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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문서는 소련의 문화에 대해서 다루는 문서다.한국에서 소련이 낙후된 나라로 인식되지만 출판과 언론, 영화, 연극, 음악, 프로스포츠를 비롯한 문화산업 자체는 어마어마하게 큰 나라였다. 이는 소련인들의 구매력이 생각보다 높았고 당대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휴가를 비롯한 여가시간이 많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1] 물론 아래에서 보듯이 검열이 발전을 막은 측면도 있고 오히려 검열때문에 역설적으로 지하 출판시장과 언더그라운드 음악 시장이 상당히 크게 발달했다. 대중문화도 장편 TV시리즈물이 많지 않다는 점 때문에 소련 문화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돌풍을 끈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2. 문학
러시아 제국 시기와 비교하면 소련 시기에는 문해율의 증가와 크게 저렴해진 책값, 도서관의 대대적인 확충으로 문학작품을 보편적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오히려 러시아 문학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는데 제정 말기에 번창하던 러시아 문학이 소련의 검열로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2] 혁명 당시 러시아에서 다른 나라로 망명한 작가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에서 발표된 문학작품을 평가 절하하기도 했다.하지만 소련 문학은 러시아 제국 시절 수많은 작가들을 배출한 전통에 이어 냉전 시기 동안에도 이념적으로 경쟁관계였던 서구권으로부터 높이 평가받았다. 한국에서는 노벨상 수상작가로 유명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외에도, 반체제 문학가들 뿐만 아니라 소련/러시아 SF 문학의 거장인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작품은 1950년대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 SF 잡지에 출간되기도 했다.[3]
소련의 문학이 러시아 제국 시대에 비해 쇠퇴했을지언정, 소련 정부는 알렉산드르 푸시킨, 미하일 레르몬토프,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니콜라이 고골, 이반 투르게네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문학 작품을 민간에 보급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4], 러시아 혁명 당시 해외로 망명한 러시아계 난민들도 러시아 문학을 전 세계에 보급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소련 성립 후에 문해율이 급증하고 의무 교육 제도가 발전하면서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이 써낸 작품들은 지식인 계층을 넘어 대중들까지도 널리 읽었으며, 제정 말기에 정점에 이른 19세기 러시아의 문학은 이념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문학이나 비평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소련 당국 역시 혁명 이후 문맹 퇴치를 국가적 과업으로 삼아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힘썼고, 그 결과 소련인의 독서율은 미국인 평균보다 전반적으로 더 높은 편이었다.
특히 제정 러시아의 문필가들은 정치성만으로 경력이나 문학사에 끼친 의의를 날리기 어려울 만큼 의미있는 존재였다. 한 예로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저자 미하일 불가코프의 경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팬이었다. 스탈린은 불가코프가 희곡 <백위군>이 당국의 검열을 받자 수정해 발표한 <투르빈가의 나날들>을 좋아해서 홀로 극장에 가서 보곤 했다. 1930년 반체제 작가로 찍혀 곤란한 처지였던 불가코프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 소련을 떠날 기회를 주거나 극장에서 생계를 위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다. 한 달 후 스탈린은 불가코프에게 전화를 걸어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 조감독으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직장을 얻은 불가코프는 지속적으로 반체제 작품을 투고하다가 극장관리자와 충돌해 조감독 자리를 잃고 출판도 금지당해 곤궁한 처지에 놓였지만 그래도 숙청당하지 않고 창작 활동을 이어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완성했다. 또한 <고요한 돈강>의 미하일 숄로호프 등 적지 않은 작가들이 소련의 공포 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점에서 반체제 작품을 기고했음에도 목숨을 연명했으며 군인과 당원들이 마구 숙청당하는 와중에도 문학인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다만 소련 체제에 대한 비판이나 스탈린 본인에 대한 비판은 좌시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스탈린 풍자시로 인해 추방당하고 결국 체포되어 굴라크에서 생을 마친 시인 오시프 만델시탐이 있다. 특히 소련 지도부에서 각별히 생각하던 러시아 문필가들이 아닌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지에서 활동하던 문학가들은 1930년대 대숙청 당시 민족주의 혐의로 대거 처형되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대숙청 시기 문학가들의 숙청을 가리켜 '처형되어버린 르네상스(Розстріляне відродження)'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소련 작가들 중에서는 러시아 제국 때부터 활동했던 막심 고리키의 경우 제정 시절에 쓴 작품들은 소비에트 리얼리즘의 원형이 되었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하일 숄로호프의 작품들조차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현대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재창조했다고 극찬을 받았다. 게다가 수준 낮은 어용 작품만 있던 것이 아니라, 제정 러시아 당시 문학가들의 비판정신과 문학성을 이어받아 소신 있게 부조리에 저항하는 작품들도 꾸준히 발표되었다. 소련 문학은 소설에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막심 고리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미하일 숄로호프, 미하일 조셴코가 활약했으며 시문학에서는 안나 아흐마토바,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일리야 에렌부르크 등이 활약했다.
또한 이념적으로 당국의 입맛을 충족시켜야 했다고 하더라도 소련작가동맹에 가입하려면 일단 작가동맹으로부터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5] 일단 작가가 되려면 문학적으로 기본 소양을 갖추어야 했다. 만약 작가동맹으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아 작가동맹의 회원이 되면, 적어도 배급에서 우선권을 얻거나 집필을 위한 유급 휴가를 얻고, 괜찮은 별장을 받는 등, 여러가지 면에서 우대를 받았다. 따라서 작가동맹에 속했던 인기 작가들은 인세 수입으로 소련에서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6]
흔히 SF 소설이라고 하면 미국 같은 서구권 작품을 많이 떠올리지만, 소련 역시 SF 소설에서 여러 거장들을 배출했다. 대표적으로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SF 3대 고전으로 불리는 우리들을 쓴 예브게니 자먀틴, 톨스토이의 친척인 알렉세이 톨스토이, 소비에트 리얼리즘 시기에는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있다.
소련 초기에는 탐정 소설이 유행하기도 했다. 제정 말기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한 러시아의 탐정 소설은 초창기부터 문필가들이 엉터리 문학이라며 학을 뗄 정도로 비판받았지만, 당시 셜록 홈즈같은 추리물을 대신하는 대체제로써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이 당시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탐정 소설은 그야말로 성서나 다름 없어서 1930년대 초반까지 탐정 소설을 애독했다. 소련의 탐정 소설은 적백내전의 트라우마가 남은 시절인 만큼, <붉은 핑커톤>이라 불리며 소련 내부의 간첩들을 잡아내고 서방의 음모를 분쇄하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소련의 대다수 작가들은 탐정소설을 싸구려 저급소설이라고 천시하여 탐정소설을 읽지말것을 권고하기도 했고, 스탈린 정권 시기부터 국제 혁명 기조가 시들해지고, 탐정 소설 작가들이 문학계, 정치계의 압력을 받기 시작하면서 소멸했다. 이후 소련 문학계는 제임스 본드와 비슷하게 NKVD, KGB 등 첩보원(스파이)들을 주제로 한 첩보물과 애국주의을 결합시키면서 문학 뿐만이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973년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던 봄에 있었던 17번의 순간들(Семьнадцать мгновений весны)은 소련에서 히트작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소련은 초기부터 정부 차원에서 오 헨리를 비롯한 영미권 작가들의 작품과 다양한 해외문학 작품들을 수입해 대중들에게 보급했다. 스탈린 사후 냉전 시기에도 외국 문학은 소련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대표적으로 셜록 홈즈나 반지의 제왕같은 시리즈가 인기를 끌어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영어는 소련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외국어 중 하나였다.
지역문학도 어느정도 발달했었다. 오히려 당대에는 시장의 수요에 의해서 출판량이 결정되지 않던 시절이라, 지역어 문학 출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판매량도 2억 6천만부로 소련 전체 도서 판매 총량의 10%대로 결코 무시못할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전국 단위로 출판되었고, 범용적이었던 러시아어 문학작품보다 판매량과 우선순위가 떨어졌기 때문에 지역어 문학작품의 출간량과 판매량은 러시아어 문학에 비해 적은 편이기는 했다.
소련 붕괴 이후 작가들은 1990년대 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소련 시절 작가들이 문학 교사 등의 일자리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면, 소련 해체 후 생활고가 어려워지면서 문화 지출이 줄어든데다가 출판 시장 또한 외국 문학들의 유입 등으로 인해 급격히 축소되어 수입 또한 일시적으로 감소했다. 여기에는 소련 문학작품 대부분이 이념적인 문제로 인하여 주로 소련에서 내수용으로 검열되어 왔던 점도 한 몫 했다. 1990년대 러시아 문학이 부진해 보였던 이유는 당연히 당시 러시아의 어려운 사정도 있지만, 동시에 시대가 급격히 변하면서 소련 문학에서 러시아 문학으로 세대가 교체되던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0년대를 거친 이후 러시아 문학은 2000년대부터 소련 문학보다 더욱 다양한 장르에서 새로운 작가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2.1. 반체제 문학
솔제니친과 같은 반체제적 작가들은 작가 동맹에서 파문당하고 닥터 지바고처럼 체제 자체를 비판하는 소설은 출간이 철저히 금지되었으며 검열을 통과한 출판물들도 반체제적 요소들은 철저하게 걸러졌다. 비록 스탈린 사후에는 검열이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이후에도 소련 당국은 체제에 반하는 내용은 주기적으로 검열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반체제 작가들은 익명으로 사미즈다트(самиздат)로 작품을 유통해야 했다.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집권 시절 동안에는 어느 정도 체제 비판이 허용되었다. 예를 들어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소련 작가동맹이나 당국으로부터 압력을 받았지만 직접적인 탄압은 없었다. 훗날 소련 반체제 문학의 거장으로 이름을 알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흐루쇼프 집권기인 1962년 11월 강제수용소의 실태를 고발한 명작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출간을 허가받아 소련 문학잡지였던 "노비 미르"에 출간할 수 있었다.[7]
하지만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은 다시 검열을 강화했다. 브레즈네프 시기 반체제 예술작품을 출간했던 예술가들은 지속적으로 KGB의 감시를 받거나 당국의 심기를 거스를 경우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강제로 약물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솔제니친이나 예브게니 옙투셴코,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등 반체제 예술인들이 해외로 망명한 것 또한 이 시기였다. 소련 당국에서 검열이 완화된 것은 19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이후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언론 및 출판의 자유가 완화된 이후의 일이었다.
대숙청과 즈다놉시나가 종료되고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진 뒤에도 문인들이 느꼈던 심리적 압박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서 <러시아 문학사>를 저술한 드미트리 스뱌토폴크미르스키(Дми́трий Петро́вич Святопо́лк-Ми́рский)는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의 문학 작품들은 상당수가 서랍 문학, 즉 시를 몰래 써놓고 책상 서랍 밑에 보관하는 형태로 창작과 유통이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8] 하지만 작가들도 당국에 순종적이지만 않고, 자신의 작품을 온전하게 출간시키기 위한 다양한 편법을 쓰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수기나 타자기 등을 이용해 책을 직접 유포하는 사미즈다트가 있었다. 또한 몇몇 작가들의 경우 지인들을 통해 서방으로 수기 원고가 반출되어 출판되는 경우도 있었다.[9]
2.2. 해빙기
스탈린이 사망하고, 소련은 엄혹한 분위기가 점점 완화되기 시작했다. 스탈린 시절 서슬퍼런 숙청이 잦아들고, 해빙기가 시작된 것이다. 소련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기 전부터 스탈린주의와 즈다놉시나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이 죽은지 2달이 되던 시점에 시인 올가 베르그골츠가 서정시를 쓸 권리를 공개 주장하고,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은 당에서 음악 분야에 개입하는 것을 중단할 것과 예술가를 감시, 감독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예술가들에 대한 신뢰를 호소하는 글을 발표했다.베르그골츠와 하차투리안의 공개적 의사 표명 이후, 시인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가 편집하는 잡지인 "신세계(노비 미르, Новый мир)"[10]에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고 작가의 개인적 관점을 강조하는 사설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또한 작가 베라 파노바, 연출가 레오니트 소린은 당 관료들의 화려한 생활과 도덕적 타락을 공격하는 작품들을 공개했다.
스탈린에게 빌붙어 옛 동료들을 팔아먹은 문화계의 보수파들은 대다수 예술가들의 분노에 찬 반격에 당황했지만, 1954년부터 반격을 시도했다. 소련의 유일한 문학 단체인 작가동맹을 통제하는 그들은 일부 회원을 추방하고, 자신들을 비판한 여러 잡지의 편집자들을 경질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예술가와 일부 언론인들은 1954년에서 1955년 사이 보수 세력의 보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련 사회의 부조리를 묘사했다.
1956년에 흐루쇼프가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스탈린을 고발하는 비밀연설을 발표한 직후,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분노는 더 격렬해졌다. 학자와 대학생들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단체들을 결성했으며 과학계에서도 들고 일어나, 유사 과학자 트로핌 리센코를 끌어내렸다.[11]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예술계에서 보수파들이 힘을 잃자, 여러 작가들이 스탈린 시대에 예술가들을 탄압한 문화계의 보수파, 관료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스탈린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작가 동맹의 전임 회장이었던 알렉산드르 파자예프가 자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흐루쇼프가 실각하면서 적폐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 책임자에 대한 조사와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3. 음악
소련의 이미지로 인해 흔히 한국에서 "소련 음악"이라고 하면 선전 가요나 군가, 클래식, 민요를 떠올리는 일이 잦다. 더 나아가, 한국의 경우 공산권 국가에서는 군가나 민요 등의 노래만 부르며 락이나 팝 등의 대중 가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12] 하지만 이런 노래들을 제외하고도 소련 음악계는 음악적으로 뛰어난 인재를 대다수 배출했다.물론 검열로 유명했던 소련에서 음악 활동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문학가들이 여러 차례의 필화를 겪었듯 음악가들 또한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이런 검열은 스탈린 시절 정점을 찍었는데, 이 시절 노래에는 반드시 스탈린을 찬양하는 소절이 들어가거나 공산당의 입장을 반영하는 내용이 필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두 번째 오페라 작품이었던 "므첸스크의 맥베스"로, 이 작품이 스탈린의 취향과 맞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쇼스타코비치는 프라우다의 혹평에 시달리다 반강제로 문화계에서 한동안 숨죽여 지내야 했고, 숙청을 피하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긴 교향곡을 발표해야 했다.
그러나 클래식과 대중 가요를 막론하고 의외로 장르의 다양성은 대단했으며, 이는 특히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검열이 그나마 완화되기 시작하며 확대되었고 멜로디야[13] 또한 미국 음악을 LP로 발매하는 등 장르와 국적 불문 다양한 음악을 취급하였다.[14] 1968년 소비에트 재즈 페스티벌[15], 1986년 및 1987년의 록-파노라마 페스티벌 등 관제적 성격이나마 국가가 주관하는 여러 페스티벌도 개최되었다. 소련 음악가들은 서구의 음악 트렌드를 어떻게든 적극 수용하고자 음지로 노력하였고, 통념과 달리 실제로도 그렇게 뒤쳐지는 편이 아니었다. 실제로 AOR[16], 헤비메탈[17], 디스코[18], 일렉트로니카[19] 등 당시 소련 대중가요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특히 락 밴드 활동은 아주 빈번해서, "자생 밴드 하나 없는 공장 없고 학교 없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20]
소련의 경우 무직자는 법적으로 처벌이 가능했는데, 음악가의 경우 정부의 통제를 받는 관제 밴드 '비아'[21]에 소속되거나 솔로로 활동하더라도 당국 통제를 받아야 했다. 비아에는 매니저와 프로듀서 그리고 예술 감독이 의무적으로 배당되었고, 이들은 국가의 의견에 맞추어 밴드의 가사와 음악을 조율하고 감독/감시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일반적으로 다비트 투흐마노프 등 몇몇 선도 작사/작곡가들이 (정부의 지시에 따라) 유행을 선도하면[22] 이를 따라 비슷한 종류의 음악들을 만들어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보통 비아는 사랑이나 기쁨, 슬픔 등 보편적이고 가족친화적인 노래들을 주로 불렀으며, 러시아어로 번안을 한다면 영미권 음악을 가지고 올 수도 있었다.[23]
이에 반대하여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음악가들은 상당히 많았다. 이런 언더그라운드의 시작은 "바르드 가수"들이었다. 알렉산드르 베르틴스키[24],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불라트 오쿠자바,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 등의 가수들로 대표되는 바르드는 여러 진통 끝에 그나마 안정을 제공해주기 시작한 체제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고, 과거의 혼란을 다시는 겪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유의 부재와 부조리가 반복되는 "회색빛 체제" 소련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던 사람들의 음악이었다. 에스트라다의 영향을 크게 받은 러시아 고유의 음악 장르인 "바르드 음악"은 어쿠스틱 기타 반주와 선율보다 가사에 주안점을 더 둔 것이 특징이었다. 이들은 기타 하나만 들고 자기가 직접 작사/작곡한 음악을 소수의 관중 앞에서 즉석으로 공연했다.[25] 주제는 일상의 감정, 전쟁의 기억, 사회에 대한 회의와 약간의 희망 등 다양했다. 관중들은 이런 공연을 레코드판 혹은 카세트로 녹음하였고, 조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복제되어 퍼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비소츠키처럼 이 과정에서 전국적 명성을 획득하는 가수들 또한 발생하였다. 물론 소련 음악인 협회에 소속되지도 않았고, 멜로디야를 통해 음반을 발매한 것도 아니었기에 이걸로 돈을 벌진 못해 대다수의 바르드 가수들은 평범하게 살았다. 특히 러시아 락 음악은 이런 바르드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빅토르 초이와 예고르 레토프가 대표적인 가수다.
물론 언더로 활동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우선 이 경우 직업이 음악가로 인정되지 않아 많은 가수들은 투잡을 뛰어야 했다.[26] ВИА에 소속되지 않은 언더 가수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대중 매체 출연이 힘들었고[27] 멜로디야(Мелодия)를 통해 음반을 제작하고 발매할 수도 없었으며[28][29] 공식적인 공연도 사실상 개최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앞서 언급된 크바르티르니크를 위시한 각종 불법 공연(racketeering)이 횡행했으며 사설 스튜디오 영업 또한 활발했다.[30]
당시 문화부를 위시한 소련 당국은 이러한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에게 당근과
이는 다시 말해 높으신 분들의 심기에 조금이라고 걸리는 게 있으면 가차없는 탄압에 들어갔다는 의미이며, 이는 특히 1982년부터 1984년 사이에 절정을 달했다. 당시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연달아 사망하자 소련 당국은 일명 '기강 잡기'에 들어갔고, 특히 이 때 활동하던 언더 가수들은 조금이라도 인기를 끌거나 '불순한' 제스처를 보이면 바로 탄압당했다. 몇몇 사례를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 크루크(Круг): 80년대 소련을 휩쓸었던 AOR 밴드. 건전한 노래를 주로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인기를 끌었다'는 이유로 밴드가 해체될 뻔했으나, 안드로포프의 부인과 아들이 직접 나서 말린 덕분에 간신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 데데테(ДДТ): 부조리와 전쟁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노래를 발표하였고, 그 덕분에 지역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34] KGB에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35] 각종 고초를 겪었다. 결국 리더인 유리 셰프추크는 본진인 우파를 떠나야 했고 이후 레닌그라드에서 밴드를 새로 꾸렸다.
- 크루이즈(Круиз): 항목 참조. 인기를 끌던 와중 당국의 지시로 강제로 밴드가 해체되었고, 한동안 앨범 작업을 하며 셋방살이를 전전하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3인조 헤비매탈 밴드로 부활했다.
-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 항목 참조. "불건전한" 음악을 했다는 이유로 멤버 한 명은 정신병원에 3개월 수감되어 각종 약물을 주입당했고 한 명은 심장 문제에도 불구하고 강제 입대처리되어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기지에서 복무했다.
- 인스트룩치야 포 비지바니유(Инструкция по выживанию):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와 비슷한 케이스. 반항적인 노래가 문제가 되어 리더는 다른 도시로 강제 이주당했고, 멤버 둘은 강제 입대당했으며 미성년자 멤버 한 명은 반강제로 대학교에 진학당했다. 당시 작업한 앨범도 압수당했는데, 복제를 떠 둔 것이 없어 결과적으로 영영 분실되었다.
- 지그재그(Зигзаг): 모스크바의 중소규모 밴드. 반항적인 가사와 공연 당시 멤버 한 명이 가짜 권총을 들고 포즈를 취한 게 문제가 되어 해체되었다. 당시 작업한 앨범 원판을 압수당한 것은 덤. 여담으로 이 밴드의 리더가 훗날 마스테르(Мастер)와 아리야(Ария)로 유명해지는 안드레이 볼샤코프(Андрей Большаков)이다.
- 데카(ДК): 1980년대 모스크바에서 활동했던 밴드로 훗날 섹토르 가자 등에 영향을 미친 로파이 음악이 특징이다. 아트락부터 엑스페리멘탈 록까지 상당히 다양한 수준의 스펙트럼을 자랑했으며, 풍자적인 가사와 반소비에트적 활동으로도 유명했다. 리더 세르게이 자리코프는 KGB에 협조하는 방식을 통해 가까스로 밴드 해체를 막아냈다.
- 코로지야 메탈라(Коррозия металла): 1980년대 초반부터 활동을 시작한 헤비메탈 밴드로, 1985년 어느 건물 지하실에서 첫 단독 공연을 개최했으나 시작 10분 만에 "훌리건의 분탕"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들이닥친 경찰의 손에 끌려가는 기록을 달성했다(...)
이러한 탄압은 1984년 절정을 찍었고, 고르바초프 취임 후인 1985년부터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는 더 느슨해져 언더그라운드 측에서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노래가 발표되어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소련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라고 불리는 포돌스크 페스티벌(1987)이 개최된 것도 이 때이다.[36] 당시 활동했던 유명한 밴드로 키노[37], 알리사, 주파르크, 아크바리움, 스트란니예 이그리,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 등이 있다.
잘 언급되지는 않으나, 70년데 후반에서 80년대는
클래식의 경우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아람 하차투리안,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등이 있었으며,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등이 있었다. 대중 가요의 경우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많은 가수들이 활동했다.
재즈는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국가가 나서서 페스티벌까지 열었던 적 있지만 이건 1960년대에 들어서나 이렇게 된 것이고 실제로는 오랜 기간 탄압받았던 적 있다. 1920년대 미국에서 부흥한 재즈는 소련에도 흘러들어와 이런저런 수준으로 성장했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고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강한 탄압을 받아 크게 위축되었다. 1950년대 후반쯤 들어 흐루쇼프 시대가 되어 사회에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가 생기고 나서야 소련 재즈가 다시 성장했고 국가에서도 페스티벌을 여는 수준으로 밀어주는 음악이 되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소련에서 재즈가 크게 번창하고 꽃피우던 시기로, 이 시절에는 여러 재즈 음악가들도 흥하던 때였으며 꽤 괜찮은 음악들도 나왔다. (# - 이고르 나자룩의 1978년 작 ‘긍정’[48])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재즈는 몰락했다.
나무위키에 문서가 생성된 가수/밴드만 하더라도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불라트 오쿠자바, 아크바리움, 마시나 브레메니, 빅토르 초이, 마이크 나우멘코, 아욱치온,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 크루이즈, 예고르 레토프, 드미트리 셀리바노프, 얀카 댜길레바 등 상당히 많은 수가 활동하였다.
4. 방송
1988년 당시 브레먀에서 방송된 일기예보.[49]
소련에서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때는 1939년이었고, 텔레비전이 대중화되기 시작한것은 1950년대 후반 니키타 흐루쇼프 때였다.[50] 소련 최초의 대량생산TV인 КВН-49가 본격적으로 시판된 것이 1949년도 였지만, 이 당시에는 방송권력이 한정적이라서 대중들에게 파고들기에는 시간이 상당히 걸렸기 때문이었다. 국토가 위낙에 넓어 난시청 지역이 많았고, 텔레비전에 대해 중요한 대중매체라고 인식한 시기가 미국에 비해 비교적 늦어 완전히 대중화되기까지는 대략 2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소련에서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비롯한 대도시들과 키이우, 민스크, 알마티, 타슈켄트를 비롯한 구성국 수도에서는 1960년대 중후반 즈음에는 웬만한 집에서도 TV를 가지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기반시설이 부족했던 북 시베리아와 우랄 지역, 카라쿰을 비롯한 오지에서는 1970년대 중반까지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었어도 전파가 닿지 않아 제대로 시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었다. 물론 당국에서는 1960년대에 TV의 중요성에 대해 인지한 뒤로는 인공위성을 통한 위성방송을 활용하고자 노력했으며, TV보급률 상승도 인공위성을 통한 난시청 지역의 축소와 맞물려있었고, 실질적으로 소련 전역에서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인공위성 고리존트가 발사된 뒤였다. 이러한 인공위성이 동유럽 각지와 쿠바에 정주하는 소련인들 대상으로도 전파를 내보냈기 때문에 해당 국가에 사는 인민들이 소련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게 하는 효과도 낳았다.
컬러방송은 1967년에 시작했으며 방송 방식은 프랑스식[51] SECAM 방식이었다. 초기에는 컬러 텔레비전은 흑백 텔레비전보다 가격이 많이 비쌌고[52], 기존의 흑백TV 생산공장들이 컬러TV 생산공장으로 전환하는 작업도 늦었고, 또한 기존의 흑백 텔레비전이 컬러방송의 시작과 함께 가격대가 많이 낮아지면서 컬러 텔레비전은 여유가 있는 가정부터 서서히 보급되었다. 이후 컬러TV의 가격이 조금씩 낮아지면서[53] 점차적으로 흑백 텔레비전이 컬러 텔레비전으로 교체되었고, 1970년대 말에는 컬러텔레비전이 대중화되었다.[54]
주요방송국으로 소련의 방송을 총괄했던 소련 중앙텔레비전과 각 지역별로 있던 지역방송국이 있었으며, 현재의 구소련권 국영 및 공영방송사들도 이러한 지역 방송사들이 모태가 된다. 소련 중앙텔레비전의 채널은 소련 해체직전에 6개가 있었고, 프로그램 1과 프로그램 2는 전국종합채널, 프로그램 3(모스크바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5(레닌그라드 프로그램)는 지역종합채널이었으며, 나머지는 교육방송이나 스포츠 방송을 집중적으로 내보내는 전문방송채널이었다. 이중에서 전문방송채널은 각 지역별로 안보내는 경우도 많았고, 러시아를 제외한 공화국에서는 자국어 텔레비전 채널을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 전역에서 6개 TV채널을 다 볼 수 있게 된 것은 위성방송 체계가 완비된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부터였고, 그 이전에는 지역에 따라 프로그램 1, 프로그램 2와 지역채널만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 중앙텔레비전 1프로그램은 소련 해체후에 러시아 채널1이 되었고, 2프로그램은 로시야 1이 되었으며,[55] 나머지 채널들은 지역 국, 공영채널이 되거나 민영화되었다.
TV에서 방영되었던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건강, 동물의 세계, 영화파노라마, 국제파노라마, 농촌시간 등 장수프로그램의 수가 상당했고, 일부는 현 러시아에서도 방영하고 있었지만 소련 제1프로그램과 제2프로그램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들은 1편짜리 TV영화[56]와 미니 시리즈가 대부분이었고 한국에서 생각하는 TV연속극 류의 드라마는 중앙채널에서 편성되지 않고 각 공화국 지역방송사에서 소규모로 제작되었다. 토론 방송이나 자극적인 오락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의 일이었고 그 이전에는 오락프로그램이나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 편성할 프로그램은 다 편성했지만 동시에 상당히 심심하고 보도의 신속성도 떨어졌다는 평도 있었다.
이렇듯 1960년대에 텔레비전 공장의 대량 건설로 텔레비전이 대중화되었지만 소련제 텔레비전의 품질은 좋지 않았다. 단순히 지직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툭하면 폭발하곤 했다. 텔레비전 한 대만 날려먹으면 운 좋은 편이었고, 사망 사고도 있었으며 크바르티르(아파트 방)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는 일도 파다했다.[57] 1980년 무렵 모스크바의 화재 원인 중 두 번째로 높은 원인은 과열된 텔레비전의 폭발이었다.[58] 1980년 브라운관 폭발 사고는 2,126건이었고 1985년 이 수치는 두 배 이상 증가하여 5,490건에 도달하였다.[59] 이러다 보니 소련 방송사들은 텔레비전 방송이 끝난 직후 삑삑거리는 비프음과 함께 "텔레비전을 끄는 것을 잊지 마시오(Не забудьте выключить телевизор)"라는 문구를 송출하였고[60] 내무부에서는 텔레비전을 안전하게 쓰는 법에 대한 공익 광고를 제작해 송출하였다. 당시 소련 전자제품 판매대리점들은 텔레비전 수리로 먹고 살았고, 소련 인민들 사이에서는 낮 시간 동안 텔레비전 방송을 방영하지 않는 이유가 텔레비전 폭발을 막기 위한 당국의 배려라는 농담이 돌 정도였다.[61]
1989년 브레먀의 마무리 장면.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예의 문구가 송출된다.
소련 텔레비전에서 화재가 자주 난 원인은 당시 TV 구조를 살펴봐야 이해가 가능하다. 이 당시 텔레비전은 스위치를 켠다고 바로 켜지는 것이 아니라 20초에서 1분 정도 예열을 시킨 다음에야 화면이 나오는 방식이었다.[62] 이런 방식의 경우에는 화재의 위험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 따라서 고열에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소련에서 제작된 텔레비전들은 진공관 형태의 부품을 다수 포함했던데다가 저질 플라스틱 및 가연성 소재를 듬뿍 사용하였고[63], 설상가상으로 품질관리체계가 많이 부실한 편이었기에 본체가 조금이라도 낡거나 브라운관이 과열되면 부품이 폭발하고 불붙은 가연재가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텔레비전들은 대량생산을 하기 좋았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 생산되었다. 당시 해외에서 생산된 TV를 구입할 형편이 안되던 가정에서는 텔레비전이 과열되면 꺼서 식히는 식으로 수십 년간 사용하기도 했다. 다만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TV 생산량이 연 수백만대는 되었기 때문에 코메콘 및 사회주의권 국가를, 제3세계 국가들 상대로 TV를 원조 또는 수출하기도 했으나, 1980년대 후반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영향으로 수입시장이 개방되자 토시바 텔레비전 등 품질이 우수한 해외 제품들이 각광받으면서 소련제 텔레비전을 빠르게 대체했다.
소련은 1967년 처음 텔레비전 광고를 시작했다. 당시 공영방송에서 보수적으로 네덜란드의 TV광고 시작년도가 1967년, 프랑스가 1968년이며, 1990년대에야 TV광고를 개시한 북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빠른 축에 속했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라는 통념과는 달리 TV 광고가 활발히 제작되었고 광고시장도 제법 컸다고 한다. 물론 아무시간에 광고를 방영하는 건 아니고 특정 시간에 한해 광고를 묶어 편성했고 당대의 TV편성표를 보면 광고가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취급되었다.[64] 다만 이들 광고 중에서 보존되어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중국에서 1978년에 TV 광고가 도입되고 북한에서 2009년에 도입된 것에 비하면 월등히 빠르기는 했다. 물론 이때는 상품의 가짓수가 몇 종류 정도였던데다가 질좋은 상품은 빨리 매진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생산되지 않은 제품들도 광고를 방영하다 보니 당시 소련 시민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어 광고 효과는 적었고, 이 때문에 당시 소련TV에서 분명히 광고가 방영되었음에도 광고가 없었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개선된 것은 1980년대 중후반의 고르바초프 때 와서부터였고, 전 시간대에 광고를 편성하기 시작한 것은 소련 붕괴 이후의 일이다.
러시아는 아니지만,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 제작된 광고가 한 때 유튜브에서 컬트적 인기를 끌기도 했다.[65][66]
라디오의 경우 65.00 ~ 74.00MHz(30kHz)의 OIRT FM이라는 별도의 FM대역이 있으며 러시아 일부지역에서는 아직도 송출하고 있다.[67] 라디오나 전축은 주로 라트비아에서 생산되었으며, 라트비아에서 라디오/전축을 만들던 Audiotehnika사의 경우는 소련 해체 이후 일본산 가전제품에 밀려 타 업종으로 변경을 거듭하다가 오늘날에는 수입 오디오 도매업체로 업종을 변경했다.
소련에서 라디오를 열심히 보급하고 음악 분야에 검열을 비교적 느슨하게 한 이유는 복지 차원도 있지만 정치 선전의 목적이 컸다. 물론 라디오에서 하루종일 정치 선전과 연설만 나오면 사람들이 라디오를 공짜로 줘도 받기 싫어 했을 테고, 때문에 소련 라디오 방송은 주로 듣기 좋은 음악을 계속 틀어주다가 중간중간에 뉴스나 정치 선전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라디오는 러시아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소수민족들에게 러시아어를 보급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TV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라디오가 표준어를 보급하는 첨병 역할을 한 점은 서유럽/남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5. 신문
소련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문발행부수를 기록했다.[68] 신문 값이 1부당 4-5코페이카 정도로 매우 저렴하여[69] 웬만한 소련 가정에서 보통 5~6종 정도 신문을 같이 구독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70] 프라우다나 이즈베스티야,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등 상위권 신문의 경우에는 1000만부가 넘는 엄청난 발행부수를 기록했고, 일간지 일일 발행부수는 1970년대에 1억부를 넘어선 이래로도 지속적으로 증가해 소련 붕괴 직전에는 1억 3700만부로 6200만부대에서 정체되었던 미국의 두배 이상을 기록했다.소련 신문은 이념적인 이유로 주로 엄숙함을 내세웠고 선정성과 거리가 먼 편집방침을 고수했으며, 당국에서 이념적으로 맞는 내용만 쓸 수 있었다. 특히 공산당에서 운영하던 프라우다나 정부에서 발행하던 이즈베스티야는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지루한 편이었다.[71] 이런 사유로 소련 말기에는 개혁파 주간지인 논쟁과 사실(Аргументы и факты)[72]가 3500만부라는 발행 부수를 자랑했을 정도였다.
물론 당에서 언론을 통제했기 때문에 소련 주요 신문들은 소련 당국과 공산당의 정책을 홍보하거나 보도하는 역할을 주로 해왔고, 대개 지하출판물이 소련 당국을 비판하는 형태였다.[73] 1980년대 중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펼친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영향으로 언론의 자유가 활성화되면서 언론 시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나 아르메니아 대지진 등 당시 소련 내 인명사고나 리가, 빌뉴스, 트빌리시 등지에서 일어난 독립 시위를 보도하면서 이후 민주화 및 소련 붕괴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의외로 한국의 시민기자 제도와 비슷한 인민통신원 제도와[74] 편집부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제도는 잘 갖춰졌던 편이고[75], 1980년대 중반 글라노스트 정책기 이전에 나온 소련의 사회고발 기사도 이러한 시민기자들의 취재에서 나왔다. 물론 사회비리를 고발한다 해봐야 최상층은 겨냥하기 힘들고, 중간급 관료를 고발하는 정도였기는 했다만 이들이 써낸 기사를 통해 당대 소련 사회의 사회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기는 했다.
6. 출판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독서가 전통적으로 지식인의 향유물로 여겨졌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로는 문맹률이 줄어들면서 책이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독서 문화가 활발해진 시기는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때부터였다.하지만 책의 출판량이 늘어났다해도 스탈린 시대에는 도심지의 주거공간이 비좁아서 러시아 제국 시기에 비해 도서시장이 발달되었어도 집집마다 많은 책을 넣을 공간을 가지기는 쉽지 않았으나, 1953년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스탈린 시절의 엄격한 통제가 완화되는 해빙기가 도래했다. 스탈린 시절 동안 정치적, 이념적으로 당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문인들이 보다 자유롭게 활동하기 시작했다.[76] 이와 더불어 사회적으로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입은 피해를 어느 정도 극복하면서 생활 수준이 점차 개선되었고, 1가구 1아파트 시대가 열리면서 주거공간도 넓어졌고, 주 5일제도 시행되었다. 이처럼 소련 사회가 스탈린 시절에 비해 전반적으로 여유로워 지면서 독서문화가 매우 발달되었고, 1인당 독서시간은 세계 최고수준에 달했다. 당시 소련 가정에서는 어느 정도 형편이 된다 싶으면 문학전집이나 시집을 갖추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77] 직장에서 일 없을 때 심심풀이용으로 읽으려고 책을 구입해 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책을 많이 모으는 것이 능력 과시 수단이 되면서 책의 판매량은 더더욱 높아져 갔다. 당시 소련의 책 1권값은 196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1루블에서 3루블 이내, 아동용 서적은 코페이카 단위로 팔았기 때문에 단순히 책을 많이 모으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78] 이 당시에는 소련이 세게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나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서량은 대단히 높았으며,[79] 1971년에 소련에서 하루에 430만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하며, 1990년 기준으로 러시아의 책 발행량이 16억부를 기록했을 정도였다. 물론 소련 붕괴 이후로는 출판시장이 전체적으로 축소되었을적도 있으며, 2010년에는 5억부로 줄어든다. 현 러시아도 스마트폰의 보급에도 아직도 독서를 즐겨하는 경우가 많고, 책값도 부담이 적어서 출판시장이 세계 수위권에 드는데[80], 소련은 이보다 발행량이 훨씬 더 많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출판사나 작가들이 종종 우리나라의 독서문화는 소련시대에 비해 크게 후퇴했다며 개탄하는 글을 종종 올리기도 했다. 물론 러시아의 독서문화가 쇠퇴하는 것은 휴대전화로 소설이나 만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이 대중화되면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소련 시대에는 인터넷이 없던 시대인지라 희소문헌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떨어졌다며 꼰대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선호한 소설책은 그 만큼 빠르게 매진되어 쉽게 구하기 어려웠고, 이 경우에는 암시장[81]에서 비싸게 구매해야 했다. 금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서 수십 루블 이상의 거액을 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82] 소련에서는 출판사나 인쇄소에서 필요나 수요에 따라 주문을 받아 인쇄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가와 상급기관에서 정해진 양만큼 생산하는 방식으로 책을 찍어냈기에 수요가 늘어난 책이 있더라도 이런 시장의 요구가 반영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었다. 따라서 어떤 서적이나 간행물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났을 때 이에 따라 업체 재량으로 출판량을 늘이거나 증쇄하기 어려웠다. 또한 공산당의 이념이나 역사를 다룬 서적들이 발행량의 상당수를 차지했는데 이런 서책들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별로였지만 체면을 위해서라도 일정 수량씩 발매되었다. 그리고 이때는 신문의 발행량도 매년 꾸준히 증가하였고, 제지공장에서 늘어나는 신문과 책의 수요를 다 감당하기 벅찼던지라 이 때문에 전체적인 책 생산량이 많았음에도 책의 부족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런 책 부족현상은 러시아어 서책의 인기가 덜한 지역에도 러시아어 소설을 일정 수량씩을 배포해서 판매하는 유통구조도 한 몫했는데 이 때문에 러시아어 소설책을 사오려고 몰도바, 캅카스, 발트 3국, 중앙아시아 등지로 가서 여행을 겸하여 책을 사는 일이 빈번했다.[83][84] 1970년대 중반부터는 폐지 20kg를 모으면 소설책 구입 쿠폰과 교환이 가능하도록 했는데, 서점에서 책이 입고될 때까지 일찍 기다리거나 시장에서 비싼값을 주지 않고도 소설책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인기를 끌었다. 책 부족이 더욱 심화된 1980년대에는 소련 각지에서 책 부족 현상으로 인해 책끼리 서로 물물교환하는 책교환시장(книгообмен)까지 등장하기도 했다.[85] 그래서 소련인들은 소설책을 읽을 때 도서관에서 읽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또한 소련에서는 타자기나 복사기[86]같은 인쇄장비를 KGB에 소속된 제1부(Первый отдел)라는 부서에서 별도로 관리했는데, 국가에서 허락받지 않은 용도로 사용할 경우 KGB에 보고되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미즈다트와 같은 자가출판이 유행했던 배경에도 이와 같은 사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소련의 많은 상품부족 문제가 그렇듯이 책의 부족문제는 소련 붕괴 직전까지도 지속되었지만 소련 해체기인 1991~92년을 전후로 구 소련 시민들의 구매력을 상실시키는 방식으로 해결되었고, 초인플레이션과 함께 종이와 출판장비의 가격도 급속히 상승, 출판시장도 급속히 붕괴되어서 구소련권 출판업자들은 미약한 저작권 의식과 급속히 떨어진 책 판매량으로 한 동안 금전적으로 고통을 받아야했다.
소비에트 대백과사전을 펴내기도 했으며, 각 공화국마다 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7. 영화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영화 문서 참고하십시오.소련에서는 영화 관련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었다. 이는 소련 공산당이 영화를 이념선전의 도구로써 삼았기 때문이었다. 소련 초기까지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교육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활자매체보다 영상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상매체가 이념을 설파하는데 적격으로 여겨졌다.[87] 또한 TV와 라디오가 없었던 시절에는 뉴스도 영화로 소련 당국에게 더더욱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문맹이 퇴치되면서 신문과 잡지에도 크게 신경쓰게 되었고, 동시에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하는 게 가능한 라디오와 TV가 보급됨에 따라 선전 역할은 이들 매체로 넘어갔고, 영화는 일반인들에게 순전히 오락용으로써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소련말기까지도 선전기능으로써 역할이 완전히 없어진것은 아니라서 러시아 혁명, 내전이나 제2차 세계 대전과 영웅에 대한 영화가 주기적으로 제작되거나 해외에서 소련인들이 활약을 펼치는 오락영화로 수행되었다.
소련은 영화 제작 뿐만 아니라 보급에도 신경을 썼다. 소련의 모든 도시에는 영화관이 한두곳 정도는 갖추어져 있었으며, 작은 시골마을에도 영화관이 있을 정도로 흔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1인당 영화관람 횟수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TV가 대중화된 1970년대에도 연간 영화관람객수가 40억명대에 달했고, 소련 말기에도 관람객수가 연 30억명대를 유지했을 정도였다. 그 만큼 영화관 수가 많았던 데다가 표값도 쌌기 때문에[88] 부담없이 여가를 보낼 수 있는 수단으로 인기를 누렸고, 흥행한 영화들은 기본 수천만 단위의 엄청난 관객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로 영화관들이 경제난으로 인한 지원 중단과 수익성 악화로 문을 닫으면서 이러한 기반시설이 타격을 받았다. 그나마 2000년대 이후로 추세가 반전되었지만 아직도 소련 시절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친다.
소련 영화계 또한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등 가라성 같은 영화인을 배출했으며, 몽타주 기법의 선구자로 불린 전함 포템킨 (1925), 소련 영화사 상 최초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전쟁과 평화 (1967), 소련 SF의 걸작으로 불리는 솔라리스 (1972), 스토커 (1979)등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다양한 명작을 배출했다. 당시 소련 영화 감독들은 국가에서 전액 지원받아 운영되었기에 흥행보다는 작품성과 예술성에 신경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당대 소련의 영화 가운데 철학적이거나 시적인 내용을 담은 경우가 많아 예술성으로 인정받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러한 점때문에 소련 영화 가운데 서구권에서 인기를 끈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고, 주로 북한이나 베트남, 중국,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 등 공산권에서 인기를 끈 편이었다.
소련 역시 각 공화국별로 지역영화도 발달되었다. 특히 러시아 뿐만 아니라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제작된 영화 중에서는 예술성을 인정받아 수람 요새의 전설 (ამბავი სურამის ციხისა, 1985)이나 석류의 빛깔 (Նռան գույնը, 1969)처럼 해외에서까지 주목받은 작품도 있었다. 다만 소련 정부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 문화적으로 보수화되면서 지역색이 강한 작품은 네 개의 와이셔츠 (Četri balti krekli, 1967)[89]처럼 탄압받기도 했다.
소련에서 외국 영화 최고흥행기록을 달성한 영화는 멕시코 영화 예세니아 (Yesenia, 1971)였다. 이외에도 인도 영화도 많이 수입해 높은 흥행기록을 올렸으며, 타 유럽권 국가 영화나 여러 제3세계 국가 영화작품도 수입해서 개봉했다. 미국영화도 드물게 수입하여 상영되기도 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는 상영작이 많지 않아 많은 미국 영화들이 한참뒤에 개봉되거나 개봉조차 되지 않아서 불법복제 필름 혹은 비디오로 시청하는 경우가 많았다.[90]
소련내에서 미국영화에 대한 접급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된것은 고르바초프 시대인 1980년대 중반이었다. 외국문화에 대한 검열이 완화되고, 개인사업이 활성화된데다가 아직 비디오 레코더의 보급률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서구산 비디오영화들을 틀어주는 비디오 상영관이 소련 전역에 속속 들어섰던것이었다.(당시 소련에서는 이를 비디오 살롱이라고 한다.) 이 비디오 상영관에서 틀어주는 영화들의 번역과 더빙수준이 날림 수준인것이 많았고, 영화 관람비도 영화관에서 보는 것보다 2배는 더 비쌌지만 그간 수입안된 영화들이 어떤영화였는지 궁금했던 소련인들의 이목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해서 짭짤한 산업이 되어갔다. 이후로 이 비디오 상영관들은 비디오 레코더 보급률이 좀 더 높아짐에 비디오 대여점으로 전화되었으며 소련 해체기 이후로 영화관들이 폐쇄되거나 표값을 올리면서 영화관에 갈돈이 없던 러시아인들의 문화공간이 되어갔다.
영화 뿐만 아니라 연극, 발레 등과 같은 '무대예술'의 초강대국 중 하나였으며 지금의 러시아까지 이어진다.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 안톤 체호프 등 전세계 연극계에 한 획을 그은 위인들이 많이 있으며[91], 현재에도 연극 관련 교육과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다. 발레 또한 소련 시절부터 현재 러시아까지 발레단들 하면 세계구급 발레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8. 만화
소련이 당대에 세계적으로 책 출판량이 많은 국가였고, 애니메이션도 예술성으로 많은 호평을 받아서 국가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정작 만화는 푸대접을 받았으며, 만화는 그리 발전되지 않았다. 일단 소련에서도 주요 어린이 잡지와 신문, 시사잡지 등에서 만화가 연재되었고, 만화책도 발행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들이 재미를 위해 보거나 풍자를 위한 도구라는 것이 소련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으며 교육적인 측면에서 만화책보다는 그림책과 소설책을 읽게 해주는 것이 상상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만화책의 발행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성인용 만화도 다를바 없어서 소련에서 성인용 만화라고 해봐야 신문과 잡지에 실리던 시사만화와 캐리커쳐 정도가 연재되거나 타 동유럽 국가에서 간간히 성인용 만화가 좀 들어오던 수준에 그쳤다.문맹과 저학력자가 많았던 소련 초기에는 만화를 당국에서 홍보용이나 교육용으로 상당히 써먹었으며, 이 당시까지만 해도 만화를 많이 활용하기는 했으나, 중등교육이 보편화된 이후로 당국에서 만화를 활용하려는 시도가 줄어든것이 원인이었다. 스탈린 후반기의 문화정책 담당자들은 만화를 활용하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만화를 어린이나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이나 보는 급이 낮은 매체로 여기며 상당히 천시하여[92] 1950년대 들어서는 만화를 활용하려는 시도를 중단했다. 흐루쇼프 집권기부터는 TV가 점차 대중화되고, TV애니메이션이 엄청난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문화당국 차원에서는 만화를 활용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적극적이지 않았고 이 당시에는 만화를 단순히 아동들의 흥미를 돋구거나 교육적인 목적으로 활용하는 정도에 머물게 되었다. 소련 후기를 경험해 본 박노자 역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학습만화를 접하지 못했으며, 청소년들은 성인들과 다를 바 없이 세계명작 번역본을 그냥 읽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동시대 중국에서 정책적인 차원에서 만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고, 타 동유럽 국가에 비해서도 만화가 대중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다. 그나마 고르바초프 시절에 외국만화의 수입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만화책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나면서, 소련의 만화 장르가 다변화되었지만, 동시에 한참 동안이나 외국만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구소련권 만화는 독자적인 색체가 약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러시아의 인기만화들은 슈퍼맨, 스파이더맨. 원더우먼같은 미국 슈퍼히어로 만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고, 우크라이나 만화도 마찬가지로 미국 슈퍼히어로물의 영향을 짙게 받은 수준을 넘어 아예 2010년대 이전에는 자체 만화산업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말이 만화계 관계자 입에서 나올 지경이다.
9. 애니메이션
만화책과는 달리 소련 애니메이션은 당시 세계적으로 발전되었다. 1920년대에 신경제정책으로 소련이 안정화 되었을 때부터 다채로운 제작기법을 도입하여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놓았고, 특히 흐루쇼프 해빙기 이후로 작품소재가 다양해지고 1950년대 후반기부터 텔레비전이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하자 1960년부터 TV방송을 고려하여 제작편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소련 애니메이션은 주로 아동용 위주로 제작되었지만 동시에 상업성보다도 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 많이 배출했고, 당시 소련 영화감독들도 예술적인 용도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여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소련, 러시아 애니메이션에서 지금까지도 화자되는 걸작인 눈의 여왕 (Снежная королева, 1957)이나 소련 아동 애니메이션의 대부격인 누 파가디! (Ну, погоди!),[93][94][95] 일본에서도 리메이크된 체부라시카 (Чебурашка)가 있다. 이 밖에도 2020년대 들어 인터넷 밈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한 보물섬 (Остров Сокровищ, 1988)도 있다.현재까지도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권 TV채널에서는 이 당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자주 재방영되고 있지만,[96] 이 당시 TV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아무리 시리즈물이라도 주 단위로 제작, 편성한다는 개념은 아니었다. 제작기법에 따라 제작기간이 정말 오래걸리는 경우도 있기때문에 극장판 애니메이션 마냥 다음편을 몇달 뒤나 몇년뒤에나 볼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소련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회수가 많은 장편시리즈를 제작하는 것을 예술적이라고 생각하지않았기때문에 단편작들이 많았으며, 장편 시리즈물이라고 해도 회수가 많지 않았던것도 특징이었다. 소련 당대 TV에서 방영되는 회수가 많은 애니메이션은 외국수입작이 대부분이었고 소련 작품은 일부 작품을 제외하면 장편이라해도 몇편 정도 제작, 방영하는 수준이았다. 예를 들면 소련 애니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가 높은 작품으로 손꼽혔던 '누 파가디!'는 소련 당대에 제작된 회수는 17편이고, 러시아 치하에서 제작된 회수도 7편이다. 참고로 1편당 분량은 10여분 정도. 이러다보니 텔레비전에서 애니를 방영했을 때 단독프로그램으로 편성되는 일보다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에서 여러 애니들을 묶어서 편성하거나 "잘자! 애들아(Спокойной ночи, малыши!)"를 비롯한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한국의 열려라 꿈동산과 비슷하게 여러 애니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편성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97][98]
소련 시절에는 수입 애니로 주로 체코슬로바키아나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쿠바 등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 작품 위주로 수입했고, 그 중에는 패트와 매트도 포함되었다. 당시 소련의 인기 수입 애니도 폴란드 작품인 볼렉과 롤렉 (Bolek and Lolek)이나 렉시오 (Reksio)같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는 작품들이 많다.[99]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2X2>[100]가 개국된 후에 서구권과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대대적으로 수입하기 시작하여 편성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소련 제1프로그램에서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수입해서 편성할정도로 옛 소련권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또한 소련 해체 이후로 러시아의 방송사들이 자체제작 애니보다는 수입단가가 싼 외국애니메이션을 주로 틀거나 소련시대 애니메이션을 재방영하는데 급급하면서 민영화된 스튜디오들이 투자자를 찾아나서기 힘들어지면서 러시아 애니업계는 침체기를 맞이했다.[101] 러시아의 애니산업이 부흥하기 시작한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로, 로시야 텔레비전에서 자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보유할정도로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TV방영 애니메이션은 아직은 수입산 애니가 많은 편이다. 또한 소련시절과는 달리 미국과 일본, 유럽의 영향으로 작품의 장편화도 진행되어서 수십~수백회 단위로 제작되는 경우도 많아진 편이다.
10. 식문화
자세한 내용은 소련 요리 문서 참고하십시오.11. 의복
11.1. 군복
자세한 내용은 군복/러시아군 문서 참고하십시오.11.2. 제복
소련 석탄산업부의 1947년형 제복[102] | 소련 외무부의 1943년형 제복(장관) |
매체에서 흔히 표현되는 공산주의 국가의 모습은 거의 전체주의적 특징을 지니며 그 이미지는 열병식이나 퍼레이드를 자주 벌이고 일반 공무원들조차 제복을 입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한다. 특히 소련은 존재하던 시절에도 제1세계(서유럽이나 미국 등) 국가들에 상당한 공포를 유발하는 존재였으며 특유의 군사적인 이미지 때문에 지금도 소련식 제복은 세계적으로 나치 독일, 미국과 더불어 제복의 상징성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소련은 초기에는 제복에 전혀 관심이 없는 국가였다. 20세기 초반까지는 관료 권위주의 문화가 지배하던 시대였으므로 유럽도 제복은 비교적 흔하게 사용했고 멋을 중시했는데 동양(대한제국, 청나라, 일본 등)에서조차 이런 서구식 제복뽕을 한 사발씩 들이켰다.
그래서 소련은 당시 서양의 시대상으로서는 미국과 더불어[103]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본디 전근대부터 제복이라는 것은 예복이나 다름없었고 당연히 화려한 금자수 등이 사용되는 귀족적 상징으로 통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이념 하에서는 상극이었다.
현대 중국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인민복이나 기타 간소한 복제를 고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인데 부르주아, 귀족의 제국에서의 탈피를 국시로 건 소련에서도 당연한 이념적인 결론이었으므로 소련 공산당은 혁명을 완수한 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내려오던 각종 전통을 완전히 단절시키면서 제국의 제복도 모조리 폐기했다.
물론 소련도 철도, 선박 등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본적인 분야의 제복들을 새로 제정하긴 했지만 그것은 제국 시절의 것처럼 화려한 자수가 들어가 있다거나 멋드러진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초기 노농적군의 군복과 마찬가지로 농민이나 노동자의 작업복에서 채용한 복제에 간소한 계급장만 붙인 수준에 불과했다.
스탈린 하면 보통 회색이나 백색의 원수복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 스탈린이 예복을 입은 것은 전시에 원수 계급을 받은 이후부터이며 이전까지는 인민복을 입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백색의 원수복을 보고 "웨이터 복" 같다며 크게 짜증을 낼 정도였고 전후에 장군들과 함께 사진을 찍을 때는 예복을 갖춰 입은 장군들 사이에서 혼자 인민복만 입고 있었다. 이는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한 다른 소련의 정치인이나 유명 인사들도 마찬가지여서 대부분이 예복 보다는 인민복이나 정장을 갖춰 입었다.
사실 초기 각료나 정치인들이 입던 인민복도 정해진 공통적인 형태가 존재하기 때문에 색만 맞춘다면 제복의 역할은 충분히 했다. 예전에도 인민 의원(장관)같은 고위 관료들은 단정한 인민복에 표식 정도만 단 옷을 제복처럼 입곤 했다. 단지 유럽처럼 계급장을 다는[104] 제복을 쓸 필요가 없는 소련은 제복을 제정하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봤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한데 초기 소련에는 사회주의 원칙에 따라 관등과 같은 계급이 없었으며 직책만 있었기 때문이다.[105] 그런데 소련 내부 사정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무원의 제복 제정에 대한 문제는 외교무대에서 두드러졌다. 소련은 성립 초기에는 세계에서 비정통정부 취급이었고 열강들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끄는 국가도 아니었거니와 국제 왕따였다.[106]
당연히 처음에는 격식 딱딱 차리고 외교를 할 일도 거의 없었지만 소련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연합국의 일원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고 결국 1941년에 소련 최고회의는 '소련 국외주재 외교공관 및 대표부(상주외교사절단)' 관등을 제정했다. 이때는 국제법상의 형식만 갖춰 대사, 공사, 대리대사 수준의 계급만을 만들었고 군대처럼 체계적으로 외무부의 관등을 나눈 것은 1943년에 제복을 제정하면서다.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소련을 완전히 개조해 버린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소련의 군복은 변경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나치 독일을 꺾으면서 소련이 제2세계의 수장이자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라설 것을 알았고 당연히 그에 걸맞은 권위를 보이길 원했다.
소련군은 과거 열강이었던 러시아 제국의 영광, 위엄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군복들을 그에 맞춰 개정했다. 소련은 원래 군복도 러시아 제국과의 단절을 위해 노동자의 작업복과 비슷한 형태로 간소하게 제정해 두었고 계급장마저도 금빛이 번쩍이는 전통적인 견장을 최대한 지양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후반기인 1943년부터는 러시아 제국식의 커다란 견장을 다시 도입하는 동시에 고전적인 수려한 예복들을 제정하기 시작했는데 소련의 제복정신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소련은 외교관 제복의 제정 필요성을 금방 실감했다. 지금은 그냥 외교관들이 평범한 정장만 입고도 회담을 잘만 하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테일코트라든가 실크 햇은 공식석상에서 필수적인 복장 예절에 속했다. 그러나 소련에서 프록 코트나 실크 햇은 부르주아의 상징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착용하는 것이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에서 외교관 제복 제정에 관한 문제는
1. 이제 국제적으로 나설 일도 많은데 부르주아 스타일은 불법이라 할 수 없다.
2.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스타일로 하자니 가오가 안 산다.
3. 그럼 일단 깔쌈하게 만들고 프롤레타리아의 기운이 오는 옷이라고 한다.
4. ????
5. 우왕ㅋ굳ㅋ
2.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스타일로 하자니 가오가 안 산다.
3. 그럼 일단 깔쌈하게 만들고 프롤레타리아의 기운이 오는 옷이라고 한다.
4. ????
5. 우왕ㅋ굳ㅋ
이렇게 해결했다.
독소전쟁으로 흥이 깨져 버린 소련은 제복뽕에 맛을 들이고 군복을 제외하고도 나치 독일이 했던 것과 똑같이 각종 정부부처의 공무원들까지도 제복을 입게 하는 데 열을 올렸다. 사실 제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제복 문화는 세계적으로 사장되고 있었는데 얘네들은 역행하고 있었다.
결국 스탈린 시절에 소련은 제복의 천국이라고 불릴 수 있는 국가가 되어 버렸다.[107]
철도, 선박 등의 기본적 분야의 제복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무원 제복들이 1943년에서 1953년까지의 10년 사이에 제정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제복들을 '스탈린식 제복'이라고 칭한다. 소련은 1943년에 제정한 외교관과 검찰제복은 나름 금 자수 등의 디자인도 공을 들이는 등 여러모로 장인정신을 보였지만 이후부터는 복붙 수준으로 구색만 맞추어 그냥 만들기 시작해서 많이 만들게 된다.
이것은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제복이 딱히 필요 없는 기관에까지도 제복을 제정하다 보니 일어나는 문제였고 소련 성립 초기부터(대략 1918년) 있었던 기존의 제복들도 군복처럼 특정 형식 아래 개정하려고 했기 때문이다.[108]
이러다보니 당연히 제복들은 형식이 거의 동일했고 그냥 옷의 색깔만 다른 수준으로 찍혀나왔다. 그러다가 스탈린이 죽고 소련의 새 지도자가 된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1954년에 스탈린식 제복들을 전부 손보아 형태를 간략화하거나 혹은 폐기해버리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하지만 끝내 (심지어 지금 러시아 연방을 포함해 독립국가연합의 많은 국가들에서도) 강철의 대원수가 피워놓은 제복의 꽃은 지지 않았다. 말렌코프는 대부분의 제복을 폐지했으나 기존부터 있었거나(철도, 우편 등) 스탈린식 제복의 시작이 되었고 퀄리티가 잘 뽑혔던 검찰과 외교관 제복 정도는 폐지하지 않았고 이것은 니키타 흐루쇼프 치세에도 이어졌다.
그런데 흐루쇼프가 실각한 후에 많은 제복들은 차츰차츰 부활하기 시작했고[109] 그 영향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나탈리아 포클론스카야 등이 입은 러시아 연방의 검찰 제복은 소련의 1988년형 검찰 제복을 기원으로 하며 기타 많은 독립국가연합 소속 국가들의 중앙행정기관 제복들도 마찬가지로 많은 개정이 있긴 했지만 원류가 소련 제복인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원래 정부기관이었다가 공기업 등이 되거나 민영화된 조직들, 이를테면 루스키줴데 등은 상황이 반대라 전통을 많이 상실했는데 여기도 제복이 거의 코레일 수준으로 잡탕이 된 상태다.
국가행정기관[110] | 제정 혹은 스탈린 시대의 개정년도 | 비고 |
외무부(Министерство иностранных дел СССР) | 1943 | [111] |
검찰(Генеральная прокуратура СССР) | 1943 | |
운수부(Министерство путей сообщения СССР) | 1943 | [112] |
삼림산업부(Министерство лесной промышленности СССР) | 1945 | [113] |
석탄산업부(Министерство угольной промышленности СССР) | 1947 | |
하운선박부(Министерство речного флота СССР) | 1947 | [114] |
해운선박부(Министерство морского флота СССР) | 1948 | [115] |
재정부(Министерство финансов СССР) | 1948 | [116] |
지질부(Министерство геологии СССР) | 1948 | |
예비노동자원부(Министерство трудовых резервов СССР) | 1948 | [117] |
어업부(Министерство рыбного хозяйства СССР) | 1949 | |
조달부(Министерство заготовок СССР) | 1949 | |
체신부(Министерство связи СССР) | 1949 | [118] |
지리 및 지도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геодезии и картографии СССР) | 1949 | [119] |
국가검열부(Министерств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контроля СССР) | 1949 | |
민간항공부(Министерство гражданской авиации СССР) | 1950 | [120] |
발전소부(Министерство электростанций СССР) | 1951 | |
국가세관위원회(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омитет таможенного контроля СССР) | 1951 |
소련의 특성상 군사조직이었던 국가안전위원회, 내무부와 그 휘하 조직인 국경군 등은 표에 없고, 소방과 경찰도 제외한다. 스탈린 시대 이후에 제정된 제복도 제외한다. 예를 들어서 소련 법무부(Министерство юстиции СССР)는 1971년에 제복이 제정되었으며 소련 교육부(연방공화국계몽부)에서 학생제복 통일령을 내린 것도 스탈린 시대 이후다. 국제조직(적십자 등)도 제외되어 있다. 소련 붕괴 시점까지, 그리고 모든 분야의 제복으로 범위를 늘린다면(소년단 등) 소련의 제복 종류는 위 표보다 훨씬 많아진다.
12. 성문화
Ну, секса у нас... (смешок) секса у нас нет, и мы категорически против этого!
글쎄, 우리에게 성관계란... (웃음) 우리에게 성관계란 없어요, 우리는 단호하게 이에 반대하니까요!
1986년 7월 17일, 미국-소련간 교류방송 프로그램인 "여성이 여성에게 말한다" 중 소련측 참가자의 발언[121]
글쎄, 우리에게 성관계란... (웃음) 우리에게 성관계란 없어요, 우리는 단호하게 이에 반대하니까요!
1986년 7월 17일, 미국-소련간 교류방송 프로그램인 "여성이 여성에게 말한다" 중 소련측 참가자의 발언[121]
소련의 성문화는 건국 초창기 러시아 내전과 신경제정책, 산업화를 겪으며 시대에 따라 급변했다. 혁명 초기 자유 연애에 대해서도 일부는 부르주아적 연애로 비난했고, 일부는 반대로 자유 연애를 강조했으며 콜론타이처럼 혁명적 연애, 사회주의 가족애와 동지애를 강조하는 이들도 있었다.
소련 초기의 성문화 형성과 여성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여성 운동가들은 혁명적 연애, 육아와 가사의 완전한 사회화, 심지어 일부일처제 폐지, 오픈 릴레이션십을 방불케 하는 자유 연애와 성적 자유주의를 주장했으며 러시아 혁명 직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이후 소련에서는 성 긍정이 새로운 성문화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건국 초창기, 블라디미르 레닌을 위시한 대부분의 소련 수뇌부들은 말로는 성평등을 외쳤지만, 러시아의 오랜 가부장제 문화에 영향을 받아 성적 개방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레닌은 콜론타이가 성욕을 충족시키는 것은 물 한 잔을 마시듯이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물 한 잔 이론' 이라 부르면서 비꼬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레닌은 다른 이들이 콜론타이를 비난할 때 어느 정도 보호해 주었으며 콜론타이의 여성 운동과 다양한 논설 기고, 소설 집필과 발표 활동을 존중해 주었다. 또한 콜론타이의 양성 평등 이론과 성평등과 관련한 법제 정비 노력을 지지했으며 여성이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것은 그야말로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비판했다.
다만, 레닌은 이렇게 콜론타이를 보호하고 지지해주면서도 콜론타이가 노동조합과 관련해 자신과 정쟁을 벌이고, 제노텔(여성부)의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불편해 했다. 이에 소련 지도부는 콜론타이가 아닌 상대적으로 유순한 이네사 아르망을 제노텔의 위원장으로 임명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이네사 아르망은 콜론타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화적이었을 뿐, 레닌의 최측근으로 오래도록 활동한 고참 볼셰비키로서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경제와 행정 부문 위원으로 활동할 정도의 중진이었다. 그녀는 여성 인권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으며 18년에는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카를 라데크 같은 거물 정치인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러시아 여성 노동자 대회를 추진하고 레닌을 연사로 초빙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아르망이 20년에 콜레라로 사망한 뒤, 콜론타이가 제노텔의 수장이 되었고 그녀와의 갈등을 불편해한 소련 지도부는 콜론타이를 경질해 외교관으로 보냈다.[122]
콜론타이 이후에 제노텔의 수장이 된 소피야 스미도비치는 자유 연애에 대해 반대하고 가정에 대해서도 기존의 가정상을 유지하면서 아내와 남편이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콜론타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기에 소련 지도부와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다만, 콜론타이의 후임자들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다고 해서 그녀가 경질된 이후의 제노텔이 완전하게 순수성을 잃고 소련 여성 운동이 급격하게 쇠락했다고 볼 수는 없다. 스미도비치 역시 여성 운동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제노텔의 쇠락은 이러한 지도부의 빠른 교체와 운영 방향 변화 외에도 제노텔이 가정을 파괴하고 부모와 아이들을 떨어뜨려 놓을 것이라는 소문을 믿고 두려워 한 중장년층 이상 여성들의 비협조, 여성혐오적 가치관을 지닌 일부 남성들의 공격, 가장 큰 문제였던 인력과 재원의 부족이 영향을 미쳤다.
레닌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123] 러시아 혁명을 통해 막 소련 사회에 자리를 잡아 가던 개방주의적 성문화는 크게 쇠퇴하여 도로 보수적인 성문화로 회귀하고 말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부터 러시아 내전기에 이르는 약 10년의 혼란기 속에서 많은 관념들이 하루 아침에 뒤바뀌었다지만, 대중들과 관료들의 정서가 완전하게 변화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도시의 청년층들은 개방적인 성 정책을 반겼지만, 농촌에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성문화가 일반적이었고, 관료들과 중장년층들도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랐던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보기에 소련의 성 문화는 너무 퇴폐적으로 변화했던것이었다. 이에 스탈린도 중장년층과 관료들의 여론을 수용해서 성 정책을 다시 보수화했다. 제노텔이 해산되었고 이혼 절차도 어려워졌다.
1936년에 여성의 건강이나 불륜 같은 이유가 아니라면 낙태도 금지시켜서 여성의 낙태권과 이혼권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스탈린이 인구 증대와 안정적인 자녀 양육을 바랬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국가 예산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공영 탁아소를 비롯한 보육 시설과 세탁소 등은 상당 기간 동안 축소되었고, 스탈린 정권은 소련 여성들이 가사와 노동, 육아, 교육을 모두 해낼 수 있는 슈퍼 우먼이 되길 바라면서 다양한 프로파간다를 퍼뜨려 여성들을 세뇌했다.
스탈린 정권은 남성 노동자들이 노동 규율의 강화와 노동 조합의 약화, 노동자 권리의 축소에 분노하여 태업과 결근, 이직 등을 일삼고 강경하게 저항하자, 여성 노동자들을 남성 노동자들이 떠난 빈 자리에 집어 넣었다. 제정 시기의 남성 공장 노동자들은 작업 반장과 경영진의 폭압에 맞서서 서로 단결하여 대항하거나, 개별적으로 근무 중에 작업 반장의 머리에 담요를 씌우고 망치로 머리를 찍거나, 자빠뜨려서 밟아버리는 식으로 저항했었던 경험이 있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단결력이 떨어지고, '완력'도 부족해 작업 반장과 경영진에게 비교적 저항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제정 말기에 노동 운동을 지도한 경험이 있는 스탈린 정권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여성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건설의 역군으로 추켜 세우면서 남성 노동자들의 빈 자리를 채웠다. 여성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순종적'이어서 태업이나 결근, 집단 저항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고, 교육 수준과 기술 수준이 남성에 비해 비교적 떨어지는 편이어서 임금도 적게 줄 수 있었다.
이렇듯, 스탈린 시대부터 소련의 성문화는 보수화되지만, 동시에 러시아 제국 시대에 비해 개선되었던 것들도 많았다. 러시아 제국이 망하는 그날까지도 러시아 전체 지역에 만연했던 악습인 스노하체스트보, 조혼, 영아 살해, 사생아에 대한 인권 유린 및 살해, 아동 학대 및 가정폭력, 성매매, 자녀에 대한 성매매 강요, 명예살인, 여성의 교육권 불인정, 극도로 가부장적인 문화, 기타 다양한 악습은 소련 정부 차원에서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근절하는데 성공했다.[124][125]
소련 존속 기간 동안, 연방 소속 국가에서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장려되고, 다양한 분야에 여성들이 진출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발렌티나 테레시코바)도 소련에서 배출했다.
스탈린 사후로 전후 베이비붐 현상에 따라 낙태가 재합법화되고, 이와 동시에 직장 생활의 자율화, 흐루숍카의 보급이 이뤄져 소련의 보편적인 가족 형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화해 스탈린 정권 시기보다 진보했다. 하지만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대중 매체에서 성에 대해 보수적으로 다루었던 것은 여전해서 고르바초프 집권 이전까지 성에 대해서 심심하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 언론 통제가 완화되면서 전에는 물밑에서나 이루어지던 성에 대한 논의가 물꼬를 틀기 시작했다. 소련 해체 이후로는 경제난으로 인해 빈곤층들이 성매매에 뛰어드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성매매가 급속히 늘어나고, 포르노 비디오 시장도 급속히 활성화되었으며, 신문과 방송도 황색 언론화되면서 한 동안 소련 시대와는 천지 차이로 퇴폐적으로 변하게 된다.
12.1. 성소수자
러시아는 원래, 서유럽과는 별도로 독립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여 교회법에서는 처벌 대상일지라도, 세속에서는 성소수자들을 처벌하는 법률이 없었으며 서유럽만큼 크게 차별하지도 않았다. 러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성소수자들을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서유럽화 정책을 실시한 표트르 대제 시기부터였으며 이후, 성소수자들을 크게 혐오하던 니콜라이 1세가 성소수자는 공민권 박탈 및 시베리아 유형에 처할 수 있다는 법령을 제정해 억압을 강화했다.[126]제정 시기의 유산을 청산하고자 했던 소련 건국 초창기에는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범죄였던 성소수자들을 합법화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법을 제정했다. 따라서 적어도 스탈린 이전 1920년대에는 성소수자들은 잠깐이지만 법적으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심지어 소련 수뇌부 중에서도 성소수자가 있었다. 트로츠키의 후임자로 초대 소련 외무장관이 된 게오르기 치체린은 동성애자로서 정치 배경도 멘셰비키 출신에 당시 소련 지도부에서 비주류에 속했지만, 레닌에게 중용받아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라팔로 조약의 체결에 참여하는 등, 외교적으로 중요한 업무를 담당했다. 치체린은 스탈린 정권 시기인 1930년에 은퇴했는데,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숙청당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스탈린 정권 시기부터 법령이 개정되면서 성소수자들은 다시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수만 명이 넘는 성소수자들이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주된 탄압 대상은 남성 성소수자로서 여성 성소수자는 정권의 관심에서 멀었다.
이는 제정 시기와도 유사한 행태인데, 러시아 제국의 경찰과 오흐라나, 지식인들도 남성 성소수자에게만 관심을 기울였지, 여성 성소수자들은 체포도 하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제정 시기 남성 성소수자 공동체는 의사, 지식인, 경찰들이 남긴 회고, 정보, 기자들이 목숨 걸고 공동체에 잠입해 취재한 기록들이 존재하지만, 여성 성소수자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정보를 철저히 은폐했고 의사나 기자, 지식인들이 정보를 수집하지 않아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굴라크에도 성소수자들이 존재한 것이 파악된다. 굴라크를 방문한 이들과 간수, 경비원들의 회고, 기록에 따르면 장교처럼 군복을 입고 남장한 여성들이 '남성역'을 수행하고 여성 연인과 함께 하고 있었다고 한다. 간수와 경비원들은 이 남장한 여성들을 간성인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소련 사회의 강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성소수자 공동체는 암암리에 명맥을 이어갔지만, 때로는 체제를 위한 도구로써 악용되기도 했다. 일례로 영국 외교관이었던 존 바살(William John Christopher Vassall, 1924-1996)의 사례가 있었다. 1952년 모스크바 주재 해군 무관이자 군종관으로 근무하던 바살은 성소수자로써 주변 사람들로부터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같은 성소수자이자 대사관 직원이었던 미하일스키를 통해 모스크바 내 성소수자 공동체를 소개받았다.
하지만 당시 성소수자 공동체는 KGB의 감시망을 피해갈 수 없었고, 외국 외교관들의 약점을 수집해 첩보자산으로 활용하던 미인계 및 콤프로마트 공작[127]을 벌이던 KGB는 바살이 성소수자 공동체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입수하자, 바살을 위한 파티를 열어 다른 남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촬영했다. 다음날, KGB로부터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여러 장 받은 존 바살은 본국인 영국으로부터 처벌을 피하기 위해 수년 동안 소련의 간첩으로 활동해야 했었다.
소련에서는 성전환 수술이 1920년대부터 집도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당시의 성전환 수술은 인터섹스를 교정하려고 시행했다. 본격적인 성전환 수술은 1970년부터 집도되기 시작했다. 다만 성전환 수술이 집도되었다해도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다반사였던 시대인지라 트랜스젠더가 사회에 당당히 나서서 활동을 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트랜스젠더가 처음 공론화된 것은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였으며, 이후 1990년대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128]
13. 기타
- 소련 시절 생산된 공산품 및 예술품들은 무식할 정도로 튼튼한 것으로 유명했다. 공산주의 경제 특성상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오랫동안 쓰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디자인은 투박하고 실용적인 기능만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일단 성능은 충족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련산 가전제품, 생활용품들은 현재도 잘 쓰이고 있다. 러시아 블라디미르주에 있는 콜추기노(Kol'chugino, Кольчу́гино)에서 생산되던 주전자는 무려 황동으로 만들어졌고 두껍고 튼튼해서 60년 이상 묵은 제품도 여전히 구소련 국가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현역으로 잘 쓰이는 걸 볼 수 있다.[129] 그 외에 툴라의 사모바르나 구소련산 슬라바, 라케타, 포베다같은 기계식 시계들도 잘 쓰이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런 제품들은 앤티크 제품으로써 두터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소련시절에 생산된 물건들에는 크게는 사모바르와 도자기인형 같은 것부터 작게는 전기케이블, 전구, 과자, 담배갑 같은 시시콜콜한 것도 제품 표면이나 포장지에 가격이 찍혀있는데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이 가격이 급하게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툴라에서 생산되고, 현재도 러시아에서 계속 생산되는 전기 사모바르의 경우, 1960, 70년대의 가격은 40루블로 일정하나 1980년대 이후 50루블, 60루블로 치솟는다. 그리고 가격자유화가 이루어진 1991년산 이후의 사모바르는 가격표시가 되어있지 않다. 물론 이 가격은 국영상점의 판매가이며, 국영상점의 물품은 늘 부족했기 때문에 국영상점의 물건을 확보한 다음에 인민들에게 비싼 값으로 되파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 의외로 복권 산업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원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사행성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복권이 금지되었지만 이후로 소련이 내전 상태에 빠지면서 재정 상황이 말이 아니었던지라 1921년부터 다시 발행을 시작했던 것, 이후로 일시적으로 발행하는 수준이었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복권이 생기기 시작했고, 소련에서 카지노 같은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박 수요가 복권으로 몰려들어서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급으로 활성화되었던 것이다. 다만 초기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당첨되면 현금으로 돌려주는" 로또 형식의 복권보다는 빙고와 같이 당첨되면 상품을 증정하는 형태의 복권이 대다수였다.[130] 정기 복권 발행 초창기에는 주로 자동차를 상품으로 주는 복권이 인기였고, 이외에도 냉장고나 소정의 현금, 예술 상품을 당첨 상품으로 내거는 복권도 있었다. 이처럼 복권 산업이 활성화되어 있다 보니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이 열렸을 당시에도 재원의 절반 가량을 복권 판매로 충당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복권 1등에 당첨되었다고 미국이나 유럽처럼 백만장자 자산가가 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1등에 당첨되면 몇년치 봉급에 해당되는 금액을 받았고 간혹 복권을 다발로 사서 운이 좋을 경우에는 약 10년치 급여에 달하는 금액을 받아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31] 1982년작 영화인 "스포츠 로또 1982년"(Спортлото-82)라는 코미디 영화도 제작되어서 크게 흥행한 것을 보면 당시 소련에서 복권이 서민들의 소소한 여흥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대부분의 당첨자들은 돈으로 받기보다는 자동차를 선택했다고 한다.[132]
여담으로 당시 소련에서는 같은 숫자가 3번 이상 나오는 복권에는 '행운'이 담겨있다는 일종의 미신이 있었으며, 이는 현대 러시아에도 일부 남아 있다. 이런 복권을 "행운의 티켓"(Счастливый билет)이라 부른다. "행운의 티켓"에 대한 노래 (한국어 자막 포함)
- 빈병 줍기가 쏠쏠한 용돈벌이 수단이었다. 소련의 물가 수준에 비해서 빈용기 보증금의 액수가 15~20코펙으로 제법 되었기 때문이었다.[133] 당시 공식적으로 근로를 할 수 없었던 소련 아동 입장에서 이 금액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15코펙이면 시내버스 혹은 노면전차를 3번 타거나 빵 한 덩이[134]를 살 수 있었고, 자잘한 학용품이나 군것질거리는 그보다 더 많이 살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콘 하나가 7코펙에서 28코펙이었다 한다. 그래서 소련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용돈벌이용으로 빈병을 줍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물론 성인들 입장에서도 적은 금액이 아니였기에 대다수의 알뜰한 소련 가정에선 남녀노소 할거 없이 주기적으로 병을 반납하러 동네마다 있는 유리병 수거장에 줄을 서는게 일상이였다.[135][136]
- 1960년대 소련인들이 상상한 2017년의 미래상.
- 밤문화의 경우에는 대체로 심심했던 편으로 평가된다. 물론 소련에 술집들도 많았고 문화회관과 디스코장에서 춤판을 벌이기는 했지만, 나이트클럽처럼 술을 따로 팔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술도 파는 나이트클럽이 개장한것은 1990년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14. 참고
- 문학
- 러시아 문학사, 드미트리 미르스키 저, 이항재 역, 써네스트, 2008년.
- 음악
- 식문화
- The Surprising American Fast Food Roots of Traditional Russian Cuisine (영어) (러시아 전통요리에 숨겨진 미국 패스트푸트의 놀라운 기원), Nicole Ziza Bauer, KCET, 2021년 07월 01일.
- How the Communists 'stole' beloved American foods (영어)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에서 사랑받는 음식을 어떻게 '훔쳤을까'), Anna Sorokina, Russia Beyond, 2019년 02월 01일.
- 기타 출처
- Russia Beyond (영어), Russia Beyond (한국어)
로시스카야 가제타에서 설립하고 RT에서 운영하는 문화 공보용 사이트다. 소련 및 러시아 문화에 관련된 양질의 컨텐츠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의 문화뿐만 아니라 러시아 제국과 소련 시절에 일어났던 여러 문제적 사건들과 당대의 사회문화, 유행등이 어땠는지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도 한때 중앙일보와 제휴해서 러시아 포커스라는 이름으로 발행된바 있고, 한국어 사이트도 있지만 2017년에 구조조정을 거쳐 다수의 언어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기존 사이트만 유지하는 실태이고, 기사 신규 업데이트가 없다.
다만 운영 주체가 주체인 만큼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비록 RT나 스푸트니크같은 같은 계열 미디어처럼 노골적으로 체제를 선전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국영매체라는 특성상 치부가 될 수 있는 내용은 편집되거나 윤문되어 나오는 편이다.[137] 따라서 소련 및 러시아 문화를 처음 접하는 입문 내용으로 참고하고,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해당 내용과 관련된 자료를 같이 찾아보며 교차검증할 필요가 있다.
15. 관련 문서
[1] 그러나 생필품이나 사치품의 공급이나 유통망이 낙후되어서 구매력을 따라가지 못했고, 이 때문에 소련의 물자 문제가 심각했다.[2] 소련 건국 이후 러시아 문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혁명 당시 가족과 함께 망명 후 러시아계 미국인이 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꼽을 수 있는데 나보코프도 처음에는 러시아어로 소설을 쓰다가 나중에는 영어로 글을 썼다.[3] 사실 문화적 측면에서 군사독재의 영향을 받았던 한국과는 달리, 냉전 시기 미국과 서유럽을 비롯한 서구권에서는 소련 및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문화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했다. 다만 오늘날과 같은 정보교류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냉전 시기 특성상, 소련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창구는 비교적 제한적이었다.[4] 다만 소련 정부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기독교적, 반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상당히 불편해하여, 몇몇 서적을 불온 서적으로 취급했고, 러시아 백계 난민(Белая эмиграция)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5] 비슷하게 예전에 한국에서 등단하려면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를 통과하고 기존 작가의 추천을 받아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6] (출처) Who could become millionarire in USSR?, Georgy Manaev, Nov. 10 2022 (영어)[7] 뒷이야기로 노비 미르의 편집장이었던 처음 작품을 받았을 때 당시 편집장이였던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는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생활의 자세한 묘사에 감명받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직접 해당 작품을 출간시켜 달라고 요청했었다고 한다. 당시 중앙위원들은 대부분 소설의 출간에 반대했지만, 니키타 흐루쇼프가 작품을 마음에 들어하면서 결국 출간될 수 있었다고 한다.[8] 참고로 미르스키는 좌익 유라시아주의의 창시자이기도 했으며 1932년 영국에서 소련으로 귀환해 활동하였으나, 대숙청 시기인 1939년 간첩 혐의로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했다.[9] 한 가지 예로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필한 자서전의 경우 흐루쇼프가 KGB로부터 압력을 받아 그동안 작성했던 원고를 넘겨달라고 하자, 아들이었던 세르게이 흐루쇼프는 미리 복사본을 만들어 두어 KGB에게 원본을 넘겨주고 지인들을 통해 복사본을 서방으로 반출시켜 반드시 출판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그 결과 흐루쇼프의 자서전은 본인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970년 서방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10] 소련 반체제 문학의 대표작이었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이 잡지에서 처음 선보였다.[11] 그러나 정치적 능력 만큼은 좋았던 리센코는 흐루쇼프의 도움으로 복권되었고, 처녀지 개간 운동과 같은 대참사를 일으킨 뒤에야 정치국에서도 비난받으며 완전히 끌어내려졌다.[12] 이는 민요나 선전가요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북한의 가요계 때문에 생긴 편견이다. 허나 소련만 하더라도 1950년대부터 영미권 락앤롤을 모방하는 밴드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중국도 개혁개방 시절부터 최건 같은 가수들이 활동하였다.[13] 1964년에 설립된 소련의 국영 음반사이자 소련의 유일한 공식 음반사. 멜로디야가 아닌 소련 음반사는 전부 (비공식 및 불법) 언더그라운드 음반사였다. 당대 세계 최대 규모의 음반사이기도 했다.[14] 물론 검열은 적용되어서 언더그라운드 가수의 음반을 발행하지 않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고르바초프때 들어서는 인디 가수들의 음반도 취급하였지만, 저작권을 대놓고 무시하는 일이 빈번했다. 키노는 자신들이 만들다 폐기한 음반을 멜로디야에 그대로 빼앗겼고,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는 멜로디야가 자신들의 노래를 다른 가수의 노래와 뒤섞어 만든 근본 없는 컴필레이션 앨범을 찍어내는 것을 보고 발매 중단과 저작권료를 요구했으나 무시당했으며, 마스테르는 멜로디야가 발매한 자신들의 2집 앨범 수익의 0.1%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야 했다.[15] 과거에는 즈다노프를 위시한 당국자들의 탄압에 시달렸으나, 스탈린 사후에는 이런 기조가 완화되어 이 즈음이 되면 재즈는 소련에서 상당히 밀어주는 음악 장르가 되었다. 대신 락이나 메탈을 잡았다[16] 이 쪽에서는 밴드 크루크(Круг)가 유명하다. 1980년대 초반 소련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문화부가 이를 단속하려 하자 당시 서기장이었던 안드로포프의 아내와 아들이 직접 나서서 이를 막았다는 전무후무한 뒷이야기를 남겼다.[17] 이 쪽은 주로 8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아리야(Ария), 마스테르(Мастер), 아브구스트(Август), 크루이스(Круиз), 초르니 코페(Чёрный кофе), 초르니 오벨리스크(Чёрный Обелиск) 등이 그 예시.[18] 이 쪽에서는 빅토르 살티코프의 밴드 포룸(Форум)이 유명하다.[19] 러시아 일렉트로닉 음악의 시조로 꼽히는 유리 체르납스키 및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에두아르트 아르테미예프와 같은 인물들이 활동했으며, 밴드 중에서는 신스팝 밴드인 알랸스(Альянс)가 1980년대 대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알랸스의 대표곡 "새벽에"(На заре). 사실 서방권에서도 전자 음악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했으므로 그리 늦은 편은 아니었다. 당장 일본의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나 서독의 크라프트베르크가 데뷔한 게 80년이다.[20] 기록상 소련의 최초 락 밴드는 50년대 모스크바에서 출몰했으며, 사실상 관제 밴드긴 했으나 비틀즈 등의 노래를 커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당시 환경의 열악함으로 인해 이들 중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의 기록이 실전되었다. 앨범은 고사하고 질 좋은 실황 녹음본, 하다못해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밴드가 대다수.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는 사정이 그나마 나았지만, 지방 쪽으로 가기 시작하면 상황이 절망적이다. 노이즈 잔뜩 낀 채 씹힌 카세트 테이프 한 두 개만 남아 있어도 다행이다 할 수준.[21] 보컬-기악 앙상블(Вокально-инструментальный ансамбль), 줄여서 ВИА(비아).[22] 예를 들어 1960년대에는 에스트라다 스타일의 곡이 주류였다. 소련 음악을 거론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단어인 "에스트라다 스타일"은 반주보다 러시아 특유의 운율을 딱딱 맞춘 싯구 같은 가사, 기억하기 쉬운 주 선율 그리고 가수의 가창력이 중심이었으며 잔잔한 오케스트라 선율의 반주를 보통 사용하였다. 우라나라로 따지면 뽕짝기가 빠진 7080 대중가요나 포크 음악과 유사한 편이다. 알라 푸가초바가 부른 백만송이 장미 러시아판이 대표적인 에스트라다 가요다. (원곡은 라트비아 노래) 허나 시대의 흐름 또한 보수적으로나마 수용하였기에, 1980년대가 되면 사이키델릭하거나 상당히 락스러운 곡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시점쯤 되면 군 내부 음악 페스티벌에서 장병들이 헤비메탈 곡을 커버해 부르는 등 상당히 사회적으로 검열이 느슨해진 시기긴 했지만.[23] 그 예시가 ВИА Поющие гитары(노래하는 기타들)의 곡 "Синий иней"(푸른 서리)인데, 들어보면 알겠지만 영국의 R&B 밴드였던 Eruption의 One way ticket의 선율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가사를 완전히 개작하는 경우도 있었고, 단순히 번역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24] 소련 최초의 반전 가요로 꼽히는 "То, что я должен сказать"(내가 말해야만 하는 것)을 부른 가수이다.[25] 이런 비공식 소규모 공연을 크바르티르니크(квартирник)라고 한다. 아파트 방(квартир)에서 주로 공연했기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크바르티르니크는 불법이었다. 당국에 적발될 경우 음악가들은 하룻밤 구류를 살았고, 공연을 주선한 사람은 최대 몇 개월까지 감옥에 투옥될 수 있었다.[26] 빅토르 초이는 화부(stoker)였고, 유리 셰프추크는 미술 교사였으며,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는 경비원과 수위로 일했다. 이 쪽에서도 서로 간의 인맥과 커넥션이 있어서, 특히 편한 직업은 타 음악가의 소개가 없으면 못 들어갈 지경이었다.[27] 원칙적으로는 출연할 수 없었다. 물론 암암리에 들어가는 것까지 눈에 불을 켜고 단속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소련의 국민 영화였던 "이반 바실리예비치, 직업을 바꾸다"(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меняет профессию, 1973)를 보면 배경음악으로 바르드 가수였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노래가 슬낏슬낏 지나간다. 1980년대가 되면 아예 이런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전문으로 출연하는 인기가요 스타일의 프로그램 "뮤직 링"(Музыкальный ринг)이 방영되기도 했다.[28] 멜로디야는 소련 국영 음반사로, 당시 소련에 존재했던 유일한 음반사였다. 즉 멜로디야를 사용할 수 없다면 정식 유통망을 통해 공급할 수 없었다. 실제로 멜로디야를 사용하지 못하던 시절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은 음악으로 돈을 벌지 못했다. 음반을 내도 불법 복제로 유통되다시피 하던지라...[29] 이후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멜로디야는 이런 언더그라운드 락 밴드의 앨범 취입, 판매, 유통을 맡기 시작했다. 그 첫 타자가 마시나 브레메니였는데, 동료 음악가들은 이런 마시나 브레메니에게 "배신자"라는 비난까지 서슴치 않았다. 일례로, 데데테의 노래 "죽은 개 발로 차지 마라"(Не пинайте дохлую собаку, 1985)는 보컬 셰프추크 본인이 마시나 브레메니의 메이저 진출을 두고 마시나 브레메니의 멤버인 마카레비치를 저격한 곡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곡이다.[30] 레닌그라드의 안드레이 트로필로(안트로프 스튜디오)나 알렉세이 비시냐(얀시바 셀라 스튜디오)처럼 집이나 자신의 소유 건물에 사설 스튜디오를 차려 설비를 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더 나아가, 아크바리움의 "라디오 아프리카"(1983) 앨범처럼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몰래 시설을 임대해 녹음 작업을 한 경우도 있었다. 참고로 당시 뇌물을 먹이고 앨범을 찍은 곳은 그 유명한 키로프 극장. 재미있게도 이런 사설 스튜디오에서 음반을 녹음했다는 게 (사실 많은 경우에는 그렇긴 했으나) 반드시 조악한 저품질 결과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례로 1980년대 초중반부터 활동한 언더 밴드 피크닉(Пикник)의 1/2집은 사설 스튜디오 작업물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중에 나도는 리마스터링판은 상당한 음질을 자랑한다.[31] 레닌그라드는 당시 러시아 락의 사실상 중심지로 기능했다. 소련 제2의 도시이자 서방 세계였던 핀란드와 접해 있어 서방의 악기와 음반을 그나마 쉽게 밀수할 수 있었던 점이 한 몫 했다.[32] 정부의 감독관이 공연 셋리스트와 가사 등을 검열했으며, 하다못해 관중들의 태도까지 감독했다. 락 공연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래카드나 환호성조차 규제당해서 마치 오페라를 관람하듯 점잖은 차림으로 자리에 앉아 매 공연이 끝날 때마다 박수로 화답하는 것 외에는 큰 소리도 낼 수 없었다.[33] 재미있게도 락클럽의 설립을 주도한 자는 한때 고르바초프와 함께 서기장 후보로 꼽히던 그리고리 로마노프(1923 - 2008)였다. 그리고리 로마노프는 정치적으로 보수파였는데, 해당 시설의 설립을 통해 "반동분자"들을 한데 모으고 의견을 종합해 이들을 감시하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34] '아마추어 음악가' 등 3인이 지역 신문에 발표한 사설에서 제대로 털렸는데, 훗날 본인들이 인정했듯 사실상 언론의 이름을 빌린 KGB의 다굴이었다. 당시 사설을 보면 노래 가사에 '신'이 언급되었다는 이유로 바티칸의 하수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수준이었다.[35] 이 와중에 당시 작업한 앨범 원판이 압수되었고 이후 분실되었다. 당시 앨범 제작을 맡았던 사운드 엔지니어가 훗날 복구하긴 했지만.[36] 당국 몰래 진행한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황을 녹화한 자료가 상당수 남아 있다. 아이러니한 건 분명히 공식 관제 페스티벌이었던 록 파노라마 86/87의 경우 전체 영상이나 녹음은 전혀 남아있지 않으며 개인이 알음알음 찍은 저화질 영상이나 녹음 정도만 남아 있다. 멜로디야에서 동명의 앨범을 출시하긴 했는데, 실황이 아니라 참석한 밴드들의 앨범판 곡을 그대로 수록해 발매한 일종의 컴필레이션 앨범이었다.[37] 본격적으로 탄압의 광풍이 휘몰아쳤던 1980년대 초반 키노는 훗날의 유명세와는 달리 '아는 사람만 아는' 수준의 레닌그라드 지역 밴드였던지라 탄압이나 피해를 받진 않았다. 이들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변화의 투사' 이미지를 얻은 것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발표된 앨범 혈액형(1988) 공개 전후였다.[38] 그 유명한 비소츠키는 알코올에 진정제 중독자였으며, 비아 중에서도 마약 복용이 걸려 멤버 전체가 물갈이된 사례가 있었다.[39] 헤비메탈 밴드 아리야가 그 예시. 원래 아리야는 비아 출신이었고, 비아는 공식적으로 감독과 매니저가 배정되었다. 그런데 아리야의 매니저였던 베크시테인은 자금을 횡령하고 멤버들을 핍박하는 등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고 결국 아리야 멤버들은 뛰쳐나가 언더그라운드 밴드 "아리야"를 결성하게 된다.[40] 80년대 팝 밴드였던 미라시(Мираж)가 그 예시. 여성 보컬 타티아나 옵시옌코를 내세워 인기를 끈 팝 밴드였는데, 정작 옵시옌코는 TV 출연 담당이었고 진짜 보컬이 따로 있었다. 결성 당시 진짜 보컬은 이리나 솔티코바(Ирина Ивановна Салтыкова).[41] 80년대 러시아의 슈퍼스타였던 알라 푸가초바가 그 예시. 당시 타 음악가의 노래를 뺏어가거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가수를 핍박하는 등 각종 텃세를 부렸다는 증언이 수두룩하다.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에게 꼽사리 낀 것이나, 망언 제조기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와 한때 관계를 맺은 것도 자주 등장하는 비판.[42] 80년대 초반 튜멘에서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 밴드였던 "인스트룩치야 포 비지바니유"이 그 예시. KGB의 탄압에 밴드가 사실상 해체되었으나, 튜멘 락 클럽의 직원이었던 로만 네우모예프가 사실상 다시 부활시켰다. 이후 원 멤버들과 노래 저작권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으나, 밴드는 현재까지고 활동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러시아 위키피디아에 "쇼 비즈니스의 상어"로 직접적으로 언급된) 네우모예프는 이전까지 가수와 거리가 먼 생활을 했으나, 예토전생 과정에서 기타를 배우고 보컬로 나서게 되었다.[43] 이고리 탈코프는 80년대 소련의 대중음악 가수로 1992년 자신과 갈등을 빚던 프로듀서에게 나강 권총으로 피살당했다. 프로듀서는 유대인 출신으로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스라엘로 도망쳤는데, 본인은 현재까지 자신은 누명을 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피의자 인도를 거부해 한동안 수사가 난항을 맺다 2022년에서야 간신히 불구속 기소가 된 상황.[44] 사실 저작권에 대한 낮은 인식은 소련과 90년대 러시아에서 아주 만연하던 문제였다. 당국 탄압도 있었지만, 여하간 소련 시절 음악가들이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하던 데는 이런 복제가 한 몫 했다.[45] 90년대 해빙 이후 비틀즈 측은 특별히 러시아 전용으로 비틀즈 앨범들을 풀었는데, 도를 넘은 불법 복제로 비틀즈 측이 빡돌아서 다시는 러시아에 앨범을 팔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썰이 존재한다.[46] 카세트테이프 빽판은 특별히 "마그니티즈다트(магнитиздат)라고 불렸다.[47] 늑골 항목 참조. 당시 소련에서는 병원에서 폐기한 X-레이 필름을 가공한 뒤 밀수해 온 레코드에 대고 눌러 찍는 방식으로 빽판을 제작하곤 했다. 뼈 사진이 찍힌 필름으로 만들었다고 "갈비뼈"(ребра)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보통 5~10회 재생하면 망가져서 더 이상 재생할 수 없을 정도로 저급품이었지만, 그럼에도 1루블~1루블 50코펙 하는 싼값에 많이 배포되었다. 1948년 레닌그라드에서 처음 제작되었으며, 1950~60년대 소련 언더그라운드 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1970년대에 카세트 테이프가 대중화됨에 쇠퇴하였다.[48] 1975년 발매된 José Feliciano의 ‘Affirmation’의 커버이다.[49] 영상 제목을 보면 "09.06.1988"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1988년 09월 06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1988년 06월 09일임을 의미한다. 러시아의 경우 날짜를 (일)-(월)-(년) 순서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50] 통계상으로 보면 TV수상기 대수가 100만대를 돌파한 것은 1957년도이고, TV가 1가구당 1대꼴로 보급된 것은 1970년대의 일이었다.[51] 원래 소련에서도 자체 컬러방송 전송방식을 개발하려고 했으나 개발작업 및 수상기 양산에 난관이 일자 포기했다.[52] 처음에는 컬러TV 1대 가격이 1000루블을 초과했다. 못 구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웬만한 소련 가정의 8달치 급여에 맞먹는 수치였고 기존 흑백TV 가격의 3배에 달했기 때문에 쉽사리 엄두가 안 나는 가격이었다.[53] 물론 점차적으로 낮아졌다고는 해도 이전부다 부담이 덜한 수준이고 절대적으로 보면 600~750루블대로 싼 값도 아니었다.[54] 원래 미국과 일본도 이런 식으로 컬러TV가 보급되었다. 미국에서 컬러방송을 1954년에 시작했음에도 컬러수상기가 흑백수상기 수를 추월한 것은 1972년도였고, 일본도 1960년데 컬러방송을 시작했음에도 컬러 수상기가 흑백 수상기 대수를 추월한 것은 1973년도의 일이었다. 초창기에 컬러 수상기의 가격이 흑백 수상기보다 비쌌고, 송출 지역도 한정적이라서 사람들이 굳이 비싼 돈 들여 컬러TV를 사지 않았거나 못했기 때문이었다.[55] 다만 로시야 텔레비전이 만들어진 것 자체는 1991년으로 매우 늦었다. 러시아를 제외한 타 구성국에서는 자국어 텔레비전 채널이 있었지만, 러시아에서는 이미 중앙방송에서 러시아어로 송출하고 있었고, 프로그램 3과 프로그램 5에서 지역방송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러시아인을 위한 채널을 편성할 필요가 작았다.[56] 한국으로 치면 단막극 비슷한 위상이다.[57] 당시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던 텔레비전 세트는 루빈-714(Рубин-714)라는 모델이었는데, 특히 잘 터지는 걸로도 유명했다.[58] 출처: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59] 출처: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紙의 보도[60] 여담으로 조용한 밤중 번쩍이는 화면에서 1초마다 나는 비프음과 섬뜩하게 보이는 경고문은 많은 소련 어린이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문구는 소련 붕괴 후 옐친 시절까지도 계속 방영되었는데, 소련이 붕괴되었다고 해서 소련 시절 텔레비전까지 싸그리 사라진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련 시절에는 불이 나면 소방대가 출동했지만,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던 옐친 시절에는 출동할 소방대도 온데간데없었다는 차이점이 있긴 했다.[61] 채널에 따라 다르지만 평일에는 12시에서 14시 사이 혹은 14시부터 16시까지가 정파 시간이었다. 종종 영상 대신 라디오 방송을 수중계하는 경우도 있었다.[62] 한국도 마찬가지로 TV방송 초기부터 1970년대 중반에 이코노TV가 출시되기 이전까지 TV를 보려면 스위치를 켠 다음 예열시간을 기다려야 했다.[63] 당연히 텔레비전의 핵심 부품 중 하나인 브라운관도 질이 상당히 떨어졌다.[64] 사실 독일에서는 공영방송에 한해서지만 그 잔재가 남아 있고 이탈리아나 네덜란드 등도 하루에 몇번씩 광고를 묶어 편성하는 식이었다.(블록광고) 한국에서도 1981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KBS 1TV에서도 이런식으로 광고를 편성했지만 1994년에 KBS 1TV의 광고가 폐지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65] 다만 저작권 문제로 인해 현재는 전부 삭제되었다.[66] 하지만 현재 에스토니아 텔레비전(ETV)에서는 광고를 내보내지 않고 있는데 에스토니아라는 나라 자체가 인구가 140만명 안팎으로 적다보니, 새로 출범한 민영방송들이 적자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002년에 광고가 폐지되었고 현재는 국가예산으로 재원이 충당되고 있다.[67] 지금은 그 시절 수신기에 CCIR FM을 청취하기위한 변환기가 있다.[68] 인구가 더 많은 중국과 인도는 소련에 비해 신문발행량이 밀렸다. 소련이 존속했을 당시에는 문맹률이 상당했던 편이기도 했고, 경제력도 비교적 열악했기 때문이었다.[69] 참고로 소련 시절 일반적인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 약 200루블 정도였다. 물론 정부 보조금이 상당히 들어가긴 했지만, 당시 영화표 한 장이 50코페이카, 아파트 월세가 관리비 합쳐 한 달에 약 12루블, 대중교통 한 번 타는 데 5~20코페이카가 들었다.[70] 이렇게보면 대단히 많이 읽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문의 면수가 4~6면 안팍으로 적었다. 대신 광고는 거의 없어 평균적으로 치면 한국의 신문 1~2개를 본것과 분량상 차이가 크지는 않았다.[71] 중국의 인민일보나 북한의 로동신문의 구성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72]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에 존재한다. 신문사 홈페이지[73] 그래서 프라우다에는 프라우다(진실)가 없고, 이즈베스티야에는 이스베스티야(소식)가 없다는 농담이 세간에 돌아다니기도 했다.[74] 레닌이 주창한 개념으로 인민통신원을 중앙정부 차원에서 신경쓰기 힘든 관료들의 부패를 고발하여 사회를 개혁하는데 필요하다면서 프리랜서 기자들의 양성을 지시했고, 스탈린이 300만명이 넘는 인민통신원이 있다고 직접 언급했을 정도다.[75] 다만 당시 소련 신문의 지면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편지를 다 실을 수는 없었고, 싣는다 해도 일정 검열 수준을 넘어서면 실을 수 없었다.[76] 소련 반체제 문학의 걸작이었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같은 작품이 나오던 시기도 이 시기였다. 다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비롯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작품들은 당시 소련 정부가 검열에 나섰다. 솔제니친의 작품이외에도 반체제 작품에 검열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77] 다만 자가 아파트가 좁았기 때문에 책을 별장에다 보관하는 경우도 많았다.[78] (출처) Книги как роскошь: то дорого, то дефицит (러시아어)(사치로써의 서적: 비싸면서도 부족했던), 보리스 베일린, 2015년 11월 24일, 베스티 FM(Вести ФМ).[79] 물론 이에 대해서 소련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소련의 TV가 재미없어서 독서량이 많았다는 식의 야유섞인 농담을 하기도 했다. 한국도 TV채널이 1개~3개 정도였던 시대였지만[80] 물론 세계에서 독서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라는 타이틀은 인도 등 다른 국가들로 넘어갔다.[81] 소련에서는 원칙상 개인 간 상거래가 불법이었다.[82] 당시 임금은 오르는데 상점에서 살 것이 없어 평균 소련 인민의 실질 수요력은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의외로 이런 돈을 마련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았다. 여담으로, 당시 보드카 등 주류 판매량이 늘어난 이유에도 이러한 '쌓여만 가는 은행 계좌'가 한 몫했다.[83] (출처) SOVIET SUFFERING PAPER SHORTAGE; Books and News Curtailed -- Government Denounces Misuse of Machinery (영어) (소련이 종이 부족을 겪고 있다: 책과 뉴스가 축소되고, 정부는 기계 오용을 부정했다), The New York Times, 1961년 1월 29일.[84] (출처) PAPER SHORTAGE IS FELT BY SOVIET (영어) (소련이 종이 부족을 체감하고 있다), The New York Times, 1973년 10월 9일.[85] (출처) Книгообмен в СССР, ч. 1 (러시아어) (소련에서의 서적교환, 1부), 2016년 5월 11일, strana-sssr.net.[86] 1970년대 서구권에서 제록스같은 복사기를 수입했다.[87] 러시아 영화 항목에도 나와있듯, 소련 영화는 세계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88] 1982년 기준 영화표 한 장은 50코페이카였다.[89] 제작 당시에는 검열 때문에 약 20년 가량 개봉하지 못하다가 1986년 5월에서야 첫 시사회를 가졌다.[90] 사실 소련 초창기에는 수입제한이 없었지만, 1927년에 수입제한이 생기면서 이때부터 미국영화를 보는데 지장이 많았다. 예외적으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 대한 우호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미국영화를 상영했으나, 전후에는 냉전이 시작되면서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는 쉽게 관람하기 어려웠다. 그 외에도 데당트 시기에 일시적으로 미국영화의 상영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이 또한 반짝 특수 정도에 그쳤다.[91] 다만, 안톤 체호프는 소련 체제가 출범하기 한참 이전인, 1904년에 사망했다.[92] 한국에서 만화를 어린이들이나 보는 매체로 천시하여서 만화 발전이 늦어졌다는 말이 있고,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기는 하지만, 사실 일본에서도 1980년대 이전에는 만화를 어린이들이나 본다는 편견이 많았었고, 미국과 중국, 소련, 대만도 역사를 따져보면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다.[93] 1969년부터 제작이 시작되어 2D 셸 애니메이션으로는 2006년까지 20회로 제작되었고, 3D 리에이크 버전은 2021년에 공개되었다. 다만 리메이크 버전은 저질의 그래픽과 서투른 편집으로 인해 혹평을 받았다. 오죽하면 러시아 연방 공산당도 이 작품을 보고 원작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애니메이션 제작자를 고소해야 한다고 날뛰는 코미디스러운 촌극이 벌어졌을 정도.[94] 누 파가디는 구소련권에서 최고의 인기 애니메이션으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로, 이미 소련 시대에 게임과 껌, 우표도 나왔을 정도였고, 소련 해체 이후로도 구 소련권에서 재방영이 자주 이루어졌으며, 기념동전도 나올 정도이다. 톰과 제리, 루니툰, 딱따구리 같은 미국의 인기 애니메이션처럼 늑대가 토끼를 잡겠다고 꾀를 부리다가 된통 당하는 것이 주 내용인지라, 미국 언론에서는 '소련의 톰과 제리'라고 소개하기도 했고, 소련 해체를 전후해서 미국 애니들이 구소련권 어린이 시간대에 널리 방영되기 시작했는데, 구소련권 시청자들은 톰과 제리와 루니툰이 누 파가디와 비슷한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다. 다만 누 파가디 제작진들이 방송 초기 당시에는 톰과 제리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하고, 톰과 제리를 본 것은 1987년이었다.[95] 여담으로 2012년부터 러시아에서 어린이 관련 영상매체 검열 법안이 강화되면서, 누 파가디도 새로운 검열 기준에 따르면 폭력적인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실제로 19금으로 지정되어 심야시간에서 새벽시간대에만 방영이 가능해지고, 거기에다가 담배를 피는 장면까지 삭제되어야 하냐는 논란이 생기면서 검열기관에서 직접 해당 작품은 아동작품으로 방영될 것이라 해명하는 일이 있었다. 그만큼 러시아 검열 기준이 당대 기준으로도 매우 보수적인 편이었고, 누 파가디가 위낙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 (러시아어)[96] 인기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자체 제작하는 것에 비해 판권료가 저렴해서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시청자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다만 2010년대 들어서면서 마샤와 곰같이 몇몇 아동 애니메이션이 성공을 거두면서 조금씩 새로운 작품들이 선을 보였다.[97] 참고로 KBS판 아기공룡 둘리의 경우에는 원작자가 방송연장을 거부했음에도 분량이 누 파가디보다 훨씬 많다.[98]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라서 아무리 인기 애니라도 주 단위로 빡빡하게 제작하는 개념이 아니라서 령리한 너구리와 다람이와 고슴도치는 수십년에 걸쳐 에피소드가 제작되었음에도 회수가 100회를 넘지 못한다. 비슷하게 체코슬로바키아의 장수 애니 시리즈인 패트와 매트도 제작기간이 길어 주 단위로 편성하는 개념의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대신 상업영화에서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넣을 수 있어 독창적인 작품이 탄생했다.[99] 동유럽권에서는 이름이 있는 작품이지만 한국에서는 냉전 시대이다보니 수입되지 못했고, 이후로도 미국과 일본 작품 위주로 수입되다보니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한국에 알려진 대표적인 동유럽 애니메이션 작품으로는 패트와 매트(체코슬로바키아)가 있다.[100] 소련 첫번째 민영방송사로 처음에는 소련 제3프로그램(모스크바 프로그램)의 저녁 시간대를 빌려서 편성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수입프로그램과 뮤직비디오를 많이 틀어주었다. 이후 1997년도에 계약연장 실패로 폐국되었다가 2003년도에 재개국했고, 애니메이션의 편성비중이 높다. 또한 해당방송사에서 편성하는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저연령층 작품뿐만 아니라 고연령층 작품들도 많이 수입해 틀어주는 편인데, 이중에서 사우스파크, 해피 앤드 프렌즈 같은 수위가 과격한 것들도 틀어주었다보니 학부모단체나 종교단체와도 트러블도 많은 편이다.[101] 일례로 대표적인 소련 애니 제작사였던 소유즈물트필름도 1990년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형극 제작 스튜디오를 매각하기도 했다.[102] 좌측부터 공훈광부(почётный шахтёр), 석탄산업부 관료, 석탄산업부 고위관료(예복), 국가 광업기술시찰국 고위관찰관, 광공업대학 학생(예복)이다.[103] 미국은 정부기관의 제복이 거의 사용되지 않은 건 소련과 비슷했지만 군인의 정복은 유럽의 그것과 유사했다.[104] 많은 국가의 제복에서 화려한 자수 등의 장식은 계급장을 겸한다. 당연히 높으신 분이 될수록 화려해진다.[105] 이건 심지어 군대도 마찬가지라서 장교도 직책만 있지 계급은 없었다. 그러다가 1935년이 되어 기강이 무너지고 군대가 무너지고 나라가 황폐화되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계급제도를 다시 도입했다.[106] 미국은 러시아 혁명을 거쳐 RSFSR의 성립이 공표되고 나서도 신생국가의 시장을 노리고 사업 등의 목적으로 출국하려는 자국민들에게 그런 나라는 없다며 금지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징 때문에 나온 견제책이기도 했지만 러시아 내전이 끝난 후엔 인정한다.[107] 소련은 연합국의 무기대여법 물자에 금/은사를 대량으로 요구했다. 소련의 경공업 수준으로는 금/은사를 대량으로 생산하는데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쟁하고는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런 터무니없는 부탁에 미국과 영국은 어이없어 했지만 그렇다고 안 들어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수천톤의 금/은사가 소련에 제공된다. 사실 소련의 제복들이 1943년을 기점으로 금자수 떡칠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만큼 풍족하게 물자를 받아서다.[108]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관등이 제정되기 때문에 새 계급장 도입에 맞춰 옷들이 비슷한 구조로 고쳐지는 것이다. 소련은 관등을 군대 계급과 거의 동일한 형식으로 제정했기 때문에 대게 비슷하다. 즉 군대처럼 위관, 영관, 장성의 구분도 존재한다.[109] 일례로 전술한 석탄산업부는 1954년에 제복이 폐지되었으나 1976년에 부활했다.[110] 1946년 이전까지 소련 장관회의의 명칭은 '소련 인민위원회의'였고 부(Министерство)는 인민위원부(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의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 헌법상 '국가위원회(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омитет)'도 중앙행정기관에 속한다.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국가안전위원회가 대표적이다.[111] 제복은 1943년에 제정되었으나 외교관 관등의 최초 제정은 1941년이다.[112] 초기에는 육해공 전부를 관할하는 부서였지만, 모두 분리되어 사실상 철도부가 된다. 제복 자체는 1918년부터 존재했다.[113] 제지산업도 총괄한다. 산림경비대는 1935년부터 별도로 제복이 존재했다.[114] 제복의 최초 제정년도는 1924년으로 해운부와 동일한데 원래 같은 부처 소속이었다.[115] 제복의 최초 제정년도는 1924년이다.[116] 국립은행(Госбанк)등의 은행원도 동일하다. 소련의 은행은 전부 국영이었다.[117] 직업교육을 잘 받지 못한 노인계층, 직업전문학교 학생 등을 관리했던 부서. 제복이란 것은 교복을 말하는 것이다.[118] 우체국의 우정공무원도 동일하다. 제복도 1918년부터 존재했다.[119] 부는 아니고 '소련 장관회의 산하 지리 및 지도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геодезии и картографии при Совете министров СССР)이었다.[120] 현재의 아에로플로트이다. 제복의 최초 제정년도는 1926년이다.[121] 당시 해당 발언의 당사자였던 류드밀라 이바노바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의 발언이 본의와 다르게 왜곡되었다면서 반박했다.출처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러시아어) 하지만 해당 발언은 당시 소련 사회가 성을 금기시하던 현실을 풍자한 유행어로 소련인들에게 화자되었다. 이후 이바노바의 발언은 소련에 성관계는 없다(В СССР секса нет)라는 표현으로 시대를 풍미한 유행어가 되었다.[122]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이 때문에 콜론타이는 상대적으로 권력과 거리가 먼 노르웨이, 스웨덴 대사를 역임하면서 대숙청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숙청기에 옛 볼셰비키 인사들 대부분이 숙청당했던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스탈린의 정치관과 여러모로 대조되었던 콜론타이가 중앙 부처에 남아있었다면, 숙청을 피하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123] 스탈린의 정적이었던 레프 트로츠키는 성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따라서 성적 억압을 스탈린을 비판하는 근거 중 하나로 들었다.[124] 스노하체스트보는 러시아 농촌 지역에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성폭행하는 악습으로서 조혼과 영아 살해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러시아 농촌에서는 11 ~ 13세 남아와 15 ~ 19세의 여성을 결혼시키는 조혼 풍습이 보편적이어서 부부 관계를 맺는 게 최소 2년 이상 불가능했었고, 장정들이 약 3개월 ~ 반년 이상 도시로 나가 돈을 벌고 있는 등, 남편이 아내와 함께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악랄한 가장들은 이 기간들을 이용해 며느리를 성폭행했고, 그 관계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화로나 들판에 던지거나 묻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핵가족이 보편적이고 교육 수준 및 치안이 양호한 도시 지역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125] 자녀에 대한 성매매 강요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부농, 공무원, 군인, 경찰, 손님에게 보내 성적 향응을 제공하고 화대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세 아이의 어머니가 자녀들 모두에게 성매매를 강요하고 '손님'들에게 화대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126] 그러나, 두 황제의 법령들은 점차 사문화되어 제정 말기에는 성소수자인 황족과 귀족들이 마음껏 자신들의 성향을 공개하고 다녔으며, 여기에는 메시체르스키 같은 대귀족과 세르게이 로마노프, 콘스탄틴 로마노프 같은 황실 종친, 외무 장관을 지낸 람스도르프도 있었다.[127] 소련/러시아 정보기관에서 벌이는 공작의 한 종류로, 목표대상의 약점 또는 기밀을 파악해 이를 대가로 목표대상을 협박 또는 포섭하여 첩보기관의 자산으로 활용하는 공작을 말한다.[128] 당시 서구권에서조차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결혼이 무효화되는 사건이 있었을 정도였다. 또다른 사례로 캐롤라인 코시가 트랜스젠더라는 것이 황색언론지에 의해 아웃팅 당한 이후로 한 동안 어려움을 겪었을 정도였다. 이런 시대상을 감안했을 때 서구권보다 보다 보수적이었던 소련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129] 종처럼 생겨서 주름무늬가 들어간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인식할 수 있다.[130] 로또 형식의 복권은 1970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131] 기록에 따르면 소련 시절 최대 당첨금은 1985년도의 6만 루블로, 당시 기준 40년치 급여에 해당되는 수준이었다. 다만 10년도 못 가서 루블화가 종이짝이 되어버리진 하지만[132] 푸틴도 젊은 시절에 이렇게 어머니가 복권을 사서 자동차를 얻어서 내내 타고 다녔다.[133] 병의 크기에 따라 보증금은 조금씩 달랐다. 1970~1980년대 소련에서 펩시 병은 330ml였고, 맥주, 보드카, 우유병은 500ml. 와인 병은 700ml였다. 1980년대 기준으로 소련인들의 평균 월급은 대략 150루블쯤이였는데, 달러로 비유하자면 월급을 1,500달러 받는 사람이 빈병 하나에 보증금으로 2달러를 받는 격이였다! 한국으로 치자면 월급을 200만원 받는 사람이 빈병 하나 팔아서 3천원을 받는 것과 동일한 수준이다.[134] 한국 빵집에서 파는 그런 조그마한 빵이 아니라 식빵 크기의 호밀빵을 말한다. 밀도가 높고 포만감이 높아서 러시아인 기준으로 혼자서 식사용으로 이틀은 먹을 수 있는 양이다.[135] 플라스틱 병이 등장하기 전이라 대부분의 술과 음료들은 유리병에 담기는게 당연하던 시대였고, 잔치라도 치뤘거나 식구가 많은 가정일수록 빈병 수입도 짭짤했다. 좀 많이 모아가면 빈병 보증금만으로도 간단한 생필품과 식료품을 구입하기에도 충분했다.[136] (출처) 5 ways children made money in the USSR, Georgy Manaev, Russia Beyond, 2022년 04월 21일. (영어)[137] 예를 들어 러시아 제국과 소련 시절에 비판적인 내용을 가볍게 다루어도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의 문화검열이나 기타 정권에 비판적인 내용이 될 수 있는 기사는 생략하거나 다루지 않는다.[138] 유머 중에서는 정치적 풍자 성격이 강한 것도 있지만, 농담 내용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