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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colbgcolor=#000><colcolor=#fff>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Константин Циолковский | Konstantin Tsiolkovsky
파일:치올코프스키.jpg
본명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코프스키
Константин Эдуардович Циолковский
Konstantin Eduardovich Tsiolkovsky
출생 1857년 9월 17일
러시아 제국 랴잔현 이젭스코예
사망 1935년 9월 19일 (향년 78세)
소련 러시아 SFSR 칼루가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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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교사, SF소설 작가, 공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학력 무학, 독학, 임용고시
종교 무종교 (유신론)[1]
서명 파일:Konstantin_Tsiolkovsky_signature.svg
수훈 노동적기훈장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기2.2. 과학 및 수학 교사, 이론 연구자로서의 삶2.3. 말년
3. 평가4. 기타5.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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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구는 인류 문명의 요람이다. 그러나 누구도 요람에서 평생을 살 수 없다.
Земля - это колыбель разума, но нельзя вечно жить в колыбели.
우주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한 그의 유명한 말.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코프스키[2]러시아 제국-소련물리학자이자 로켓의 이론적 기초를 최초로 정립한 공학자이고, 금속 비행기, 국제우주정거장, 궤도 엘리베이터, 지구 외 행성 착륙, 태양계 탈출 등의 이론적 아이디어를 제시한 항공우주공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자, 외계 행성테라포밍, 외계인과의 통신과 교류, 인류우주 진출, 천체역학에 관한 새로운 전환점 발견, 외계 동식물에 대한 과학적 공상, 인간의 우주 활동 중에 나타날 수도 있는 생리 및 의학적 변화 등등 다양한 과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였었던 과학자이며, 다수의 공상과학 작품 저작자 겸 러시아 우주론[3]의 대표자 중 한 명[4]이다.

정치적으로는 확실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나[5], 소련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인물이었고, 사후에도 소련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우대를 받았다. 게다가, 혁명 이전의 러시아 제국 정부와도 나쁘지 않은 관계였으며, 제정 시절에 교육 관련 공로로 훈장을 여러 차례 수훈받거나 고위직으로의 승진을 임명받았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세계 최초 인공위성스푸트니크 1호도 1957년 그의 탄생 100주년에 맞춰 발사[6]된 것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기

1857년 9월 17일,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코프스키는 러시아 제국 라잔현 이젭스코예 마을의 산림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에두아르드 이그나티예비치 치올콥스키(Эдуард Игнатьевич Циолковский)는 몰락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귀족이자 자연과학 교사이며, 지방 산림청 관료였고, 그의 어머니인 마리야 이바노프나 유마셰바(Мария Ивановна Юмашева)는 타타르의 소규모 토지 귀족이자 상공업 협동조합의 경영자였다. 특히, 아버지 에두아르드의 자연과학 교사로써의 직업적 영향을 받아서 어렸을 때부터 수학과 물리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우주에 대한 남들과는 전혀 다른, 몇 세기 앞선 과학적 공상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였다. 1867년에 처음으로 인생의 곡절을 겪게되었는데, 10세 때 겨울에 눈썰매를 타다가 성홍열을 앓았고, 이 때문에 청각 능력을 완전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일상 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로 청각을 영구적으로 상실해버렸다. 이 점이 학습과 공부에 여러모로 방해가 될 것이란 것을 염려하던 어머니의 결정으로,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홈스쿨링을 받다가 1872년, 12세에 아버지가 자연과학 교사로 부임하였던 밧캬의 김나지야(중등학교)로 보내졌다. 그러나, 치올콥스키는 부모님의 예상, 특히 아버지의 예상과는 다르게, 경직되고 수동적인 학교 분위기에 청각 장애가 있어서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하지는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치올콥스키의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뒷바라지와 응원을 아낌없이 해주던 그의 어머니인 마리야가 치올콥스키가 불과 14세일 때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렸을 때부터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치올콥스키는 1874년, 16세 때 청각 장애와 권위적인 분위기로 인한 학교 생활 부적응과 이로 인해 나타난 매우 불규칙적인 시험 성적 때문에 다니던 학교로부터 퇴학 조치를 받았고, 그 이후부터는 자기 관심 분야, 특히 자연과학 관련 학문에 한정해서 독학에 더더욱 열정적으로 임하였고, 19세 때까지 그는 여러 도서관들을 방문하는데에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했었다. 굳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스스로 완전 독학으로 물리학천문학, 철학, 문학 등의 다양한 학문들을 공부[7]하면서 꾸준한 학습 과정을 거쳤다. 이미 어릴 때부터 본격적인 독학을 시작하였고, 특히 그가 14살 때부터는 수학에 대한 큰 관심과 강한 학구열을 가지게 된 이후, 어릴 적부터 모스크바와 같은 대도시에서 명성을 나름 얻고 싶어했었던 야망이 타올랐던 치올콥스키는 부단한 노력 끝에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학문적 능력이 있음을 인정받았으며, 16세에 아버지의 지인이자 천문학자인 아리스타크 아폴로노비치 벨로폴스키(Аристарх Аполлонович Белопольский)의 추천서를 받은 아버지 에두아르드의 동행 하에 치올콥스키는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홀로 모스크바에 남겨진 청소년인 치올콥스키는 체계적인 공부를 하면서도 동시에 비교적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하고자, 곧바로 모스크바의 유명한 도서관 중 하나였던 체르트콥스카야 공공 도서관[8]으로 찾아가서 면접을 본 뒤, 최종적으로 합격하여 그곳의 보조 관리인으로서 일을 시작하였다. 매일 열심히 주경야독 비슷한 생활을 하기 시작한 치올콥스키는 도서관의 보조 관리인이 된 지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기억에 남을 스승이 될, 체르트콥스카야 공공 도서관의 정식 관리인 중 한 명인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표도로프'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 우주철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자 러시아(모스크바)의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던 니콜라이 표도로프는 첫 만남 이전부터 자신의 일터를 기웃거리며, 열심히 업무와 학습에 집중하고 있었던 치올콥스키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치올콥스키는 소문으로만 듣던 위대한 철학자인 니콜라이 표도로프와의 첫 만남 과정이 그리 설레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게, 피곤한 표정의 왠 노숙자같이 생긴 늙은 관리인이 근무시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옆에 서있던 다른 관리인에게 '태업하지 마십시오!'라는 경고를 받는 광경을 보고서, 처음엔 그 노인이 표도로프인 줄 몰랐으나, 나중에 경고를 받던 그 늙은 관리인의 정체를 알아보았더니, 실제론 그가 니콜라이 표도로프였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고는 치올콥스키는 표도로프를 찾아가 그의 제자를 자청하였다.

괴짜천재는 같은 괴짜천재를 알아본다고, 그 첫 만남은 우스꽝스러웠지만 흔치않은 괴짜천재인 남남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제자와 스승의 관계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표도로프에게 직접 찾아가서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마침내 표도로프로부터 승낙받은 치올코프스키는 자신을 체르트콥스카야 공공 도서관의 '하숙생'으로 여기고 있었던, '위대한 학자' 표도로프와 사제 관계를 가지고, 서로 친해지는 과정에서 그의 지도 아래, 이따금 금지된 책들과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숨겨두고 있었던 표도로프를 통하여 이런 금서들을 몰래 빌려 읽거나, 표도로프에게 러시아 우주철학에 대하여 아주 상세하게 배움으로써 자신의 우주 개척을 향한 갈망에 대해 큰 열정을 불어넣는 배움과 탐구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1873년부터 1876년까지 3년 동안의 폐관수련에 가까운 독학은 그를 건강이 나빠진 폐인의 모습으로 만들기에 충분[9]3코페이카만으로 빵을 사고 물을 길어다가 말그대로 3년 동안 연명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독한 생활고가 한참 젊고 열정 넘치는 그의 학구열과 우주에 대한 야망을 완전히 꺾어낼 수는 없었다.]하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 도서관 관리인이자 그의 청소년기 때 유일한 후원자였던 니콜라이 피사레프가 치올콥스키의 아버지와 여러차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폐인이 된 치올콥스키가 걱정된다며 부자간 만남의 자리를 주선하였고, 직장 동료인 피사레프의 초대를 받고 따라온 치올콥스키는 이미 몇 차례 자기 자신의 건강 문제에 대해 걱정하던 가족들, 특히 모스크바로 찾아온 아버지가 자신의 피폐한 몰골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들에게 염려가득한 목소리로 훈계하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피사레프가 보낸 편지의 내용대로 건강과 외관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아들의 모습에 경악하면서, "어디에 재정착하던 상관없으니, 적어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과 거처를 얻어두어라. 네가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널 책임지기는 힘들겠구나."란 마지막 경고가 섞인 꾸지람을 듣던 치올콥스키는 아버지가 아주 오래간만에 사주는 식사를 게걸스레 먹다가 이내 잠깐 생각에 빠졌고, 결국에는 장기적 관점에서 '이대로 살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아버지의 설득이 타당하다고 여겼으며, 마침내 치올콥스키는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들었던 체르트콥스카야 공공 도서관과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표도로프와 작별을 한 치올콥스키는 1876년에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부임지, 밧캬로 아버지를 따라서 모스크바를 떠났으며, 밧캬에서 명망높은 지식인이자 자유주의자들의 대표인으로서 나름 잘 알려진 아버지의 인맥을 통하여, 과외 교사로써 잘 사는 집안의 자제들을 1대 1로 지도하고, 그 댓가로 25 코페이카부터 1 루블까지의 비고정적인 수업료를 받으며 살아가는, 정말 특별하지는 않지만 자신만의 본격적인 인생을 시작하였다.

2.2. 과학 및 수학 교사, 이론 연구자로서의 삶

1876년, 뱟카에서 과외 교사, 주로 대수학과 기하학을 가르치면서 전전긍긍하던 치올콥스키는 마침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되면서 꿈에 그리던 자신만의 작업용 실험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875년에 여동생이 사망하였는데, 고등 교육 과정을 밟고 있었던, 전도유망한 그의 남동생 이그나티우스가 발진티푸스로 사망하였다. 게다가 아버지 에두아르드마저도 청각 장애와 심각한 신경성 장애를 앓기 시작하자, 치올콥스키는 1878년에 약 2년 동안을 해왔던 과외 교사 활동을 그만 두고, 고향인 라쟌현을 향해 돌아갔다. 치올콥스키의 형들 중 이오시프는 카잔 보병 학교의 수료생, 즉 장교 신분이였던 만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해야만 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1878년 11월 12일에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징병 중 신체 검사에서 청각 장애와 근시 문제로 인해 병역 면제를 받았다는 점뿐이였다.

결국에는 라쟌의 임대 아파트에서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던 치올콥스키는 점점 생활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였고, 그나마 할 줄 아는 교육 분야에서 먹고 살고자, 1879년 9월달에는 외부 활동인 자격으로 공립학교 교사 임용고시의 첫 시험에 통과하였으며, 제일 어려웠던 마지막 시험에서도 통과한 치올콥스키는 시범 교사로서의 수업과 수학 및 기하학 분야에서의 능력 검증을 끝으로 4개월 동안 공식적인 공립학교 교사 임명장이 올 때까지 밧캬 인근 농촌 지역 대지주의 자제들을 상대로 다시 한 번 과외를 지도하거나, 우연히 농촌에서 알게된 한 소녀에게 글을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등 시간을 적절하게 떼우면서 보내고 있었다.

마침내, 1880년 1월 24일에 보롭스크 시립학교로부터 수학 및 기하학 교사로 공식 임명장을 받아낸 치올콥스키는 첫 부임지를 향해 이삿짐을 싸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에 기뻐하기 시작한 에두아르드가 32루블의 비싼 외투를 주문 제작한 것에 대해 나름 신경이 쓰였었는지 첫 수업으로 받은 급여의 일부를 아버지에게 용돈으로 보내는 등 훈훈한 가족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1년 뒤 1881년 1월 9일에 에두아르드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급사하였다. 치올콥스키는 당시 보롭스크에서 한참 바쁠 때였으며, 아버지, 에두아르드의 부고 소식이 담긴 편지는 너무 늦게 치올콥스키에게 도착하였다. 당연히 소식이 너무 늦었던 탓에 치올콥스키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그는 가족과 의도치 않게 절연한 사람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보롭스크에 도착한 뒤, 치올콥스키는 지역의 호텔에 머물렀다가 시립학교의 교장인 톨마셰프의 초대를 받아 교장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모아둔 모금으로 집을 구하길 바란다며 치올콥스키는 교장으로부터 모아둔 돈을 받아내었고, 마침 근무지 근처에 빈 집이 있던 상황에서 그 집의 소유주와 계약을 맺은 치올콥스키는 원인 불명의 일산화탄소가 쏟아져나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할 뻔하였고, 그 다음날 난방장치가 아주 허술하게 설치된 것을 알게된 치올콥스키가 곧바로 건물주를 불러서 계약을 해지하였다. 이후에 예디노베리예 구교도 교회의 신부이자 집주인인 예브그라프로부터 3칸짜리 방이 딸린 아파트를 임대받았고, 치올콥스키는 그 곳에서 예브그라프 신부가 꽤나 주당이라 벌어지는 사소한 문제들을 제외한다면, 이웃이자 집주인인 소콜로프 가족과 직장 상사인 톨마쵸프 교장, 동료인 체르트코프 교사는 물론 보롭스크의 이웃들과 친근한 관계를 금방 만들어 나름 편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보롭스크 시립학교에서 근무를 선지 몇 개월만에 집주인인 소콜로프의 딸, 바르바라 소콜로바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7명의 남매를 두게 되었다. 그리고 보롭스크에서의 근무 기간 중 남는 시간에 치올콥스키는 처음으로 학문적 성과를 내고자 하였는데, 1882년부터 1883년까지 물리적 동역학과 공기역학적 유사성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저술하였다. 특히 물리적 동역학에 관한 저술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러시아 물리-화학 학회의 공동창립자 중 한 명인 표트르 페트로비치 판-데르-플리트의 주목을 받았고, 그 결과 러시아 물리-화학 학회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이후에 승진 가도를 달려가던 치올콥스키는 1886년부터 1887년까지 '대형 제어 열기구의 비행에 관한 계산'을 완료하여 후에 금속 항공기와 우주 발사체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쌓을 수 있었고, 1887년 봄에는 보롭스크를 방문한 파벨 미하일로비치 골루비츠키는 치올콥스키에게 방문하여 짧은 모스크바 여행 계획을 같이세웠고, 치올콥스키는 이에 동의하였다. 골루비츠키와 같이 모스크바에 여행을 떠난 치올콥스키는 모스크바를 여행하다가 그 곳에 있는 '폴리테크닉 박물관'에서 열린 '자연 과학, 인류학 및 민족지학 애호가 협회' 모임에서 치올콥스키는 금속 열기구에 관한 보고서를 읽었고, 이 경험 또한 나중에 치올콥스키가 항공우주 분야에서 선각자로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좋은 지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치올콥스키는 또 다시 한 번 시련을 맞이하고 마는데, 집에 돌아온 치올콥스키는 이웃 농부가 숯 버너로 요리를 하다가 실수로 집 근처의 건초 헛간에 불을 질러버렸고, 이 불이 자신의 집까지 번져서 집과 재산은 물론이고 그 동안 쌓아둔 연구 기반들이 대부분 불에 타버린 탓에 심한 상실감과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거기서 시련은 끝나지 않았는데, 강변에 위치한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갔으나, 1888년 홍수로 집 전체가 유실되어 그나마 얼마없던 연구 기반마저 전부 집과 함께 흙탕물을 뒤집어 쓴 쓰레기가 되어버렸고, 치올콥스키는 이성의 끈을 거의 다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이들을 그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선진적인 방식으로 교육하던 인자한 과학 교사는 여타 다른 학교 선생들처럼 말도 안 되는 요구는 기본이요, 모욕과 체벌을 통해 원하는 학습 요구를 달성하도록 강제하였고, 많은 인내심은 남아있었지만 예전과 같은 평정심 대신에 폭력성을 가진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아직 남아있는 이성을 붙들어맨 치올콥스키는 묵묵히 교육 공무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였고, 그 공로로 1889년에 교육 공무원으로서는 고위직인 직책을 수여받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교육학적 경험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나갔다. 1890년에 그는 보롭스크 시립학교의 교육 위원회에서 승인한, 1~3학년을 위한 산술 및 기하학의 새로운 커리큘럼을 개발하였고, 1890년 여름에 모스크바 교육청의 관리위원이 치올콥스키에게 블라디미르 학교로의 전근을 제안했고, 치올콥스키는 이에 동의했지만, 전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치올콥스키는 자신이 금속 비행선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있다고 10월 23일 러시아 기술 협회와의 정기 회의에서 보고하였다. 프로젝트는 자체는 승인되었지만 비현실적이란 이유로 자금 조달은 거부되었다. 1891년, 치올코프스키는 비행기 프로젝트를 맡았고, 부단한 노력 끝에 이 비행기를 니콜라이 예고로비치 주코프스키에게 보냈는데, 주코프스키는 비행기에 대해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평소에 전근을 원하던 치올콥스키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892년 1월 27일, 칼루가 주의 공립학교 교장인 운코프스키는 "가장 유능하고 성실한 교사 중 한 명"인 치올콥스키를 칼루가로 전근시켜 달라는 탄원서를 모스크바에 제출하였고, 2월 4일, 그 청원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보롭스크 시의 시민들은 도시에 뛰어난 업적과 공로를 세운 치올콥스키에게 엄숙한 작별 인사를 하였고, 소년 합창단은 작별의 노래를 불렀으며, 동료이자 상사, 후배인 교직원들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2.3. 말년

3. 평가

우주항법(cosmonautics)의 이론적 정립, 발전에서 많은 공헌과 인간이 다른 행성들의 환경을 재설계할 수 있게 되는 시대, 즉 행성의 지구화가 가능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일찍이 예견했다. 1896년 외계 지능과의 교신에 관한 책을 집필했고, 또 1903년에는 다단계 액체 연료 로켓으로 인간이 지구의 대기 바깥으로 여행할 수 있게 하는 방법에 관해 상세하게 기술했다. 에펠탑에서 영감을 얻어 궤도 엘리베이터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기도 했으며 추력방향의 변경이 가능한 로켓엔진, 우주정거장, 연소실의 설계, 자이로스코프를 이용한 자세제어, 우주와 출입가능한 에어록의 설계 등 로켓이 발명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현대에도 쓰이는 이론적 배경을 설계했다. 참고로 1903년은 라이트형제가 세계최초로 비행에 성공했던 시기다. 인류가 비행을 처음 시작할 때 치올코프스키는 우주여행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고, 현재도 큰 틀에서는 이 이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차르정 시절에는 그의 연구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었으나,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공산당에 의해 중용되어 '사회과학 사회주의 아카데미'의 정회원으로서 활발히 연구를 진행하였다. 신생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하여 이 시기에 다단 로켓, 심지어는 우주정거장의 이론적 가능성까지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노고를 인정한 소련 정부와 공산당으로부터 훈장을 수훈받았으며, 그의 사후에 소련 정부와 공산당은 그의 과학적 업적을 기리고자,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러주었다.

비록 그가 살아 생전에는 지금과 같은 본격적인 설계와 목적성을 지닌 로켓을 만들기는 커녕 실물을 보지도 못했지만, 이러한 이론적 기초를 닦아주었기에 로켓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발렌틴 글루시코, 미하일 얀겔이 주도한 냉전 초기 소련의 우주과학기술 성과물들(예: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10],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과 우주 유영, 지구 외 태양계 행성 탐사선 임무 등)도 치올코프스키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생전에 직접 대형 로켓을 만들어 발사할 수 있는 당시 기술적인 한계와 직접 시제형 액체 연료 로켓을 발사할 기회가 없다보니, 이후 최초의 액체 로켓 발사를 성공시킨 로버트 고다드, 이 기술을 발전시켜 잘 써먹은 베르너 폰 브라운, 세르게이 코롤료프 등 후대의 항공우주 과학자들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못한 편이다.

어머니를 어릴 때 여의었고, 아버지도 청년일때 급사, 형제자매들도 병으로 죽었고, 그의 아들 2명은 자살, 2명은 병마, 딸도 1명은 병으로 죽었으며, 본인도 병상에 누워있던 60세에서야 그 공로를 정부와 학계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평생을 말도 안 되는 공상과 기이한 지적 탐구를 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는 괴짜란 평가를 받았으며, 거의 평생을 그 누구의 후원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왔다. 모든 연구는 얼마되지 않는 개인 재산을 정말 알뜰하게 계획하여 들여서 진행해야만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절대로 평탄치 않은 삶을 지내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치올코프스키는 그가 생전에 불가능이라고 남들이 비관하던 자신의 공상과 이론들을 자신의 사후에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전세계에 있는 그의 후배들을 통하여 증명해내었고, 우주로 나아가는 길에 첫번째 발자취를 남긴 그를 인류 전체가 유명할 정도로 알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류를 우주적 관점에서 특별한 행성들 중 하나에 불과한 지구에서 이륙하여 저 드넓고 수 많은 세계를 품고있을 우주로 나아가, 인류가 영구적으로 번영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한 과학자이자 비범한 천재, 러시아의 극히 일부 지역에서나 알려진 재야학자로서 생애를 보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4. 기타

  • 쥘 베른이 쓴 달 세계 여행을 보고 완전히 엉터리라고 비난하기도 했다.[11] 사실 쥘 베른도 이걸 알았기에 이 소설에서도 대포 안에서 온갖 완충 장치를 하고 설계되었지만 달에 도착할때 같이 탄 개는 머리가 으스러져 죽었으며 사람들도 한참을 기절해야 했고 토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평소에 매우 검소한, 은둔형 재야학자의 삶을 살아왔음에도 인간 관계 자체를 포기하진 않았기 때문에, 그가 벌여온 여러 기행에 대한 재밌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살면서 해온 기이한 행동들을 중 보롭스크에서 했었던 '실험 관련 일화들'을 둘러보자면 다음과 같다.
    • 그는 스스로 과학 실험에 필요한 장비를 제작하고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진공 펌프였다. 어느 날, 월셋방 집주인과 그의 지인이 치올콥스키의 집에 방문했었을 때, 진공 펌프 특유의 야릇한 소음을 완벽하게 성대모사하였고, 월셋방 집주인과 그의 지인은 폭소를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 때로는 방문객이 그의 집을 찾아올 때마다, 교묘하게 설치한 전류 기계 장치와 연결된 접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잼'을 발라둬놓고, 방문객들에게 그 잼을 맛보게 한 뒤에 접시와 연결된 전류 기계 장치를 작동시켜 방문객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전류를 내보내어 방문객들의 반응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 발사체 실험에 관한 영감을 얻고자 밤에 폭죽을 몇 다발씩이나 터뜨리거나 연등을 건물 지붕 위로 최대한 많이 날려보냈기 때문에, 주변 이웃 주민들에게 광범위한 층간 소음과 광공해를 유발하기도 했었다.
    • 우주로의 탐사 비행 과정에서 지구를 탈출할 때의 대기권에서 벌어질만한 기압 변화 상황들을 알아보고자 했었다. 직접 사비를 들여서 마련한 공기 펌프 장치가 설치된 밀폐된 건물 공간을 활용, 다양한 고도들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동시에 동일한 실험실에서 산소 부족 상태를 스스로 체감해보려고 자가 실험을 강행한 적도 있었다.
    • 외계 행성의 지구화에 대해 과학적 영감과 추론을 얻고자 아파트 인근에 온실을 건축한 다음, 레몬과 오렌지를 파종하고 재배하였다. 그러나 만성적인 연구 자금의 부족과 당시 기술력의 한계로 인하여 기대하던 것과 달리 실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으나, 주변인들의 반응은...
    • 자신의 치올코프스키 로켓 방정식(정확히는 구체화되지 않은 초기 도식)으로 소형 시제형 발사체를 여유가 된다면 친한 이웃이자 자신을 믿고 따라주던 열성 팬 쇼킨[12]과 같이 제작하였으며, 가능하다면 하늘 위로 높이, 그것도 성공할 때까지 수차례에 걸쳐서 발사하였다. 모든 보롭스크 주민들이 그를 '민폐나 끼치는 인간'이라고 수군덕대고 있을 때[13], 때마침 발사에 성공한 것이다. 이 때의 발사 실험의 성공이 어찌나 기이한 상황이였었는지, 그 이후부터 그는 보롭스크 시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괴짜 과학 교사로 유명해졌다.
  • 대단한 업적을 남긴 치올콥스키에게도 흑역사가 있는데, 식민주의인종주의에 기반한 우생학에 대한 옹호와 연구[14]알베르트 아인슈타인상대성 이론에 대한 확고한 불신[15], 가족들을 자기 자신을 외롭지 않도록 해주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로 여기지 않고 굉장히 억압적이고도, 무정하게 대한 점[16] 등이 존재한다.
  • 미미의 컴퓨터 여행에서 한 에피소드 주역으로 나왔다. 밈에게 달 세계 여행을 보고 너무 허구가 많다고 지적하고 우주로 배를 만들어 직접 쏴 올리는 게 더 현실감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밈과 같이 현실화된 우주선을 우주복 차림으로 타고 이게 언젠가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1957년 그의 동상이 스푸트니크 1호가 쏴 올라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밈이 1957년 그의 탄생 100주년에 맞춰 인류는 세계 최초 인공위성을 쏘아 우주로 올렸습니다라고 에피소드가 끝난다.
  • 1950년대 소련이 루나 3호의 탐사 프로그램 진행 과정에서 달의 뒷면에 대한 촬영에 성공했을 때, 달 뒷면의 분화구 중 한 곳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수식이 바로 치올코프스키 로켓 방정식이다. 이 로켓 방정식을 통해 다단 로켓 구성이 사용연료 대비 적재량(payload)의 비율을 높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 소련과 현대 러시아에서 우주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세 사람을 꼽으라면 반드시 포함되는 인물이다. 나머지 둘은 세르게이 코롤료프, 유리 가가린이다. 로스코스모스 설립 이전 구 소련 우주국 청사 로비엔 이 세 인물의 대형 초상화가 치올코프스키, 코롤료프, 가가린 순으로 걸려 있었다.

5. 어록

- 콘스탄틴 E. 치올코프스키의 어록 출처
Человечество не останется вечно на земле, но в погоне за светом и пространством сначала робко проникнет за пределы атмосферы, а затем завоюет себе всё околосолнечное пространство.

인류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지만, 빛과 우주를 추구하기 위하여, 먼저 소심하게 대기권 밖을 정복한 이후에, 태양계 내 모든 행성과 공간을 정복하고 차지할 것이다.
- «Воздухоплавание в наше время / 우리 시대의 항공학», 1912년.
…Это даст возможность даже громадные оранжереи делать со стенками очень тонкими. Может быть, даже и растения переработаются так, что будут жить без внешней газовой среды, перерабатывая всё внутри себя, как зоофиты (кактусы). Если мы мечтаем о таком преобразовании для животных, то тем более можем научно думать о том же для более простых существ, каковы растения.

...이것은 심지어 거대한 온실들도 극도로 얇게 만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아마도 식물들조차 외부 기체 환경 없이 살 수 있도록 재활용될 것이고, 그들의 내부의 모든 것을 동물-식물(선인장)처럼 스스로 재활용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동물을 위한 이러한 변화를 꿈꾼다면, 우리는 더 단순한 생물들, 즉 식물에 대해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Жизнь в межзвёздной среде/성간 환경에서의 생활», 1919년.
Планета есть колыбель разума, но нельзя вечно жить в колыбели.

행성지성의 요람이다. 그러나 누구도 영원히 요람에서 살 수는 없다.
- «Исследование мировых пространств реактивными приборами / 반작용 추진 장치를 이용한 우주 탐사 연구», 1903년 기고, 1911~1912년 개정.
Сначала неизбежно идут: мысль, фантазия, сказка; за ними шествует научный расчет, и уже, в конце концов, исполнение венчает мысль.

먼저 첫 번째로 진행되는 것은 생각, 공상, 꿈 같은 이야기이고, 과학적인 계산이 뒤따르게 되어있으며, 그리고 최종적으로, 계획하던 바완성될 것이다.
- «Исследование мировых пространств реактивными приборами / 반작용 추진 장치를 이용한 우주 탐사 연구», 1903년 기고, 1911~1912년 개정.
Невозможное сегодня станет возможным завтра.

오늘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은 가까운 미래라면 실현될 것이다.
- «Исследование мировых пространств реактивными приборами / 반작용 추진 장치를 이용한 우주 탐사 연구», 1903년 기고, 1911~1912년 개정.
Многие думают, что жизнь так сложна, так загадочна, что начало её не могло зародиться на такой ничтожной пылинке, как Земля, что жизнь есть произведение безграничной вселенной, зародилась где-то на планетах, между далёкими солнцами, в течение бесконечности веков, и только перенесена случайно на Землю, где и расцвела. Конечно, об этом можно говорить. Но не преувеличивают ли загадочность жизни? Это во-первых. Во-вторых, перенос жизни через мировые пространства довольно трудно допустить:

많은 사람들은 생명이 너무 복잡하고 신비로워서 지구와 같은 작은 행성에서 자연 발생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광활한 우주의 산물이며, 먼 별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생성되어 우연히 지구로 옮겨져 번성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의 신비로움을 너무 과장하는 것은 아닐까? 우선 이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생명체가 우주 공간을 이동했다는 가설은 현재의 과학 기술로는 증명하기 어렵다.
- «Зарождение жизни на Земле / 지구상 생명의 기원 », 1922년.
Млечный Путь содержит сотни миллионов солнц и миллиарды планет, на которых могла бы зародиться жизнь:

은하수에는 수억 개의 항성과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수십억 개의 행성이 있다.
- «Зарождение жизни на Земле / 지구상 생명의 기원 », 1922년.
...Они, герои, смельчаки, проложат первые воздушные тропы трасс: Земля — орбита Луны, Земля — орбита Марса, а ещё далее: Москва — Луна, Калуга — Марс.
...용감한 영웅인 그들지구 - 달의 궤도, 지구 - 화성의 궤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스크바 - 달, 칼루가 - 화성 같은 첫 번째 비행로열어낼 것입니다.
- 1935년 5월 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노동절 집회 참가자들을 위한 전연방라디오 연설 중에서.


[1] Georgy Manaev, "How are religion and Russian space science connected?", 「Russia Beyond」, 2021.5.27.[2] 현행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치올콥스키"이다.[3] 인간이 우주를 개척하여 우주의 본질을 계속해서 탐구하고, 우주를 끊임없이 개척하게 된다면, 인류 문명이 영생과 불사의 혜택을 누릴 정도로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하던 러시아 특유의 우주철학.[4] 다른 러시아 우주론의 대표자인 사람 중에는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콥스키의 청소년 시절 스승인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표도로프가 있다.[5] 다만 여러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겉으로 굳이 들어내진 못했지만, 치올콥스키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자기 자신의 성격만큼은 '혁명가이자 공산주의자'였다고 주장하였다.[6] 특히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본인의 로켓 방정식을 설계에 반영한 우주선이 지구 궤도에 발사되어 한 치의 오차없이 성공적으로 궤도상에 최초의 인공 위성이 안착되었다. 자신의 이론이 틀리지 않았음을 늦었지만 사후에라도 후배들을 통해 입증한 셈이다.[7] 보통 수준의 학습을 한 건 아니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도서관의 문이 열리자마자 입장하여, 도서관이 다시 문을 닫기 직전에 도서관 관리인이 치올콥스키를 직접 문 밖으로 정중히 내쫓을 때까지 최대한 많은 책들을 가능하다면 다 읽으려했을 정도였다.[8] 이 체르트콥스카야 공공 도서관은 모스크바 최초의 공공 도서관으로서, 원래는 과학자이자 고고학자, 민족학자, 역사가인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체르트코프의 개인 도서 소장시설이였으나,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공공 도서관으로서 1863년에 정식 개관하였다. 이후에 바실리 주콥스키, 알렉산드르 푸쉬킨, 니콜라이 고골,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등의 러시아의 유명한 지식인들이 자주 방문하였고, 이에 따라 명망 높고, 역사가 깊은 '지식의 보고 그 자체'인 유명한 공공 도서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9] 치올콥스키는 자신의 아버지가 매달 보내주는 10루블(이따금 15루블을 받기도 하였다.)에서 대부분을 서적 구매와 물리 및 화학 실험용 기자재 구매와 자신이 거처하던 주택의 월세 지불에 사용하였고, 나머지 돈 중[10] 그의 사후 1957년에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였는데, 발사 과정에서 치올코프스키의 로켓 방정식을 이용하여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지구 대기권 바깥의 궤도로 날려보내는데 성공하였다. 자신의 이론을 직접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순간이기도 한 셈이다.[11] 거대한 대포로 사람이 속에 탄 포알을 달로 쏴서 간다는 줄거리인데, 실제로 그렇게 쏘면 엄청난 압력으로 포알 속 사람은 발사 순간 끔살당한다.[12] 쇼킨은 치올콥스키의 온실 건축 및 온실에서의 레몬 및 오렌지 재배 실험에도 같이 참여했다.[13] 소형 로켓 모형이 공중에서 폭발한다거나, 아니면 연료 추력으로 잘 상승하던 로켓이 갑자기 고꾸라진다거나 등등으로 고전하던 치올콥스키는 애초에 평소 기이한 행동들 때문에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는 않았는데, 인명 사고가 날만한 위험한 로켓 실험을 하고 있었으니, 주민들로써는 당연한 반응일 수 밖에 없었다.[14] 그렇다고 나치같은 극단주의적 우생학까지는 아니였지만, 그 당시 과학자로서는 그 누구보다도 계급사회를 싫어했으면서도 천부적인 재능에 관한 관점을 믿어온 탓으로, 인류의 나쁜 유전적 인자들, 그의 언급에 따르면 저지능자, 약자, 게으른 사람, 무지한 사람, 무책임한 사람, 흉악무도한 범죄자들 등등을 외과적 거세 방법을 통해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생학이 비과학적이라고 판명난 현대 시점의 기준으로는 문제가 있는 건 당연하기 때문에 그의 우생학 분야에 관한 관심과 탐구는 비판받아야 마땅할 것이다.[15] 치올콥스키는 과학자의 기본 소양을 갖춘 사람이긴 했지만, 원래부터 세계적인 주류 학계와 관계가 멀었었다. 많은 여러 과학자들의 검증을 통해 에테르 입자 이론이 폐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주 공간을 채우고 있는 빛의 매질'이 존재하며, 이러한 '법칙'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었다. 게다가 알큐비에레 드라이브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이론상 물리세계의 법칙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빛의 속도를 넘길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실용 부문에서는 기술적으로 경험이나 기반이 전무한 상태이다. 아광속 이하의 속도로만 우주 탐사와 비행이 가능하다는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물리법칙 발견은 우주로 인간이 진출하도록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어나가는 삶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겨왔던 치올콥스키에게는 꽤나 심적 혼란을 야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물론 처음부터 가족 간의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였다. 냉담한 성격의 아내와 입장 차이를 좁히려고 노력했고, 심지어는 아내를 도와 집안일을 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우주 관련 연구에 서서히 발목이 잡히기 시작하자 사이가 점차 악화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