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Edward Donald Slovik.1920년 2월 18일 ~ 1945년 1월 31일 (향년 24세)
미합중국 육군의 탈영병.
남북 전쟁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탈영죄만으로 총살형에 처해진 유일한 인물이다. 이후에도 처형된 탈영 미군은 여럿 나왔지만 대부분 탈영과 더불어 살인 등 중범죄를 저질러 그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았고 탈영만으로 처형된 사례는 하나도 없다. 전시에 탈영병이 총살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생각이 들겠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탈영자는 2만 1천 명에 이르고 그 중 탈영죄만으로 총살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49명이다. 게다가 실제로 집행된 건 에디 슬로빅이 유일하다.[1]
2. 생애
1920년 미시간의 디트로이트에서 폴란드계 미국인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손버릇이 나빠 공장 등에서 물건을 훔쳤고 교도소에 두 번이나 가기도 했다. 1942년에 가석방된 뒤 앤투어넷 위즈니스키(Antoinette Wisniewski, 1915년 ~ 1979년)와 만나 결혼하였다. 에디 슬로빅은 성격에 문제가 많은 데다가 전과자이기마저 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여자와는 결혼할 수 없었는데 아내인 앤투어넷 위즈니스키는 소아마비 환자라 한쪽 다리의 길이가 3cm 짧았고 게다가 간질병까지 앓고 있었다.#앤투어넷과 에디 |
텍사스에서 훈련을 받은 뒤 프랑스 전선에 배치됐지만 동료와 숨는 등 적 앞에서 도망쳤다. 부대에서 낙오하여 후방에 있는 캐나다군 육군 부대에서 6주를 보내기도 했고 이 일로 기소되었다. 슬로빅은 군사 법원에서 자신이 전선에는 맞지 않는다며 소총수로 배치되면 도망갈 거라고 대대장인 로스 헨베스트(Ross Henbest) 보병 중령에게 말했다. 군 변호사인 헨리 서머는 부대로 일단 복귀하면 기소가 연기될 것이고 다른 부대로 전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지만 슬로빅은 거부하고 군사 법원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밝혔다. 아마 자기가 탈영만 했으니 사형은 당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미군에서 탈영죄로 처형당한 범죄자가 여럿 있긴 했지만 순수 탈영만으로는 사형이 집행된 사례가 이전이건 이후건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제 무덤 파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당시 그가 소속됐던 육군 제28보병사단은 휘르트겐 숲 전투(Hürtgenwald)를 비롯해 독일 국방군 육군과의 최전선에서 계속 사상자를 내고 있었고 워낙 전투가 처절한 나머지 정신줄을 놔 버린 군인들도 수두룩할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사단에선 군기를 확실히 세우고 잠재적 탈영병들에게 탈영한다고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1944년 11월 11일에 군법 회의가 열렸고 군 검찰 측인 존 그린(John Green) 육군 대위는 그가 전선에 배치될 경우 탈영하겠다고 증언했다고 증인을 내보냈고 변호인 측인 에드워드 우즈(Edward Woods) 대위는 슬로빅이 증언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9명의 장교로 된 배심원은 유죄로 판단했고 적전탈영죄로 사형이 선고됐다. 사단장인 노먼 코타(Norman Cota) 육군 소장이 재가했다.
1944년 12월 9일 슬로빅은 연합군 최고 사령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육군 원수에게 감형 청원을 보냈지만 12월 23일 기각되었다. 결국 본보기로 이듬해인 1945년 1월 31일 오전 10시 4분에 프랑스 알자스의 광산촌인 생트마리오미느(Sainte-Marie-aux-Mines)의 사형장에서 육군 군사경찰들에게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이후 우아즈-엔(Oise-Aisne)의 미군 묘지 중 범죄로 인해 사형이 집행된 이들을 매장한 E 묘역에 묻혔으나 1987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중범죄자가 아닌 일반 탈영병임을 감안해 그의 시신을 미국으로 옮기는 것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허가하여 미국으로 와 1979년에 사망한 아내의 무덤에 같이 묻혔다. E 묘역에 안장된 이들은 원칙적으로 이장이 불허되나 슬로빅 이병에 이어 1990년에 27번 묘의 알렉스 F. 미란다(Alex F. Miranda) 육군 이병[3]이 미국 본토로 이장됨에 따라 현재 총 94명이 안장돼 있다.
3. 유사 사건
미군의 군법재판상 형량, 특히 사형은 1984년에 레이건 대통령이 사형 제도를 부활시키기 전까지 생각보다 일관성이 없어서 소위 시범 케이스로 처형되는 일이 굉장히 많았다.미군 역사상 마지막 처형은 1961년 육군 병사였던 존 A. 베넷에게 집행한 교수형인데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11세의 소녀를 강간했지만 살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본보기로 걸려 처형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살인죄나 간첩죄가 아닌 범죄로 사형이 집행된 케이스는 그가 유일하다.
4. 기타
- 1974년 그의 이야기가 TV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젊은 나이의 마틴 신이 슬로빅 일병으로 열연하여 에미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난 탈영해서 총살 당하는 게 아니다. 어렸을 때 빵을 훔쳐 먹어서 총살당하는 것이다."
- 슬로빅과 슬로빅의 사형 집행을 승인한 노먼 코타 사단장은 둘 다 동유럽계 미국인이었다. 슬로빅은 폴란드계, 코타는 크로아티아계이다.
- 슬로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 앤투어넷 위즈니스키는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죽을 때까지 대통령이 7명이나 거쳐가는 동안 그 대통령들에게 남편의 사면을 요청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남편 총살 후 평생을 홀로 살았다. 참고로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이 징병당해 부부생활을 한 기간은 단 2년에 불과했다.
[1] 정확히는 군사재판을 거쳐 정식으로 총살형이 집행된 사례가 없었을 뿐 대부분의 탈영은 현장에서 즉결 처분 후 전사 처리하는 것으로 덮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미군 역시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기 위해 증언에 따르면 전장에서 도주하던 병사를 상관이 재량으로 즉결처분하고 전사자로 보고했다는 증언이 있으며 이는 6.25 전쟁에서의 대한민국 국군도 마찬가지였고 이로 인해 상관살해도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2] 물론 이 시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혹한 징병과 국가적 학살이 난무했던 시기였기에 그냥 운이 조금만 나빠도 다 죽어야만 했다. 후술하겠지만 애초에 에디가 배치된 전장도 생존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던 치열한 곳이었다. 만약 사형을 안 당했더라도 어차피 전장에서 죽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3] 술에 취해서 부사관을 총으로 살해한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장된 이유는 유족들이 이 사건이 책임능력이 없는 만취 상태에서 벌어진 과실치사임을 주장하며 재심을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