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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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개괄적인 역사 | 2010 상하이 엑스포에 제출된 폴란드 역사 애니메이션 한국어 설명 | 960년 폴란드 공국의 건국부터 현재까지의 폴란드 역사를 다룬 타임맵 |
폴란드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2. 슬라브족 이전
슬라브족이 폴란드 땅에 살게 된 것은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절에 슬라브족들이 게르만족들의 뒤를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폴란드 땅에는 켈트족, 게르만족, 발트족이 살고 있었다. 원래 슬라브족 자체가 폴란드보다는 벨라루스의 남동부와 우크라이나와 드니프로 강 부근에 살았던 민족이다.켈트족은 현 폴란드의 남쪽 끄트머리 산악지대[1]에, 발트어족은 현 폴란드의 북부를 중심으로 거주하였고 이 중 동프로이센[2]에 거주하는 발트어족 외에는 상당수가 슬라브족의 이주 과정에서 흡수되었다. 게르만족은 폴란드 서부를 중심으로 거주하였다. 이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거나 슬라브족에 동화되었다.[3]
3. 건국 전설
옛날에 레흐, 체흐, 루스란 형제가 있었다. 어느 날, 각자의 길을 떠나 나라를 세우기로 하였다. 루스는 동쪽으로 가서 러시아를 세우고, 체흐는 남쪽으로 가서 체코를 세웠다. 하지만 레흐는 결정을 못하고 그냥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그는 큰 나무를 보았는데, 그 위에서 크고 하얀 독수리가 둥지를 틀고 새끼들에게 먹이를 먹이는 걸 보았다. 독수리가 반갑다며 석양을 등지고 날개를 크게 펼치며 아는 척을 하였다.레흐는 아래서 쳐다보니 크고 아름다워 이 세상 새가 아닌거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보니 광활한 평야, 비옥한 흙, 그리고 맑은 시냇물을 보니 이곳을 낙원이라 생각, 그는 그곳에 깃발을 꽂고, 둥지라는 뜻을 가진 수도를 만들었다.[4] 이 전설은 1295년에 발간된 폴란드 중세 연대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폴란드 국장의 백수리와 붉은 바탕은 이때 레흐가 본 수리와 석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슬라브 삼형제 신화는 저 멀리 페르시아까지 전해져 한때 폴란드를 레흐의 땅이라는 뜻의 레흐스탄이라 부르기도 했다. 비엘코폴스카 연대기에서는 판노니아의 왕 판(Pan)이 슬라브족들의 조상이며, 레흐와 루스와 체흐는 판의 아들인데 레흐가 막내고 체흐가 장남이었다고 한다.
4. 폴란드 왕국 / 피아스트 왕조
미에슈코 1세(Mieszko I)와 기독교 국가가 된 폴란드[5] |
미에슈코 1세가 966년에 가톨릭을 받아들인 이래, 992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Bolesław I, 967 ~ 1025, 재위 992 ~ 1025)의 왕위 등극부터 폴란드 왕국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볼레스와프 1세는 동서남북으로 왕국의 영토를 넓혀나갔다. 그는 키예프 대공국과의 전쟁에서 승전하여 영토를 넓히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그의 별명이 용감왕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고(1004년 ~ 1018년. 중간에 몇 번 쉬었지만, 그래도 10년 넘게 전쟁이 이어진 셈) 12세기에 벌어진 내란으로 나라가 쪼개졌으며(분할 공국시대, 1138 ~ 1320) 뒤이어 벌어진 몽골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느라 국가가 황폐화 되었다. 폴란드의 악몽인 레그니차 전투도 이때의 일. 이렇게 국력을 소모하며 지내던 폴란드는 내부의 결합을 필요로 하게되고 14세기 초반부터 폴란드 역사상 첫번째 왕조인 피아스트 왕조의 '브와디스와프 1세'(Władysław I, 1260 ~ 1333, 재위 1320 ~ 1332)를 중심으로 통일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북쪽의 독일 기사단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압박을 막아내면서 폴란드를 계속 통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자신의 아들 카지미에시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망한다.
폴란드가 본격적으로 강대국으로 뜨기 시작한 것은 '카지미에시 3세'(Kazimierz III , 1310 ~ 1370, 재위 1333-1370)가 폴란드를 통치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미에슈코 1세 사후 그의 아들 볼레스와프 1세가 사방팔방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폴란드의 위용을 자랑하기도 했지만 이후 폴란드가 분열 지경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몽골이 동쪽에서부터 침공해 왔기 때문에 방어했으나 나라의 국력을 다 써버렸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성기는 바로 카지미에시 3세부터 시작한다. 카지미에시 3세는 정치, 행정, 외교, 군사, 경제, 문화 각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그는 '카지미에시 3세 대왕(Kazimierz III Wielki)'으로 불리기도 한다. 폴란드판 세종대왕이라 보면 될 듯.
5. 폴란드 리투아니아 동군 연합 / 야기에우워 왕조
야드비가(Jadwiga)와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Władysław II Jagiełło) |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1410년 그룬발트 전투를 통해 독일 기사단국을 철저히 박살내버렸다. 초반에 리투아니아 기병대가 독일 기사단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패주하며 후퇴했고, 그 뒤를 독일 기사단이 따랐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숲에 매복했던 폴란드 군대가 리투아니아 군대를 돕기 위해 나타났고, 결국 독일 기사단은 산산조각나며 괴멸당했다. 39,000여 명에 이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 맞서 27,000여 명에 이르는 독일 기사단은 8,000여 명의 전사자와 14,000여 명의 포로라는 엄청난 피해를 내며 묵사발이 났고, 전사자 중에는 독일 기사단장 울리히 폰 융잉엔(Ulrich von Jungingen 1360~1410)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과 1,400여 명만이 그단스크(단치히)로 도망쳐 들어갔을 정도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독일 기사단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독일 기사단의 명예와 영향력은 땅에 떨어져버렸고 1460년에는 무역의 황금알인 그단스크까지 폴란드에 빼앗겼다. 그리고 1454 ~ 1466년의 13년 전쟁을 통해 완전히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에 복속된다.
6. 동유럽의 대국이 되다
빈 전투(1683년)에서 돌격하는 윙드 후사르 |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독일 기사단국을 속국으로 만든 후 세력을 크게 불리기 시작했다.[9] 1480년에는 킵차크 칸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벌이던 모스크바 대공국[10]의 뒤통수를 치며 킵차크 칸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독일 기사단국과 싸우느라 킵차크 칸국을 도울 수는 없었다. 독일 기사단국은 이미 폴란드의 속국이었지만, 계속해서 독립을 시도하였다. 이때의 전쟁은 독일 기사단국의 독립 의지를 완전히 꺾기 위한 전쟁이었다.
카지미에시 4세 시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야기에우워 왕가는 가장 드넓은 영토를 자랑했고 아들을 통해 헝가리-보헤미아를 별도의 왕국으로 다스리기도 했다.[11] 러시아와의 전쟁을 말아먹으면서 동부 영토의 1/3을 날려먹고 말았다. 이후 중흥을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발전하였고,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시기에 단순한 동군연합이 아닌 단일 연합국가로 통합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지그문트 2세 사후 개시된 선거왕 시대(1569-1795) 시기에 자유 선거(Wolna Elekcja)를 통해 안나 야기엘론카와 공동 군주로 선출된 '스테판 바토리'(Stefan I Batory, 1533-1586, 재위 1576-1586.)[12]는 그단스크의 반란을 철저히 진압하였다. 이 양반이 반란을 어떻게 진압했냐면, 6배의 그단스크 군(폴란드 군 2,000 vs 그단스크 12,000)을 거의 학살 수준으로 이겨버리고(그단스크 군 4,500명이 전사하고 5,000명은 포로) 다음으로 그단스크 장기 포위전에 들어가서 항복을 받아냈다. 다음으로 그는 과거 반역을 일으켰던 카자크 헤트만 사무엘 즈보로프스키도 참수하였고(...) 주요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후 그는 폴란드 역사상 최고의 재상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 1542 ~ 1604)의 지원을 받아 이반 뇌제의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에서 승전, 동부 영토의 일부를 되찾았다. 이후 지그문트 3세 바사 치세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중요한 영토였던 스몰렌스크도 되찾았다. 지그문트 3세는 무능했지만[13]대신 그의 유능한 부하들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지그문트 3세가 일으킨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고 덤으로 외국의 침략까지 격퇴해 내면서 폴란드의 위용을 계속 떨쳤다. 그 유명한 윙드 후사르의 활동 시기 역시 바로 이때의 일이다.[14]
163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최대 영역[15] |
루스 차르국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적극 개입하여 루스 차르국의 차르를 바꾸기도 하였고, 1611년에는 클루쉬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모스크바까지 함락시켰다. 얼마 안 가 쫓겨나기는 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 영토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뻗어있던 동유럽의 강국이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을 막아내는 가톨릭의 방패요, 유럽의 방파제였다. 1683년의 빈 전투에서는 폴란드군 윙드 후사르의 결정적인 돌격으로 승패가 결정되었다. 빈 전투의 승리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을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하필 리투아니아와 연합하고 있을 때가 전성기라서, 폴란드까들은 폴란드가 대단한 게 아니라 리투아니아의 도움 덕이라며 폄하하기도 하지만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와 연합한 이유는 동쪽 모스크바 대공국의 압박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또한 두 나라의 국력차를 고려할 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폴란드가 주도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리투아니아 왕이 폴란드 여왕과 결혼한 동맹 국가여서 리투아니아 귀족도 폴란드 귀족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문제는 반 폴란드 성향의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폴란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폴란드에서 군대를 일으켜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실 리투아니아인들은 지금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마냥 전성기라고 좋아하진 않는다. 남유럽으로 치면 이베리아 연합이 형성될 당시 포르투갈 왕국 귀족들은 이를 기뻐했지만 훗날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각종 차별을 받은 것 때문에 현대 포르투갈인들이 이베리아 연합 시절을 좋게 평가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포르투갈 왕국이 무력을 통해 스페인으로 독립한 것과 달리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또다른 외세들에 의해 폴란드 왕국과 함께 멸망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폴란드로부터 독립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6.1. 귀족 공화정은 망국의 원인이었는가?
6.1.1. 아니다
흔히 세간에서는 만장일치가 아니면 제대로 된 결정을 못 내리는 귀족 공화정 체제 자체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몰락의 주 원인으로 지적하지만, 되려 귀족 공화국 체제가 가장 활발하게 작동한 17세기 초반이야 말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최전성기였다. 나라 자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만장일치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럭저럭 지배 계급의 이해가 일치하기 마련. 게다가 귀족 공화국 체제는 단순히 귀족들이 이거 저거 다 해먹는 게 아니라, 당시로는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이었던 인권 사상, 피지배자의 권리 등을 바탕으로 한, 나름대로 이념적 토대가 있었던 체제였기도 하다. 폴란드가 괜히 유럽 최초로 성문화된 헌법을 제정한 나라가 아니다.지리적, 사회적으로 비슷한 처지였던 폴란드 왕국과 헝가리 왕국을 비교해보면 나름 장점도 분명하다. 중세 폴란드 의회는 자국 내 유대인들과 독일인들의 권리를 안정적으로 보장하였던 것에 비해, 같은 시대 헝가리 왕국은 현금이 필요하면 유대인들의 재산을 압수한 후 추방했다가 다시 유대인 박해정책을 해제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국 내 상공업 기반이 더 취약해졌다. 또한 헝가리 왕국은 강력한 군주가 즉위했을 때는 나라가 정상적으로 돌아갔을지는 몰라도 능력이 부족한 군주가 즉위했을 때 나라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무너졌지만, 폴란드의 경우 귀족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힘을 합쳐 여러차례 외세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무엇보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란 국가 자체가 토후들의 정치적 연맹을 토대로 생긴 국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적, 정치적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고 다른 유럽 국가들 따라 중앙 집권화를 추진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 중세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확장 과정에서 현지 유력자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과정을 통해 급속히 영토를 확장하였던 바 있었다. 앞에 설명한 지그문트 3세와 브와디스와프 4세가 다른 유럽 국가식 중앙 집권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대대적인 귀족들의 반란만 맛보고 삽질만 했다. 지그문트 3세의 경우 왕당파 대귀족이자 뛰어난 헤트만으로 유명했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분쇄하기는 했으나, 지그문트 3세는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결국 반역자들을 사면하고 말았다.
세임이 귀족계급의 기득권 강화에 집착하였던 것도 나름 이유가 있다. 전근대 동유럽 평야지대는 유럽 외부의 유목민 세력의 지속적인 침략 등의 이유로 농사지을 토지는 남아도는데 농업에 종사할 인력은 만성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이 농노들의 권리를 대폭 제한하고 토지에 묶어두는 정책은 비인간적이기는 해도 당시로서는 별 다른 대안이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6.1.2. 그렇다
폴란드 귀족공화정은 17세기 초반 이해 폴란드가 겪은 수많은 내우외환의 토대를 제공한 책임이 있다. 귀족공화정은 시민, 농민, 정교도 등을 억압하여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민족들을 아우르는 데 실패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려 농민이나 시민들의 권리를 외면했다. 농민들에게는 1주일에 8인일의 부역이 요구되고 영주재판권이 유지되었으며[16], 자국 농민과 도시민이 외국과 무역하는 것은 제한하는 조치로 인해 그단스크의 독일인/르비우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해외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렇듯 당시 폴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견고한 농노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상공업이 매우 부실했다.이미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 입장에서는 루블린 조약 전후로 르비우의 정교회 신도들이 "르비우 형제단"이라는 이름의 자치조직 건설을 시도하고 자신들의 권리 신장을 내세우고, 정교회 신도들을 동방 가톨릭 교회로 강제개종시키는 정책에 저항하자 이를 누르기 위해 고생한 적이 있었다. 폴란드인 귀족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국 내 피지배 계층이 성장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위협하는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싹을 자르는 것이 급선무였다. 폴란드는 세임을 통해 혈통적, 문화적 거리감을 초월하여 하나의 '귀족' 이른바 "사르마트인"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세임은 모든 사회 계층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국민'으로 만들어 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특히 귀족층이 주도하는 입법부가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행정부와 사법부를 입법부가 통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부 폴란드 역사가들은 대홍수 당시 스웨덴군에 대한 민중봉기를 이유로 들며 당시 농민들도 폴란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스웨덴군의 약탈과 학살로 인해 발생한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 "종교 신도로서의 연대의식"과 "같은 언어와 역사를 공유하는 민족으로서의 연대의식"은 별개이다. 그렇다고 세임을 통해 뭉친 폴란드 귀족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항상 충성하였을까? 폴란드 분할 이후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대홍수 당시 스웨덴 측에 가담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을 민족 반역자들이라고 비판하지만, 당시 스웨덴군에 가담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은 스웨덴-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통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실권 회복을 노렸던 귀족들로 이들 나름대로 다른 민족주의적 명분이 있었다.[17] 전근대 유럽 국가에서는 국적보다는 계급이 중요하였고, 스웨덴 국왕을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이 모시는 과정은, 이미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해주기만 하면 아주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귀족공화정의 문제는 단순히 왕권과 귀족권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강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중앙집권화의 문제였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중앙집권화를 달성하지 못한 나라가 성공한 나라를 상대로 우위를 점했던 적은 거의 없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폴란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폴란드의 귀족들은 폴란드라는 하나의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다스리는 영지에서 어느 정도의 수익을 올릴지만을 탐닉하느라 바빴다. 다른 나라도 중앙집권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시기에는 이 상태로도 유럽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으나,[18] 시대가 변하면서 다른 나라들이 중앙집권화를 달성한 뒤에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즉, 귀족공화정이 전제군주제보다 우월해서 폴란드가 최강국으로 군림한 게 아니라, 그냥 다른 나라도 다 비슷하게 왕이 귀족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귀족공화정이 폴란드의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허나, 시대가 흐르면서 분열되었던 러시아는 강력한 제국으로 재탄생했고, 프로이센은 주변의 다른 독일 도시 국가들을 집어삼키며 제국으로 거듭날 왕권을 구축했고, 오스트리아는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통수까지 쳐대던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강력한 황권을 가진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변모하여 패권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허나, 폴란드의 정치 체제는 시대의 흐름을 못 따라갔으며, 그에 따른 부실한 중앙권력으로 인해 국론의 통일조차 힘든 상황이었고, 귀족공화정을 위시한 기득권 세력들이 너무나도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탓에 개혁을 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중앙집권화가 중요한 것은 그게 실질적으로 작용했느냐 이전에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봉건영주들의 사유물이 아닌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가가 형성의 기반을 놓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때문에 당시 폴란드가 유럽의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중앙집권화가 필수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지그문트 3세와 브와디스와프 4세의 개혁은 폴란드라는 나라의 국익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다. 비록 그게 실패로 끝나면서 폴란드의 역량만 깎아먹은 삽질이 되기는 하였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이다.
그리고 폴란드가 토호들의 정치적 연맹을 바탕으로 세워져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건 어차피 불가능했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당장 초기 유럽 국가들 중에서 토호들이 연맹해서 세우지 않은 나라가 더 드물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제후들이 왕권을 무시하고 저지른 짓거리만 봐도 프랑스는 노르망디 공작이 프랑스 국왕을 쌩까고 자기 멋대로 잉글랜드를 침공해 노르만 왕조를 세웠고, 신성 로마 제국의 잘리어 왕조는 제후들이 배신을 때린 탓에 황제가 교황한테 무릎을 꿇어가며 빌기까지 해야 했다. 러시아는 한 술 더 떠서 세임과 마찬가지로 귀족의회(Боярская дума)가 존재하면서 도시 국가 연맹체적 성격이 있었고[19] 이반 뇌제 이후에는 황가의 핏줄이 끊어지면서 혼란 시대라는 막장 시대까지 겪었다. 폴란드가 러시아를 침공해 모스크바를 점령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즉, 토호나 제후들의 입김이 강했던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딱히 폴란드만이 특별한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문제가 있다면 폴란드는 이러한 귀족들의 특권을 공화정이라는 형태로 고착화시키면서 왕이 왕 노릇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세력이 미미하게 되었고, 이게 계속 유지되면서 중앙집권화를 할 엄두도 못 내게 되었다는 거다.
7. 대홍수와 연방 쇠퇴
17세기 후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연주황색이 상실한 영토이다.(1657년 ~1686년) |
폴란드의 전성기는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코사크 대반란이 시작되면서 막을 내렸다. 코사크의 봉기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한때 우크라이나 전역을 상실하고 코사크의 자치권을 인정해야만 했다. 코사크의 반란은 1651년 베레스테츠코(Beresteczko)에서 폴란드군이 카자크-타타르 연합군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겨우 진정되었으나, 이 봉기에서 엄청나게 많은 정예병이 희생되었고, 또한 국력이 계속 소모되어 결과적으로 대홍수(Potop) 시기를 맞이하였다. 폴란드에게 패배한 코사크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해 왔고,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가 직접 공격에 나서면서 폴란드는 순식간에 국토 절반이 점령당했다. 이후 스웨덴도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손잡고 함께 침공해 오면서 나머지 절반을 점령해 폴란드는 거의 패망 직전에 이르렀지만, 폴란드 농민과 귀족들 너나할 것 없이 스웨덴의 폭압적인 지배에 민중봉기를 일으켰고, 타타르가 폴란드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폴란드와 종교가 다른 세력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가톨릭에 기반한 폴란드 민족정체성의 맹아가 이때에 생성된다.
폴란드군은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파베우 얀 사피에하, 얀 소비에스키,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 등 명장의 지휘를 받아 스웨덴군과 브란덴부르크, 루스 차르국 등에 맞서 여러 번의 승리를 거두었고, 1657년 벨라우 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 공국을 독립시켜 브란덴부르크와의 전쟁을 끝내고, 1660년에 올리바 조약을 체결하여 리보니아의 영유권과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의 스웨덴 왕위 계승권 주장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스웨덴과의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아직 러시아와의 전쟁이 남아있었다. 폴론카(Polonka), 류바르(Lyubar), 바시아(Basia) 강, 추드니우(Chudniv) 등에서 폴란드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 막판에 흘루키우(Hlukiv) 공방전에서 타타르가 발을 빼고 계속된 전쟁에 지친 리투아니아군이 후퇴하는 등 군대가 붕괴하면서 다 말아먹고 말았다. 러시아와의 전쟁은 1667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양측 모두 엄청난 피를 흘린 끝에 1668년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끝맺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폴란드는 전체 인구 중 1/3이 사망하거나 외국에 편입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무엇보다도 프로이센의 독립에 더해 리보니아와 스몰렌스크, 키유프 등 폴란드 변경의 주요 부분들이 다 날아가버려 정치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전성기만 해도 그럭저럭 지배층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여 제대로 작동하던 귀족회의도 나라가 망조가 드니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침투에 넘어가 이후로는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재위 시절 빼고는 나라 정치 자체가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8. 폴란드 분할과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치하
1764년 분할 직전의 폴란드. |
1773년 ~ 1795년 폴란드 분할과 멸망. |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무서워졌다. 1772년에 폴란드에 살던 온갖 민족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개입함으로써 1773년 8월 영토가 쪼개졌다. 물론 친러파가 가득한 의회의 동의를 얻은 조치였다. 당시 폴란드 의회의 의원 타데우시 레이탄(Tadeusz Rejtan)이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분할안의 통과를 막는 데에는 실패했고, 이후 그는 울분에 휩싸여 자결했다.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는 영국의 입헌군주제에 상당한 이해를 갖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국가를 이끌기에 충분한 지성과 근대적 능력을 갖추고 있던 개념있는 양반이었다.[20] 스타니스와프 2세는 기사학교(Szkola Rycerska)의 설립안을 가결시켜 이곳에서 수많은 개혁 청년과 엘리트들을 양산해내었고, 세계 최초의 교육부인 '국민교육위원회'의 설치안도 가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1차 분할 이전에 폴란드에 관세 제도를 도입하여 외국 물건에 대한 관세를 매겨서 자국의 산업 보호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휴고 코원타이,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츠, 안제이 자모이스키, 아담 카지미에시 차르토리스키, 스타니스와프 마와호프스키, 이그나치 포토츠키 등 열렬한 개혁가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폴란드를 개혁했고, 1788 ~ 1792년에는 위대한 4년 세임을 개최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791년 5월 3일 가결된 '5월 헌법'으로 세계사에서 2번째(미국 다음), 유럽에서는 최초로 가결된 성문헌법이었다. 182명의 세임 의원들의 서명을 받은 5월 헌법은 입헌군주제와 세습군주제, 국왕의 자유도시, 종교의 자유, 귀족에 대한 과세(10%의 소득세)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또한 농민들은 귀족들의 자의적인 재판을 당하지 아니하며 국가가 이들을 보호하고, 도시민들에게 토지 구입을 허용하며, 농노제가 소작제, 즉 계약제로 전환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는데, 소작제는 전적으로 귀족과 농민 모두의 동의를 받은 상태에서 행해야 했다. 농민들은 원한다면 도시로 떠날 수도 있었다. 문제가 많은 자유 거부권을 폐지하고 의회에 2/3 다수결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의회에 외국에 대한 전쟁 선포와 화폐, 공채 등 대외적, 대내적 정책에 대한 가결과 부결의 권리를 맡겼다. 슐라흐타의 국왕 선출권을 박탈하여 포니아토프스키 가의 세습 군주제를 명확히 하기도 했다. 여기에 왕의 조카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의회 내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고, 일체의 자유 거부권이 무시되는
하지만 이것을 빌미로 1793년에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폴란드는 맞서 싸웠지만 러시아는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고, 결국 1793년 다시 한 번 영토가 분할된다. 최전성기에 1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면적을 자랑했던 폴란드의 영토는 이제 21만 제곱킬로미터로 축소되었으며, 왕국은 37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795년에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이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의 대(對) 러시아 봉기를 철저히 탄압했고, 1795년에는 세 번째 분할이 이루어져 폴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때부터 눈물없이 보기 힘든 폴란드의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21] 헌법이 생긴 지 고작 4년 만이었다.
독립을 위해 프랑스 혁명정부와 협력했던 폴란드 군단의 공로로 나폴레옹이 폴란드 분할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병합한 영토를 토해내게 하고 그 자리에 바르샤바 공국을 세운 기간 동안 잠시 괴뢰국으로나마 독립하였다. 그러나 빈 회의의 결과 바르샤바 공국은 또 다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게 분할되어 지도에서 사라졌다. 프로이센의 서프로이센과 포젠 대공국, 러시아의 폴란드 입헌왕국[22],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크라카우 대공국으로 분할되어 삼국의 치하에 놓였다. 폴란드인들은 11월 봉기, 1월 봉기, 크라쿠프 봉기, 포즈난 봉기 등 수많은 봉기를 일으키면서 삼국의 폴란드 지배를 거부하였으나 삼국은 이들을 철저히 탄압하였다.[23]
빈 체제의 등장 이후 베르사유 체제까지의 자세한 역사는 크라쿠프 자유시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포젠, 폴란드 입헌왕국과 프리비슬린스키를 참조.
9. 폴란드 제2공화국
1차대전 말기의 폴란드 섭정왕국.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분할 점령한 괴뢰국이었다. 청록색이 독일령, 연두색이 오스트리아-헝가리령. |
1919년 독립 직후의 폴란드. 아이보리색이 당시의 영토다. |
Unconquered: Trying Times |
100년의 세월이 지나 1차대전이 발발한 후 1915년에 동맹국이 프리비슬린스키를 점령하였고 위와 같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공동으로 지배했다. 1차 대전에서 폴란드인 150만 명이 동맹국(독일-오스트리아)과 협상국(러시아)에 소속되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동맹국이 항복하면서 1918년 11월 11일 폴란드는 123년만에[24] 폴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폴란드 역사에서는 이를 '폴란드 제2공화국'이라 한다. 폴란드의 민족영웅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폴란드의 총통(Naczelnik Państwa)이 되었다.
한편 소비에트 러시아는 1918년 11월 1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파기를 선언, 그 직후 유럽을 공산화할 목적으로 동유럽의 모든 신생국들에 대해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로 알려진 대대적인 침공을 단행한다. 피우수트스키는 동유럽의 다른 신생국가들과 편먹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1919년 2월 베레자 카르투스카의 붉은 군대를 공격, 이로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한다. 그해가 가기 전 폴란드는 빌뉴스와 민스크를 점령했다. 이후 1920년 초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원조를 요청하자 동맹을 체결[25], 5월에 키이우를 점령하는 등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는 미하일 투하쳅스키 지휘 하에 반격을 개시, 빌뉴스와 민스크, 키이우를 모조리 재점령하고 역으로 폴란드를 밀어붙였다. 8월에는 바르샤바까지 붉은 군대가 진격했으나, 피우수트스키의 지도 하에 폴란드군은 기적적으로 비스와 강에서 붉은 군대를 대파, 폴란드 영내에서 붉은 군대를 몰아냄으로써 국가 존망의 위기를 넘겼다. 1921년 3월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는 리가 조약을 체결, 이로서 벨로루시 서부와 우크라이나 서부는 폴란드령이 되고 나머지는 소련령이 되었다.
폴란드의 괴뢰국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 지도 중앙의 초록색. |
폴란드의 민주정은 1926년 5월 피우수트스키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너뜨렸다. 피우수트스키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진 않았으나 군부총감으로 군사력을 휘어잡고 배후에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부리듯 군림했다. 게다가 차기 외무장관 및 다른 정부 요직도 죄다 그의 부하들이나 인맥이 독점했다. 반대파들은 탄압당했고, 일부는 정치범수용소[27]에 갇히기도 했다. 그가 죽고 나서도 유제프 베크(Józef Beck) 외무장관을 비롯한 부하들이 권력을 이어받고 반대파를 제거하며 정치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나치당이 정권을 잡았고, 이후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으며,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켰고, 마침내 주변국들을 차례로 합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불가침 조약의 조건이 폴란드 분할이었다.
10.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과 독소 분할
1937년의 폴란드 인구 분포. |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른 폴란드의 분할선(실선)과 폴란드 침공 이후 조정에 따른 분할선(굵은 점선). |
폴란드는 1939년에 독일과 소련에게 거의 동시에 침공을 받아 분할 점령되었다. 독일 점령 지역에는 총독부가 들어섰으며, 소련 점령 지역은 우크라이나 SSR과 벨로루시 SSR에 분할 합병되었다. 전후에도 폴란드에 돌려주지 않아 바르샤바가 국토의 중앙에서 동쪽으로 간 듯한 이유이다. 이후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 양측에 저항했고, 이로 인해 심한 탄압을 받았다. 소련은 폴란드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지식인들과 장교들을 학살하였고,[28] 독일도 폴란드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뒤이어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유대인 학살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수도인 바르샤바는 1944년 8월 봉기 때 독일군이 도시 전체를 다 쓸어버려 아무것도 안 남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폴란드 정부는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가 독일의 프랑스 침공 때는 프랑스 서부의 앙제 시, 그 다음에는 런던으로 옮겨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소련에 억류된 폴란드인과 망명 폴란드인들을 모아서 자유 폴란드군을 조직해서 연합군과 함께 영국 상공에서부터 시작해서 이탈리아, 노르망디, 네덜란드 등지에서 피터지게 싸웠다. 연합군 내에서 폴란드군이 네다섯번째로 큰 군대였다.[29] 하지만 망명정부는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기 전에 자력으로 탈환코자 무리한 봉기를 시도하여 대패했고, 폴란드 국내군도 큰 피해를 입고 뒤따라온 소련군에게 박해받아야 했다.
폴란드는 2차대전 중 동유럽 전체에서 가장 크고 조직적인 반나치 저항 운동을 펼쳤다. 폴란드의 저항조직 중 하나인 국내군(Armia Krajowa)이 보유한 병력만 40만[30]에 달했고, 1944년 바르샤바 봉기도 일으켰다. 또 폴란드 국내에서 폴란드 지하국(Polskie Państwo Podziemne, 약칭 PPP)이라는 임시 정부를 세워 이들도 적극적으로 나치 독일에 대항했다.
또한 폴란드는 2차대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국가 중 하나로, 연합국 기준으로 소련과 중국에 이어 사망자가 3번째로 많은 나라다. 여기서 사망자는 민간인과 군인의 사망을 모두 포함한 수치로 전 인구의 20%가 사망했다. 특히 유대계는 열 명 중에서 아홉 명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 전에 연합국에게 토사구팽당해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이 점령한 동쪽 땅을 바쳐야 했다. 또한 이걸 논의하는데 폴란드 망명정부한테는 초대는커녕 귀띔도 안해줬고 이에 항의하는 망명정부에게 처칠은 '불만이면 언제든지 연합국에서 탈퇴해도 좋다'고 말하기까지 했다.[31] 그래도 소련이 독일의 오데르강 동부를 폴란드 영토로 주었는데 웬만한 폴란드 도시보다 산업화가 잘 되어 있는게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그러나 이것도 억지로 찾아보면이지, 해당 지역을 넘겨받으면서 경제발전이 되지도 않았고 구 독일령 지역은 현재까지도 가난한 지역인데다 동부 지역을 빼앗기면서 전후 폴란드는 주기적인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전쟁 초기부터 후반까지 용감하게 싸운 폴란드 입장에서는 독일의 배상이라면 모를까, 본인들 땅 빼앗기는 대신 던져준 거나 다름없다.
10.1. 유대인과 폴란드인의 협력과 대립
일부 폴란드인들은 나치 점령기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일례로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은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폴란드 유대인인 자신의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의 경험을 그린 만화 《쥐》에서 폴란드인들도 나치 못지않게 유대인을 박해하고 국수적인 모습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했다. 그 대표적인 상징이 폴란드인을 돼지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돼지로 묘사된 폴란드인이 자신들이 차지한 집의 원 주인인 유대인이 찾아오자 '히틀러가 네놈들을 끝장내버린 줄 알았는데!' 하면서 집단린치 후 목매달아 죽여버린 장면이 나온다. 또한 유대인 역사학자 에마누엘 링엘블룸은 유대인들이 수용소행 열차로 끌려갈 때 열차 주위의 폴란드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으며, 독일군과 손잡고 유대인을 잡으러 다닌 반유대주의자들이 많다고 일기에 기록했다.독일 점령기 폴란드에서는 폴란드인의 유대인 밀고뿐만 아니라 폴란드인 자신들이 직접 유대인을 살해하는 사례가 빈발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41년 7월 10일에 예드바브네(Jedwabne)에서 폴란드 주민들이 유대인 남녀노소 340여 명(최소 수치)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다. 독일군은 이 학살 행위를 주민들에게 직접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선전용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방관하였다. 후일 폴란드계 미국인 역사학자 얀 그로스(Jan Gross)가 《이웃들》(Neighbors)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여 폴란드인들이 주도한 이 학살을 고발했다. 그 뿐만 아니라 종전 이후(!)에는 키엘체(Kielce)에서도 폴란드인에 의한 유대인 포그롬이 발생, 공격당한 유대인 200명 중 42명이 사망하고 4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후로도 몇 년간 폴란드에서는 생존한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이 발생하여 1,000명에서 2,000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다.[32] 따라서 유대인들은 전후에도 팔레스타인 등 국외로 이주했으며 오늘날 폴란드에 남은 유대인은 1~2만 명에 불과하다.
중세 폴란드는 전통적으로 유대인에게 비교적 관대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평범한 폴란드 민중들은 반유대주의적이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폴란드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반유대주의도 점점 더 강해졌고, 1차 대전을 계기로 폴란드를 분할한 3개국이 무너지고 난 후에는 포그롬이 빈발했다. 전간기 폴란드 제2공화국의 독재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다문화주의자로서 유대인들을 포용했지만 그가 죽은 후 인기가 떨어진 권위주의 군사정권이 민족민주주의당과 같은 극우파와 타협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통제와 차별을 점차 강화했다. 그리고 이런 막장 취급을 받다 보니 폴란드 침공 때 소련 점령지의 유대인들은 폴란드보다는 차라리 소련이 낫겠다면서 소련에 적극 협력한 편이고[33], 이게 또 폴란드인들에게 밉보이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폴란드인의 홀로코스트 가담은 전후 혼란과 공산정권 수립 이후로도 강성한 민족주의 분위기 탓에 이들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전의 군사정권과 마찬가지로 인기가 떨어졌던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정부는 폴란드인 가담자 처벌에 주저했고, 당장 예드바브네 학살만 해도 학살에 가담한 폴란드인들은 대개 평범한 시민으로 살면서 천수를 누렸다. 공산정권이 무너진 오늘날에도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폴란드인의 존재는 현지에서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고, 심지어 논의 자체를 억누르려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폴란드에서 집권하고 있는 극우정당 법과 정의는 2018년 폴란드인의 홀로코스트 가담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홀로코스트 법"을 제정했는데,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이주한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홀로코스트 학자들도 폴란드 정부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심지어 원래는 최대 징역 3년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으나 이러한 국제적인 항의 때문에 처벌이 완화된 것이라고 한다.
물론 폴란드인 전부가 유대인 배척에 앞장선 건 아니다. 또 다른 많은 폴란드인들은 유대인들을 도와주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고타'(Zegota)로, 이 단체가 게토와 수용소에서 구출한 유대인의 수가 무려 6만여 명에 이른다. 또한 당시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와준 폴란드인들이 전체 성인 인구의 2%에 이른다는 사실을 봐도 꽤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제고타의 대다수는 가톨릭 교도였다. 여담으로, 이런 폴란드인들을 같은 폴란드인이 신고시에 더 나은 배급을 준다는 말에 혹해 고발하여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게 하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11. 폴란드 인민공화국과 연대노조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달라진 폴란드의 영토. |
전쟁이 끝나고 1947년 총선 결과 노동자당의 압승으로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물론 소련이 개입한 부정선거였다. 1948년에는 노동자당과 사회당이 합병해서 연합노동자당이 되고, 1952년에는 인민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폴란드 인민공화국(Polska Rzeczpospolita Ludowa)'이라는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가가 세워졌다. 이에 대해 영국은 국내에 머물고 있는 10만여 명의 폴란드인들에게 시민권을 전부 부여하는 특혜를 수여했으나 그것으로 어디 보답이 되랴... 폴란드인들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나라를 숙적에게 45년간 점령당한 셈이다.
40년대 말부터 50년대 중반까지 볼레스와프 비에루트가 국가원수로 집권하여 스탈린주의식 정치가 펼쳐졌다. 공산당이 소련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비호 아래 잘 놀던 사이 폴란드 본국은 나치 독일에게 점령을 당하였고 수많은 군인들이 해외로 망명해서 폴란드를 위해 싸웠으며 국내에 남은 사람들은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를 조직해서 바르샤바 봉기 등의 숱한 항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소련은 지원을 해주기는커녕 전후에 폴란드를 점령하여 수많은 전쟁 영웅들을 잡아다 시베리아에 보내버렸으며 대부분이 거기에서 옥사하였다. 폴란드 국내군의 마지막 사령관이었던 레오폴트 오쿨리츠키(Leopold Okulicki) 소장도 시베리아에서 옥사했으며 폴란드 국내에서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암살 작전을 지휘했던 아우구스트 에밀 필도르프(August Emil Fieldorf) 소장은 전후 폴란드 공산 정권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이에 국내군을 포함한 반공우파 인사들은 6년간 폴란드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에 이어 소련과도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고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 반소 반공 항쟁을 벌였는데 이들을 저주받은 병사라 부른다. 저주받은 병사의 저항은 마지막 요원인 유제프 프란차크(Józef Franczak)가 루블린에서 사살된 1963년까지 이어졌다. 반소 저항군들은 대부분 공산 정권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당했다. 체포되어 징역을 산 이들은 대부분 대독 전쟁에 참여한 참전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민주화 시절까지 반역자로 몰렸으며, 민주화 이후 사면 복권 및 훈장이 수여되었다.
포즈난 항쟁(Poznański Czerwiec) |
한편 1956년 비에루트가 소련을 방문하던 도중에 사망하고 그 직후 반소 자유화 운동이 펼쳐지자(포즈난 항쟁), 이를 강경진압한 국방장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는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쫓겨났다. 이로써 당내에서 스탈린주의파 강경파는 실권을 잃어버렸으며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했다.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폴란드 인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외교적으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잔류하는 등 소련에 유화적인 제스쳐를 취했기 때문에 동시기 헝가리와 다르게 뒤엎어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임기 초반에 고무우카는 농업 집단화 정책을 중단시키고 언론통제를 완화하는 등 자유화 정책을 펼쳐나갔으며 그동안 대립했던 가톨릭을 복권시키는 등 나름대로 진보적인 정책을 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개혁이 지지부진해졌고 언론 통제도 다시 강화되는 등 자유화 조치도 후퇴하면서 지식인층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거기에다가 60년대 중반 무렵부터 경제가 침체되면서 고무우카의 지지기반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졌다. 고무우카는 이를 서독과 외교관계 개선으로 풀려했고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는데 성공했지만 이는 실망스런 정치를 펼친 것에 대한 면피로 보였다. 그리고 1968년 학생들의 시위로 위기를 맞자(시위 자체는 소규모라 비교적 쉽게 진압된 편이었다) 고무우카는 소련의 지시대로 체코슬로바키아에 폴란드군을 출동시키는 짓을 해버렸고, 때문에 당내에서도 고무우카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져 그해 11월에 경쟁자들의 도전 속에 간신히 서기장 재선에 성공할 정도였다. 이후에 경기침체는 더더욱 심해졌고 1970년 크리스마스에서 급작스러운 식료품값 인상을 시행하자, 식료품값 인상에 항의하는 노동자의 투쟁으로 당내에서 지지기반을 완전히 상실하며 결국엔 사임하였다.
그 후 에드바르트 기에레크가 집권해서 경제침체를 타개할 방안으로 서방과 좋은 관계를 맺고 경제개방정책을 폈다. 그 덕분에 당시 폴란드는 매년 9%의 성장을 기록하면서 TV나 세탁기 같은 전자제품도 대대적으로 보급되는 등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렸고, 지지도가 높아진 기에레크는 소련과도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면서 잘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호황은 석유 파동의 여파로 폴란드의 수출이 크게 위축되면서 오래가질 못했고, 결국 1976년에 대대적인 물가인상을 시행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실망감이 커져나갔다. 물가인상은 인민들의 저항으로 단기간에 철폐되었지만 그 대신에 외화난에 시달리면서 풍족해졌던 가전제품도 수입량이 줄면서 품귀현상이 벌어졌으며, 70년대 말에 이루어진 금리 인상으로 외채가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가면서 폴란드는 파산 상태에 직면하고 말았다.
이러한 을씨년스러운 상황에서 자치노조 '연대'가 결성되었다. 한편 1980년 기에레크가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고 스타니스와프 카니아가 집권하며 새로이 등장한 연대노조를 인정했으나, 소련이 폴란드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하자 군부에서 카니아를 내쫓고 계엄령을 시행했으며 강경파인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집권하여 레흐 바웬사를 구금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이에 맞서 자유노조 연대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공산당 독재 타도 투쟁이 전개되었다. 자유노조를 강경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빚을 상환하기 위해 긴축정책을 대대적으로 펴는 동시에 구제금융을 받기 위하여 IMF에도 가입하였지만 경제는 도저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내핍을 강요받은 노동자들의 군사정부에 대한 반감만 늘어났다. 이 당시 폴란드인들의 삶이 어땠는지 마르지 항목 참조.
결국 명분을 잃은 공산정권이 굴복하여 원탁회의가 진행되었고, 동유럽 혁명 와중이던 1989년 6월 실시된 총선에서 통일노동당(공산당)이 다수의 의석을 상실했다. 1989년 4월 정당, 정부, 노조, 지식인 대표 등 55명으로 이루어진 '원탁회의(Obrada Okragłego Stołu)'에서는 헌법 개정이 합의되어 자유노조의 합법화, 자유선거에 의한 상원 신설, 하원 460석 중 35%의 자유선거, 대통령제 신설 등이 결정되었는데, 출처. 여기서 상원 100석중 99석 하원 161석을 자유노조가 차지했다.
본래 폴란드 통일노동당의 의도는 자유노조를 기존 정치체제에 편입시키는 대신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는 것이었다. 신설된 대통령직은 국회에서 선출되는 것이었는데, 원탁회의의 합의에 따라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를 초대 대통령으로 지명하였고 야루젤스키는 본래 통일노동당 인사인 체스와프 키슈차크를 총리에 임명하고자 하였으나, 자유노조의 맹렬한 반발로 철회되고 자유노조 기관지의 편집장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를 총리로 지명했다. 이에 따라 동구권 국가 중 처음으로 비공산 연립정권이 출현하는 기록을 세웠다.
12. 폴란드 제3공화국
1989년 9월 13일에 폴란드에서 비공산 연립정권이 출범하였다. 폴란드 역사에서는 이 시점부터의 폴란드를 제3공화국이라 한다.야루젤스키는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지만 이미 실권은 개혁파로 완전히 넘어갔고, 개혁의 지연과 옛 공산권 세력 잔류에 불만을 품은 개혁파들은 야루젤스키에게 조기퇴임 압력을 넣었다. 12월의 헌법 개정에서 국명을 폴란드 공화국으로 개명하고 사회주의 조항을 삭제했으며, 1990년에 이루어진 완전한 자유 지방선거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했고, 더불어 통일노동당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국방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자유노조로 넘어갔다. 야루젤스키는 10월에 결국 자유노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통령 임기를 리셋하는 헌법 수정(amendment)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에서 퇴임했으며, 이에 따라 임기 5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수정이 이루어졌다. 수정된 헌법에 따라 11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레흐 바웬사가 2대 폴란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91년에는 드디어 완전 자유 총선이 실시되었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이때까지 런던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더 이상 존속할 명분이 없어진 망명정부도 공식 해체하고, 1935년의 폴란드 헌법 원문과 폴란드 대통령의 상징물 등이 레흐 바웬사에게 전달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등 가톨릭 세력도 큰 영향을 미쳤다.
폴란드의 구 신영토에 따른 정치성향의 비교(2010년 대선). 구영토에서 카친스키, 신영토에서 코모로프스키의 지지가 뚜렷하다. |
바웬사는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 후 사회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정작 경제를 살리는 데 실패했고, 1991년과 1993년 총선에서 참패하여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민주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동거정부가 형성되었고, 1995년 대선에서도 패배하면서 구 공산당 출신의 사민당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에프스키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었다. 이후 크바스니에프스키는 의외로 친유럽 연합, 친서방 정책을 펴면서 10년간 폴란드의 상황을 잘 이끌어나갔다.(퇴임 당시에는 무소속) 하지만 임기 말에 부정부패 스캔들이 수시로 터지는 바람에 지지율이 급속히 떨어져나가 결국 2005년 총선과 대선에서 사회민주당은 군소정당으로 몰락하고 말았고, 이후에는 법과 정의당과 시민 연단이 정권을 주고받는 보수양당제가 형성되었다.[34]
1997년에 헌법을 개정한 이래 폴란드는 의원내각제 국가지만 이원집정부제 성격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5년 중임으로 국민 직선으로 선출되며, 국민 직선의 양원제 국회에서 하원의 다수당 당수가 총리로서 대부분의 국정 운영의 실권을 가지지만 대통령에게 법안 거부권이 있는 등 대통령의 실권이 완전히 없지는 않다.
민족주의 우파 성향의 "법과 정의당(PIS)"에서 2005년 당선된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동생)과 2006년 취임한 야로슬라프 카친스키(형) 총리가 쌍둥이로 집권하면서 화제를 끌기도 했다. 앙겔라 메르켈과 신나게 갈등을 빚기도 했다.
야로슬라프 총리는 2007년 총선에서 시민연대가 승리하면서 고작 1년 3개월만에 사임하여 동거정부가 형성되었고, 동생인 카친스키 대통령은 2010년 임기를 6개월 남겨놓고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해 7월 중도파인 시민강령(PO) 당의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가 5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1년 총선에서도 시민강령이 승리하였다(형 야로슬라프는 결선투표에서 탈락). 코모로프스키는 반공운동을 이끌던 친유럽주의자로, 카친스키보다 친유럽 성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해서도 온건한 정책을 펴고 있었다가, 2014년 크림 위기 이후에 강경 성향으로 돌아섰다.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비호를 받은 우크라이나 극우주의자들이 1943년에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인에 대해 벌인 학살을 추모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루치크(우크라이나어: Луцьк, 폴란드어: Łuck)를 방문하였다가 우크라이나의 극우 정당인 자유당(Свобода) 청년 당원에게 어깨에 계란을 맞았다. (단순히 대통령에게 투척한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직접 어깨에 짓눌러 버렸다.)[35][36]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은 2013년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한국을 국빈 방문하고, 박근혜 대통령과 한-폴란드 양국관계를 전략적 동반자관계로 격상시키는 데 합의하였다. 또한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방문하여 "유럽 속의 폴란드, 폴란드 속의 유럽"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2015년 총선에서 강경 우파인 법과 정의당(Prawo i Sprawiedliwość)이 승리하면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전체 의석 460석 중 법과 정의당이 235석, 시민연단이 138석을 가져갔으며, 우익 포퓰리즘 정당인 쿠키즈 2015(42석), 자유주의 정당인 현대당(28석) 등 신흥 정당들이 그 뒤를 이었다. 좌파의 경우 "통합 좌파"라는 선거연합을 이루어서 선거에 나섰으나 득표율이 불과 0.4% 모자라[37] 좌파는 의석을 한 석도 얻지 못했다.
2016년에 법과 정의당이 기자들의 접근을 제한하는 법안을 제출하다가 언론자유의 훼손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결국 철회하였다.# 낙태금지법안까지 상정했지만 이 또한 논란이 거세져서 포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8년 초엽에 나치가 주도한 홀로코스트에 폴란드 당대 극우파들이 방조하거나 동참한 것을 부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까지 하면서 마찰이 생기고 있다.
그럼에도 법과 정의당이 EU와의 마찰이 있기는 해도 경제가 그런대로 굴러가고있는 데다가 강경우파라고는 하지만 사회민주당 집권 시절에도 이루지 못했던[38] 복지정책도 열심히 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통치에도 지지율은 제법 높다.
결국 지속적인 언론 탄압, 인권 탄압 등에 대한 피로감으로 시민 연단을 비롯한 야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13. 연표와 역대 국왕, 대통령
13.1. 연표
아래 내용의 대부분이 들어있는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폴란드 역사. 이 영상은 2010 상하이 엑스포에서 첫 선을 보였으며, 2015년 6월 5일부터 2015년 8월 30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폴란드, 천년의 예술 전시전"에서도 선보였다.
- 10세기 경, 서슬라브인의 일파인 폴란인(Polanie)을 중심으로 민족과 국가가 성립.
- 960년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성립, 폴란드의 첫 왕으로 미에슈코 1세 즉위.
- 966년 미에슈코 1세(재위: 960?~992년), 세례를 받으며 가톨릭으로 개종.
- 1000년, 그니에즈노 회합.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가 폴란드 공작이었던 용감공 볼레스와프(Bolesław, 후의 볼레스와프 1세)와 만나면서 그니에즈노 메트로폴리아(대주교좌)가 폴란드에 처음 생긴 교황청 직속 교구로 탄생했다. 하지만 오토 3세가 죽은 이후로 폴란드는 독일과 반목하게 되었다.
- 1018년, 볼레스와프 공의 키예프 공국 침공으로 키예프가 함락되었다.
- 1025년, 볼레스와프 공의 대관식. 그리고 폴란드 왕국이 성립.
- 1031년 이복형제들간 내분으로 미에슈코 2세 폐위, 이후 복위
- 1034년 미에슈코 2세 사망, 대규모 이교도 반란. 1040년까지 실질적 공위시대.[39]
- 1039 보헤미아 공 브르제티슬라프 1세, 폴란드 대규모로 침공하여 수도 그니에즈노, 포즈난 파괴.
- 1040년 크라쿠프 천도
- 1138년 폴란드 분열시대 시작
- 1226년 폴란드 대공이자 마조프셰 공이던 콘라드 1세, 프루시 정복을 위해 독일기사단 불러들임.
- 1241년 폴란드 연합군, 레그니차 전투에서 몽골군에 참패. 크라쿠프, 브로츠와프 파괴.
- 1259년 몽골군 2차 침입, 크라쿠프 재차 파괴.
- 1287년 몽골군 3차 침입, 헝가리 지원으로 방어 성공.
- 1295년 대폴란드공 프셰미스우 2세 폴란드 왕으로 대관하며 폴란드 통합에 박차, 그러나 1년 뒤 암살됨.
- 1300년 보헤미아 프르제미슬 왕조 바츨라프 2세, 폴란드 대공위 획득. 실롱스크 지방의 보헤미아 속국화.
- 1306년 브와디스와프 1세가 폴란드 대공이 되며 보헤미아와의 동군연합 붕괴. 이후 보헤미아는 끊임없이 폴란드 대공위/왕위(1320년부터)를 요구하며 폴란드와 충돌.
- 1308년 독일기사단 그단스크 점령.
- 1320년 브와티스와프 1세, 폴란드 왕으로 대관하며 폴란드 분열시대 종결
- 1333년, 폴란드 최고의 명군인 카지미에시 대왕(카지미에시 3세)의 즉위.
- 1335년 보헤미아와 트렌친 조약 체결. 실롱스크 지방을 보헤미아에 할양하는 대신 보헤미아의 폴란드 왕위 요구 영구히 포기.
- 1364년, 이탈리아 반도의 볼로냐 대학교를 본뜬 첫 대학인 크라쿠프의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아카데미아 크라코프스카 Akademia Krakowska') 설립.
- 같은 해 9월, 카지미에시 대왕이 주도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를 포함한 덴마크, 헝가리, 키프로스 왕국, 브란덴부르크의 여러 왕과 공이 참석한 '크라쿠프 회합'이 열리다. 이때 열린 비에쥐넥(Wierzynek)의 화려한 만찬이 유명하다.
- 1377년, 요가일라의 리투아니아 대공 즉위
- 1386년 야드비가 여왕과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의 혼인. 크레바 법령 반포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공동 통치. 그러나 리투아니아 통치는 명목상이었고 대공 섭정 스키르가일라가 리투아니아 통치.
- 1410년 7월 15일, 그룬발트 전투(Bitwa pod Grunwaldem). 튜튼 기사단에 맞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대승을 거두다.
- 1440년 브와디스와프 3세 헝가리 왕위 획득
- 1444년 바르나 전투로 브와디스와프 3세 전사.
- 1447년 리투아니아 대공 카지미에시 4세, 폴란드 왕으로 즉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실질적인 동군연합 결성.
- 1453년 프루시 동맹의 출병 탄원. 이에 응해 카지미에시 4세 독일 기사단 공격.
- 1466년 2차 토룬 평화조약으로 독일기사단 종속화.
- 1543년, 수도자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다룬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출판.
- 1569년, 루블린의 통합('우니아 루벨스카 Unia Lubelska')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단일 의회를 가진 연방이 되다.
- 1573년, 종교적 양심의 자유와 관용의 법칙을 주장한 법령 '콘페데라치아 바르샵스카(Konfederacja warszawska)' 발효.
- 1596년, 지그문트 3세 바사,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천도. '황금의 세기'가 시작되다.
- 1609년, 지그문트의 군대가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대항하는 모스크바 군대를 패배시키고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 1619년, 폴란드 영토가 가장 넓어지다.
- 1626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연방 침공. 연방은 전쟁에서 패해 리보니아 일부, 리가 할양.
- 1648년 카자크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봉기. '대홍수'의 시작.
- 1655년 스웨덴군, 루스차르국군, 에르데이군 연방 침공. 국토 대부분 점령. 이듬해부터 연방이 외세군 몰아냄. 전쟁은 1660년까지 지속.
- 1683년, 제2차 빈 포위. 얀 3세 소비에스키의 8만 대군이 신성동맹군에 참여하여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다. 윙드 후사르의 활약.
- 1700년 루스 차르국의 편들어 대북방전쟁 참전, 스웨덴에 참패.
-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러시아 제국이 지원하는 아우구스트 3세가 즉위하면서 연방은 점차 러시아의 속국화.
- 1772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1차 폴란드 분할.
- 1791년 5월 3일, 유럽 최초의 근대적인 성문 헌법인 5월 3일 헌법(Konstytucja 3. Maja)이 제정되었으나 친러파에 의한 타르코비차 반동의 결과 폐지되었다.
- 1793년, 1795년, 2-3차 분할로 폴란드는 지도상에서 사라졌다.[40]
- 1794년,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Tadeusz Kościuszko)의 봉기.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여했던 코시치우슈코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마치에요비체 전투에서 진압되었다.
- 1797년, 프랑스령 롬바르디아에서 폴란드 의용군 결성.
- 1806년, 나폴레옹 전쟁 중에 바르샤바 공국이 일시적으로 성립되었다. 1813년 러시아에 의해 멸망.
- 프레데리크 쇼팽(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의 일생.[41]
- 1815년 러시아 제국의 동군연합 국가 폴란드 입헌왕국이 수립.
- 1830년 11월 봉기 발발. 러시아와 폴란드 입헌왕국 간 전면전으로 번짐.
- 1863년 1월 봉기 발발.
- 1867년 폴란드 입헌왕국이 러시아 직할령으로 완전히 편입, 프리비슬린스키가 됨.
- 1903년, 폴란드인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키리가 방사능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괴뢰국 폴란드 섭정왕국이 수립.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폴란드 제2공화국 독립.
- 1919년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전쟁 발발. 동시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발발.
- 1920년 바르샤바 전투 대승으로 붉은 군대 궤멸. 리가 조약으로 르부프, 빌뉴스 등 확보하며 영토 확장.
- 1926년 피우수트스키 쿠데타. 이후 폴란드에는 권위주의적인 사나치아(Sanacja) 정권이 들어섬.
- 1938년 뮌헨 회담으로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실롱스크 치에신(슬레스코 테신) 지방 획득.
- 1939년 9월 1일, 독일의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호의 그단스크 포격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폴란드 분할.
-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 폴란드에서 망명한 조종사들의 참전.
- 1944년, 자유 폴란드군이 참전한 몬테카시노 전투. 폴란드 내 시민군이 일으킨 바르샤바 봉기.
- 1945년, 소련의 위성국이 되다.
- 1956년, 6월 포즈난에서 첫 대규모 파업.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의 '10월의 해빙(Odwilż)'.
- 1968년, 68혁명의 일부인 폴란드 3월 시위.
- 1970년, 12월 파업. 1976년, 6월 시위.
-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선출 및 즉위.
- 1980년,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 성립해 1만명 참가.
- 1981년, 보이치에흐 비톨트 야루젤스키 장군의 계엄령으로 1만 명 이상 체포. 1982년 말일 휴지되어 다음 해 7월 종료.
- 1989년, 원탁 회의와 자유선거.
- 1999년, 폴란드의 NATO 가입.
- 2004년, 폴란드의 EU 가입. # 주한폴란드 대사관
13.2. 역대 군주
출처 : 한국어 위키분류:폴란드 역대 국가원수 및 정부수반 틀 분류 참고.
13.3. 역대 대통령 및 서기장
- 제2공화국 대통령
대수 | 이름 | 재임 | 정당 |
1 | 가브리엘 나루토비치 | 1922년 12월 11일 ~ 1922년 12월 16일[A] | 무소속 |
2 | 스타니스와프 보이치에호프스키 | 1922년 12월 22일 ~ 1926년 5월 14일[45][B] | 인민당 피아스트 |
대행 | 마치에이 라타이 | 1926년 5월 15일 ~ 1926년 6월 4일 | 인민당 피아스트[47] |
3 | 이그나치 모시치스키 | 1926년 6월 4일 ~ 1939년 9월 30일[48] | 무소속 |
대행 | 볼레스와프 비에니아바드우고쇼프스키 | 1939년 9월 25일 ~ 1939년 9월 26일 | 무소속 |
- 제2공화국 망명 정부 대통령
대수 | 이름 | 재임 | 정당 |
1 |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 | 1939년 9월 30일 ~ 1947년 6월 6일[A] | 무소속 |
2 | 아우구스트 잘레스키 | 1947년 6월 9일 ~ 1972년 4월 8일[A] | 무소속 |
3 | 스타니스와프 오스트로프스키 | 1972년 4월 9일 ~ 1979년 3월 24일 | 사회당 |
4 | 에드바르트 라친스키 | 1979년 4월 8일 ~ 1986년 4월 8일 | 무소속 |
5 | 카지미에시 사바트 | 1986년 4월 8일 ~ 1989년 7월 16일[A] | 무소속 |
6 | 리샤르트 카초로프스키 | 1989년 7월 19일 ~ 1990년 12월 22일 | 무소속 |
- 폴란드 인민 공화국 서기장
대수 | 이름 | 재임 | 정당 |
1 |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 1948년 12월 22일 ~ 1956년 3월 12일[A] | 통일노동당 |
2 | 에드바르트 오하프 | 1956년 3월 20일 ~ 1956년 10월 21일[53][B] | 통일노동당 |
3 |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 1956년 10월 21일 ~ 1970년 12월 20일[B] | 통일노동당 |
4 |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 1970년 12월 20일 ~ 1986년 4월 8일[B] | 통일노동당 |
5 | 스타니스와프 카니아 | 1980년 9월 6일 ~ 1989년 10월 18일[57] | 통일노동당 |
6 |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 1989년 7월 19일 ~ 1989년 7월 29일[B] | 통일노동당 |
7 | 미에치스와프 라코프스키 | 1989년 7월 29일 ~ 1990년 1월 29일[B] | 통일노동당 |
- 제3공화국 대통령
대수 | 이름 | 재임 | 정당 |
1 |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 1989년 12월 21일 ~ 1990년 12월 22일[B] | 통일노동당 |
2 | 레흐 바웬사 | 1990년 12월 22일 ~ 1995년 12월 22일 | 자유노조 |
3 |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 1995년 12월 23일 ~ 2005년 12월 23일 | 사회민주당[61]→민주좌파연합 |
4 | 레흐 카친스키 | 2005년 12월 23일 ~ 2010년 4월 10일[A] | 법과 정의 |
5 |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 2010년 8월 6일 ~ 2015년 8월 6일[63] | 시민 연단 |
6 | 안제이 두다 | 2015년 8월 6일 ~ 현재 | 법과 정의 |
[1] 카르파티아산맥 북서부, 현 슬로바키아 일대.[2] 이곳에 살던 발트족은 '프로이센인' 혹은 '프루센'이라고 불렸다. 이들의 이름에서 지명 '프로이센'이 유래되었다.[3] 발트어족의 일파로 동프로이센에 살던 프로이센인은 슬라브족에 동화되지 않았고, 폴란드가 건국된 후에도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당시 유럽인 기준에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였고, 13세기 초반에 마조프셰(현 폴란드 동부 지역) 공작 '콘라트 1세(Konrad I mazowiecki, 1187-1188 ~ 1247, Książę mazowiecki)'는 튜튼 기사단에 이들을 정복하고 기독교화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프로이센인은 튜튼 기사단에 정복되어 피지배민족이 되었으며, 이후 독일 이주민에 동화되거나, 학살, 추방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이들이 사용하던 '고대 프로이센어'도 17~18세기에 사멸하였다.[4] 이곳이 오늘날의 그니에즈노(Gniezno)라고 한다.[5] Zaprowadzenie chrześcijaństwa, 1889년, 낭만주의 작품.[6] 서슬라브인의 일파. 이들의 이름에서 국명 '폴란드(Poland)'와 '폴스카(Polska)'가 유래하였다.[7] 미에슈코 1세의 선택은 (농담조로 말해) 폴란드 역사 내내 최악의 선택으로 판정된다. 나토의 군사전문가들이 '이상적인 전쟁터'라고 부르는 드넓은 평원지대에 살림을 차린 것이다. 폴란인이 지금의 영토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현재보다 숲이 우거져 있는 평야지대가 많았고 적들, 특히 기병이 진격하는 데 있어서 버거운 편이었으나 점점 개간과 벌목, 화력 무기의 발달로 인해 숲들이 줄어들어 탁 트인 평야지대로 변모해 갔다. 폴란드도 이러한 자국의 상황을 잘 이용하여 주요 무역로가 되어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기도 하고, 수많은 유럽의 학자들을 배출한 크라쿠프의 야기에우워 대학교의 경우는 유럽 학자들의 고향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평야 지역에서 폴란드인이 대규모로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웠고 또 평야를 따라 외국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으니 평야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8] 헝가리 왕위는 야드비가의 언니인 마리어가 계승했다.[9] 독일 기사단국은 1525년에 37대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Albrecht Herzog von Brandenburg-Ansbach, 1490 ~ 1568)가 개신교로 개종하고 로마 가톨릭과 절교한 후 세속국가 '프로이센 공국'이 되었다.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으로, 프로이센 공작은 폴란드 국왕의 신하였다. 또 프로이센 공국은 초대 공작 알브레히트의 후손만이 세습할 수 있었다. 이 조항에 따라 1618년에 프로이센계 호엔촐레른 가문의 대가 끊겼을 때 폴란드 국왕은 프로이센 공국을 회수하여야 했으나, 대외 활동으로 정신이 없던 당시 국왕 지그문트 3세는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의 아들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Albrecht Friedrich von Preußen 1553~1618)의 사위이자 호엔촐레른 가문의 직계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Johann Sigismund, 1572 ~ 1620)'가 프로이센 공작은 폴란드 국왕의 신하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 결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탄생하였고, 이는 비극적인 폴란드 근현대사의 시발점이 되었다.[10] 중세 후기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은 1240년 이후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몽골의 지배는 1480년까지 이어졌다.[11]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헝가리-보헤미아 전체를 단일 통치자가 다스린 적은 없었다. 야기에우워 왕가의 헝가리-보헤미아 왕국은 1490년에야 완성되었으며,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1526)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전사하면서 2대 만에 단절되고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가게 된다. 보헤미아 왕국 참조.[12] 헝가리어로 '바토리 이슈트반'. 그 유명한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외숙이다. 이슈트반의 누나 언너가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이다.[13] 지그문트 3세의 관심사는 부왕 요한 3세로부터 물려받은 스웨덴 왕위였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저 숙부 칼 9세에게 빼앗긴 스웨덴 왕위를 되찾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익보다는 개인의 사욕을 위해 움직였고 이때문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14]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해서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타라스 불바(역제: 대장 불리바)>에서, 불바를 위시한 자포로제 카자크들의 주적은 폴란드다. 폴란드 기병은 전투에 이골이 난 카자크들에게조차 강적으로 등장한다.[15] 다만 이 지도에는 고증오류가 있는데 연방 북쪽의 리가를 비롯한 리보니아 지역은 1629년 알트마르크 조약으로 스웨덴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폴란드는 알트마르크 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며 계속해서 리보니아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나 1635년 스웨덴과 슈툼스도르프 조약을 체결하면서 남동부 라트갈레 지역을 제외한 리보니아의 스웨덴 영유를 일시적으로 인정했고, 1660년 올리바 평화 조약으로 최종 포기했다.[16] 다른 말로 하면 영주의 자의적 처벌이 가능했다.[17] 물론 주 이유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형성 당시 우크라이나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폴란드 왕국 귀족 측으로 넘어간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18] 실제로 폴란드가 강국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프로이센은 일개 도시국가 수준이었고, 러시아는 내전까지 겹친 혼란 시대였다.[19] 이 부분은 좀 복잡하다. 러시아는 중앙집권화를 지향했으나 땅이 너무 커서 역설적으로 지방 단위에서는 지방분권을 인정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와중에서 봉건귀족, 지방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면 안되니까 그 대신 농민, 상인 등의 비중이 높은 지방자치단체들을 용인해 준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반 4세가 도입한 구바(Губа)가 있는데 보통 수장은 은퇴한 현지 봉직인사들 중에서, 보좌관은 농민들 중에서 선출되었다. 게다가 사법권을 가지고 있어서 농민들이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역갑질(...)이 일어났다는 기록까지 있다. 즉 강력한 지방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강력한 지방 비귀족 세력을 지원하는 지방분권이니 결국에는 중앙집권이나 다름없고 강력한 지방귀족들을 중앙이 제어하지 못한 폴란드의 지방분권과는 맥락이 다르다.[20] 그러나 그의 유약한 성품은 결과적으로 동쪽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를 막는 데에는 실패하였다.[21] 폴란드의 국가, 일명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가 탄생한 것도 이때였다.[22] 러시아 제국과의 동군연합 형태로, 사실상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점차 자치권을 상실하더니 1월 봉기 실패 이후에는 프리비슬린스키라는 이름으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러시아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23] 그나마 오스트리아는 부분적으로 자치권을 부여하는 등 좀 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의 폴란드인들은 물론 오스트리아의 통치 역시 싫어했지만 적어도 독일이나 러시아의 통치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24] 바르샤바 공국이나 폴란드 입헌왕국 등은 사실상 괴뢰국이었다.[25] 원래는 같은 동포국가인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폴란드와 싸우자 서우크라이나를 원조했고 나중에는 아예 나라를 합치기도 했는데, 소비에트 러시아의 침공을 당해서 이 즈음이면 서부로 세력이 쪼그라들게 된다. 정작 서우크라이나 영토였던 곳은 1919년에 폴란드에게 거의 먹혔다.[26] 리투아니아의 수도였으나 이 당시 인구 비중이 유대인 40%에 폴란드인 50%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언어는 폴란드어를 쓰지만 민족 정체성은 리투아니아인인 사람들까지 폴란드인으로 합치는 꼼수가 활용되었다.[27] 골때리게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최초의 전투가 벌어진 베레자 카르투스카에다 세웠다(...)[28] 러시아는 한동안 이 학살을 인정하지 않았다. 추모제를 위해 러시아의 초대 없이 (친러파였던 총리만 정식 초대) 러시아로 향하던 폴란드 대통령과 국가 주요 고위인사들(무려 97명!)이 조종사의 과실로 인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아픈 기억이 있다. 러시아에서도 추도사를 보내고 조사에 손을 빌려줬으나 희생자들의 성향이 반 러시아에 가까워 음모론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자세한 것은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를 참조.[29] 첫째는 소련, 둘째는 미국, 셋째는 영국이다. 자유 프랑스군은 자유 폴란드군과 비등했는데, 프랑스가 식민지를 회복하고 본토 수복에 나선 1944년 이후로는 확실히 자유 폴란드군보다 늘어났다.[30] 추산치가 20만에서 60만까지 다양함.[31] 사실 이는 소련을 계속 같은 편으로 묶어두기 위한 계산임과 동시에 연합국 내에서 '폴란드가 먼저 전쟁을 유발했다'는 인식이 있는 점도 한몫했다. 그러니까 폴란드를 1차대전 시기의 세르비아 취급하며 푸대접한 셈이다. 물론 이는 독일의 자작극이었고, 전범재판을 치르며 진상이 밝혀지게 된다.[32] 전전 폴란드 유대인이 워낙 많아서 적어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폴란드에 남은 유대인은 50,000명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거의 전부(90% 정도) 나치 독일에 살해당했고, 생존자도 대부분 소련을 비롯한 외국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즉 폴란드는 아직까지 남아있던 국내 유대인의 2-4%를 살해한 것이다.[33] 니얼 퍼거슨의 《증오의 세기》에선 적기(赤旗)를 흔들며 "소련 만세! 폴란드에 죽음을!" 하는 유대인이나, 백적의 폴란드 국기에서 흰 부분을 떼어내 붉은 깃발을 만드는 유대인들이 나온다. 저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실려가는 동포들을 보는 폴란드인들의 시점에선 뭐…[34] 법과 정의당의 극우 성향이 강해지자 바웬사는 시민연단을 지지했다.[35] 루치크는 원래 키예프 루스의 땅이었으나 폴란드 왕국에 먹혔고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도시가 되었다. 폴란드 분할로 인해 러시아 제국에 넘어갔으며, 러시아 제국 붕괴 당시 인구 대다수가 우크라이나인이었기 때문에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했지만 폴란드의 침공을 받아 국토 대부분이 점령당했다. 1939년의 폴란드 침공 이후 동부 지역이 소련에 편입되자 폴란드 장교들은 카틴 학살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소련의 지배가 이어진지 2년 뒤, 나치 독일이 독소전쟁을 벌여 이 곳을 점령하였고 소련과 폴란드에게 실컷 얻어맞았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군을 반겼다. 루치크는 1939년 당시 유대인이 절반 이상이었고 우크라이나인이 폴란드인보다 두 배 많았는데,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을 전부 죽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들도 독일의 억압을 받게 된다.[36] 위 동영상에서는 폴란드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서 계란을 맞았음에도 댓글에는 폴란드인들이 폴란드어로 자국의 대통령 보고 "계란이 아니라 똥을 맞았어야 했다"든지 "코모로프스키는 쓰레기"라는 등의 욕을 하고 있는데 2014년부터 민족주의 성향의 법과 정의당(Prawo i Sprawiedliwość)의 지지율이 다시 시민연단(Platforma Obywatelska)의 지지율을 추월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37] 폴란드 총선에서 의석을 얻기 위해선 정당은 5%, 정당간 선거연합은 8% 이상을 득표해야 한다.[38] 사실 사회민주당 집권 시절에 재정적자 축소를 명목으로 복지정책이 축소되어온 것은 마찬가지였기는 했다.[39] 당시에도 대공이 있었긴 한것으로 보이나, 이름을 제외하고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40] 러시아는 니에멘(Niemen)과 부크(Bug) 강 동쪽의 폴란드 영토 전부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오스트리아는 루블린 지역과 크라쿠프를 포함한 나머지 마워폴스카(Małopolska; 소폴란드) 지역, 포들라시에(Podlasie)와 마조프셰(Mazowsze) 지역 일부를 복속시켰다. 프러시아는 바르샤바를 포함한 마조프셰 지역과 포들라시에와 리투아니아 지역을 크라쿠프 지역 일부와 함께 차지했다.[41] 위 애니메이션 동영상의 5분 7초경에 잠깐 울리는 곡이 쇼팽이 작곡한 <혁명>의 일부.[42] 헨리크 2세와 헨리크 4세 사이에 헨리크 4세의 아버지 헨리크 3세가 있었으나, 그는 폴란드의 국왕이 아니었다.[43] 작센의 국왕으로, 선거왕정으로 추대된 것이 아니다.[A] 임기 중 사망[45] 피우수트스키의 쿠데타로 실각.[B] 사임[47] 1931년에 폴란드 인민당에 통합됨.[48] 독소 양국의 폴란드 분할점령으로 제2공화국 패망.[A] 임기 중 사망[A] 임기 중 사망[A] 임기 중 사망[A] 임기 중 사망[53] 포즈난 반소항쟁으로 인해 실각, 고무우카에게 서기장직 양도.[B] 사임[B] 사임[B] 사임[57] 자유노조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야루젤스키의 쿠데타로 실각.[B] 사임[B] 사임[B] 사임[61] 통일노동당의 후계 정당, 이후 민주좌파연합으로 당명 변경.[A] 임기 중 사망[63] 폴란드는 대통령이 임기중 사망할 경우, 보궐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 남은 임기를 채우는 게 아니라 한국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