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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서진의 정치가 난릉성공(蘭陵成公) 衛瓘 | 위관 | |
작호 | 치양공(菑陽公) → 난릉군공(蘭陵郡公)추봉 |
시호 | 성(成) |
성 | 위(衛) |
이름 | 관(瓘) |
자 | 백옥(伯玉) |
부친 | 위기(衛覬) |
생몰 | 220년 ~ 291년 |
본관 | 사주(司州) 하동군(河東郡) 안읍현(安邑縣) |
국적 | 조위(曹魏) → 서진(西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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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삼국시대의 위나라와 서진의 정치가. 자는 백옥(伯玉). 사례 하동군 안읍현 사람.2. 생애
2.1. 조위 시기
위기의 아들.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었음에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위나라에서 상서랑, 정위경, 진서장군 등의 관직을 지냈다.263년에 종회가 촉을 정벌하러 갈 때 감군으로 종군했는데[1], 등애와 종회의 알력 와중에 종회가 등애를 모반자로 몰려고 해 등애더러 위관을 죽이게 만들려했지만 이를 알고는 거꾸로 등애와 등충 부자를 체포해 낙양으로 호송하도록 했다. 그러나 종회가 강유의 부추김을 받아 난을 꾀하는 것을 알자 그 수하 장수인 호열과 호연 부자와 힘을 합쳐 종회와 강유를 죽여 진압했는데, 등애의 수하들이 등애가 무죄함이 밝혀졌다고 믿어 그를 풀어주자 보복당할 것을 염려해 등애에게 원한을 품었던 전속을 시켜 등애 부자까지 죽였다.
조정에서는 미연에 난을 진압했다고 해서 이를 공로로 취급했으나 세간에서는 등애가 억울하게 죽었다 해 위관을 비난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같이 종군한 두예는 '위관은 명사의 이름을 얻고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그에 걸맞은 명성을 쌓지 못하고 부하를 제대로 다스리지도 않았으니 이는 소인이 군자의 겉치레를 하는 것이다. 필경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라고 비난했는데, 이 말을 듣자 한걸음에 두예를 찾아가 직접 일의 전말을 해명했다고 한다.[2]
2.2. 서진 시기
277년에 탁발사막한을 보내 귀국하게 하면서 서쪽에서 세력을 떨치던 선비족의 탁발역미를 약화시키고자 선비족 대인(유력자)들에게 뇌물을 보내 탁발역미의 아들을 죽이게 만들고, 또 탁발역미에게 종속된 상태였던 오환왕 고현도 뇌물로 설득시켜 선비족 대인들에게 '탁발역미가 자기 아들이 대인들 때문에 죽었다고 보복으로 대인들의 자식들을 잡아죽이려 한다' 는 말을 퍼뜨리게 했다. 결국 대인들이 탁발역미를 떠나 세력이 미약해지고 탁발역미도 병사해 선비족의 위협이 약해졌으며, 이 공적으로 위관의 동생이 정후에 봉해졌다.278년 10월에는 정북장군을 지내다가 상서령이 되었고 사마충의 우매함을 걱정해 사마염에게 태자를 폐하도록 우회적으로 간하기도 했다.[3] 서진 성립 후에 282년에 상서령에서 사공으로 봉해졌으며, 284년에 사마량과 함께 진군이 제정한 구품관인법을 귀족 가문 일부가 관직을 독점하게 된다고 해서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다.
서진 건국의 일등공신인 가충과는 서로 적대적으로 경쟁하는 사이였는데, 태강(280년 ~ 289년) 초에 위관은 태자소부를 지냈고 사마염이 태자비를 간택할 때 가충의 딸인 가남풍과 위관의 딸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황후 양씨의 입김으로 가남풍을 낙점하자 그 골이 더 깊어졌다. 사마염이 죽기 전에 290년에 양준이 아들 위선을 헐뜯으면서 사마염에게 공주를 도로 빼앗아 오도록 권하자 부끄럽고 두려워 늙었다는 이유로 자리에 물러나겠다고 해 태보로 승진했다가 공작의 신분으로 집에 가도록 명령받았다.
사마충이 혜제로 등극한 후 신료들의 원로 위치로 혜제를 보좌했는데, 조정에서 양준 일파가 제거된 뒤로는 그 일에 앞장선 여남왕 사마량과 초왕 사마위(司馬瑋)의 입김이 세졌다. 사마위는 난폭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를 경계한 위관은 사마량과 의논해 사마위를 봉지로 돌려보내려 했고, 그 일환으로 사마위의 수하 공손굉을 잡아들이게 해 사마위는 위관을 미워하게 되었다.
2.3. 죽음과 사후
공손굉이 적로장군 이조를 통해 위관과 사마량이 혜제의 폐립을 꾀한다고 가남풍에게 무고하자, 그렇지 않아도 태자비 간택건이나 사마염 생전에 태자 교체를 건의한 일 등으로 위관을 싫어하던 가남풍은 기회다 싶어 혜제더러 사마위에게 밀칙[4]을 내리게 했고 이 밀칙을 받은 사마위는 지체없이 움직여 위관은 청하왕 사마하에게 체포된 다음 살해되었다. 향년 72세. 두예의 예견이 적중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서기 3세기에 72세면 충분히 장수했고 두예는 위관보다 7년 먼저 죽었다. 그 예견도 진짜 예견이라기보다는 사마씨에 곡학아세하는 인물의 여론 편승에 가깝다는 청대 고증학자 초순의 의견도 있다. 다만 자연사한 두예에 비해서 위관의 끝이 안 좋기도 해서 결국 두예의 말대로 된 셈이기는 하다.위관이 죽은 후 가남풍은 사마위가 정식 칙명도 받지 않고 대신을 죽였다 해서 사마위까지 처형하고 본격적으로 전횡을 시작했다. 이후 난릉군공으로 추봉되었고 시호는 성공(成公)이다.
위관의 아들은 위항(衛恆)이고 자가 거산(巨山)인데 황문시랑을 지냈다. 위항의 아들은 위개(衛玠)이고 자가 숙보(叔寶)인데 성대한 명성이 있었고 태자세마가 되었다가 일찍 죽었다. 그 외의 자식으로는 진혜제 사마충과 결혼할 뻔했던 딸이 있는데 꽤나 미인인데다가 성품도 좋아 사마염이 진지하게 사마충의 배필로 고려한 적이 있으나 무산되었다. 291년에 위관을 죽게 만든 사마위가 토사구팽 당한 뒤, 위관의 딸은 가남풍에게 아버지를 신원시켜 줄 것을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위관의 신원은 회복되었다.
3. 기타
여류 서예가이자 화가 위부인이 위관의 가문 후손이다. 실제로 위관 본인도 꽤 서예로 이름을 날린 인물로써 부풍 내사 돈황 출신의 색정과 함께 초서에 능해 당대에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았으며, 아버지 위기와 아들 위항까지 3대가 모두 명필로 유명했다. 중국에는 아직도 위와 같은 위관의 친필 글씨들도 남아있다는 모양이다. 양나라 시절 서예 관련 책인 '서품'에서는 위관의 글씨를 '상품지하(上品之下)'로 평가했다. 서품에서는 위관에게 살해 당한 종회의 글씨 역시 같은 상품지하로 평가하고 있다.
4. 미디어 믹스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8, 9, 10, 11 |
삼국지 12, 13, 14 |
등애의 보복이 두려워서 그를 죽였다는 두예가 쓴 기록 때문에 매력이 매우 낮다. 지력, 정치력은 훌륭한 편이나 통솔력은 조금 어정쩡해서 전장에 내보내기엔 미묘하다. 장군직을 지냈다지만 분명한 글씨로 이름을 날린 문인 출신이고 뒷날 서진에서 꽤 출세해서 재상급 인사까지 된 인물인데 일러스트는 장군처럼 그려졌다.
삼국지 8에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능력치는 무력 46/지력 82/정치력 79/매력 42 어중간한 인재이지만 교란 3, 기습 5, 낙석 3, 공성 3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교란과 기습은 가장 좋은 전법이고 범용성이 좋아 위관에게 적절하다. 더블어 등장시기가 늦지만 수명이 길어서 수련을 어느 정도 할 수가 있고 특기에 반계, 혼란, 정찰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장특과 함께 리즈 시절이다. 기습 5는 등애와 종회, 강유를 기습해 죽인 걸 반영한 것.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9/무력 53/지력 81/정치력 79로 후반기치고 높게 나온다. 제사, 정란, 혼란, 매도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9/무력 45/지력 81/정치력 78/매력 37에 명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통솔력이 어정쩡한 69에 무력이 낮지만 지력이 80을 넘기 때문에 전장에서 아예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니다. 내정 특기로 농업이 있는데 정치력이 78로 괜찮은 편이라 특기를 살릴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특기는 상업, 화시, 진정, 반목, 위압, 명사로 총 6개다.
삼국지 11에서는 오나라 진영인 반장, 마충을 제외한 포박 특기의 소유자로 등장. 능력치는 통솔력 69/무력 46/지력 79/정치력 78/매력 28에 병종 적성(노병, 병기 A)도 등장 시기를 감안하면 야전용으로 쓰기에 그리 나쁘지 않다. 포박이 워낙 사기인 데다 가뜩이나 장수가 없는 후기 삼국지에서 그나마 있는 장수들까지 강탈해가는 사기성 짙은 장수지만 너무 후반에 나오기 때문에 마충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영웅집결에서는 종회군 소속으로 나온다.
삼국지 12에서 영 좋지 않은 궁공격강화라서 시장의 가증해결원로 쓰이게 되었다. 능력치는 11의 능력치에서 매력만 빠졌다. 일러스트는 11까지는 제법 멋있는데 12편에서 완전히 추남이 되었다. 일러스트는 오른손을 올리면서 등애를 주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12 때와 같으며 특기는 상업 2, 설파 1. 전수특기는 상업이고 전법은 궁병속공진.
삼국지 14의 능력치는 통솔 69, 무력 45, 지력 79, 정치 86, 매력 32이며 개성은 포박, 진흥, 법률, 문화, 주의는 명리, 정책은 화계연구 Lv 4, 진형은 안행, 정란, 투석, 전법은 연노, 진정, 정란, 투석, 친애무장은 사마염, 혐오무장은 등애다.
4.2. 84부작 삼국지
마지막 회에 강유와 종회의 난을 진압한다. 강유가 분전 끝에 자결하자 (위군이 달려들어 그의 시신을 처참하게 훼손했다는 정사의 서술과 달리) 그 앞에서 읍을 하고는 "촉의 멸망은 장군의 죄가 아니고 후주가 어리석어 이렇게 되었을 뿐"이라 말한다. 강유는 그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떨구며 눈을 감고 위관은 예를 갖춰 강유의 시신을 잘 묻어주라고 명한다. 본래 문인으로 활동한데다 촉한 공략전때도 일선에서 싸우는 일과 거리가 먼 감군의 직위였던 만큼 극중에서도 문관의 복색으로 나오며 성격도 선비같이 묘사되기에 코에이에서 질나쁜 잡장처럼 묘사한 것과 격차가 크다.4.3. 삼국전투기
호오즈키로 패러디되었다. 다만 원본과는 달리 뿔은 없다. 성도 전투 (3)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캐릭터 소개에 의하면 '상당히 냉철한 인물'이라고 서술되었다. 진서의 위관을 본다면 뭔가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기는 굴리는데 오묘하게 결정적인 부분에서 안 맞아서 손해보는 인간' 정도의 평이 맞는 것도 같지만, 등애를 체포하고 종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보였던 민첩함과 냉정함 때문에 그렇게 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서진 건국 이후 위관의 행적은 거의 묘사되지를 않았으니 딱 촉 정벌에서의 행적만 놓고 캐릭터를 짠 것으로 보인다.검각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종회의 촉 정벌 당시 군사로서 참전했다. 종회와 함께 낙양에서부터 움직였으며, 한중 도착 후에는 이보와 순개에게 각각 1만씩의 병사를 배정해 수비성인 한성과 낙성을 포위할 것을 명했다.
이후 종회가 검각에서 막히고 적의 힘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하자 검각은 성이 아닌 관이라 후방에서 얼마든지 보급을 받을 수 있기에 힘이 떨어질 리가 없다고 말했다. 종회는 이에 어차피 불가능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며, 촉의 기둥인 강유를 잡아두는 것만으로 촉의 내부를 동요시킬 수 있으니 기회는 반드시 올 거라고 하자 납득했고, 대신 병사들이 많이 지쳤으니 잠시라도 휴식을 할 필요는 있다고 진언했다. 종회는 이를 받아들여 일시적으로 검각에서 물러나게 된다.
성도 전투 편에서는 등애가 촉 멸망 이후 지나치게 텐션이 올라가자 사마소의 명을 받아 일에는 절차가 있으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등애는 국가 대계를 위해서라면 멋대로 하겠다고 발언하여 이걸 어떻게 상부에 보고해야 하나 난감해하기도 했으며, 이 발언을 이용해 종회가 등애를 참소해 사마소가 등애를 소환하라는 명을 내리자 위관은 종회의 명으로 등애 체포 임무를 맡게 된다.
종회는 앞으로의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위관까지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병력을 쥐꼬리만큼만 딸려보냈지만,[5] 위관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종회가 자기를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어 일부러 시간을 계산하며 움직여 밤에 성도에 도착하게끔 움직였고, 정확히 모두가 잠든 밤중에 성도에 도착한 뒤 어두워서 병력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상황을 이용해 성문을 지키던 병사에게 자신은 등애를 체포하기 위해 왔으며 조정의 군에 합류하지 않고 반기를 들면 삼족을 멸하리라고 협박하여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력을 자기 병력에 더했고, 비슷한 작업을 반복한 끝에 날이 밝을 무렵에는 등애의 최측근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도 병력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고 묘사되었다.
그리고 위관은 그때까지 자고 있던 등애 부자를 체포했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등애의 측근들이 병사를 끌고 들이닥쳤지만 위관은 등애는 아직 죄가 확정된 것이 아니고 무죄가 입증되면 바로 풀려날 것이지만, 만일 당신들이 움직인다면 그때야말로 돌이킬 수 없어진다고 설득해 행동을 멈추게 하였다.
그리고 수틀린 종회가 대놓고 사마소에게 반기를 들며 반역을 선언했을 때는 표면 상으로는 종회에게 동조하는 척을 한 것으로 묘사됐다. 일단 동조를 표했기에 다른 제장들과는 달리 구금되지 않았는데, 종회가 구금한 제장들의 사형을 위관에게 감독하게 하려고 하자 구금된 제장들은 인질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기에 바로 죽이는 건 시기상조라고 하며 종회를 이치에 맞게 설득하여 제장들의 목숨을 살렸다. 이후 위관은 구금되어있던 제장들의 본진에 줄줄이 격문을 보내서 움직이게 하였고[6] 이게 제대로 먹혀들어 종회의 난을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다.
이렇게 종회의 난을 조기에 진압해버리며 엄청난 공을 세웠고 이보도 이제 급승진만 남았다며 축하해 줬지만, 위관은 아무리 명령이었다 하더라도 등애가 자기를 체포, 압송한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며 겁을 집어먹고 전속을 불러 등애 부자를 살해하라는 명을 내려 그들을 제거하게끔 했다.
전투외편 8편에서는 도독청주제군사로서 임치에 배치되었다고 언급되었다.
독발수기능의 난 에피소드에서는 위관의 딸만 잠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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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관 | 색정 |
[1] 즉 위관은 사령관들을 감사하는 감독관이었다. 괜히 종회와 등애가 위관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닌 것이다.[2] 두예는 이렇게 위관을 비난했으면서 정작 사마소/사마염에게 등애는 무죄이니 복권해야한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따라서 진심으로 등애를 위해서인 게 아니라 그냥 여론에 편승해 자신의 명성을 높이려는 생각이라는 청대 고증학자 초순의 견해도 있다.[3] 일화에 따르면, 연회 중에 위관이 취한 체하고 사마염이 앉은 용상에 다가와 그 팔걸이를 만지며 '이 자리가 실로 아깝사옵니다' 라고 말하자 사마염은 '경이 정말 취했구려' 라고 받아넘기면서도 내심 사마충 대신 동생 사마유에게 자리를 물려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낌새를 눈치챈 가남풍은 곧 사마염이 사마충에게 국정에 관한 글을 지어올리라 명을 내리자 뛰어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글을 사마충이 쓴 것처럼 꾸며 올리게 했고, 이 때문에 사마염은 태자를 폐할 생각을 접었다고 한다.[4] "여남왕 사마량과 태보 위관이 황제 폐립을 꾀하고 있다. 초왕은 조명을 받들어 회남왕과 장사왕, 성도왕 등 3명의 왕과 함께 군사를 동원해 공문을 지키고, 사마량과 위관의 관직을 박탈하도록 하라."[5] 등애의 성격 상 위관이 체포하겠다고 나서면 길길이 날뛰며 위관을 죽일 거라는 계산이 섰기에 그런 것. 이렇게 되면 종회 입장에서는 등애 체포를 넘어 그를 죽여버릴 명분을 얻을 수 있음과 동시에 잠재적 위험분자인 위관까지 제거할 수 있게 된다.[6] 위관의 격문만으로는 다들 긴가민가했지만 구건의 실책으로 인해 호열의 친필 밀서를 요리사로부터 전달받은 호연이 먼저 움직인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