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6 09:57:40

니키타 흐루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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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 흐루쇼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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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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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963년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출생 1894년 4월 15일러시아 제국 쿠르스크현 칼리놉카
사망 1971년 9월 11일 (77세) | 소련 러시아SFSR 모스크바 연방시
국적 러시아 제국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png소련 파일:소련 국기.png
종교 무종교(무신론)
직업 정치인
신체 166cm
경력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53년 9월 14일 ~ 1964년 10월 14일)
소련 장관회의 주석 (1958년 3월 27일 ~ 1964년 10월 14일)

1. 개요2. 이름의 한글 표기3. 생애
3.1. 초기 이력
3.1.1. 젊은 시절3.1.2. 제2차 세계 대전3.1.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2. 지도자로 등극하다
3.2.1. 스탈린 격하 운동3.2.2. 미국과의 대결3.2.3. 교회 박해3.2.4. 국민 생활 수준, 의료 수준 향상과 주택 건설
3.3. 몰락
3.3.1. 군사교리 수정과 군부의 반발3.3.2. 농업정책 대실패3.3.3. 실각과 그 이후
3.4. 사망
4. 회고록5. 일화6. 매체에서
6.1. 영화6.2. 게임6.3. 기타

1. 개요

"그는 스탈린이 가장 신뢰한 졸개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팔꿈치까지 피를 묻히며 충성할 정도로. 그럼에도 그는 스탈린주의, 소련 시스템, 그리고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회복이 불가능한 치명상을 입혔다. 그는 헝가리 혁명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그럼에도 그는 강제수용소 문을 열어 수백만 명을 풀어주었고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출판을 허가했다. 그는 베를린 장벽을 쌓아올리고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했지만 소련의 재래식 병력을 일방적으로 감축했으며, 미국과의 화해 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었다. 그는 잔인하고, 독선적이었으며, 무자비하였지만, 너그러웠고 대중적이었으며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 뉴욕 타임스에 실린 레온 아론의 서평.

소련공학자, 정치인.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련의 최고권력자로,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소련 공산당 제1비서(제2대 서기장)와 소련 장관회의 주석을 지냈다. 하지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 의해 실각하고 여생을 보내다 1971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 이름의 한글 표기

영어권에서 그의 성씨인 'Хрущёв'를 'Khrushchev'로 옮겨 적은 표기가 한국에 전해지면서 러시아어 발음과 동떨어진 '크루시체프'로 널리 알려졌으며[1], 냉전시기 러시아통이 전무했던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어 표기인 '후루시초후(フルシチョフ)'의 영향으로 '흐루시초프'라는 표기가 사용되었다. 심지어 영문번역일 경우에는 'Khrushchev'의 영어 발음([ˈkrʊʃtʃɛf\])에서 비롯된 '크루체프'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잘못된 표기에 대한 원인은 щ의 발음상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щ가 러시아어에서 시치([ɕt͡ɕ])→시([ɕː])의 변화를 겪는데[2], 영미권에서 쓰이는 러시아어 라틴문자 표기법인 BGN/PCGN상에서는 일괄적으로 'щ'에 대해서 'shch'로 옮겨적기 때문에, 이걸 답습해서 일본어에선 '후루시초후(フルシチョフ)', 한국어에선 '크루시체프' 내지 '흐루시초프'로 쓰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행 외래어 표기법상에서 щ는 '시'로 표기되고, 이에 따라 Хрущёв[xrʊˈɕːɵf\]는 '흐루쇼프'로 표기된다.

3. 생애

3.1. 초기 이력

3.1.1. 젊은 시절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이 강하고, 오랫동안 살았기에 우크라이나인으로 종종 오해되나 실제로는 1894년 러시아 쿠르스크주 칼리놉카(Калиновка)에서 나고 자란 러시아인이다. 그러던 1908년 만 12세의 나이로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현(Екатеринославская губерния) 유좁카(Юзовка, 현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 도네츠크)로 이사왔다. 그리고 이때 가정 상황이 좋지 못해 학교에 불규칙적으로 다니다 문맹이 되었다.[3] 그러나 대단한 지력을 가졌으며 이는 그의 정적들도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광산 기술자였기 때문에 징집에 면제되었다. 대전 중에는 노동조합에 가입해 활동하다 10월 혁명 후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적백내전에서 붉은 군대에 입대해 백군에 맞섰다. 전후에는 광산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 당의 주목을 받는다.

이렇듯 출신 성분, 능력 모두 우수한 검증된 인재였기에 젊은 나이부터 우크라이나와 모스크바 두 공산당 고위 간부로 일했으며, 상관인 라자리 카가노비치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건설에 관심을 가져 스탈린 공업학교에 입학해 건설학을 배우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두번째 아내가 되는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와 같이 공부를 하게 되어 후일 개인적으로 스탈린을 알게 된다.

이후 모스크바 지하철 공사 감독을 맡아 블라디미르 레닌 훈장도 받고, 스탈린의 측근이 되어 당의 핵심 인물이 된다.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 동안 흐루쇼프와 일하던 동료 대부분이 숙청을 당하는데, 그 와중에 그는 대숙청에 일조하기도 했고[4], 이 와중에 그 자신 또한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능숙하게 처신하여 살아남게 된다. 나중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수장으로 임명된 그는 거기서도 숙청을 담당하게 되는데, 거의 모든 정부요직과 군 간부들을 숙청하고 거의 예외 없이 사형시켰다고 한다. 당시 흐루쇼프가 자신이 숙청한 인물들 중에 무고한 사람들이 있음을 알았던 것은 확실하고, 1939년에는 "인민의 적들을 찾아내 제거해야 하지만, 무고한 한 명의 인민이라도 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5]

3.1.2. 제2차 세계 대전

흐루쇼프는 소련군폴란드 침공 당시 스탈린의 명령으로 폴란드에 진주하는 소련군을 따라가면서 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참고로 소련 붕괴 후 기밀해제된 카틴 학살 관련 서류에는 흐루쇼프의 사인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사실상 우크라이나에서처럼 숙청을 관리 및 감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그는 키예프에 있었는데, 키예프 방어를 위해 군과 협력하였으나 키예프의 함락을 막을 수는 없었고, 1942년 초에 하르코프 방면에서 스탈린의 무모한 공격명령을 수행하던 도중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고 그가 정치장교로 있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은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26만 7천 명이 전사하고, 20만 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사를 겪는다(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그로 인해 숙청당할 위기에 몰렸으나,[6] 스탈린은 그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보낸다.[7]
파일:attachment/krscv.png
스탈린그라드 전투 시절로 추정되는 흐루쇼프의 사진.

이렇게 보내진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승리를 거뒀으나, 그 직후인 5월에 개인적으로 큰 사건을 겪게 되는데 공군 전투기 조종사이던 아들 레오니트 흐루쇼프[8]가 적기에 격추돼 실종된다. 먼 훗날인 1990년대에 시신을 찾아 전사로 확인됐지만 당시에는 비행기와 유해를 찾을 수 없어서 탈영이나 배신 등 여러 음모론이 나왔다.

이에 흐루쇼프는 스탈린에게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실종된 레오니트를 탈영병으로 규정하고, 탈영병의 가족을 처벌하는 연좌제 규정에 따라 큰며느리를 굴라그로 보내버린다.[9] 그리고 이 사건을 결정적인 계기로 이후 흐루쇼프가 스탈린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10]

3.1.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3년 말 우크라이나로 복귀한 흐루쇼프는 재건 작업을 맡았다. 그러면서 당시 산발적으로 봉기하고, 잔존한 반소 게릴라[11]들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당장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굶주림에도 생산되는 식량 대부분이 모스크바에서 다른 지역으로 수송됨을 알고,[12]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서 이를 수정하여 우크라이나에 식량을 보내달라 요청하나 거절 당한다.

이에 흐루쇼프는 직접 모스크바로 찾아가 스탈린과 대면해 약간의 식량을 얻어내나, 이 일로 스탈린에게 찍혀 상관 카가노비치에게 자리를 잠시 빼았겼으나 1947년 복권된다.[13]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스탈린 앞에만 가면 재롱둥이(…)가 되어 춤[14]추고 노래하며 대머리를 농담 삼아 딸랑딸랑 귀여움 받는 등 꽤나 수모를 당했다고…

3.2. 지도자로 등극하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서기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내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6개월 만에 서기장에서 사임하였다.[15] 이 과정에서 스탈린의 충복인 라브렌티 베리야와 권력 다툼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게오르기 주코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등의 지지를 얻어 결국 베리야를 반역죄로 처단하고 서기장에 등극한다.

지나칠 정도로 주의 깊고, 어찌 보면 소심할 정도인 스탈린과는 정반대로 굉장히 과격하고 앞뒤를 재지 않는 호쾌한 성격을 자랑했다.[1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Khruschev_shoe_fake.jpg
UN 회의장에서 연설할 때 구두를 벗어 연단을 치면서 연설했다는 사진이 있으나, 조작된 사진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건 자체는 일어났다고 하며, 필리핀의 UN 대변인인 로렌조 스믈로그가 소련을 비방하는 연설을 하자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구두를 벗어 자신이 앉아있던 책상을 내려찍었다고 한다. 다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소리나 사진자료 등은 남아있지 않으며, 정확히 어느 타이밍에 일어났는지도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우리 상식에서는 납득이 안 되는 괴상한 행동이지만, 러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제스처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 당시의 사진을 분석해 본 결과 흐루쇼프는 양쪽 발 모두 구두를 신고 있었다고 한다.[17]

스탈린을 격렬하게 비판해서 스탈린 체제의 억압성을 수정하려 한 것은 높게 평가받지만, 반대로 이것이 그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켰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흐루쇼프의 통치시기는 소련 역사상 몇 안 되는 해빙기의 하나로, 이 당시의 젊은이 세대가 나중에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정책)의 주축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

파일:external/img.hani.co.kr/117911124965_20070515.jpg
한창 잘 나가던 때의 흐루쇼프.[18]

피가 피를 부르던 소련 정치를 순화한 인물이기도 했다. 스탈린 시절만 해도 권력 투쟁에서 패한 경우는 대부분 처형되었는데, 흐루쇼프는 연쇄 강간마 베리야를 제외한 다른 정적들(말렌코프, 불가닌, 몰로토프, 보로실로프 등)을 당에서 추방만 했을 뿐, 처형이나 감금 같은 물리적인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정적들은 비록 권력을 잃고 야인이 되었으나, 모스크바에서 고액을 받는 연금생활자로 지내거나 혹은 지방의 한적한 기관으로 좌천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방침은 후임 서기장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절에 와서도 마찬가지였고, 흐루쇼프 자신도 그 길을 따라 야인이 된 후에도 고액 연금수령자로서 수혜를 입었다.

3.2.1. 스탈린 격하 운동

그가 서기장 자리에 막 앉았을 당시에는 누가 뭐래도 흐루쇼프는 스탈린주의자로 보였으며, 스탈린의 신적인 우상화는 아직까지도 소련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비난하면서 그를 신적인 위치에서 독재자로 끌어내려 세계를 놀라게 했다.

라브렌티 베리야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억압적 정책을 대부분 폐지했고 고문 방지 법안을 내고 굴라그에 끌려갔던 이들을 석방시켰다. 이런 베리야의 자유화 정책은 다른 정적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흐루쇼프, 말렌코프 등 여러 정적들이 베리야를 "국가를 흔든다"는 명목으로 잡아 처형했다. 이것으로 다시 스탈린 시대로 정책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흐루쇼프는 한 술 더 떠서,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소련 전역과 전 세계 공산주의 국가에서 모인 대표단을 앞에 두고 무려 5시간에 걸쳐 '개인 숭배와 그의 결과에 대하여'라고 이름이 붙은 비공개 연설을 행했다. 여기서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여러 비행들을 나열하고,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하라는 레닌의 유언장, 스탈린의 키로프 암살 사주, 대숙청, 독소전쟁 당시 스탈린이 저지른 악행들을 열거하면서 "우리는 스탈린 덕분에 독일을 이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겼다"[19], "스탈린은 천하의 악당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독재자"라고 주장했다. [20]

당시 이 연설을 들은 소련 공산당 고위 당직자들은 충격을 금할 수 없었으며, 심장마비를 일으키거나 후에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할 정도였다. 후문에 의하면 흐루쇼프가 연설을 마치자 오랫동안 청중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가, 이윽고 사람들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고 한다. 이 연설에서 착안한 공산주의 유머가 있는데 전당대회에서 졸던 당직자 한 사람이 자다가 깨서 놀란 나머지 "흐루쇼프! 이 더러운 반동!"이라고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왜냐고? 잠결에 21차 전당대회가 열렸다고 착각하고 흐루쇼프의 후임이 흐루쇼프를 격하하고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이것을 기점으로 소련의 체제도 많이 순화되었고, 많은 정치범들이 석방되었으며, KGB는 반정부인사를 체포하거나 처형하는 역할보다는 감시하는 역할로 바꾸었고, 반역자로 처형된 여러 명이 복권되었다.

비단 소련 국내 뿐 아니라 전세계 공산주의권에도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특히 마오쩌둥 통치하에서 스탈린주의 체제를 고수하던 중국과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수정주의 논쟁으로 번지며 두 국가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중국은 소련을 주적으로 간주하고 소련과의 전면전을 가정한 군사전략을 수립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며 1970년대에 이를 간파한 미국이 전격적으로 중국과 수교하게 된다. 또한 동유럽에도 일시적으로 자유와 해방의 물결이 퍼져나가면서 폴란드에서 포즈난 항쟁에서의 학살극을 벌인 스탈린주의파가 물러나서 고무우카가 집권하였으며, 헝가리에서 반소무장봉기가 일어나서 너지 임레가 집권하게 되나, 흐루쇼프는 폴란드에 대한 대응과는 다르게 헝가리의 반소봉기는 무자비하게 진압한다.[21]

본인도 물론 독재자라는 평가지만, 적어도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로 분류하던 서방 학계의 정의에 혼란을 줄 정도로 사회 억압을 풀고 광신적인 지도자 숭배를 완화했으며 피의 숙청이 난무하던 정치 문화를 온건화했고 모든 잉여생산물을 철저히 수탈해 공업화에만 쏟아붓던 스탈린식 경제 정책을 완화, 민생 경제를 향상시킨 업적 등을 고려하면 스탈린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다.

한편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위기감을 느낀 고참 정치위원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은 반당집단을 만들어 흐루쇼프와 대적하지만, 이미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다진 흐루쇼프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들은 모조리 실각해 본격적으로 흐루쇼프의 1인 체제가 열리기 시작한다.

이후 흐루쇼프는 50년대 말, 60년대 초가 되면 '전인민국가론'을 전면에 내세우며 세 가지 개혁을 하는데 하나는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국회처럼 개방하고 공식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물론 일부 인민들에게는 연설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방 당조직을 농업분야와 공업분야로 나누고 두 조직의 권한을 같게 해서 경쟁을 붙이는 것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바로 지방의 작은 소비에트부터 공산당 중앙위원회까지 매 선거때마다 모든 위원의 3분의 1이 무조건 교체되어야 한다라는 규정이었다. 이 규정들은 여러모로 공산당원들이 계급화되어가는 소련체제를 개혁할만한 나름 좋은 수였지만 흐루쇼프가 실각하자 마자 전부 취소되었다.[22]

3.2.2. 미국과의 대결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의 대결만큼은 그도 호락호락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미군의 항공력이 너무 강해 핵폭탄이 있어도 그걸 운반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련의 베르너 폰 브라운이라 할 수 있는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그의 거대 로켓 R-7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소련에서 미국까지 단 20분 만에 핵폭탄을 날릴 수 있는 로켓이 가한 충격은 대단하였으며, R-7의 페이로드를 이용해 스푸트니크 위성 시리즈를 연달아 발사, 미국의 체면을 박살내는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국민을 안정시키려던 아이젠하워 정권은 그야말로 지지도가 급락했고, 다급하게 미국의 인공위성을 쏘기 위해 강행한 미해군뱅가드 로켓 계획도 전세계가 생중계로 지켜보는 앞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쪽박을 제대로 뒤집어썼다.

그나마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와 육군 미사일 팀이 익스플로러 1호를 쏘면서 간신히 미국의 체면은 유지했고, 그 뒤로 미국은 "다시는 빨갱이에게 지지 않겠다!"며 NASA를 설립하고 과학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등 이후 미국의 우주정책이 쾌속질주할 수 있도록 엄청난 투자를 했다. 그리고 결과물은 아폴로 계획 착륙이라는 괴물.[23][24]

미국은 공군이 미약해서 자신들을 위협할 수 없을 것이라던 소련이 갑자기 ICBM이라는 신무기로 자신을 위협하자 화들짝 놀라 미니트맨 미사일을 600기 이상 배치했다. [25] 당시 소련은 전후복구에 중점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본격적인 핵무기 생산 경쟁을 할만한 사정은 아니었고, 소련의 당시 사정은 최소한의 전쟁억지력으로서의 필요한 핵무기만 배치한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흐루쇼프 당시에는 본격적인 핵탄두 경쟁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전후복구가 마무리된 이후인 1960년대 후반부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탄도탄 전력을 엄청나게 증강시켜 1970년대 말에는 소련이 미국을 추월한다.

이런 미사일 만능주의 정책, 그리고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관련 정책[26] 등이 얽히면서 재임 중에 전 세계가 전면적인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몰렸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다만 위에서 열거했듯이, 그는 전쟁의 참상을 그 누구보다도 더욱 뼈저리게 느끼는 위치에 여러번 있었고,[27] 당장 자신의 아들도 전쟁 중에 실종되어 사망했으리라 여겨지고 있었으며, 자신 역시도 스탈린 정권의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최후까지 미국에서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전쟁은 피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었고, 미국 역시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핵전쟁만은 최후의 선택으로 여기고 피하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결국 양측이 합의하는데 성공하는 뒷배경도 있었다. 실제로 겉으로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물밑에선 흐루쇼프와 케네디의 최측근 인사들이 직접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미지와는 달리 굉장히 신중한 사람.[28]

3.2.3. 교회 박해

그러나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기에 종교면에서는 스탈린보다 더 탄압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의 부흥을 허가하고,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국가 행사에 초청하던 스탈린과는 달리[29] 흐루쇼프는 러시아 정교회를 대놓고 박해하는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독소전쟁 시절이 예외였을 뿐 소련에서 종교, 특히 러시아 정교회는 언제나 탄압 대상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 성직자들은 차르 시대의 전제주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찬성해 사회 변혁을 억눌렀고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바라본 종교의 기능과 일치한다. 혁명 이후 공산당은 국가 무신론으로 인민들을 계몽(?)하면 더 이상 종교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 전망했으나 이것이 계속 빗나가자 공산 정권은 정교회를 박해했다.[30][31]

그로 인해 러시아 정교회는 스탈린보다[32] 흐루쇼프를 "악마의 자식", "사탄의 제자"라고 훨씬 더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가 오히려 죽어서 정교회의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던 것은 스탈린 시대 살아남기 위해 정권에 아부한 처세와 비슷하다. 이미 정교회는 존립 기반이 심각하게 흔들릴 정도로 탄압받았고 수도회와 신학교는 강제 폐쇄되었으며, 기존의 사제들과 신자들은 어용화된 국가 공인 교회에 발길을 끊고는 탄압을 피해 몰래 숨어 성찬예배를 드려야 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정교회는 한동안 비밀결사였다.[33]

흐루쇼프의 종교 제한 정책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깊은 동면에 들었으며, 오랜 세월 후에 고르바초프의 개혁 때 다시 사회에 등장하여 숨통을 트기 시작하더니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 연방이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재부흥을 맞게 된다.

3.2.4. 국민 생활 수준, 의료 수준 향상과 주택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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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러시아의 흐루숍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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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중공업 치중을 벗어나 경공업을 중시하여 일상용품의 생산을 강조하였다. 스탈린 시대는 경제 성장률은 높았으나 중공업 몰빵으로 국민 생활 수준은 안습이었는데 흐루쇼프 시대부터 소련은 살 만한 나라가 된다. 흐루쇼프 시대는 경제 성장률도 높았고 국민 생활 수준도 빠르게 향상되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도 이 정책은 계승되어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소련에 TV와 세탁기, 라디오(...)[34]같은 가전제품이 널리 보급되었다. 경공업 중시와 일상용품 생산 강조는 흐루쇼프 시대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국민 생활 수준 향상은 흐루쇼프의 공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브레즈네프도 흐루쇼프의 국민 생활 수준 향상 정책을 계승하여 브레즈네프 시대에도 소련 국민의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었지만 소련 국민의 건강과 의료 수준 향상은 흐루쇼프는 대성공했지만 브레즈네프는 대실패해 의료 복지는 흐루쇼프가 브레즈네프보다 확실히 잘했다. 2차대전 이후 스탈린 시대 말기부터 흐루쇼프 시대 말기까지 소련 국민의 평균 수명 증가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러시아 SFSR의 1948년 평균 수명은 남자 47세, 여자 56세였는데 1964년 평균 수명은 남자 64.89세[35], 여자 73.58세로 선진국 수준 턱밑까지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남자의 평균 수명은 3세나 감소했고(...) 여자의 평균 수명은 크게 감소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증가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이었다. 이후 1980년대 중반 고르바초프가 금주법을 시행하여 남자의 평균 수명이 흐루쇼프 시대 말기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1987년 64.83세에서 남자 평균 수명이 더 증가하지 않아 1964년 64.89세 기록을 경신하지는 못했다.

한편 당시 소련은 독소전쟁 후에 수많은 주거지가 파괴된 데다가 도시화로 인한 주택난이 가중되었는데, 흐루쇼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량의 아파트를 빠른 기간내에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소형 아파트가 주요 도시 지역에 대량으로 건축되었고, 이 아파트를 무상으로 공급하면서 당시 소련의 주거난 해소에 기여했다. 이러한 소형 아파트들은 흐루숍카(Хрущёвская квартира)라고 불린다. 이 아파트는 애초에 값싸게 대량으로 건축된 만큼 외관이 후지고 층간소음도 심했으며 주방도 좁았고[36] 천장이 낮은 등 스탈린카(스탈린 집권기에 건축된 고급 아파트)에 비하면 훨씬 후졌기 때문에 개집이나 판자촌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공용 아파트나 진짜 판자집 따위에 거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서 소련 서민층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상당수의 흐루숍카가 여전히 서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있다.[37] 이 덕분에 러시아를 포함한 주변의 동유럽 국가와 중앙아시아에서도 흐루숍카 아파트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 몽골 울란바토르 시내에도 간간히 보인다.[38] 보통 5층에서 9층 구조에 가로로 늘어져 있는 형태가 가장 일반적이며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대도시에는 12층 짜리도 많이 있다.

그리고 소련에서 일반인들에게 별장(다챠)이 보급된 것도 이 시기로 그 이전에 고위층이나 일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 등 일부에게만 나누어주었던 별장을 불특정 다수에게도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주면서 별장이 일반화되었다.

3.3. 몰락

3.3.1. 군사교리 수정과 군부의 반발

소련은 냉전이 시작되자 다시 부활한 종심작전 이론에 의해서 서방보다 거대한 재래식 전력을 보유하여 전쟁억지력을 갖추려고 했다. 이는 독소전쟁의 전훈에 의한 것이었으나, 문제는 미국은 나치 독일보다도 훨씬 거대한 생산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재래식 전력을 갖춘다는 것은 미국의 경제에 미치지 못하는 소련의 경제에 큰 부담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핵무기와 ICBM 등 전략무기를 확충하고, 재래식 전력을 감축하려고 했는데[39], 이는 독소전쟁을 거치며 비대해진 군부의 반발을 불렀다. 특히 흐루쇼프의 집권을 돕기도 했던 국방장관 게오르기 주코프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고 흐루쇼프는 1957년 주코프가 외유를 하고 돌아오는 시점에 그를 해임해버렸다. 주코프는 꼼짝없이 그대로 야인으로 내려갔다.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흐루쇼프는 사후 출판된 회고록에서 주코프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주코프를 해임한 후 흐루쇼프는 자신과 스탈린그라드 전투 시절부터 친했던 로디온 말리놉스키를 국방장관으로 내세웠고, 말리놉스키는 흐루쇼프의 생각대로 군을 개편했다. 그래서 소련 육군 교리도 핵과 미사일 중심으로 바뀌면서 BMP 보병전투차량의 등장 및 Object 775IT-1 미사일 전차 연구가 이 당시에 이루어졌다. 또한, 이 양반 덕분에 기존 중전차를 비롯한 재래식 전력의 도태가 빨라졌고 중전차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병기들에 사용될 예산들은 T-55와 T-62 같은 주력전차들에게 넘어갔다.

말리놉스키는 흐루쇼프의 심복이었지만, 흐루쇼프의 실각때 수수방관함으로써 흐루쇼프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문민통제의 입장에서는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게 한 말리놉스키의 행동은 합당한 것이지만, 으리로 보면 그는... 믿는 도끼에 발등찍은...

3.3.2. 농업정책 대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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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설명한 냉온탕을 오가는 대외정책과 군부의 반발 뿐만 아니라, 농업 정책의 실패도 흐루쇼프의 몰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흐루쇼프는 소련에 있는 광대한 미개척지를 개간하고자 하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실시한 게 미개척지 개간 사업인데, 문제는 미개척지의 대부분이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같은 곳이어서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에 별로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다. 춥고 메말라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농사 시작하면 망하기 딱 좋은 땅이라는 말.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처녀지 개간 운동을 참조

여기에 흐루쇼프의 농업정책은 트로핌 리센코 때문에 더 말아먹는다. 리센코는 용불용설을 변형해 종자를 냉각시키는 춘화처리를 하면 추위를 이기는 품종이 나온다는 '춘화이론'을 신봉했는데 이것이 생물학에 무지했던 스탈린과 공산당 고위층을 현혹시켰고 여기에 각종 실험조작등이 가해지자 소련정부는 리센코의 이론에 따라 소련 농업정책을 추진하고 멀쩡한 종자들을 얼리는 춘화처리를 한다. 게다가 스탈린 사후에도 리센코의 영향력은 여전해서 흐루쇼프 시대에 들어서면 처녀지 개간운동의 와중에 춘화처리는 오히려 확대된다. 이게 리센코의 춘화처리를 유사과학이라고 비판하거나 유전자 설을 주장한 니콜라이 바빌로프 등 리센코의 이론에 반박하는 생물학자들이 대숙청에 모조리 쓸려나가서 이미 리센코가 과학계의 독재자가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40]

그러나 리센코 이론의 결과는 참혹했다. 당연히 상당수의 멀쩡한 종자들은 얼어죽고, 그나마 살아남은 종자들은 획득성질을 상속받았다고 생각하여 황무지에 대거 심었지만 몇년만에 십수도의 온도차이를 이겨낼 성질이 나올리가 없으니 대부분 얼어죽어 농업생산량이 급감한 것이다. 여기에 집단농장체제의 비효율까지 겹쳐 소련 농업은 망했어요.[41] 적국인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들로부터 대규모의 식량을 수입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참혹한 실패는 흐루쇼프의 지도력에 치명적인 흠집을 냈다. 처녀지개간메달 문서에 이 때의 참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나마 남쪽의 참새를 싫어하는 인간과 달리 흐루쇼프는 잘못을 인정하고 재빨리 부족한 곡물을 수입해서 대규모 기근은 일어나지 않았다.[42]

그래도 흐루쇼프는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받았다.

3.3.3. 실각과 그 이후

흐루쇼프가 너무 막 나간 탓에 권력 기반이 악화되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당 내 원로 보수 인사들은 음모를 꾸몄다. 처음에는 반혁명 반당 음모사건을 조작해서 흐루쇼프를 체포하려고 했으나 결국 당 내 비밀회의에서 공격을 통해서 실각을 모의한다. 이 모의는 노출되었고, 흐루쇼프에게 보고되었으나 흐루쇼프는 이것을 허풍으로 여기고 오히려 쿠데타 세력들에게 너네 나 몰아내려 한다며?라고 농담을 하였다. 이 때문에 브레즈네프는 공포에 질려 니키타가 우릴 모두 죽일 거야!라고 울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흐루쇼프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브레즈네프 등은 거사하게 된다.

휴가 중 "농업발전 협의"로 급거 소환된 흐루쇼프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등의 공격에 못 이겨 결국 무능을 이유로 자진 사임하게 되었고 사실상의 쿠데타 혐의로 별장에 감금된다. 소련은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을 이어받음으로써 보수화된다. 흐루쇼프 본인도 어느 정도 낌새는 눈치챘다고 한다. 다만, 낌새를 눈치챘음에도 혼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순순히 물러났고, 그 과정에서 연금, 여생을 보낼 주거에 대한 부분을 협의했는데 브레즈네프는 연금액을 100루블에서 80루블로 깎은 것 말고는 다른 조건은 다 그대로 들어주었다고 한다.

흐루쇼프가 이렇게 맥없이 무너진 이유는 여러가지로 분석 가능한데, 일단 그 자신의 건강 상태도 너무 안 좋았다는 점, 적백내전과 스탈린 통치를 겪었던 그가 또 다른 분열을 일으킬 자신이 없었다는 점이 있다. 흐루쇼프의 건강 문제는 의외로 심각해서, 흐루쇼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CIA가 몰래 그가 사용한 화장실에서 남긴 걸로 채변검사(...)를 실시한 결과 "이 사람 아직까지도 살아있는게 신기하네." 수준이었다고 한다.

실각 상태에서 연금과 아파트, 그리고 별장을 받은 흐루쇼프는 강요된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실각 전날 측근에게 말했듯이 스탈린 시절이면 물기 하나 안 남기고 증발했을 것이지만 이제 시대는 바뀌었고, 감시 상태지만 외국 인사들이나 예술가들의 방문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흐루쇼프의 아들의 회고에 의하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자주 울곤 했다고 한다.

흐루쇼프 실각 후에 당의 공식 역사에서 흐루쇼프의 공로는 모두 삭제된다. 방대한 분량의 '소련 대백과 사전'에서 그의 공로들이 모조리 삭제된 건 유명한 일화이다.

당시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였던 리처드 닉슨[43]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했는데, 하필이면 흐루쇼프가 별장에 간 사이에 아파트에 방문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흐루쇼프가 남긴 말들 중 "내가 한 일들 중 의미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사형당하지 않고 그저 유배되게 소련을 변화시킨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의 경제정책 자체는 브레즈네프가 집권하면서 부정당했지만 흐루쇼프가 시행했던 정책 중 상당수는 브레즈네프 시기에도 폐지되지 않고 시행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탈 스탈린화 정책을 펼쳤고, 재임기간 내내 수많은 유머러스하거나 탈권위적인 일화를 다수 남김으로써 소련을 말 한번 잘못했거나 태업했다하면 굴라그로 끌려가거나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을 하면서 고생을 해야하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사회분위기를 지닌 나라에서 현대 중국 수준의 독재로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닌 국가로 변화시켰고, 소련이 고도성장을 하는 과정에서도 인민들이 여전히 궁핍한 삶을 면치 못했는데 나름대로의 자유를 주면서도 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며, 이런 점에 있어 흐루쇼프가 소련에 남긴 유산은 크다.

3.4. 사망

1971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감시는 심했지만 나름대로 거창한 장례식을 치렀지만, 크렘린 벽 묘지에는 묻히지 못하였다. 지금은 노보데비치 수도원보리스 옐친과 함께 묻혀 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도 나름대로 명망 있는 인사들이 많이 묻혀 있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크렘린에 비하면... 또 전직 서기장임에도 러시아에서는 신문 한 줄로 사망소식이 언급되었고 서방에서만 그의 사망이 큰 이슈가 된다. 실각했음에도 아들 세르게이는 고위공무원으로 살다 소련이 붕괴한 1991년 미국 브라운 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가 된다.

4. 회고록

은둔생활 후 회고록 작성에 착수한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회고록을 위한 구술녹음자료[44]를 만들었는데 모종의 사정으로 복사본이 유출돼서 서방에 흘러들어가게 된다. KGB에서는 녹취자료를 관리 중인 흐루쇼프의 아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그 원본을 입수, 보관하게 되고 이 원본은 소련 붕괴 전후에 공개된다. 서방에서 유출된 회고록이 출판되자 소련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그것은 CIA의 작품임을 언명하고 흐루쇼프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회고록의 내용을 부정한다. 사실 이 라디오 방송 출연은 실각 후 그가 유일하게 공식 석상에 나온 때다. 당연히 회고록이 조작이라는 것 자체가 강요된 거짓말. 하지만 CIA가 여러모로 개입한 것은 맞으며, 특히, 번역과정에서 의도적인 오역으로 소련 체제의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한 사실도 있다.

흐루쇼프 회고록은 격동의 소련 현대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그가 겪은 스탈린 시대의 불합리성 및 높으신 분들에 대한 비판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내용이었으며,[45] 쿠바 미사일 위기 등의 사건에서 소련이 보인 반응에 대한 훌륭한 연구 자료로 평가받는다.

특히 주목할 것은 당시에도 논쟁 중이던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서 김일성이 스탈린을 방문해서 남침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확답을 받았다는 증언인데, 종래의 내전설, 남침 유도설, 소련 명령설[46]을 완전히 부정하는 자료였다.

5. 일화

왜인지 몰라도 옥수수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 본인이 공산진영 지도자답지 않게 팝콘도 즐겨 먹는 등 옥수수를 좋아했으며 1959년 방미시에 본 아이오와 주의 옥수수 대농장에 감명을 받아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에 대신 개량형 옥수수를 심기도 했으나 기후에 맞지 않아 똥망하면서 소련 전역에 식량 위기가 찾아왔고 결국 이는 5년 뒤에 그가 실각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 자신이 우크라이나 출신인 만큼(정확하게는 러시아에서 출생한 러시아인이기는 했지만 출생지 자체가 우크라이나와 가까워서 우크라이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어린시절부터 우크라이나에 살았다), 우크라이나에 나름대로 애정과 관심이 있었다. 옥수수 건도 식량난을 뭔가 획기적으로 개선해보려다가 실패한 경우이다. 이후 소련에서 옥수수는 동물사료로 사용된다.

참고로 미국에선 "소련에서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흐루쇼프는 바보다!'를 외치다가 체포돼서 징역 23년형을 선고받았는데 국가 서기장 모독죄로 3년에, 국가 기밀 누설죄로 20년을 더한 것이라더라"는 농담이 존재한다는데, 이 농담을 만든 사람이 '흐루쇼프' 본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47]

학력이 낮고 좀 멍청해보이는 이미지이긴 했지만, 경력이나 행적들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흐루쇼프는 막가파 이미지나 농업 생산력 증대 관련으로 놀림받으면 받았지 바보 이미지로 놀림받진 않았다.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소련 서기장 자리는 체스 실력으로 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펩시를 세계 굴지의 음료회사로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1959년 모스크바 엑스포 당시 미국에서 펩시콜라 담당자도 소련으로 왔었는데 펩시콜라 담당자가 느닷없이 흐루쇼프에게 콜라를 권하자 흐루쇼프는 기꺼이 받아마셨고, 닉슨과 같이 건배도 했다. 그리고 흐루쇼프가 기꺼이 콜라를 받아마신 사진이 세계 각 언론을 통해 전파되면서 펩시콜라의 판매량은 급속하게 늘어나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하게 되고, 브레즈네프 시기에 펩시가 소련에 진출하면서 1986년에 코카콜라가 소련에 진출하기 이전까지 소련의 콜라시장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보기도 하였다.

집권 중에 러시아 소속이었던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버렸다. 이에 대해선 그가 우크라이나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만큼 우크라이나 공산당 경력과 인맥 관리가 중요했기에 우크라이나에게 세바스토폴이라는 괜찮은 항구도시 하나 주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그 시절에야 단순한 행정구역 변경 정도였겠지만... 이는 수십년 뒤 2014년 크림 위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결국 크림 반도는 러시아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 때 소련 최고회의는 아무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한 거수기 역할에 그쳤고 훗날 이 결정은 당시 헌법 기준으로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휘하에서 부통령으로 재직하던 시절인 1959년 유명한 이른바 '주방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라는 발언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 그의 또 다른 농담 및 어록
    • 흐루쇼프가 협동농장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돼지들이 '흐루... 흐루...' 하며 울고 있었다(러시아어로 돼지 우는 소리가 'хру хру'이기 때문. 흐루쇼프의 철자는 Хрущёв). 그러자 흐루쇼프가 말하길, "돼지들이 발음을 똑바로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잘 시키시오."
    • "정치인들이란 다 똑같다. 개울도 없는데 다리를 놔주겠다고 공약을 하니 말이다."
    •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
    • 1960년대에 흐루쇼프를 취재하던 한 이집트 기자가 시가를 피우자 흐루쇼프는 시가를 빼앗아 재떨이에 문질러 꺼버렸다. 기자가 왜 그러냐고 하자 "이건 자본주의의 상징이오. 당신은 나세르의 친구이니 시가를 피울 수 없소"라고 강하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쿠바 혁명이 일어난 후, 그 기자가 다시 흐루쇼프와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번엔 흐루쇼프가 웃으면서 시가 한 상자를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기자가 놀라서 "놀랍습니다, 각하. 지난번 저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라고 하자 "물론이오. 그러나 카스트로 동지가 혁명을 이룩한 이후로 이 시가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시가가 되었다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오 쾌남 오오
    • <냉전의 역사>라는 책에 따르면 마오쩌둥에게 "베를린은 서방의 아킬레스건이오. 그것은 '물집이 생겨 통증을 주는, 유럽에 놓인 미국의 발'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마찬가지 <냉전의 역사>에 따르면 "베를린은 서방의 고환이다. 서방세계가 아파서 소리지르게 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베를린을 꽉 움켜쥔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서기장 양반, 내가 고자라니!
    • 스탈린 사후, 국제혁명의 노선 문제와 당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 문제의 입장 차이라는 핑계의 국경분쟁으로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 사이에서 영토분쟁이 벌어졌을 때 이 갈등을 봉합하고 형제 사회주의 국가의 연대와 우애를 유지하기 위한 회담이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이때 중국대표로 회담에 참여한 사람은 저우언라이. 한참 동안 격렬한 논쟁을 벌어졌지만 양국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열받은 흐루쇼프는 저우언라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부르주아 지식인 계급 출신인 당신이 노동자 계급 출신인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소!".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물론,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심각한 계급적 문제를 가지고 있지요. 자신의 출신계급을 배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도 회담이 끝난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흐루쇼프는 대인배(?)스럽게 손님인 저우언라이에게 행렬의 선두 자리를 양보했고, 국제혁명의 영도자인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두고 어떻게 내가 선두에 서겠느냐는 저우언라이의 사양에 대해 "당신을 내 뒤에 두면 그 지팡이로 내 머리를 후려칠까봐 무섭소."라고 대답함으로써 복수했다. 이것만 보면 뭔가 째째한데[48]
    • 한 유머를 질리도록 하기도 했는데 아이고 흐부장님, 그 중 하나가 아데나워에 관한 농담이었다고 한다. 그는 독일의 문제는 아데나워의 알몸으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뒤쪽은 좌우로 갈라져 있고, 앞쪽은 못 일어서기 때문이라고(…). 흐루시초프 치하만 해도 서독은 전쟁의 참화로 개발살이 났기 때문에 했던 말이다.[49]
  • 생전에 소련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내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50]에게 1971년 죽기 일주일 전 본인이 먼저 전화를 걸어 사저로 불러서 "나는 당신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당신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시인이라서 진실을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정치가였다. 정치가라는 것이 얼마나 역겨운 직업인지 당신은 모를 거다. 정치가는 쫓겨나지 않으려고, 그저 소리지르는 수밖에 없는 자리다"라며 옙투셴코에 대한 탄압을 사과했고, 옙투셴코는 흐루쇼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 닉슨과 통화를 하면서 "쿠지카의 어머니를 보여주겠다(Показать кузькину мать)"[51]라고 엄포를 여러 번 놓았는데, 미국 측에서 "쿠지마와 그 어머니가 대체 어떤 인간들이기에 그걸 보여주겠다는 건가"하고 어리둥절했다는 이색 에피소드가 있다.[52] 이 말은 "혼쭐을 내 주겠다(teach someone a lesson)"라는 러시아어 숙어인데 당시 미국에 이런 숙어를 이해할 정도로 러시아어를 잘 하는 사람이 많이 없었기에 일어난 일. 흐루쇼프와 코시긴의 통역가였던 빅토르 수호드레프(Viktor Sukhodrev)가 증언하기를, 흐루쇼프가 미국인들에게 처음으로 이 말을 꺼낸 것은 그 유명한 '주방 논쟁(Kitchen Debate, 1959)' 당시였다고 한다. 비유하자면,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속담을 듣고 여럿이 함께하면 못해낼 것이 없다라는 뜻의 관용어로 오해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 마네시 광장에서 예술 전시회가 열렸을 때 직접 전시회장에서 추상화를 감상한 다음에 "당나귀가 제 꼬리로 그렸어도 이보다는 낫겠다!"는 감상평을 남기면서 추상화가들을 깐 일이 있다. 사실 당대 서방 일반인들이나 여러 유명인사들이 보기에도 이러한 추상 예술이 이게 그림이냐, 내가 그려도 이것보다 낫겠다며 까이기는 마찬가지였다만, 하필 흐루쇼프가 그 말을 꺼냈기에 그 무게감이 엄청났고 덕택에 소련 미술계는 다시 빙하기로 접어들었다는 웃지 못할 후문이 있다.[53]

6. 매체에서

6.1. 영화

  •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는 밥 호스킨스가 흐루쇼프 역을 맡았는데, 웃기는 것은 10여 년 전에 제작된 이너 서클에서는 이 사람이 흐루쇼프가 처형하는 베리야 역을 맡은 것이다. 같은 문어머리이기 때문에 ..
  •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배경이기 때문에 정치국 회의에서 쿠바로 화물선을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짧게 등장한다.
  •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선 초상화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 영국에서 제작한 블랙코미디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에선 말라깽이로 나오며 스티브 부세미가 명연기를 보였다. 영화에서 흐루쇼프는 실제로 스탈린 밑에서는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환심을 사다가도[54], 스탈린이 죽고 권력 공백이 생기자 능수능란하게 일을 처리하고 계략을 내 정적을 냉정하게 숙청하는 실제 역사의 흐루쇼프를 잘 묘사했다. 원수 베리야를 숙청하고 권력을 드디어 잡지만, 자기도 브레즈네프에 실각될 것이라는 암시[55]를 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6.2. 게임

  • 메탈기어 솔리드 3에서 카메오(?) 출연한다. 더 보스의 망명으로 소련 영토가 데이비 크로켓으로 핵공격을 받는 사태가 벌어지자 군부 강경파를 진정시킬 겸 위장망명이 아니라는 증명을 위해 미국이 더 보스를 제거하는 김에 덤으로 자국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볼긴 대령을 암살해줄 것을 미국 쪽에 은근히 요구하는 역할이다. 스네이크제로 소령과 무전연락을 할 수 있는 것도 서기장 권한으로 위성채널을 빌려줬기 때문이며, 작전지역 내에 조력자를 심어둔 것도 그의 밀명이다. 어떤 의미로는 스네이크의 스폰서 되시겠다. 성우는 시오야 코조(일)/David Thomas(영)
  • SD세계대전에서 영웅유닛으로 등장한다.(하지만 영웅같지 않다)
  • 호이4에서 소련 장관진으로 등장하며 공산주의 지지도를 높여준다.

6.3. 기타


[1] 이 표기는 ё의 움라우트를 누락시킨 잘못된 라틴문자 표기에서 비롯된다. ё는 1917년에 도입된 문자로, 이전에는 발음은 다르지만 е와 구분 없이 쓰였다. 발음을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변형해서 도입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러시아어 교재, 저학년용 교과서, 정확성이 중요한 TV 뉴스를 제외하면 ё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2] 그래서 러시아의 전통 스프 요리인 보르시가 대외적으로는 보르시치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3] 20대 후반에서야 겨우 글을 읽고, 이름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4]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일하던 당시 직접 스탈린에게 보고한 사형수 숫자만 8500명이라고 한다. 서기장 동무, 딸랑딸랑[5] 1956년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격하하며 대숙청에서 사용된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했다.[6] 스탈린이 몸소 그의 대머리에 담뱃재를 털면서 "로마에서는 패장에게 재를 뿌리는 풍습이 있었네."라고 했다고 한다.그래도 목숨은 부지했으니[7] 영화 에너미 엣더 게이트에도 흐루쇼프가 지휘관으로 나온다.[8] 레오니트 흐루쇼프는 망나니로 유명했는데, 술을 마시던 중 빌헬름 텔 흉내 내다 사과 대신 부하 머리를 맞춰 죽여 최전선으로 좌천된 후 적기에 격추 당했다. 스탈린의 둘째아들 바실리 스탈린과 닮았는데 바실리 역시 술주정뱅이에 공군 조종사였고, 걸핏하면 사고를 쳐 스탈린의 속을 엄청 썩였다.[9] 며느리는 5년 뒤 석방되었지만, 스탈린 사후까지 자기 자식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하지도 않았고, 커서도 어머니가 반역자라고 배워왔던 흐루쇼프의 손자들은 친모와 사이가 죽을 때까지도 미적지근했다고 한다.[10] 실제 흐루쇼프는 집권 후 며느리를 가혹하게 대한 심문관을 총살시켜버렸다.[11] 홀로도모르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역은 반소 감정으로 들끓었다.[12] 소련 특유의 유통 제도 탓.[13] 라자르 카가노비치는 인생역정도 비슷한 흐루쇼프의 선임자 노릇을 했는데 워낙 감정이 없고(자신의 형 미하일을 독일 스파이로 몰아 죽였다) 스탈린에게 잘 보이려고 딸랑이짓을 충실히 해서 흐루쇼프는 개인적으로 이 사람을 엄청 싫어했다. 카가노비치는 스탈린 사후 처음에는 흐루쇼프를 후원했지만 스탈린 비판이 시작되자 위기감을 느껴 말렌코프, 몰로토프와 함께 흐루쇼프를 끌어내리려다가 역공을 받아 실각, 칼륨 공장장으로 좌천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고참 볼셰비키들 중에서는 그가 가장 오래 살았다. 바로 소련이 해체되기 5개월 전인 1991년에 사망했다. 심지어 흐루쇼프보다 1살 많았다.[14] 그것도 다른 춤이 아니라 춤추기 힘든 걸로 악명 높은 우크라이나 전통 춤 고팍. 코사크 사람들이 털모자 쓰고 펄쩍펄쩍 뛰는 그 춤 맞다.[15] 말렌코프는 서기장 사임 후에도 정치국에 잔류하다가 니콜라이 불가닌, 라자르 카가노비치 등과 함께 1957년 흐루쇼프를 실각시키려는 시도가 발각되어 지방수력발전소장으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숙청된 덕에(?) 자신들을 숙청한 흐루쇼프와 비슷한 또래임에도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특히 카가노비치는 흐루쇼프보다 한 살 위인데도 고르바초프 시대까지 살아 소련 해체 바로 직전에 죽었다.[16] 아래의 경우도, 호쾌한 기분파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부분으로 언급되기도 한다.[17] 이 에피소드는 EBS 인터넷수능 영어 지문에 "흐루쇼프가 서양 사람들이 정치적 논쟁을 매우 좋아해서 그들이 원하는 걸 연설에서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이런 행위를 했다."고 나오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18] 저 사진을 본 사람들은 "왠지 뒤에 있는 사람을 패고 오는 것 같다"고 한다(...)[19] 물론 대숙청으로 인한 소련군 약체화나 독소전쟁 초기의 뻘짓 등의 문제점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스탈린이 독소전쟁 승전에 기여한 바는 크다.[20] 연설의 내용을 보면 거의 시작부터 마르크스는 개인숭배를 배격했다, 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흐루쇼프가 단단히 준비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21] 사실 원래는 너지 임레가 스탈린주의파와 대립했다가 쫓겨나는 경험이 있던 만큼 흐루쇼프와는 정치적인 성향은 비슷했기에 초기에 너지 정권을 승인하려 했지만, 너지가 집권한 이후에 헝가리가 유고슬라비아처럼 WTO를 탈퇴하고 중립화 선언을 하려고 하는 등 소련에게서 독립하려고 하자 망설이다가 태도를 바꾸고 헝가리에 군대를 내보내서 너지 정권을 뒤엎게 된다. 반대로 고무우카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긴 했지만 WTO에 잔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22] 대숙청 이전의 소련의 지방분권화 복구나 즈다노프가 약속했던 최고 소비에트의 다자후보 선거 같이 급진적 개혁은 하지 못했는데, 그 정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인지 실각한 탓에 점진적 정치개혁이 중지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23] 그러나 미국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NASA의 예산은 끊임없이 줄어들었으며, 그 결과 지금은 지구에는 까지 사람을 보낼 수 있는 로켓이 없다. 오죽하면 2003년 중국인 우주비행사 양리웨이가 3번째로 우주 유인을 나가자 이걸 빌미로 미국 우주선 관련 예산이 늘지 않을까 기대를 했을 지경이다. 사실 오리온 계획이라고 달 착륙 및 유인 화성우주선까지 통합하는 계획을 진행하기는 했는데, 2008~2009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예산이 안녕하신지 심히 우려되는 상태.[24] 사실 아폴로 계획은 당시에도 가히 엄청난 비용을 들인 프로젝트라 다시 실행하는 것부터가 매우 힘들다. 또 그렇게 비용을 들여서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이나 성과가 없는 것도 문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지만 달에 대해 조사하려 했다면 차라리 로봇을 보내는게 인간보다 훨씬 나았다. '인간 달착륙'에 악을 쓴 것은 실질적인 성과가 따라와서가 아니라 그저 소련과의 자존심 대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25] 1964년 당시 미국이 실전배치한 탄도탄 전력은 아틀라스 ICBM 113기, 타이탄 I 108기, 미니트맨 600기, 폴라리스 224기였는데 반해 소련의 탄도탄 전력은 R-7A 6기, R-16 172기, R-9A 11기 수준이었다.[26] 스푸트니크 쇼크로 패닉 상태에 빠진 미 의회는 ICBM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당시 생산가능한 중거리 미사일을 엄청난 속도로 만들도록 강요하였으며, 이들은 사정거리 문제로 인하여 미군은 이 미사일들을 서독과 터키에 대량으로 배치했고 냉전시기 최전방국가였던 서독과 터키에 대한 핵우산 정책으로 활용되었다. 소련이 똑같은 짓을 쿠바에 하려다 일어난 것이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 참고로 남한 역시 랜스 미사일과 같은 단거리 탄도탄이 배치된 적이 있다.[27] 자기 목숨도 왔다갔다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사업.[28]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 'D-13'에 보면 흐루쇼프가 정치인/외교관/군인들이 개입된 공식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2차대전에 참전했던 자신의 어릴적 고향친구를 밀사로 파견해서 백악관측과 비밀협상에 나서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케네디 대통령도 자신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한테 포괄적인 권한을 부여해서 최종협상에 내보낸다. 실제역사에서는 피그만 침공을 계기로 이미 양측이 서로 밀사를 보내면서 직접적으로 서로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29] 참고로 스탈린은 조지아신학생 출신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는 가난한 집 수재들은 학비가 면제되기 때문에 신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긴 했다.[30] 모스크바 시내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을 헐고 나서 소비에트 궁전을 세우려다가 무산되자 그 자리에 야외 수영장을 만든 것도 흐루쇼프가 했다. 동아시아 나라들의 사서를 보면 역적의 집을 밀어버리고 그 터를 아예 연못으로 만들어 버리는 조치가 꽤 자주 언급되는데 이와 좀 비슷한 것 같기도...?[31] 그래도 소련의 랜드마크가 될 만한 성 바실리 성당과 크렘린 궁 내부의 성당들은 헐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32] 스탈린 역시도 전투적 무신론자 연맹을 동원하여 정교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다가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애국심 마케팅에 이용하기 위해서 정교회의 숨통을 틔여준 것일 뿐이다.[33] 비밀결사라는 것이 기존 매체에서 신비조직이나 악의 심부름꾼으로 자주 표현되긴 하지만, 실제로 선악의 관계 없이 탄압을 피해 살던 세력들도 비밀결사라고 한다. 현재 북한에서 종교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든 종교인들도 이런 식이고, 일본의 가톨릭 박해로 숨어지낸 신자들인 카쿠레키리시탄 역시 일종의 비밀결사다.[34] 의외라면 의외일거 같지만 1960년의 당시 소련의 라디오 보급률이 50%에 지나지 않았다.[35] 소련 붕괴 이전 최고 기록이었다![36] 보통 호실 내부는 12~18평 정도에 2~3개의 방과 화장실 한 칸 정도 딸린 것이 전부이며, 초창기엔 이것보다도 더 좁아서 9~12평 정도가 고작이었다.[37] 사실 흐루숍카 자체는 일반인들에게 면적이 좁고 외형도 불품없어 보이기 때문에 큰 호평을 받는 주거형식은 아니지만 러시아 대도시 지역의 집값이 일반 서민들 기준에서 수십년치 봉급을 써야 겨우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싸기 때문에 그나마 싼 흐루숍카가 선호되고 있는 것이다.[38] 이는 몽골이 과거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 러시아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도 한 몫 했다. 당장 몽골어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39] 후에 1960년대 중국, 그리고 1990년대의 북한도 비슷한 전략을 쓴다. 재래식 무기를 대규모로 확충할 돈이 없을 때, 핵무기를 개발해 전쟁억지력을 갖추는 것은 오히려 싸게 먹힐 수도 있다. 소련 붕괴 이후에 러시아도 한동안은 이 전략을 고수해서 아쿨라급으로 대변되는 핵전력은 끝까지 지켜냈다.[40] 원래 소련 생물학계에선 1930년대까지만 해도 니콜라이 바빌로프를 필두로 한 유전자설(당시엔 가설. DNA는 50년대에 와서야 발견)이 대세였고 바빌로프 역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돌아다니며 무려 40,000개의 품종을 들여오는 등 열정적으로 노력했다. 이 양반은 심지어는 종자를 찾아 일본을 거쳐 한국까지 찾아왔고 1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니 흠좀무. 그러나 대숙청 당시 스탈린과 친분이 두터웠던 리센코와 달리 인맥이 없던 바빌로프는 고작 5분 동안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 형무소로 끌려갔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소련 인민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그는 '연구를 빙자하여 국고를 축내며 외국 여행이나 다닌 반동'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여러 과학자들이 스탈린에 탄원하여 사형은 간신히 면하고 종신형으로 대체되었으나 3년 후 형무소에서 굶어죽고 만다. DNA가 발견된 후인 1960년대에 바빌로프는 복권되었다. 이미 그는 굶어죽었지만...[41]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외로 초기 몇년 간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삽질들이 추가되면서 완전히 망했다.[42]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쩌둥이,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모토로 농업 증산을 실시했다가 비슷하게 농업을 말아먹었다. 여기에 중국은 한술 더 떠 흉작을 감추고 풍년이 들었다며, 외국에 곡물 수출을 계속 하다가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43] 물론 그는 화려하게 재기해서 대통령에 오른다. 하지만 흐루쇼프처럼 명예롭지 못하게 퇴임했다[44] 생애의 젊은 시절 항목에서 이미 설명됐지만 흐루쇼프는 사실상 반문맹 상태였다. 글을 읽을 순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글을 쓰진 못 했으며 기껏해야 자신의 이름을 적는 수준에 그쳤다.[45] 물론 회고록의 특성상 자신이 관여한 여러 범죄나 사건들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46] 한때는 김일성은 싫다고 징징거렸지만 스탈린이 강력하게 밀어서 남침했다는 설이 유행하기도 했다.[47] 브레즈네프 관련 농담이란 말도 있다. 하도 확대 재생산이 많이 돼서… 다만 이 정도 유머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흐루쇼프 시절 소련이 개방화된 것은 흐루쇼프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탈린 시절에 저랬다가는 본인의 처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조시대처럼 3족이 멸해질 정도였으니...[48] 얼핏 보면 째째하고 우스워보이기는 일화일 수도 있으나, 이 일화의 포인트는 공식 일정에서 공식 회담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공식적인 행렬의 선두자리, 즉 의전상 가장 중요한 자리를 양보했다는 점에 있다. 당시의 소련은 공산주의 진영의 종주국이었고, '국제혁명'이나 '범세계적인 형제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대와 우애'를 강조하던 당시의 공산권 국가 및 정당들의 분위기 속에서 국제혁명의 지도적 국가이자 정당인 소련과 소련 공산당의 지위는 자본주의 진영 내에서 미국이 차지하던 종주국의 지위보다 훨씬 공고했다(흐루쇼프의 후임자인 브레즈네프가 주장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별 국가의 주권이 제한될 수 있다는 노선- 을 생각해 보자. 게다가 국제 공산주의 진영 내에서 흐루쇼프의 영향력은 브레즈네프의 영향력보다 더 강력했다). 더구나 흐루쇼프가 소련의 1인자인 서기장 지위에 있었던 반면 중국에서 주은래의 지위는 모택동의 뒤를 이은 2인자인 총리였다. 즉, 이 사건에 대해 흐루쇼프를 대인배라고 보는 것은 서열 1위 국가의 서열 1위 지위에 있는 자신의 의전 서열이 서열 2위 국가의 서열 2위 지위에 있는 주은래보다 명백히 앞서고, 더구나 방금전까지 험악한 논쟁을 벌이던 상황에서도 손님에 대한 예의로 의전상 선두 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후에 오고간 이야기는 그냥 주은래가 흐루쇼프의 양보를 사양하고, 흐루쇼프는 주은래의 사양을 농담으로 받으며 재차 권했다는 정도일 뿐이다. 당시 흐루쇼프의 '당신이 내 뒤통수를 지팡이로 때릴까봐...' 운운은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에서도 웃으며 한 농담이라고 되어 있고, 뭣보다 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공식행사에서 공식 특사로 파견된 상대가 정말 자기 머리를 때릴 것이라고 걱정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다만 전후의 여러 사정을 보건데, 흐루쇼프는 농담을 무척 좋아했던 데 비해 농담을 그리 잘 하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49] '티토: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 재스퍼 리들리, 431쪽[50] 1961년 '바비 야르'라는 시를 발표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1년 1943년까지 많은 유태인들이 나치 독일군에 학살(단 유대인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도 포함되어 있었다)당했던 키예프 북서부 바비 야르라는 곳에 소련이 인근 공장의 폐기물 매립장을 세우려 하는 것에 대한 비판, 나아가 바비 야르 사건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려 사건을 잊혀지도록 하려는 소련에 대한 비판이었다. 1941년 8월에 독일군이 키예프를 점령하고 9월 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 동안 바비 야르에서 유대인 33, 771명이 총살당했으며, 1943년까지 유대인, 집시, 소련군 포로까지 합쳐 10만 여 명이 나치군에 총살당했다. 1939년 당시 키예프 인구(846, 700명)25.5%를 차지했던 유대인들이 1943년에 이르러서는 20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줄었다고. 또 스탈린이 죽었을 때 "우리는 스탈린이 다시는 그의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바비 야르에는 1976년에야 소련 정부가 추모비를 세웠고, 그나마 피해자인 유대인들이 추모비를 세우는 것이 허가된 것은 소련이 붕괴된 1991년이었다. 2011년 10월에 와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바비 야르를 국립추모공원으로 영구보존키로 결정했다.[51] 러시아어 및 영어판 위키피디아에 항목이 존재한다. 러시아어판에서는 '쿠지카'로 되어 있고 영어판에서는 '쿠지마(Kuzma)'로 되어 있는데, '쿠지카'가 '쿠지마'의 애칭(diminutive) 정도 되므로 별 차이는 없다. 웃긴 건, 흐루쇼프의 영향 때문인지, 영어판 문서가 러시아어판보다 더 길고 자세하다(...).[52] 쿠지카/쿠지마는 러시아 속담에 등장하는 사악한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고, 딱정벌레 종류의 해충 이름이기도 하고, 집에서 애들 때릴 때 쓰는 채찍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 외에 상황에 따라 악마를 지칭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여간 뜻이 영 좋지 않은 단어. 그리고 그런 쿠지카/쿠지마의 어머니 되는 사람을 꺼냈다는 것은 그보다 더 나쁘다는 의미.[53] 반면 미국은 문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앤디 워홀이나 잭슨 폴록 등 현대미술가들을 적극적으로 밀어줬다.[54] 스탈린이 쓰러진 날 아침에도 그런 모습이 보인다. 전날 연회장에서 실컷 어릿광대 놀음을 하면서 술에 취한 상태였지만 흐루쇼프는 집에 와선 아내에게 자기가 그날 스탈린 앞에서 한 농담과 스탈린의 반응을 모조리 받아쓰게 해서 정리했고, 그걸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복기하고 있었다.[55] 음악회장에서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는 정치국원들을 보여주면서 끝나는데, 나중에 흐루쇼프가 브레즈네프에게 실각당할 것이란 자막이 뜨는 와중에 흐루쇼프 윗줄을 보면 웬 송충이 눈썹이 흐루쇼프 정수리를 꼬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