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20:11:54

스뱌토폴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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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제6대 대공
스뱌토폴크 블라디미로비치 | Sviatopolk Vladimirovich
파일:Sviatopolk_I_of_Kiev.jpg
<colbgcolor=#005bbb><colcolor=#ffd400> 이름 스뱌토폴크 블라디미로비치[1]
Sviatopolk Vladimirovich
현대 러시아어 이름 Святополк Владимирович
현대 우크라이나어 이름 Святопо́лк Володимирович
고대 슬라브어 이름 Свѧтоплъкъ Володимѣровичь
별명 저주공[2]
전임자 블라디미르 1세
후임자 야로슬라프 1세
종교 로마 가톨릭
생몰년도 979년?[3] ~ 1019년
재위 키예프 루스 대공
1015년 7월 15일 ~ 1019년[4]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골육상잔2.3. 야로슬라프의 반란2.4. 몰락
3. 여담

[clearfix]

1. 개요

키예프 루스의 제6대 대공. 블라디미르 1세가 사망할 시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들이었다. 공위 계승자가 아니었으나 형제 간의 골육상잔을 통해 대공위에 올랐고, 결국 오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사망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979년 전후에 야로폴크 1세의 첩이었다가 그의 사후 블라디미르 1세가 취한 동로마 출신 수녀에게서 태어났다. 블라디미르 1세가 그녀를 취할 때 그녀는 이미 임신 중이었으므로 사실 스뱌토폴크 1세는 야로폴크 1세의 아들임이 거의 확실하나, 일단 블라디미르 1세는 스뱌토폴크를 아들로 받아들였다. 블라디미르 1세가 스뱌토폴크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 것은 아니다. 블라디미르 1세의 아들들은 대부분 블라디미르 1세의 아버지 스뱌토슬라프 1세를 기리는 의미에서 '슬라프'를 돌림자로 쓰고 있는데, 스뱌토폴크만 유독 그의 친아버지일 가능성이 높은 야로폴크 1세와 같은 '폴크'를 이름 뒤에 붙였다. 자신이 죽인 형에 대한 부채 의식이었던지, 블라디미르 1세는 스뱌토폴크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상속도 친아들들과 똑같이 해주었다. 그는 공위 계승권 3위에 자리했으며, 988년에 투로프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이런 블라디미르 1세의 태도와는 반대로, 스뱌토폴크는 일찌감치 그의 친아버지가 누군지 분명히 의식하며 자랐다. 그의 문장이 이를 보여준다. 블라디미르 1세의 아들들은 일괄적으로 블라디미르 1세 문서에 있는 그의 문장과 거의 비슷한 모양의 문장을 사용했으나, 스뱌토폴크는 왼쪽 위에 십자가를 그린 독자적인 문장을 사용한다. 이 때문에 블라디미르 1세부터 부자 간 관계가 불온했는지, '원초 연대기'는 스뱌토폴크 1세의 아비가 둘이어서 그의 일생이 저주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투로프 공작으로 재위하던 중 1013년에 폴란드 영지의 대공인 용감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딸[5]과 결혼했다. 볼레스와프 1세는 정력적인 인물로 키예프 루스와 소규모 무력 분쟁을 겪고 있었는데, 이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정략결혼을 타진한 것이다. 또한 투로프 공작령이 폴란드와 붙어있었기 때문에 스뱌토폴크에게도 직접적인 이득이 되는 결혼이었다.

2.2. 골육상잔

아내가 된 폴란드 공주와 그녀가 고해성사를 위해 데려온 콜베르 주교 라인부른은 스뱌토폴크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본래 가족들과 같이 동방 정교회를 믿던 스뱌토폴크를 로마 가톨릭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스뱌토폴크에게 원수나 다름 없는 아버지를 무찌르고 키예프 루스의 대공위를 쟁취하라고 바람을 넣었다. 이에 설득된 스뱌토폴크는 아버지를 상대로 반기를 들려 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1세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이들의 음모를 눈치챘고, 선제적으로 기습하여 스뱌토폴크, 그의 아내, 라인부른 주교까지 모조리 투옥시켰다. 스뱌토폴크는 키예프에 구금되어 있다가 1015년 초에 석방되었거나 탈옥해서 감옥을 빠져나왔다.

당시 시국은 혼란스러웠다. 블라디미르 1세는 그가 동로마 공주 안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중 장남, 로스토프 공작 보리스에게 공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런데 블라디미르 1세의 아들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던 노브고로드 공작 야로슬라프가 계승에 불만을 표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블라디미르 1세는 이를 정벌하려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공교롭게도 블라디미르 1세가 늙은 나이에 과로하다 사망하였다. 그 뜻을 알던 측근들은 블라디미르 1세의 사망을 숨기고 페체네그족과의 전선에 나가 있던 보리스를 몰래 키예프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스뱌토폴크가 블라디미르 1세의 사망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는 즉각 키예프를 점거하고 대공 즉위를 선언했다. 이에 키예프 시민들이 떨떠름하게 반응하자 재물을 뿌려서 환심을 샀다.

이 소식을 들은 보리스의 군대는 분개하여 보리스에게 키예프로 진군하자고 청했으나 보리스는 저항을 거부하고 스뱌토폴크 1세의 즉위를 인정하기로 했다. 이에 군대는 흩어져 키예프로 돌아갔고, 보리스는 적은 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전선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스뱌토폴크 1세는 공위의 가장 큰 위험 요소인 보리스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우선 보리스를 아들과 같이 대하겠다고 선언한 후, 보야르 푸트샤를 보리스에게 보냈다. 푸트샤는 보리스를 칼로 강하게 찌른 후 자루에 담아 키예프로 끌고 갔다. 키예프에서 자루를 열어 봤을 때, 보리스는 중상을 입은 채 간신히 숨만 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를 보기 괴로워한 한 바랑인 전사가 창으로 단숨에 목숨을 끊어 주었다. 보리스를 죽인 후, 스뱌토폴크 1세는 후환의 싹을 완전히 자르기 위해 보리스의 동생 무롬 공작 글레브도 키예프로 불러들였다. 글레브가 키예프로 가는 길에 스몰렌스크 근처에서 노브고로드 공작 야로슬라프와 만났다. 스뱌토폴크 1세를 적대하던 야로슬라프는 글레브에게 키예프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면서 키예프로 가면 살해당할 것이라고 충고했으나 글레브는 아버지와 형의 명복을 빌어야 한다며 꿋꿋이 키예프로 갔다가 그대로 살해당했다. 보리스와 글레브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또 다른 이복형제 드레블랸스크 공작 스뱌토슬라프는 스뱌토폴크 1세에게 살해당할까봐 두려워 그의 외가이자 키예프 루스의 속국인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의 백크로아티아로 도망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스뱌토폴크 1세는 분명히 도둑이 제 발 저린 상황일 것이라 생각하고 군대를 급파해 그를 잡으라고 명령했다. 스뱌토슬라프는 전력으로 도망쳤으나 루스 서남부의 스코레라는 마을에서 따라잡혔다. 결국 스뱌토슬라프는 일곱 아들 , 그리고 부하들과 함께 스뱌토폴크 1세의 군대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전사했다. 일곱 아들들도 모조리 죽었고 이를 본 스뱌토슬라프의 아내는 인근의 산에 올라가 투신자살했다. 이렇게 스뱌토폴크 1세는 형제 셋을 죽이고 대공위에 즉위하였다. 루스 국민들은 이런 그의 모습에 완전히 질렸고, 그를 '저주 받은 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만 최근에 북유럽에서 '에이문드의 사가'라는 기록이 나오면서 새로운 가설이 등장했다. 보리스와 글레브를 살해한 이가 스뱌토폴크 1세가 아닌 야로슬라프 1세라는 것이다. 에이문드의 사가에는 동쪽의 두 왕 야리슬레이프와 부리슬레이프의 전쟁이 나오는데, 여기서 주인공과 바이킹들이 야리슬레이프의 편으로 참전해 부리슬레이프를 죽이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기록의 시대와 단어의 어감 상 야리슬레이프가 야로슬라프, 부리슬레이프가 보리스일 가능성이 높은데다가 보리스와 글레브는 스뱌토폴크 1세의 즉위를 인정하는 측이었으므로 야로슬라프가 이들과 싸워 이기고 이들을 죽인 죄를 스뱌토폴크 1세에게 덮어 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부리슬레이프가 스뱌토폴크 1세의 장인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일 가능성도 만만치 않게 높은 데다가 루스 쪽 기록이 일괄적으로 스뱌토폴크 1세가 친족살해자라고 지목하고 있으므로, 여전히 정설은 스뱌토폴크 1세가 세 형제를 죽였다는 것이다.

2.3. 야로슬라프의 반란

노브고로드 공작 야로슬라프는 블라디미르 1세 생전에 이미 반란의 기치를 들어올렸을 만큼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 이런 그가 스뱌토폴크 1세의 날치기 즉위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스뱌토폴크 1세 즉위 다음 해인 1016년에 야로슬라프는 내전을 시작했다. 노브고로드의 징집병들과 북유럽에서 온 바이킹 정예병들을 이끌고 키예프로 진군했다. 이에 스뱌토폴크 1세 역시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고, 두 군대는 류베치라는 곳에서, 드네프르 강을 끼고 조우했다. 양측 모두 섣불리 크고 거친 드네프르 강을 거쳐 선공하기를 꺼려서 우선 각자 진을 쳤다. 스뱌토폴크 1세는 야로슬라프가 쉽게 선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술과 고기를 내어 잔치를 준비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야로슬라프는 과감하게 선공을 감행했다. 편하게 풀어져 있던 스뱌토폴크 1세의 군대는 기습 공격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고, 박살이 나고 말았다. 많은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도망치다가 인근의 강과 호수에 빠져죽었다. 스뱌토폴크 1세는 간신히 빠져나와 폴란드로 도망쳤다.

야로슬라프는 그대로 키예프로 입성해 야로슬라프 1세로써 대공 즉위를 선언했다. 하지만 스뱌토폴크 1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겐 강력한 처가 폴란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1017년, 스뱌토폴크 1세는 페체네그족을 매수하여 키예프로 진군, 도시를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야로슬라프는 이미 키예프의 방어 시설을 강화한 뒤였고, 아무리 강력한 페체네그족들이라도 결국 유목민족이었던 만큼 공성에는 약했다. 일부 성벽을 무너뜨리기도 하는 등의 혈투 끝에 스뱌토폴크 1세는 패배했고 군기도 빼앗겼다. 자력으로 복위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장인 볼레스와프 1세에게 지원을 부탁했다. 이에 볼레스와프 1세는 친히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스뱌토폴크 및 페체네그족들과 합류, 키예프로 진군했다. 이에 야로슬라프 1세도 요격을 나서, 루스 서쪽의 부그 강에서 두 군대가 조우했다. 꼭 앞서 있었던 류베치 전투와 같은 양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방심한 쪽은 야로슬라프 1세였다. 야로슬라프 1세가 진을 치고 쉴 것을 명령할 때 볼레스와프 1세가 과감한 도하를 감행, 대승을 거두었다. 야로슬라프는 키예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즉각 그의 본거지인 노브고로드로 도망쳤고, 스뱌토폴크 1세는 폴란드 군대를 앞세우고 키예프에 입성할 수 있었다.

2.4. 몰락

하지만 다시 찾은 권세는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폴란드 군대는 키예프에 몇달 간 주둔하면서 마구잡이 약탈을 자행하는 등 불손하게 굴었고, 볼레스와프 1세도 스뱌토폴크 1세의 이복여동생들을 멋대로 첩으로 삼는 등 방자하게 굴었다. 이에 키예프 시민들은 분노했고, 결국 폴란드 군대에 야습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 볼레스와프 1세는 깜짝 놀라 폴란드로 회군했다. 폴란드 군대가 돌아가자 스뱌토폴크 1세에겐 군사력이 거의 사라졌다.

한편, 폴란드 군대의 강함을 맛본 야로슬라프 1세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아예 노브고로드까지 버리고 스웨덴으로 망명하려고 했다. 그러자 노브고로드의 포사드니크[6] 콘스탄틴 도브루니치[7]가 야로슬라프 1세가 도망치려고 준비한 배를 불태워 버리고 그에게 정신 차리고 맞서 싸울 것을 간언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야로슬라프 1세는 다시 군대와 자금을 모아 1019년에 남진했다. 폴란드 군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스뱌토폴크 1세는 패배하고 다시 도망쳤다. 야로슬라프 1세는 키예프에 재입성하였다. 스뱌토폴크 1세는 다시 페체네그족의 힘을 빌렸다. 이에 야로슬라프 1세도 출진, 이전에 보리스가 살해당했던 페체네그족과의 최전선 알타 강에서 만났다. 이번 싸움은 야로슬라프 1세가 완승을 거두었다. 페체네그족들은 박살나서 도망쳤고, 전투 중 스뱌토폴크 1세마저 부상당했다. 그는 부상 입은 채로 하염없이 도망치다 1019년에 폴란드 또는 체코 어딘가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은 후에도 계속 후대에 역대 최악의 키예프 루스 대공으로 회자되었고, 민담에 악역으로 등장했다. 가족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3. 여담

최근 폴란드의 보드지아라는 마을에서 1020년경에 만들어진 전사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 출토된 유골의 하플로그룹을 조사해 본 결과 루스인이었고, 유물의 만듦새가 뛰어나 상당히 고위 인사의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1010년~1020년 사이에 폴란드 내륙에 묻힐 만한 키예프 루스 고위급 인사는 스뱌토폴크 1세 밖에 없으므로 이 유골은 스뱌토폴크의 것으로 추정된다.
[1] 그의 출생의 비밀 때문에 스뱌토폴크 야로폴코비치로도 불린다.[2] 러시아어로는 Окаянный, 발음은 오까얀늬-[3] 975년에서 980년 사이로 비정된다.[4] 1016년에 야로슬라프 1세에게 찬탈당했다가 1018년에 일시적으로 복위하였다.[5] 야사에는 두브라프카라는 이름이었다고 하나, 역사서에는 이름이 실려있지 않다.[6] 키예프 루스의 시장 직.[7] 블라디미르 1세의 외삼촌 도브리냐의 아들로 블라디미르 1세에게는 외사촌동생, 야로슬라프 1세에게는 5촌 당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