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8:50:16

아르세니 골로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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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3대 북방함대 사령관
아르세니 그리고리예비치 골로프코
Арсе́ний Григо́рьевич Головко́
Arseny Grigoryevich Golovko
파일:골로프코 제독.jpg
출생 1906년 6월 23일
러시아 제국 테레크 주 프로클라드나야 마을
(現 러시아 카바르디노-발카리야 공화국 프로클라드나야 마을)
사망 1962년 5월 17일 (향년 55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모스크바)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재임기간 제3대 북방함대 사령관
1940년 7월 ~ 194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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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배우자 ???[1]
키라 니콜라예브나 골로프코[2][3]
자녀 아들 미하일[4]
딸 나탈리야[5]
복무 소비에트 연방 해군
1925년 ~ 1962년
최종 계급 상장 (소비에트 해군)
주요 참전 스페인 내전
독소전쟁
주요 서훈 레닌훈장 (4회)
우샤코프 훈장 1등급 (2회)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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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성장2.2. 독소전쟁2.3. 전후
3. 여담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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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골로프코.jpg
소련 해군제독. 북방함대 사령관을 지냈다.

2. 생애

2.1. 출생성장

파일:골롶.jpg
1906년 6월 23일 수의사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7명의 형제들과 함께 자랐다. 프로클라드나야 마을은 바다와 멀리 떨어진 산악 지형의 카자크 마을이었고, 아버지는 골로프코가 자신을 따라 말 사육업에 꼭 필요한 수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1920년 마을 최초로 콤소몰에 가입했고 1925년 모스크바로 와 티미랴제프 농업 대학에 입학했지만 몇달 후 1925년 11월 5일 콤소몰에 의해 해군에 징집되었다.

1925년 발트해 수병으로 시작한 골로프코는 곧바로 사관학교로 보내져 1928년 프룬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지휘참모 특별 과정을 수료하며 빠르게 고위장교 루트를 밟았다.

1936년 해군대학에 입학했을때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하고 군사고문단에 자원해 스페인에 파견되었다. 카르타헤나 항구의 해군기지 군사고문으로 일하다 소련으로 돌아와 1938년에 해군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한 그는 북방함대 구축함 사단장, 북방함대 참모장을 지내다 1938년 7월엔 카스피해 전단 사령관, 1939년 7월엔 아무르강 소함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40년 7월 북방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2.2. 독소전쟁

파일:골롶골롶.jpg
제2차세계대전 내내 북방함대 사령관을 지내며 무르만스크 방어 및 북극 방어, 북극항로로 보내지는 랜드리스 보급선 보호, 독일-노르웨이 통신선 교란, 펫사모-키르케네스 공세를 지휘했다.

2.3. 전후

1946년엔 소련 해군 부참모장, 1947년에 소련 해군 참모장 겸 해군 제1부총사령관으로 지내다 1950년엔 총사령관 겸 해군 제1차관으로 임명됐다.

1951년 초, 해군 수석 감찰관 고르데이 레프첸코 제독이 해군부의 상황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제출했다. 내용은 해군장관 유마셰프 제독의 잦은 질병으로 인해 사실상 골로프코 제독이 해군부의 권력을 장악했지만 부서를 제대로 조직하지 못하고 중요한 안건들이 몇달째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내용들이었다.

1951년 해군 최고 군사회의가 열려 유마셰프 제독이 해임되고 쿠즈네초프 제독이 해군장관으로 재임명됐다. 골로프코도 비판을 들었지만 스탈린은 마지막에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결국 1952년 발트함대로 좌천당하고 1956년 1월부터 11월까지 발트함대 사령관을 지냈다.

1956년 11월 다시 소련 해군 부사령관으로 복귀했다.

1961년 10월 노바야제믈랴에서 진행된 차르 봄바 실험에 참여했다가 방사능에 피폭당했다.[6] 집에 돌아온 골로프코는 심장 통증을 호소했고 1962년 봄에는 숨을 못 쉬기 시작했다. 아내의 고집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병문안 온 아내를 볼때마다 "나를 집에 데려가 줘."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골로프코의 피부는 핏기가 빠진 거 같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백발로 세면서 노인처럼 변해갔다. 결국 같은 해 5월 17일 55세에 불과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아내에게 한 마지막 유언 역시 "집에 데려가 줘."였다.

3. 여담

  • 그를 기리기 위해 어드미럴 고르쉬코프급 호위함 3번함이 아드미랄 골로프코(Адмирал Головко)로 명명됐다.
  • 쿠즈네초프가 간첩혐의로 탄압당할 때 비난하는 것을 거부해 찍혔다는 말도 많다.[7] 실제로 구축함의 실패 테스트를 은폐했다는 혐의로 기소당했고, 자신도 징역을 받을 거라 생각해 감옥에 가져갈 짐을 꾸리고 체포를 기다렸으나 다행히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

4. 대중매체




[1] 1944년에 의료사고로 사망했다. 나중에 두번째 아내 키라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해 낙태수술을 하다가 사망한 것이라고 증언했으나 검증되지는 않았다.[2] 성별 구분이 없는 성씨.[3] 영화 배우다.[4] 아버지를 따라 해군에 입대해 대령까지 달았다.[5] 어머니를 따라 배우가 됐고, 나탈리야의 아들도 배우가 되어 3대 배우 가문이 됐다.[6] 당시 방사능의 위험성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대피소에서 나와 버섯구름을 직접 지켜봤다고 한다.[7] 골로프코를 북방함대 사령관으로 앉힌 게 쿠즈네초프라 명백한 쿠즈네초프 라인으로 평가받고 있어 더 그랬다.[8] 어째선지 성이 고로빈으로 개명되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