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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국기 | 국장 | ||
<colcolor=#ffffff> 1939년 ~ 1945년[1] | |||
<rowcolor=#ffffff>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폴란드 제2공화국 | 우크라이나 SSR | ||
폴란드 임시정부 | |||
<colbgcolor=#666> 위치 | 폴란드,우크라이나[2] | ||
수도 | 1939년 10월 12일 ~ 1939년 11월 4일: 리츠만슈타트 1939년 11월 4일 ~ 1945년 1월 19일: 크라카우 | ||
정치체제 | 군정 | ||
언어 | 독일어[공식],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이디시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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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침공 이후 설립된 나치 독일의 군정청이다.2. 상세
폴란드가 나치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된 후, 나치 독일이 점령한 지역은 다시 폴란드 서부[4]와 총독부 관할구역으로 구분되었다. 이 중 폴란드 서부는 나치 독일에 편입되었다. 나치 독일은 자신들이 점령한 폴란드 지역의 폴란드인들을 추방하거나 2등 국민으로 취급했다. 폴란드인들은 공공장소를 이용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폴란드인들이 이용하던 거의 모든 교육기관들이 폐쇄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대학 역시 폐쇄되었으며, 대학 교수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 외 정치, 문화, 과학, 예술 등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조직들이 해체되었다. 폴란드인들에게는 기초 노동에 필요한 초등 교육 정도만이 허가되었다.점령 초기 3달 동안 6만 1천여 명[5]에 이르는 폴란드 정치인, 폴란드군 장교, 경제인, 성직자, 지식인들이 처형되었고 그 중 1천여 명은 전쟁포로였다. 독일 국방군, 슈츠슈타펠, 게슈타포, 자위단(Selbstschutz) 모두 폴란드인들에 대한 학살에 가담했다. 포모제(Pomorze) 지방에서만 2만 3천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 이후에도 AB조치(AB-Aktion)가 행해져 1940년 봄부터 여름까지 3만여 명의 폴란드인들이 체포되어 그 중 7천여 명이 학살당했다. 독소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7월에는 르부프(Lwów)의 대학 교수 25명과 그의 가족들도 학살되었으며, 그 중에는 전(前) 폴란드 총리 카지미에시 바르텔(Kazimierz Bartel)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9년 1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바르샤바 인근의 팔미리(Palmiry) 숲에서는 1,700여 명의 폴란드 지식인들이 처형되었다. 이러한 학살의 목적은 폴란드 민족을 말살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종전시까지 폴란드의 의사의 45%, 판사와 변호사의 57%, 교사의 15%, 대학 교수의 40%, 고급 기술자의 50%, 초급 및 중급 기술자의 30%, 성직자의 18%가 학살당했다. 가톨릭 성직자들도 3천여 명이 학살당했다.
나치 독일이 자국 본토로 편입시킨 폴란드령에서는 폴란드인들에 대한 혹독한 동화정책과 강제이주가 행해졌다. 대략 250만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이 총독부령으로 추방되었으며, 그 자리를 130만 명의 본토 독일인들이 차지했다. 남은 폴란드인들은 학살당하거나 독일의 강제 동화 정책에 희생되었다. 한편 총독부령은 5개 구역(바르샤우, 크라카우, 라돔, 루블린, 갈리치엔[6])으로 나뉘었다. 폴란드인 탄압정책 중 가장 괴상한 것으로는 정책적으로 폴란드 어린이들을 납치한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렇게 납치된 아이들의 숫자가 20만에 이르렀다. 자모시치(Zamość) 지역에서만 3만여 명이 납치되어 이 중 4,445명이 독일화를 목적으로 독일 본토에 이송되었다. 독일 당국에 납치된 어린이 중 수만여 명이 강제노동에 혹사당해 사망했다. 그 중 다시 폴란드로 돌아온 이들은 15~20%에 불과했다.
폴란드인들은 나치 독일에게 있어 식민지 주민이자 노예이었으므로, 폴란드인들은 모든 편의를 독일인에게 먼저 양보해야했다. 폴란드인과 폴란드 유대인들이 경영하던 모든 사업체가 독일인들에게 접수되었다. 정류장과 버스, 기차에서도 폴란드인들은 맨 뒤쪽 칸을 이용해야만 했고, 필요시에는 독일인에게 양보해야 했다.[7] 성인은 제복을 입은 독일인에게 경례를 해야 했고, 상점주인들은 독일 손님들을 먼저 응대해야만 했다. 식량이 배급될 때도 폴란드인들은 독일인들보다 적은 양을 배급받았다. 독일인들은 1일 배급량이 2,310칼로리에 달했지만, 폴란드인들은 654칼로리에 불과했다. 총독부 내에서 폴란드인보다 식량을 적게 배급받은 민족은 유대계뿐이었으며, 이들은 독일인들의 1/10에도 못 미치는 184칼로리를 배급받았다.[8] 심지어 가죽 가방마저 사용을 제한받았으며, 프레데리크 쇼팽의 음악을 연주하면 처형당했다.
또한 나치 독일의 관할인 (폴란드)[9] 총독부에서는 점령 내내 폴란드인들을 강제로 독일에 이주시켰는데, 이는 독일에서 강제노동에 동원하기 위함이었다. 약 150만 명의 폴란드인들이 독일 영내로 끌려가, 대개는 나치 독일의 열악한 대우와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죽어나갔으며, 이렇게 빈 자리가 생기면 또 다른 폴란드인들이 들어왔다. 이렇게 수천명의 폴란드인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 지역 외에 폴란드 본토에서도 폴란드인들 가운데에서 강제 노동을 위한 인원이 계속 선발되었고, 독일 지역과 비슷한 이유로 또 많은 폴란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폴란드인들과 유대인들이 의약품과 식량 부족으로 인해 사망했으며, 정신질환자들은 특히 집중적으로 학살되었다.[10] 독일의 가혹한 통치로 인해 600만 명의 폴란드인과 폴란드 유대인들이 사망했는데, 특히 폴란드 유대인들은 335만 명에 이르던 전전 인구 중 90% 가까이 학살당했으며, 이 때문에 폴란드는 2차 대전 기간 동안 유대인 사망률이 가장 높은 국가였다. 그리고 600만 명이라는 숫자도 알고 보면 폴란드인과 유대인만 계산한 것이고, 그 밖의 소수민족 희생자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가혹한 통치로 인해 폴란드의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지하 레지스탕스 활동이 벌어졌으며, 이 저항운동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반나치 레지스탕스 중 가장 거대한 세력을 자랑했다. 폴란드 저항군 중 공산주의 계열을 제외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런던에서 항전하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지지했다.
3. 영역
1939 ~ 1941 | 1941 ~ 1944 |
[1] 1944년에 폴란드 해방을 선언했고 바르샤바가 함락된건 1945년이기에 사실상 1944년 까지 유지되었다[2] 1941년 후에 현재의 우크라이나 일부도 추가되었다.[공식] [4]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독일 제국 영토였다가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이 폴란드에 할양한 지역은 모두 여기에 속했다.[5] 이는 독일 측이 기록한 것으로, 실제 수치는 10만여 명에 이른다고 본다.[6] 1941년 독소전쟁 발발 후 추가되었다.[7] 그나마 폴란드인들은 나은 경우였고, 유대인은 이런 것들을 아예 사용할 수 없었다.[8]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밀수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가슴아픈 일화가 하나 있다. 게토의 담장에 파인 개구멍으로 유대계 소년들이 몰래 식량을 반입하다가 독일 경찰에 체포당했다. 이 독일 경찰은 지나가던 폴란드인을 불러 이 유대인들을 다리로 떨어뜨리라고 명령했고,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 폴란드인은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따랐고, 죄책감으로 자살했다.[9] 나치가 폴란드 민족말살정책을 위해 지은 정식명칭은 폴란드를 빼고 그냥 총독부(Generalgouvernement게네랄고우퍼네멘트)로 지었다.[10] 나치 독일은 T4 작전으로 자국의 정신질환자들도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