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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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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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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0000><colcolor=#ffd700> 소비에트 연방 제22대 총참모장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 Сергей Ахроме́ев | Sergey Akhroméev | |||
본명 | 세르게이 표도로비치 아흐로메예프 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Ахроме́ев Sergey Fyodorovich Akhroméev | ||
출생 | 1923년 5월 5일 | ||
소련 러시아 SFSR 탐보프현 스파스크구 빈드레이읍 빈드레이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모르도비야 공화국 토르베옙스키군 빈드레이) | |||
사망 | 1991년 8월 24일 (향년 68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크렘린 최고회의 청사 | |||
묘소 | 트로예쿠롭스코예 묘지 | ||
재임기간 | 제22대 총참모장 | ||
1984년 9월 6일 ~ 1988년 12월 1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c0000><colcolor=#ffd700> 배우자 | 타미라 바실리예브나 아흐로메예바 | |
자녀 | 딸 2명 | ||
복무 | 노농적군 | ||
1940년 ~ 1946년 | |||
소비에트 지상군 | |||
1946년 ~ 1991년 | |||
최종 계급 | 원수 (소비에트 지상군) | ||
병과 | 기갑 | ||
주요 참전 | 독소전쟁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
주요 서훈 |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4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적성훈장 (2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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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모스크바의 제1특수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하일 프룬제 고등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동부전선 해군보병대 하급부사관으로 복무한 뒤 다시 미하일 프룬제 고등해군사관학교로 복귀했다. 1942년 5월부터 8월까지 흑해함대에서 함포 관리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육군으로 전군하여 제28군 제197예비보병연대 소총소대장을 역임했다. 아흐로메예프는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승리를 이끌었다. 1944년 7월부터 하리코프 및 모스크바 군관구의 제14자주포여단 기계화보병대대장을 역임했다.18개월이 지났지만 집에 돌아간 적은 없다. 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겨울 내내 밖에서 잤기 때문에 따뜻했던 적이 없다. 늘 전사하거나 아사한 동무들뿐이다. 내 소중한 동지들 10명 중 8명이 죽었다. 중학교 동기 32명 중 살아남은 건 나를 포함한 2명이 끝이다.
아흐로메예프의 회고록
아흐로메예프의 회고록
2.2. 전후~냉전
1945년 6월부터 9월까지 SU-76 자주포대대 부대대장을 역임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SSR 바쿠 군관구 제31근위기계화사단 제14중전차및자주포연대 ISU-122 자주포대대장으로 임명됐다. 1952년 스탈린 군사학교를 졸업한 뒤 프리모스코이 군관구 제39군 제190전차및자주포연대장을 역임했다.2.2.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년부터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성공적으로 승리해서 파키스탄 서부 지역을 단번에 점령했다. 이로서 소련 해군의 보급로가 완벽히 확보됐다. 바실리 추이코프, 키릴 모스칼렌코를 비롯한 여러 장군들이 아흐로메예프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동료들에 의하면 아흐로메예프는 밤낮 없이 근무했다고 한다.2.2.2. 전후
1983년 원수로 진급했다. 이로서 아흐로메예프는 총참모장을 역임하지 않고 원수로 진급한 처음이자 마지막 소련군 원수가 됐다.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총참모장을 역임했는데, 그는 냉전 종식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힌다. 하지만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 따라 합의된 OTR-23 오카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전량 해체에 앞장서서 반대했기 때문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눈엣가시로 등극했다. 결국 그는 반강제로 총참모장 자리에서 물러났다.1988년 12월부터 소련 공산당 총서기 고문을 역임하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당시 군대를 배치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방사선 측정, 토양 제염[1], 폐기물 처리도 아흐로메예프의 지휘 하에 진행됐다.
이후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과거 악감정을 말끔히 털어낸 고르바초프는 유능한 아흐로메예프의 사직서를 처리할 때 상당히 망설였다고 한다.
1990년 3월 15일에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대통령 군사고문으로 임명됐으나 이후 긴급하다고 판단되는 군 관련 문제에 대한 보고가 계속 미뤄지는 등 이런 행보에 지쳤는지 다시 1991년 6월에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고르바초프는 망설이다가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았다.
2.3. 8월 쿠데타 및 사망
아흐로메예프는 쿠데타를 피해 가족들과 소치에서 휴가를 보내다 주동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을 만났다.이후 8월 20일부터 소련 최고회의 청사였던 크렘린 행정동[2]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올레크 바클라노프와 실무진을 구성하여 쿠데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바클라노프 몰래 비밀리에 비상사태 대비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8월 21일까지 자신의 사무실에서 밤을 보냈고, 아침에는 소치에 남아있는 가족들과 통화를 했다. 그리고 야나예프의 신임을 얻기 위해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에 제출할 보고서 초안을 작성했으나 정작 야나예프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8월 22일에는 고르바초프에게 소련 해체를 저지하겠다는 뉘앙스의 편지를 보냈으나,
Почему я приехал в Москву по своей инициативе — никто меня из Сочи не вызывал — и начал работать в «Комитете»? Ведь я был уверен, что эта авантюра потерпит поражение, а приехав в Москву, ещё раз убедился в этом. Дело в том, что, начиная с 1990 года, я был убеждён, как убеждён и сегодня, что наша страна идёт к гибели. Вскоре она окажется расчленённой. Я искал способ громко заявить об этом. Посчитал, что моё участие в обеспечении работы «Комитета» и последующее связанное с этим разбирательство даст мне возможность прямо сказать об этом. Звучит, наверное, неубедительно и наивно, но это так. Никаких корыстных мотивов в этом моём решении не было.
8월 22일 고르바초프에게 보낸 편지
8월 22일 고르바초프에게 보낸 편지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물론 야나예프의 신임도 얻지 못하고 8월 23일 국가안보 최고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이후 같은 날 밤, 소련 최고회의 청사의 사무실에서 아내에게 남기는 유서와 유언을 적은 메모를 남긴 후 창틀에 목을 메달고 자살하고 말았다.
Не могу жить, когда гибнет моё Отечество и уничтожается всё, что я всегда считал смыслом в моей жизни. Возраст и прошедшая моя жизнь дают мне право уйти из жизни. Я боролся до конца.
조국이 무너지고 있고 내가 믿은 모든 것들이 파괴되는 상황에서 살 수가 없다. 내 나이와 지금까지의 삶을 고려하면 이제 세상을 떠나도 상관없다. 나는 끝까지 싸웠다.
1991년 8월 24일, 유서의 내용
조국이 무너지고 있고 내가 믿은 모든 것들이 파괴되는 상황에서 살 수가 없다. 내 나이와 지금까지의 삶을 고려하면 이제 세상을 떠나도 상관없다. 나는 끝까지 싸웠다.
1991년 8월 24일, 유서의 내용
그리고 8월 24일 21시 50분, 자살한 상태로 경비원에 의해 발견되었고, 경비원의 신고를 받은 검찰청이 23시 정각에 현장에 도착한 이후 시신을 수습했고, 이후 법의학자들이 사망시각을 조사한 결과 21시에 첫 번째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끈이 끊어지면서 실패했고 다시 매듭을 묶은 후 또다시 목을 멨고, 대략 21시 20분에 사망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목을 메달고 죽었는데, 유서와 자살론이 가짜라는 주장이 나왔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그의 메모 역시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3]
1991년 9월에 두 딸과 부인이 참석한 가운데 트로예쿠롭스코이 묘지에 안장되었고, 안장된 지 다음 날 맘에에 무덤은 도굴되어 훈장이 패용되어 있던 예복이 도난당했다고 한다. 범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며 또 다시 같은 자리에서 장례식이 진행됐다.
3. 진급 이력
[1] 방사선에 오염된 인체, 장치, 실내시설 등에서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는 행동[2] 1929년에 추도프 수도원, 보즈네센스키 수녀원, 소 니콜라옙스키 궁전을 헐고 1932년 착공하여 1934년에 준공한 건물로 처음에는 소비에트 연방 제1적군학교가 입주했다가 1년 만에 레포르토보로 이전하면서 1938년에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관저가 되었고, 1958년부터 1967년까지 극장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청사로 쓰였고, 2008년부터 12년까지 공보실, 의전실, 대외정책국, 공문서보관소가 입주했다가 2016년 철거되었다.[3] 아내에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