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Белостокско-Минское сражение Kesselschlacht bei Białystok und Minsk Battle of Białystok–Minsk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당시 사진 | ||
날짜 | ||
1941년 6월 22일 ~ 7월 3일 | ||
장소 | ||
비아위스토크, 민스크, 나바흐루다크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블라디미르 클리몹스키†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이반 볼딘 † | ]][[틀:깃발| ]][[드미트리 파블로프|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헤르만 호트| ]] [[틀:깃발| ]][[틀:깃발| ]][[귄터 폰 클루게| ]] [[틀:깃발| ]][[틀:깃발| ]][[하인츠 구데리안|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알프레트 슈트라우스 | ]][[틀:깃발| ]][[페도어 폰 보크| ]]
결과 | ||
소련의 대패, 나치 독일의 기록적인 대승 | ||
영향 | ||
소련이 폴란드에서 후퇴, 나치 독일이 폴란드 완전 점령 | ||
<colbgcolor=#c0c0ff,#334> 전력 | 약 67만 명 - 1야전군 - 3야전군 - 4야전군 - 10야전군 전차 1936대 | 약 75만 명 - 2기갑집단 - 3기갑집단 - 4야전군 - 9야전군 전차 4,522대 |
피해규모 | - 사상자 341,073명 - 부상 76,717명 - 전차 4,799대 손실 - 항공기 최소 1,177대 손실 | - 사상자 12,157명 - 전차 101대 손실 - 항공기276대 손실 |
1. 개요
1941년 독소전쟁의 서막을 연 전투. 이 전투로 소련군은 초전 박살나고 기나긴 고난을 겪게 된다.2. 전투 이전
1940년 프랑스를 완전 점령한 나치 독일은 더 이상 유럽에 영국 말고는 남은 적수가 없었다. 그러자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1940년 12월 OKH에 소련 침공계획 입안을 제시한다. 이렇게 등장한 작전이 바르바로사 작전이다. 작전 내용은 4개월 내 소련 주요 지역을 붕괴시키고 최종적으로 볼가 강 하구 아스트라한에서 백해 연안 아르한겔스크에 이르는 A-A라인까지 진출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의 시행을 위해 기타 추축국 지원 포함 400만의 병력이 동원되고 전차 3,300여대, 작전기 2,000여기가 투입되었다. 이후 북, 중, 남부 3개의 집단군으로 나누어 각각 레닌그라드, 폴란드와 모스크바,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한편 소련은 1939년 체결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을 바탕으로 동부 폴란드를 점령하였다. 그럼에도 소련은 언젠가는 독일과의 충돌이 불가피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군비 증강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전쟁 발발 직전 500만의 상비군, 18,000여대의 전차와 12,000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문제는 대부분이 구식 장비인데다가 1937년의 대숙청으로 주요 장교가 다 쓸려나가면서 지휘구조가 변변찮았다. 이는 1939년 겨울전쟁에서 여실히 드러났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저 조약만 철석같이 믿고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았다.
민스크 방향으로 전진한 중부집단군은 페도어 폰 보크 원수가 총 지휘를 담당했다. 작전의 주공으로 선정된 중부집단군에는 2개의 기갑집단이 배속되었고 항공지원을 담당한 제2항공군 또한 900기의 작전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한편 중부집단군을 상대할 소련군은 80만의 서부집단군이었다. 사령관 파블로프는 전력을 북에서 남으로 길게 편성해 배치하고 후방에 예비대를 배치하였다.
3. 전투 경과
6월 22일 새벽 3시 30분 공격이 개시되었다. 동프로이센에 배치된 헤르만 호트의 제3기갑집단이 비아위스토크[1]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비아위스토크는 소련 제3군과 10군의 연결고리임과 동시에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당시 이곳은 소련 제11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술한 것처럼 노후화된 장비와 지휘 체계의 엉망으로 전력 운용은 완전히 실패했다. 결국 11군은 네만 강을 건너온 독일 제3기갑집단에게 완전히 절단되었다. 한편 남쪽 부크 강 일대로는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이 소련 제4군을 갈아버리고 무려 60km를 전진해 나바흐루다크[2]까지 접근하였다. 잔존 소련 전력은 독일의 제4, 9군이 밀어버렸다.
23일, 소련 제10군이 약간의 반격을 시도했지만 별 영향은 없었고 24일이 되자 독일군은 비아위스토크 바로 앞까지 전진하였다. 이때 소련 서부전선군 사령관 파블로프는 전 병력을 동원해 방어가 아닌 공격에 나선다.하지만 소련군은 별 힘도 쓰지 못하고 독일 제4, 9군에게 비아위스토크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뒤늦게 파블로프는 흐로드나 쪽으로 전력을 집중해 반격에 나섰지만 소련군의 피만 흐를 뿐이었고 간신히 극소수 병력만 민스크로 퇴각했다.
25일 독일 제2기갑집단이 슬로님과 바우카비스크 연결선을 차단하자 파블로프는 사차하라 강 방면을 통해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그사이 27일 제2기갑집단은 신속히 이동해 제3기갑집단과 함께 민스크 동쪽을 싹 쓸어버렸다. 당시 민스크에는 제3, 13군이 집결해 있었으나 기타 병력이 갈려나가는 걸 보면서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렇게 비아위스토크에는 소련 제10군이, 민스크 일대에는 소련 제3, 13군이 고립되고 말았다.
스탈린은 이러한 사실을 개전 후 3일만에, 그것도 독일 선전방송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뒤늦게 현지 사수 명령을 끊임없이 내려보냈다. 하지만 이미 병력손실이 너무 컸던 서부전선군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6월 30일 최후의 공격을 개시했지만, 아무런 변화는 없었고 민스크는 완전히 점령되었다. 그렇게 7월 3일이 되자 남은 30만의 소련군은 백기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