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30 23:00:51

오시프 만델시탐

1. 개요2. 생애3. 스탈린 풍자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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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시프 에밀리예비치 만델시탐(Осип Эмильевич Мандельштам)은 러시아 제국소련시인이다.

고로데츠키, 구밀료프와 함께 러시아 모더니즘 학파의 한 분파인 아크메이즘(Acmeism, Акмеизм)의 유명인물 중 하나였다.

2. 생애

1891년 01월 14일 러시아령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부유한 유대-폴란드인 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테니세프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당시 불법이었던 사회혁명당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1911년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유대인은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기에 감리교로 개종하고 입학하였다. 다만 학위는 받지 못했다.

1911년 구밀료프, 고로데츠키 등이 주축이 된 "시인 길드"(아크메이스트)를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아내 나데즈다와 모스크바로 이주하였고, 이후 몇 년 간 비평, 에세이, 번역 활동 등에 전념하였다.

3. 스탈린 풍자시 사건

Мы живем под собою не чуя страны,
(우리는 우리 발 밑의 조국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네)
Наши речи за десять шагов не слышны,
(우리의 말은 열 발자국만 떨어져도 들리지 않지만)
А где хватит на полразговорца, -
(어쩌다 말을 꺼내게 된다면)
Там помянут кремлевского горца.
(크렘인의 높으신 분이 반드시 언급되기 마련이지)
Его толстые пальцы, как черви, жирны,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통통한 손가락은 지방으로 차 있고)
И слова, как пудовые гири, верны,
(아령만큼 무겁고 진중한 그의 말은 언제나 옳다네)
Тараканьи смеются усища,
(바퀴벌레 같은 콧수염은 웃음을 짓고 있고)
И сияют его голенища.
(그의 장화는 반짝거리지)
А вокруг него сброд тонкошеих вождей,
(그의 주변은 두꺼운 목의 어중이 떠중이들로 둘러싸여 있고)
Он играет услугами полулюдей.
(그는 이 반푼이들의 시중을 받는다지)
Кто свистит, кто мяучит, кто хнычет,
(누구는 속삭거리고, 누구는 야옹거리고, 누구는 훌쩍거리고)
Он один лишь бабачит и тычет.
(그 혼자만이 으르렁거리고 이놈 저놈 거린다지)
Как подкову, дарит за указом указ -
(마치 편자마냥 그는 갖가지 법령을 박아대지)
Кому в пах, кому в лоб, кому в бровь, кому в глаз.
(누구는 고간에, 누구는 이마에, 누구는 눈썹에, 누구는 눈짝에)
Что ни казнь у него -- то малина
(그의 처벌은 무엇이든 간에 달콤하기 그지없고)
И широкая грудь осетина.
(그의 오세트인 가슴[1]은 광활하기 그지없네)

한동안 시를 창작하지 않던 만델시탐은 1933년 가을 일명 "스탈린 풍자시"(Stalin Epigram)으로 알려진 시 "크렘린의 높으신 분"(Кремлёвский горец)[2]을 발표하였다. 만델시탐은 이 작품을 몇몇 친한 친구들만이 참석한 비공개 낭송회에서 공개하였으나, 돌고 돌아 경찰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섯달 후인 1934년 오시프와 나데즈다 부부는 엔카베데에서 나온 세 명의 요원에게 체포되었다.

나데즈다는 다른 작가인 알렉세이 톨스토이 때문에 체포된 것이라 믿었으나[3] 심문 중 요원이 보여준 종이에는 문제의 시가 적혀 있었고, 오시프와 나데즈다는 상황이 복잡해졌다는 걸 직감했다. 오시프나 나데즈다 둘 모두 그 파장을 우려하여 해당 시를 어디에도 적은 일이 없었으나, 당시 비공개 낭송회에 참석했던 누군가[4]가 이 시를 종이에 적어 유출한 것이었다. 오시프의 사건은 겐리흐 야고다가 엔카베데의 수장에 오른 뒤 가장 최초로 맡은 사건 중 하나였는데, 야고다는 부하린과의 만남에서 만델시탐의 시를 낭송하였을만큼 만델시탐의 시를 매우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시프를 심문하는 데 있어서는 한 치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고 나데즈다는 훗날 회고했다.[5]

오시프는 사형을 각오하였으나, 나데즈다와 안나 아흐마토바[6]가 오시프의 구명 운동에 나섰다. 당시 오시프는 유명 시인이었기에 많은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당시 주소련 리투아니아 대사 유르기스 발트루샤이티스(Jurgis Baltrušaitis)는 유명 시인이 처형 위기에 있다고 알렸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니콜라이 부하린 등 유명 인사들 또한 구명 운동에 참여하였다.[7]

구명 운동 덕분인지 놀랍게도 오시프는 사형 선고를 받지 않았으며 굴라크에 끌려가지도 않았다. 5월 26일 오시프 앞으로 3년의 우랄 유형을 선고받았다.[8] 허나 오랜 심문 끝에 오시프는 지친 상태였고, 체르딘에 도착한 당일 밤 창문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하였다. 이에 오시프의 형제 알렉산드르는 당국에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탄원하였고, 12개의 대도시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 중 한 곳에서 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에 부부는 보로네시를 골랐다.[9] 보로네시에 거주하며 오시프는 여러 편의 시를 저술하였으나 끊임없이 다시 체포될까 두려워했다.[10] 다만 3년 동안 오시프와 나데즈다 부부는 아무 탈 없이 잘 생활했으며, 심지어 지역 엔카베데 수장과 호의적인 면담까지 나누었다고 한다.

이후 그 유명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1936년 겨울 오시프와 나데즈다 부부는 모스크바 거주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모스크바 근처 트베리의 칼리닌에서 살며 종종 모스크바를 방문하곤 했다.[11] 1937년 4월, 작가동맹의 장이었던 블라디미르 스타프스키가 오시프를 불렀고, 2주 간 모스크바 교외 휴가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3월 16일[12] 스타프스키는 니콜라이 예조프에게 오시프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낸 상황이었다. 이는 오시프를 체포하기 위한 함정이었으며, 모스크바의 바깥으로 보낸 것도 체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5월 5일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던 오시프는 "반혁명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엔카베데에 다시 체포되었다.[13] 8월 2일 5년의 굴라크형을 선고받은 오시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브토라야 레치카 굴라크에 수용되었고, 1938년 12월 27일 당시 수용소에서 유행하던 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Чего ты жалуешься, поэзию уважают только у нас — за неё убивают. Ведь больше нигде за поэзию не убивают...
어째선지 이 나라에서 시는 오직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뿐이야. 그 어디서도 시를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곳은 없는데...[14]


[1] 스탈린의 부친은 오세트인이다.[2] 시의 첫 줄을 따 "Мы живем, под собою не чуя страны"(우리는 우리 발 밑의 조국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간다)로도 알려져 있다. "스탈린 풍자시"라는 명칭은 주로 영미권에서 통용되는 명칭이며,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해당 명칭으로 문서가 개설되어 있다.[3] 체포 며칠 전 레닌그라드에서 알렉세이가 오시프의 아내를 모욕하였고, 격분한 오시프가 알렉세이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4] 유포자의 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5] "그런 종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람의 피는 물과 다를 게 없었다." (나데즈다의 회고 중)[6] 본명 안나 고렌코. 소련의 유명한 여류 시인.[7] 파스테르나크는 문제의 비공개 낭송회에 참석하였고, 비록 시 자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나 구명 운동에는 거침없이 참가하였다. 부하린은 1920년대부터 오시프를 알고 있었으며 종종 도와주던 사이였다. 부하린은 야고다를 직접 만나 해당 문제를 언급하였으며, 스탈린에게도 탄원서를 보냈다고 한다.[8] 유형 장소는 북서 우랄 지방의 페름에 위치한 체르딘이라는 도시였다.[9] 지명이 마음에 들어서 보로네시를 골랐다는 뒷이야기가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10] 부부가 보로네시에 도착한 직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스탈린의 전화를 받았는데, 정말 만델시탐이 훌륭한 시인인지 딱 한 마디를 물어봤다고 한다. 이 일은 통화 한 달 뒤에나 부부 귀에 들어갔고, 그 뒤부터 부부는 체포를 두려워했다고 한다.[11] 당시 오시프는 살아남기 위해 스탈린에게 바치는 송가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12] 공교롭게도 이 날은 부하린이 처형당한 날이었다.[13] 이런 식으로 체포 대상자를 "휴가"보낸 뒤 요원을 보내 슬쩍 체포하는 건 엔카베데의 단골 수법이었다. 수용소 군도의 초반에 아주 잘 언급되어 있다.[14] 만델시탐과 아내의 대화 중에 나온 말. 아내 나데즈다가 저술한 회고록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