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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온 말리놉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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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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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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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정치장교, A: 포병, T: 기갑, Si: 통신, Sa: 공병
※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병과원수랑 병과상원수는 대장과 동급이나 의전서열상 대장과 원수 사이에 있었다
※ 포병·기갑·통신·공병·공군 장교는 상장→대장이 아닌 상장→병과원수로 진급
※ 윗 첨자 : 전사
1. 반공 및 지시불이행 혐의로 총살당했으나 전후 1957년 7월 31일 무죄로 판결나면서 복권
2. 1944년 4월 20일 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 전후 1953년 8월 3일 대장 계급 복권
3. 1942년 3월 17일 원수→소장으로 4계급 강등 및 1945년 7월 19일 중장→소장으로 강등
4. 1942년 7월 12일 독일군에게 생포당한 이후 나치 독일에 전향, 종전 후 체포되어 나치 부역 혐의로 사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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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3대 국방장관
로디온 말리놉스키
Родио́н Малино́вский | Rodion Malinovsky
파일:Rodion_Malinovsky.jpg
본명 로디온 야코블레비치 말리놉스키 (러시아어)
Родио́н Я́ковле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Rodion Yakovlevich Malinovsky
로디온 야코비치 말리노우스키 (우크라이나어)
Родіон Якович Малиновський
Rodion Yakovych Malynovskyi
출생 1898년 11월 23일
러시아 제국 헤르손현 오데사
(現 우크라이나 오데사주 오데사)
사망 1967년 3월 31일 (향년 68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크렘린 벽 묘지
재임기간 제3대 지상군 총사령관
1956년 3월 ~ 1957년 10월 26일
제3대 국방장관
1957년 10월 26일 ~ 1967년 3월 31일
서명 파일:로디온 말리놉스키 서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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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야코프 말리놉스키
어머니 바르바라 니콜라예브나 말리놉스카야
배우자 라리사 니콜라예브나 말리놉스카야 (1946년 이혼)
라리사 야코블레브나 갈페리나[1]
자녀 아들 겐나디[2], 로베르트, 에두아르드, 입양아들 한 명[3]
딸 나탈리아
학력 프룬제 군사대학 (졸업)
소속 정당
[[소련 공산당|]]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914년 ~ 1917년
노농적군
1918년 ~ 1946년
소비에트 지상군
1946년 ~ 1967년
최종 계급 상병 (러시아 제국 육군)
상사 (프랑스 외인부대)
원수 (소비에트 지상군)
주요 보직 제48소총군단장
소련 국방장관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스페인 내전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만주 작전
주요 서훈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레닌훈장 (5회)
수보로프 훈장 1등급 (2회)
적기훈장 (4회)
전승훈장
쿠투조프 훈장 1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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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유년기와 1차대전, 적백내전 시기2.2. 전간기와 2차대전 시기2.3. 종전 후
3. 수훈 경력4. 진급 이력5. 기타

[clearfix]

1. 개요

소련군 육군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많은 무공을 남겼고, 전후에도 소련군의 전투력 강화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유년기와 1차대전, 적백내전 시기

오데사에서 가난한 농부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무슨 이유인지 살해당했고, 미망인이 된 어머니가족들을 이끌고 우크라이나의 시골 마을로 이주해 재혼했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는 식솔이 늘어서 좋을 게 없다고 말리놉스키를 박대했고, 결국 열세 살 때 집에서 쫓겨나 농장 일을 하거나 오데사이모 집에 얹혀 살면서 식료품 상점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등 거친 생활을 했다.

1차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말리놉스키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고 병역 의무도 질 필요가 없었지만, 너무 팍팍한 삶 때문이었는지 동부전선으로 향하던 군용 열차에 몰래 탑승해 러시아 제국 육군에 입대했다. 1915년에는 독일 제국군의 공격을 격퇴한 공로로 성 게오르기 메달 4급을 수훈받았지만, 직후 심한 부상을 입어 육군 병원에서 요양해야 했다.
파일:external/www.echo.msk.ru/element-722543-misc-1.jpg
1916년 당시의 모습
퇴원한 후에는 러시아 원정군 소속으로 프랑스 전선에 파견되었고, 종전 후 1년 뒤인 1919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적백내전 시기에는 시베리아에서 저항하던 백군을 상대로 여러 전과를 올렸고, 내전 종결 후에는 정식 지휘관 교육을 받은 뒤 소총대대의 대대장으로 부임했다.

2.2. 전간기와 2차대전 시기

1926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고, 1927~30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고급 장교 과정을 수료했다. 졸업 후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던 제3기병군단의 참모장으로 근무했고,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6~38년에는 좌파 공화군을 지원하기 위한 의용군으로 파견되었다. 그럼에도 비슷한 시기 소련에서 진행된 대숙청의 풍파를 피할 수 있었고[4], 귀국한 뒤에도 오히려 참전 공로를 인정받아 레닌훈장적기훈장을 받았다.
파일:external/www.echo.msk.ru/element-787731-misc--1938.jpg
1938년 당시의 모습
이후 프룬제 군사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독소전쟁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1941년에 이전 상관이었던 국방장관 티모셴코의 부름을 받고 야전 업무에 복귀했고, 오데사 군관구 소속의 제9군 산하 제48소총군단 군단장에 부임했다. 당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수뇌부는 독일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말리놉스키는 티모셴코나 주코프 등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현실화되었다고 예견하고 전투에 대비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제9군은 루마니아와 맞닿은 프루트 강의 국경지대에서 독일 국방군과 처음 맞닥뜨리게 되었다. 말리놉스키는 최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하는 등의 대담한 행동으로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았고, 일시적이나마 독일 육군의 진격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강한 독일 육군의 공세 때문에 결국 흑해 연안을 따라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 도중 말리놉스키의 부대는 니콜라예프에서 독일 육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었지만, 이 포위를 뚫고 드네프로페트롭스크로 탈출했다.

비록 후퇴하기는 했지만, 말리놉스키는 독일군의 침공에 강하게 맞선 전과 덕에 8월에 제6군의 참모장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장 계급을 받고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독일군의 공세로 큰 피해를 입고 돈바스 지방으로 후퇴한 제6군은 재빨리 병력과 물자를 보충받아 개편되었고, 말리놉스키는 제12군과 합동으로 독일군의 동진을 저지하는 작전을 펼쳤다.

겨울이 되자 독일군의 진격은 둔화되었고, 말리놉스키는 12월에 남부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당시 남부전선군은 세 개의 야전군과 두 개의 기병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어느 부대든 인력과 물자의 소모가 막심했고 기병 군단의 경우 사실상 사단 정도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말리놉스키는 전의를 다잡고 역공을 가해 독일군 방어선을 어느 정도 서쪽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1942년 5월에는 티모셴코가 지휘한 남서전선군의 일원으로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참가했는데, 소련군의 역량을 너무 과신한 티모셴코가 무리한 전략을 짰다가 역으로 당하면서 첫 대패를 당했다. 이 패배의 책임은 주로 티모셴코가 졌기 때문에 말리놉스키는 크게 문책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의심병 환자 스탈린은 말리놉스키가 서방의 반공 성향 정치인들과 내통하면서 일부러 독일군에게 져주고 있는 게 아니냐는 근거없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입은 손실 때문에 남서전선군은 재편될 수밖에 없었고, 말리놉스키도 북캅카스전선군으로 옮겨 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스탈린은 말리놉스키에게 로스토프로 진격해 오던 빌헬름 리스트의 독일 육군 A집단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말리놉스키는 무리한 명령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에 따라 방어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방어전은 우려했던 대로 또 실패해 탈탈 털리고 말았다.

소련군이 볼가 강까지 밀리게 되자 스탈린은 말리놉스키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비하려고 도시 북동부에 급조한 제66군 지휘관으로 앉혔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말리놉스키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는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부의 정치장교였던 흐루쇼프에게 말리놉스키의 동태를 철저히 관찰하라고 지시했다.

말리놉스키가 맡게 된 제66군은 그 때까지 전투 경험이 전무했던 뉴비 부대였지만, 1942년 9~10월 동안 진행된 독일군의 마지막 대공세에서 스탈린그라드 북부 방면의 포위 위기를 막아내고 진격을 둔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어 11월에 주코프와 바실렙스키가 입안한 천왕성 작전으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지휘하던 독일 육군 제6군이 포위되자, 히틀러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돈 집단군에 스탈린그라드 남서 방면에서 소련군 포위망을 돌파해 제6군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헤르만 호트가 이끈 기갑 집단을 선봉에 내세운 돈 집단군은 명령대로 남서 방면으로 진격했지만, 말리놉스키는 이를 발견하고 제2근위군을 동원해 호트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리고 소(小) 토성 작전의 일환으로 돈 집단군을 역으로 포위하는 작전까지 실행했지만, 포위 직전 호트 기갑 집단은 가까스로 퇴각했다. 결국 스탈린그라드에 방치되어 있던 독일 육군 제6군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소련군에 항복하면서, 소련은 독소전쟁 개전 이래 독일을 상대로 최고의 승리를 거두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전으로 조공을 맡았던 말리놉스키도 상장으로 승진했고, 동시에 수보로프 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43년 2월에는 남부전선군 사령관으로 다시 부임해 로스토프주에서 만슈타인과 맞붙었고, 여기서 만슈타인 군을 분쇄하고 우크라이나로 통하는 길을 여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대장이 되었고, 남서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돈바스 공업지대를 재탈환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말리놉스키는 10월 중순에 독일군에게 기습 공격을 가해 자포리자에서 섬멸하는데 성공했고, 이 결과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양단되고 말았다.

이후 말리놉스키는 제3우크라이나전선군으로 개칭된 남서전선군을 계속 지휘했고, 1943년 12월부터 1944년 4월까지 독일 남부집단군을 탈탈 털면서 자신의 고향 오데사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을 해방시켰다. 이 공로 덕에 그 동안 서방 끄나풀 아니냐고 의심하던 스탈린도 말리놉스키를 다시 보게 되었고, 1944년 5월에는 말리놉스키를 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속시켜 몰도바를 탈환하고 루마니아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말리놉스키는 자신의 후임으로 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을 맡은 표도르 톨부힌과 함께 첫 공세를 시작했지만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을 앞세운 독일군의 강한 저항을 만나 실패했고, 8월 말에 마찬가지로 톨부힌과 연합해 더 강하고 기습적인 대공세를 벌여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을 합쳐 415,000명의 포로를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신나게 두들겨맞은 루마니아에서는 그 동안 바지사장이었던 국왕 미하이 1세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그 동안 철권 통치를 휘둘렀던 친독 성향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를 쫓아내고 연합국으로 돌아섰고, 말리놉스키는 이 공로로 톨부힌과 함께 소련 원수 계급장을 받았다.

이후에도 말리놉스키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은 트란실바니아알프스 산맥을 넘어 헝가리로 진격했고, 요하네스 프리스너의 남부집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10월에 데브레첸을 점령했다. 이어 소모된 병력과 물자를 톨부힌의 제3우크라이나전선군과 새로 편성된 루마니아 제1군/제4군의 협력으로 보충한 뒤 12월 말에 부다페스트 점령 작전을 시작했다. 히틀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부다페스트를 내줘선 안된다면서 여섯 개의 무장친위대 기갑사단과 다섯 개의 육군 기갑사단을 동원해 반격하도록 명령했지만, 이미 수많은 전투 경험을 갖추고 장비 면에서도 훨씬 우세했던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결국 한 달 반 가량 계속된 격렬한 시가전 끝에 말리놉스키는 부다페스트를 점령했고, 그 기세를 계속 이어서 슬로바키아로 진격하고 1945년 4월에 오스트리아을 점령했다. 말리놉스키의 진격은 4월 말에 체코브르노를 탈환하면서 끝났고, 소련은 이 연이은 공세의 성공으로 루마니아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화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파일:메레츠코프와 말리놉스키와 바실렙스키.jpg
다롄 비행장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모습[5]
유럽 전선의 전쟁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자, 말리놉스키는 극동 지역의 자바이칼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만주 작전 준비를 시작했다. 이미 수많은 야전 경험을 쌓았고 장비도 일본 육해군에 비해 훨씬 좋았던 소련군은 겨우 열흘 동안 관동군을 신나게 털었고, 말리놉스키는 이 공로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만주 점령 이후, 만주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을 지시했고 스탈린의 지령 하에 미국과 완전히 척지지 않는 수준에서 중국 공산당을 무장시켰다. 미국 외교관 존 멜비는 이때 그에 대해 "눈곱만큼의 고상함이나 자비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2.3. 종전 후

2차대전 종전 후 말리놉스키는 자바이칼-아무르 군관구의 사령관과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을 역임했고, 극동군 총사령관 시기에는 중국 인민해방군북한 조선인민군의 훈련과 물자 보급을 맡아 국공내전한국 전쟁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또 스탈린으로부터 완전한 신임을 받아 소련 최고회의 의원(1946)에 선출되는 한편,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한국전쟁 휴전 후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가 해체된 뒤에도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 재직했고, 이후 흐루쇼프가 스탈린 사후 권력 투쟁 끝에 서기장이 되자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및 국방차관에 임명되었다. 독소전쟁 시기부터 말리놉스키를 눈여겨 보던 흐루쇼프는 그가 주코프보다 덜 반항적이고 체제 순응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고, 1956년 2월, 20차 당대회에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켜주고 있었다. 이후 말리놉스키는 사망하는 시점까지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남는다.

결국 주코프가 흐루쇼프의 핵무장 방침에 반발하다가 1957년 10월에 국방장관 자리에서 축출되자, 말리놉스키는 주코프의 후임으로 자리를 이어받았다. 물론 말리놉스키도 주코프와 마찬가지로 핵무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보지는 않았지만, 훨씬 유화적이고 외교적인 수사로 흐루쇼프를 설득해 핵무기 개발과 재래식 군대의 현대화를 동시에 추진했다.

이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쳐 1964년 10월, 흐루쇼프 축출 음모에 소극적이나마 가담하였고 수슬로프 등 흐루쇼프 축출에 망설이던 간부회원들을 대거 반 흐루쇼프 음모로 끌어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공으로 브레즈네프-코시긴-포드고로니-셸레핀의 과두정이 수립된 후에도 국방장관에 유임되었으나, 1964년에는 외교 사절로 방소한 저우언라이에게 연회 자리에서 만취한 채 "우리가 흐루쇼프를 쫓아냈듯이 당신들도 낡은 덧신인 마오쩌둥을 제거할 차례"라고 말하는 외교적 대형사고를 쳤다. 이후 군의 현대화와 독자성 확보에 주력하다가 1967년 3월에 병환으로 사망했다. 장례는 여타 소련 육해군 원수들과 마찬가지로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소련 육군 기갑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 말리놉스키 기계화학교로 개칭되었고,[6] 모스크바 군관구 산하의 제10근위전차사단에도 말리놉스키의 이름이 붙었다.

3. 수훈 경력

4. 진급 이력

5. 기타

  • 소련 전선 사령관 중 유일하게 프랑스어, 독일어를 현지인급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 낚시, 사진 촬영, 체스를 취미로 즐겼다. 특히 체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는데 여러 대회에 참가하는 건 물론이고 직접 체스 문제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1] 혼전성은 쿠체렌코(Кучеренко).[2] 게르만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뇌수막염으로 요절.[3] 갈페리나의 소생의 아들.[4] 소련의 대공화파 원조 공작의 총책임자였던 구 볼셰비키 베테랑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부터 시작하여 스페인 내전 참전자, 망명온 독일이나 다른 나라 출신 공산주의자, 전간기 중국에 원조 고문단으로 파견되었던 인사들처럼 조금이라도 '외국물' 먹었던 당원, 간부들이야말로 오히려 대숙청의 집중된 타겟 중 하나였다.[5] 왼쪽부터 키릴 메레츠코프, 말리놉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6] 이후 1998년 프룬제 군사대학과 통합후 러시아 군사 종합 아카데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