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4 19:5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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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국
Рѹ́сьскаѧ землѧ

Rus'skaya zemly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0px-Alex_K_Kievan_Rus..svg.png
국장 어?[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evanRus1000.png
[2]
882년 ~ 1283년
위치 동유럽
수도 키예프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벨리키 크냐즈(대공)
주요 대공 올레그(882~912)
볼로디미르 1세(980~1015)
야로슬라프 1세(1019~1054)
볼로디미르 2세 모노마흐(1112~1125)
언어 고대 동슬라브어, 교회 슬라브어,
고대 노르드어
종족 루스인(동슬라브인), 노르드인
종교 정교회, 슬라브 종교
통화 그리브나
성립 이전 루스 카간국
하자르 카간국
멸망 이후 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수즈달
1. 개요2. 전성기3. 문화4. 경제5. 쇠퇴
언어별 명칭
고대 동슬라브어 Рѹ́сьскаѧ землѧ[3] / Рѹ́сь
(Rus'skaya zemlya / Rusĭ)
우크라이나어 Київська Русь
러시아어 Ки́евская Русь
벨라루스어 Кіеўская Русь
그리스어 Κράτος των Ρως
영어 Kievan Rus'

1. 개요

동(東)슬라브 민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이다. 창시자는 류리크의 친족이자 왕조의 후계자인 올레크 공(公)으로 오늘날 노브고로드 부근였던 근거지를 882년 키예프[4]로 옮기면서 시작된다.

슬라브족의 이동 이후, 분화된 슬라브족들 중 12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었던 동슬라브 부족들이 키예프 공국에게 정복되면서 통일이 되었다.

2. 전성기

원주민인 슬라브 및 우랄계와 북유럽에서 이주해 온 바이킹계 주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미 올레크의 뒤를 이은 스뱌토슬라프 대에 하자르의 수도 아틸을 함락했고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거의 점령하는 등 그 군사력을 입증한 바 있다. [5] 이런 키예프 공국의 병사들의 활약을 본 동로마 제국바랑인 친위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스뱌토슬라프의 아들인 볼로디미르 1세가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누이 안나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받아들였고 이후 정교회가 정식으로 국교로 인정되었다. 때문에 이후 정교회는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인들의 명실상부한 전통 종교가 되었다. 키예프 상인들은 드네프르 강흑해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 교역했으며 볼가 강의 아틸[6]과 불가르[7]를 거점 삼아서 압바스 왕조와 교역했다.

이후 야로슬라프 1세가 재위하면서 영토가 확장되고 11세기 중반에 최전성기를 이른다. 야로슬라프 1세는 자신의 세 공주들을 각각 프랑스, 헝가리, 노르웨이 왕에게 시집을 보내고, 자신의 여동생들을 폴란드 국왕, 동로마의 황자와 혼인을 시켰으며, 그 자신도 스웨덴 공주와 혼인을 맺는 등 적극적인 혼인 외교정책을 펼쳐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을 피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한편 중세 유럽의 문화적 패권국인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를 방해하는 페체네그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적극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남긴 상처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서유럽을 능가하는 문화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 당시 키예프 공국의 문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예를 들자면, 야로슬라프 1세의 딸 중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에게 시집 간 안나 야로슬라프나[8]가 1050년에 편지를 보내는데, 내용 중에 '아버지께서 저를 보낸 나라는 정말 야만적인 나라예요. 주택은 어두침침하고, 성당은 끔찍하고, 문화는 미개해요.'라는 내용이 있을 지경이다. 이 외에도 루스카야 프라우다』는 우크라이나 최초의 법전을 편찬하는 등 키예프 공국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며 번창하게 된다.

그러나 후술할 몽골의 침략으로 키예프는 화려한 수도에서 20여명이 사는 촌락으로 변할 정도로 쇠퇴했고,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대제 시기가 돼서야 몽골의 통치 동안 발전한 서유럽과의 기술력 차이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3. 문화

파일:external/kiev-assist.com/ancient-Kiev-by-Kiev-Assist-400x240.jpg

목조로 지은 교회 건축물들이 그 아름다움과 특유의 건축 형태로 유명했으나, 수명이 짧은 목조 건물 특성상 키예프 공국의 건축물 중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없다. 다만 역사 기록과 그림을 바탕으로 키예프 공국 시대의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들을 복원한 야외 박물관이 우크라이나 키예프리비우 등에 있으니 혹시 우크라이나에 들를 일이 있으면 잠시 방문해볼 것을 권한다.

사가 문학이 발전했으며, '이고르 대공의 원정기' 같은 수준 높은 고전 서사시 작품도 쓰여졌다. 정교회 수도사들에 의해 쓰여진 원초 연대기는 류리크 왕조의 기원부터 1110년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슬라브족의 초기 역사, 분파, 습속에 관한 여러가지 구전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1146년부터 1154년 사이에 일어난 공후 이쟈슬라프 2세의 키예프 왕위 계승 투쟁을 비롯한 이야기를 담은 '키예프 연대기'도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문학사에서는 키예프 공국 시대의 문학 작품을 우크라이나 문학의 시초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을 정도.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후에도 13세기 후반 갈리치아-볼히니아에서 키예프 공국 시절 연대기에 영감을 받아 '볼히니아 연대기'를 편찬하였다. 열왕기이사야서의 영향을 받은 볼히니아 연대기는 교회와 관련된 일보다 세속적이고 군사적인 일들에 관해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연결하는 무역을 통해서 동로마 문화 및 중동의 선진 문화를 적극 흡수하면서, 당대에는 서유럽보다 더 높은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식받은 동방 정교회와 이콘화 전통 또한 우크라이나 문화를 특징 짓는 키예프 공국의 유산이다. 다만 정교회 신앙이 키예프 일반 주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키예프 공국 내에서는 기독교 교리와 다른 종교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해 줄 교육받은 성직자의 수가 부족했던 연유로 인해, 키예프 루스 주민 대다수는 기독교와 슬라브 토속 신앙을 둘 다 믿는 이중신앙을 가지고 살았다.

4. 경제

노브고로드, 스몰렌스크, 체르니고프(체르니히우), 키예프, 류베치, 프스코프, 폴로츠크, 비텝스크 같은 키예프 공국의 주요 도시들은 대개 스칸디나비아와 흑해를 잇는 수상 교통로에 건설되었다. 특히 흑해와 가까운 키예프와 스칸디나비아와 가까운 노브고로드는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서유럽 출신 여행자들은 키예프 루스에 많은 도시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루스를 도시의 나라라고 칭했다. 상인들의 권리는 '스메르드'라고 불리는 자유민 농민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했는데, 상인을 살해할 경우에는 자유민 농민을 살해한 경우의 벌금보다 두 배 이상 되는 액수를 지불해야 했다.

상인들의 권리가 높았던 이유는 이들이 키예프 루스의 전사 계급이기도 했으며, 대외 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었다. 키예프 루스의 상인들은 동로마 제국, 중부 유럽, 스칸디나비아, 이슬람 칼리프조와 교역했다. 동로마 제국에는 밀랍, 꿀, 아마, 가죽, 대마, 귀금속, 무기, 갑옷을 주로 수출했으며 이슬람 칼리프조에는 주로 노예와 모피를 수출했다. 오늘날 스페인의 후우마이야 왕조의 노예 대부분은 키예프 공국에서 중부 유럽의 유대인 상인들을 통해 수출된 슬라브족 노예였다.

키예프 공국에서는 화폐를 거의 주조하지 않았는데, 이슬람 칼리프조와 동로마 제국에서 유입된 화폐가 많았던데다가 자체적인 농업과 공업이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11세기 이후부터는 흐리우냐[9]라는 화폐 단위가 생기는데, 이것은 400그램 중량의 은괴였다. 흐리우냐를 절반으로 자른 것을 루블 흐리우냐 또는 줄여서 루블이라고 했다. 은괴에는 중량 표기와 함께 공작의 인장을 새겼다.

5. 쇠퇴

파일:13세기 초 루스 지도.png

여러 공국으로 분열된 키예프 공국

12세기 초반부터 흑해스칸디나비아를 잇는 무역로가 쇠퇴함에 따라서 키예프 공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이 잡혀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무역 쇠퇴는 치명적이었다. 더욱이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이 갖춰졌다기 보다는 왕위 계승자들이 각 지방 도시를 다스리며 상황에 따라 서로 내전을 벌이는 상태였기에, 국력을 단결시키기 어려웠다. 종종 볼로디미르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쇠퇴기에 접어든 키예프 공국을 중흥시켰을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마련되지 못했다. 하자르 칸국페체네그인을 주무르던 키예프 공국이었지만, 말기에 접어들면 유목민족인 쿠만볼가 불가르의 침략 앞에 끙끙대기 시작한다.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보리스테네스 강(드니프로 강) 일대 비옥한 흑토 평야는 전성기 시절에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평야 지대 특성상 유목제국의 기습과 침략에 매우 취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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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13세기 중반에 몽골 제국이 침공하면서 처참하게 멸망하였다. 키예프 공국의 난민들은 북쪽에 척박한 삼림 지대로 대거 피난을 떠났다 한다.

이후 키예프 공국의 영토 대부분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리게 된다.

[1]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국장은 여기서 유래했다.[2] 1000년경의 강역.[3] 루스 공국이란 뜻이 아니라 루스인들의 땅이란 뜻이다. 당시에는 '키예프'나 '공국'이란 말은 나라 이름으로 쓰이지 않았다.[4] 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당시 발음은 고대 동슬라브어로 키예부(Кꙑѥвъ)에 가까웠다. 현재는 우크라이나어로 키이우(Київ).[5] 유목 민족이었던 폴로베츠 인들의 어머니들은 그의 이름으로 겁을 주곤 했다. 나폴레옹 사례와 비슷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정벌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유목 민족인 페체네그 인에게 살해당한다. 당시 페네체크 병사들은 그의 두개골로 물 따위를 마셨다 한다. 흠좀무[6] 오늘날의 아스트라한 근처[7] 오늘날 타타르스탄카잔 근교[8] Anna Yaroslavna. 키예프의 안나(Anna(Anne) of Kiev)라고도 불린다.[9] 러시아어로는 그리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