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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국왕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Aleksander Jagiellończyk | |
이름 |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Aleksander Jagiellończyk |
출생 | 1461년 8월 5일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
사망 | 1506년 8월 19일 (향년 45세) 리투아니아 대공국 빌뉴스 |
재위 |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
1492년 7월 30일 ~ 1506년 8월 19일 | |
폴란드 왕국의 왕 | |
1501년 12월 12일 ~ 1506년 8월 19일 | |
배우자 | 헬레나 이바노브나 (1495년 결혼) |
아버지 |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
형제 | 울라슬로 2세, 야드비가, 카지미에시, 얀 1세 올브라흐트, 조피아, 엘즈비에타, 지그문트 1세, 프리데리크, 엘즈비에타, 안나, 바르바라, 엘즈비에타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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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5대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국 20대 대공. 부왕과 마찬가지로 귀족들의 특혜를 인정하는 여러 권한을 승인하여 폴란드 왕권 약화를 초래하였다.2. 생애
1461년 8월 5일 폴란드 왕국의 수도 크라쿠프에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와 독일왕,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알브레히트 2세의 딸인 엘리자베트의 네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1492년 6월 7일 아버지 카지미에시 4세가 사망한 뒤 7월 30일에 형 얀 1세 올브라흐트에 의해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지명되었다. 이어진 폴란드 국왕 선거에서, 일부 폴란드 귀족들은 그를 옹립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한 명의 군주의 지도를 받음으로써 양자의 통합이 이어가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카지미에시 4세의 막내아들인 프레데리크 야기엘론치크와 함께 형 얀 1세가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알렉산데르는 리투아니아에 강한 애착을 가졌고, 수도 빌뉴스의 개발에 몰두했다. 또한 리투아니아 고문들의 도움을 받으며 외교 정책에 수행에 있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독립을 보장받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폴란드 국왕인 형 얀 1세 올브라흐트와 우호 관계를 이어가, 양국이 서로 마찰을 벌이지 않게 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무능했고, 이로 인해 리투아니아가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것을 막지 못했다.
1492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이반 3세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침략했다. 그가 이끄는 모스크바군은 루부츠크, 므첸스크, 츨레피엔, 로하체프를 점령하고 뱌지마를 위협했다. 여기에 세르페이스크 공작과 메시초프스크 공작은 리투아니아 대공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자기들의 영지를 모스크바에 넘겼다. 그해 겨울 리투아니아군이 반격에 착수해 세르페이스크와 메시초프스크를 탈환했지만, 1493년 1월 모스크바 원정대가 뱌지마를 공략하고 스몰렌스크를 위협했다.
1494년, 알렉산데르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점령지를 그대로 가져가는 것을 인정하는 조건하에 이반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양자간의 휴전을 공고히 하기 위해 1495년 2월 15일에 빌뉴스 대성당에서 이반 3세의 딸인 헬레나 이바노브나와 결혼했다. 헬레나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참금도 없이 찾아온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줬다며 알렉산데르를 칭송했다. 알렉산데르는 1051년 8월에 아내에게 크나이지체, 테테린, 스몰니아니, 흐라디슈체 및 윙치체의 영지를 부여했다.
이후 수년간 잠잠했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폴란드가 몰다비아 공국의 슈테판 3세에게 수체아바 근교 코즈민 숲 전투에서 완패한 뒤 위축된 모습을 보이자 1500년 5월 병력을 세 부대로 나눈 뒤 토로페츠, 스몰렌스크, 브랸스크를 향해 진격했다. 야쿠브 자카리치가 이끄는 모스크바 별동대는 브랸스크를 점령하고 총독 스타니슬로바스 바르투셰비추스(Stanislovas Bartuševičius)를 비롯한 포로들을 끌고 갔으며, 뒤이어 므첸스크, 트루브체프스크, 스타로두브, 노브고로드 시에비에르스키, 푸티울, 릴스크, 고멜, 루베츠를 점령했다. 또한 다닐 바실리예비치 셰냐가 이끄는 모스크바군 20,000명은 도로고부즈를 점령하고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
리투아니아의 대 헤트만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가 스몰렌스크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지만, 1500년 7월 14일 비드로자 전투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모스크바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고 스몰렌스크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한편, 안드레이 표도로 비치 첼라드닌이 이끄는 세번째 모스크바 분견대는 토로페츠를 점령하여 북부 리투아니아 국경지대를 유린한 뒤 리투아니아군이 반격에 착수하기 전에 물러났다. 여기에 멩글리 1세 가라이가 이끄는 크림 타타르군은 모스크바군과 협력해 키예프와 르부프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알렉산데르는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해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지에서 대규모 용병을 모집해 반격에 착수하려 했다. 그러면서 형 얀 1세에게도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몰다비아 공국에게 완패한 뒤 폴란드군 전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에 새로운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얀 1세는 맏형인 보헤미아 왕국 국왕 블라디슬라프와 함께 모스크바에 사절단을 보내 리투아니아와 모스크바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이반 3세가 완고한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리투아니아는 튜튼 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10년 동맹을 맺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1501년 6월 17일, 폴란드 국왕에게 복종하길 거부한 튜튼 기사단을 응징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던 얀 1세가 토룬에서 급사했다. 이후 피오트르쿠프에 긴급 소집된 세임은 그해 10월 3일 알렉산데르를 차기 국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알렉산데르는 모스크바와의 전쟁에서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낼 수 있겠다고 여기고 크라쿠프로 곧장 이동했다. 1501년 12월 12일 바벨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이자 막내동생 프레데리크 야기엘론치크 추기경의 주관하에 폴란드 국왕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아내 헬레나는 정교회 신앙을 고수했기에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폴란드 왕비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알렉산데르는 폴란드 귀족들이 자신을 폴란드 왕으로 추대하는 대가로 제시한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그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세습 권리를 포기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된다는 내용의 미엘니카 연합 칙령을 반포했으며, 세임에 폴란드 통치를 실질적으로 행사할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에 왕이 국고를 쓸 때 세임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왕실 물품의 분배 역시 제한되었다. 알렉산데르는 그 대가로 폴란드 귀족들로부터 병력과 물자 지원을 받아내고 모스크바와의 전선에 투입했다.
한편, 이반 3세는 알렉산데르가 폴란드 국왕이 되기 위해 리투아니아를 떠난 틈을 타 므스치슬라우를 포위 공격했지만 리투아니아의 대 헤트만인 스타니슬로바스 요나비추스 케스가일라(Stanislovas Jonavičius Kęsgaila)가 이끄는 구원군에 의해 패퇴했다. 1502년, 이반 3세의 아들 드미트리 이바노비치가 지휘하는 모스크바군이 오르샤를 점령하고 비쳅스크 일대를 황폐화시킨 뒤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 이에 리투아니아 장군 스타니슬로바스 키슈카(Stanislovas Kiška ?~1513)가 800명의 용병대와 귀족 사병대를 이끌고 모스크바군의 보급로를 끊고 습격전을 이어갔고, 디미트르는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스몰렌스크 요새를 돌파하지 못했다. 그해 9월 13일, 튜튼 기사단이 스몰리나 호수 전투에서 압도적인 숫자를 앞세운 모스크바군을 격파했다. 이에 모스크바군은 스몰렌스크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1503년 3월, 이반 3세는 알렉산데르의 부인이자 자신의 딸인 헬레나의 간절한 설득을 받아들여 리투아니아와 6년간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 조건으로, 아래의 영토를 모스크바가 가지는 것을 받아들이게 했다.
- 베르호프 공국의 모든 영토
- 세베르시나 공국 내 체르니고프, 스타로두프, 고멜 ,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릴스크
- 키예프 공국의 류베치와 푸티블
- 므스치슬라우 공국 내 포포바 고라, 므글린
- 스몰렌스크 남부의 브랸스크, 트룹쳅스크, 라하다시, 포체프
- 스몰렌스크 북부 및 동부의 도로고부시, 토로페츠
- 폴라츠크 북동부의 오스트리, 네벨
또한 알렉산데르는 이반 3세가 "모든 루스인의 통치자"를 자처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고, 모스크바 상인이 리투아니아 영내에서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하는 걸 보장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이 협약으로 인해 영토의 1/3을 모스크바 대공국에 빼앗겼다.
1504년, 알렉산데르는 단치히를 방문해 그들의 특권을 확인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무역을 이 항구도시에 의존했다. 1505년에는 라돔에서 열린 세임에 참석해 일명 "니힐 노비(Nihil novi: 새로운 것이 없다)"로 명명된 세임 헌법을 승인했다. 니힐 노비는 헌법에 명기된 라틴어 문구인 "Nihil novi [...] sine communi Consiliorum et Nuntiorum Terresterium consensu(영주와 지주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것이 없다)"를 축약한 것으로, 폴란드 국왕이 세임의 동의 없이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금지했고, 단지 왕실에 직속된 도시, 교육, 종교, 유대인, 봉토, 왕실 토지의 농민 및 광산 문제에 대해서만 독립적인 칙령을 내릴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왕의 입법 권한은 매우 제한되었고, 폴란드 귀족들의 권세는 한층 더 강력해졌다.
1506년, 크림 칸국에 소속된 타타르인 5,000명이 멩글리 1세 가라이 칸의 아들 가라이 페티와 부르나쉬의 지도하에 2달 동안 1,800km를 주파하면서 각지를 약탈했다. 7월 20일 클레크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 진영을 세운 뒤 민스크, 나바흐루다크, 아시미아니, 리다, 볼로비스크 등 반경 100km 내 도시 및 촌락들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병에 걸린 채 리다에 체류하던 알렉산데르는 리투아니아 헤트만 스타니슬로바스 키슈카와 왕실 원수 미콜라스 글린스키스에게 지휘권을 맡겨 타타르인들을 몰아내게 했다. 이에 따라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 7,000명의 병력을 소집한 두 사람은 7월 30일 리다에서 출격했다. 그러다 도중에 키슈카가 병에 걸려 더 갈 수 없게 되자, 글린스키스가 전군을 홀로 통솔하기로 했다.
1506년 8월 5일, 글린스키스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클레크에서 타타르군과 격돌했다. 그 결과 타타르군은 크게 패하여 도주했고, 사로잡힌 타타르 병사들은 그들이 파괴한 많은 정착지에 정착했다. 알렉산데르는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에 기뻐했지만, 자신이 곧 사망할 것을 직감하고 빌뉴스로 갔고, 그해 8월 19일 그곳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을 폴란드로 데려가지 말고 빌뉴스에 그대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그의 유해는 빌뉴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헬레나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했기에, 손아래동생 지그문트 1세가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즉위하였고 이어서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