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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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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예이젠시테인[1]
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Эйзенштейн
Sergei Mikhailovich Eisenstein[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5px-Sergei_Eisenstein_03.jpg
출생 1898년 1월 22일[3]
러시아 제국 리보니아 주 리가
(現 라트비아 공화국 리가)
사망 1948년 2월 11일 (향년 50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연방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안장 노보데비치 묘지
배우자 페라 아타셰바 (Pera Atasheva, 1934년 혼인)
직업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영화 이론학자
영화 편집자
활동 기간 1923 ~ 1946년
주요 서훈 레닌훈장
소련 명예훈장

1. 개요2. 생애3. 기타4.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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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영화감독.

1898년 1월 22일 당시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라트비아 리가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4]

2. 생애

영어도 잘해 미국 할리우드와도 인연이 있었다. 할리우드 초기 발전을 이끈 인물이었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메리 픽포드도 《전함 포템킨》을 보고 감명을 받아 예이젠시테인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할리우드에 초청받아 미국에 가기도 했는데, 이 당시 찍은 사진으로 찰리 채플린테니스를 치는 사진이 있는 등 화려한 인맥을 쌓기도 했다. 월트 디즈니와도 친분이 있었다. 다만 나중에는 할리우드에 대해 좋은 시설과 장비가 있으면서도 서부극 같은 (시시한) 것밖에 못 찍는다는 식의 비판을 하기도 했다.

다만 이는 예이젠시테인의 미국 경험이 그닥 좋게 안 끝난 것도 있던 점도 존재한다. 예이젠시테인은 미국에 넘어가서 야심차게 촬영하던 영화 <¡Que viva México!>의 스케쥴이 질질 끌리다 비자 문제 등이 꼬이면서 결국 포기하고 돌아와야 했고, 당시 소비에트 연방에서 미국인들과 친분이 있다는 것은 주요 숙청감이었다. 이로 인해 30년대는 예이젠시테인에게 있어서 최악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의 예이젠시테인은 방만한 촬영으로 인해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경향을 자주 보였었는데, 이게 결국 소비에트 연방에서 대참사로 번진다.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계획하던 <베진 초원(Бежин луг)>이 2년간 200만 금루블 이상이라는 거금을 잡아먹었는데, 간신히 완성한 직후엔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의가 계급투쟁보단 기독교적 선악의 투쟁에 가까운 내러티브를 문제삼아 상영 중지명령을 내리면서 기어이 영화가 엎어진 것.

그 때문에 당시 소련 영화계의 총책임자였던 보리스 슈먀츠키가 2년 뒤에 총살당하는 등 수많은 영화인들이 죽거나 굴라크로 끌려갔다. 예이젠시테인 본인은 다행히도 예이젠시테인의 영화들을 마음에 들어했던 스탈린이 <베진 초원> 사태를 예이젠시테인보단 그를 관리 감독해야 할 상급자들의 탓으로 돌리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5]. 예이젠시테인이 스탈린에게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한 끝에 만든게 <알렉산드르 넵스키>였고, 이 작품이 완성도 높게 잘 만들어지면서 예이젠시테인도 간신히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훗날 《이반 뇌제》 1부를 만들 때는 출세하지만, 2부에서 이오시프 스탈린풍자했다는 이유로 몰락한다.[6] 사실 스탈린에 대한 풍자는 1부에서부터 만들어 놓았으나, 스탈린이 1부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2부의 제작은 장려했다고 한다. 2부에 대한 악평도 사실은 자신의 풍자보다는 취향에 안 맞아서라고... 다큐멘터리 영화 알마아타에서의 에이젠슈테인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어찌 되었든 스탈린의 악평 탓에 3부의 제작은 좌초되고 남은 필름들이 파괴되었으며, 2부는 스탈린이 격하된 1958년이 되기 전까지 개봉조차 하지 못했다.

1948년 2월 11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후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3. 기타

한국에도 알려진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대표작으로는 《전함 포템킨》, 《이반 뇌제》, 《알렉산드르 넵스키》 등이 있으나, 당연하게도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영화인 만큼 한때는 들여오는 것 자체를 금하던 시절이 있었다. 유명한 감독이지만 그가 감독한 작품 자체는 열 편이 채 안 된다.

결혼 이력이 있기는 하지만 일기에서 관련 기록이 발견되는 등 여러 행적으로 미뤄보아 러시아에서는 제정시대 이래 소련을 거쳐 현대까지도 금기시되는 동성애자였다는 의혹이 있다. 표트르 차이콥스키처럼 역사가들도 반박불가라 여기는 정도는 아니라 영화 공부하는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는 편이다. 러시아 외의 국가에서 나온 전기를 찾아보면 동성애 의혹을 조심스럽게나마 소개하기도 한다.

카를 마르크스자본론을 영화화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7] 하지만 예이젠시테인 시대 소련의 정치적 상황 등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했다. 훗날, 독일의 영화감독인 알렉산더 클루게는 이 시도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작품을 따로 창작하기도 했다. 예이젠시테인이 자본론의 영화화를 위해 노력하던 시기에 쓴 작품 노트가 2020년 국내에도 정발되어 있다. 제목은 《〈자본〉에 대한 노트》.

4. 작품 목록

  • 글루모프의 일기(Дневник Глумова, 1923, 단편)
  • 파업(Стачка, 1925)
  • 전함 포템킨(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 1925)
  • 10월(Октябрь «Десять дней, которые потрясли мир», 1927)
  • 일반 노선: 낡은 것과 새 것(Старое и новое «Генеральная линия», 1929)
  • 감상적인 로맨스(Romance sentimentale, 1930)[8]
  • 베진 초원(Бежин луг, 1937)[9]
  • 알렉산드르 넵스키(Александр Невский, 1938)
  • 이반 뇌제 1부(Иван Грозный 1-я серия, 1944)
  • 이반 뇌제 2부(Иван Грозный 2-я серия, 1945)


[1] 사실 "에이젠시테인"이 맞는 발음이자 표기지만, 러시아어 표기법의 문제로 인해 "예이젠시테인"이라는 부정확한 표기법이 일단은 원칙이다. 이 외에 "에이젠슈테인", "에이젠슈타인", 더 나아가 아예 독일식 표기법인 "아이젠슈타인" 같은 표기법도 찾아볼 수 있다.[2] 러시아어의 로마자 표기 기준 Sergey Mikhaylovich Eyzenshteyn, 독일식 성씨를 쓰는 독일계나 유대계 러시아인의 이름을 영어에서 표기할 때는 성씨를 독일어 철자대로 쓰는 것이 보편적이다.[3] 그레고리력 기준 1898년 1월 10일[4] 아버지는 부유한 건축기사였다.[5] 스탈린은 본인도 시인 출신이어서 그랬는지 불가코프와 같이 본인이 좋아하는 예술가들을 의외로 너그럽게 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예이젠시테인 본인이 딱 이 케이스였다.[6] 마지막 장면에만 의도적으로 독일 표현주의식 조명을 사용해 공포감을 극대화했고 컬러로 촬영해 폭군의 이미지를 강화시켰다.[7] 제임스 조이스의 스타일을 채용할 예정이었다고.[8] 프랑스어 영화이다.[9] 미완성작. 원본 필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폭격으로 소실되었고, 촬영 중 하도 방만하게 촬영하느라 남은 B컷들과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나중에 재구성한 버전들이 일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