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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모더니즘

1. 개요2. 역사
2.1. 자디드 운동2.2. 소련의 자디드 운동
2.2.1. 자디드 운동과 이슬람 사회주의와의 관계
2.3. 쇠퇴
3. 개념 구분
3.1. 이슬람 모더니즘 = 세속주의?3.2. 이슬람 모더니즘 = 이슬람 자유주의?3.3. 이슬람 모더니즘 = 이슬람주의?
4. 관련 인물
4.1. 이집트/시리아4.2. 남아시아4.3. 중앙아시아/동유럽4.4. 중국 회족4.5.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

영어: Islamic Modernism
아랍어: حداثة إسلامية

이슬람모더니즘이 결합된 이념.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아랍권에서는 이집트 알아즈하르 대학교의 셰이크(원로 학자)였던 무함마드 압두가 창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자디드 운동이라고 하여 러시아 제국의 세속 학문과 이슬람 학문을 융합하는 형태로 비슷한 시기에 약간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이슬람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근대화 이념이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슬람권의 근대화/현대화를 주도했던 이념이기도 하다. 19세기 중엽에 그들 스스로 살라피야(سلفي)라고 칭했는데 이는 20세기 후반에 생긴 이슬람 근본주의살라프파가 아닌 전근대 당시 이슬람 전통을 준수하면서 이슬람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서양의 변화를 수용하고 서양과 타협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2. 역사

서양프랑스 혁명산업 혁명 등의 여파로 가톨릭의 권위가 추락하고 모더니즘이 득세했다. 서유럽 국가들의 인구와 자본, 국력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18~19세기에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은 국력이 나날이 약화되고 심지어 문맹률까지 점점 늘어나는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이런 차이를 체감한 이집트[1]무굴 제국[2]의 일부 무슬림들은 서양의 앞선 문물을 수용하여 이슬람 사회도 서양처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에 서구 열강의 서아시아, 남아시아 지역 침탈이 가속화되자 진보적인 무슬림 지식인들은 이슬람 사회 역시 서양처럼 모더니즘[3]을 수용하여 서양의 침입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이집트 알아즈하르 대학의 원로 이슬람 학자였던 무함마드 압두는 중세 이슬람 사회의 과학 기술과 인문학이 서구보다 훨씬 앞섰음에도 당대에 들어 그 관계가 역전된 원인을 비교분석한 끝에 "이슬람권에서 다시금 철학이 부흥해야만 이슬람권의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마드하브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현대적인 이슬람 해석을 주장했다.

2.1. 자디드 운동

중앙아시아동유럽에서의 이슬람 현대주의 운동은 인도나 아랍권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직접 식민지 상태로 인종차별경제적 착취에 시달리던 인도나 이집트, 이란과 다르게 러시아 제국타타르 무슬림들은 러시아에서 군복무와 통상을 통해 전통적으로 사회적 입지가 높은 편이었으며 타타르 지식인들은 러시아가 서구로부터 유입한 학문과 기술을 이슬람식으로 재해석한 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 위구르인들에게 다시 전파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근대 이전 카자흐인들은 명목상 무슬림이었으되 일상생활에서는 텡그리 신앙의 영향이 더 강했으나 타타르인 상인들이 카자흐인들과 접촉하면서 이슬람 문화가 본격적으로 카자흐인들에게 뿌리내렸다. 19세기 초부터 카잔 대학은 러시아 문화를 타타르인과 카자흐인에게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는 교육정책을 크게 강화했다. 니콜라이 알민스키는 학교를 추가로 설립하고 타타르인 교사들을 채용하여 타타르어로 러시아식이나 유럽식 교육을 하게 했다. 서구식 교육의 확대는 볼가 지역의 대다수의 타타르인들로부터 저항 대신 환영을 받았다. 카잔 대학에서 교육받은 무슬림들은 러시아 문화에 상당 수준 동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튀르크와 무슬림 문화유산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많은 볼가 타타르인들이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영토 각지로 가서 자디드 운동을 전개했다.

위구르도 마찬가지로 타타르인 출신 교사들이 동튀르키스탄 지역으로 가서 청말 위구르인들이 제국주의적 압제에 맞설 수 있도록 민족주의 교육 및 언어를 위구르어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근대적인 마드라사는 아랍어페르시아어로 된 교재를 반복 암기하는 것이 교육의 주안점이었고, 동튀르키스탄의 전통적인 마드라사들은 따로 글씨를 필사하는 법은 배워도 작문을 직접 가르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시기에 동튀르키스탄을 재점령했던 한족 군벌정권들은 서당을 신장성 각지에 설치하여 위구르인들에게 강제로 유교 경전을 암기시켰는데, 무성의한 교육 시스템과 교사들의 낮은 수준 때문에 서당 졸업자들은 한자 몇 개만 간신히 쓰는 수준이었고 일부 위구르인 학생들에게 강제로 위구르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 부모와 학생들이 의사소통도 못하게 되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

대조적으로 타타르인들이 동튀르키스탄에 새로 새운 이슬람 현대주의 자디드 학교들은 위구르인 학생들에게 서구식으로 과학,수학, 역사, 문학, 체육 등을 포괄한 종합적인 교육을 실시했으며 이슬람 역시 교과과목에 포함시켜 위구르인 일반의 호응을 얻었고, 위구르어 문법과 작문은 물론 현지 상황에 맞게 중국어 교과 과목도 추가했다. 당시 대부분의 교재는 타타르어에서 위구르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교과서의 수준도 월등한 편이었다. 이 때문에 이슬람 현대주의에 입각한 자디드 학교들은 위구르인 가정에서 선호도가 월등히 높았으며, 이렇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

2.2. 소련의 자디드 운동

소련은 중앙아시아의 경제를 크게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소련 내 여타 지역에 뒤지지 않는 수준의 대중교육을 실시함으로서 교육 면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자디드 운동가들이 세워놓은 토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창기 소비에트 정권은 이슬람 자체를 소련에서 일소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는데 자디드 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여기에서 적당한 타협이 불가능했다.

타협의 결과 소련 내 무슬림 거주지역의 교육투자와 그 성과 하나만큼은 포르투갈, 영국이나 프랑스의 식민지 지역보다 월등했는데 1930년대에는 초등교육이 의무화되고 10세에서 30세 사이의 성인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는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무슬림 식민지에서 초등학교 취학률이 6% 정도를 자랑하던 시절이다.

소련의 무슬림 지식인들은 언어와 문학의 근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6년 소비에트 정권은 바쿠에서 개최된 튀르크어학 대회에서 아랍 문자 사용을 금지하는 대신[4] 자디드 운동가들과 타협 하에 터키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라틴 문자를 사용하도록 지침을 변경하였다. 1938년 이후로 스탈린 정권의 러시아인 동화 정책이 추진되며 러시아어가 의무 과목이 되긴 하였으나[5] 이는 오히려 부족주의지역감정이 어느 정도 극복되고 언어(우즈베크어, 아제르바이잔어, 카자흐어, 타지크어, 키르기스어, 튀르크멘어, 바시키르어 등등)에 기반한 민족 정체성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볼셰비키의 숙청 하에서 살아남은 자디드 운동가들은 무슬림 소수민족 고유의 역사, 언어, 구전문학, 서사시, 미술을 재발견하고 발전시키는데 열심이었다. 따라서 스탈린 사후에는 다양한 민족문화가 부활되거나 재창조되었다.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무슬림들의 구전문학과 서사시는 계속 보존되었고, 현대 문학의 형태로 재해석이 이루어졌다. 흐루쇼프 시대 이후 다양한 민족 언어로 된 잡지와 신문이 출간되었다. 어문학적,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연구되면서 중앙아시아 내 여러 민족들의 역사관과 민족주의가 현대적으로 확립되었다.

2.2.1. 자디드 운동과 이슬람 사회주의와의 관계

다른 한편에서는 소련에서는 이슬람 신학교를 딱 두 개만 허용하고 운영하였는데 이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보급할 목적 겸 역사적 상징성을 홍보할 목적이 강했다. 공교롭게도 소련의 영토 중에는 중세 초에 하디스 분류학이 발전했던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일대[6]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힛 알 부카리"[7]가 편찬된 부하라에는 역사적 상징성을 감안하여 전시용으로 이슬람 신학 대학교 운영되었고, 당시 투르키스탄 최대도시였던 타슈켄트에도 이슬람 신학교가 운영되었다. 이런 이슬람 신학교들은 소련 내 무슬림들의 불만을 달래주는 목적 외에도 제3세계이슬람 사회주의, 아랍 사회주의 세력과 소련 내 무슬림 학자들간의 교류와 홍보를 돕는 목적이 있었다.

2.3. 쇠퇴

대공황 이후에 서아시아레닌주의, 나치즘, 기독교 근본주의가 영향을 미쳐 종교와 모더니즘을 결합시키려고 했던 이슬람 모더니즘의 입지는 좁아지고 세속주의이슬람주의라는 양 극단이 오히려 영향력이 강해졌다. 상술한 것처럼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중앙아시아의 자디드 운동을 주도하던 무슬림 학자들은 20년대 후반부로 숙청당하거나 튀르키예로 탈주하거나 아니면 볼셰비키에 협력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레닌주의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식민지 치하 무슬림 민족들의 제국주의 타도를 주장하여 상당수 무슬림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8] 하산 알 반나는 이슬람 모더니즘에 레닌주의 교리를 적극 흡수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이슬람주의의 초석을 다졌다. 이 외에도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단순한 논리로 나치와 손을 잡았던 아민 알 후세이니도 있다.[9] 20세기 중반은 이슬람 모더니즘이 레닌주의와 나치즘 및 기독교 근본주의에 바탕을 둔 엄숙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이슬람주의로 변질되어가던 과도기였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슬람 모더니즘 대신 아예 세속주의를 추구했던 튀르키예는 근본주의를 근절하고 문맹을 완전 퇴치하는 것은 물론 고등교육을 보급하는데 성공했으나, 정작 이슬람 모더니즘이 발전했던 이집트/시리아, 인도/파키스탄의 경우 오늘날에도 기본적인 문맹 퇴치조차 완료되지 못했다.

이슬람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단체 중 하나가 바로 오늘날 무슬림 형제단이었다. 인도/파키스탄 이슬람 모더니즘에서 촉망받던 천재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우민화 정책을 추구하던 파키스탄 군사독재자들과 손을 잡으면서 파키스탄의 현대화 자체를 가로막았다.

이후 20세기 후반에 이슬람주의 혹은 와하비즘오일 머니에 의한 근본주의 포교로 이슬람권에서 주류 사상이 되면서, 이슬람 모더니즘은 세속주의의 분파로 치부되어 오늘날 비주류 학파로 물러서게 되었다.

3. 개념 구분

3.1. 이슬람 모더니즘 = 세속주의?

이슬람 모더니즘은 무슬림 중 세속주의 성향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으나, 이슬람 모더니즘 학파의 주요 인물들은 세속주의 성향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았다. 온건파라는 설명은 적당해도 세속주의라는 설명은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세속주의의 경우 종교적인 생활에서 탈피를 주장하는 경우로 대표적으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있으며, 더 나아가 아예 이슬람을 배교한 이븐 와라크아얀 히르시 알리같은 경우까지 포함할 수 있다. 반대로 이슬람 모더니즘은 이슬람 자체를 탈피하거나 배격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여 이슬람을 방어하는 사상이다. 오히려 이슬람 모더니즘을 공격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경우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과 다르게 직접 일은 안하고 성금만 먹고 살며 다른 경쟁자 선교사들을 어떻게 하면 견제할까에 포커스에 집중된 것에 비해[10], 이슬람 모더니즘 성향의 운동가들은 상술한 위구르인에 대한 타타르인들의 교육 봉사 사례에서 보듯 직접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 직접 어려운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3.2. 이슬람 모더니즘 = 이슬람 자유주의?

전자는 이슬람 교리를 사회적 변화에 맞추어 수호하지만 후자는 이슬람 교리를 개혁하는 사상이다.

3.3. 이슬람 모더니즘 = 이슬람주의?

오늘날의 이슬람주의는 이슬람 모더니즘이 극우화된 형태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숙주로 삼아 이슬람 신정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목표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경우처럼 결국 가서는 폐쇄적으로 이슬람 교리를 내세우지만 이슬람 현대주의자들은 힌두교와 무슬림 사이의 단결과 시아파와 순니파와의 갈등 해소를 내세운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의 경우에서 보듯 타종교에 대해 폭력과 배척보다는 대화와 타협에 좀 더 열린 입장이다.

4. 관련 인물

4.1. 이집트/시리아

  • 무함마드 압두 - 순니파 내에서 사멸된 상태였던 중세 이슬람 사변철학 무타질라 학파를 재평가하고 복권시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자 사실상 이슬람 현대주의의 아버지 격 되는 인물이다.
    프리메이슨 멤버로서 여러가지 허무맹랑한 음모론과 연계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슬람에서 갈라져 나온 신흥 종교인 바하이교 신도들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바하이교 교리 형성 과정에도 거의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 라시드 리다 - 살라프파의 사상적 기원을 확립한 인물. 시리아의 이슬람 개혁가로 무함마드 압두의 사상을 이어받았으나, 이후 와하브파에 경도되어 와하브파 이론과 무함마드 압두의 이론을 접목하였다. 초창기에는 아랍 사회주의나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친했으나 이후 갈라섰다.
  • 타하 후세인 - 이슬람 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으나 아예 아타튀르크 비슷한 세속주의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 하산 알 반나 - 무슬림 형제단의 창립자. 근현대 이슬람 모더니즘과 오늘날의 이슬람주의 사이의 과도기적인 인물이다.
  • 유수프 알 까라다위 - 이집트 출신으로 카타르에서 활동한다. 걸프 아랍 왕정 국가에서 활동하는 신학자 중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편이다.2006년부로 니캅 착용 관련하여 총대를 메고 소신 발언을 남겼고 해당 발언은 이후 ISIS의 니캅, 부르카 강요를 비판하는 근거로도 인용되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겨우 니캅이 필수 복장이 아니라고 한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20세기 중반 셰이크 알 알바니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교수로 근무할 당시 “니캅은 이슬람에서 필수적인 의복이 아니다.”라고 바른 말 했다가 찍혀서 쫓겨난 적이 있어서, 다른 걸프 왕정 국가 내 이슬람 신학자들이 니캅에 대한 공개적인 의견 표시를 꺼리는 상황이었다.

4.2. 남아시아

  •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 - 영국의 식민 지배에 맞서 순니파시아파의 화해, 힌두교와 무슬림 사이의 화해를 주장했던 인물
  • 사이드 아흐마드 칸 - 서구 유물론과 이슬람을 접목시킨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급진주의적인 개혁관을 지녔으며, 이 때문에 심지어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에게까지 비판을 받았다. 우르두어의 현대화를 진흥시킨 인물이다.
  • 무함마드 이크발 - 19세기 말 영국과 독일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법철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으나 문인으로도 명성이 높았는데, 우르두어 문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 인물로도 유명하다.

    • 그의 수제자 중 한 명이었던 아불 알라 마우두디가 파키스탄 독립 이후 부패한 군인 및 토후들과 손을 잡고 이슬람주의로 전향하면서 사이드 아흐마드 칸과 무함마드 이크발의 남아시아 무슬림 근대화 시도를 대부분 뒤집어 엎었다는 점에서 비운의 개혁가라고도 볼 수 있다. 적어도 사이드 아흐마드 칸과 무함마드 이크발은 남아시아 무슬림 사회에서 고리대금이라도 없애려고 노력했는데,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독립 이전 방글라데시)에서 고리대금마저 샤리아로 합법화시켰다.[11]

4.3. 중앙아시아/동유럽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현대주의는 자디드(Jadid) 운동으로도 불린다.

* 카이윰 나시리 - 타타르 문학의 아버지 중 한 명. 농촌 종교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카잔부하라의 마드라사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아랍어, 페르시아어, 우즈베크어를 공부했다. 러시아어는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한동안 러시아 신학교에 비교종교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1871년 신학교를 떠나 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의 교육관에 입각하여 이슬람 과목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 산수, 지리, 역사, 음악, 미술 등도 가르쳤다.(이슬람 근본주의에서는 음악과 미술을 금기시한다.) 이 외에도 타타르어로 된 러시아어 학습 교재와 타타르어-러시아어 사전을 저술하고 볼가 타타르인들의 구전 문학을 수집하여 기록한 등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 무사 비기에프 - 타타르인 이슬람 현대주의자로 쿠란타타르어로 번역한 일로 소련 시절 비무슬림 친구들에게 농담삼아 "이슬람계의 루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05년 혁명 당시 러시아 제국 내 타타르 무슬림들을 대표하여 활약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볼셰비키와 타협하는 입장으로, 동료들과 공산당을 설득하여 192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가 건설되었다.[12] 1927년 이후 소련에서 국가 무신론을 권장하면서 공산당과 알력을 빚기 시작하고 1931년 레닌그라드에서 핀란드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체포된 이후 동튀르키스탄으로 추방당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국왕 나디르 샤의 도움으로 비행기로 이집트로 이주하여 알 아즈하르 대학의 교수로 일했다.
* 압둘 라우프 피트랏 - 러시아 제국/소련 시대 우즈벡 이슬람계의 개혁 운동(자디드 운동)을 주도하고 우즈벡어의 현대화를 주도한 지식인. 무사 비기에프와 다르게 볼셰비키와 타협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 메흐멧 에민 부그라 -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의 핵심 멤버
*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 - 위구르 민족주의 창간 및 배포 운동을 벌이던 지식인으로 신장에 스웨덴인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인쇄소를 빌리는 등의 도움을 받았다.
* 마수드 사브리 - 위구르인으로 이스탄불에서 내과 의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1915년 동튀르키스탄으로 돌아와서 쿨자시에 약국과 몇 개의 학교를 설립했다.
* 부르한 샤히디 - 통튀르키스탄에 거주하던 타타르인으로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 이스마일 가스프랄르 - 크림 타타르족 출신으로 범튀르크주의 이론가. 현대 크림 타타르 민족주의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러시아 제국 출신이었으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 압둘레쉬드 이브라힘 - 토볼스크 출신의 시베리아 타타르족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시기부터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던 인물이었다. 일본 내 타타르 무슬림 커뮤니티를 대표하던 사람이었다.
* 메흐멧 압둘하이 쿠르반하이 - 적백내전 당시 백군이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바시키르인 출신 무슬림 학자로 도쿄 모스크 건립에 관여한 인물이다. 다른 바시키르인들과 다르게 일본인하고 이목구비가 비슷하여 별 위화감이 없었다고 한다. 도쿄 자미의 초대 이맘이었다.

4.4. 중국 회족

4.5. 기타

  • 레자 아슬란 - 이란계 미국인으로 시아파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기독교 종교 서적도 몇 권 집필했는데,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나서도 기독교 종교 서적을 계속 집필, 출간하고 있다고 한다.

5. 관련 문서

  • 모더니즘 - 공교롭게도 모더니즘 역시 50~6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에 자리를 내주고 몰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모더니즘도 2차대전 이후 몰락했다.
  • 이슬람
  • 살라프파
  • 이슬람 사회주의
  • 이슬람 자유주의
  • 이스마일파 - 원래는 중세부터 암살과 테러로 악명높던 극단주의 종파였으나 현대에는 이슬람 현대주의와 이슬람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훈자 문서 등 참조
  • 아흐마디야 - 원래는 카슈미르/펀자브 지역의 흔한 수피 분파 중 하나로 출발했으나 이슬람 현대주의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온건하고 진보적인 차별화된 교리를 갖게 되었다. 물론 다 진보적인 교리만 있는 건 아니고 교리에 예수의 무덤이 카슈미르에 있다던지 같은 다소 뜬금없는 내용도 있다.


[1] 나폴레옹이집트 원정으로 상당수의 이집트인들이 유럽과 이슬람권의 기술 격차에 큰 충격을 받았다.[2] 특히 조로아스터교파르시들은 해상 무역에 종사한 덕에 인도의 여러 민족 중에서도 영어를 제일 빨리 배워 영국과 프랑스와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에 비례해 인도 내 상권을 더 공고하게 장악하기 시작했다. 남아시아의 무슬림 지식인들 역시 서구 문물의 적극 도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3] 자연 현상을 이성적으로 객관화, 수치화할 수 있다는 가치관을 말한다.[4] 기존의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율법학자들을 숙청하기 위한 조치였다.[5] 1939년 이후에는 라틴 문자 사용이 금지되고 키릴 문자로만 표기하도록 정책이 다시 변경되었다.[6] 원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는 불교나 마니교도들이 운영하던 종교시설 겸 학교들이 많았는데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면서 원래 있던 수도시설들이 중세 이슬람 대학교로 개조되었다. 그 때문에 하디스 분류학이 정작 아라비아반도나 바그다드보다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중앙아시아에서 발전했다.[7] 이슬람 순니파에서 가장 권위있는 하디스 편집본[8] 자디드 운동의 영향을 받았으나 소련의 간접 통치만 이루어지던 동튀르키스탄(신장)의 경우에는 반대로 중국 국민당의 강압적인 소수민족 강제 동화정책에 맞서 친소련 정책을 취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소련한테 버림받았다.[9] 인도의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스(이쪽은 힌두교도) 역시 일본 제국주의와 손을 잡은 적이 있긴 했다. 찬드라 보스가 일본에 협력한 것과는 별개로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는 것과는 다르게 아민 알 후세이니는 단순한 팔레스타인 해방을 넘어 나치 내 한트샤르를 창설하는데 힘을 보탰다는 치부 때문에 이슬람계에서 별로 언급을 꺼리는 인물이 되었다.[10] 실제로 이슬람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상호간의 공격적인 견제는 이슬람교계 전반의 우려를 낳을 수준이다.[11] 이란에서 사용되던 방법을 응용하여 고리대를 이용한 죄에 따른 벌금을 돈을 빌린 사람한테만 다 뒤집어 씌우거나 말도 안되는 상환 일자를 잡아놓고 벌금을 채무자에게 다 뒤집어 씌우는 식으로 이자를 합법화했다.[12] 일단 건설 취지 자체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무슬림 소수민족을 존중하고 보호한다는 프로파간다 홍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