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6:23:15

드네프르 강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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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 강 전투
러시아어: Битва за Днепр
독일어: Schlacht am Dnepr
영어: Battle of the Dnieper
제2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의 일부
파일:Map_of_dnieper_battle.jpg
▲ 드네프르 강으로 진격하는 소련군
날짜
1943년 8월 26일 ~ 12월 23일
장소
소련 드네프르 강 동안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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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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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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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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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주코프|]]
(총군부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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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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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참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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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로코솝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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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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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바투틴|]]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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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코네프|]]
(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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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온 말리놉스키|
로디온 말리놉스키
]]
(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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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톨부힌|]]
(제4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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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폰 만슈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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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집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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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집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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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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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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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항공함대 사령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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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호트|]]
(제4기갑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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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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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폰 마켄젠|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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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갑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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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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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오토 뵐러
(제8군 사령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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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카를아돌프 훌리트
(제6군 사령관)
결과
소련드네프르 강 동안 탈환
영향
독일 국방군 남부 전선 붕괴
소련의 드네프르 강 서안 교두보 확보
크림반도에 독일 제17군 고립
전력 병력 2,650,000명
전차/자주포 2,400대
포 51,200문
항공기 2,850기
병력 1,250,000명
전차/자주포 2,100대
포 12,000문
항공기 2,000기
피해 규모 제2차 돈바스 공세
* 전사/실종 66,166명
* 부상 207,356명
* 전차/자주포 886대
* 야포 814문
* 항공기 327기
드네프르 강 전투[2]
* 전사/실종 309,092명
* 부상 991,294명
* 전차/자주포 4,050대
* 야포 4,145문
* 항공기 824기
제2차 돈바스 공세
* 전사 4,721명
* 실종/포로 2,985명
* 부상 21,234명


드네프르 강 전투
* 전사 37,897명
* 실종/포로 28,585명
* 부상 168,804명

1. 개요2. 1943년 가을의 남부 전선
2.1. 소련군2.2. 독일군
3. 전투 서열
3.1. 소련군
3.1.1. 9월 1일3.1.2. 12월 1일
3.2. 독일군
3.2.1. 9월 5일3.2.2. 12월 3일
4.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5. 제2차 돈바스 공세6. 체르니고프-폴타바 공세 : 무너진 전선
6.1. 중부 전선군의 공세6.2. 보로네시 전선군의 공세6.3. 스텝 전선군의 공세
7. 드네프르 강으로의 경주 : 누가 먼저 강에 도착할 것인가
7.1. 최초의 교두보, 카네프7.2. 부크린 상공의 소련 공수부대7.3. 류테즈 : 동부전선의 향방을 바꿔버린 작은 마을
8. 쿠반 교두보 포기9. 드네프르 강 하류 : 자원 지대의 상실
9.1. 멜리토폴 공세 : 17군의 크림반도 고립9.2. 자포로제 공세 : 댐을 지켜라!9.3. 드네프로페트롭스크크리보이로그
10. 제2차 키예프 전투
10.1. 소련군의 키예프 탈환10.2. 독일군의 반격
11. 결과

[clearfix]

1. 개요

드네프르 강 전투와 이어진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는 시기상으로 쿠르스크 전투와 바그라티온 사이에 있는 전역이다. 이 두 전역은 1943년 8월 부터 1944년 5월까지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독일은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를 차례로 빼앗기며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밀려나게 된다.

2. 1943년 가을의 남부 전선

2.1. 소련군

쿠르스크 전투에서 적의 공격을 막는데 성공한 소련군은 전략 예비대로 남겨둔 스텝 전선군의 병력들과 스타브카 직속 예비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벌이게 된다. 쿠르스크 북쪽 쿠투조프 작전과 남쪽 루미안체프 작전을 시작으로 스몰렌스크 방면 수보로프 작전[3]과 미우스 강 방면 미우스 공세[4]와 이지움-바르벤코보 공세[5]를 펼쳤으며 이는 드네프르 강 전면에 대한 체르니코프-폴타바 공세로 이어진다.

2.2. 독일군

성채 작전이 실패하면서 독일은 전 전선에서 적의 공세를 막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시칠리아에 서방 연합국이 상륙하면서 양면 전선이 열리게 되었고 서부 전구와 발칸 반도에도 계속 증원 요구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오룔 방면에서 후퇴하여 예비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 제2기갑군은 유고슬라비아로, 제1SS기갑사단 "LSSAH"는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3. 전투 서열

3.1. 소련군[6][7]

3.1.1. 9월 1일

  • 중부 전선군 ( 사령관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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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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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독일군

3.2.1.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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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부 집단군 ( 사령관 :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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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12월 3일

  • 남부 집단군 ( 사령관 :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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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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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루미안체프 작전과 제4차 하르코프 공방전.jpg
▲ 하리코프를 포위하는 보로네시 전선군[20]

루미안체프 작전(벨고로드-하리코프 공세)으로 쿠르스크 남쪽 방면에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미우스 강 방면 6군에 가해지는 압력은 제2SS기갑군단의 분전으로 간신히 막아냈지만 곧바로 보로네시 전선군이 벨고로드 방면으로 5개 군을 투입했다. 여기에는 1전차군과 5근위전차군, 5근위군, 6근위군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소련측 기록으로는 포와 전차 전력이 독일의 6배였고 이는 1km당 65대의 전차와 200문의 화포를 투입한 상황이었다. 벨고로드-하리코프 공세 기간, 소련군은 보로네시 전선군 739,000명, 스텝 전선군 464,000명을 합쳐 1,144,000명을 동원했으며 독일군은 350,000명을 보유중이었다.

8월 5일, 소련군이 벨고로드를 탈환했고 독일 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 사이에는 65km에 이르는 공백이 생겨버렸다. 일단 돌파에 성공하자 바투틴은 곧바로 두 개의 전차군을 투입했고 소련군은 하리코프를 우회하여 폴타바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히틀러는 하리코프를 사수하라고 11군단을 도시로 밀어넣고 있었다. 호트는 이 틈을 막지 못하면 전선에 재앙이 닥칠 것을 파악하고 4기갑군을 남서쪽으로 후퇴시키는데 소련군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아크티르카(Akhtyrka)로 이동하던 19기갑사단장 구스타프 슈미트 중장은 전사한다.[21] 19기갑사단을 비롯해 5개 사단이 포위망에 갇혀 버렸지만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일단 48기갑군단과 몇몇 사단들이 수미와 아크티르카 사이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코네프의 스텝 전선군이 하리코프로 밀고 들어왔다. 라우스의 11군단은 아군이 후퇴하여 전선을 구축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야 했다. 독일군 입장에선 다행히도 라우스는 증원받은 6기갑사단을 활용해 귀중한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그 사이 미우스 강에서 3기갑사단과 제5SS기갑척탄병 사단 "비킹"이 도착했다. 소련군이 스탈린의 재촉으로 방어선에 무리하게 기갑전력을 밀어넣는 바람에[22] 독일군은 적 전차군단을 분쇄하고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련군이 8군[23]과 1기갑군 사이를 단절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미 4기갑군과 8군 사이도 중간중간 뚫려 있는 상태에서 8군과 1기갑군마저 단절되면 독일군은 드네프로 강으로 밀려드는 적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만슈타인은 자신의 직권으로 8월 22일, 하리코프에서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8월 23일, 소련군은 하리코프를 탈환했다. 소련군은 공세 기간 중 전사 및 실종 71,611명, 부상 183,955명을 합쳐 255,566명의 손실이 발행했다. 하리코프 전선이 잠깐 안정된 것처럼 보이자 이번엔 다시 미우스 강 방면의 소련군이 독일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5. 제2차 돈바스 공세

파일:돈바스 공세.png
▲ 미우스 강 방면에서 공세를 가하는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

8월 13일 남서 전선군 우익이 스텝전선군과 함께 진격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소련의 제병협동이 완전하지 않아 보병의 초기 돌파는 쉽지 않았고 본격적인 돌파를 위해선 전차군이나 전차군단의 선도 제대가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가지고 있었고 돌파가 실패하더라도 적의 예비전력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24]

공세 개시 시점에서 두 전선군은 남서 전선군의 564,200명, 남부 전선군의 446,700명을 합쳐 1,050,000명의 군인과 1,250대의 전차 및 자주포, 21,000문의 화포와 1,400대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다. 이에 반해 독일은 400,000명의 군인과 매우 빈약한 전차 및 항공기를 보유 중이었다.[25] 8월 16일, 말리놉스키의 남서 전선군이 1기갑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미우스 강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는 8월 18일, 톨부힌의 남부 전선군이 개시했다. 7월 공세는 독일의 기갑 예비대 덕분에 방어에 성공했지만 이번엔 예비대가 전무했다.

8월 20일, 전선에 20km정도의 구멍이 뚫렸다. 처음엔 작은 틈새였지만 예비대가 없는 훌리트는 이 틈새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소련군은 물밀듯이 밀려왔다. 8월 24일, 소련군은 독일 29군단의 후방을 차단했다. 타간록에 갇혀버린 29군단을 구원하기 위해 크림반도에서 13기갑사단을 끌고 왔고 루델을 비롯한 공군 조종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간신히 포위망에 구멍을 뚫는데 성공했고 그 좁은 통로로 간신히 군단을 빼낼 수 있었다. 만슈타인은 즉각 히틀러에게 방어선을 60km정도 뒤인 스탈리노까지 물리겠다고 선언했다. 만슈타인과 클루게는 히틀러에게 동부전선에서의 작전에 대한 간섭을 중단하라고 했지만 히틀러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신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은 스몰렌스크를 포기하고 데스나 강 서안으로, 6군은 스탈리노와 칼미우스 강의 "거북이 방어선"(Tortoise Line)으로, 17군은 쿠반반도에서 크림반도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26]
파일:드네프르 강으로 밀려드는 소련군.jpg
▲ 드네프르 강으로 밀려오는 소련군

9월 8일, 소련군은 스탈리노를 탈환했고 10일에는 마리우폴이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돌출부에서 퇴각하는 것을 거부하는 히틀러때문에 독일군은 예비대를 확보할 수가 없었고 결국 9월 14일, 만슈타인과 야전 사령부에서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바투틴의 보로네시 전선군이 집단군 북쪽을 돌파해 키예프로 남서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좀 더 북쪽에서는 중부 전선군이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을 연결하던 2군을 몰아내며 집단군 사이의 연결이 끊어져 버렸고 전선은 완전히 붕괴해버렸다. 9월 15일, 히틀러는 드네프르 강 동안에 있는 남부집단군 전체를 드네프르 강 서안으로 후퇴시키는 것을 허가한다.

9월 16일, 분단된 전선을 효과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6군은 A집단군 소속으로 변경된다. 이후, 돈바스 공세는 9월 22일, 소련군이 자포로제드네프로페트롭스크에 도달하여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며 종료된다. 공세 기간 중 소련군은 전사 및 실종 66,166명, 부상 207,356명을 합쳐 273,522명의 손실이 발생했다.

6. 체르니고프-폴타바 공세 : 무너진 전선

파일:아크티르카 전선.jpg
▲ 드네프르 강으로 밀려나는 독일군의 전선
돈바스 공세가 한창 진행되던 8월 26일, 드네프르 강을 향한 소련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소련은 돈바스 공세와 체르니코프-폴타바 공세에서 5개 전선군 휘하 36개 제병협동군, 4개 전차군, 5개 항공군을 동원했으며 체르니고프-폴타바 공세의 주력인 3개 전선군은 1,581,300명을 보유한데 비해 공세 전면의 독일군은 350,000명을 보유 중이었다. 소련군은 포 30,300 문, 전차와 자주포 1,200대, 로켓 발사기 690문, 항공기 1,450기를 보유 중이었고[27] 독일은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이 가지고 있는 예비병력과 타 전선에서 끌어모은 병력을 포함하여 총 700,000명의 병력과 전차 및 자주포 1,200대, 항공기 900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세 시작 시점에서 소련군은 병력 2.1 배, 항공기 1.4 배, 화포는 4 배, 전차 및 자주포는 비슷한 수준이었다.[28][29] 어느 곳에서도 공세가 쉽지 않았고 적의 완강한 저항을 만났지만 소련은 막강한 전력을 바탕으로 적을 몰아내게 된다.체르니코프-폴타바 공세 작전은 3개의 공세로 계획되었으며 소련군은 적이 드네프르 강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을 막기 위해 3개 전선군에서 동시에 공세를 실시했다. 공세 결과, 소련군은 류테즈[30]에서 자포로제까지의 구역에서 드네프르 강에 도달했으며 그 대가로 107,645명의 전사/실종, 343,821명의 부상자와 함께 1,140대의 전차/자주포와 916문의 야포, 269기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6.1. 중부 전선군의 공세

제일 북쪽 로코솝스키의 중부 전선군은 중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을 연결하는 독일 제2군에 대해 체르니고프-프리퍄트 공세(Черниговско-Припятская операция)를 시작했으며 동원된 병력은 1개 전차군과 4개 제병협동군 휘하 35개 소총사단과 3개의 전차 군단, 1개 기계화 군단을 포함한 579,600명이었다. 로코솝스키는 북쪽부터 13군, 48군, 65군, 60군을 배치했고 후방에 70군[31]과 2전차군, 9전차군단을 보유중이었다. 공세 목표는 노브고로트세베르스키를 거쳐 드네프르 강 중류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공세 방면에는 중부 집단군의 제9군과 제2군이 있었으며 북쪽부터 제9군 우익의 제35군단[32], 제2군의 제20군단과 제13군단[33]이 배치되어 있었다.

8월 26일, 공세 첫 날부터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을 만났다. 27일 하루동안 소련군은 적의 반격을 12번이나 격퇴해야 했다. 같은 날, 제2전차군과 제65군은 간신히 셉스크를 탈환했으나 독일군은 2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사단을 투입해 셉스크 서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전선군 좌익에서의 공세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60군은 공세 시작 4일만에 60km나 진격하며 글루코프를 탈환하고 우크라이나에 진입했다. 이 지역은 양 측 모두 집단군, 전선군 사이의 연결점으로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지역이었다. 거의 100km에 달하는 이 구역은 독일측은 제13군단과 제7군단 좌익을 포함한 1.5개 군단이 담당하고 있었고[34] 소련측도 스타브카 예비인 제7근위기병군단 혼자 담당하고 있었다.[35]

그러자 로코솝스키는 주공을 이반 체르냐홉스키의 제60군 방향으로 바꾸었다. 이 지역에는 적의 방어선이 빈약하고 예비대가 없어 쉽게 밀어낼 수 있었다. 로코솝스키는 곧장 제13군과 제2전차군, 제4돌파포병군단 그리고 가용 항공기를 전부 제60군의 진격로에 투입했고 이는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제13군과 제60군을 선두로 9월 3일, 소련군은 셰임 강을 건넜고 곧이어 6일에 코노토프를 탈환하고 데스나 강도 통과했다. 15일이 되자 제60군은 네진에 도달했다. 이 시점에서 중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의 연결은 끊어져버렸고 남부 집단군 전체가 드네프르 강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공군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2개 보병사단과 3개 기갑사단을 투입했으나 이 정도로는 돌파구를 막을 수 없었다. 중부 전선군은 좌익에서의 성공으로 우익에서도 노브고로트세베르스키를 16일에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21일에 제13군은 체르니고프를 탈환하고 드네프르 강에 도달했다. 22일부터 제13군이 도하를 강행했고 23일에는 제60군과 제61군도 드네프르 강 서안에 교두보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도하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일단 교두보를 마련하면 독일군은 이를 몰아내기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다. 피해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으나 적이 강 건너에 방어선을 만드는 것에 대해선 문책하겠다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소련 사령관들은 피해는 신경쓰지 않고 강을 건널 생각만 하고 있었다. 9월 말까지 중부 전선군은 드네프르 강 너머 7개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북쪽의 제48군과 제65군도 고멜 서쪽에서소지 강너머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중부 전선군의 공세는 9월 28일, 진격 방향을 키예프에서 고멜로 바꾼 스탈린의 결정에 따라 30일에 마무리되었고 이후 드네프르 공세에는 큰 역할을 하지 않게 된다. 중부 전선군의 공세는 5개 전선군 중 제일 성공적이었음에도 크게 활용되지 못했으며 이후 로코솝스키는 스탈린의 결정이 큰 실수였고 이 결정이 아니었다면 9월 중에 키예프를 해방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실제로 9월 중순, 중부 전선군은 키예프 바로 북동쪽까지 진군한 상태였으며 독일군은 키예프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중부 전선군의 성공으로 소련군의 공세 방향이 남서쪽에서 서쪽으로 바뀌면서 이후 키예프는 보로네시 전선군이, 드네프르 강 하류는 스텝 전선군이 담당하게 된다.[36] 중부 전선군은 공세 중 전사/실종 33,523명과 부상 107,878명의 피해가 발생했고 2군은 전사/실종 4,501명과 부상 15,586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6.2. 보로네시 전선군의 공세

중부 전선군 좌익에서는 바투틴의 보로네시 전선군이 수미-프릴루키 공세(Сумско-Прилукская операция)를 시작했다. 보로네시 전선군은 8개 제병협동군과 1개 전차군 휘하 42개 소총사단, 5개 공수사단, 2개 기계화군단, 7개 전차군단, 1개 전차여단을 포함한 665,000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12,600문의 포, 전차와 자주포 493대, 항공기 520기를 보유중이었다. 보로네시 전선군의 공세는 수미에서 폴타바 북쪽의 4기갑군을 분쇄하고 공세 전면의 독일군은 병력 265,000 명, 전차 및 자주포 700 대, 포 2,725 문, 항공기 400기를 보유 중이었다. 계획은 중부전선군과 마찬가지로 8월 22일 하달됐고 사실상 벨고로드-하리코프에 대한 공세(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가 끝나자마자 연속된 공세를 개시했다. 바투틴은 북쪽부터 38군, 40군[37], 47군[38], 27군, 1전차군, 4근위군[39], 6근위군[40], 5근위군, 4근위전차군단을 배치했으며 후방에 52군을 보유중이었다.

8월 26일, 타 전선군과 함께 공세를 개시했으며 전선군 좌익의 1전차군과 3개 근위군이 주력으로 하리코프에서 남서쪽으로 폴타바와 크레멘츄크를 향해 진격하고 우익의 47군과 27군이 1개 전차군단과 1개 기계화군단을 증원받아 서쪽으로 조공을 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크티르카-폴타바를 잇는 축선에서 독일군이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3일만에 공세가 중단됐다. 진격이 생각보다 느린 상황에서 중부 전선군의 공세가 큰 성과를 거두자 9월 2일에 바투틴은 우익의 38군과 40군에게 공세 재개를 명령했고 5일, 소련군은 수미를 점령하고 프셀 강을 건넜다. 이에 스타브카는 지지부진한 전선군의 좌익 대신 우익을 주공으로 설정하고 스타브카 예비로 있던 3근위전차군과 남서 전선군의 1근위기병군단을 증원했다. 이제 보로네시 전선군의 목표는 키예프와 카네프 사이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폴타바는 스텝 전선군 담당이 되면서 5근위군이 스텝 전선군의 휘하로 이동했다. 52군은 체르카시 방면을 담당했다.

4기갑군이 키예프체르카시로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보로네시 전선군은 3근위 전차군을 선두로 38군과 40군은 엄청난 속도로 진군했다. 기갑 부대는 하루에 30km를 전진했으며 선도부대는 최대 50km나 진격했다. 16일에 3근위전차군은 롬니, 18일에 프릴루키를 탈환했다. 전선군 좌익의 4근위군과 6근위군은 여전히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4기갑군이 키예프와 카네프로 전면 철수를 결정하면서 진격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21일에 3근위전차군과 40군은 드네프르 강에 도달했고 곧바로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도하 장비도, 공병부대도 아직 도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련군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강을 건넜다. 24일에 드네프르 공수작전을 시작하면서 부크린에 공수부대들을 투입했고 26일에 38군은 키예프 북쪽에서 류테즈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같은 날, 키예프 동쪽의 마지막 독일군이 섬멸됐다. 이때부터 강 서안 교두보를 두고 엄청난 격전이 이어졌으며 30일에 전선군은 교두보를 확장시키는 새로운 공세를 위해 잠시 공세를 멈췄다. 공세 기간동안 보로네시 전선군의 손실은 전사/실종 46,293명, 부상 131,211명이었고 4기갑군의 손실은 2,360명의 전사/실종과 8,852명의 부상이었다.

6.3. 스텝 전선군의 공세

하리코프 점령을 마무리한 스텝 전선군도 보로네시 전선군 좌익에서 폴타바-크레멘추크 공세(Полтаво-Кременчугская операция.)를 개시했다. 시작 시점에서 스텝 전선군은 53군, 57군, 69군, 7근위군과 5근위전차군, 8항공군을 보유중이었다. 소련군의 1차 목표는 하리코프-드네프로페트롭스크 철도가 지나는 메레파였다. 그러나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26일에 공세를 시작해서 10일이 지난 9월 5일에야 메레파를 탈환할 수 있었다.

어쨌든 추가 진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소련군은 6일에 스텝 전선군으로 37군[41], 46군[42], 5근위군[43]을 증원했고 이제 스텝 전선군은 30개 소총사단, 2개 기계화 군단, 2개 전차 군단을 포함한 336,200명을 보유 중이었다. 코네프는 북쪽부터 53군, 69군, 5근위군, 7근위군, 37군, 57군, 46군을 배치했고 8군과 1기갑군은 이 앞에서 3개 기갑사단을 포함한 20개 사단을 보유중이었다. 8군은 스텝 전선군 전면에 북쪽부터 3기갑군단 일부, 11군단, 42군단을 배치한 상태였다. 작전이 진행되면서 소련군의 최우선 목표는 폴타바였으나 곧 적이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에 강 너머 크레멘추크와 드네프로페트롭스크로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라우스의 11군단과 브라이트의 3기갑군단을 소련군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전선에 돌파구가 뚫리자 포위되는 것을 피해 후퇴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폴타바에 가까워지자 독일군은 폴타바 근방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106보병사단과 다스 라이히를 투입해서 적을 막아섰다. 그러자 전선군의 우익에서 폴타바를 공략중이던 5근위군과 53군은 폴타바를 공격하면서 북쪽과 남쪽에서 폴타바를 우회했다. 제69군과 제7근위군은 전선군 중앙에서 코벨랴크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선의 좌익인 57군과 46군은 드네프로페트롭스크 방향으로 적을 추격했다. 21일이 되자 5근위군과 53군은 보르스클라 강(Vorskla River)에 도달했고 22일 새벽부터 5근위군의 32근위소총군단이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53군 소속 소총군단들도 강을 도하했다. 북쪽의 도시에서는 3개 사단이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를 비롯한 독일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9월 23일, 폴타바가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드네프르 강 너머로 후퇴하는 적을 쫓아 28일과 29일 이틀 간의 전투를 통해 크레멘츄크를 점령했다. 이어서 크레멘추크부터 드네프로페트롭스크 사이의 전선에서 전선군 소속 야전군들이 차례로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고 30일에 크리보이로그와 드네프로페트롭스크를 향한 공세 준비를 위해 잠시 공세를 중단했다. 스텝 전선군의 손실은 27,829명의 전사/실종과 104,732명의 부상이었으며 8군의 손실은 4,739명의 전사/실종과 15,253명의 부상이었다.

7. 드네프르 강으로의 경주 : 누가 먼저 강에 도착할 것인가

파일:드네프로 강으로의 경주.jpg
▲드네프르 강을 먼저 건너려고 노력하는 소련군과 독일군[44]
소련군의 공세가 한창 진행되던 와중 9월 15일, 히틀러가 드네프르 강 서안으로의 후퇴를 드디어 허가하면서 독일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매우 늦은 후퇴였기에 만슈타인은 매우 어려운 후퇴 작전을 실행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전선이 전체적으로 무너져버린 상황에서 4개군 15개 군단을 1,000km 뒤로 후퇴시켜 강을 건너 다시 중부집단군과 휘하 야전군을 연결시키고 방어선까지 구축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독일인 시민까지 거의 100만 명의 인원에 20만 명의 부상병과 추축국 의료인원들까지 후퇴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소련군이 징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청장년의 소련 시민과 가족들까지 소개시켜야 했는데 거의 40만에 달하는 숫자였다. 후퇴를 성공시킨다고 해도 드네프르 강은 또 다른 문제였다. 4기갑군, 8군, 1기갑군 3개 야전군 45개 사단이 단 6개의 다리만으로 강을 건너 700km의 방어선을 새로 구축해야 했는데 소련군보다 다리에 먼저 도달할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였다. 그 와중에 히틀러는 초토 작전을 진행하면서 후퇴할 것을 요구했다. 그 지역 건물, 기계, 목축 등등 모든 것을 없애라는 지시였지만 시간도 없을 뿐더러 수많은 야전 사령관들이 이를 무시하고 군사적 작전에 한해서만 시행하여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4기갑군은 키예프와 카네프로, 8군은 크레멘추크와 체르카시로, 1기갑군은 자포로제와 드네프로페트롭스크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소련 보로네시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도 드네프르 강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을 라스푸티차가 한창인 가운데 양측은 동부전선의 명운이 걸린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드네프르 강 너머에는 수송, 정비부대, 훈련병과 부상병을 제외하면 예비부대가 전무한 상황이었다.

7.1. 최초의 교두보, 카네프

소련군이 드네프르 강변에 도달한 9월 21일, 독일 8군 사령부에는 감청한 통신문 한 장이 전달되었다. 파르티잔이 바투틴에게 보낸 내용은 카네프 북쪽 드네프르 서안에는 독일군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보안부대를 제외하고 그리고로프카(Григоровка)와 르지쉬체프(Ржищев) 사이에는 병력이 아예 없었다. 바투틴은 즉각 이 지역에서 24기갑군단을 추격중인 파벨 리발코의 3근위 전차군에게 카네프 북쪽에서 도하할 것을 지시했다. 리발코는 직접 51근위전차여단을 방문해 당장 강변에 도착한 병력을 활용해 도하할 것을 명령했다. 공병과 도강 장비가 도착하기 전이었음에도 소련군은 뗏목을 만들고 수영하면서 강을 건넜다. 이들은 당시에는 몰랐지만 최초로 강을 건너는 영광을 얻게 된다.

소련군이 강을 건너는 재앙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독일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24기갑군단이 맡기로 했던 카네프 근방은 소련군이 22일 아침에 교두보를 확보했고 같은 날 중부 전선군 휘하 13군은 중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을 연결하는 체르니고프에서 강을 건넜다. 당장 근방의 독일군을 모아 교두보를 봉쇄하긴 했지만 그리고로프카의 교두보에 신경쓰느라 적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8군은 이제 막 키예프에서 도하하는데 성공한 19 기갑사단의 기갑수색대대를 동원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적을 몰아낼 수가 없었다.

23일 새벽 리발코는 카네프에 거의 도착한 발터 네링 기갑대장의 24기갑군단을 급습했다. 독일군은 간신히 이 공격을 격퇴했고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강을 건너는 14시간 동안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독일은 철로와 도로가 2중으로 설치된 다리를 통해 빠르게 강을 건넜다. 군단 병력이 엄청 줄어든 덕에 강을 빨리 건널 수 있었다. 소련 공군도 전차도 보이지 않았다. 소련군은 후퇴하는 적에겐 딱히 관심이 없어진 상황이었다. 소련군은 이미 교두보를 확보한 상태에서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했다. 24일까지 소련군은 드네프르 강에 23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다리에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중장비를 도강시키 어려웠고 교두보를 확장시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소련군은 소련군 답지 않은 방법을 쓰기로 한다.

7.2. 부크린 상공의 소련 공수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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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네프, 부크린 교두보와 강하하는 소련군

소련군은 강 건너에 공수작전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발상 자체는 굉장히 좋았다. 문제는 늘 그렇듯 당시 소련군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련군의 진짜 문제는 병사들이나 소대, 중대급 하급장교들이 아니고 사이에 끼어있는 대대-사단을 맡은 중간 장교들의 수준이 한심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일단 공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니 계획을 짜긴 하는데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보안을 지킨답시고 작전 개시 15분 전에야 중대 지휘관들에게 자세한 계획이 하달됐다. 급하게 편성된 공수군단 소속 1,3,5 공수 여단의 사령관들은 작전 시작 기한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연료 공급이 느린 탓에 하루가 미뤄졌다. 더군다나 공수여단이라고는 해도 강하를 한 번도 안해본 병사들이 수두룩했고 수송기 조종사들도 강하 작전 경험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운도 없었다. 9월 24일 밤, 대규모의 소련 공수부대가 공수작전을 시행했다. 밤에 공수작전을 시행해서 강하를 해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건 둘째치고 그 자리에는 하필이면 독일 19기갑사단의 주력이 와 있었다. 당시 소련군은 부크린과 살짝 북쪽 발리카(Балыка)의 교두보를 연결하려는 듯이 교두보에서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양동작전이 아니라 자기가 공세하고 있는 곳에 강력한 적군이 오는 것은 당연한데 그걸 무시하고 강하를 해버린 것이다. 공수부대는 사실상 궤멸되었고 두 번째 작전은 취소되었다. 살아남은 부대원들은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소련군은 전간기동안 공수부대의 선구자였지만 그런 경험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발터 네링 장군은 '전략적으로 옳은 작전이었으며 성공했다면 우리에겐 재앙이 될 뻔했다'고 평했다.

결국 의도는 좋았으나 능력이 안 된 작전이었다. 수송 계획은 절반만 이루어져 병력의 70%만 강하할 수 있었고 대전차포나 화기는 거의 보급하지 못했다. 그리고 강하 된 인원 중 60%가 돌아오지 못했다. 작전의 실패 이후 소련군은 그냥 교두보를 증강해서 적을 밀어내는 방법을 쓰기로 한다.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소련군에겐 압도적인 힘이 있었다. 독일이 계속해서 교두보를 봉쇄하려 시도했지만 소련군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교두보를 확장하고 있었다.

7.3. 류테즈 : 동부전선의 향방을 바꿔버린 작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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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북쪽 류테즈 교두보

부르킨 교두보에서의 작전이 실패하고 독일 8군은 강 건너 소련 제3근위전차군과 교두보가 연결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북쪽으로 130km정도 떨어진 키예프 근방에서 새로운 작전이 시작된다. 시작은 한 병사의 과감한 행동이었다. [45]

소련군 선도 부대는 키예프 근처에서 강을 건너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강 건너편에는 류테즈(Лютеж)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고 하우페 장군의 제8군단이 수비 중이었다. 수많은 실패 속에 9월 27일, 제240사단 제842보병연대의 제2대대 병력중 네페도프(Нефедов) 하사의 제2 분대 22명이 강둑에 간신히 도착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차가운 강 속으로 사라졌지만 강을 건너서 참호를 파는데 성공하자 소대, 중대급 독일군의 맹공에도 소련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련군은 궤멸당할 뻔했지만 간신히 병력을 보충하며 30일까지 교두보를 살짝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10월 3일, 바투틴이 급히 크랍첸코 중장의 5근위전차군단 사령부를 찾았다. 바투틴은 류테즈 교두보를 반드시 확장시키기 위해 기갑전력이 넘어가야하는데 교량을 설치하기 전에 아군이 전멸할 것 같으니 도하할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크랍첸코는 즉각 방법을 탐색했고 어부들의 도움으로 적당히 전차가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찾았다. 바닥이 모래고 깊이는 7m정도였기에 T-34를 급히 개조해서 잠수기능을 부착했다.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이런 방법을 몇 번 썼지만 소련군은 처음이었다. 이런식으로 1개 여단 규모의 전차를 강 너머로 보내는데 성공했다.

10월 18일, 보로네시전선군 부사령관 안드레이 그레치코 상장은 스타브카에 류테즈에 공세를 펼칠 교두보를 확보했다고 보고했다. 전선군은 당장 투입할 예비전력이 없었다. 소련군도 지속된 공세로 소총사단의 경우 전력의 70%까지 줄어있었다.[46] 스탈린은 부크린 교두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남부집단군 전체를 포위하길 원하고 있었다.[47] 그러자 전선군은 부크린에 있던 병력을 200km 북쪽 류테즈로 돌린다.[48] 바투틴과 그레치코는 적의 코앞에서 적 몰래 3근위전차군과 수 개의 소총군단, 엄청난 화력집단을 드네프르 강 두 번, 데스나 강 한 번 건너 옮기는데 성공했다.

독일도 소련군의 이동을 알고는 있었지만 목적지를 몰랐기에 소련군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3개 제병협동군과 1개 전차군단, 1개 기병군단을 배치할 수 있었다. 그레치코에 따르면 “2천 문의 포, 5백 문의 로켓발사대가 준비되었다. 제38 군의 공격로 7km 넓이에는, 1km 당 100 문이 넘는 화포가 동원되었다. 대포 하나가 10m 범위에만 포탄을 쏟아 붓는 것이다. 류테즈에 배치된 아군의 전력은 독일군과 비교해, 보병은 3배, 포는 4.5배, 전차는 9배로 압도적이었다.”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전력을 집결시키는데 성공했다. 소련군은 스탈린의 의도를 살짝 틀어 지지부진한 남쪽에서의 공격 대신 키예프를 점령하고 4기갑군을 분쇄한 뒤 적의 후방으로 침입해 남부집단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운다. 이후 제2차 키예프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8. 쿠반 교두보 포기

히틀러는 남부집단군의 퇴각과 함께 코카서스 쿠반반도에 있는 17군도 후퇴시킬 것을 명령했다. 여기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위험해진다는 이유로 발칸 국가들이 반대했으나 드네프르까지 밀리는 상황에서 의미가 없었다. A집단군 사령관 클라이스트 원수와 17군 사령관 에르빈 야넥케 공병 대장은 크림힐트 작전(Unternehmen Krimhild) 작전을 수립하여 케르치 반도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9월 25일, 철수를 시작했고 10월 9일까지 240,000명의 병력과 부상자 16,311명, 민간인 27,456명, 물자 115,477톤, 자동차 21,239대, 전차 74대, 포 1,815문, 말 74,657마리를 대피시켰다. 이는 독일이 후퇴하면서 중장비를 온전히 후퇴시킨 몇 안되는 성공적인 작전이었다.[49]

9. 드네프르 강 하류 : 자원 지대의 상실

북쪽에서 강을 도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군은 공세의 두 번째 단계인 드네프르 저지대 공세를 시작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반격부터 여기까지 소련군은 쉬지 않고 공세를 이어오고 있었다. 새 공세를 펼치는데 계획을 세울 시간은 거의 없었으며 재편은 공격도중에 잠깐잠깐 실시됐다. 전방 사단들은 5,000명이 안 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스텝 전선군과 남서 전선군, 남부 전선군이 동원되었으며 소련군은 112개 사단과 16개 여단, 8개의 전차 및 기계화 군단을 포함한 1,506,400명의 병력, 24,437문의 포, 1,160대의 전차와 자주포, 2,000기의 항공기를 보유 중이었다. 이에 맞선 독일 남부 집단군 휘하 1기갑군과 A집단군 휘하 6군은 병력 770,000명, 포 8,000문, 전차와 자주포 800대, 4 항공함대는 항공기 1,000기를 보유 중이었다. 드네프르 저지대(하류) 공세 작전에서 소련군은 5개의 공세를 진행했으며 173,201명의 전사 및 실종, 581,191명의 부상을 비롯하여 2,639대의 전차 및 자주포, 3,125문의 야포와 430기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9.1. 멜리토폴 공세 : 17군의 크림반도 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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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하단, 크림반도를 고립시키고 드네프르 강 하류에 도달한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

시작은 최남단 톨부힌의 남부 전선군이었다. 이 지역을 맡고 있는 독일 6군은 보탄방어선(Wotan Line)까지 후퇴한 상태였다. 8월 26일, 톨부힌은 돈바스 공세를 마무리 지은지 4일만에 공세를 재개했다. 남부 전선군은 555,300명의 병력과 800대의 전차, 5,600문의 포와 1,100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고 이를 막아야 하는 6군은 210,000명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 1,500문의 포 그리고 4항공함대에서 700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다. 톨부힌은 멜리토폴 북쪽을 공세의 주력으로 4개 제병협동군과 휘하 45개 소총사단과 2개의 전차 군단, 3개의 기계화 군단, 2개 기병 군단을 투입했다. 남쪽에는 도시를 우회할 28군을 배치했다.

9월 26일,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됐다. 독일군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소련군은 재편이 필요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고 계획은 커녕 정찰할 시간도 없었다. 그 결과, 5일만에 큰 피해를 입은 소련군은 9월 30일부터 10월 9일까지 거의 진격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6군 사령관 훌리트는 이 공격을 막기 위해 남부의 병력과 야전군 예비대를 전부 북쪽으로 돌려야 했고 6군이 보유한 2개 기갑사단과 3개 대전차 대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모조리 동원했다. 이 곳은 대평원이기 때문에 방어선이 뚫리면 크리미아까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를 파악한 톨부힌은 제51군, 전차군단, 기병군단을 남쪽으로 돌려 10월 9일, 공세를 재개했다. 15km전선 전체에 1m당 한 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소련군의 시체가 산을 쌓고 부서진 전차가 평원을 메웠지만 소련군은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공격해왔다. 11전차군단은 수백대의 전차를 잃고도 기세를 유지했다.

3산악사단, 258, 17 보병사단, 13기갑사단은 도시를 지키며 30번에 걸쳐 적을 격퇴했다. 스탈린그라드가 생각날 정도의 지독한 전투였다. 10월 23일, 소련군은 멜리토폴을 해방시켰고 4근위기병군단과 19전차군단을 선두로 3개 소총군단을 추가로 투입했다. 남서쪽 44군단은 붕괴위기까지 몰렸지만 13기갑사단과 포병, 대전차대대들이 궤멸당하면서도 자리를 지킨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 10월 27일, 일부 보병사단들은 3주 전 6군에 배치 되었을 때보다 전력이 10%로 줄어있었다. 6군이 보유한 전차는 25대 뿐이었다. 소련군의 피해는 훨씬 컸지만 그럼에도 공세는 계속되었다. 51군은 전력의 99%가 사라지고 200명만 남은 73보병사단의 우익을 돌파했다. 게오르기 자하로프 중장의 2근위군이 쏟아져 들어왔다. 돌파구는 금세 40km에 달했고 훌리트는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었다. 6군은 남북으로 분단됐고 포위되지 않기 위해 필사의 후퇴를 시작했다. 제일 남쪽, 약한 전력의 49군단은 4산악사단과 그나마 남은 13기갑사단의 일부를 합쳐 퇴로를 뚫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헤르손에서 강을 건너는데 성공했고 니코폴과 크림반도 사이에서 전선을 재구축하는데 성공했다.

11월 1일, 소련군은 크림반도의 입구인 페레코프 지협에 도달하여 크림반도로의 육상 이동로를 차단했다. 이어서 11월 5일, 소련군은 드네프르 강 하류에 도달했다. 하지만 니코폴 남쪽에 있는 적의 교두보를 정리하는 데는 실패했다.
공세 기간 동안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전사 및 실종 42,760명을 포함해 198,749명의 손실을 입었다.

9.2. 자포로제 공세 : 댐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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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우측, 자포로제를 공격하는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

자포로제는 드네프로 저지대 최대 요충지였다. 강 만곡부에 위치해 있으며 자포로제의 댐은 서부 우크라이나 공업 단지를 돌리는 전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 전기는 키로보그라드의 금속 가공 공장과 크리보이로그의 광산을 가동시키 위해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포로제는 강 북쪽에서 드네프로페트롭스크로 내려오는 적을 요격할 수 있고 남쪽에서 진군하는 적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공세는 말리놉스키의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좌익이 진행할 예정이었다. 3개 제병협동군, 2개 전차군단과 1개 항공군을 포함한 병력 100,000명에 포 2,000문 전차 700대를 동원했고 모든 부문에서 2:1 이상의 전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곳의 방어를 담당한 건 마켄젠의 1기갑군이었다. 자포로제와 댐을 보호하는건 헨리치 장군의 40기갑군단이었고 17군단에서 보병 사단 몇 개를 차출해 분견군 규모의 헨리치 전투단을 편성했다. 1기갑군은 당연히 드네프르 동쪽 강변과 자포로제 교두보를 모두 지킬 전력이 없었으므로 전력을 자포로제에 집중했다. 그렇게 모인 전력은 30,000명의 병력과 포 600문, 300대의 전차 및 자주포였다. 소련군은 자포로제 서쪽 드네프르 강을 넘어 교두보를 확보했고 10월 10일 도시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엄청난 전력차에도 독일군은 도시를 잘 방어하고 있었다. 16기갑척탄병 사단은 오히려 공세로 나서 적의 선봉을 물리쳐버렸다. 656중전차엽병연대[50]는 엘레판트 대전차자주포의 막강한 88mm주포로 t-34전차를 하나하나 격파했지만 소련군은 끝도 없이 밀려왔다. 연대에는 1개의 구축전차대대와 2대의 엘레판트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떤 때는 전력차가 10:1까지 벌어졌다. 독일군은 늘 그랬듯 한 줌의 예비대가 부족했다. 소련군은 포병사단을 투입했다.[51] 전선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10월 12일,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독일군을 이용해 항복을 권유했다. 그 중에는 옛 40기갑군단 상관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를 물리치고 초인적으로 계속 싸웠다. 이 싸움은 이제 히틀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조국과 동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독일군은 물자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탄약 문제도 심각했다. 소련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계속 공격해왔다. 특히, 물자가 매우 풍부한 상태였다. 10월 13일, 독일군에게 최대 위기가 닥쳤다. 적이 도시에 야습을 가한 것이다. 댐에 적의 포화가 닿기 시작했다.

헨리치는 댐을 폭파하기 위해 국방군최고사령부에 연락했지만 아무도 권한이 없었다.[52] 히틀러는 자고 있었고 아무도 그를 깨울 수 없었다. 결국 헨리치는 1기갑군 사령관 마켄젠에게 자신이 책임을 지고 댐을 폭파하겠다고 전했다. 마켄젠은 헨리치를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논쟁을 벌이지 않고 "귀관은 목숨을 걸고 있네."라는 말과 함께 암묵적으로 허가했다. 14일 오전, 소련군이 또다시 공세를 가했고 16기갑척탄병사단과 421척탄병 연대의 병력이 가까스로 막아냈다. 헨리치는 18시 45분에 교량을, 20시에 댐을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공병장교는 도저히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16기갑척탄병사단이 아직 후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군단 작전장교 크리스티안 스토클 중위는 사단을 찾아나섰다. 불타는 도시 속 한 헛간에서 슈베린 장군을 찾았지만 그는 아군이 전부 후퇴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후퇴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14일 밤, 댐은 폭파되었고 교량을 건너지 못한 병사들을 위해 보트가 준비되었다.[53] 자포로제의 해방으로 멜리토폴 공세를 진행중이던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도 드네프르 강 하류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4일간 소련군은 전사 및 실종 3,443명을 포함해 17,708명을 손실했다.

9.3. 드네프로페트롭스크크리보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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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상단, 니코폴과 크리보이로그로 진격하는 제2,3 우크라이나 전선군

소련군의 다음 목표는 드네프로페트롭스크와 크리보이로그, 니코폴이었다.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크리보이로그 방면으로 계속해서 압박하는 가운데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드네프로페트롭스크로 갑자기 공격을 가해왔다. 소련군의 전력은 100,000명의 병력, 2,000문의 포와 수백 대의 전차였고 방어하는 독일군은 25,000명의 병력과 700문의 포, 50대의 전차가 전부였다.

10월 24일, 추이코프의 제8근위군이 공세를 개시했고 25일, 드네프로페트롭스크를 탈환했다. 이어서 소련군은 니코폴과 크리보이로그로 진격해나갔다. 29일, 한스-발렌틴 후베 기갑대장으로 지휘관이 바뀐 1기갑군은 완강하게 저항했다.[54] 소련군은 최대 60km까지 진군했지만 공세를 멈췄고 11월 14일, 공세를 재개했지만 12월 23일, 공세를 중단할 때까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지역은 이어진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에서 다음해 2월에 탈환하게 된다.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 우익, 북쪽에는 코네프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공세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전 공세에서 확보한 크레멘추크 교두보는 9월 말, 훨씬 커져 있었다. 하지만, 코네프에게는 전 전선에서 공세을 가할 충분한 병력이 없었다. 카네프에서 드네프로페트롭스크까지 담당하고 있던 탓에 나머지 3개 전선군과 비슷한 길이의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코네프는 그레멘추크 교두보가 아닌 남쪽의 새로운 교두보에서 공세를 가하기로 한다. 드네프르페트롭스크를 공격 중이던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 측면을 보호하며 크리보이로그를 해방시키고 1기갑군과 6군을 포위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전선의 절반이 넘는 구역에는 4근위군과 52군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병력을 전부 남동쪽으로 이동시켰다. 부크린에서 류테즈로 병력을 이동시킨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후 공세에서 52군은 체르카시를 탈환한다. 소련군은 450,000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이를 방어하는 건 8군과 1기갑군 휘하 24개 사단과 4항공함대[55] 휘하 2개 항공군단이었다.

10월 15일 아침, 5근위군과 7근위군을 선두로 공격이 시작됐다. 37군과 57군도 대기중이었다. 코네프는 전선이 돌파되자 5근위전차군과 7근위기계화군단을 바로 투입했다. 16일, 전선에는 큰 구멍이 뚫렸고 만슈타인은 곧바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차출한 4개 사단[56]을 투입했다. 히틀러 입장에서는 독일 무기 생산 원료의 30%를 차지하는 크리보이로그와 니코폴 광산은 굉장히 중요한 곳이었고 만슈타인 입장에서는 여기가 뚫리면 1기갑군과 6군 전체가 포위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23일, 5근위전차군과 37군은 크리보이로그 코앞까지 다가왔고 키로보그라드 동쪽 30km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반격으로 10~17km까지 다시 밀려났다. 코네프는 크리보이로그를 우회하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만슈타인은 11, 23 기갑사단을 새로 투입해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스탈린의 개입으로 소련군의 공세가 분산되는 바람에 독일군은 사단을 재배치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57]

10월 28일, 독일군은 항공 지원과 함께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고 7근위군과 37군을 20km나 밀어냈지만 이게 한계였다. 소련군은 11월 5일, 재차 공격을 가했지만 독일군의 방어를 뚫을 수는 없었다. 전선이 소강상태가 되는 가운데 23일, 코네프는 크리보이로그 방면 공세를 중단하고 다른 방면 공세를 준비하기로 했고 스타브카의 승인을 받아 공세를 중단했다. 독일군이 비록 크리보이로그와 니코폴을 지키는 것 자체는 성공했으나 또다시 소중한 예비대가 소모되었고 100km나 밀려난 탓에 소련의 교두보는 이제 전략적 공세가 가능할 정도로 거대해져버렸다.

코네프는 살짝 북쪽 즈나멘카로 눈길을 돌렸다. 이 지역을 담당하던 52군은 11월 13일, 체르카시에 작은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어서
남쪽 공세에 투입되던 4개 군과 53군, 심지어 북쪽을 방어하던 4근위군까지 공세를 위해 모았다.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4개월간 지속된 공세로 인력이 크게 부족했고 이제는 보급까지 위험한 상태였다. 이 지역을 방어하던 독일군 14개 보병사단, 6개 기갑사단 및 1개 기갑척탄병 사단도 너덜너덜해진 건 마찬가지였다. 이 중 독일 8군은 3,47 기갑군단과 11군단 휘하 9개 보병사단과 1개 기갑사단을 즈나멘카에 투입했다.

11월 20일,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10km정도 적을 밀어내긴 했지만 전선을 돌파하는데는 실패했고 진격은 지지부진했다. 남쪽에서 재편중이던 5근위전차군[58]을 급히 끌고왔고 22일 공세를 재개하려 했지만 악천후로 24일로 미뤄졌다. 여전히 전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한 상태에서 코네프는 전차군 투입을 보류했다. 25일, 전선 돌파에 성공하여 5근위전차군 휘하 전차여단이 적 전선을 40km나 돌파했다. 이들은 주요 교차점을 점령했고 12월 1일까지 유지했다. 12월 3일, 소련군은 알렉산드리아를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5일, 2개 전차군단이 즈나멘카 외곽까지 진출했고 6일에는 알렉산드리아가 해방됐다. 이어서 53군과 4근위군이 합류했고 6일부터 산업 도시인 즈나멘카를 놓고 3일간 시가전이 벌어졌다. 독일군은 하루에 10번 넘게 반격을 해왔다. 9일 저녁, 도시는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12월 12일, 소련군은 키로보그라드[59]에 다다랐고 3면으로 도시를 포위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저항은 완강했고 반격으로 소련군이 오히려 밀려나면서 10일 넘게 전선은 고착되어버렸다. 우익에서는 52군이 12월 14일, 체르카시를 탈환하고 4근위군에 합류했다. 소련군은 공세 기간 엄청난 손실을 입었으나 독일군도 감당하기 힘든 손실이 발생했고 예비대가 또다시 소모되어버린 탓에 전투 8월과 9월 동안 밀렸던 것처럼 이어지는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에서도 계속 밀리게 된다.

10. 제2차 키예프 전투

다시 류테즈 방면으로 돌아와서, 바투틴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키예프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류테즈 교두보에 있는 작은 마을 노보-페트로브치(Novo-Petrovtsy)에는 바투틴과 그레치코의 전선군 사령부, 공세의 핵심이 될 모스칼렌코의 38군 사령부와 리발코의 3근위 전차군 사령부도 들어섰다. 이 조그만 마을 곳곳에는 군단 사령부와 사단 사령부들도 모여있었다. 이렇게 주요 사령관들이 모여있는건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만큼 소련군의 의지는 결연했다. 소련군은 10월 혁명 기념일인 11월 6일 이전에 키예프를 반드시 점령할 생각이었다. 사령관들은 피해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시가 지옥이 된다해도 상관없었다.

소련군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휘하 20개의 소총사단[60]과 4개의 전차군단, 1개의 기병군단을 포함한 670,000명의 병력과 7,000문의 포, 675대의 전차와 700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다. 화력의 밀도가 지금까지의 공세 중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반면, 키예프를 방어하고 있던 호트의 4기갑군은 너덜너덜해진 11개의 보병사단과 2개 기갑사단을 포함한 270,000명의 병력을 보유 중이었다.

10.1. 소련군의 키예프 탈환

파일:키예프와 자포로제.jpg
▲ 지도 좌측, 키예프를 탈환하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11월 1일, 적의 전력을 분산할 목적으로 부크린 교두보에서 양동 작전을 개시했고 11월 3일, 본격적으로 키예프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엄청난 포격 속에 5근위전차군단의 지원을 받은 38군은 10km의 전선에서 10km 깊이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다. 호트는 전선에 있던 3개 보병사단에 더해 1개 기갑사단과 1개 기갑척탄병사단을 추가로 투입했으나 6개 소총사단과 1개 전차군단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40소총사단은 첫날 저녁 이미 키예프 외곽에 도달해 있었다. 독일은 7기갑사단의 도움으로 이를 간신히 격퇴할 수 있었다.

11월 4일, 바투틴은 돌파 지점으로 3근위전차군과 1근위기병군단을 투입했다. 7근위전차군단은 7기갑사단의 전선을 돌파해버렸고 리발코는 도시를 우회해 적 보급로로 달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소련군이 지토미르-키예프 도로를 장악하자 38군은 키예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7기갑사단, 20기갑척탄병사단과 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는 모두 도시에서 밀려나버렸고 88사단은 사실상 궤멸당해 버렸다.[61] 7군단과 13군단도 속절없이 밀려났다. 만슈타인은 자신에게 48기갑군단과 40기갑군단의 재량권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히틀러는 48기갑군단은 넘겨줬지만 40기갑군단은 크리보이로그의 반격을 위해 거부했다. 호트는 휘하 군단들에게서 간절한 증원요청이 빗발치고 있었지만 보낼 수 있는 병력이 없었다. 11월 6일 자정, 혁명 기념일이 시작되자 소련 51소총군단과 5근위전차군단이 시내를 질주하기 시작했고 그날 아침 키예프는 해방되었다.

11월 7일, 6근위전차군단은 파스토프를 탈환했다. 파스토브는 독일 후방물자가 쌓여있는 집결지로 이곳에 있는 45량의 기관차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동부전선에서 열차는 전차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였다. 전선 상태를 파악할 수 없어 기갑전력이 엉뚱한 곳으로 가는 와중에 철도 인력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키예프에 있는 열차와 보급품들을 대부분 탈출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파스토프가 소련군에게 넘어가자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탈환을 위한 기갑사단 3개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크리보이로그 방면의 반격을 위해 또다시 거부했다. 대신 이탈리아에서 차출한 1SS기갑사단 "LSSAH"와 그리스에서 차출한 1기갑사단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동 중인 두 사단은 현재 전장에 있지도 않았다. 만슈타인은 이대로 가면 남부집단군은 궤멸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히틀러는 프랑스에서 온 25기갑사단도 지원하는 것으로 타협했지만 그걸로는 택도 없는 상황이었다.

12일에는 38군 휘하 24소총군단이 지토미르에 도달했다. 북쪽에서는 13군이 16일에 체르노빌을 탈환하고 17일에는 60군이 코로스텐을 탈환했다. 소련군의 공세는 기습의 효과와 더불어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사상자가 전사 및 실종 6,491명을 포함해 30,569명에 불과했다.

10.2. 독일군의 반격

25기갑사단은 겉으로 보면 90대의 4호전차에 45대의 티거 전차를 보유한 509중전차대대까지 상당한 전력을 보유중이었으나 휘하 병력들은 동부 전선에 처음 투입되는 신참들이었다. 훈련도 턱없이 부족했다. 호트는 지원이랍시고 이런 전력을 받으니 머리가 아픈 상황이었다. 지옥과도 같은 동부전선에서 숙련도의 차이가 전투력에 미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했다.[62] 그럼에도 호트는 방법이 없어 이들을 파스토프로 투입했다. 전력은 상당했기에 그나마 기대해 본 것이다. 그러나 전선의 혼란 속에 사단의 주력 기갑전력은 200km나 떨어진 키로보그라드역으로 가고 말았고 사단은 나머지 기갑척탄병들과 포병, 공병들은 동원해 반격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1월 10일이 되자 파스토프까지 가지도 못하고 사단은 와해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들은 다스 라이히와 10기갑척탄병 사단 잔존 병력들과 합세해 적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은 막아냈다. 덕분에 만슈타인은 간신히 예비대를 끌어올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또다른 보급창고인 지토미르가 소련군에게 탈환되면서 막대한 보급품과 연료가 소련군에게 넘어갔다. 소련군이 이 보급품때문에 잠시 멈추자 8군단이 지토미르에 간신히 전선을 재구축했다. 만슈타인은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승리했던 방식대로 소련군을 섬멸한 뒤 키예프를 되찾으려고 했다. 11월 13일, 독일군은 헤르만 발크 기갑대장의 지휘 아래 48기갑군단에 1, 19기갑사단과 LSSAH사단을 지원하여 5개 기갑사단[63]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여기서 모인 기갑전력의 규모는 총 7개 기갑사단, 1,000대의 전차 및 돌격포로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군이 집중시킨 기갑전력 중 최대 규모였다. 드네프르 강 전투 기간 내내 작전술적 반격이 이루어진 유일한 경우였다.[64]

11월 20일, 독일군은 지토미르[65]를 탈환하고 곧이어 코로스텐을 되찾았고 코로스텐(Коростень)-라도미쉴(Радомышль)-지토미르(Житомир)-브루실로프(Брусилов)-파스토프(Пастов)로 이어지는 전선을 재구축하는데 성공했다.[66]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독일군의 가용가능한 전차와 돌격포는 360대 뿐이었다.[67] 그러나, 키예프에 도달하는데는 실패했고 독일군은 이제 키예프와 드네프르 강 중류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렸다. 12월 초, 독일은 키예프를 탈환하기 위해 추가로 두 번의 공세작전을 펼쳤지만 소련군의 방어선은 뚫릴 기미가 없었다. 60군은 코로스텐에서 밀려났지만 방어선을 구축했고 스타브카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에 1전차군과 18군을 지원하여 적의 추가 진격을 막았다. 키예프 전투 시작 시점에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671,000명을 보유중이었는데 방어 시에는 730,000명으로 오히려 증가한 상태였다.

22일, 독일군은 반격을 중단했다. 이 여파로 드네프르 유역으로 가야할 예비대를 모두 키예프에서 소모해버렸고 소련군이 다시 공세를 시작하자 막을 방법이 없었다. 호트는 12월 10일, 키예프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고 에르하르트 라우스 기갑대장이 새로 4기갑군 사령관이 되었다. 소련군은 키예프 방어 작전기간 26,443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고 61,030명이 부상당했다.

11. 결과

소련군은 독일군을 드네프르 강 서안으로 완전히 밀어냈고 키예프와 드네프로페트롭스크에 전략적 공세가 가능한 교두보를 형성했다. 키예프 전방은 간신히 막은 것 처럼 보였지만 소련군이 다시 공세를 시작하면 막을 방법이 없었으므로 밀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드네프르 강 중류의 교두보들은 어느 정도 봉쇄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는 소련군이 하류의 광산과 공업 도시들에 집중하고 있던 덕분이므로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하류의 키로보그라드, 크리보이로그, 니코폴등의 자원들은 독일군이 반격을 통해 지켜내는 데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키예프에서 완전히 밀려났고 소련의 압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후, 중부 집단군에 대한 공세가 지지부진하자 스타브카는 차기 공세에서 가용 가능한 6개의 전차군 전부를 남부 전선에 투입하게 된다. 독일은 이 지역을 지키자고 전선이 줄어들지 않는 바람에[68] 4개월 내내 반복해왔던 실수, 부족한 병력을 너무 늦게 증원하는 방식을 이어나가게 된다.

양측은 7월부터 5개월간 쉬지 않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인적, 물적으로 엄청난 손실이 발생했다. 소련군 사단은 평균 인력이 2,000명대였다. 대대급까지 줄어든 경우도 수두룩했다.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단들이 이름만 사단이고 연대급으로 줄어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되찾은 드네프르 강 동안에서 무차별적으로 징집을 실시했다. 이런 병력들은 훌륭한 군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독일군에게 위협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소련군이 쉬지도 않고 공세를 계속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69]

보급부대들은 전방부대들과 또다른 전투를 치렀다. 소련군은 진격이 너무 빠른 탓에 보급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가을 라스푸티차는 이런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그럼에도 소련군은 놀라운 속도로 도로와 철로를 복구시키는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후방의 파르티잔때문에 더 힘든 상황이었다. 수많은 보안사단들을 동원해 숨어있는 파르티잔을 소탕하면서 보급로도 지켜야했다.

전투가 끝나고 소련군은 곧바로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를 이어나갔다. 독일 남부집단군은 1기갑군을 니코폴에서 빼내 빈니차의 4기갑군과 체르카시의 8군 사이의 우만지역으로 재배치했다. 드네프르 강 하류를 담당하게 된 6군도 다시 남부집단군으로 돌아왔다. 소련군은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크림반도의 17군 전방에 배치시키고 제1,2,3 우크라이나 전선군으로 공세를 이어나갔다. 각각 지토미르빈니차, 체르카시키로보그라드, 니코폴크리보이로그로 진격하게 된다.

독일군은 타지역에서 20개 사단을 드네프르 전선으로 증원했지만 소련군을 막기엔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미 양면전선에서 전투를 치르는 상황에서 프랑스에도 곧 적이 상륙할 것이 확실한 상황이었고 1944년 봄, 히틀러는 서부 전구에 우선권을 부여하겠다고 선언했다. 동부 전선의 위협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지만 서부 전선에서는 단기간에 상륙한 적을 몰아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서방 연합군이 다시 상륙을 준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 다시 병력들을 동부로 돌려 적을 막겠다는 말과 함께 부족한 전력은 점점 타 전선으로 빠져나갔다. 독일군은 평야에서 적을 막을 방법이 없어졌으므로 이후 프리피야트 습지와 카르파티아산맥, 드네스트르 강에서야 소련군의 공세를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1] 9월 4일 전출[2] 체르니고프-폴타바 공세부터 제2차 키예프 전투까지[3] 칼리닌, 서부, 브랸스크 전선군[4] 남부 전선군[5] 남서 전선군[6] 소련군이 10월 20일, 전선군의 명칭을 일괄적으로 변경하며 남부 전선의 5개 전선군도 함께 명칭이 바뀌었다.[7] 작전 기간동안 제1,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주코프가, 제3,4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바실렙스키가 스타브카에서 파견되어 조율했다.[8] 9월 19일, 상장으로 진급[9] 10월 20일, 기갑상장으로 진급[10] 소련군은 보병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과는 계급 앞에 병과명이 붙는다. 이 병과들은 대장으로 진급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대신 항공, 포병, 전차병, 통신병, 공병 이 다섯 병과는 나머지 소규모 병과와 다르게 대장과 동일한 병과원수와 병과상원수로 진급이 가능했다. 이는 소련의 대장, 독일의 상급대장, 서방권의 대장에 상응하는 보직이었으며 타국의 원수에 상응하는 소비에트연방원수는 대장과 병과 상원수 윗 단계의 계급이다. 병과 원수와 병과 상원수는 차등이 있으나 둘 다 대장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계급이었다.[11] 10월 27일, 상장으로 진급[12] 9월 21일, 대장으로 진급[13] 히틀러의 거부로 상급대장으로 진급하는데 실패했다.[14] 9월 1일, 보병대장에서 진급[15] 9월 4일, 제2항공함대로 전출[16] 12월 10일부터 에르하르트 라우스 기갑대장[17] 11월 15일부터[18] 정식으로는 12월 5일부터지만 11월부터 한 달 간 사령관이 공석이라 실질적으로는 11월부터 지휘했다.[19] 10월 29일부터[20] 드네프르 강을 따라 동그라미 쳐진 장소들은 곧 격전지가 된다.[21] 마지막 순간에 부관인 콘네 중위와 함께 슈테 하사와 전차병들에게 도망갈 것을 명하고 소련군을 막다 전사했다. 슈테 하사는 5년간의 포로 생활 후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22] 스탈린은 이미 하리코프를 탈환했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하루빨리 도시를 점령하길 원했다.[23] 켐프 분견군을 재편하여 편성했다. 사령관은 오토 뵐러 보병대장[24]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전략 예비대가 없었기 때문에 소규모의 예비대라도 적의 공격마다 끌려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다.[25] 남부 전선군 소속 5충격군과 2근위군이 10km의 좁은 통로에 공세를 개시했을 때, 1km당 120문의 포를 집중했다.[26] 모든 명령이 임시방편이었기 때문에 야전사령관들이 원하는 작전술적 반격이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능했고 기갑전력이 모일 수가 없으니 모든 반격이 뒤늦은 전술적 반격이었다.[27] 소련군은 공세시 1파만 투입 병력과 장비만 수치에 넣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공세 시작 후부턴 엄청난 증강이 이루어지게 된다.[28]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독일 기갑전력은 쿠르스크에서 그다지 소모되진 않았다. 오히려 독일 기갑 전력은 이후로 더 늘어났으며 티거와 판터의 비율이 오르고 자주포 대대가 추가되면서 더 강해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독일군의 전력이 늘어나는 것보다 소련군의 보충이 훨씬 빨랐으며 독일은 그 와중에 이탈리아와 발칸, 서부로 계속 병력을 차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쿠르스크와 드네프르 공세를 거치며 소련군의 수준도 엄청난 성장을 하면서 이전만큼의 성과를 내기 어려워졌다.[29] 무엇보다도 수적우세가 매우 중요했다. 소련은 쿠르스크 이전에도 전투 중에도 항상 우세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선이 소강상태일 때는 소련군이 방어만 했지만 독일의 공세가 실패하고 소련이 공세를 시작하자 독일은 어느 곳에서든 압도적인 적을 상대해야했다.[30] 고멜과 키예프의 중간 지점에 있다.[31] 9월 1일에 스타브카 예비로 철수[32] 나중에 제2군에 배속[33] 공세 시작 직후 제4기갑군에 배속[34] 사실 독일군은 타 전선에 비해 빈약하긴 해도 이 군단들이 그렇게까지 넓은 담당구역을 담당한 건 아니었다. 그냥 이 시기의 독일군은 심각한 병력 부족에 시달렸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이 지역의 강력한 방어를 포기했을 뿐이다.[35] 물론 근처에 제2전차군과 제9전차군단이 있었고 후방에 3근위전차군과 제61군이 추가로 있긴 했다.[36] 중부 전선군이 확보한 교두보들은 이후 벨라루스로 진군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지만 바그라티온 작전 이전까진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37] 2전차군단 배속[38] 3근위기계화군단과 10전차군단 배속[39] 3근위전차군단 배속[40] 5근위전차군단 배속[41] 스타브카 예비에서 이동[42] 남서 전선군에서 이동[43] 보로네시 전선에서 이동[44] 여기 나오는 지명들은 이어진 공세에서 중요한 곳들이니 한번씩 봐두자[45] 현대전에서도 병사 한 명의 과감한 결단이 전역의 향방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독일군이 엄청난 강군이었던 이유도 임무형 지휘체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군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그 소련군도 이런 사례가 수두룩하다. 무작정 상부의 명령만 따르길 강요하는 군대는 절대로 강군이 될 수 없다. 당장 만슈타인은 드네프르 강으로 퇴각하는 작전에서 자신들은 야전군 사이의 조율만 할테니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라는 간결한 명령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물적 손실은 어쩔 수 없지만 독일군은 후퇴해서 일단 전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46] 이는 후방부대를 모두 합친 것으로 30%의 손실이면 전방 전투 병력의 적어도 절반이상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현대전에서 이 정도 손실이면 공세가 힘들다고 볼 수 있으나 여긴 소련군이라 충분히 감내할 만 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물자가 무한히 보충되었기 때문에 공세역량을 보존할 수 있었다.[47] 스탈린의 이런 소망은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까지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독일 정보국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까지도 적이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전선을 붕괴시키고 발트해에 도달하여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을 포위섬멸하려고 할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48] 스타브카가 생각을 바꾼 것인지 그레치코와 바투틴의 독단인지는 알 수 없다.[49] 다른 작전으로는 들소 작전, 시칠리아 철수작전인 레어강 작전등이 있다.[50] 혹은 656중구축전차연대, "Schweres Panzerjäger-Regiment 656"[51] 소련군이 압도적인 화력이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건 분명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전에서 사상자의 가장 큰 비중은 화포에 의한 부상이다. 그런데 전쟁 끝날때까지 소련군은 독일군보다 사상자 비율이 높았다. 심지어 방어중일때도!! 이상하지 않은가?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중 중곡사포를 대량 손실했고 1945년에서야 회복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무전기와 표병정찰대의 부족으로 간접화력지원이 거의 불가능했다. 전투 시작 이후 진군하는 아군을 따라가며 화력 지원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소련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사화력의 효과를 극대화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화력의 집중으로 적 전선을 뚫어버리는 포병사단과 포병군단인 것이다.[52] 폭파를 위한 폭약을 설치하는 것조차 허가가 필요했다.[53] 하지만 엄청난 양의 폭약을 사용했음에도 댐은 일부분만 무너졌을 뿐이었다. 사실 댐을 무너트리려면 엄청난 폭약 말고도 정교한 폭약 설치가 필요하다. 저 긴박한 상황에서 건축 전문가도 아닌 공병들이 그런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댐은 인간이 건축한 것 중 가장 단단한 시설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54] 마켄젠은 이탈라아로 이동해서 케셀링의 남서 전구 사령부(OB Südwest, C집단군) 휘하 신편 14군 사령관이 되었다.[55] 오토 데슬로 상급대장으로 지휘관이 바뀜[56] 376, 384 보병사단과 14, 24 기갑사단[57] 독일군 사령부는 소련군과 싸우면서 히틀러와도 싸워야 하는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지만 소련군 사령부 역시도 독일군을 상대하면서도 스탈린과 싸워야 하는 힘든 상황이었다.[58] 2전차군단과 2기계화군단[59] 서우크라이나 공업 중심지 중 하나로 경제적 가치도 높지만 위치도 중요한 탓에 차후 이어지는 공세에서 격전지가 된다.[60] 제1 체코슬로바키아 보병여단도 있었다.[61] 혼란을 수습하려던 사단장 로트장군은 전선에 나섰다가 전사했다.[62]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 때 도시 동쪽을 지키던 282사단은 전선에 처음 투입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병력들이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는 바람에 전선이 무너졌고 군사령부는 일부를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처형하려했으나 6기갑사단이 전선을 복구하자 없던 일이 되었다.[63] 7,25기갑사단 포함[64] 크리보이로그와 니코폴에서도 대규모 반격 계획이 있었으나 결국은 시행되지 못했다.[65] 다음 공세에서 12월 31일, 소련군이 또다시 탈환한다.[66] 전 문단 지도 참고[67] 수리가능한 수치까지 합치면 여전히 900대를 보유하고 있긴 했다. 실제로 절반정도는 며칠 이내로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68] 사실상 히틀러때문이다. 히틀러는 광물 자원 뿐 아니라 크림 반도를 지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구데리안은 돈바스와 하리코프에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며 비꼬았지만 히틀러는 들은 체도 안했다.[69] 큰 틀에서 보면 사실상 종전하는까지 날까지 공세를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