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오스 2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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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로마 제국 제96대 황제 바실리오스 2세 Βασίλειος 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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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바실리오스 2세 Βασίλειος Β΄ |
이명 | 바실리오스 2세 마케돈 불가록토노스[1] Βασίλειος Β' Μακεδών Βουλγαροκτόνος 불가리아인의 학살자 |
출생 | 958년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사망 | 1025년 12월 15일 (향년 67세)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976년 1월 10일 ~ 1025년 12월 15일 (49년) | |
전임자 | 요안니스 1세 |
후임자 | 콘스탄티노스 8세 |
부모 | 아버지 : 로마노스 2세 어머니 : 테오파노 |
종교 |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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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의 어머니를 제외하고, 그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누구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누구의 사랑을 받지도 못했다. 사랑은커녕 그를 좋아한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절친한 친구도 없었던 듯하다. 비잔티움의 역대 황제들 중 그처럼 고독한 사람은 없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로마 제국 제96대 황제이자 마케도니아 왕조 제9대 황제.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976년에서 1025년에 이르는 49년이라는[2] 기나긴 치세 동안 명장으로서 동쪽의 타우루스 산맥 너머 아르메니아까지 제국의 판도를 넓혔고, 제국 북부를 위협하던 숙적 불가리아 제1제국을 42년 동안의 전쟁을 치른 끝에 멸망시켜 도나우 강 이남의 발칸반도를 수복했으며, 키예프 공국을 정교회로 개종시켰다.
동로마 제국의 대표적 명군으로 여러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대제의 칭호를 받지 못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위시한 교회의 호감 문제가 아니라) 몇 가지 이상한 성격 탓에 당대인들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는 대제(大帝)라 불렸던 후대의 마누일 1세 콤니노스 이상의 평가[3]를 받고 있으며, 명실상부한 동로마 최고의 황제로 꼽히는 경우가 많다.
2. 언어별 표기
그리스어 |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Βασίλειος Β' Βουλγαροκτόνος) |
라틴어 | 바실리우스 2세 불가록토누스(Basilius II Bulgaroctonus) |
영어 | Basil II the Bulgar Slayer |
3. 즉위 전의 삶
로마노스 2세와 테오파노의 장남이었으며 958년에 태어났을 때 로마노스 2세가 공동황제였으므로 포르피로옌니토스(황가의 적자)였다. 재위기간은 962년 ~ 1025년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통치한 기간은 976년 ~ 1025년이었다.로마노스 2세가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붕어하자 황태후 테오파노는 당시 제국 최고의 명장이었던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공동황제로 옹립한 뒤 그와 결혼해 권력의 안정을 꾀하기로 했는데 적자인 바실리오스(5세)와 동생인 콘스탄티노스(3세)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이때 니키포로스가 바실리오스 형제 중 한 명의 대부를 서준 일 때문에 결혼성사가 무효가 될 뻔한 해프닝이 있었다. 그렇게 니키포로스 2세는 바실리오스의 계부가 되었다.
니키포로스 2세는 사라센의 저승사자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장군이었으나 근본적으로 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불가리아와 외교 마찰을 일으키는 등 정치적인 역량이 부족했는데 이는 또다른 쿠데타를 유발했다.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는 니키포로스 2세의 외조카이자 전우이며, 부하였지만[4] 군권 박탈 등 여러 이유로 니키포로스 2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마침 황후 테오파노가 요안니스에게 접근해 유혹했고[5] 두 남녀는 니키포로스 2세를 제거할 기회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969년 12월 11일, 니키포로스 2세는 테오파노와 요안니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계획대로라면 테오파노가 또다시 황후가 되었어야 했으나 황제가 된 요안니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간섭으로 테오파노를 배신했다. 테오파노가 프로티 섬의 수도원으로 추방당하면서 11세의 바실리오스는 어린 동생과 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게 되었다. 테오파노는 요안니스 1세가 붕어한 976년에야 추방이 해제되어 아들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기록은 978년인데 스클리로스의 반란에 맞서 조지아의 군주에게 원군을 요청한 것이었으며, 추방 생활의 후유증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4. 험난한 제위로의 길
4.1. 스클리로스 내전
976년 1월 10일 공동황제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가 붕어하자 바실리오스 2세는 사실상 단독 황제로서 권력을 장악했지만 당시 그는 고작 18세의 정치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에 불과했다. 황제는 자신의 친척이자 시종장(παρακοιμώμενος, Parakoimomenos)인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Βασίλειος Λεκαπηνός)[6]의 후견으로 착실히 국정 경험을 쌓았다. 실권을 장악한 레카피노스는 이 어린 황제를 얕잡아보며 조종하려고 들었다. 이에 황제는 내심 불만을 품었으나 군말없이 따르며 행정과 군사를 익혔다.바실리오스 2세의 집권 초반부는 내전으로 점철되었다. 두 전임 황제(니키포로스 2세, 요안니스 1세)는 모두 무력으로 즉위한(심지어 한 명은 전임 황제를 암살하고 즉위한) 장군 출신 황제였다. 이로 인해 바실리오스 2세의 정통성은 이미 상당히 약해져 있었고, 제국의 귀족들은 앞의 두 사람처럼 황제가 되고자 바실리오스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반란의 중심에는 요안니스 1세의 처남인 바르다스 스클리로스(Βάρδας Σκληρός)와 니키포로스 2세의 조카인 바르다스 포카스(Βάρδας Φωκᾶς)가 있었다.[7]
요안니스 1세가 붕어한 지 몇 달 후인 976년의 봄, 바르다스 스클리로스가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격렬했다. 977년에는 니케아가 반군 손에 넘어갔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또한 반군에게 공격받았다. 이에 레카피노스는 바르다스 포카스를 유배지인 히오스 섬에서 소환하고, 군권을 부여해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비록 충성심은 의심스러웠으나 바르다스 포카스가 요안니스 일가에게 확실한 반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8] 라이벌 제거가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반감 때문이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어쨌거나 포카스는 적극적으로 바실리우스의 요구에 협조하여 스클리로스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979년 스클리로스가 바그다드로 도주하면서 반란은 종식된 듯이 보였다.
4.2.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
979년, 스클리로스의 반란을 진압한 바실리오스 2세는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 황제였다. 젊은 황제는 내정의 안정에 온 힘을 쏟으며 실권자이자 정적인 레카피노스에 대한 견제를 착착 진행해나갔다. 그러던 985년, 바실리오스 2세는 레카피노스가 바르다스 포카스와 내통하여 반란을 계획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레카피노스는 반란 및 부정부패 혐의로 유배형과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바실리오스 2세는 레카피노스가 독단적으로 반포한 모든 법률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숙청 작업을 마무리했다.요안니스 1세의 붕어 당시, 불가리아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사무일은 스스로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를 칭하고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986년에는 사무일이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지역을 공격해 라리사를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바실리오스 2세는 직접 군사 20,000명을 이끌고 사르디카를 공격했지만 불가리아군의 저항으로 실패했고, 오히려 8월 17일 트라야누스 관문이라는 고개에서 매복 중이었던 불가리아군에게 기습을 당해 참패했다. 이 패배로 동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바실리오스 2세에 대한 반란의 움직임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내전의 불씨가 또 당겨진 것이었다.
4.3. 포카스 내전
987년 8월 15일, 바르다스 포카스가 칭제했다. 또다시 내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포카스는 바그다드로 도망친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에게 서로 바실레프스임을 인정하고 공동황제로서 제국을 양분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반긴 스클리로스는 협정을 맺고자 포카스를 찾아갔지만, 이는 포카스의 함정이었다. 스클리로스는 피로포이온 요새에 감금되었고, 후방의 위험을 제거한 포카스는 거병한 후, 서방으로 진군했다. 아비도스로와 크리소폴리스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이때가 바실리오스 2세의 최대 위기였다. 수도는 포위당했고, 자신을 구원해줄 세력은 없었다. 게다가 말이 반란군이지 당시 동로마 제국의 정예 병력은 전부 포카스 휘하의 반란군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설사 항복하더라도 기존의 위치인 꼭두각시 황제가 되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폐위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실리오스 2세는 휘하에 있었던 해군으로 시간을 벌면서 류리크 왕조 키예프 루스의 대공이었던 블라디미르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해 약 6,000명의 바랑인을 지원받았지만[9] 그 대신 그의 여동생인 포르피로예니티 안나를 블라디미르 1세에게 시집보내야 했다.[10]
989년 2월, 바실리오스 2세는 바랑인 병력 6,000명을 중심으로 크리소폴리스를 기습하여, 반란군을 몰살하는데 성공했다. 포카스도 역습을 위해 해군 주둔지인 아비도스를 공격했지만 황제군의 완강한 방어에 막혀 실패했다. 3월에는 바실리오스 2세가 동생인 콘스탄티노스와 같이 아비도스로 진격하여, 아비도스 외곽에서 반란군을 격퇴하고 포카스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11] 포카스의 아내는 피로포이온 요새에 감금시킨 스클리로스를 내세워 반란군 잔당을 모으려고 했지만, 이미 대세는 황제군에게 기운데다가 스클리로스 또한 실명 직전의 노인이었다. 스클리로스는 항복 제안을 받아들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비티니아에서 스클리로스를 만나, 앞으로 이와 같은 내전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스클리로스는 본인 스스로가 반란 주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와 같이 바실리오스 2세에게 제대로 조언했다.
자만해진 총독의 봉급을 삭감하십시오. 전장에 나간 장군에게 너무 많은 자원을 주지 마십시오. 부당한 요구로서 그들을 지치게 만들어, 자기 일에 전념하기도 바쁘게 하십시오. 여인의 의논을 허락하지 마십시오.[12]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쉽지 않게 하십시오. 가장 은밀한 계획은 소수의 사람들하고만 공유하십시오.
과연 바실리오스 2세는 이 조언을 평생에 걸쳐 실천했다. 황제는 스클리로스를 쿠로팔라티스(κουροπαλάτης)에 임명해 여생을 보내도록 했다. 이로서 두 번째 반란도 종결되었으니 989년 10월의 일이었다. 이때 황제의 나이 31세였다.5. 제국의 중흥을 이끌다
월 단위를 기준으로 한 바실리오스 2세 시대의 영토. 바르다스 포카스의 내란이 터지자마자(0분 59초) 아나톨리아가 전부 반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부분이 눈에 띈다. |
바실리오스 2세 치세하의 최대 강역 |
일찍이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에게 참패했던 바실리오스 2세는 당시의 패전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반드시 불가리아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했고, 결국 그 맹세를 지켰다.
내전이 끝난 후, 바실리오스 2세는 복수를 위해 불가리아를 재침공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995년 알레포와 안티오키아가 이집트의 시아파 파티마 왕조[14]의 손에 함락당하기 직전이라는 안티오키아 총독의 급보를 받았기에, 황제는 불가리아 정벌을 단념하고 시리아 지역으로 원정을 떠났다. 바실리오스 2세는 전군에 노새를 지급해 최소 3개월은 걸릴 원정길을 빠르게 주파했고, 불과 16일 만에 알레포에 16,000여 명의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파티마 왕조는 패배했고, 황제는 이참에 기세를 몰아 에메사와 트리폴리까지 밀고 내려갔다. 아쉽게도 트리폴리는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황제는 만족하면서 귀환길에 올랐다. 이것으로 한동안 파티마 왕조는 동로마 제국에 도전하지 못할 터였다.[15]
귀환하던 도중 바실리오스 2세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유지였던 에브마티오스 말리노스에게 대접을 받게 되었다. 황제에 버금가는 부귀를 누리는 말리노스의 연회 내내 그는 조용히 있었다.
짐은 가난한 사람을 상대로 허구한 날 (제국의 테마들을 가로질러 원정길에 오를 때마다) 탐욕과 불법 행위가 자행되는 것을 똑똑히 목도했다. 토지를 불리고 가난한 백성의 재산을 제 것인 양 부당하게 떵떵거리는 세력가들의 땅은 몰수하는 것이 마땅하다.
996년 바실리오스 2세의 칙령[16]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그는 아나톨리아 귀족들에게 치명타를 날릴 새로운 칙령을 공포했다. 이 칙령은 그동안 토호들이 강탈한 농민들의 토지를[17] 무상으로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귀족들 또한 호구가 아닌지라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라는 귀족들의 항의에, 바실리오스 2세는 996년 바실리오스 2세의 칙령[16]
아우구스투스때 그대의 조상이 이 땅을 받았음을 증명한다면 소유를 인정하겠다.
고 맞받아쳤다.고대 로마로부터 면면히 이어왔다는 계승 의식이 잘 드러나는 말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묻혀 있는 로마 시 외곽의 아우구스투스 영묘가 제국령에서 벗어난 지 200년도 넘은 시점에 이런 말을 한 건 당연히 까라면 까라는 뜻이었다. 이 칙령으로 말리노스는 정의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으로 감옥 신세를 지게 되었고, 많은 귀족들이 몰락했다. 또한 바실리오스 2세는 토지 반환은 물론이고, 대토지 소유자들에게 농민들의 미납된 조세까지 내도록 했다.[18] 그리고 당시 교회로의 기증을 통해 봉건 영주화 되어가고 있었던 수도원의 토지 소유를 억제하려고 했다.[19] 당연히 성직자들도 반발하면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바실리오스 2세는 한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러야 했다. 이는 물론 10세기에 들어 눈에 띄게 강력해진 아나톨리아 지방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견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5.1. 불가르인의 학살자
1014년,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지휘하에 클리돈 통행로에서 불가리아인을 포획한 로마군. 불가리아 제1제국의 말기인 이 시기쯤 되면 불가리아에서 슬라브적인 색채가 튀르크적인 색채보다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20] 머리채가 잡힌 불가리아인의 복식이 유럽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방적인(유목민적, 몽골/튀르크적) 색채가 강한 것이 주목된다. |
이 불가리아 포로 학살을 야사로 여기는 견해가 있으나, 이 기록 자체는 (관찬 사서에 가까운)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의 《약사》 등이 출처이다. 실제로 클레이디온 전투와 바로 그 전에 대규모 야전이 있었고, 편집증적일 정도로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 바실리오스 2세가 그 이후로 수도로 돌아가 공세의 고삐를 늦추고 소모전으로 일관해서 불가리아를 고사시켜 버리는 전법을 보인 여유를 봤을 때, 불가리아가 그때의 패배에서 절멸에 가까운 손실을 겪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특히 저 15,000명의 병력은 불가리아 추정 총병력 35,000명의 40%를 넘어가는 엄청난 수치로, 저 정도의 병력을 그렇게 짧은 시기 안에 다 잃었으면 사실상 그 이상의 저항은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한다. 사무일이 충격을 받고 쓰러져 죽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큰 심리적 타격을 입었다는 얘기이다. 즉 당시의 정황과 (실화든 프로파간다든) 널리 인정받은 점을 미루어보아, 과장은 있을 수 있지만 아예 야사일 수는 없다. 무엇보다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정복 이전에 시리아 원정 당시 포로로 잡은 베두인 병사들의 오른팔을 잘라버리고, 조지아 원정에서는 압하스인 포로들의 두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든 전적이 있었다.
이렇듯 전장에서는 냉혹한 장군이었지만 불가리아를 재정복하고 벌인 그의 행보는 그와 대비되게 매우 관대하고 유화적이었다. 그의 개인적인 원한은 오흐리드의 황궁을 약탈해 보물들을 제국군 장병들에게 나눠 주며 폐허로 만드는 데에서 끝냈고, 기존의 불가리아 황족들이나 귀족 등 지배층들은 손대지 않은채 오히려 매우 우대했다. 죽은 차르 이반 블라디슬라프의 황후였던 마리아를 로마 제국에서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위인 조스테 파트리키아에 봉했고, 그녀의 아들들은 주요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했다. 그리고 불가리아 각계각층의 귀족들의 아들들은 동로마 여인들과 결혼하도록 주선했고, 딸들은 동로마 남편감을 찾아주어 제국 귀족층에 편입시켰다. 또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불가리아 속주 주민들이 세금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세금을 인하하고 곡물로 현물 납부할 수 있도록 해서 민심을 잡았으며,[22]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대주교를 황제가 서임하게 된 것 외에는 건드리지 않아서 독립성을 유지시켰다.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를 병합한 이후 불가리아의 남은 군대를 그대로 제국 불가리아 테마병들로 편입했는데 이 병력은 제국이 불가리아를 제압하는데 소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거뜬히 초과하는 수치로 추산된다. 불가리아 정복보다는 이런 편집증적인 인력 관리에 바실리오스 2세의 진면목이 있다.
6. 말년
불가리아를 무너뜨린 황제는 곧 동방의 조지아 왕국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조지아 지역은 타오 공국 시절 바실리오스가 한 번 짓밟았지만 명군 바그라트 3세가 즉위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이며 공국이 아닌 왕국 타이틀을 달 정도로 뚜렷한 팽창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1014년에 바그라트 3세가 죽고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1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탓에 귀족들을 통제하지 못하며 애를 먹고 있었고 바실리오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가리아를 확실히 흡수하고 곧장 원정을 시작했다.바실리오스는 바시아니 평원에서 기오르기 1세를 격파했고 이후로도 계속 승리를 거두며 삼츠헤까지 진격한다. 이에 기오르기는 니키포로스 시피아스와 내통하여 반란을 획책해서 바실리오스를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바실리오스는 이 반란을 순식간에 진압했고 곧바로 조지아로 다시 군대를 보내 확실하게 짓밟았다. 이후 조지아 왕인 기오르기 1세는 장남인 바그라트 4세를 인질로 보내고 14개의 요새를 제국에 내주며 다비트 3세가 가지고 있었으나 제국에 귀속된 영역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제국과 평화 협정을 체결했고 이것으로 조지아 원정은 마무리된다.
그외에도 이탈리아 남부에서 992년에 공표된 <금인칙서>에 따라 베네치아의 해상 원조를 받으면서 노르만인들을 격퇴하기도 했다. 조지아 원정이 끝난 뒤 바실리오스 2세는 1027년 시칠리아 원정 계획을 세웠으나, 1025년 12월 15일에 붕어했다. 이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자손을 남기지 않았다. 유능한 후계자를 미리 지정해 놓았어야만 했으나,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 무책임하다고 싶을 정도로 관심이 없었으니 결국 스스로 제국을 쇠퇴한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재위 말년엔 니키포로스 시피아스 등이 이 점을 노려 반란을 꾀하기도 했다. 결국 공동 황제였던 동생 콘스탄티노스 8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8세는 연이은 군사 반란 이후 성격이 바뀌고 유능한 통치로 제국을 발전시킨 형 바실리오스 2세와는 달리 60세가 넘었음에도 젊은 시절처럼 방탕하고 사치스러웠으며, 무능하기 짝이 없는 팔푼이었다. 그러다보니 귀족들에게 휘둘리고 살아 황권을 스스로 약화시켰다. 특히 바실리오스 2세는 마지막 상속자인 세 공주들을 결혼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에[23] 후손이 없는 마케도니아 왕조는 초라하게 단절되고 말았다. 황제가 기껏 대량으로 양성해둔 군대와 쌓아둔 예산들은 내전이라는 로마의 전통놀이에 투입되어 녹아내렸다.
7. 평가
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봉건 지주를 복종시켰으며, 제국의 적(특히 도나우 강 인근 지역과 동부)을 정복했다. 로마군의 권세는 어디서든 경외의 대상이었다. 황제가 전쟁에서 가져온 약탈품 덕에 재정은 가득 넘쳐났다. 학문의 등불은 황제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조금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불타올랐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중들 다수는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의 삶은 화려하고 다채로웠다. 설사 도시의 방어 시설 어딘가가 파손되었더라도 침공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미하일 프셀로스
바실리오스 2세의 군사적인 업적은 1인칭 형식으로 서술한 그의 비문에서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문서 하단 참조). '불가르족의 학살자'라는 별칭에 가려져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 이외의 곳에서 거둔 군사적인 승리, 키예프의 루스족을 개종시킨 일, 할아버지와 같은 방법으로 동로마의 백과사전 문화를 후원한 업적은 잘 조명받지 못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또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면서, 엡도몬[24]에 성 요한 세례자 성당을 건립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외곽의 군대 연병장 옆에 부속 황궁[25]을 둘 정도로 경건한 인물이었다. 병력 만큼이나 재정 관리에도 치밀해, 그가 붕어할 무렵 유사시를 대비해 비축한 비상금이 로마 제국 국가 예산 2년치를 훌쩍 넘길 정도였다. 비슷하게 거대한 영토를 수복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국고가 부족했던 것과 대조되는 점이다. 물론 이 돈은 후임 황제들이 나중에 전부 까먹지만, 사후 몇십 년 후에도 물가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자금이었다.미하일 프셀로스
바실리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예니토스가 의전서에 정리한 제국이 절대 외국인에게 넘겨줄 수 없는 세 가지 중 하나를 포기했다. 그 세 가지인 즉슨, 황실에서 태어나고 자란 공주(포르피로예니티, 안나 콤네나 항목을 참조), 그리스의 불, 자줏빛 제관(제위)였는데, 황실에서 태어나고 자란 공주인 자신의 여동생을 키예프 루스 대공 블라디미르 1세에게 시집보낸 것이다.[26]
원래 동로마 황실은 절대 포르피로예니티를 다른 나라로 출가시키지 않았다. 오토 1세의 며느리였던 테오파노도 황실의 여자였을 뿐 포르피로예니티는 아니었다[27]. 그래서 바실리오스 2세도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 했고, 아예 번복하기에 이르나 분노한 대공 블라디미르 1세가 제국을 침략하여 바르나 등을 점령하자 어쩔 수 없이 원래 약조대로 행했다. 다만 이 이후로부터는 동로마 제국에서 본격적으로 공주들을 다른 나라에 시집보내기 시작했고, 제국으로 시집오는 외국인 황후들 또한 더 잦은 빈도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까지의 동로마 제국이 포르피로예니티(제위 계승권과 직결된 황실의 공주)를 다른 나라로 출가시키지 않고, 외국인 황후도 잘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돌려 말하면 이 시기 동안 동로마 제국이 그들이 인지하는 세계 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외국'이 없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서로마 분열~서로마 멸망 이후 동로마의 가장 위험한 경쟁 상대이자 주적은 7세기 이전까지는 사산조 페르시아, 7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제국이었고, 이들은 군사력이든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든 동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강대국이자 선진국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 종교적으로도 '그리스도교 세계에 속하지 않는' 적대적인 관계였기에 왕실 결혼을 통한 동맹이나 협력을 고려할 상대가 아니라 말 그대로 경쟁 상대이자 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다른 이웃 국가들, 특히 국혼의 대상으로 고려할 만한 그리스도권 국가들은 아직까지 동로마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맹 세력으로 인정받을 수준까지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강대국'으로써 다른 어떤 나라와도 대등한 동맹을 맺을 수 없고, 맺을 필요도 없었기에 황실 결혼과 같은 형태의 외교정책을 취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서로마 멸망 이후 장기간의 분열 및 혼란기에 휩싸였던 서유럽에서 샤를마뉴의 제국이 그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자 당장 동로마의 이리니와의 혼담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논의되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마케도니아 왕조 후기, 바실리오스 2세 이후부터 황실의 공주들이 외국의 군주와 결혼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잦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 역시 명확하다. 대략 이 시기(서기 1000년 전후)부터 유럽-지중해 그리스도교 세계의 다른 나라들 역시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도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리잡았고, 따라서 이들과도 대등한 입장에서 외교적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마케도니아 왕조 이후, 동로마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던 콤니노스 왕조의 외교적 정책 노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서유럽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면서도 이전까지 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었던 외교적 입장에 따라 십자군 제후들을 제국의 통제하에 있는 야만인 용병처럼 인식하고 대우했으나 이러한 외교 노선의 결과물은 썩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따라서 손자인 마누일 1세의 시대에 오면 이러한 인식이 완전히 전환되어 본격적인 친서방 노선, 즉 서유럽 국가들과 (왕실 결혼 등을 포함하여) 적극적이면서도 동등한 외교적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결국, 포르피로옌니타를 <제국이 절대 외국인에게 넘겨줄 수 없는 것 세 가지> 중 하나로 꼽은 콘스탄티노스 7세의 의전서는 <제국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이념적 원칙> 이라기보다는 "당시 상황에서 제국이 취해야 하는 지침"에 가까웠고, 이후 제국이 처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이 원칙 역시 변화할 수 있었던 셈이다.
다른 하나인 제위는 1204년 알렉시오스 5세가 수도에서 도망가고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에 협의하여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제위에 올림으로써 끝났다. 그리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어 제국 자체가 멸망하기에 이르지만, 나라가 없어진 상황에서야 의전서고 뭐고 의미가 없으니 이하 생략.
가장 오래 외국에 넘겨지지 않은 것은 바로 그리스의 불이었다. 그리스의 불은 출현하자마자 각종 짝퉁이 넘쳐났으나(아랍은 물론이거니와 십자군도 사용했다!), 그 정확한 배합 비율은 극비로 취급되어 제4차 십자군 당시는 물론 1453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유출되지 않았다. 물론 화약 병기의 발전으로 고대와 중세를 풍미했던 액체 화약의 필요성이 감소한 것도 클 것이다.
다만 적어도 이런 사항을 동시대인들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진 않으며, 그들이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부분은 따로 있었다. 물론 황제로서의 바실리오스 2세는 직무를 아주 열심히 수행했다. 전쟁터에 나가서 지휘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만 좋아했던 게 아니라, 수도에 있을 때면 황궁 내의 사무실에 틀어박혀 산더미처럼 쌓인 결제 서류들을 밤이 늦도록 일일이 직접 처리하고 지시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야전에선 본래 하급 장교들이 해야 할 전투 장비 지휘 검열을 열병식 때 몸소 하면서 열외 조치까지 직접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문화 활동은 물론 옷을 멋지게 입는 것조차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씻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데다가, 연인은 고사하고 친한 친구도 만드는 일이 없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개인의 개성에 관대한 현대의 사회인이라도 이런 식이면 주변의 시선이 곱지 못할 텐데, 그는 그 당대에도 1,0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중세 강대국, 그것도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이 자리는 결코 사생활이나 개인의 개성 같은, 중세에는 있지 않았던 개념이 존중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황제라는 자리에는 제국의 최고 지도자라는 역할로서 제국의 위대함, 권위, 세련됨 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표출하고, 또 그걸 적극적으로 가꾸며 외국과 자국 내 신민들 모두에게 과시하여 결과적으로 문화력으로 표현되는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 자체를 강화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근대 이전의 군주들이 많은 자금과 노동력을 소모해서 후세가 보기에는 스케일이 큰 사치에 불과한 거대한 궁전, 종교 건물, 문화 시설들을 지은 건 물론 군왕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기호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었지만, 주된 목적은 결코 왕 혼자 어마어마하게 큰 궁전에서 놀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서 왕실의 권위 자체를 지속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표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1세기 민주 국가의 국가원수라면 모를까 11세기의, 그것도 전제군주제 국가의 국가원수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바실리오스 2세는 이런 면에선 완전히 무관심했을 뿐더러, 좋아하지도 않았다. 모든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일이자 취미이기도 했던 군대 지휘와 내정 관리에 그런 것들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상술한 장비 검열 때, 바실리오스 2세는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며 난리를 피우면 군인들의 소중한 체력이 낭비된다 며 부하 병사들이 본인을 맞이할 때 박수를 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같은 이유로, 바실리오스 2세와 함께 숙영하던 부대들은 적어도 중요한 전투에서 이기기 전까진 파티나 놀이도 즐기기 어려웠다. 현실과 인간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극도의 실용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이유로 앞서 이야기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군인들과 장군들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이 황제를 그다지 좋아할 수가 없었던 건 무리가 아니며, 트레드골드가 정확하게 지적한 "박약한 책임감"이란 지적[28]은 바로 여기에서 근원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그가 해야 했던 이런 역할을 전담하는 사람은 정작 따로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의 동생이자 후세에 무능한 황제로 이름난, 이름 뿐인 공동황제 콘스탄티노스 8세였다. 이 사람은 평생 놀고 먹으면서 스포츠 경기나 하고, 성대한 의식을 아내와 함께 집전하는 게 일이었다. 권력을 가진 형님 황제는 일이 취미라 권력을 누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실권이 없는 동생 황제는 형이 귀찮아서 싫어라 하는 공적 의식 참여와 집전 그리고 사교 활동하면서 노는 게 일.[29] 제국 황후가 해야 하는 모든 중요한 일은 진작부터 제수가 떠맡아 하고 있었다. 바실리오스 2세에게도 나름대로 할 말은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상술한대로, 업적으로만 보면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같은 과거의 대제들은 물론, 한세기 반 뒤의 대제인 마누일 1세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인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꽤 박했고, 그를 군주로 존경하면서 좋아했던 건 그의 군인들 뿐이었으며, 대제의 칭호 또한 받지 못했다. 게다가 대체로 후세에 명군이라 이름난 군주들은 성격이 괴팍한 경우는 있어도 나름대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은 있었는데[30], 바실리오스 2세에게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자신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이런 의미에선 세계사적으로도 꽤나 특이한 경우이다.
허나 그 당대인들의 아들, 손자 세대에서 그의 대한 평가는 180도 바뀌게 되는데 조카딸인 조이의 남편들, 여동생, 양자의 치세 그리고 그 경쟁자들 간의 권력 암투를 뒤에 두고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후계자라는 표면적인 이름의 들러리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에게 보인 일련의 무뇌적인 행각들과 바실리오스 2세의 뒤를 이은 무기력하거나 무능하거나 정통성이 없는 황제들의 지배, 페체네그족과 튀르크족, 노르만족에게 시달리던 11세기 중반 당대의 백성들이 아버지, 할아버지들에게서 이야기로 들어온 마케도니아 왕조 시절 무적을 자랑하던 제국의 영광에 대한 향수가 그의 대한 후세대의 평가를 극적으로 바꿔놓게 된다.[31]
이후 콤니노스 왕조의 중흥기가 다시 한 번 도래하기는 하지만 강대국 동로마 제국이라는 의미에선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였기에, 이러한 그의 모습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비잔티움 연대기》의 작가였던 노리치는 바실리오스 2세가 붕어한 다음날인 1025년 12월 16일을 동로마 제국의 몰락이 시작되는 날로 봤다.
총평하자면 바실리오스 2세는 군주로서의 능력은 그 어떤 명군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후계자 양성만큼은 능력의 유무 이전에 관심조차 없었고, 그 점이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겠다.
8. 외모
기록을 묘사된 바로는 좋은 말로도 잘생기거나 세련된 외모는 아닌 딱 그 시대 사람들의 평균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본인이 황제였기 때문에 좀 더 가꿀수 있는 환경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지만 극도의 실용주의적 성격 때문에 본인을 꾸미는 데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프셀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보통 키보다는 작았지만 전반적으로 균형있는 체격에 아치형 눈썹과 총명하게 빛나는 연하늘색 눈동자를 지녔다고 한다. 유별난 점 없는 외모였으나 말을 잘 부려서 안장 위에서는 폭풍간지였다고 한다. 말년에는 턱수염이 벗겨졌지만 뺨 쪽에 난 수염이 넉넉한 덕에 풍성해보였다고 한다.9. 비문(碑文)
στίχοι ἐπιτάφιοι εἰς τὸν τάφον κυροῦ Βασιλείου τοῦ Βουλγαροκτόνου καὶ βασιλέως.
불가르인의 학살자 바실리오스 황제 폐하의 무덤의 묘비문
ἄλλοι μὲν ἄλλῃ τῶν πάλαι βασιλέων
다른 오래된 무덤들에 묻힌 다른 군주들은
αὑτοῖς προαφώρισαν εἰς ταφὴν τόπους,
자기 스스로를 위해 무덤을 두었으나
ἐγὼ δὲ Βασίλειος, πορφύρας γόνος,
자주빛 혈통을 지닌 짐, 바실리오스는
ἵστημι τύμβον ἐν τόπῳ γῆς Ἑβδόμου
엡도몬의 땅에 짐의 무덤을 두노니,
καὶ σαββατίζω τῶν ἀμετρήτων πόνων
짐이 전장에서 맞닥뜨리고 견뎌야 했던
οὓς ἐν μάχαις ἔστεργον, οὓς ἐκαρτέρουν·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안식에 드는도다.
οὐ γάρ τις εἶδεν ἠρεμοῦν ἐμὸν δόρυ,
하늘의 왕이신 하느님께서 짐을 굽어살피시어
ἀφ’ οὗ βασιλεὺς οὐρανῶν κέκληκέ με
세상의 위대한 지배자인 황제로 삼으셨으니
αὐτοκράτορα γῆς, μέγαν βασιλέα·
그 날로부터 짐의 창은 하루도 쉴 날 없이 움직였노라.
ἀλλ’ ἀγρυπνῶν ἅπαντα τὸν ζωῆς χρόνον
짐은 평생을 긴장 속에 살며
Ῥώμης τὰ τέκνα τῆς Νέας ἐρυόμην
새 로마의 백성들을 지켜내었고,
ὁτὲ στρατεύων ἀνδρικῶς πρὸς ἑσπέραν,
에스페리아[32]의 변경에서부터,
ὁτὲ πρὸς αὐτοὺς τοὺς ὅρους τοὺς τῆς ἕω,
멀리 동쪽의 변방에 이르기까지 용맹하게 원정하여
ἱστῶν τρόπαια πανταχοῦ γῆς μυρία·
수없이 많은 전승 기념비를 도처에 세웠도다.
καὶ μαρτυροῦσι τοῦτο Πέρσαι καὶ Σκύθαι,
페르시아인들[33]과 스키타이인들[34]이 이를 보았고
σὺν οἷς Ἀβασγός, Ἰσμαήλ, Ἄραψ, Ἴβηρ·
아바스기아인들과, 이스마일파인들[35], 아랍인들과, 이베리아인[36]들 역시 그러했다.[37]
καὶ νῦν ὁρῶν, ἄνθρωπε, τόνδε τὸν τάφον
그러니 사람들이여, 짐의 이 무덤을 보거든
εὐχαῖς ἀμείβου τὰς ἐμὰς στρατηγίας.
짐의 행동에 대한 감사의 기도라도 올려주지 않겠는가.
바실리오스 2세의 묘비문
불가르인의 학살자 바실리오스 황제 폐하의 무덤의 묘비문
ἄλλοι μὲν ἄλλῃ τῶν πάλαι βασιλέων
다른 오래된 무덤들에 묻힌 다른 군주들은
αὑτοῖς προαφώρισαν εἰς ταφὴν τόπους,
자기 스스로를 위해 무덤을 두었으나
ἐγὼ δὲ Βασίλειος, πορφύρας γόνος,
자주빛 혈통을 지닌 짐, 바실리오스는
ἵστημι τύμβον ἐν τόπῳ γῆς Ἑβδόμου
엡도몬의 땅에 짐의 무덤을 두노니,
καὶ σαββατίζω τῶν ἀμετρήτων πόνων
짐이 전장에서 맞닥뜨리고 견뎌야 했던
οὓς ἐν μάχαις ἔστεργον, οὓς ἐκαρτέρουν·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안식에 드는도다.
οὐ γάρ τις εἶδεν ἠρεμοῦν ἐμὸν δόρυ,
하늘의 왕이신 하느님께서 짐을 굽어살피시어
ἀφ’ οὗ βασιλεὺς οὐρανῶν κέκληκέ με
세상의 위대한 지배자인 황제로 삼으셨으니
αὐτοκράτορα γῆς, μέγαν βασιλέα·
그 날로부터 짐의 창은 하루도 쉴 날 없이 움직였노라.
ἀλλ’ ἀγρυπνῶν ἅπαντα τὸν ζωῆς χρόνον
짐은 평생을 긴장 속에 살며
Ῥώμης τὰ τέκνα τῆς Νέας ἐρυόμην
새 로마의 백성들을 지켜내었고,
ὁτὲ στρατεύων ἀνδρικῶς πρὸς ἑσπέραν,
에스페리아[32]의 변경에서부터,
ὁτὲ πρὸς αὐτοὺς τοὺς ὅρους τοὺς τῆς ἕω,
멀리 동쪽의 변방에 이르기까지 용맹하게 원정하여
ἱστῶν τρόπαια πανταχοῦ γῆς μυρία·
수없이 많은 전승 기념비를 도처에 세웠도다.
καὶ μαρτυροῦσι τοῦτο Πέρσαι καὶ Σκύθαι,
페르시아인들[33]과 스키타이인들[34]이 이를 보았고
σὺν οἷς Ἀβασγός, Ἰσμαήλ, Ἄραψ, Ἴβηρ·
아바스기아인들과, 이스마일파인들[35], 아랍인들과, 이베리아인[36]들 역시 그러했다.[37]
καὶ νῦν ὁρῶν, ἄνθρωπε, τόνδε τὸν τάφον
그러니 사람들이여, 짐의 이 무덤을 보거든
εὐχαῖς ἀμείβου τὰς ἐμὰς στρατηγίας.
짐의 행동에 대한 감사의 기도라도 올려주지 않겠는가.
바실리오스 2세의 묘비문
다만 아쉽게도 그의 무덤은 4차 십자군 때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재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는 없다.
10. 대중매체에서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플레이 가능한 시나리오가 없어 비잔티움 역대 황제 목록에서만 찾을 수 있다. 바닥을 기는 외교력과 하늘을 뚫는 전투력, 고독하고 금욕적인 삶을 반영해 독신주의자 특성이 붙었다.
-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도 역시 비잔티움 역제 황제 목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능력치는 외교력 2, 전투력 24, 관리력 9, 계책력 8, 학습력 9로, 전작과 마찬가지로 전투력이 독보적이다. 독신주의자 특성 역시 붙어 있다.
-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러시아 전근대편>에서 러시아의 정교회 개종을 다룰 때, 블라디미르 대공에게 안나를 시집보내고 블라디미르 1세와 루스의 정교회 개종을 확정지을 때 등장한다. [38]
- 《동로마 황녀가 내 아이를 임신하셨다》에서는 주인공의 곁사돈으로 나온다.[39]
11. 여담
- 공동황제로서의 재위 기간까지 포함하면,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로마 황제였다. 2살에 공동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르고 67살에 죽었으니.
- 당대의 기록에 따르면, 적들은 전장에 바실리오스 2세의 깃발이 보이면 "도망쳐라! 황제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며 후퇴하기 바빴다.[40]
- 흔히 '불가록토노스'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생전에 바실리오스 2세는 이 별칭을 쓴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불가록토노스'라는 별칭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점은 적어도 불가리아 제2제국이 부흥하고 4차 십자군으로 제국이 여러 망명 정권으로 쪼개지는 시절까지 가야 한다. 바실리오스 2세 자신은 소(또는 젊은) 바실리오스, 혹은 포르피로예니토스(자줏빛 혈통)라 불리는 것을 선호했고, 공식적으로도 이 별칭을 즐겨 사용했다. 이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초대 황제이자 그의 조상인 바실리오스 1세를 의식한 표현이었다.
- 988년 우주력을 동로마 제국의 공식 기년법으로 채택한 황제가 바실리오스 2세였다. 989년 10월 2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지진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서쪽 돔 아치가 붕괴되자 수리를 지시하기도 했다. 수리가 끝난 때는 6년 후인 994년 5월 13일이었다.
- 우수한 장군에, 특유의 성격 때문인지 혹자는 그를 BADASS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현실 토탈워 유저라는 썰이 돌 정도다.
- 2007년 <포브스> 지에 따르면 역사상 가장 부유한 인물 9위에 해당했는데 이는 당시 총 GDP, 순자산,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결과였다. 이에 따르면 그의 보유 자산은 오늘날 가치로 1,694억 달러. 재정 감각이 좋아 죽기 전까지 20만 파운드(약 90톤)의 금을 비축해뒀다. 어느 정도 부유한지 잘 감이 안 온다면 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4억 달러 차이로 8위(1,698억 달러)였고, 2007년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빌 게이츠의 재산이 560억 달러였다. 내정에만 힘썼던 것도 아니고 대외 전쟁도 상당히 많이 치렀으며, 내전도 굵직한 것만 두 차례 치렀고 영토도 고대 로마 시절의 몇 분의 일 밖에(?)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국부 축적을 해놓았다는 것은 재정 관리를 그야말로 초인적으로 한 것이다.
- 2009년 스카이TV에서 집계한 위대한 그리스인 100인 중 70위에 선정되었다. 역대 로마 황제 중에서는 2위였고, 가장 순위가 높은 로마 황제는 28위의 콘스탄티노스 11세였으며 그 다음은 콘스탄티누스 대제(71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82위)였다. 헌데 그리스어권도 다 통합하기는커녕 도시국가로 쪼그라든 아테네 대성당 앞에 그 동상이 있는 최후의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야 이해할 만해도 다른 황제들은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바실리오스 2세가 속한 마케도니아 왕조부터 아르메니아계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그리스나 그리스어권이 아닌 일리리아(나이수스) 출신이었고[41] 후기 로마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라서 서로마 제국만 로마 제국이라고 하는 사람도 로마 황제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그랬다. 즉 여러모로 현대 그리스의 역사관을 알 수 있는 통계이다.[42] 사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현대 그리스 문화에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따져보면 이상하지 않지만 서방 가톨릭 국가들을 비롯한 타 그리스도교 나라들도 존경하는 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애매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의 덕을 본 건 오히려 튀르키예인 것이 분명하다.
[1] 불가리아인의 학살자[2] 2살 때(960년) 대관식을 하여 공동황제(= 후계자)가 된 것까지 치면 약 65년으로 로마 제국 역대 황제들 중 최장기 재위이다.[3] 냉정히 말해 마누일 1세에 대한 사학계의 평가는 호의적이라기보단 복합적이다. 그의 재능이 뛰어났던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그의 치세가 야기한 문제점들도 많기 때문.[4] 최소 9세기부터 기록에 등장한 아나톨리아의 명문 유지 가문인 쿠르쿠아스 가문 출신으로, '치미스키스'는 별명이었다.[5] 요안니스 1세는 키가 좀 작긴 했지만 상당한 미남이었다.[6] 시종장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로마노스 1세 레카피노스의 사생아로, 바실리오스 2세의 할아버지였던 콘스탄티노스 7세와는 처남 관계였다. 바실리오스 2세의 입장에서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아버지의 외삼촌 즉 진외종조부였다.[7] 두 사람 모두 군에서 각자의 유력한 지위를 활용하여 당대 제국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두 사람의 반란은 멜리시노스 가문, 코르티키오스 가문, 타로니티스 가문 등 소아시아 지역 유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8] 일찍이 바르다스 포카스는 971년에 요안니스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이 일가를 싫어했다.[9] 이 사건 이후 동로마 황제들은 지속적으로 바랑인들을 고용해서 바랑인 친위대가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10] 이후 블라디미르 1세가 개종해 키예프 공국은 동방 정교회 국가로 거듭났다. 이 명맥은 키예프 공국의 후예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로 이어지게 된다. 마침 블라디미르 1세는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할 겸 귀의할 세련된 종교를 찾고 있었다. 가톨릭, 이슬람, 정교회, 심지어 유대교까지 모두 검토했는데, 조사 작업 차 하기아 소피아에 방문한 사절단이 지상의 것인지 천국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극찬한 기록이 남아있다. 반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이슬람은 돼지고기와 술에 대한 금기가 빡세서 제외되었고(다른 전승에 의하면 이슬람교의 예배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절단이 "그들의 종교 의식에는 즐거움이 전혀 없고 오직 슬픔과 우울함만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블라디미르 1세가 그런 종교는 믿고 싶지 않다면서 이슬람교를 거부했다고 한다.), 유대교는 유대인의 민족 종교인데 블라디미르 1세가 유대인의 운명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민족 종교이면서 그 민족도 제대로 구원해 주지 못하는 종교가 무슨 소용이냐면서 제외했다. 가톨릭은 교황수위권 등 교회 / 주교 간의 서열 관계가 정교회보다 빡셌고, 러시아 입장에서 로마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제외되었다.[11] 여담으로 아비도스 전투때 포카스가 홀로 바실리오스 2세를 기습했지만, 바실리오스 2세가 노려보자 그 자리에서 쓰러져 급사했다는 전설이 있다.[12] 이는 아무리 가까운 황실 여인이어도 중요한 정치적인 결정에서 배제하라는 것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실리오스 2세가 자식없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동생인 콘스탄티노스 8세는 딸 둘을 남기고 몇 년 뒤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의 딸 둘(바실리오스에게는 조카딸들)이 20여년 동안 황후, 공동황제, 여제의 지위에 있었다.[13] 이런 이유로 서구권에선 그가 동성애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는 듯하다. 다만 그가 남성을 좋아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어찌 보면 무성애자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지만, 젊었을 때에는 여자들 꽁무니 쫓아다니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는 기록도 있다. 종합해 봤을 때, 반란으로 인해서 사람이 많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14] 당시 기세를 떨치던 강대국이라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었다.[15] 이때 이집트군의 침공에 어리버리하게 대처한 안티오키아 총독 미하일 부르치스(젊은 시절 니키포로스 2세의 시리아 원정 당시 가장 먼저 안티오키아 성벽을 용감하게 돌파한 공으로 총독까지 출세한 인물이었지만, 이 무렵에는 한심한 모습을 보였다.)를 해임하고 용감하게 싸운 젊은 군인을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가 바로 후기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지겹도록 언급되는 달라시노스 가문의 선조였던, 다미아노스 달라시노스였다.(팔레올로고스 가문은 11세기 후반에야 기록에 등장한다. 주목할 만한 기록은 디라히온 전투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된통당한 파티마 왕조는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를 부수면서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했다.[16] 주디스 헤린의 《비잔티움》, 425쪽[17] 당시 동로마 제국의 귀족들은 고리대금업으로 농민들의 땅을 빼앗는 일이 흔했다. 심지어 고리대금업으로 빼앗지 못한다면 농민들을 협박하거나 강압하는 일도 흔했다.[18] 이전에 농민들의 미납된 조세를 귀족들은 내지 않고, 다른 농민들이 내게 하는 횡포를 부렸다.[19] 이는 당대 서유럽에서도 일어난 일로, 교회권의 성장에 기여하여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나는 요인이 되었다.[20] 불가리아는 일종의 튀르크 + 슬라브 연립 정권으로 출발했고, 나라 이름부터가 튀르크족의 일파인 '불가르'족에서 따 온 만큼 튀르크쪽이 상위 파트너였다. 하지만 불가리아 및 그 주변 발칸 반도 북부 ~ 동유럽권에서는 슬라브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점차 슬라브화되었다. 단적인 예로 군주의 칭호가 불가리아 초창기에는 칸이었는데, 913년 동로마에 대해 승전한 이후 로마와 맞먹는다는 자부심을 담아서 '카이사르'의 슬라브식 음차인 차르로 바뀌었고, 군주의 이름들도 초대 군주인 아스파루흐부터 시작해서 코르미소쉬, 비네흐, 텔레츠, 우모르,오무르타그 등 튀르크-몽골적 느낌이 강한 이름이 많다가, 9세기 중반 보리스 1세를 시작으로 블라디미르, 시메온 대제, 사무일, 로만 등 그리스도교-슬라브적 느낌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만은 Roman, 즉 자신들의 최대의 적인 '로마인'이 맞다.[21] 13세기 초 트라키아에서 동로마인을 학살하고 다닌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칼로얀은 과거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록토노스'라고 불렸음을 의식하여 스스로를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 즉 로마인의 학살자라고 일컬었다. 구글에도 자동검색어로 'Kaloyan the Roman slayer'가 뜬다.[22] 원래는 화폐 납부였는데, 따라서 농민들은 금화를 곡물로 바꿔서 세금을 내야 했다. 하지만 현물 납부를 허용해서, 널뛰는 중세 화폐가치에 요동치지 않고 정해진 양만 내도 되게 한 것이다.[23] 물론 콘스탄티노스 8세도 공주들을 독신녀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8세의 장녀였던 에우도키아는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망가졌고, 3녀 테오도라는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작고 조울증으로 의심되는 증상이 있었다. 그나마 차녀 조이는 미인인데다가 나이도 20대 초반이어서 작센 왕조의 오토 3세와 결혼시키려 시도했고, 오토 3세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복잡한 사건들이 일어나서 일이 지체되었고, 오토 3세가 요절하면서 혼담이 좌절되었다. 그런데 공주들의 조모였던 테오파노 황후는 2,000년 동안의 로마 역사에서도 미인으로 손꼽혔으며,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8세도 미남이었다고 전해진다. 큰아버지가 로마 역사상 최악의 추남이었던 것이 함정이었지만. 이는 아예 해외로 떠나는 것이면 몰라도 조카딸들이 국내 귀족과 결혼을 하면 그 조카사위들이 자신의 권력을 넘볼 것이라는 두려움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24] 지금의 이스탄불 바크르쾨이 지구[25] 블라헤르네 궁전. 1453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시까지 동로마 황제의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전소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26] 이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초년기 바실리오스 2세가 많은 정치적 위기와 악조건에서도 끝까지 쫓겨나지 않은 이유가 그 또한 포르피로예니토스로서 정통성의 끝판왕이었기 때문이다.[27] 명문 군벌인 스클리로스 가문 출신이었다.[28] "후계 문제에 대한 관심의 지적만큼 바실리우스 2세의 박약한 책임감의 개념을 뚜렷이 드러내주는 것은 없다." 워렌 트레드골드, 박광순 역 《비잔틴 제국의 역사》 p.256.[29] 콘스탄티노스 8세는 어린 시절부터 평생 동안 형의 정치적인 조력자로서 활동하였던 든든한 아우였고, 형의 제위 초기에 일어난 권력 투쟁의 시기에는 군사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형과 함께 직접 선봉에 나선 경력도 있었다. 바실리오스 2세의 사후 황제로서의 통치가 무능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치세에 딱히 큰 문제가 터지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그의 선임 황제로서의 재위 기간은 겨우 2년에 불과했다. 문제는 그 짧은 기간 동안 형이 심혈을 기울여 세워놓은 토지 정책을 대부분 다 엎어버린 데다가, 후계자 선정도 어처구니없이 이뤄졌고 그 기간 동안 딸들을 결혼시켜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이사키오스 1세까지의 불안정했던 제위 계승과 다툼으로 인해 제국이 쇠망하는 원인이 되었다.[30] 제국 창건자인 아우구스투스만 하더라도 성격이 무척 차갑고 냉혹했지만 워낙에 미남이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당연히 아우구스투스는 황후도 있었고 마음을 터놓고 지낼 동성 친구도 있었다.[31] 말년에 인기 없는 상태에서 죽은 엘리자베스 1세가 그 후 뒤를 이은 스튜어트 왕조의 실정으로 인해 급격한 평가 반전을 누리게 된 것과 비슷하다.[32] 그리스어로 서쪽이라는 뜻이다.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기준으로 볼 때 이탈리아 반도는 서쪽에 있으니 이탈리아 반도를 가르키는 의미도 포함했다.[33]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한지 4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바스 왕조의 분열 이후 페르시아계 지방 정권들이 들어섰으며 그 중 하나인 부와이 왕조를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다. 또한 튀르크족이 중앙아시아 및 몽골에서 서아시아로 오면서 페르시아 문화와 복식을 받아들이는 등 문화적으로 페르시아화되었으므로 튀르크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수도 있다. 당시 로마에서 페르시아는 동쪽의 외적을 뜻했다.[34] 여기서 '스키타이인'은 불가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데 본디 볼가 강 유역의 불가르가 고대 스키타이인들이 살던 흑해 북안의 스텝 지역을 통해 동로마 제국령 발칸반도로 남하해 정착했기 때문이다. 이후 스키타이는 불가르를 포함해 페체네그, 쿠만 등 다뉴브 강 건너 북쪽에서 내려온 유목민족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35] 시아파의 일파인 이스마일파를 신봉하던 파티마 왕조를 가리킨다.[36] 고대 이베리아 왕국이 있던 곳, 즉 조지아를 가리킨다.[37] 상술한 지역은 모두 바실리오스 2세가 전역을 치른 곳이다. 시적으로 표현했지만, 쉽게 말해 이 지역에서 모두 이겼다는 뜻이다.[38] 1판에선 바실리 2세로 나오는데, 바실리오스 2세의 러시아어 표기가 '바실리'이다.[39] 왜 곁사돈이냐면 주인공이 바실리오스의 친딸이 아닌 그 동생인 콘스탄티노스 8세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 즉, 직접적인 장인은 바실리오스 2세가 아닌 콘스탄티노스 8세다.[40] Ian Heath, Angus McBride, 《Byzantine Armies 886–1118》, Osprey, 23쪽.[41] 마케도니아 북부 즈음에서 고대 후기 ~ 중세 초기의 라틴어권과 그리스어권을 구분짓는 'Jirecek Line'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나이수스(현 세르비아 니스)는 다뉴브 강과 멀지 않을 정도로 북쪽이라서 라틴어권에 속했다.[42] 다만 이런 의문 제기는 나무위키의 이 항목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뿐만이 아니라 튀르키예인, 불가리아인, 심지어 가끔은 이탈리아인마저도 하는데 그리스인들도 자기네 말빨이 딸리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동로마 제국사를 그리스사 전체에 편입시키지 않으면 그리스인들은 디아도코이 시기 이후부터 오스만 제국한테서 독립하기 전까진 자기 나라가 없는 민족이 되기 때문이다.그게 사실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