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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테니아 왕국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Королєвство Русь | Королівство Русь | ||
<rowcolor=#fff> 왕실기 | 국장 | |
1199년 ~ 1349년/1392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키예프 루스 | 리투아니아 대공국 | |
폴란드 왕국 | ||
<colbgcolor=#005bbb> 위치 | 동유럽 | |
수도 | 르비우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국왕 | |
언어 | 고대 동슬라브어, 루테니아어 | |
종교 | 정교회 | |
주요사건 | 1199년 갈리치아 합병 1240년 키예프 루스 멸망 1323년 왕국 분열 1349년 폴란드-갈리치아 합병, 멸망 1392년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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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에 세워졌던 중세(고대) 동슬라브의 나라."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라고도 하며 루테니아 루스의 첫 왕국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우크라이나는 이 나라를 키예프 루스와 더불어 우크라이나 역사 최초의 나라로 여긴다.
2. 역사
2.1.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Галицько-Волинське князівство)
1222~3년부터 개시된 몽골의 침략 결과 수즈달, 리야진(랴잔), 키예프 등이 차례로 함락되면서 키예프 공국은 멸망했다. 키예프 대공국의 영토였던 곳 대다수는 몽골과 투르크계 타타르인의 지배를 받게 되어 타타르의 멍에라는 암울한 지배기에 놓인다.
한편, 키예프 공국의 남서부 국경지대에 있는 갈리치아와 볼히니아 지방은 몽골의 침략에 의한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이 지역은 공후들보다는 지주들의 힘이 더 막강했으며 폴란드와 헝가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직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 키예프 대공국에 속하던 시절인 1187년에 헝가리 왕이 이 지역을 정복하려다 실패했으며, 12년 후 볼히니아의 공작 로만 므스티슬라비치(Рома́н Мстисла́вич)가 갈리치아를 합병하여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통합했다. 로만은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3세의 요청을 받고 쿠만족들과 싸워 연거푸 대승을 거두며 1201년 발칸 반도에서 쿠만인들을 축출해내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알렉시오스 3세의 조카 안나 공주와 결혼한다. 로만은 1205년 폴란드인의 매복 기습을 받고 전사했다.
2.2. 다닐로의 건국
로만이 죽은 당시 큰아들 다닐로(Данило Романович)는 겨우 세 살이었고 막내아들 바실코는 돌잡이 아기였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의 간섭을 받으며 다시 분열되었다.[1]로만의 아들 다닐로는 이 와중에 이웃 지역 공후들의 궁정에서 떠돌아다녀야 했다. 다닐로는 이 와중에 일반 루테니아인 농부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현실 감각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과거 로만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에게 격려를 받으면서 자라났다. 다닐로는 1221년부터 1264년까지 재위하며 선정을 펼치며 볼히니아를 부흥시켰다. 1230년대가 되자 다닐로와 그의 형제들은 볼히니아를 헝가리로부터 탈환하였다. 다닐로는 세금을 감면하고 도시의 민회를 부흥시켰기에 언제나 루테니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1245년 다닐로와 바실코는 헝가리 국왕의 사위인 갈리치아의 로스티슬라프 공을 격파하며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다시 통일했다. 갈리치아로 건너간 다닐로는 르비우 시를 건설하고, 그의 동생 바실코는 볼히니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다른 형제들의 경우와 다르게 이들은 통치권을 나누고 나서도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냈고,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하나의 나라처럼 운영되었다.
몽골 제국의 침략군이 1240년에 키예프 루스를 밀어버리고 나아가 갈리치아와 볼히니아까지 파괴시켜려 들자 다닐로는 당장 무리하게 싸우는 방법 대신에 직접 바투 칸에게 가서 조공을 바치는 방법을 택하고 타타르(몽골)로 가는 교황의 사절단에 합류했다. 다닐로는 서유럽과 손을 잡고 타타르인을 무찌르려는 계획을 세웠고, 1253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왕(Король Русі)으로 승인받고 드로히친에서 그리고 드로히친에서 교황 특사 오피초 데 메차노(Opizo de Mezzano) 주교가 주재한 대관식에서 왕관을 받았다.[2] 다닐로가 왕으로 등극하면서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의 이름은 루테니아 왕국, 즉 루스 왕국(Ру́ське королі́вство)으로 변경되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교황은 결국 다닐로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정교회 주민들의 반감으로 결국 교황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지만, 왕이라는 칭호와 루테니아 왕국이라는 국명은 계속 이어졌다. 다닐로는 1256년에 몽골인들을 볼히니아에서 몰아내는덴 성공했으나, 1260년에 몽골이 다시 원정을 감행하자 결국 몽골의 우위를 인정하며 결국 다시 조공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다닐로 치세에는 문학이 발전했으며, 교역로를 통한 무역으로 상업이 발전하고, 독일인과 폴란드인의 이주로 인구가 계속 증가하는등 번영을 누리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2.3. 전성기
1264년 다닐로가 세상을 떠났고 뒤이어 즉위한 동생 바실코(Василько Романович)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루테니아 왕은 다닐로의 아들 레우 1세(Лев Дани́лович)가 계승했다. 서유럽의 힘을 빌려 몽골에 대적한 아버지와 달리 레우는 몽골과 친하게 지냈다. 북쪽으로는 벨라루스의 지배권을 두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대결하며, 서쪽으로는 폴란드 왕국을 몽골과 연합해 많은 도시들을 약탈하고 점령하거나, 수도 크라쿠프를 위협하고 1292년에는 루블린을 차지하는 등 레우는 루테니아 왕국의 전성기를 계속 이어갔다. 1301년 레우 1세가 세상을 떠난 후 레우의 아들 유리 1세(Ю́рій Льво́вич)가 왕위를 이었는데 유리의 치세 아래에서 루테니아 왕국은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번영을 누렸으나 폴란드로부터 빼앗은 루블린을 다시 빼앗기는 등 쇠퇴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2.4. 쇠퇴와 멸망
유리 1세는 7년의 짧은 치세 아래 1308년 사망했고 왕국은 유리의 두 아들인 안드리(Андрій Юрійович)와 레우 2세(Лев II Ю́рійович) 형제가 공동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형제는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리투아니아와 몽골에 대적하였는데 1323년 몽골과의 전쟁에서 형제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형제 모두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루테니아 왕국을 다스리던 다닐로의 직계는 끊기고 말았고 루테니아 왕국은 다시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로 분열되어 갈리치아는 루스인 보야르들이 차지하고 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는 리투아니아 공작 류바르타스가 차지했다.
일단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보야르 3자 간의 합의로 유리 1세의 외손자였던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볼레스와프가 유리 2세(Юрій II)라는 이름으로 루테니아 왕에 등극했는데, 1340년 유리 2세의 등극 이후 커져가는 폴란드의 영향력에 반감을 가진 보야르가 유리 2세를 독살했다. 이를 빌미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가 갈리치아를 침공해 1349년 갈리치아를 전부 병합했다. 볼히니아는 류바르타스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난 이후 사실상 리투아니아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국가 갈리치아-볼히니아는 이 시점에서 사실상 멸망한다.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갈리치아와 볼히니아의 지배권을 두고 1392년까지 전쟁을 벌이다가 1392년 오스트루프 협정으로 갈리치아는 폴란드에, 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로 분할한다는 합의를 보고 분쟁을 끝낸다.
3. 관련 항목
[1] 헝가리가 갈리치아의 영토를 일부 떼어간 덕택에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루마니아에는 오늘날에도 루신인(Rusyns)이라고 불리는 소수민족이 남아있다. 헝가리 국왕의 짧은 갈리치아-볼히니아 지배는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 건설로 이어졌다.[2] 중세 시대에 왕이라는 직함은 교황만이 공인할 수 있는 것으로, 다니엘이 교황에게 왕위를 승인받은 것은 루스 역사에서 유일한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