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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전투 |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 ||
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칸타브리아 전쟁 영어: Cantabrian Wars 라틴어: Bellum Cantabricum | ||
시기 | 기원전 29년 ~ 기원전 19년 | |
장소 | 스페인 칸타브리아, 아스투리아스, 레온, 팔렌시아 | |
원인 | 로마군과 칸타브리아 부족의 무력 충돌 | |
교전 세력 | 로마 제국 | 칸타브리아족 아스투레스족 |
지휘관 |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푸블리우스 카라우시우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라미아† 가이우스 푸르니우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 코로코타 가우손† |
병력 | 7개 군단 | 7만 ~ 10만 명 |
피해 | 불명 | 칸타브리아인과 아스투레스인 다수 |
결과 | 로마 제국의 히스파니아 반도 완전 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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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9년 ~ 기원전 19년, 로마 제국에 복속하지 않은 최후의 히스파니아 세력인 칸타브리아족과 아스투레스족을 상대로 벌인 로마 제국의 대외 전쟁이다. 로마의 히스파니아 정복 과정에서 치른 마지막 전쟁이다.2. 배경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히스파니아 반도의 주도권을 확보한 이래, 로마 공화국은 200여 년간 히스파니아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히스파니아 부족민들은 이에 맞서 루시타니아 전쟁, 누만티아 전쟁 등을 벌이며 로마군에 막대한 손실을 강요했지만, 로마의 압도적인 물량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복속되었다. 기원전 82년 포풀라레스파인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옵티마테스파가 장악한 로마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세르토리우스 전쟁이 발발했을 때, 히스파니아 부족들은 이때를 틈타 로마에서 독립하고자 세르토리우스 편에 대거 가담했다. 그러나 기원전 72년 세르토리우스 전쟁이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 피우스가 이끄는 로마 정부군의 승리로 종식되자, 그들은 로마의 패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로마에 복종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는 부족들이 있었으니,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해안지대에 자리잡은 칸타브리아인과 아스투레스인이었다.로마의 기록에 따르면, 칸타브리아인과 아스투레스인은 기원전 4세기경 대서양 연안의 갈리아 남부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 켈트족과 현지 이베리아인의 혼혈 집단이라고 한다. 칸타브리아인은 등 12개 부족으로 나뉘었으며, 베사야 강 계곡의 아라킬룸[4]에서 부족 연합 회의를 종종 벌여 공동 정책을 수립, 집행했다. 칸타브리아인은 탁월한 승마술과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전사로 유명했고,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 카르타고군과 로마군의 용병으로 동시에 기용되는 등 용병업에 종사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들은 야만적이고 길들일 수 없는 산악인으로, 용맹하지만 도적질을 즐겨하는 족속이었다고 한다.
로마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히스파니아 반도의 종주권을 확보한 뒤, 칸타브리아인은 로마 장군들에게 기용되어 용병업에 종사하기도 했지만, 로마에 복종한 부족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로마군을 종종 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며 약탈을 자행하는 등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다. 세르토리우스 전쟁 초기엔 세르토리우스를 지원했지만, 그의 위세가 히스파니아 전역에 퍼지자 위협을 느끼고 폼페이우스를 지원했다. 기원전 56년 갈리아 전쟁을 치르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갈리아 남동부의 아키타니 부족들을 돕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으나 카이사르의 부관이자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격파되었다.
기원전 49년 일레르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에게 협력해 카이사르를 대적했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문다 전투 참패 후 카이사르군의 추격을 피해 히스파니아 반도 각지를 떠돌 때 숨겨주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후 로마 정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섹스투스를 지원하여 히스파니아 주둔 로마군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한편, 아스투레스인은
페시코스족, 티부로스족, 지구로스족
으로 나뉘었으며, 이베리아 북서쪽 해안과 산악지대를 칸타브리아인과 양분했다. 이들 역시 강인한 전사로 명성이 자자했고, 용병업에 종사했다. 다만 칸타브리아인과는 달리 로마를 상대로 무력 활동을 벌이지 않고, 근거지를 지키는 데 만족했다.로마인들은 자신들을 이토록 괴롭히는 칸타브리아인들을 방치한다면 히스파니아 속주를 안정시킬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또한 그들은 칸타브리아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산악 지대에 우수한 재질을 갖춘 철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으며, 금광과 은광 역시 많다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그 땅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한층 더 커졌다. 기원전 30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를 물리치고 로마 세계의 1인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9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한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에게 칸타브리아인들을 복종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10년간 이어진 칸타브리아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기원전 29년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총독이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을 받들어 전쟁을 개시한 이래 2년간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알 수 없다. 타우루스 총독이 아우구스투스를 칭한 옥타비아누스로부터 칸타브리아족, 아스투레스족, 바케오스족을 정복한 공적을 인정받아 임페라토르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칸타브리아인들은 이후에도 로마를 상대로 적대 행위를 지속했기 때문에, 타우루스는 소규모 접전에서 몇 차례 승리했지만 완전 제압에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급기야 기원전 27년 산악 지대로 진입한 로마군이 적의 기습을 받아 참패하고 군단기를 빼앗겼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우구스투스는 진노했다. 기원전 26년, 그는 히스파니아로 직접 가서 세기사마[5]에 군사기지를 세운 뒤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등 7개 군단과 비슷한 수의 보조 병력이 집결했으며, 로마 해군도 동원되어 해안가에서 적의 후방을 습격할 준비를 갖췄다.플로루스에 따르면, 기원전 26/25년 겨울에 가우손이 이끄는 아스투레스인들이 눈덮인 산에서 내려와 아스투라 강으로 진군한 뒤, 아스투라 강 인근의 타라코넨시스에서 겨울 숙영 중이던 3개 로마 군단을 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베나벤테 지역의 브리게키니족이 아우구스투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아우구스투스는 즉시 현지 로마군에 대응하라고 명령했다. 푸블리우스 카라우시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즉시 매복 중이던 아스투레스인들을 덮쳐 큰 타격을 입힌 뒤 란키아 요새로 몰아붙였다. 란키아가 곧 함락당하자, 살아남은 아스투레스인들은 메둘리오스 산으로 피신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제때에 적의 기습 계획을 밀고해 준 브리게키니족에게 보답하고자 아스투레스족의 영역이었던 브리간툼을 그들에게 줬다.
아우구스투스는 얼마 후 질병에 걸려 타라고나로 물러나야 했고,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총독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가 황제를 대신하여 군사 활동을 벌였다. 그는 푸블리우스 카라우시우스와 함께 칸타브리아인과 아스투레스인에 대한 원정을 이어나갔다. 로마군이 메둘리오스 산을 포위하여 15마일 길이의 해자와 도랑을 건설하자, 가우손은 이를 뚫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뚫지 못하고 기아와 추위로 인해 도저히 살아남을 가망이 없어지자, 병사들에게 독약을 마시거나 검으로 자살하라고 명령하고 자신도 함께 자살했다. 살아남은 아스투레스인들은 베투스에게 항복했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타 에메리타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주화가 주조되었다.
그러나 칸타브리아인들은 저항을 계속 이어갔다. 기원전 24년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총독으로 부임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라미아가 베투스의 뒤를 이어 칸타브리아 전쟁을 맡았다. 그 과정에서 타라코넨시스의 도시들이 로마군에 식량 지원을 약속해놓고 식량을 수령하러 온 로마 병사들을 습격해 살해하자, 아이밀리우스는 보복 차원에서 이 도시들을 초토화시키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러던 기원전 22년, 칸타브리아인들이 숨은 숲을 지나가던 중 매복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뒤이어 전쟁 지휘를 맡은 가이우스 푸르니우스는 로마 병사들이 험준한 산악지대에 숨어서 유격전을 전개하는 적에게 고전하자 역시 산악 지대에 살면서 산악전 경험이 풍부한 루시타니아인들을 대거 고용해 칸타브리아인과 맞붙도록 했다. 이 작전은 큰 성과를 거두었고, 칸타브리아인들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까지 싸웠고, 생포될 위기에 몰리면 독을 먹고 자살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미처 목숨을 끊지 못하고 생포된 칸타브리아인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그 와중에도 승리의 찬가를 계속 부르고 끔찍한 고통에도 신음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전사로서 죽는 것은 승리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원전 19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가 부임해 칸타브리아 일대로 파견되어 잔여 반란군을 평정하고 행정체계를 개편하면서, 칸타브리아 전쟁은 비로소 종식되었다. 70,000명에서 100,000명 가량이었던 칸타브리아인 중 살아남은 이는 수천 명밖에 안 되었는데, 전원 평원지대로 강제 이송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규모 반란이 기원전 16년까지 벌어지자, 로마군은 칸타브리아인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는 걸 막기 위해 제10 게미나 군단과 4군단 마케도니카를 현지에 60년 동안 주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