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야누스 관문 전투 불가리아어: Битка край Траянови врати 중세 그리스어: Μάχη στις Πύλες του Τραϊανού 영어: Battle of the Gates of Trajan | ||
시기 | 986년 8월 17일 | |
장소 | 불가리아 이흐티만 인근 트라야누스 관문 | |
원인 |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침공과 사무일의 대응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 불가리아 제1제국 |
지휘관 | 바실리오스 2세 스테파노스 레온 멜리시노스 | 사무일 |
병력 | 30,000명 | 불명 |
피해 | 막대한 손실 | 미미함. |
결과 | 불가리아 제1제국의 확장과 바실리오스 2세의 입지 악화. |
1. 개요
986년 8월 17일, 불가리아 원정에 나선 바실리오스 2세의 동로마군이 불가리아의 이흐티만 인근 트라야누스 관문 고개에서 사무일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의 기습을 받고 궤멸된 전투.
2. 배경
971년, 요안니스 1세는 스뱌토슬라프 전쟁에서 스뱌토슬라프 1세가 지휘하는 키예프 루스군을 격파한 뒤 키예프 루스에 복종했던 불가리아 제1제국 동부 일대를 장악하고 불가리아 차르 보리스 2세를 체포했다. 그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요안니스 1세는 개선식을 거행하면서 보리스 2세를 폐위시키고 마기스테르라는 명예 칭호를 하사했으며, 보리스의 동생 로만을 거세하고 수도자로 삼았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를 해체하고 다뉴브 강 전선을 복원하려는 동로마 제국의 염원이 300여 년만에 실현되는 듯했다.그러나 서부 불가리아는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고, 소피아 백작 니콜라의 네 아들 다비드, 모세, 아론, 사무일이 세력을 일으켜 동로마 제국에 대항했다. 이들은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에게 사절을 보내 동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다비드는 테살로니키와 테살리아 주변의 국경 지대를 지켰고, 모세는 에게 해 연안과 세레스에 대한 공격의 전초기지가 될 스트로비차를 지켰으며, 아론은 스레데츠를 통치하며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베오그라드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켰고, 사무일은 비딘의 강력한 요새에서부터 불가리아 북서부를 통치했다. 이들은 장차 옛 수도 프리슬라프를 포함한 동부 불가리아 영토를 해방시킬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976년 1월 요안니스 1세가 시리아 원정을 마친 뒤 귀환하던 중 사망했다. 즉위 이래 니키포로스 2세, 요안니스 1세에게 밀려나 명목상의 지위만 유지하고 있던 바실리오스 2세는 비로소 선임 군주가 되었지만, 나이가 여전히 어렸기에 환관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가 실권을 잡았다. 그러나 바르다스 스클리로스 등 각지의 군벌들이 바실리오스 2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황제가 되고자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사무일 형제는 이 때를 틈타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했다. 그중 다비드는 테살로니카를 공격하다가 전사했고, 모세는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하지만 사무일과 아론은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어갔다. 동로마 제국군은 패배를 거듭해 트라키아로 패주하였고, 동로마의 정복에 반대하지 않았던 불가리아 귀족과 관리들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당시 제국의 실권자였던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의 반란에 대처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터라 불가리아 반란군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건 어렵다고 보고, 내부분열을 유도하기로 했다. 그는 아론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시켜주고 트라키아의 지배자로 세워줄 테니, 사무일을 배신하라고 권유했다. 아론은 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양자는 긴밀한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무일은 아론을 공격했고, 976년 6월 14일 뒤프니차 인근에서 아론과 그의 부하들을 모조리 처단했다. 다만 아론의 아들인 이반 블라디슬라프만은 사무일의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가 간청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론을 이용한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전 차르인 보리스 2세와 로만을 불가리아로 돌려보내서 내분을 일으키게 하였다. 보리스 2세는 국경 근처의 숲을 지나가던 중 동로마 복장을 입은 것을 보고 오해한 불가리아 경비대에게 살해되었다. 조금 뒤쳐져서 걷던 로만은 경비대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로만은 비딘으로 끌려갔는데, 사무일은 의외로 그를 차르로 추대하고 자신은 장군을 자처했다. 당시 로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갔을 때 요안니스 1세의 명령에 따라 거세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식을 둘 수 없으니 사무일이 결국 그의 뒤를 이을 게 확실했다. 로만은 사무일에게 국정을 맡겼고, 자신은 신앙 생활에 전념했다.
사무일은 동로마군이 바르디스 스클리로스의 반란군에 집중된 틈을 타 트라키아와 테살로니키, 테살리아, 헬라스, 펠로폰네소스 일대를 휩쓸었고, 많은 동로마 요새들을 공략했다. 977년 테살리아의 중요한 항구도시인 라리사를 포위하여 983년까지 공성전을 벌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구원군을 파견했으나 중도에 격파당했다. 결국 라리사 주민들은 항복하였고, 남자들은 불가리아 군에 강제 입대하고 여자와 노약자는 불가리아 내륙으로 끌려갔다.
985년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를 숙청하고 실권을 잡은 바실리오스 2세는 이대로 밀리기만 하면 답이 없다고 여겼다. 또한 자신을 무력한 황제로만 여기고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의 반란을 제압한 바르다스 포카스를 따르는 병사들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리려면 군사적 위업을 조속히 세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986년, 바실리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3만에 달하는 병력을 일으켜 불가리아의 중심지인 세르디카로 진격했다.
3. 경과
986년 발칸 반도에서 3만 병력을 긁어모아 출진한 바실리오스 2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와 필리포폴리스를 거쳐 세르디카로 향했다. 이후 세르디카로 진군하여 그곳을 단숨에 함락한 뒤, 남서쪽의 마케도니아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사무일을 끝장내려 했다. 그렇게 진군을 이어가던 중 트라야누스 관문 부근에서 레온 멜리시노스 장군이 이끄는 강력한 분견대를 남겨서 후방을 지키게 했다.이윽고 세르디카에 도착한 바실리오스 2세는 곧바로 숙영지를 선설한 뒤 20일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세르디카 공략은 생각만큼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았다. 불가리아인들은 도시 주변의 마초를 불태워서 적 기마들이 먹을 것을 쉽게 얻지 못하게 했으며, 세르디카 주변에 숨어있는 불가리아 유격대는 식량을 얻으려는 로마 장병들을 번번이 습격했다. 게다가 로마군이 세르디카 요새에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공성 장비를 세우고 경계를 게을리하는 바람에 적 수비대의 기습으로 공성 장비가 모조리 불태워지는 걸 막지 못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흘러가면서 바실리오스 2세가 초조함을 느끼던 중, 멜리시노스가 사무일이 이끄는 군대의 급습을 받고 필리포폴리스로 후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서방 전선 방면 로마군 사령관 스테파노스는 그것은 핑계일 뿐이고 멜리시노스가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는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그 말에 동요했고, 전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신속하게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동로마군은 지시에 따라 숙영지를 철거한 뒤 산길을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했다. 이때 사무일은 적의 행렬을 가만히 미행하다가, 적군이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멈췄을 때 전투 나팔을 불어댔다. 이에 장병들은 불가리아군이 인근 산길을 모조리 봉쇄했다고 여겨 두려움에 떨었고, 상당수의 장병들이 탈영했다. 다음날인 986년 8월 17일, 로마군은 대열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산길을 따라 계속 이동했다.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사무일은 그때까지 매복해 있던 병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불가리아 장병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적을 향해 돌진했고, 전의를 완전히 잃은 로마군은 삽시간에 무너졌다. 로마군 선봉대는 적군이 아직 차단하지 않은 비탈길로 간신히 빠져나갔고, 나머지 군대는 불가리아군에 포위되어 모조리 죽거나 사로잡혔다. 바실리오스 2세를 호위하던 정예 아르메니아 근위대만이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황제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했다. 또한 바실리오스 2세가 가지고 있던 황제의 휘장과 보물들은 사무일에게 넘겨졌다. 이리하여 전투는 불가리아군의 압승으로 종결되었다.
4. 영향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는 바실리오스 2세의 입지에 치명상을 입혔다. 아나톨리아의 군벌 바르다스 포카스는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무능하고 어린 황제 대신 자신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반란군은 한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며 바실리오스 2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또한 사무일은 동로마 제국이 바르다스 포카스의 반란에 휘말리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공세를 이어가 베로이아 등 여러 중요한 요새들을 공략했으며, 남쪽의 이피로스와 서쪽의 디라키움을 공략했다.이제 바실리오스 2세는 꼼짝없이 몰락하는 듯했으나, 그는 극한까지 몰린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우선 자신의 여동생 안나를 키예프 루스의 대공 블라디미르 1세와 혼인시키고, 그 대가로 루스군을 지원받은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반란군을 격파했다. 뒤이어 아나톨리아 반도로 넘어가 991년 아비도스 전투에서 바르다스 포카스를 무찌르고 반란을 진압했다. 그렇게 반란을 진압한 후, 바실리오스 2세는 자신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긴 사무일을 상대로 20여 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사무일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고 여세를 몰아 1018년 불가리아 제1제국을 멸망시켜 발칸 반도의 패권을 완벽하게 확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