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우선적으로 추진한 조치는 종교에 의해 주도된 제도들의 부정과 종교의 자유 보장이었다.[1] 당시 혁명을 주도했던 레닌은 "신을 말하는 자들은 어리석다."고 말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했다.[2] 애초에 카를 마르크스부터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했으며[3] 공산주의의 주요 철학적 기반인 (변증법적) 유물론부터 관념론인 종교를 완전히 배격하는 이론이다. 이에 따라 소련은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 정교회의 특권을 박탈했다.그러나 스탈린 시대 이후 영화 등의 일상적인 미디어에서 종교적인 표현이나 연출이 나오는 것은 비교적 문제되지 않았다. 아무리 행정력이 강했던 소련이라도 개인이 믿는 신앙을 단속할 수는 없었고, 종교를 하나의 문화로 보려는 시각이 흔했다. 대표적으로 브레즈네프 집권 당시 공산권에서 대 히트를 친 코미디 영화 슈릭 시리즈에서는 종교적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즉, 직접적으로 종교를 언급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문화적 관습으로써 비교적 여유롭게 허용되었다.
- 성호 긋는 씬
- 이슬람-타타르 문화인 일부다처제와 처녀 납치, 명예살인 등의 요소가 들어있다.
- 소련의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 <스토커>에는 기독교 성화는 물론 여러 성경의 구절이 인용됐다.
2. 그리스도교
18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 및 유럽 사회에서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국교는 평화적이든 강제적이든 심각한 위신과 권력의 손실을 겪었다. 성직자 역시 일단 신분제 사회에서 전 계층을 어우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귀족이거나 지배층에 속했으므로 시민혁명 등이 발생하면 일단 숙청 대상이 되었다. 소련 이전의 러시아 제국은 영국의 성공회처럼 차르가 국교의 수장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는데 각 지역색이 강한 정교회 특성상 거의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 있는 수준이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도 차르의 승인 하에 착좌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차르를 상대로 하는 투쟁이 발생하면 교회도 기존의 지배권력을 내려놓고 종교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거나 탄압당하고 권력을 빼앗기는 과정이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필 그것이 소련에서는 극단적으로 종교를 배척하는 무신론적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방법으로 구현되는 바람에 소련 치하에서 정교회는 그야말로 대재앙을 맞았다.러시아 혁명 이전의 상황을 보면 종교개혁이나 군주들과의 대립에서 많은 마찰을 겪은 가톨릭, 개신교와 달리 러시아 정교회는 대대적으로 교회구조를 완전히 청산해야만 하는 중대한 사회적 폭발은 없었다. 이 덕분에 정교회는 기독교의 전통을 보존하고 수호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대신 시간이 쌓여 오면서 부패 수준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교회는 각 지역 교회가 거의 개별적인 총대주교 휘하에 속해 있는 구조였고 만약 교회가 군주의 권위에 굴복하거나 둘이 합을 맞춰 버리면 개혁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농업국가인 데다 문맹이 태반인 러시아 제국의 백성들이야 그렇다 쳐도 정교회가 가진 심각한 부패와 세속화 문제는 당대 지식인이나 귀족들이 이미 공공연하게 인지하고 혐오했던 상태였다. 레프 톨스토이나 니콜라이 고골과 같은 많은 러시아 문호들의 문학 속에서 성직자들은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상태가 나빴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혁명까지는 아니라도 백성들의 교육수준이 향상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정교회는 어떤 수단이었어도 시련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에서 정교회는 존속되었다.[4] 하지만 정교분리가 이뤄지지 않아 권력과 결탁한 특성상 볼셰비키에게 있어 러시아 제국의 지배이념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고 초창기 소련에서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정교회는 명목적으로는 인정되었으나 종례 종교가 주관하는 제도들은 전부 철폐시켰고 이를 위반하는 성직자들은 잡혀갔다. 박해를 받던 러시아 정교회를 부흥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레닌, 트로츠키와 달리 일국사회주의, 즉 세계혁명이 아닌 단일 국가에서의 사회주의 체제 구축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는 마르크스의 이론과도 반하는데 러시아 내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의 타격으로 인해 차악으로써 취한 방향이었다. 따라서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러시아 민족적 모습을 지닌 러시아 정교회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신앙을 가질 것을 장려하였다.[5][6] 물론 스탈린 본인은 무신론자였다.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으로 종교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정교회는 러시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했다. 소련 말기의 종교 분포는 무신론 60%, 러시아 정교회 20%, 이슬람 10%, 개신교 7% 등이었는데 수치상으로만 그렇고 실제로는 과반 이상이 정교회 신자였다. 한 예로 소련 비밀경찰 KGB 간부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은 사실 정교회 교인이었고 수많은 소련 공산당 출신 정치인이 러시아 연방 건국 이후 정교회 신자임을 어필하며 정교회 신앙을 회복하는데 팔을 걷어 붙였다. 결국 소련 붕괴 후 집권당인 통합 러시아와 주류 기득권이 주도하여 러시아 정교회를 다시 거의 준 국교화하는 데 성공했으나 푸틴에 대한 반감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선 타 유럽과 마찬가지로 종교를 이탈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소련은 정교회를 통해 기독교 전체를 관리하길 원했으며 따라서 가톨릭이나 루터교 같은 개신교 계열 단체는 철저하게 탄압되었다. 특히 소련 당국은 정교회와는 달리 서구권 기독교의 영향력을 철저하게 경계하여 소련 국내뿐만 아니라 동유럽 전역에서 서구권과 연관이 있는 기독교 선교 활동이나 관련 인사들을 중점적으로 탄압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 같이 역사적으로 서구권 기독교 신앙의 전통이 강했던 사회주의 국가의 시민들은 이런 반종교 정책을 민족 고유 전통과 역사를 말살하려는 시도로 여겨 소련, 더나아가 사회주의 체제에 반감을 가지게 하는데 일조했다. 당장 폴란드에서는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을 기점으로 가톨릭 신앙을 탄압하던 폴란드 인민공화국에 대한 반정부 투쟁이 탄력을 얻었고[7] 동독에서는 루터교 신자들이 동유럽 혁명 당시 앞장서서 반체제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3. 이슬람
소련에서는 이슬람 신학교를 딱 두 개만 허용하고 운영하였는데 이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보급할 목적 겸 역사적 상징성을 홍보할 목적이 강했다. 공교롭게도 소련의 영토 중에는 중세 초에 하디스 분류학이 발전했던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일대[8]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힛 알 부카리"[9]가 편찬된 부하라에는 역사적 상징성을 감안하여 전시용으로 "미르 아랍 마드라사"라는 7년제 이슬람 신학 대학교가 운영되었고 당시 투르키스탄 최대도시였던 타슈켄트에도 이슬람 신학교가 운영되었다. 이런 이슬람 신학교들은 소련의 무슬림들의 불만을 달래주는 목적 외에도 제3세계의 이슬람 사회주의, 아랍 사회주의 세력과 소련의 무슬림 학자들간의 교류와 홍보를 돕는 목적이 있었다.물론 소련의 대 이슬람 유화정책은 무슬림 인구가 밀집한 중앙아시아나 북캅카스, 아제르바이잔, 볼가 강 일대에 한정되었고 무슬림 인구 비율이 소수라서 봉기할 가능성이 적었던 지역[10]에서는 이슬람도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탄압을 당했다.
지역적으로 따지면 카자흐는 17세기까지도 명목상으로나 이슬람화되었고 텡그리즘의 전통이 강한 지역이었고 17 ~ 18세기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카자흐 부족들이 단결하기 위해 이슬람이란 종교를 이용했을 정도였다. 부하라와 히바, 코칸드 등의 국가의 이슬람 보수주의자들인 카디미스트들은 기득권층으로서 대체로 러시아 제국에 복종하던 이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 겸 이슬람 개혁 운동인 자디드주의가 19세기 후반부터 태동하기 시작해 정치 세력화하고 일부 세력이 소련과 손잡고 중앙아시아 정치의 핵심을 장악했다. 스탈린은 카디미스트들이나 자디드 운동가들이나 모두 가리지 않고 숙청해 버렸다. 민족주의적, 종교적 성향을 갖고 있는 정치 세력이라면 모조리 없애버려서 근본주의가 자라날 토대를 없애버렸다.
다른 한편으로 소련에서는 소련 전역에서 1920년부터 여성의 취업을 장려하였고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여성을 사회 각 분야에 고용하면서 중앙아시아 이슬람권 내 여성 차별 및 억압 구도를 상당부분 개선하기도 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후방인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여성들이 모든 노동 분야에 진출할 수 있었다. 소련의 여타 지역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나고 상당수는 직업을 다시 남성들에게 내 주었으나 전체 여성 취업 인구는 비록 느린 속도일지라도 계속 증가했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등 상당수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학교는 한국처럼 남녀합반인 데다 남녀가 한 책상에 짝을 지어 앉는데 여타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스탈린 사후 소련 후기에 접어들면서 이슬람은 소련의 다른 종교들과 비슷하게 공개적으로 탄압받는 일은 줄어들었다. 1943년 소련 당국은 기존 러시아 무슬림 중앙신앙국을 각 지역지부로 분리하여 소련 유럽 지역 및 시베리아 무슬림 신앙청, 중앙아시아 및 카자흐스탄 무슬림 신앙청, 범캅카스 무슬림 신앙청, 북캅카스 무슬린 신앙청으로 분리하여 각 지부 별로 무프티(Mufti)라 불리는 종교 지도자가 관리하게 하였다. 다만 소련의 무슬림 인구에 비해 이슬람 관련 기관은 비교적 적은 수였기 때문에 당시 소련에서 신앙청에 등록되지 않은 비공식 성직자였던 "방랑 물라(Бродячие муллы, Wandering Mullahs)"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성직자 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추산되기도 했다. 소련 당국은 무슬림의 의무였던 메카 성지순례도 제한적으로 허용했지만 1년에 몇십 명 가량만 허가를 내 주었기 때문에 사실상 성직자를 제외하고는 불허에 가까웠다. 따라서 소련 무슬림들은 주로 지역의 무슬림 사원이나 종교 유적지를 참배하는 식으로 성지순례를 대신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소련의 영향으로 인해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 비해 아주 세속적이지만 소련 붕괴의 충격으로 인해서 타지키스탄처럼 이슬람 근본주의가 유입되어 큰 진통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11]
4. 불교
불교의 비율은 소련 전체 인구로 따지면 1% 안팎을 맴도는 수치였지만 불자들은 한 지역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불교 역시 무작정 탄압을 가할 수는 없었다. 특히 1924년까지 우방인 몽골의 복드 칸이 버젓이 살아있었고 투바 인민공화국은 불교 사회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일단은 불교의 권위를 인정해줬다.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스탈린이 종교 탄압 정책을 실시하려 하자 불교도들은 불교는 무신론이라고 주장했으나 러시아는 옛날 옛적에 몽골 제국에게 당한 게 있으니 더욱 심한 탄압을 당했다. 이슬람이나 정교회는 전시용이라도 사원이 남았지만 불교는 그런 거 없이 사원은 전부 파괴당했다. 승려들 역시 대숙청의 피해자가 되어 사형당하거나 굴라크에 끌려갔다. 살아남은 이들은 잠적하거나 소련 영외로 피신해야했다. 칼미키야 자치주는 2차 대전 와중에 나치 부역 혐의를 뒤집어쓰며 아예 해체되어 칼미크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환생으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불교 지도자인 '함보 라마'는 1930년을 마지막으로 환생이 중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에서 수많은 몽골계 병사들이 희생당하면서 이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스탈린은 두 곳의 사찰[12] 건립을 허가했다.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후에는 '함보 라마'의 부활과 동시에 함보 라마의 정권 협조[13]를 대가로 불교 대학을 건립하였고 1976년에는 아예 달라이 라마 14세가 소련을 방문하였다.
숫타니파타와 같은 불교 경전은 이미 1960년대부터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소련 각지에 유통되고 있었다. 신앙의 형태는 아닐지언정, 불교학은 동양학과 커리큘럼의 일부에 포함되어 원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입학하여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소련 말기로 갈수록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베를린 장벽 붕괴 등의 굵직한 사건을 통해, 소련 특유의 군사주의와 영웅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사회에 퍼지고 사회주의 붕괴를 예감한 사람들의 기대감이 커지면서 불교에 대한 관심도 함께 커져 갔다. 이러한 경로로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소련인의 사례로 박노자가 있다.
5. 탄압
1931년 러시아 정교회 주교좌 성당이었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이 폭파 철거되던 현장.[14] |
소련은 시기에 따라 종교 탄압 강도를 달리했다. 건국 초창기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는 종교에 대해 극심한 탄압을 자행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대조국전쟁 초반에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국가적 단합을 위해 잠시 정교회를 장려하기도 했다. 물론 개신교나 가톨릭 등 타 종파는 그런 거 없었고[15] 목회자들이나 독실한 신자들을 감옥이나 강제수용소에 가두고 괴롭히는 등 가혹한 핍박이 계속되었다. 존립을 허용한 정교회도 종교성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악의적으로 주일을 노동일로 정하거나[16] 성직자들과 평신도의 접촉을 방해하기도 하고 교회가 운영하는 자선 기관을 폐쇄하거나 기독교 출판물의 발행을 금지하는 등 다양한 탄압책이 동원되었다.
스탈린 사후 소련 지도자들은 대부분 국제사회의 인식을 고려하여 공개적인 종교 탄압을 지양했다. 예를 들어 공직자들이나 고위당 간부들은 공개적으로 신앙을 드러내거나 전례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일반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종교활동에 참석이 가능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사회적으로 신앙적이라고 간주되는 인물은 승진이나 경력에 제약이 생긴다거나 더 나아가 이념적으로 불순하다고 여겨질 경우 여러 경로를 통해 당국에 보고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소련인들은 보통 공개적이거나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일을 점차 피해갔다. 대신 세례성사 같은 중요 종교예식에 참석하는 방식으로 소극적인 신앙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생활양식은 소련 붕괴 후에도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의 종교생활에까지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스탈린 이후 소련 사회에서 종교 탄압은 은밀한 형태로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KGB는 성직자들의 임명과정에 개입하여 조금이라도 이념적으로 불온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사찰 대상으로 관리했고 심지어 신자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정보원으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2018년 라트비아에서 과거 KGB 정보원 목록을 공개했을 때 라트비아의 첫 추기경 율리얀스 바이보즈(Julijans Vaivods)나 라트비아 정교회 대주교 알렉산드르 쿠드랴쇼프(Aleksandrs Kudrjashovs)가 KGB 정보원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라트비아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던 적도 있었다.출처
소련에서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대에야 페레스트로이카가 실시되면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시작했다.
[1] 로마노프 왕조까지만 하더라도 관혼상제는 러시아 정교회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고 혼인음 종교혼주의를 민법상 규정하고 있었으며 종교적 이유로 이교도간 혼인은 금지되고 가문간의 정략결혼이 유행하였다.[2]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주도적으로 민중을 이끈 정교회 사제 '게오르기 가폰(Георгий Гапон)'에게 감명을 받은 레닌은 국내로 돌아와 그와 면담했지만 가폰이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둥 '사제로써 해야 할 소임' 같은 이야기만 꺼내자 곧 관심을 끊었다.[3] 하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그렇다고 박해할 것까지는 없다고 하였다.[4] 소련령에 남아서 활동하던 러시아 정교회는 국외로 망명해서 활동하던 러시아 정교회와 구분되어 "살아있는 교회"로 불렸다.[5] 기사[6]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인터뷰[7] 소련이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이유에도 이러한 배경이 있다.[8] 원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는 불교나 마니교도들이 운영하던 종교시설 겸 학교들이 많았는데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면서 원래 있던 수도시설들이 중세 이슬람 대학교로 개조되었다. 그것 때문에 하디스 분류학이 정작 아라비아반도나 바그다드보다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중앙아시아에서 발전했다.[9] 이슬람 순니파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하디스 편집본[10] 이를테면 립카 타타르인들이 사는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일대[11] 한때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일대에서 맹위를 떨쳤던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운동은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전후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한 후 탈레반과 합류하고 나서 소모되어 현재는 세력이 매우 미약하다.[12] 울란우데 근교의 이볼긴스키 사원과 자바이칼 지방의 아긴스키 사원[13] 당시 달라이 라마 14세가 함보 라마의 공식적 부활을 선언했으며 이후 함보 라마는 소련 공산당 부랴트 지부와 부랴트 공화국 정부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다.[14] 당시 소련 정부는 소비에트 궁전을 건축하기 위해 해당 위치에 있었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을 폭파해 부지를 확보하고자 했지만 소비에트 궁전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건축이 중단되었다. 해당 부지는 모스크바 시민 전용 야외수영장으로 사용되다가 1990년대 러시아에서 종교의 자유가 회복된 후 재건되었다.[15]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명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도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제수용소에서 혹사당하는 동료가 등장한다.[16] 예를 들어 성찬예배 시간에 맞추어 노동을 부과하는 등의 술책으로 신자들이 종교의식에 가는 것까지 막는 경우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