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2 20:59:17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

<colbgcolor=#555><colcolor=#fff>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
Александр Башлачёв | Alexander Bashlachev
파일:Alexander_Bashlachev_1987.jpg
본명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바실라초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Башлачёв
Alexander Nikolaevich Bashlachev
출생 1960년 5월 27일
소련 러시아 SFSR 체레포베츠
사망 1988년 2월 17일 (향년 27세)
소련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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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시인, 싱어송라이터, 음악가
장르 싱어송라이터, 바르드 록, 포크 록
악기 보컬, 어쿠스틱 기타
활동 1983년 ~ 1988년

1. 개요2. 생애3. 음악 및 평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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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바실라초프는 소련의 음악가이자 시인으로, 소련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계 및 러시아 록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주요 장르는 바르드 록[1] 및 포크 록.

2. 생애

1960년 볼고그라드 주에 위치한 체레포베츠(Череповец) 시에서 태어났다. 1977년 체레포베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체레포베츠 야금소에서 아버지와 함께 화가로 일하다 1978년 스베들로프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에 위치한 우랄 대학교에 입학해 저널리즘을 전공하였다. 1983년 졸업한 뒤 1년 동안 '커뮤니스트(Коммунист)' 지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1980년대 초반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4년 9월 체레포베츠에서 그는 소련 및 러시아의 저널리스트이자 음악 비평가인 아르테미 트로이츠키(Артемий Троицкий)를 만났고, 그의 소개를 통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몇 차례 크바르티르니크[2]를 개최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5년 3월 바실라초프는 ДДТ(데데테)의 보컬 유리 셰프추크와 함께 첫 무대 데뷔를 하였으며, 이후 자신의 첫 공식 앨범[3]인 '세 번째 수도(Третья столица)'를 녹음하였다. 이후 1986년 그는 레닌그라드에 정착하였으며 3월부터 레닌그라드 록 클럽[4]의 책임자였던 세르게이 피르소프의 도움으로 블로힌 거리(Улица Блохина)에 위치한 캄차트카(Камчатка) 화력발전소에서 화부로 일할 수 있었다[5]

1987년 봄 그는 알렉산드르 우치텔 감독의 영화 '락' 촬영에 참여하였으나 도중에 촬영을 중단하고 빠져나왔다[6]. 이후 6월 그는 제5회 레닌그라드 록 페스티벌에 참가해 상을 받았다[7]

이후 1988년 1월 29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같은 해 2월 17일 아침 7시에서 9시 사이 자신의 집[8] 부엌 창문으로 떨어져 사망한다. 2월 23일 그는 코발레프스키 공동묘지에 묻혔다.

바실라초프의 정확한 사망 원인은 현재도 불명이지만, 고독 및 슬럼프에 시달리던 그가 투신자살을 했다는 게 대표적인 견해이다. 그와 사실혼 관계이던 아나스타샤 라흘리나(Анастасия Рахлина)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영적 감각 비스무리한 게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어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교류에 한계가 있었고, 일종의 카산드라 컴플렉스와 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또한 그의 주변 사람들은 1986년 중반부터 창작의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마지막 곡인 '체리(Вишня)'는 1987년 중반에 쓰인 곡이며, 죽기 1-2년 전부터 그의 신곡 발표나 공연 횟수는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예고르 레토프 또한 1987년 바실라초프를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그는 너무나도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는 완전하게 부서지고 파괴된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기력은 남김없이 소진되어 있었다."[9]라고 표현한 바 있다.

3. 음악 및 평가

바실라초프는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불라트 오쿠자바 등과 함께 러시아의 바르드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받는다. 러시아 음유 시가에 영향을 받아 시 낭송에 가까운 포크 음악을 했으며, 러시아에서는 상당히 높이 평가 받는 인물이지만[10] 가사가 현지인들이 해석하기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해외에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4. 기타

  • 바실라초프는 생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밴드로 더 도어즈아크바리움[11]을 꼽았다.
  • 소련의 영화감독 라파일 라흘린(Р. Рахлин)의 딸 아나스타샤 라흘리나(1965 - 2018)와 사실혼 관계였다.1985년 아들 이반이 태어났으나 어릴 적 사망하였고, 바실라초프의 사망 이후인 1988년 8월 3일 라흘리나는 아들 예고르(Егор)를 낳았다.
  • 27세 클럽에 속한다.


[1] 러시아 음유 시인(바르드)의 음악 전통을 이어받은 러시아 특유의 록 장르.[2] Квартирник. 소련의 아파트 방에서 이루어진 소규모 라이브 콘서트. 당시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는 인디 음악가 및 밴드는 레닌그라드 록 클럽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공식 공연 혹은 방송 출연이 힘들었기에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빅토르 초이 등의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은 주로 이런 식의 라이브를 통해 공연하고 청중과 교류하였다. 이들의 공연은 거의 대부분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되었는데, 바실라초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며 현존하는 그의 앨범은 몇몇 공연 녹음 등을 제외하면 모두 이러한 부틀랙으로 구성되어 있다.[3] 다만 정규 레코딩은 아니고 홈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였다. 당시 소련에서 언더그라운드 밴드는 스튜디오에서 정규 녹음을 할 수가 없었다.[4] 루빈슈타인 거리에 위치한 공연 시설로, 당시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는 언더그라운드 음악 공연이 공식적으로 가능한 몇 안 되는 곳이었다. 주파르크, 키노, ДДТ 등도 거쳐간 당시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집결지 중 하나.[5] 당시 소련에서 무직은 범죄였으며, 언더그라운드 가수는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기에 다른 직업이 필요하였다. 캄차트카 화력발전소는 당시 피르소프와 빅토르 초이(1986년 가을 - 1988년 근무)를 위시한 몇몇 록 가수들이 석탄을 나르는 화부(stoker)로 위장취업한 곳이었다. 이후 호텔 건설 때문에 몇 차례 철거당할 위기에 놓이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빅토르 초이 박물관이 되어 있다.[6] 빅토르 초이가 참여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후 우치텔은 바실라초프의 장례식 장면을 찍었는데, 이는 영화 '락'의 일부 버전에 삽입되었다[7] 당시 대상은 키노에게 돌아갔는데, 대중에게 그 유명한 앨범 혈액형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8] 쿠즈네초프 대로에 위치한 아파트(№ 281, дома № 23, корп. 1) 8층[9] 출처[10] 일례로 예고르 레토프는 그가 러시아 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라고 평가하였다.[11] Аквариум. 러시아 록의 대부로 손꼽히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Борис Гребенщиков)의 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