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페오스 전투 그리스어: Μάχη του Βαφέως 튀르키예어: Bafeus Muharebesi 영어: Battle of Bapheus | ||
시기 | 1302년 7월 27일 | |
장소 | 아나톨리아 이즈미트만 남쪽의 바페오스(오늘날 튀르키예 얄로바와 카라무셀 사이) | |
원인 | 오스만 베이국의 니코메디아 포위를 풀려는 동로마 제국의 시도.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 오스만 베이국 |
지휘관 | 요르요스 무잘론 | 오스만 1세 |
병력 | 2천 명 | 5천 명 |
피해 | 상당수. | 미미함. |
결과 | 오스만 베이국의 승리. | |
영향 | 오스만 베이국의 위상 증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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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02년 7월 27일, 오스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베이국 소속 튀르크군과 요스요스 무잘론이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아나톨리아 이즈미트만 남쪽의 바페오스에서 맞붙은 전투.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처음으로 격돌한 전투이다.
2. 상세
1281년경, 오스만 1세는 아나톨리아 반도 서북부 비티니아 지방의 쇠위트에서 영주이자 룸 술탄국의 봉신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에르투으룰의 뒤를 이어 영주에 올랐다. 그는 동로마 제국을 향한 지하드를 선포해 현지의 동로마군을 상대로 소규모 접전을 벌여 성과를 거뒀다. 이에 주목한 튀르크 전사들과 학자, 이슬람 성직자들이 그의 휘하에 들어오면서, 그는 차츰 세력을 키웠다. 이윽고 1299년, 오스만 1세는 룸 술탄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오스만 베이국의 건국을 선포했다.오스만 1세는 나라를 세운 직후부터 인근 영역 확보를 위한 전쟁에 착수했다. 에스키셰히르, 빌레지크, 이네골이 이 시기에 공략되었고, 여러 마을이 별다른 저항 없이 복종했다. 그는 여세를 이어가 1301년 니코메디아로 쳐들어가 주변 지역을 약탈했고, 뒤이어 부르사 일대도 약탈했다. 다만 공성 기술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에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두 도시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지 않고 느슨한 포위를 이어갔다.
요르요스 파키메리스에 따르면, 안드로니코스 2세는 니케아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메가스 헤타이라치(μέγας ἑταιρειάρχης: 특정 구역의 지휘관)인 요르요스 무잘론에게 이들을 격퇴하라고 명령했다. 무잘론은 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튀르크군에 접근했는데, 그 중 절반은 알란 용병대였고 나머지는 소수의 정규군과 지역 민병대였다고 한다. 오스만 1세는 이에 맞서 5,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주로 튀르크 경기병으로 구성되었지만 파플라고니아에서 고용된 보병들도 소수 있었다고 한다.
무잘론은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알란 용병들이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히 낮기 때문에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희박하다고 보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오스만 1세는 현지 그리스인으로부터 무잘론의 이같은 움직임을 사전에 경고받았고, 자기가 먼저 기습하기로 했다. 파키메리스에 따르면, 100여 명의 튀르크 경기병들이 적이 주둔하고 있던 코윤히사르 요새를 기습 공격했다가 패퇴하는 척했고, 동로마군은 이에 속아 바테오스 평원으로 추격했지만 알란 용병대는 추격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튀르크 본대가 나타나 적을 향해 돌진했고, 동로마군은 삽시간에 허물어져 사방으로 도주하다가 적의 추격으로 다수가 죽거나 사로잡혔다. 무잘론은 알란 용병대의 엄호를 받으며 니코메디아로 가까스로 도주할 수 있었다.
바페오스 전투에 대한 소문은 소아시아 전역에 삽시간에 퍼졌고, 지하드에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튀르크 전사들이 그의 편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삽시간에 세력을 불린 그는 비티니아 전역을 빠르게 석권했고, 니코메디아는 1337년 최종적으로 함락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의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