재되어있는 제82공수사단은 아직 나이메겐(Nijmegen)에서 독일군과 한창 박 터지게 싸우는 중이었다. 물론 작전대로라면 이미 아른험(Arnhem)까지 거의 도착해야 했을 시점이었지만, 각종 삽질과 독일군의 저항으로 30군단은 이제 겨우 제82공수사단과 합류하며 중간 지점인 그레이브(Grave)의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3] 화염방사기로 무장한 미군 신병이 도망가자 미군이 사살하거나 포탄에 갈기갈기 찢겨나가거나 정신붕괴된 미군 장교가 보고를 강요하는 장군을 군번줄 뭉치로 때리는등 상당히 현실적이다.[4] 영창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번 설득이 있었고, 다른 부대로 보내주겠다는 제의도 있었으나 본인이 모두 거부했다.[5] 우아즈-엔 미군 묘지의 '공식적인' 구역은 A~D 네 개 구역이고, 소위 'E구역'이라고 불리는 범죄자 묘역은 묘지에서 동떨어진 숲속에 처박히듯 조성되어 있다. 미군의 흑역사인 만큼 모든 매장자의 인적 사항은 기입되어 있지 않고, 그냥 번호가 새겨진 자그마한 표석이 지표면에 드러나 있는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